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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구약의기독론(12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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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론(121)]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7) 다윗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사무엘상 17:32~50)_2026-06-14(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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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4T20:52:30+09:00</published>
		<updated>2026-06-14T22:23:35+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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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2026-06-14(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기독론(121)]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7) 다윗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사무엘상 17:32~5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_6UQwyW5R3c 1. 들어가며 성도는 어둠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이 아니라 빛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천국은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이며,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밝게 빛나는 성이...</summary>
	<content type="html">&lt;p&gt;2026-06-14(일) 주일낮2부예배&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21)]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7) 다윗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lt;/strong&gt;&lt;/span&gt;(사무엘상 17:32~5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_6UQwyW5R3c&lt;/p&gt; &lt;div class=&quot;youtube-div dtmseditor-youtube-embed&quot;&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_6UQwyW5R3c?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div&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wrap&quot;&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성도는 어둠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이 아니라 빛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천국은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이며,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밝게 빛나는 성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부터 어둠을 사랑하는 삶을 버리고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8:1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그러나 빛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방해가 있다. 죄는 사람을 어둠에 붙잡아 두고, 악한 영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한 도덕적 반성이 아니다. 회개는 어둠의 영들이 붙잡고 있던 합법적 근거를 끊고, 성도가 빛의 세계로 이동하는 영적 실제다. 회개할 때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정결해지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의 감각이 살아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이번 설교는 이러한 영적 전쟁의 실제를 다윗의 생애를 통해 보여 준다. 다윗은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 속의 훌륭한 왕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왕직을 수행하도록 세우신 사람이며, 장차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표다. 그러므로 다윗을 살피는 일은 단순한 인물 연구가 아니라, 왕직을 준비하는 성도의 영적 훈련을 살피는 일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amp;ldquo;전쟁에 능한 자&amp;rdquo;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목동 시절에는 사자와 곰과 싸웠고, 청년 시절에는 골리앗과 싸웠으며,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과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았다. 왕이 된 뒤에는 이스보셋, 압살롬, 세바와 같은 내부 대적의 반란을 겪었고, 이어 블레셋, 아말렉, 에돔, 모압, 암몬, 소바, 아람 같은 외부 대적들과도 싸웠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증언한다(삼하8:6).&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하8: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을 정확히 알려면 사무엘상하와 역대상만 읽어서는 부족하다. 역사서는 다윗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여 주지만, 시편은 그때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사무엘하 22장은 시편 18편과 거의 같은 노래이며, 다윗이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받은 뒤 여호와를 찬양한 내용이다. 또한 역대상 16장에는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길 때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세워 여호와께 감사하게 한 찬양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시편 105편, 96편, 106편과 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다윗의 전쟁을 이해하려면 사건과 고백을 함께 보아야 한다. 사건만 보면 전쟁사가 되고, 고백까지 보면 영적 전쟁의 원리가 열린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이것이 통전적으로 성경을 읽는 방식이다. 성경의 한 부분만 떼어 보면 다윗은 용맹한 왕으로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시편과 역사서를 함께 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울고, 묻고, 회개하고, 찬양하고, 다시 일어선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성도가 영적 전쟁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능력의 방법만 배우면 위험하다. 말씀의 기준, 회개의 길, 하나님의 임재, 천국의 목적, 악한 영의 실체를 함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전쟁이 사람의 흥분이나 감정 싸움으로 흐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왕직 훈련이 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그렇다면 다윗은 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가? 그 비결은 사람의 배짱이나 전술에만 있지 않다. 다윗의 승리는 &amp;ldquo;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amp;rdquo;는 믿음,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께 묻는 순종,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은 훈련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윗이 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오늘 성도가 어떻게 영적 전쟁의 승리자로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2. 다윗의 전쟁은 왜 성도의 영적 전쟁을 보여 주는가?&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의 전쟁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전쟁을 세 범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첫째, 목동 시절의 전쟁이 있다. 그는 양떼를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과 싸웠다.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이미 목자의 마음으로 훈련받았음을 보여 준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일 뿐 아니라 백성을 해치는 원수와 싸우는 자다. 그러므로 목동 다윗의 전쟁은 훗날 왕 다윗의 전쟁을 미리 보여 주는 훈련장이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둘째, 이스라엘 내부의 대적과의 전쟁이 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고, 사울이 죽은 뒤에는 이스보셋이 사울 왕가를 다시 세우려 했다. 다윗이 왕이 된 뒤에도 압살롬이 반역했고, 이어 베냐민 사람 세바가 또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성도의 영적 전쟁에도 안의 대적이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 안에는 죄와 결합한 악한 영들이 역사할 수 있고, 공동체 안에도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혼란과 분열의 영이 일어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셋째, 외부 대적과의 전쟁이 있다. 다윗은 블레셋과 싸웠고, 아말렉과 싸웠으며,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아람과도 싸웠다. 이것은 성도에게 밖의 대적도 있음을 보여 준다. 귀신론적으로 말하면 사람 안에 들어와 죄와 질병과 저주를 일으키는 영들이 있고, 동시에 사람 밖에서 죄를 짓게 만들 기회를 기다리는 세대의 영과 가문의 영들도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안의 죄와 악한 영을 회개로 처리해야 하며, 밖에서 공격하는 영적 세력도 말씀과 기도로 대적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성경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엡6:12). 이 말은 사람을 대적의 본체로 보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고 죄를 짓게 만들며 가정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악한 영은 대적해야 할 대상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구분하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악한 영과 싸우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의 전쟁은 바로 이 영적 원리를 역사 속 사건으로 보여 준다. 다윗은 단지 자기 원수를 이긴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대적을 물리친 사람이다. 그러므로 오늘 성도도 다윗의 전쟁을 보며 자신이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단지 천국 입구에 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장차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자로 준비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배워야 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이 점에서 다윗은 성도의 거울이다. 다윗의 외로움, 다윗의 믿음, 다윗의 회개, 다윗의 훈련, 다윗의 전쟁은 모두 오늘 성도에게 영적 사실을 가르쳐 준다. 성도는 다윗처럼 처음부터 완전한 자가 아니다. 다윗도 넘어졌고, 바세바 사건과 우리아 사건이라는 큰 죄를 범했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뻔뻔하게 덮지 않았다. 그는 괴로워했고,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서 회개했다. 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자는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깨달을 때 회개함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3. 골리앗과의 싸움은 왜 모든 승리의 전형인가?&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이 치른 수많은 전쟁 가운데 성경이 가장 자세히 기록한 전쟁은 골리앗과의 싸움이다. 사무엘상 17장은 단지 어린 목동이 거인을 쓰러뜨린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장은 다윗이 앞으로 치를 모든 전쟁의 원리를 압축하여 보여 주는 대표 사건이다. 다윗이 어떻게 싸웠는지, 무엇을 의지했는지, 어떤 고백으로 나아갔는지를 보면 다윗의 모든 승리의 비결을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역사적으로 이 사건은 다윗이 약 열다섯 살 전후의 소년이었을 때 일어난 일로 이해된다. 당시 블레셋은 철기 문화를 가진 강한 민족이었고,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블레셋은 가드 사람 골리앗을 앞세웠다. 골리앗은 거인이며 어려서부터 전쟁에 익숙한 용사였다. 반면 다윗은 아직 전쟁터의 군인이 아니라 양을 치던 소년이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싸움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그러나 영적 전쟁에서 결정적인 것은 겉모습이 아니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왔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했지만, 다윗은 그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피아 식별이 일어난다. 다윗에게 이 싸움은 자기 명예를 세우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싸움이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이 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근거는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이전의 실제 경험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 새끼를 물어가면 따라가서 그것을 쳐서 구해냈고, 그것이 자신을 해하려 하면 수염을 잡고 쳐 죽였다고 말했다(삼상17:34-36).&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상17:34-36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이 고백은 다윗의 전쟁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이미 은밀한 목장에서 전쟁을 배웠다. 그곳에는 박수치는 사람이 없었고, 왕궁의 인정도 없었으며, 군대의 훈장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다윗을 훈련시키셨다. 작은 양 한 마리를 지키려는 목자의 마음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왕의 마음으로 자란 것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그러므로 골리앗 사건은 다윗의 모든 승리의 전형이다. 첫째, 그는 대적의 겉모습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 크게 보았다. 둘째, 그는 과거에 하나님이 도우신 경험을 현재의 싸움에 적용했다. 셋째, 그는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울의 갑옷을 벗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익숙하게 훈련시키신 물매를 사용했다. 넷째, 그는 전쟁의 결과를 여호와께 맡겼다. 이 네 가지 원리는 오늘 성도의 영적 전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4.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는 믿음은 무엇을 뜻하는가?&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의 승리를 여는 핵심 문장은 사무엘상 17장 47절이다. 그는 골리앗 앞에서 &amp;ldquo;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다&amp;rdquo;고 선포했다. 이어 &amp;ldquo;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amp;rdquo;이라고 말했다. 히브리어 본문의 흐름을 따라 말하면, &amp;ldquo;참으로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다&amp;rdquo;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amp;ldquo;전쟁&amp;rdquo;은 히브리어로 &amp;lsquo;밀하마&amp;rsquo;이며, 싸움과 전투를 뜻한다. 다윗은 이 밀하마의 최종 주권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여호와께 있다고 믿었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상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이 믿음은 무기를 부정하는 믿음이 아니다. 다윗은 물매를 사용했다. 그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나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물매가 자신을 구원한다고 믿지 않았다. 물매는 도구였고, 승리는 여호와께 속한 것이었다. 이것이 믿음의 균형이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를 성실히 준비하되, 그 도구 자체를 하나님처럼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오늘날 성도의 영적 전쟁도 동일하다. 회개, 말씀, 기도, 선포, 영적 무장, 은사와 분별은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성도는 예수 이름의 권세로 명령해야 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싸워야 하며, 말씀의 검을 붙들어야 한다. 하지만 최종 승리는 사람의 기술에 있지 않고 주님께 있다. 주님께서 이기게 하시면 이기고, 주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많은 방법을 알아도 이길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여기서 구원론의 실제가 열린다. 구원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그 승리를 믿는 자에게 적용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도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품고 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이름으로 싸우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골리앗을 작게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크게 보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골리앗은 실제로 컸고, 실제로 강했으며, 실제로 전쟁에 익숙한 용사였다. 그러나 여호와는 골리앗보다 크셨고, 여호와의 이름은 블레셋의 신들보다 강했다. 그래서 다윗은 싸울 수 있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이 믿음이 없으면 사람은 승산 있는 싸움만 고른다. 믿음이 없으면 대적의 크기를 보고 물러선다. 믿음이 없으면 귀신을 두려워하고, 영적 공격이 있을까 겁을 먹고, 회개와 축사의 길을 중간에 포기한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끝까지 간다. 악한 영들이 두려움을 주고, 몸을 아프게 하고, 환경을 흔들어도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는 사실을 붙든다. 다윗의 믿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성도에게 길을 열어 준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5.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했는가?&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의 승리 비결 가운데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이었다. 다윗은 부모와 형제에게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막내였고, 양을 치는 자리로 밀려나 있었으며,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왔을 때에도 처음부터 부름받은 아들들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시편 27편은 &amp;ldquo;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amp;rdquo;라고 고백한다(시27:10). 이 고백은 다윗의 깊은 내면을 보여 준다. 사람의 인정이 없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영접을 붙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외로움 속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외로움은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통로가 되었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시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고백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다윗은 &amp;ldquo;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amp;rdquo;라고 고백했다(시89:26). 이 고백은 단순한 신학 문장이 아니라 삶의 의지처였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시89:26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이 확신이 있었기에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편 23편은 목자의 시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시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다윗은 부족함이 없었고,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받을 수 있었다(시23:4-5).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자의식의 노래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시23:4-5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이 사자와 곰 앞에서 물러서지 않은 것도 이 확신 때문이었다. 사자는 사람보다 크고 강하다. 곰도 소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맹수다. 그러나 다윗은 양떼를 살려야 한다는 목자의 마음으로 달려갔다. 그가 무모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10:11).&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은 전쟁 후에도 이 사실을 잊지 않았다. 사무엘하 22장에서 그는 여호와를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라고 찬양했다(삼하22:2-3).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자기 실력을 자랑하는 노래가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건지셨다는 감사의 고백이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하22:2-3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손을 내미사 자신을 붙드셨다고 고백했다. 그는 대적들이 자신보다 강했음을 인정했다. 이것이 중요하다. 다윗은 자기 힘이 대적보다 강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적은 강했으나 여호와께서 의지할 자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했다(삼하22:17-20).&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하22:17-20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로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영적 전쟁에서도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악한 영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오랜 세월 사람과 가문 속에서 죄의 통로를 만들고, 두려움과 질병과 정죄와 중독과 분열을 일으켜 왔다. 그러나 성도는 그들을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다. 대적이 강하더라도 여호와께서 의지가 되시면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담대함은 대적을 모르는 무지가 아니라, 대적보다 크신 하나님을 아는 믿음에서 나왔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오늘 성도도 이 확신을 회복해야 한다.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은 죄를 품고 사는 자만심이 아니다. 회개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붙들며,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담대함이다. 죄를 붙들고 있으면서 &amp;ldquo;주님이 함께하신다&amp;rdquo;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다. 다윗도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떠날까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하려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 회개한 성도에게 임재의 담대함이 회복되고, 임재의 담대함이 회복될 때 대적 앞에서 두려움이 줄어든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6. 다윗은 왜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께 물었는가?&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의 승리는 믿음과 임재의 확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께 물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두 가지 방식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상황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배운다. 이를 헬라어 개념으로 말하면 로고스, 곧 기록되고 선포된 말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지금 올라가야 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 정면으로 가야 하는지, 뒤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런 특정 상황에서 주시는 적용의 말씀을 레마라고 설명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은 그일라를 구할 때 하나님께 물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치고 타작마당을 탈취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곧장 자기 판단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께 &amp;ldquo;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amp;rdquo;라고 물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을 때 그는 순종했다(삼상23: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상23: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시글락 사건에서도 다윗은 물었다.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불사르고 가족들을 사로잡아 갔을 때, 다윗과 백성은 울 기력이 없도록 울었다. 백성은 다윗을 돌로 치려 할 만큼 격분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고, 하나님께 추격할지 물었다. 하나님께서는 추격하라고 하셨고, 반드시 도로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삼상30:8).&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상30: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추격하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왕이 된 뒤에도 다윗은 블레셋과 싸울 때 하나님께 물었다. 한 번은 올라가라고 하셨고, 또 한 번은 정면으로 올라가지 말고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기습하라고 하셨다. 같은 블레셋과의 전쟁이라도 하나님의 지시는 달랐다(삼하5:19,23-24). 이것이 레마의 중요성이다. 어제의 방식이 오늘의 방식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성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여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하5:19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하5:23-24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반면 사울은 평소에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그는 위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았고, 끝내 신접한 자에게 묻는 죄를 범했다. 역대상은 사울이 죽은 이유를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신접한 자에게 묻고, 여호와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대상10:13-14). 이것은 다윗과 사울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대상10: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오늘 성도도 마찬가지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서 배워야 한다.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음행하지 말아야 하며,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하며, 천국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기록된 말씀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명과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성전 건축을 해야 하는지, 어떤 사역자를 세워야 하는지, 어떤 영적 전쟁을 지금 감당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대적해야 하는지는 기도 가운데 주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성급히 움직이지 않고, 응답을 받으면 순종으로 움직인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7. 숨은 훈련은 어떻게 공개적인 승리를 만들었는가?&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의 골리앗 승리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기적만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우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준비되지 않은 손을 쓰신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훈련된 손을 쓰셨다. 다윗은 목동의 자리에서 지팡이와 막대기와 물매를 익혔다. 양떼를 지키려면 가까이 다가온 맹수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막아야 했고, 멀리 있는 맹수는 물매로 맞혀야 했다. 그는 수없이 연습했을 것이다. 거리, 속도, 바람, 돌의 무게, 손목의 각도까지 몸으로 배웠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사람들은 공개적인 승리만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밀한 훈련을 보신다. 골리앗의 이마에 맞은 물매돌은 우연히 날아간 돌이 아니다. 목장의 외로운 시간 속에서 훈련된 손이 던진 돌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더 성실히 준비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시편 144편은 이 사실을 아름답게 고백한다. &amp;ldquo;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amp;rdquo;라고 말한다(시144:1). 여기서 손과 손가락은 실제 전투의 기술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만 훈련시키신 것이 아니라 손도 훈련시키셨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시144:1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사무엘하 22장도 같은 고백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셨고, 그의 팔이 놋 활을 당기게 하셨다고 말한다(삼하22:35). 이것은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믿음과 인간의 성실한 훈련이 서로 대립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하22:35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오늘 성도에게도 숨은 훈련이 필요하다.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담대하게 귀신을 대적할 수 없으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레마를 분별하기 어렵다. 한 번의 은혜 체험이 평생의 실력을 대신하지 않는다. 성도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순종하고, 작은 싸움에서 믿음을 사용해 보아야 한다. 작은 싸움에서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큰 싸움 앞에서 갑자기 담대해지기 어렵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큰 용과 싸우려 하면 두려움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안의 죄를 회개하고, 작은 악한 영의 공격을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고, 두려움과 의심과 정죄를 말씀으로 물리치는 훈련을 계속하면 믿음의 근육이 자란다. 다윗이 사자와 곰을 이긴 경험으로 골리앗 앞에 섰듯이, 성도도 작은 순종과 작은 승리를 통해 큰 싸움에 설 수 있는 내공을 얻게 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이때 가장 중요한 훈련은 회개다. 죄가 있으면 악한 영이 양심을 참소한다. 성도가 명령해도 마음속에서 &amp;ldquo;너도 죄를 지었지 않느냐&amp;rdquo;는 참소가 올라오면 담대함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회개는 전쟁 준비의 첫 단계다. 회개를 통해 예수의 피가 역사하고, 악한 영의 합법적 근거가 끊기며, 성도의 양심이 담대함을 회복한다. 회개 없는 영적 전쟁은 오래 버티기 어렵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8. 오늘 성도는 어떻게 영적 용사로 준비되어야 하는가?&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오늘 성도가 영적 용사로 준비되려면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도는 단지 예배당에 출석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장차 천국에서 기업과 상을 받을 상속자다. 더 나아가 이 땅에서 이기는 자로 준비되면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막연한 위로만 받는 시간이 아니라 왕직을 준비하는 훈련의 시간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둘째, 성도는 전쟁의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람은 원수가 아니다.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 죄를 짓게 하는 귀신들,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이 대적이다.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나 성도나 목회자를 사람 자체로 미워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을 분별하고, 그 영이 떠나도록 회개와 기도와 사랑으로 싸워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피아 식별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셋째, 성도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에베소서 6장은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이것은 추상적인 종교 언어가 아니다. 영적 세계에서 성도에게 필요한 실제 무장이다. 진리가 없으면 속임수에 당하고, 의가 없으면 참소에 무너지고, 믿음의 방패가 없으면 불화살을 맞고, 말씀의 검이 없으면 대적을 찌를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엡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넷째, 성도는 말씀과 영적 실제를 함께 알아야 한다. 말씀 없이 영적 체험만 좇으면 속기 쉽고, 영적 실제를 모른 채 문자만 붙들면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 다윗을 제대로 알려면 사무엘상하와 역대상만 볼 것이 아니라 시편도 함께 보아야 한다. 역사책은 사건을 보여 주고, 시편은 다윗의 속마음과 영적 고백을 보여 준다. 이처럼 성경은 통전적으로 읽어야 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경륜은 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한 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때가 차매 육신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으며,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으로 성도 안에 역사하시며, 마지막에는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신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섯째, 성도는 천국의 상과 기업을 바라보아야 한다. 영적 전쟁은 이 땅의 문제 해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악한 영을 내보내고, 죄를 이기고, 말씀에 순종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삶은 천국의 기업과 연결된다. 다윗이 원수들을 제압한 뒤에 솔로몬 시대의 평화가 왔듯이, 성도의 참된 평화도 영적 대적을 처리한 뒤에 깊어진다. 타협으로 얻은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오는 평화가 참된 샬롬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여섯째, 성도는 자신의 자리에서 훈련해야 한다. 모두가 같은 계급과 같은 사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장군으로, 어떤 이는 용사로, 어떤 이는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에게 맡겨진 싸움이 있다. 적어도 자기 영혼과 자기 가정은 지켜야 한다. 자기 안의 죄와 악한 영을 회개로 처리하고, 가족을 위해 대신 회개하며, 말씀과 기도로 가문에 흐르는 악한 흐름을 끊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일곱째, 성도는 마지막 하나님의 경륜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윗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국경 안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편 110편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주에게 말씀하시며 원수들이 발판이 되기까지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고 하신 장면을 보여 준다(시110:1). 예수께서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셨기 때문에, 이 본문은 메시아의 승리와 연결된다. 결국 다윗의 왕직과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과 최종 승리를 바라보게 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마지막 때에 주님은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신다. 그분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 이기셨고, 마지막에는 그 승리를 완전히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적 전쟁은 개인의 문제 해결로만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의 흐름 안에 있다. 오늘 가정에서 악한 영을 대적하고, 자기 속의 죄를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장차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할 자로 준비되는 과정이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마지막으로 성도는 끝까지 가야 한다. 회개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평안과 은혜가 임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영들이 드러날 때는 공격과 두려움과 아픔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때 중도에 멈추면 안 된다. 다윗이 사자와 곰을 이긴 뒤 골리앗 앞에 섰고, 골리앗을 이긴 뒤에도 사울의 추격과 내부 반란과 외부 전쟁을 계속 통과했듯이, 성도도 단계마다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적 용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회개와 말씀과 기도와 순종과 실제 싸움을 통해 만들어진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았다. 다윗의 승리는 우연한 영웅담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믿음을 가졌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붙들었으며,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께 물었고, 목동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훈련을 계속했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오늘 성도도 이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 영적 전쟁은 피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와 악한 영을 방치하면 어둠은 더 깊어지고, 회개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대적하면 빛의 세계가 열린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하고, 예수의 피를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편적인 뜻을 배워야 하고, 기도 가운데 지금 주시는 주님의 인도를 분별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또한 성도는 사람을 원수로 삼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살려야 할 대상이고, 악한 영은 대적해야 할 대상이다. 이 구분이 분명해질 때 가정과 교회와 사역의 싸움이 달라진다. 미움과 분열의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회개와 권세와 말씀으로 싸우게 된다. 이것이 다윗의 전쟁을 오늘의 영적 전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마지막 시대의 성도는 막연한 구원관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예수 믿은 이후가 본격적인 훈련의 시작임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서 받을 기업과 상은 이 땅에서의 믿음과 순종과 회개와 전쟁의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안의 어둠을 회개로 처리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며, 말씀과 기도로 실력을 길러야 한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음을 믿고 끝까지 승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inde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date&quot;&gt;2026년 06월 14일(일)&lt;/p&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구약 성경의&amp;nbsp;&lt;strong&gt;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lt;/strong&gt;을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의 승리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첫째로는 그가&amp;nbsp;&lt;strong&gt;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반석이자 요새로 신뢰&lt;/strong&gt;하며 평소 찬양과 기도로 주님의 임재 안에 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다윗은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amp;nbsp;&lt;strong&gt;하나님께 세밀하게 묻는 태도&lt;/strong&gt;를 견지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다윗이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과 같은 맹수들과 싸웠던 것처럼&amp;nbsp;&lt;strong&gt;주어진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 헌신&lt;/strong&gt;과 &lt;strong&gt;부단한 실력 연마&lt;/strong&gt;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설교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amp;nbsp;&lt;strong&gt;철저한 회개&lt;/strong&gt;를 통해 내면의 어둠을 몰아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실력을 쌓을 때, 삶에서 마주하는 거대한 골리앗과 같은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인포그래픽_다윗_전쟁_승리_이유_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16db9f66b339681504f3379985fde0d0.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fc90efcd15deabfa160324b0ba092c3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5f78f3b62b9a3c38b7ec81fdb4ab2b6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25f03c4c9e513144e31b25effb83a1c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e71777c91abcb82cf8d42ac2f4ef1e5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877dcd2a594e1e921735c759fe67c9f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259480566a953c0d46bb8ff27b8fc53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4e312fa56955a6bd85ac9054d52b8d2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b4342633d5a3222ad105895c2e60035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ec3e7bfddaa586ebe1e0e19627eeadb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c98a5f65f9a560d5efaa5c5f440edf5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d825999d680dbc256635f6e5a952d1a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a05a7cf7ce7233029f3392a2ff6248d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Spiritual_Warfare_Manual.pdf_13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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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다. 그는 맹수와 싸웠을 때도, 사울왕과 그의 세력에 맞섰을 때도, 블레셋&amp;middot;아말렉&amp;middot;에돔&amp;middot;모압&amp;middot;암몬&amp;middot;소바&amp;middot;아람 등 주변 열방과 싸웠을 때도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다. 이 놀라운 전쟁 불패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그 답은 골리앗과 싸우던 날 다윗의 입에서 터져 나온 선언, 곧 &amp;quot;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amp;quot;(삼상 17:47)이라는 한 문장에 담겨 있다. 이 시간에는 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근본 비결은 무엇이며, 그 비결이 오늘날 우리의 영적 전쟁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신자에게도 영적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 안팎에는 강한 귀신과 수천 년 된 악한 영들, 그리고 몸 안에 뿌리내린 뱀들이 있다. 처음 회개를 시작할 때는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부터 공격이 시작된다.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고, 사고가 나고, 주변 사람들이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끝까지 가야 한다. 이것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죄를 계속 짓게 되고, 천국에서 받을 기업이 줄어든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다윗의 생애가 바로 그 비결을 가르쳐 주는 교과서이다. 우리가 다윗의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는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이기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2. 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근본 비결은 무엇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치른 전쟁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amp;nbsp;&lt;strong&gt;첫째는 양떼를 칠 때 사자와 곰 같은 맹수와 싸운 것&lt;/strong&gt;이다. 이것은 소년 다윗이 들판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던 싸움이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싸우고 이겼다. &lt;strong&gt;둘째는 이스라엘 내부의 적들과 싸운 것&lt;/strong&gt;으로, 자신을 해하려 했던 사울왕과 사울 사후에 왕국을 복원하려 했던 이스보셋,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과 베냐민 지파 세바까지 내부 반란 세력과의 싸움이었다. &lt;strong&gt;셋째는 외부 열방과의 전쟁&lt;/strong&gt;으로, 블레셋&amp;middot;아말렉&amp;middot;에돔&amp;middot;모압&amp;middot;암몬&amp;middot;소바&amp;middot;아람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조공을 받게 만들었다. 이 모든 싸움에서 다윗은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경은 그 이유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기록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8:6 다윗이 또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쳤고 여호와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8:14 다윗이 에돔 온 땅에 수비대를 두되 에돔의 모든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니라 여호와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여호와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amp;quot; 이 표현의 반복은 우연이 아니다. 다윗의 전쟁 승리의 원천이 오직 하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윗이 이긴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신 것이다. 사무엘하 5장 10절도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5:10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 이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음이더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점점 강성해졌다. 이것이 불패의 근본 비결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도록 자기 삶을 유지한 것이 다윗의 탁월함이었다는 점&lt;/strong&gt;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싸움도 질 수 없다.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가 여부이지, 내가 얼마나 강한가 여부가 아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다윗은 온 생애를 통해 증명하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생애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가 수행한 전쟁 중에서 성경이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는 전쟁이 바로 골리앗과의 싸움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전쟁들은 대부분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lt;strong&gt;골리앗과의 싸움은 사무엘상 17장 전체&lt;/strong&gt;를 할애할 만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 싸움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lt;strong&gt;다윗의 모든 전쟁 승리의 원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전형적 사건&lt;/strong&gt;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면 다윗이 왜 어디서나 이겼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도록 삶을 유지했는가 하는 그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이 시간에 살펴볼 핵심 주제들이다. 골리앗과의 싸움이 담긴 사무엘상 17장은 다윗의 모든 전쟁에서 공통적으로 작동한 원리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이며, 앞으로 전개될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는 원리를 한 편의 이야기로 압축해 놓은 귀한 기록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전쟁 불패의 비결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무엘상 17장 47절이다. &amp;quot;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amp;quot;&lt;/strong&gt; 이것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amp;quot;참으로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니&amp;quot;라고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면 이기는 것이고, 여호와께서 지게 하시면 지는 것이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다윗은 어떤 전쟁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다윗의 불패 신화의 출발점이다. 그러면 이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그 믿음을 어떻게 유지했는지를 차례로 살펴보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3.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은 왜 그를 왕으로 세우셨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울왕과 다윗왕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사울은 백성들이 왕을 원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도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만드신 게 아니라 요구에 응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왕답게 살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반면 다윗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라고 특별히 선택하고 파송하신 사명자였다. 그가 왕답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그런데 실제는 다윗은 그러한 삶을 살아냈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lt;strong&gt;항상 전쟁에 이기었던 다윗이 다른 이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자신의 시선을 두었다는 것&lt;/strong&gt;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항상 추구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그에게 영분별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주셨다. 다윗이 쏟아낸 메시아 예언은 이사야보다도 더 방대하고 강력하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다윗도 약한 사람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약한 면이 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다.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저질렀고, 그 죄를 덮으려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드는 더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은 범죄 이후의 태도였다.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기까지 열 달 동안 다윗은 밥맛도 잃어버리고 잠도 이루지 못한 채 온통 괴로움의 밤을 보냈다. 죄를 짓고 뻔뻔스러운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자신이 먼저 괴로워해야 한다. 그런데 다윗은 뼈까지 흔들릴 만큼 바짝 말랐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죄를 시인하고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하셨다. 그래서 다윗은 용서를 받고 회복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51편은 그 진정한 회개의 기록이다. &amp;quot;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amp;quot;(시 51:1)라는 절규는 다윗이 자기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amp;quot;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amp;quot;(시 51:11)라는 간구는, 다윗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적이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 회개로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였고, 다시 왕으로서 싸우는 자로 일어설 수 있었다. 넘어진 자였지만 다시 일어섰고, 그의 생애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이며, 그 능함의 뿌리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과 진정한 회개의 삶에 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는 찬양과 시를 올려드렸다는 점이다. 그는 수금을 타며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를 지었다. 역대상 16장에는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던 날, 아삽과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부르게 한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 이 노래가 시편 105편과 96편과 106편의 일부와 일치한다. 이것은 시편에 표제가 없어 작자 미상으로 분류된 시편들이 사실 다윗이 지은 것임을 보여 준다. 다윗은 자신이 지은 노래를 아삽과 헤만과 에단 같은 찬양 대장들에게 맡겨 공연하게 하였다. 이렇게 그는 평생 하나님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은 또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최우선순위로 삼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지만, 다윗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민족에게 모욕당할 때 분노했고, 하나님의 군대가 조롱당할 때 홀로 나섰다. 이것이 골리앗 앞에 나서게 된 진짜 이유였다. 다윗이 한 말을 다시 들어보라. &amp;quot;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amp;quot;(삼상 17:36). 자기 목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였다.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나서는 자를 하나님은 반드시 지켜 주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고로 다윗을 제대로 알려면 사무엘상&amp;middot;하와 역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내면세계를 담은 시편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한다. 역사책이 다윗의 외면을 보여 준다면, 시편은 다윗의 속내를 보여 준다. 사무엘하 22장의 노래와 시편 18편이 동일한 내용이라는 것, 시편의 저주 시편들이 다윗이 얼마나 깊은 박해와 고난을 받았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메시아가 받을 저주와 고난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4. 골리앗과의 싸움은 어떤 상황에서 벌어졌으며, 다윗은 어떻게 담대히 나설 수 있었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사건은 &lt;strong&gt;BC 1025년경, 다윗의 나이가 15세 무렵&lt;/strong&gt;에 일어났다. 사울왕은 65세로 재위 중이었다. 지중해 연안의 이방 민족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다. 당시 블레셋은 철기 문화를 보유한 강력한 군사 세력이었다. 이스라엘은 청동기 문화에 머물러 있어서 농기구나 무기를 만들려면 블레셋 땅으로 가서 돈을 내고 날을 세워야 했을 정도였다. 군사적 기술의 격차가 현저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음을 잘 아는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노략질하였다. 사울이 왕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왔다. 왕을 세워 자신들에게 대항하려는 이스라엘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강력한 전략 무기인 골리앗을 앞세웠다. 그런데 당시에는 온 나라의 승패를 대표 전사 한 명의 싸움으로 결정짓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러니 사울왕 입장에서는 자기편 가운데 누군가 골리앗과 싸워 이겨야만 했는데, 그럴 자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때 블레셋 진영에서 앞에 나선 자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었다. 키가 대략 2m 50cm에 달하는 거인이었다. 성경은 그의 장비를 상세히 기록한다.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놋으로 된 갑옷의 무게는 놋 오천 세겔, 약 57kg이었다.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에는 놋 단창이 있었으며,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었다. 그야말로 철기 시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강의 전사였다. 이런 골리앗이 날마다 이스라엘 진영 앞에 나서서 싸울 자를 내보내라고 외쳤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가 두려워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전쟁에 능하다는 사울왕도, 용맹하기로 소문난 요나단도 끽소리 못 하고 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바로 그 자리에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이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왔다가 골리앗의 외침을 듣게 되었다. 다윗이 사울왕에게 나아가 말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상 17: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아무도 낙심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울왕은 만류했다. &amp;quot;너는 소년이고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다.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느냐?&amp;quot; 그러자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담대히 말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상 17:34-36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같이 되리이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이미 사자와 곰을 쳐죽인 경험이 있었다. 사자는 성인 남자보다도 훨씬 크고, 발톱 하나가 쓸리기만 해도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는 맹수다. 그 사자의 수염을 잡고 쳐죽인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도 그 짐승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본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이길 수 없는 싸움 앞에서 미리 포기하거나 도망가지만, 다윗은 골리앗의 큰 소리를 듣고도 오히려 나아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전쟁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다윗은 물매돌 하나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 쓰러뜨렸다. 칼이 없었지만 골리앗의 칼을 빼어 목을 잘랐다. 이 광경을 본 블레셋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쳤고,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을 자기 고을 경계까지 쫓아가 대승을 거두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상 17:50 다윗이 블레셋 사람보다 강하여 물매와 돌로 그를 쳐죽였고 자기 손에 칼이 없었더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믿음이 없으면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들지 않는다. 믿음이 없으면 미리 계산해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물러선다. 믿음이 없으면 적장의 위협만 보고 두려워하여 전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담대히 나서서 큰 소리를 쳤다. 그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다음 두 장에서 살펴볼 &amp;#39;전쟁은 여호와의 것&amp;#39;이라는 믿음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깊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과정에서, 그는 사울왕이 입혀 준 군복과 투구와 갑옷을 결국 벗어 버렸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사울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하신 방식으로 싸우겠다는 선언이었다. 너무 커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익숙한 방법으로 싸웠다. 시냇가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물매에 넣고 나아갔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내가 익숙한 도구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lt;strong&gt;하나님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무기와 갑옷이 있어도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물매 하나로도 거인을 이길 수 있다. 이 단순하면서도 깊은 진리가 다윗의 담대함을 가능하게 했다&lt;/strong&gt;. 하나님이 없으면 사울의 갑옷도, 블레셋의 철기 무기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소년의 물매 하나로도 거인을 이길 수 있다. 이것이 다윗이 평생 살아낸 진리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5. &amp;quot;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amp;quot;이라는 고백은 어떤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외친 말은 단순한 격려사가 아니었다. 다윗의 전쟁 신학 전체를 담은 핵심 선언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amp;quot;참으로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니&amp;quot;이다. 이 고백의 핵심은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 곧 인간의 군사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서 소유하신 것이며,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면 이기고 지게 하시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대적을 만나도 &amp;quot;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면 반드시 이긴다&amp;quot;는 믿음이 있으면 두렵지 않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고백은 공허한 구호가 아니었다. 다윗은 이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했다. 양떼를 지키며 사자와 곰을 이겼을 때, 그 힘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그는 분명히 알았다. 그 앎이 쌓이고 쌓여 골리앗 앞에서의 담대한 선언이 된 것이다. 양떼를 지키던 시절,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자와 곰을 대면했을 때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그 체험적 확신이 골리앗 앞에서의 담대한 고백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믿음은 경험 없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 싸움을 통해 검증된 살아 있는 신앙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믿음이 있으면 오늘날 영적 전쟁에서도 두려움이 사라진다. 수천 년 된 악한 영을 만날 때, 계급이 높은 귀신을 대면할 때도 &amp;quot;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니,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면 이기는 것이다&amp;quot;라는 믿음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귀신이 주는 무서움증, 오싹한 두려움도 &amp;quot;나를 두렵게 하는 모든 영과 십자가 세운다&amp;quot;는 명령 앞에 물러간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기게 하신다는 믿음이 마음 깊이 자리 잡으면 어떤 대적 앞에서도 담대해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 이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 군대 전체가 골리앗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그 실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실제적인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골리앗의 위협만 보고 자기 힘으로 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울왕이 그 반면교사다. 사울은 평소에 하나님께 묻지도, 찬양하지도 않다가 블레셋이 쳐들어와 위급해지자 하나님을 찾았지만 응답이 없었다. 역대상은 그 이유를 명확히 기록한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평소에 여호와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는 갑자기 쌓이지 않는다. 평소에 날마다 그 관계를 쌓아 두어야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 날마다 드리는 경배, 말씀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모두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쌓는 과정이다. 평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다가 위급할 때만 찾는 신앙에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 사울의 실패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다. 예배드릴 때만, 기도 제목이 생겼을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사울의 신앙이다.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날마다 그분을 높이며, 날마다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 다윗의 신앙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달랐다. &amp;quot;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다&amp;quot;라는 고백이 입술의 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원리로 작동하였다. 그것이 모든 전쟁에서 이기게 한 핵심 믿음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믿음은 또한 사무엘하 22장에서 다윗이 직접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실제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싸워 주신다는 확신이기도 하다. 17절부터 20절까지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22:17-20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강하였나이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높은 곳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amp;quot;&amp;mdash;하나님께서 직접 손을 내미셔서 다윗을 붙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경험한 전쟁의 실상이었다. 적들이 나보다 강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보다 더 강하시므로 결국 이길 수밖에 없다는 믿음, 이것이 &amp;quot;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다&amp;quot;라는 고백의 실체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극명하다. 믿음이 없으면 적의 강함만 보고 도망가지만, 믿음이 있으면 적의 강함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나아간다. 이스라엘 군대 전체가 골리앗의 위협 앞에서 두 달 가까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윗 혼자 골리앗의 목을 베었다. 군중과 영웅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믿음의 차이다. 누가 하나님을 더 실제적으로 신뢰하는가, 그것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20편 7절은 이 신앙을 이렇게 압축한다. &amp;quot;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amp;quot; 병거와 말, 곧 첨단 무기와 군사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가 이긴다. 다윗은 이것을 지식으로 안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냈다. 그 삶이 모든 전쟁에서의 불패로 이어졌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6. 다윗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한 믿음은 언제부터, 어떻게 형성되었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새의 아들 여덟 명 가운데 막내였던 그는 부정한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의혹 때문에 집안에서 홀대를 받았다.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 선지자가 왕에게 기름 부을 아들을 보러 왔을 때조차 다윗을 그냥 들판에 내버려 두었다. 형들은 그를 무시했고, 어머니는 그를 버린 것 같았다. 시편 27편 10절은 그 상처를 담담하게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부모에게 버림받은 소년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 외로움과 멸시 속에서 보낸 들판의 시간이 오히려 하나님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는 시간이 되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amp;quot;부모는 나를 버렸어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신다&amp;quot;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래서 그는 구약 시대에 매우 드문 일이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시편 89편 26절은 이 신뢰를 노래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시 89:26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어떤 상황도 두렵지 않다. 아버지께서 함께하신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시편 23편은 양치기 다윗이 온몸으로 살았던 체험적 신앙의 고백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시 23:4-5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사자와 곰이 출몰하는 위험한 들판&lt;/strong&gt;이었다. 홀로 그 들판을 헤치며 양떼를 돌봐야 했던 소년 다윗에게 이 고백은 관념이 아니었다.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달려드는 사자의 수염을 잡고 쳐죽이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양떼를 치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과 함께한 실제적 경험이 쌓이면서 단련된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니 나는 어떤 위험에서도 안전하다는 확신,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 믿음의 뿌리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모든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찬양의 노래로 고백했다. 사무엘하 22장이 그 노래다. 이 노래는 시편 18편과 사실상 같은 내용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22:2-3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날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반석, 요새, 방패, 구원의 뿔이라 노래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다윗의 찬양이 하늘에 올라갈 때마다 하나님은 그 찬양을 받으시며 그를 더욱 강하게 하셨다. 이렇게 형성된 믿음이 모든 전쟁에서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한 믿음은 그가 어릴 때 들판에서 혼자 양떼를 치던 시간 속에서 형성되었다. 아무도 돌봐 주는 이 없는 들판에서 홀로 맹수를 대면해야 했던 그 고독한 시간이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 다른 형제들이 집에서 교육을 받고 인정을 받을 때, 다윗은 들판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있었다. 그 시간이 그를 만들었다. 사람에게 외면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발견한 자는 이 세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그 믿음이 바로 다윗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자에게는 어떤 강한 대적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강한 대적을 만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그 의지 속에서 하나님이 더 강하게 역사하신다. 수천 년 된 귀신을 만났을 때도, 계급이 높은 악한 영을 대면했을 때도,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amp;quot;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amp;quot;(시 23:4)는 고백이 자신의 것이 된 자는 영적 전쟁에서 지지 않는다. 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다윗처럼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그분이 실제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무엘하 22장 4절도 이 신뢰를 잘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22:4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위험이 닥치기 전에 이미 &amp;quot;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amp;quot;라고 고백했다. 위기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늘 하나님을 찬양하며 신뢰 관계를 쌓아 두었기 때문에, 위기가 왔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그분을 나의 반석과 요새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오는 통로다. 찬양 속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그럴 때 영적 전쟁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재를 누릴 수 있다. 이 임재가 있을 때 어떤 강한 대적도 우리 앞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7.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했으며, 물어보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지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는, 모든 중요한 결정에 앞서 반드시 하나님께 먼저 여쭈어보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단순한 경건의 습관이 아니라, 전쟁의 승패를 직결하는 실질적인 행동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성경 전체를 통해 알 수 있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을 로고스(logos)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나에게 특수한 상황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다. 이것을 레마(rhema)라고 한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영적 분별이 흐려진다. 특수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기도하며 구체적으로 여쭈어보아야 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갖추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정확하게 행동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실천했는지 성경이 잘 보여 준다. 시글락이 아말렉에게 불태워졌을 때, 다윗은 모든 것을 잃고 군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위기까지 처했음에도 여호와께 여쭤 보았다. 위기 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다윗의 방식이었다. 추격하리이까, 따라잡으리이까 물었고 하나님은 추격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추격하여 모든 것을 되찾았다. 블레셋이 처음 쳐들어왔을 때도 먼저 물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5:19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블레셋이 또 쳐들어왔을 때는 같은 상대임에도 다른 전략을 명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5:23-24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에게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에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같은 블레셋이었지만 하나님은 상황마다 다른 방법을 지시하셨다. 이것이 레마의 세계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만 알고 자기 판단대로 행하는 것은 위험하다.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 여쭈어보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 사울왕은 평소에 여호와께 묻지 않다가 위급할 때만 찾았다. 응답이 없자 급기야 신접한 자에게까지 갔다. 역대상 10장은 그 결말을 분명히 기록한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평소에 여호와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주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물어보는 것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다. 생사를 결정하는 문제다. 다윗이 하나님께 여쭤볼 때 하나님은 언제나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 주셨다. &amp;quot;올라가라&amp;quot;, &amp;quot;올라가지 말고 뒤로 돌아가라&amp;quot;, &amp;quot;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소리가 들릴 때 공격하라&amp;quot;는 식으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시를 주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따라 행동할 때 승리가 보장된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특수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구체적으로 여쭈어보고, 들은 대로 순종하는 삶, 이것이 다윗의 불패를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핵심 비결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하나님께 물어보았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다윗은 자기 생각이 없어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충분한 경험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모든 전쟁과 중요한 결정 앞에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자기 지혜가 있어도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먼저 구하는 겸손이 그를 이기는 자로 만들었다.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이 겸손함이 그를 불패의 장수로 만든 것이다. 우리도 어떤 영적 전쟁에 임할 때, 먼저 하나님께 여쭈어보아야 한다. 이때 싸워도 되는가,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싸움이 있다. 그런 싸움에 자기 판단으로 뛰어들면 지고 만다.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서 싸울 때에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8. 오늘날 우리도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다윗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전쟁 비결은 오늘날 영적 전쟁에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앞에도 다윗이 만났던 골리앗 같은 강한 대적들이 있다. 수천 년 된 악한 영, 계급이 높은 귀신, 우리 안팎에 뿌리내린 뱀들이 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다윗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첫째,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삶의 원리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유지하는 것이 모든 전쟁의 출발점이다. 다윗이 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였기 때문이다. &amp;quot;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방패&amp;quot;라는 고백이 날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갔고, 하나님은 그 찬양을 받으시며 다윗을 더욱 강하게 하셨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외면하다가 위급할 때만 찾는 신앙에는 응답이 없다. 날마다 찬양하고, 날마다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도록 하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죄가 있으면 주님이 떠나신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으로 범죄한 후 가장 두려워한 것이 무엇인가? 적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시편 51편에서 그는 &amp;quot;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amp;quot;라고 절규하였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회개를 통해 내 안의 악한 영들을 내보내고, 양심의 참소가 없어야 영적 전쟁에서 담대함이 생긴다. 내 안에 악한 영이 있으면 그 영이 양심을 참소하여 힘을 빼앗고, 결국 전쟁에서 패하게 만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둘째,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을 길러야 한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첫 번째 물매돌을 정확히 명중시킨 것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기적이 일어난 것만이 아니었다. 양떼를 치던 시절부터 물매질의 기술을 수없이 연습했기 때문이다. 강도와 속도와 바람의 방향을 계산하며 물매돌을 던지는 연습을 오랫동안 반복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었다. 시편 144편 1절이 이를 확인한다. 이 시편의 표제는 헬라어 성경(70인역)에 &amp;quot;다윗의 시, 골리앗에 관하여&amp;quot;로 되어 있다. 즉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쓴 시라는 것이다. 이 시가 골리앗과의 싸움을 앞두고 쓰인 것이라면, 하나님이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는 고백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시 144:1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사무엘하 22장 35절도 같은 고백을 담는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열심히 훈련하고 익혀야 한다. 한 번의 성령의 역사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꾸준히 말씀을 연구하고 훈련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영적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허황된 일이다. 한 번 성령이 깨우쳐 줄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계속해서 이길 수 없다. 실력을 키워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실력에는 성경 지식만이 아니라 영적 싸움의 경험도 포함된다. 다윗이 사자를 이기고, 곰을 이기고, 그 경험 위에서 골리앗을 이겼듯이, 우리도 작은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경험이 쌓여야 더 큰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 처음에는 두렵고 무서웠던 싸움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하나님이 더 강한 은사와 능력을 더하여 주신다. 그 과정에서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보여 준 영적 전쟁의 방식이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회개하고 다시 싸우고, 그 반복 속에서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이야기는 단순히 &amp;quot;열심히 하면 된다&amp;quot;는 교훈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반드시 이긴다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친히 싸워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약할수록 하나님은 더 강하게 역사하신다. 다윗이 15세 소년이었을 때, 그 약한 존재를 통해 하나님이 이기셨다. 우리도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적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공개적인 승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 숨겨진 노력의 결정품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반복된 훈련,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말씀 연구와 기도, 그것이 쌓여 전쟁의 순간에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유지하는 거룩한 삶과, 피나는 말씀 훈련을 통해 쌓인 실력, 이 두 가지가 함께 갖추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amp;quot;어디로 가든지 이기게&amp;quot; 하시는 진정한 영적 용사로 세워 주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악한 영을 먼저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 악한 영이 있으면 그 영이 양심을 참소하여 담대함을 빼앗는다. &amp;quot;네가 무슨 자격으로 귀신과 싸우느냐&amp;quot;고 참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를 통해 내 안의 악한 영들을 내보내야만 외부의 악한 영들과 싸울 때 담대함이 생긴다. 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이기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결하게 유지했던 것은 이 원리와 같다. 내 안을 먼저 청결히 해야 밖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평소에 찬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 것도 영적 전쟁 준비의 일환이었다. 찬양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불러오는 행위이다. 시편 22편 3절은 &amp;quot;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amp;quot;라고 한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계신다. 다윗이 수금을 타며 하나님을 찬양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 찬양을 받으시며 임재하셨다. 그 임재 속에서 다윗은 점점 강해졌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임재를 불러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러 전쟁을 통해 실력이 쌓이다 보면, 나중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용사가 된다. 처음에는 두렵고 떨렸던 싸움이 점점 익숙해지고, 담대함이 자라나고, 하나님이 더 강한 은사와 능력을 더하여 주신다. 다윗이 사자와 곰을 이기고 골리앗을 이기고, 이후의 모든 열방을 이긴 것처럼, 우리도 작은 싸움에서 이기는 경험이 쌓일 때 더 큰 싸움에서도 이기는 자로 세워진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늘 찬양하고, 그분께 늘 여쭈어보고, 말씀으로 믿음을 키우며, 회개로 임재를 유지하는 삶이 바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9. 나오며&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근본 비결과, 그 비결이 오늘날 우리의 영적 전쟁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생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교과서다. 그는 단순한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수행하며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 준 예표였다. 그의 전쟁 비결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우리의 영적 전쟁도 반드시 승리로 이어질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도록 특별히 파송하신 사명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자신의 시선을 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 실수가 있었을 때는 열 달의 고통 끝에 진정한 회개로 다시 회복되었다. 그의 전쟁 비결의 핵심은 &amp;quot;참으로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니&amp;quot;라는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삼상 17:47). 이 믿음은 양떼를 치던 시절 사자와 곰을 물리친 체험 위에 쌓인 것이었다.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발견했고, &amp;quot;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amp;quot;(시 27:10)라는 신뢰 위에 서서, 어떤 강한 대적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전쟁에 앞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여, 들은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우리의 영적 전쟁도 다르지 않다. 회개로 주님의 임재를 유지하고, 날마다 찬양으로 그분을 높이며, 말씀으로 믿음을 키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이것이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가야 한다. 중도에 포기하려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이 삶이 쌓일 때 여호와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신다. 죄가 있으면 회개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또 읽어 말씀으로 믿음을 키워야 한다. 모든 중요한 결정 앞에서 하나님께 먼저 여쭈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어떤 어둠의 세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이기는 자로 서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땅에서의 영적 전쟁은 우리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 도망간다고 해서 천국에서 기업이 늘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싸워서 이기는 자에게 천국에서 받을 상이 있다. 다윗이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살았기에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의 예표가 될 수 있었듯이, 오늘 우리도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회개로 임재를 지키고,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말씀으로 믿음을 키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하고,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amp;quot;여호와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더라&amp;quot;는 말씀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며, 다윗처럼 모든 결정 앞에서 먼저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다윗처럼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을 쌓아 가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천국에서 받을 상과 기업은 이 땅에서의 영적 전쟁 승리와 직결되어 있다. 싸우지 않으면 얻을 것이 없다. 그리하여 어떤 어둠의 세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이기는 자로 서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14일(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다윗의_무패_비결_승리_원칙.pn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55cb21075b9b135a96672e9c5faa22d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032bec689c6af5d1003a53a4b2bc9d4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611f96e1dbcceb84b112b968667125b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38550ca957212c35db2cf1b285da92d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326af34ede7ec0a66aa43ac2e16f02d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22e66f01c5adfd72c334814ad2308c8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fbe44cf7704ee1c21254599ca33e4d4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afdc77eb5accdae6937cdf80122e3d1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13755fa5eaf9817a2c79bac0a231f62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60861389b7b2fe956f630cd3dedc863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f81386aee0d70ec2dddf78fc7bf9f6e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Victory_Formula.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5fb44ab0452c90fb398d3a88e3dc27dc.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Invincible_Architecture.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4506f1d8063126330ae0e3bab038908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Invincible_Architecture.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358b9e41be4bb1a38e21af532b25346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Invincible_Architecture.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bdbca943a1626f5cca8ec961e2abade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Invincible_Architecture.pdf_4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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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Invincible_Architecture.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b2b719e6c8501ff149f45c73c465f2c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Invincible_Architecture.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2ec4ff98750a0672ec5e15529f9878f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Invincible_Architecture.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c72170f50903446af534719dc24eb5c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1)] David_s_Invincible_Architecture.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079/256/d0c99ec47241dd63264016f1625fec5f.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margi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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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론(120)]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6)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3)(시24:7~10)_2026-06-12(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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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2T09:32:42+09:00</published>
		<updated>2026-06-12T15:31:55+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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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20)]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6)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3)(시24:7~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LH5-_yQy5EM 1. 들어가며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쟁에 능한 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에 능하다는 말은 성품이 거칠고 사람과 잘 다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전쟁이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20)]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6)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3)(시24:7~10)&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LH5-_yQy5EM &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LH5-_yQy5EM?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html, body { margin: 0; padding: 0; } 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Malgun Gothic&#039;, sans-serif; font-size: 11pt; line-height: ; color: #222; } .main-title { font-size: 12pt;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 0; padding: 0; } .subtitle { font-size: 12pt;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 0; padding: 0; } .paragraph { margin: 0; padding: 0; } .scripture { margin: 0; padding: 0;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div class=&quot;main-title&quot;&gt;&amp;nbsp;&lt;/div&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1. 들어가며&lt;/div&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쟁에 능한 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에 능하다는 말은 성품이 거칠고 사람과 잘 다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전쟁이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왕은 먼저 사랑할 대상과 대적할 대상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피아 식별이라고 부른다.&lt;/p&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번 메시지의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선 말씀에서 왕은 양떼를 지키는 목자의 심정으로 싸워야 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고, 자신이 영적 전쟁을 위하여 부름받았다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싸움은 한 단계 더 깊어진다. 싸움을 잘하려면 먼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대적을 잘못 정하면 사람을 미워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며, 가정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러나 대적을 정확히 알면 사람은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 되고,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막는 악한 영은 대적과 축출의 대상이 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을 &amp;ldquo;강하고 능한 여호와&amp;rdquo;, &amp;ldquo;전쟁에 능한 여호와&amp;rdquo;라고 부른다(시24:8). 여기서 &amp;ldquo;능한&amp;rdquo;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amp;lsquo;깁보르&amp;rsquo;와 관련된다. 깁보르는 &amp;#39;강한 자&amp;#39;, &amp;#39;용사&amp;#39;, &amp;#39;전쟁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자&amp;#39;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왕은 막연히 선한 마음만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고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할 수 있는 영적 힘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24: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동시에 이 말씀은 그리스도론의 중심을 열어 준다. 즉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창조주로, 구약의 여호와로,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로, 죽고 부활하신 구속주로, 다시 오실 영광의 왕으로 자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시편 24편의 전쟁에 능한 여호와는 마지막에 새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가시는 영광의 왕,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lt;strong&gt;성도는 그분의 구원을 받은 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왕 노릇 할 자로 준비되어야&lt;/strong&gt;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전쟁에 능한 왕이 왜 대적을 정확히 식별해야 하며, 그 대적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lt;/strong&gt; 한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2. 전쟁에 능한 왕은 왜 &amp;lsquo;기보르&amp;rsquo;의 사람이어야 하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왕을 이해하려면 먼저 &amp;lsquo;깁보르&amp;rsquo;라는 단어를 붙잡아야 한다. 히브리어 &amp;lsquo;기보르&amp;rsquo;는 단순히 힘이 조금 센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이 말은 강한 자, 용사, 싸움을 수행할 수 있는 자, 위기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시편 24편에서 여호와께 붙은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단지 위로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원수를 치시는 분임을 드러낸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사야 9장 6절에도 이 단어의 신학적 깊이가 나타난다. 장차 한 아기로 오실 메시아의 이름 가운데 하나가 &amp;ldquo;전능하신 하나님&amp;rdquo;인데, 여기서 &amp;ldquo;전능하신&amp;rdquo;이라는 표현도 &amp;lsquo;엘 깁보르&amp;rsquo;,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진다(사9:6). 다시 말해 메시아는 평강의 왕이실 뿐 아니라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평강은 전쟁을 피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적을 제압하시는 하나님의 승리 이후에 온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 사실은 성도의 정체성을 바꾼다. 성도는 귀신을 두려워하며 숨어 사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사탄과 악한 영들은 실재하며, 그들에게도 질서와 계급과 활동 영역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은 악한 영의 존재를 알고도 뒤로 물러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대적하는 자다. 전쟁에 능한 왕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 그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의지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위대함도 여기에 있다. 그는 왕이 되었어도 자기 출발점을 잊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장에서, 양을 따르던 자리에서 데려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했다(삼하7:8). 그러므로 다윗의 강함은 교만한 강함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은 자의 강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원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하나님께서 세우셨기에 싸울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안에 있었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삼하 7:8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영적 원리가 나온다. 전쟁에 능한 사람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원래의 자리를 알고,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셨음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은사가 주어져도 교만하지 않고, 무기가 주어져도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영적 권세가 주어져도 자기 이름을 높이지 않는다. 그는 모든 능력과 은사와 무기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고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라고 주어진 것임을 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amp;lsquo;깁보르&amp;rsquo;의 사람은 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악한 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사탄의 계략을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사탄을 하나님보다 크게 보지도 않는다. 그는 말씀을 붙들고 회개를 실천하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싸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3. 하나님은 왜 원수를 멸하기 위해 왕을 세우시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는 이유는 단지 백성을 통치하게 하려는 데에만 있지 않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인 동시에 백성 앞에 나가 싸움을 싸우는 자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을 때 그들이 원한 왕의 기능도 두 가지였다. 하나는 &amp;ldquo;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amp;rdquo;였고, 다른 하나는 &amp;ldquo;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amp;rdquo;이라는 요구였다(삼상8:19-20).&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삼상 8:20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39;왕직&amp;#39;과 &amp;#39;목자직&amp;#39;이 만난다. &amp;#39;목자&amp;#39;는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자이지만, 동시에 사자와 곰이 양을 물어 갈 때 싸워야 하는 자다. 양떼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자와 곰 앞에서 도망한다면 그는 참 목자가 아니다. 예수님도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다(요10:11). 그러므로 왕이 전쟁에 능해야 한다는 말은 백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이 원리를 몸으로 배운 사람이다. 그는 궁중에서 먼저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들판에서 양을 지키며 훈련받았다. 사자와 곰이 양을 물어 갈 때 그는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양을 건져 냈다. 그 경험이 골리앗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다윗은 골리앗을 단지 키 큰 군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대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오는 골리앗 앞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삼상17:45).&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삼상 17:45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왕은 원수를 멸하기 위하여 세워진다. 그러나 이때 원수는 자기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고,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력이다. &lt;strong&gt;왕은 사람을 자기 원수로 정하여 복수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수로 규정하신 대상을 정확히 알고 그 원수를 대적하는 자&lt;/strong&gt;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를 모르면 교회 안에서도 싸움의 방향이 틀어진다. 목회자는 성도를 원수로 여기고, 성도는 목회자를 원수로 여기며, 성도끼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러면 사탄은 뒤에서 웃고, 교회는 자기 안에서 무너진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은 그 길로 가지 않는다. &lt;strong&gt;목자는 양떼를 사랑하고, 양떼를 해치는 영적 세력을 대적한다. 사람은 살릴 대상이고, 악한 영은 쫓아낼 대상&lt;/strong&gt;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천국의 왕직도 이와 연결된다. 천국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은 단지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고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적 신분&lt;/strong&gt;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허송세월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뒤부터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의 실제가 시작된다. 이 땅에서 준비하지 않은 자가 하늘에서 갑자기 왕의 권세를 받을 수는 없다. 왕직은 은혜로 열린 길이지만,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자는 회개하고 순종하며 싸우는 자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4. 다윗은 어떻게 &amp;lsquo;나의 원수&amp;rsquo;에서 &amp;lsquo;주의 원수&amp;rsquo;를 보게 되었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대적 이해는 단계적으로 깊어졌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로, 처음에는 자신을 까닭 없이 미워하고 죽이려는 사람이 원수처럼 보였다&lt;/strong&gt;. 사울과 그를 따르는 자들, 십 사람들의 밀고, 이스보셋의 잔여 세력, 압살롬의 반역, 세바의 반란은 모두 다윗 안쪽(나라 안)에서 일어난 대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lt;strong&gt;둘째, 이스라엘 나라를 공격하는 주변의 나라들 블레셋, 아말렉, 에돔, 모압, 암몬 같은 주변 민족이 다윗에게 있어서 원수&lt;/strong&gt;였다. 이처럼 다윗에게 대적은 안에도 있었고 밖에도 있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69편은 다윗이 까닭 없이 미움을 받았던 고통을 보여 준다(시69:4). 그는 자기 머리털보다 많은 자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부당하게 자기 원수가 되었다고 탄식한다. 이 단계에서 대적은 &amp;ldquo;나를 미워하는 자&amp;rdquo;, &amp;ldquo;나의 원수&amp;rdquo;, &amp;ldquo;나의 대적&amp;rdquo;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실제 고난의 언어다. 다윗은 억울하게 쫓겼고, 죽음의 위협을 받았으며, 가까운 사람에게도 버림받는 아픔을 겪었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나이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다윗의 대적에 대한 인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점차 &amp;ldquo;나를 미워하는 자&amp;rdquo;를 넘어 &amp;ldquo;주를 미워하는 자&amp;rdquo;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편 68편은 &amp;ldquo;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한다&amp;rdquo;고 말한다(시68:1). 여기서 중심이 바뀐다. 문제는 단지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통치를 미워하는 세력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68: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139편도 같은 전환을 보여 준다. 다윗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는 자들과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말한다(시139:20-21). 이것은 인간적 원한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 분별의 언어다.&lt;strong&gt; 다윗은 자기 감정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원수로 인식을 옮겨 간다&lt;/strong&gt;. 다시 말해 그는 &amp;ldquo;저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amp;rdquo;는 차원에서 &amp;ldquo;저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막는 영이 역사한다&amp;rdquo;는 차원으로 깊어진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139:20-21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이 전환이 없으면 성도는 영적 전쟁을 하면서도 육신의 싸움을 한다.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에게 복수하고, 사람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전쟁이 아니다&lt;/strong&gt;. &lt;strong&gt;성경의 전쟁이란 사람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 악한 영을 향한 대적&lt;/strong&gt;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처음에는 사울을 자기 원수로 느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 그는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과 왕권의 판단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오늘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정 안에도 대적처럼 보이는 상황이 있고, 교회 안에도 대적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사람 자체를 원수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을 붙잡고 역사하는 죄와 악한 영을 보아야 한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나 부모, 목회자나 성도가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는 영적 세력이 대적의 대상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은 대적을 넓게 보았고, 깊게 보았다. 내부의 반역도 보았고 외부의 전쟁도 보았지만, 최종적으로는 주의 원수를 보았다&lt;/strong&gt;.&lt;strong&gt; 이것이 전쟁에 능한 왕의 분별&lt;/strong&gt;이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은 눈앞의 사람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는 배후의 영적 실상을 본다. 그러므로 그의 싸움은 혈기와 복수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회개와 권세의 싸움이 된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5. 예수님은 참된 대적의 정체를 어떻게 드러내셨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대적 이해는 시편 110편에서 절정&lt;/strong&gt;에 이른다. &amp;ldquo;여호와께서 내 주(아도나이)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amp;rdquo;는 말씀은 메시아의 승귀와 통치를 보여 준다(시110:1).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다윗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amp;ldquo;내 주&amp;rdquo;라고 불렀음을 밝히셨다(마 22:45). 그러므로 시편 110편의 &amp;ldquo;내 주&amp;rdquo;는 다윗 자신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예수님의 원수는 누구인가? 헤롯인가?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인가? 아니라면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인가인가? 빌라도인가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십자가 앞에서 &amp;ldquo;십자가에 못 박으라&amp;rdquo;고 외친 군중인가? 그런데 실제로 이들은 모두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최종 원수로 규정하지 않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amp;ldquo;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amp;rdquo;라고 기도하셨다(눅23:34). 사람은 무지와 죄와 악한 영에게 붙잡힌 구원의 대상이었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요 대적이요 원수요 악한 자는 누구였는가?&amp;nbsp;&lt;strong&gt;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참된 대적은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 곧 악한 자다&lt;/strong&gt;.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amp;ldquo;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amp;rdquo;라고 가르치셨는데, 원문적 의미로는 악한 자에게서 건져 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마6:13).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 뒤에 악한 자에게서의 구원이 이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실체가 악한 자임을 보여 준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사역도 이 사실을 증명한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으며, 귀신들을 쫓아내셨다(마 4:23, 9:35).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하게 하시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갖게 하셨다(막3:14-15). 이때 예수님에게 복음 전파와 귀신 축출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사람을 죄와 질병과 우상숭배와 거짓에 묶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막 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원수의 재정의가 완성된다. 예수님은 &amp;ldquo;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amp;rdquo;고 말씀하셨다(마5:44). 사람을 원수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마귀는 대적해야 한다. 사랑할 대상과 대적할 대상을 혼동하면 복음이 무너진다. 사람은 사랑해야 하고, 사람 속에서 역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악한 영은 미워하고 쫓아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lt;strong&gt;전쟁에 능한 왕의 중심 분별이다. 그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과 타협하지도 않는다.&lt;/strong&gt; 그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지만 죄와 귀신의 활동을 방치하지 않는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을 품지만 그 사람을 묶은 어둠의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한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전쟁 방식은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권세가 함께 나타나는 방식이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6. 성도는 왜 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해야 하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성도가 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6장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혈과 육은 사람이다. 성도의 싸움은 사람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싸움이다(엡6:12). 그러므로 성도가 사람을 원수로 삼는 순간, 그는 이미 싸움의 방향을 잃은 것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하지 못하면 가정이 무너진다. 배우자가 나를 힘들게 할 때 그 사람을 미워하면 싸움은 끝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고집의 영, 분노의 영, 음란의 영, 제사의 영, 무속의 영, 거짓의 영을 보면 마음이 달라진다. 사람은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이 되고, 악한 영은 대적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출발점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파를 만들면, 그것은 성도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이 교회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것이다. 목회자를 미워하고, 성도를 미워하고, 직분자를 미워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대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주적은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과 뱀들이다. 이 사실이 분명해질 때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가 되고, 악한 영을 대적하는 군대가 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또한 성도 안팎에는 싸워야 할 영적 실상이 있다. 죄를 통해 들어온 악한 영들이 사람 속에서 역사하고, 가문과 세대를 통해 역사해 온 어둠의 세력들이 사람 주변에서 틈을 노린다. 출애굽기 20장 5절은 우상숭배의 죄가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른다고 말한다(출20:5). 이것은 죄가 개인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고 영적 영향력을 남긴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마음의 후회가 아니라 악한 영의 합법적 근거를 제거하는 영적 행위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아버지의 죄악을 자녀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고로 회개 없이 귀신을 다루려 하면 위험하다. 죄의 근거가 남아 있으면 악한 영은 다시 들어올 틈을 찾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마12:43-45). 그러므로 회개와 축사는 분리될 수 없다. 회개가 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권세를 나타내며, 성령의 능력이 악한 영을 내쫓는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마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하는 일은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남편을 미워하지 않고 그 안의 악한 영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자녀를 정죄하지 않고 그를 묶은 어둠의 영을 끊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를 배척하지 않고 그를 흔드는 악한 영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목자의 심정이다. 목자는 양을 때려잡는 사람이 아니라, 양을 물고 있는 사자와 곰을 치는 사람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왕은 사람을 향하여는 긍휼을 품고, 악한 영을 향하여는 단호함을 가진다. 그는 사람의 약함을 이용하지 않고, 사람의 죄를 방치하지도 않는다. 그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고, 말씀으로 진리를 가르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한다. 이런 분별이 있을 때 성도는 혈과 육의 싸움에서 벗어나 영적 전쟁의 실제 안으로 들어간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7. 영적 전쟁에는 왜 말씀과 무기와 은사가 함께 필요한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영적 전쟁은 열심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 전쟁에는 무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말한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가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서기 위해 필요한 영적 장비다(엡6:13-17). 이 갑주가 약하면 악한 영의 공격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엡 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여기서 &amp;#39;믿음의 방패&amp;#39;는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는다. 악한 자는 의심과 정죄와 음란과 분노와 낙심의 불화살을 쏜다. 방패가 작으면 여기저기 맞는다. 말씀과 회개와 순종으로 믿음이 자라야 방패가 커진다. 그리고 &amp;#39;구원의 투구&amp;#39;는 생각을 지킨다. 그리고 &amp;#39;성령의 검&amp;#39;은 말씀으로 대적을 찌른다. 또한 &amp;#39;진리의 허리띠&amp;#39;가 없으면 체험이 있어도 중심을 잃고, &amp;#39;의의 호심경&amp;#39;이 없으면 죄책과 정죄에 가슴이 뚫린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7편도 하나님께서 전쟁의 무기를 준비하신다고 말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칼을 가시며 활을 당기시고 불화살을 예비하신다(시7:12-13).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영적 전쟁의 실제를 보여 주는 상징도 있다. &amp;#39;칼&amp;#39;과 &amp;#39;활&amp;#39;과 &amp;#39;불화살&amp;#39;은 악을 치시는 하나님의 도구다. 성도는 하나님의 무기를 자기 욕심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7:12-13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겨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그리고 영적 전쟁의 무기 가운데 시편 2편에 나오는 &amp;#39;철장(쇠지팡이)&amp;#39;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며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게 하신다(시2:8-9). 요한계시록에서도 이기는 자에게 철장 권세가 약속된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왕권이 단지 다스림의 권세가 아니라 대적을 깨뜨리는 권세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영적 무기는 성경 밖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 안에 이미 계시된 전쟁의 언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하지만 &lt;strong&gt;이런 무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영적 세계를 본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lt;/strong&gt;. 회개가 부족하고 말씀이 약하면 악한 영이 보여 주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과 영적 전쟁을 감당할 사람은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성경의 큰 흐름, 곧 한 분 하나님의 경륜과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교회 시대와 종말의 심판과 새 예루살렘의 완성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영적 체험을 성경의 빛 아래에서 분별할 수 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lt;strong&gt;더불어 영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도 필요하다&lt;/strong&gt;. 영 분별의 은사,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과 같은 &amp;#39;보는 은사(빛의 은사)&amp;#39;가 필요하며, 병 고침, 능력 행함, 믿음의 은사와 같은 &amp;#39;행함의 은사(불의 은사)&amp;#39;도 필요하다. 그리고 영의 &amp;#39;말의 은사&amp;#39;로서 방언, 방언 통역, 예언도 필요하다. 이러한 성령의 9가지 은사들은 성도가 영적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귀한 도구들이다(고전12:7-10). 그러나 은사는 회개와 말씀의 토대 위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회개하지 않은 입술로 예언하면 혼합이 생기고, 말씀 없는 능력 추구는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은사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섬김의 도구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고전 12:7-10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나니&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그렇지만 &lt;strong&gt;처음부터 큰 무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처음에는 다 믿음으로 싸운다.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고,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며, 악한 영을 대적한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 필요한 무기와 은사와 담대함을 주신다&lt;/strong&gt;. 목자의 심정으로 양떼를 살리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싸울 도구를 주신다. 자기 명예를 위해 능력을 구하는 사람과 양떼를 살리기 위해 엎드리는 사람은 다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영적 전쟁에는 &amp;#39;말씀&amp;#39;과 영적 &amp;#39;무기&amp;#39;와 &amp;#39;은사&amp;#39;가 함께 필요하다. &amp;#39;말씀&amp;#39;은 기준이고, 영적 &amp;#39;무기&amp;#39;는 전투의 도구이며, &amp;#39;은사&amp;#39;는 성령께서 주시는 실제적 도움이다. 이 셋이 회개와 순종 안에서 함께 움직일 때 성도는 악한 영을 효과적으로 대적할 수 있다. 전쟁에 능한 왕은 체험만 붙드는 사람이 아니며, 지식만 쌓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말씀으로 분별하고, 회개로 합법적 근거를 제거하며, 성령의 은사와 무기로 악한 영을 제압하는 사람이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8. 마지막 시대의 영적 장군은 어떻게 준비되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왕의 주제는 종말론과 연결된다. 시편 24편의 영광의 왕은 마지막 전쟁을 마치고 문들을 향하여 들어가시는 왕이다. &amp;ldquo;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amp;rdquo;라는 외침은 단지 과거 예루살렘 성문을 향한 노래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지막에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시는 장면을 바라보게 한다. 그분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시며, 백마를 타고 의로 심판하며 싸우시는 왕이시다(계19:11).&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 19장은 하늘의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분을 따른다고 말한다(계19:14).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와 하늘 군대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성도는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갑자기 영광의 행렬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말씀으로 무장하고, 악한 영을 대적하며, 가정과 교회를 지킨 자들이 그날의 영광에 합당하게 준비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계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110편도 종말의 전쟁을 말한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신다(시110:5-6). 이것은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세상 왕들과 그 배후의 악한 세력들이 심판받는 마지막 전쟁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그 전쟁을 위해 영적 장군과 용사들을 준비시키신다. 어떤 사람은 장군으로, 어떤 사람은 용사로, 어떤 사람은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부름받는다. 역할은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편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은 같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110:5-6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lt;strong&gt;그렇지만 마지막 시대의 영적 장군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lt;/strong&gt; 그는&lt;strong&gt; 먼저 회개로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lt;/strong&gt; 한다. 자신 안에 들어온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해야 하며,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우상숭배와 무속과 음란과 폭력과 거짓의 죄를 끊어야 한다. &lt;strong&gt;그 다음 말씀을 배워야&lt;/strong&gt; 한다. 성경의 조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타임라인을 알아야 한다. 창조, 타락, 구속 약속, 이스라엘의 왕국, 여호와의 성육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 교회 시대의 영적 전쟁, 마지막 심판과 새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알아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또한 영적 장군은 처음에는 가정에서부터 훈련된다. 큰 전쟁을 말하면서 자기 가정을 지키지 못하면 안 된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원수로 삼지 않고, 각 사람 속에 역사하는 악한 영을 분별하며, 회개와 중보와 대적 기도로 싸워야 한다. 한 가정이 살아나면 한 교회가 살아날 수 있고, 한 교회가 살아나면 한 지역이 깨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거대한 구호보다 실제로 악한 영과 싸워 사람을 살리는 자를 찾으신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그러므로 일선의 목회자도 새롭게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복음만 전하면 충분하고 귀신은 없다고 말하면 양떼는 불량품처럼 방치된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문이 열리지만, 성도는 회개와 순종과 영적 전쟁을 통해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위로만 할 것이 아니라, 대적이 누구인지 가르쳐야 하고, 회개를 가르쳐야 하며, 악한 영을 대적하는 실제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 목자의 책임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천국의 생명책 가운데 다윗의 생명책에는 사자의 깃발을 들고 있는 다윗이 삽화로 그려져 있다. 왜 그런가? 야곱은 자신의 넷째 아들 유다를 가리켜 사자의 새끼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지파에서 다윗이 나왔으며, 궁극적으로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님이 오셨다(창 49:9-10; 계 5:5). 사자는 왕권과 전쟁의 상징이다. 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전쟁에 능한 왕이었다. 예수님은 어린양이시지만 또한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다. 성도도 어린양의 피로 씻김받은 자로서, 사자의 왕권에 참여할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계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마지막 시대의 영적 장군은 사람을 선동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분별하게 하는 자라야 한다&lt;/strong&gt;. 그는 분노를 키우지 않고 대적을 정확히 보게 한다. 그는 사람끼리 싸우게 하지 않고 악한 영을 대적하게 한다. 그는 성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군사로 세운다. 이런 자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마지막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가정은 천국 백성을 길러 내며, 성도는 영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게 된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지금까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왜 전쟁에 능한 자이어야 하며, 그 전쟁의 핵심이 대적 식별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전쟁에 능한 왕은 &amp;lsquo;기보르&amp;rsquo;의 성격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께서 원수를 멸하게 하시려고 세우신 자다. 그러나 그 원수는 사람 자체가 아니다. 다윗은 처음에 &amp;lsquo;나의 원수&amp;rsquo;를 보았으나 점차 &amp;lsquo;주의 원수&amp;rsquo;를 보게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궁극적인 대적이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과 악한 자임이 분명히 드러났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해야 한다. 사람을 미워하면 혈과 육의 싸움에 빠지지만, 악한 영을 분별하면 회개와 사랑과 권세의 길이 열린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먼저 사람을 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 사람을 묶고 있는 죄와 귀신의 역사를 대적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회개를 계속해야 하고, 말씀을 배워야 하며,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또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자기 자랑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악한 영을 제압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시대의 왕직은 막연한 소망이 아니다. 이 땅에서 준비된 만큼 하늘에서 맡겨진다.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로서 마지막 승리를 이루신다. 그분과 함께 설 자들은 오늘 이 땅에서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양떼를 살리기 위해 대적을 가르쳐야 하고, 성도는 자기 가정부터 악한 영의 역사를 끊어 내는 영적 용사가 되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왕직을 허황된 꿈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날마다 회개해야 하며, 말씀의 기준을 세워야 하며, 사람을 미워하는 싸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하는 싸움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창조로부터 새 예루살렘까지 이루어 가시는 경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는 마지막 시대의 영적 군사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수를 정확히 대적하여 마지막 시대의 영적 용사로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2026년 06월 12일(금)&lt;/div&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본 설교는 시편 24편에 묘사된 &amp;lsquo;전쟁에 능한 여호와&amp;rsquo;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핵심 자질인&amp;nbsp;&lt;strong&gt;영적 분별력&lt;/strong&gt;과 그 사명을 조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진정한 승리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뒤에서 역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amp;nbsp;&lt;strong&gt;악한 영적 세력을 정확히 식별&lt;/strong&gt;하여 대적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개인적인 원수를 넘어 하나님의 원수를 보는 단계로 성장했듯, 성도 또한&amp;nbsp;&lt;strong&gt;철저한 회개와 말씀의 전신 갑주&lt;/strong&gt;, 그리고&amp;nbsp;&lt;strong&gt;성령의 은사&lt;/strong&gt;로 무장하여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amp;nbsp;&lt;strong&gt;목자의 심정&lt;/strong&gt;과 악을 멸하는&amp;nbsp;&lt;strong&gt;용사의 권세&lt;/strong&gt;를 동시에 갖추어, 영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amp;nbsp;&lt;strong&gt;영적 장군&lt;/strong&gt;으로 준비될 것을 촉구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전쟁에_능한_자_피아식별_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76ee8dc10c2d2647ddc9876552c2d504.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b63e8eb664621fa4fd8a6ae281b78b9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ab02c2b5a65a3b6d74ebe92cea9865d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24b9276c47c818029b7783240852c5b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24ab2387d120af5f2466d177e5dbb5c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6232374c3fbdc4823f59250748bb185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6c21a7d0db7411bc6fe440812fb80ba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855fed534c3cb0469d663f46980b442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6d60b1c74822d44445373645bbd5977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168cc41c02886e5c13c188a8dffdbd5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384f3d61a60ab0e8d064242df5be3f5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3325f45be82ee172c65b5126f8c8d84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ee9c7289275b200c09c60b28ea1b83f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6866783416398f78fa366004433d548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4072d295242119de5a2fff53b75d528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0f203145663fb1675fba11889fcf84e3.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2fa2d6c1e640cce4cbcb2313d3e8285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c24191fb40b409aff16787e2fd52a99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96005bcb2cf52f7ea07656fccf970fa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4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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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a81308d1622b50c2372d39bbd588251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f4885eccbb4cdec4832e7efe380f0a4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7733dcdfe7ac18abf64fdbe01522eec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19/256/05ceb6576f0e3511a695cc8a90631bcc.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1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5)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2)(시편24:7~10)_2026-06-11(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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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1T08:40:11+09:00</published>
		<updated>2026-06-12T10:04:42+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5)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2)(시편24:7~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XxZNSynCtQA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위험하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의 시작이며, 그 은혜 안으로 들어온 성도에게는 이제부터 회개와 순종과 영적 훈련의 길이 열린다. 믿음은 면허가 아니라 부르심이며,...</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11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5)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2)(시편24:7~10)&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XxZNSynCtQA&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XxZNSynCtQA?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 .sermon-title { color: #38688c; font-weight: bold; } .sermon-body { } .sermon-verse { color: #854ba0; font-weight: bold; } &lt;/style&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1. 들어가며&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위험하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의 시작이며, 그 은혜 안으로 들어온 성도에게는 이제부터 회개와 순종과 영적 훈련의 길이 열린다. 믿음은 면허가 아니라 부르심이며, 은혜는 방종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하는 거룩한 능력이기 때문이&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성도를 단지 천국 변두리에 머무르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열어 두셨고, 어린양과 함께 왕 노릇 할 자리를 예비하셨다. 그러나 그 자리는 막연&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한 상상만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말씀을 알고, 영적 세계의 실제를 분별하고, 악한 영들과 싸우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춘 자가 장차 그 자리를 감당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을 소개하면서 그분을 &amp;ldquo;강하고 능한 여호와&amp;rdquo;요 &amp;ldquo;전쟁에 능한 여호와&amp;rdquo;라고 선포한다(시24:7-8).&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amp;ldquo;전쟁에 능한&amp;rdquo;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전투 기술이 뛰어나다는 뜻만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amp;ldquo;능한 자&amp;rdquo;에 해당하는 말은 &amp;lsquo;깁보르&amp;rsquo;로서 강한 용사, 능력 있는 전사를 가리킨다. &amp;ldquo;전쟁&amp;rdquo;은 &amp;lsquo;밀하마&amp;rsquo;로서 실제 대적과 맞서는 싸움을 뜻한다. 그러므로 시편 24편의 영광의 왕은 죄와 사망과 귀신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에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때가 차매 아들로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그 예수님은 온유한 목자이시면서 동시에 전쟁에 능한 왕이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왜 전쟁에 능한 자이어야 하며, 성도가 어떻게 회개와 말씀과 영적 무장으로 천국의 왕직을 준비해야 하는지&lt;/strong&gt;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2. 예수 믿은 후에도 왜 계속 회개해야 하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회개가 계속되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속을 모르셔서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만 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양심과 뜻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이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amp;ldquo;나는 이미 믿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amp;rdquo;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회개는 단순히 후회하는 감정이 아니다. 히브리어 &amp;lsquo;슈브&amp;rsquo;는 돌아서다, 되돌아가다는 뜻을 지닌다. 헬라어 &amp;lsquo;메타노이아&amp;rsquo;는 생각과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성경적 회개는 죄를 아프게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며, 죄가 붙잡고 있던 권리를 끊어 내는 것이다. 영적 세&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계에서 죄는 악한 영들이 사람을 붙들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회개는 감정 정리가 아니라 영적 법적 근거를 해체하는 일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은 &lt;strong&gt;하나님이 매일 분노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칼과 활과 불화살을 예비하시는 분&lt;/strong&gt;이라고 고백한다(시7:11-13).&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7:11-13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이 없으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죄로 다루신다는 뜻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기다리시지만, 죄 자체와 타협하지는 않으신다. 십자가는 죄를 가볍게 보신 사건이 아니라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하나님이 아들로 오셔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은 죄가 결코 자동으로 덮이는 가벼운 문제가 아님을 증거한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의 두아디라 교회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환난과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신다(계2:21-23).&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21-23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본문은 &lt;strong&gt;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님이 다른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구약에서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다.&lt;/strong&gt; 한 분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나, 그분의 거룩함과 심판과 구원의 원리는 동일하다.&lt;/p&gt; &lt;p&gt;&amp;nbsp;&amp;nbsp;회개에는 개인의 죄만이 아니라 가계와 삶의 배경 속에서 반복되어 온 죄까지 포함된다. 무속을 찾고, 날을 받고, 점을 치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다른 영에게 물었던 일들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 세계에서 하나님 아닌 존재에게 문을 열어 준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amp;ldquo;나는 직접 하지 않았다&amp;rdquo;는 말로 끝내지 않고, 자기 삶에 흘러 들어온 우상숭배의 뿌리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 이것이 동탄명성교회가 강조해 온 회개의 실제이며, 귀신론과 구원론이 만나는 지점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믿은 후의 삶은 회개 없는 안심이 아니라 회개를 통한 정결의 길이어야 한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우상숭배와 무속의 죄, 자신의 입술과 생각과 행위로 지은 죄,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한 죄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와야 한다. 회개가 깊어질수록 성도는 죄의 무게를 알게 되고, 죄가 악한 영에게 내어 준 권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영적 전쟁은 감정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합법적으로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는 싸움이 된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3. 천국의 왕직은 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천국의 왕직은 모든 성도가 막연히 꿈꿀 수 있는 장식품이 아니다. 성경은 성도가 장차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섬기며 왕 노릇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왕 노릇은 이 땅의 게으른 신앙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lt;strong&gt;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의 문을 여시지만, 왕직과 상급과 기업은 이 땅에서 준비한 분량과 연결되어 &lt;/strong&gt;있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의 얼굴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이마에 두며 세세토록 왕 노릇한다고 말한다(계22:4-5).&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2:4-5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하나님의 종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하나님의 종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왕 노릇은 천국의 실제 질서와 관련된다. 성도는 모두 같은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천국에서의 위치와 영광과 맡겨진 일은 같지 않다. 이 땅에서 회개하지 않고, 말씀을 모른 채, 영적 전쟁의 실제를 외면한 사람이 장차 왕의 일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왕은 다스리는 자이며, 다스림은 분별과 권세와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천국의 왕직을 말할 때에는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하나는 &amp;ldquo;구원받았으니 아무 준비도 필요 없다&amp;rdquo;는 태도이다. 다른 하나는 &amp;ldquo;나는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amp;rdquo;라는 예언이나 기대만 붙들고 실제 준비를 하지 않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회개의 그릇이 준비되어야 하고, 말씀의 기준이 세워져야 하며, 영적 전쟁을 감당할 담대함이 길러져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사울은 왕으로 세움을 받았으나 불순종으로 버림받았다. 다윗은 큰 죄와 실패가 있었으나 통회하며 돌이켰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세워졌다. 여기에서 핵심은 완전한 과거가 아니라 회개하는 현재다. 하나님은 죄를 모르셔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다시 빚으신다. 왕직은 허황된 꿈으로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자에게 맡겨지는 자리다.&lt;/p&gt; &lt;p&gt;&amp;nbsp;&amp;nbsp;천국 왕직은 하나님의 경륜의 마지막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창조 때 사람에게 다스림의 목적을 주셨고, 타락 이후에는 구속의 길을 여셨으며, 이스라엘과 다윗 왕조를 통해 왕의 모형을 보이셨다.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지금 교회 시대에는 성도를 회개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준비시키신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시고, 준비된 성도는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준비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회개만 말하면서 말씀을 모르면 영적 현상을 분별할 수 없고, 말씀만 말하면서 회개가 없으면 그 말씀이 자기 의를 세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또한 귀신을 쫓는 능력만 사모하면서 성품과 순종이 빠지면 왕직이 아니라 위험한 권세욕으로 흐를 수 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왕은 은사만 강한 사람이 아니라 회개로 낮아지고, 말씀으로 정확해지고, 전쟁으로 검증된 사람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천국의 자리는 고정된 운명처럼 닫혀 있지 않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에게 도전의 문을 열어 두신다. 그러나 열린 문은 준비 없이 통과되는 문이 아니다. 왕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도전할 수 있고, 자기 부족이 무엇인지 알아야 준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도를 두렵게 하려는 말씀이 아니라, 성도를 깨어나게 하고 장차 받을 영광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말씀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왕직을 사모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열어 두신 부르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모함은 반드시 준비로 증명되어야&lt;/strong&gt; 한다. 회개 없는 꿈은 환상에 머물고, 말씀 없는 열심은 미혹으로 흐르며, 전쟁 없는 왕권은 실제가 되지 못한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4.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왜 전쟁에 능해야 하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중요한 특징은 &lt;strong&gt;전쟁에 능하다&lt;/strong&gt;는 점이다. 왕은 백성을 지키고, 원수를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기업을 보존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왕에게 전쟁은 부수적인 기능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의 전쟁은 혈과 육의 전쟁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감정싸움도 아니며, 세상 권력의 다툼&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도 아니다. 성도의 전쟁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lt;/p&gt; &lt;p&gt;&amp;nbsp; 사도 바울은 성도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엡6:12).&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엡&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귀신론의 출발점이 된다. 성도는 사람 뒤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귀신은 단지 심리적 상징이 아니다. 성경은 악의 영들이 있고, 그들이 사람의 생각과 욕망과 두려움과 우상숭배를 통하여 역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귀신을 과장하거나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영적 사실은 말씀의 기준 안에서 분별되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왕은 죄의 문제를 먼저 다룬다. 왜냐하면 죄가 남아 있는 곳에 악한 영은 근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악한 영을 억지로 떼어 내면, 그 사람은 죄의 무서움을 배우지 못하고 다시 더 깊은 속박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은 불쌍한 마음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회개와 말씀과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해야 하는 일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죄 사함의 권세를 드러내셨다. 그분은 긍휼의 목자이면서도 악한 영과 타협하지 않는 왕이셨다. 성도도 이 질서를 따라야 한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어야 하지만, 죄와 귀신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말해서는 안 된다. 참된 사랑은 죄의 근거를 끊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랑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자에게는&lt;strong&gt; 세 가지 자세가 필요&lt;/strong&gt;하다. &lt;strong&gt;첫째, 목자의 심정&lt;/strong&gt;이 필요하다. 양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마음이 없으면 영적 전쟁은 자랑거리로 변질된다. &lt;strong&gt;둘째,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믿음&lt;/strong&gt;이 필요하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설 때 자기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 것처럼,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서야 한다. &lt;strong&gt;셋째,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시대의 영적 전쟁을 감당하도록 보내셨다는 자의식&lt;/strong&gt;이 필요하다. 이 자의식이 없으면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고, 악한 영의 위협 앞에서 흔들린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lt;strong&gt;전쟁의 대상과 방법을 정확히 아는 것&lt;/strong&gt;이다. 성도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배우자, 자녀, 성도, 이웃을 대적으로 삼으면 이미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 안팎에서 역사하는 죄의 습관과 귀신의 속임수는 분별해야 한다. 혈과 육을 향한 분노는 전쟁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지만, 악한 영을 향한 대적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속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전쟁에 능한 자는 조급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때로 죄의 고통을 통해 사람을 회개의 자리로 이끄신다. 그 징계의 과정을 사람이 함부로 없애려 하면, 당장은 편안해 보여도 결국 죄의 무서움을 배우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 사역자는 긍휼과 분별을 함께 가져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의 질서를 넘어서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왕은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원수를 제압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영적 세계에서 평화는 타협으로 오지 않는다. 죄를 회개하고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며, 말씀으로 대적할 때 참된 평화가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전쟁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5. 영적 전쟁에서 전신 갑주는 무엇을 뜻하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영적 전쟁은 맨몸으로 감당할 수 없다. 성도는 자기 열심이나 감정만으로 귀신을 이길 수 없다. 바울이 말한 &lt;strong&gt;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성도의 전쟁 장비&lt;/strong&gt;이다. &lt;strong&gt;&amp;ldquo;전신 갑주&amp;rdquo;에 해당하는 헬라어 &amp;lsquo;파노플리아&amp;rsquo;는 완전한 무장, 곧 전투에 필요한 전체 장비&lt;/strong&gt;를 뜻한다. &lt;strong&gt;왕이 될 성도는 신분만 말해서는 안 되고 무장을 갖추어야&lt;/strong&gt; 한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바울은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말한다(엡6:13-17).&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엡&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러한 6가지 항목을 갖춘 전신 갑주는 추상적인 덕목만이 아니다. 첫째, 진리의 허리 띠는 허리를 붙들어 흔들리지 않게 한다. 둘째, 의의 호심경은 마음과 양심을 보호한다. 셋째, 평안의 복음의 신은 성도가 복음의 길 위에서 이동하게 한다. 넷째, 믿음의 방패는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는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는 생각을 지킨다. 여섯째,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없는 영적 전쟁은 칼 없는 전쟁이며, 믿음 없는 사역은 방패 없는 돌진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특히 불화살은 성도가 실제로 경험하는 공격과 연결된다. 의심, 음란, 혈기, 낙심, 교만, 두려움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마음에서만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악한 자의 불화살일 수 있다. 믿음의 방패가 약하면 그 불화살이 생각과 감정에 박힌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이 왜 갑자기 흔들리는지 알지 못한 채 죄의 충동에 끌려간다. 그러므로 성도는 생각의 전쟁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7편은 하나님께서 &amp;#39;칼&amp;#3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과 &amp;#39;활&amp;#39;과 &amp;#39;불화살&amp;#39;이 있음을 말씀해준다. 이는 다윗이 영적 세계의 무기들을 이미 말씀 안에서 실제로 보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시7:12-13).&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7:12-13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시편 2편은 메시아에게 &amp;#39;철장(쇠지팡이)&amp;#39; 권세가 있음을 말한다. 철장은 악한 세력과 반역하는 나라들을 깨뜨리는 왕권의 상징이다(시2:8-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lt;strong&gt;영적 무기는 성경 밖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확인되는 사실&lt;/strong&gt;이다. 다만 무기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회개와 말씀의 검증이 함께 있어야 한다. 회개가 없으면 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말씀이 없으면 귀신이 보여 준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의 두 날개는 회개와 말씀이다. 회개는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고, 말씀은 영적 현상을 판별하는 기준을 세운다.&lt;/p&gt; &lt;p&gt;&amp;nbsp; 그리고 &amp;#39;믿음의 방패&amp;#39;에 해당하는 헬라어 &amp;lsquo;튀레오스&amp;rsquo;는 큰 방패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작은 방패로는 온몸을 가릴 수 없듯이, 작은 믿음과 얕은 회개로는 악한 자의 불화살을 충분히 막기 어렵다. 방패는 하루아침에 커지지 않는다.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경험, 회개하고 다시 선 경험,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한 경험이 쌓일 때 믿음의 방패는 커진다.&lt;/p&gt; &lt;p&gt;&amp;nbsp; 또한 &amp;#39;성령의 검&amp;#39;에 해당하는 &amp;lsquo;마카이라&amp;rsquo;는 가까운 거리에서 쓰는 검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무기임을 보여 준다. 말씀을 많이 들은 것과 말씀의 검을 쓸 줄 아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죄의 유혹 앞에서 선포하며, 귀신의 거짓말을 말씀으로 끊어 낼 때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 된다.&lt;/p&gt; &lt;p&gt;&amp;nbsp; 그러므로 &lt;strong&gt;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전신 갑주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과도 연결된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그 일에 합당한 무장과 은사와 권세가 주어진다&lt;/strong&gt;. &lt;strong&gt;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싸우며 배우고 회개하며 정결케 될 때 방패가 커지고, 검이 예리해지고, 영적 분별력이 자란다. 왕이 될 자는 전쟁을 통해 훈련된다&lt;/strong&gt;. 훈련 없는 권세는 교만을 낳고, 회개 없는 능력은 미혹을 부른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6. 다윗은 어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 자세로 영적 전쟁의 본을 보였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lt;strong&gt;&amp;nbsp;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지만, 성경은 그를 전쟁에 능한 왕으로도 분명히 보여&lt;/strong&gt; 준다. 다윗의 수금과 시편은 아름답지만, 그의 생애를 떠받친 &lt;strong&gt;또 하나의 기둥은 &amp;#39;목자의 전쟁&amp;#39;이었다. 그는 사자와 곰이 양떼를 물어 갈 때 도망하지 않았다. 양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것이 왕의 첫 번째 자격&lt;/strong&gt;이다. 왕은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양을 살리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다(요10:11).&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요&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의 목자 정신은 예수님의 목자 정신을 미리 보여 준다. 참된 영적 지도자는 양을 이용하지 않는다. 양의 고통을 자신의 부담으로 알고, 양을 삼키려는 악한 영과 싸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자기 의협심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목자의 심정이 없으면 영적 전쟁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두 번째 자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amp;#39;믿음&amp;#39;&lt;/strong&gt;이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왔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삼상17:45).&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장면에서 다윗은 자기 힘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의 이름으로 서 있는지를 알았다. 영적 전쟁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성도는 자기 체험의 이름으로 싸우지 않고, 자기 은사의 이름으로 싸우지 않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싸운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이름, 곧 예수의 이름 안에 권세가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세 번째 자세는 자신이 하나님께 보냄 받은 전사라는 &amp;#39;자의식&amp;#39;&lt;/strong&gt;이다. 사울의 군대가 두려움 속에 머물 때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자를 그냥 둘 수 없다는 의식으로 섰다. 이 자의식이 있어야 전쟁을 피하지 않는다. 계급이 낮고 무장이 약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믿음이 있&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으면 성도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lt;/p&gt; &lt;p&gt;&amp;nbsp;&amp;nbsp;창세기 49장은 유다를 사자의 새끼로 묘사하고,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을 말한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서 나왔고,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다(창49:9-10).&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창&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49:9-10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 예&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부른다. 이는 다윗의 전쟁성과 왕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을 보여 준다(계5:5).&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에게도 실패는 있었다. 밧세바 사건과 인구조사 사건은 그의 생애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숨기는 길로 끝까지 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엎드렸다. 전쟁에 능한 왕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줄 아는 사람이다. 회개하지 않는 강함은 사울의 강함이지만, 통회하는 강함은 다윗의 강함이다.&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amp;nbsp;&amp;nbsp;다윗은 하나님께서 상한 심령을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고백한다(시51:17).&lt;/strong&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영적 전쟁의 사람은 승리의 간증만 가진 사람이 아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회개하고 다시 일어난 흔적도 가진 사람이다. 그 흔적이 목자의 긍휼을 만들고, 죄인을 대할 때 함부로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죄와 타협하지 않는 균형을 만든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다윗을 단지 찬양의 모델로만 보면 부족하다. 다윗은 찬양자이면서 전사였고, 목자이면서 왕이었다. 오늘날 영적 지도자도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져야 한다. 찬양과 예배가 있어야 하지만, 악한 영을 분별하고 대적하는 전쟁성이 없으면 양떼를 지킬 수 없다. 말씀을 알아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영적 실제를 성경의 기준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래야 다윗처럼 목자의 심정과 왕의 담대함을 함께 가진 자로 세워진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7. 전쟁에 능한 여호와는 어떻게 예수님을 가리키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24편의 &amp;ldquo;전쟁에 능한 여호와&amp;rdquo;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한다. 구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원수를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신약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신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 또는 예슈아와 연결되며, 그 뜻은 &amp;ldquo;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amp;rdquo;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호와의 구원이 인격으로 오신 분이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천사는 마리아에게 나실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전하며,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마1:21).&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마&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첫째로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죄의 용서가 없으면 귀신의 권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사망의 권세도 끊어지지 않는다. 십자가는 전쟁의 패배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린 승리의 자리였다. 부활은 그 승리의 공개 선포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린양이시면서 동시에 사자이시다.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속죄를 이루셨고, 유다 지파의 사자로 원수를 이기셨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24편은 문들이 머리를 들고 영광의 왕을 맞이하는 장면을 두 번 반복한다. 그 왕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며, 만군의 여호와다(시24:9-10).&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4:9-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종말론적 전망을 가진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원수를 심판하시고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신다. 새 예루살렘의 문들이 열리고, 전쟁에서 승리하신 왕이 들어가시는 그림은 단지 시적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을 바라보게 한다. 창세기의 왕권 약속, 다윗의 왕조, 예수님의 초림과 십자가, 교회 시대의 영적 전쟁, 재림과 심판, 새 예루살렘의 왕 노릇은 하나의 타임라인 안에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백마를 타신 분으로 묘사하며, 그분이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신다고 말한다(계19:11).&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계19:16).&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승리를 영적 권세의 패배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2:1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골&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십자가는 용서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승전지다. 예수님은 피 흘림으로 죄값을 담당하셨고,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으며, 승천 이후에도 교회에게 성령을 보내어 그 승리를 적용하게 하셨다. 지금 교회 시대는 성도가 그 승리를 실제 삶과 가정과 사역 현장에 적용하는 시간이다. 마지막 재림 때에는 이 승리가 온 우주 앞에 완전히 드러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을 단지 위로만 주시는 분으로 알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목자이시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와 악한 영의 권세를 심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하시고, 왕의 권세로 원수를 밟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십자가의 은혜만 누리는 것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전쟁에 참여하고, 그분의 승리를 따라가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되는 것이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8. 참된 평화와 기업은 왜 승리 뒤에 주어지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성경의 평화는 원수를 그대로 둔 채 얻는 안락이 아니다. 히브리어 &amp;lsquo;샬롬&amp;rsquo;은 단순한 전쟁 없음이 아니라 온전함, 질서, 충만, 회복을 뜻한다. 참된 샬롬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세워질 때 온다. 죄가 그대로 있고, 귀신의 권세가 그대로 있으며, 우상숭배와 타협이 남아 있는데도 평화를 말하는 것은 성경적 평화가 아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 누린 평화는 다윗의 전쟁 위에 세워졌다. 솔로몬은 다윗이 사방의 전쟁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고,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다고 고백한다. 그 후 하나님께서 사방의 태평을 주셨고, 원수도 재앙도 없게 하셨다(왕상5:3-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왕상&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5:3-4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솔로몬의 성전과 영화와 평화는 다윗이 원수들과 싸운 결과 위에 놓여 있었다. 전쟁에 능한 아버지가 원수를 제압했기 때문에 아들이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평화의 근원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그는 주변 나라들과 정략적으로 연결되었고, 이방 여인들의 우상숭배를 허용했다. 전쟁하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타협으로 흐를 수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귀신은 달래서 나가지 않는다. 죄의 근거가 남아 있는데 위로만 해 주면 더 깊은 속박이 생긴다. 악한 영은 타협의 언어를 좋아한다. 그러나 성도는 회개와 말씀과 예수의 이름으로 합법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회개로 문을 닫고, 말씀으로 분별하며, 믿음으로 대적할 때 악한 영의 권세는 무너진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기업도 승리 뒤에 주어진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게 이방 나라와 땅끝을 기업으로 주시며 철장으로 다스릴 권세를 말씀한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말한다(계2:26-27).&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amp;ldquo;이기는 자&amp;rdquo;라는 말이 핵심이다. 왕권은 싸우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장식이 아니다.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고, 죄와 세상과 귀신의 권세를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기업은 은혜와 무관하지 않지만, 책임과도 무관하지 않다. 은혜가 시작이고, 회개가 길이며, 전쟁이 훈련이고, 승리가 기업의 문을 연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천국의 기업을 땅끝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큰 기업을 원한다면 큰 전쟁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작은 충성에도 상을 주시지만, 큰 왕권을 맡길 자에게는 더 깊은 회개와 더 강한 무장과 더 넓은 목자의 마음을 요구하신다. 다윗이 양 몇 마리를 지키는 자리에서 사자와 곰과 싸웠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서도 설 수 있었고, 골리앗 앞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왕의 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 전쟁을 피하는 자는 큰 기업을 감당하기 어렵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가정과 교회에도 적용된다. 겉으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평화가 아니다. 죄가 눌려 있고, 우상숭배의 뿌리가 남아 있고, 미움과 음란과 탐욕의 영이 계속 역사한다면 그것은 잠시 조용한 상태일 뿐이다. 참된 평화는 죄가 회개되고, 악한 영의 통로가 닫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으로 세워질 때 온다. 그러므로 성도는 평화를 원할수록 먼저 영적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기업을 주신다고 하실 때, 그것은 욕심을 채우는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이 맡기실 통치의 범위와 책임을 말한다. 책임 없는 기업은 없다. 큰 기업에는 큰 섬김이 따르고, 큰 왕권에는 큰 전쟁이 따른다. 그래서 성도는 기업의 크기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을 감당할 그릇을 준비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참된 평화는 원수가 사라진 뒤에 온다. 참된 기업은 승리한 뒤에 주어진다. 참된 왕직은 준비된 자에게 맡겨진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믿은 이후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매일의 회개, 매일의 말씀, 매일의 영적 전쟁은 장차 영원한 왕직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학교다.&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9. 나오며&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왜 전쟁에 능한 자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예수님을 믿은 후의 삶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회개는 구원받은 성도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는 길이어야 한다. 천국의 왕직은 허황된 기대가 아니라 이 땅에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실제여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영적 전쟁은 혈과 육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을 향한 싸움이어야 한다. 이 싸움은 감정과 자존심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되고, 회개와 말씀과 예수의 이름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성도의 실제 무장이며, 진리와 의와 복음과 믿음과 구원과 말씀은 왕이 될 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장비여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은 목자의 심정으로 양을 위해 싸웠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 앞에 섰으며, 하나님께 보냄 받은 전사라는 자의식으로 살았다. 그 모습은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며 동시에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시고, 마지막 날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실 분이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는 회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말씀을 모른 채 영적 체험만 좇지 않아야 하며,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서지도 않아야 한다. 죄의 근거를 회개로 끊고, 말씀의 검으로 분별하며, 믿음의 방패로 불화살을 막고,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스림의 목적을 두셨고, 타락한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 친히 구원의 길을 여셨다. 구약의 왕들과 선지자들은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였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 그림자의 실체였다. 지금 성도는 성령 안에서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을 통과하며 마지막 새 예루살렘의 삶을 준비한다. 이 타임라인을 알 때 신앙은 현재의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왕직을 향한 준비가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마지막으로 성도는 자신이 장차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변두리에 머무르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말고, 어린양과 함께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 평화는 승리 뒤에 오고, 기업은 싸움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며, 왕직은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으로 빚어진 자에게 맡겨져야 한다. 그리하여 전쟁에 능한 영광의 왕 예수님과 함께 새 예루살렘의 왕직을 감당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26년 06월 11일(목)&lt;/p&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그리스도인이 구원 이후에 걸어가야 할 실천적 신앙의 여정을&amp;nbsp;&lt;strong&gt;회개와 말씀&lt;/strong&gt;, 그리고&amp;nbsp;&lt;strong&gt;영적 전쟁&lt;/strong&gt;이라는 세 가지 핵심 축으로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도를 장차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amp;nbsp;&lt;strong&gt;왕 같은 제사장&lt;/strong&gt;으로 정의하며, 이 직분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철저한&amp;nbsp;&lt;strong&gt;영적 훈련과 무장&lt;/strong&gt;을 통해 준비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시편 24편에 계시된&amp;nbsp;&lt;strong&gt;전쟁에 능한 여호와&lt;/strong&gt;를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신자가 악한 영들의 권세를 분별하고 대적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성도가&amp;nbsp;&lt;strong&gt;하나님의 전신 갑주&lt;/strong&gt;를 입고 죄의 근거를 해체함으로써, 진정한&amp;nbsp;&lt;strong&gt;평화와 기업&lt;/strong&gt;을 쟁취하는 승리자로 성장할 것을 독려하는 목회적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전쟁에_능한_여호와_왕직_준비_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9508440ecf5c95d70eacad6725e92435.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e3ed2540353086788c768b5ad3ac676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014278cc12d912f890b00d91fb77c91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e4ed74622e35d2f5ca1f6458659a664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cd1a833fe8492b58f5d4dbcdd43a611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e8fe209cd7ec1081cc0e63e3ac2b31a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f7ec9d5a9a0aef09ef23af4aad90128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d393f927baa6df5886943ff23f97be3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aeff04847323f25008358bf97c16b3f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689656536d5190c9641addead8c4870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5464b26f4d5c04b929a76fa364d23d5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9eab6450dc97413fa70ba29999a3dba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9ead66c70ad137fbceccadd72e69a0b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1a60843c565b253dc22876ba727f84d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65a89ae2a48d73b4b5217faec90507e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0bb5d1919ebe1112f39acb7535bb01a0.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또 다른 요약입니다.&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1. 들어가며&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탐구가 아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영원한 왕직을 수행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하나님은 그 왕의 자리를 특정인에게만 고정해 두지 않으셨다. 이 시간에도 그 자리는 열려 있으며, 그것을 향해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왕이 어떤 자인지를 아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필수적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로, 그 자리를 향해 도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lt;/strong&gt;이요, &lt;strong&gt;둘째로, 내가 현재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lt;/strong&gt;이다. 허황된 꿈만 꾸면서 실제 삶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흘러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평생 &amp;#39;나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amp;#39;라는 말만 하면서 정작 말씀도 모르고 회개도 없고 준비도 없다면, 그것은 허황된 꿈일 뿐이다. 하나님이 들어 쓰시려면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준비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이 쓰시려 해도 쓸 수가 없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이다가는 버림 패로 끝나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울왕이 그러했다. 하나님이 처음에는 쓰셨지만, 불순종과 교만으로 말미암아 결국 버림 패가 되고 말았다. 반면 다윗은 실수했어도 다시 돌이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마침내 하늘의 왕직을 담당하는 자가 되었다. 왕직을 수행할 사람이 위기의 단계에서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배워야 한다. 지금 내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알아야 거기서부터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특징인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의 의미를, 시편 24편의 말씀과 다윗의 삶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기독론 강의의 전체 흐름을 잠깐 정리해 보면, 우리는 지금 &amp;#39;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amp;#39;이라는 주제 아래 여섯 번째 특징인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를 살펴보고 있다. 이 강의 시리즈는 단순히 다윗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설교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들을수록 삶이 바뀌어야 한다.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시편 24편의 핵심 선포를 개관했다. 이번 시간에는 그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며, 아울러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신학적 이유와 천국의 무기고, 그리고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가 무엇을 선포하는지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이 강의를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여섯 번째 특징을 깊이 이해하고,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2.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가? 이것은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한 출발점이다.&amp;nbsp;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으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고, 그러니 구원받은 성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amp;quot;죽여도 천국, 살아도 천국&amp;quot;이라는 식의 값싼 신학이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사랑이 크시니까 다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구원은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은 후부터 진짜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시로 기록된 시편 7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준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날마다 분노하시는 분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이미 칼을 가시고 활을 당겨 놓고 계시며, 죽일 도구와 불화살을 예비해 두고 계신 분이시다 (시7:8-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7:8-13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겨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 하나님은 날마다 분노하신다. 그러면서도 오늘까지 기다리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가 지은 죄를 몰라서, 또는 내가 했던 것을 보지 못해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시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도 역시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불꽃 같아서 모든 것을 다 살피시고,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짓이기시려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계2:18).&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계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그분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폐부와 장부 곧 우리의&amp;nbsp; 마음의 깊은 곳의 생각까지 다 살피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빛난 주석 같은 발이란 짓이겨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당시 이세벨이라는 여자의 음행과 우상 숭배하는 장면을 불꽃 같은 눈으로 낱낱이 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각 심판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끝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침상에 던지실 것이고, 그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은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시며, 그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계2:21-2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21-23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밧세바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 다윗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게 될 것처럼, 하나님은 죄의 결과를 반드시 치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다윗이 만약 이 때의 사건 후에 시편을 썼다고 한다면, 그 아이를 보면서 &amp;quot;내가 죽었어야 되었는데, 네가 대신 죽었구나&amp;quot; 라고 하면서 통곡했을 것이다. 내 죄로 인해 아무 잘못이 없던 아이가 죽어 나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잘 몰라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기다리시는 것이다. 또한 지금 나는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 벌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참고 계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고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죄악 가운데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과거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운세를 묻고, 무당집을 찾아가서 날짜를 받아서 살았다. 그런 죄악의 역사 가운데 살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셨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려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더욱 부지런히 회개해야 한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고로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 심판을 쌓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받기 이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일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성도의 본분인 것이다. 나 한 사람의 죄뿐만 아니라 부모님,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아니 내 자녀들을 위해서도 회개해야 한다. 이 회개의 삶이야말로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린 채 우상을 섬기고,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집을 기웃거리며 살아온 죄악의 역사였다. 그런 죄들이 우리 몸 안에 다 기록되어 있다. 죄는 어딘가에 기록을 남기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몰라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신다. 이는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뜻을 알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고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부지런히 회개해야 한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회개란 영적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채로 귀신을 쫓으려 한다면, 공격은 오히려 우리를 공격한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영적 세계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는 일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다. 전신갑주를 입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힐 일은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영적 전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지금 저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다양한 신분을 가진 성도들이 살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서는 24장로들이 있고, 그들 앞에는 14만 4천 석의 보좌에 앉아서 예배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왕 노릇 하는 자들도 있고 주인 노릇 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 너머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서 예배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두리에 위치한 자들도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천국에서 이러한 신분은 다 이 땅에서의 삶으로만 결정되며, 한 번 정해지면 천국에서 영원히 지속이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국의 그 어떤 성도라도 이 땅에서 준비하지 않은 것을 하늘에서 상으로 받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성도들이 받을 기업은 이 땅에서 다 장만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구약 시대 사람들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들은 이 사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여섯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라는 사실이다. 다윗은 찬양을 잘했지만 그것이 왕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사람이라면 찬양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러나 진짜 왕의 조건은 전쟁에 능한 자인가 하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성경의 인물은 대체 누구인가? 그 사람은 바로 &amp;#39;다윗&amp;#39;이다. 다윗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최고로 전쟁에 능한 자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얼마나 전쟁에 능한 자였는지에 관하서, 그의 아들은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왕상5:3-4).&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5:3-4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셨으니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자기 시대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원수들을 모조리 물리쳐주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방의 원수의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을 그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 그가 엄청난 기업을 차지하게 된 이유이다.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을 보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원수들을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장차 예수님을 어떻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서 왕노릇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메시아 예언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성취하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몸 된 교회로서 그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원수들을 발등상이 되게 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 한 번 이겼다고 해서 전쟁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니다. 원수가 다시 온다면 또 다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사도 바울은 말했다. 우리 신약성도들에게 싸움 곧 전쟁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영적 지도자라면 어떠해야 하는가? 그럴려면 그는 다윗처럼 메시아에 관한 가장 강력한 예언을 쏟아낼 만큼 성령의 계시와 지혜와 은사들을 갖춘 자라야 할 것이다. 이 일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록된 말씀을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말씀으로 영적 실제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영적 세계를 보고 있다고 해서 그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철저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영이 보여 준 것을 하나님이 보여준 것으로 착각하여,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결국 전쟁에 능한 왕이 되려면, 2가지가도 필요한 것이다. 하나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영적 능력이다. 이 두 날개를 모두 갖추는 것이 전장에 능한 자가 되는 비결이 된다. 한쪽 날개가 없으면 아무리 엄청ㅊ난 새라도 날 수 없듯이, 말씀 없는 은사도, 은사 없는 말씀도 온전한 전투를 진행하기가 어렵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먼저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수많은 시편들에서처럼 메시아에 대한 놀라운 예언들을 쏟아내었다. 시편 22편, 시편 51편, 시편 110편, 시편 24편을 보라. 모두가 다 다윗이 쓴 시편들이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와 은사를 넘치도록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하는 자가 되려면 그는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 싸우되 말씀의 바탕 위에서 싸워야 하고, 말씀을 알되 그 말씀이 영적 실제와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전쟁에 능한 자가 누군지를 알려면 그는 여호수아의 예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전쟁에 능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호수아를 전쟁터레 보낸 자로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손을 들어 기도하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다. 그때 실제 전투는 여호수아가 감당했다. 고로 전쟁에 잔뼈가 굵은 여호수아였기에, 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땅 끝까지 이르는 기업을 차지하려면 그는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한다 (시 2:9).&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내가 만약 전쟁에 능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그는 어떻게 하게 되는 것일까? 대부분 타협하게 된다. 솔로몬이 바로 그러했다. 전쟁이 두려우니까 정략 결혼으로 이웃 나라들과 싸우는 것을 대신하고, 공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신전을 세워 주는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임을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오늘날에 들어와 성도가 영적 전쟁을 회피한다면 그는 어떻게 하려고 할까? 그는 대부분 세상과 타협하려고 할 것이다. 예배를 빠지면서 세상 즐거움을 택하고, 헌신을 게을리하면서 편안함을 추구하고, 말씀을 모르는 채 세상 가치관을 따라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신앙의 핵심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다는 것은 단순히 귀신을 쫓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전쟁에서 날마다 이기는 자가 전쟁에 능한 왕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악한 문화와 타협하게 되며, 결국 신앙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반면 전쟁에 능한 자는 타협하지 않는다. 원수와 협상하거나 달래 주는 것이 아니라, 씨가 마를 때까지 싸워 이기는 자이다. 이것이 천국에서 엄청난 기업을 차지하는 자의 특징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4. 영적 전쟁을 위한 전신갑주란 무엇이며 천국의 무기고는 어떤 모습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영적 전쟁 상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혈과 육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바로 통치들과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적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엡6:10-1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6:10-17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하나님께서 전사에게 입혀주시는 전신갑주&lt;/strong&gt;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총 6가지다. &lt;strong&gt;첫째로 &amp;#39;진리의 허리띠&amp;#39;&lt;/strong&gt;는 우리의 존재 전체를 진리로 묶어 두는 것을 가리킨다. &lt;strong&gt;둘째로, &amp;#39;의의 호심경&amp;#39;&lt;/strong&gt;은 가슴, 곧 마음과 감정을 하나님의 의로 보호하는 것을 가리킨다. &lt;strong&gt;셋째로, &amp;#39;평안의 복음의 신발&amp;#39;&lt;/strong&gt;은 발걸음마다 복음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lt;strong&gt;넷째로, &amp;#39;믿음의 방패&amp;#39;&lt;/strong&gt;는 날아오는 불화살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amp;nbsp;악한 영들은 우리에게 불화살을 쏘기 때문이다. 의심의 불화살, 음란한 생각의 불화살, 혈기와 분노의 불화살을 쏜다. 그러면 이 때에 방패가 없는 자려면 그는 적의 불화살에 맞아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방패로는 적의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없다. 만약 방패가 30cm밖에 안 된다면 그는 적이 쏜 불화살을 다 막지 못해 어딘가를 맞고 말 것이다. 키를 넘기는 큰 방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방패란 곧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이 크면 클수록 방패가 만들어지고, 그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할 수가 있는 것이다. &lt;strong&gt;다섯째로, &amp;#39;구원의 투구&amp;#39;&lt;/strong&gt;는 머리, 곧 생각을 보호한다. &lt;strong&gt;여섯째로, &amp;#39;성령의 검&amp;#39;&lt;/strong&gt;, 곧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주시는 레마의 말씀이 성경의 검이다. 그런데 이렇나 전신갑주 가운데 단 한 개 곧 성령의 검만이 공격용 무기가 된다. 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다 필요하지만 특히 공격용 무기인 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천국에 가면 영적 전쟁을 수행위한 무기들이 실제로 보관된 공간이 따로 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로마 장군의 투구처럼 전쟁마다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투구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고, 길이가 2~3미터에 달하는 칼도있으며, 키를 넘는 큰 네모난 방패도 있다. 또한 전통에 담아서 쏘는 불화살이 있어 멀리서도 그것을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미국에서 전화로 기도해도 불화살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불화살은 처음에는 그냥 화살로 주어지지만 영적 장군이 되면 어느날 그것은 불화살로 바뀐다. 그러면 상대방을 치는 도구만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태워 버릴 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천국에는 이것들 외에도 장수들에게만 주시는 철장(쇠지팡이)도 있다. 시편 2편에서 다윗은 이미 이러한 무기도 있다는 것을 노래했다 (시2:8-9).&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토기장이의 그릇 같이 부수리로다 하시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영적 전쟁을 수행할 때에 이러한 전신갑주와 무기들을 우리에게 나눠주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면 영의 눈을 열고 보면, 우리가 들고 있는 방패와 칼과 투구 등의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 땅에는 전신갑주를 제대로 갖춘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누가 과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 우리도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리에게는 최소한 나를 지키는 방패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격할 칼이 정말 커야 한다. 그리고 머리를 보호할 투구와 심장을 보호할 호심경이 튼튼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갖추고 있는 영적 무기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 그것은 어떻게 장만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내가 받은 영적 훈련과 충성된 삶의 결과로 하나씩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무기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무기는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장착시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장비하는 것은 얼마나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기 위해서 영적 전투를 치르고 있는가가 결정해준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충성도를 따라 영적인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럼 왜 우리는 전신갑주를 온전히 입어야 하는가? 그것은 악한 날에 능히 악한 자들을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다.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싸우다가 쓰러지기 위함이 아니라, 싸우고 난 후에도 서 있기 위함이다. 고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자, 그가 전신갑주를 제대로 갖춘 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공격을 받아도 쓰러지지 않고, 불화살을 맞아도 타지 않으며, 어떤 공격에도 믿음의 방패로 소멸하는 자. 바로 그러한 자가 전쟁에 능한 자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한편 전신갑주을 준비할 때에는 각 항목마다 단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허리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성령의 검으로 끝나야 하기 때문다. 방어로 시작해서 공격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진리로 자신을 묶고, 의의 호심경으로 가슴을 보호하고, 복음의 신발를 신어 땅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런 후에 믿음의 방패를 들고 공격을 막고, 구원의 투구로 자신의 생각을 지키며, 마침내 성령의 검으로 적을 찔러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있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5. 전쟁에 능한 자의 첫째 자세: 목자의 심정으로 목숨을 건다는 것은 무엇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다윗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첫째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lt;strong&gt;첫째로, 목자의 자세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lt;/strong&gt;이다. 다윗은 사자와 곰이 나타나 자신이 처던 양 떼를 물어 갈 때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짐승들과 싸워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부터 되찾아 왔다. 특히 그가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에게 양 떼를 살리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선한 목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요10:1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다윗이 어렸을 때부터 &amp;quot;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amp;quot;라고 노래했을 때, 이 노래는 단순한 종교적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여호와가 바로 다윗을 지켜주었고 사자와 곰의 공격으로부터 양떼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여호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amp;quot;나는 선한 목자라&amp;quot;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윗은 비록 도망자였지만 바로 그 자세로 이미 광야에서부터 훈련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15세 되던 무렵에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용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사자와 곰과 싸우면서 양 떼를 지켜 온 오랜 훈련 덕분이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lt;strong&gt;영적 지도자가 진정한 전사가 되려면 이 목자의 심정을 먼저 가져야&lt;/strong&gt; 한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가진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열망으로 영적 전쟁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영혼이라도 그를 살리겠다는 목자의 심정 없이는 진정한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이나 이익이 아닌, 맡겨진 양 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각오가 있는 자라야 전쟁의 자리에서 끝까지 설 수 있다. 목자적 사명감이 없으면 위험이 닥쳤을 때 자신을 먼저 보호하려 하고, 결국 양 떼를 버리는 삯꾼이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또한 신약의 성도들이 악한 영들과 싸워 그것들을 추방하려면 그는 언제나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야&lt;/strong&gt; 한다. 철저히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우리가 강제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 행위는 불법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해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징계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사실을 거역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비록 죄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그는 다시 죄를 짓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죄가 무서운 것인 줄 알아야 하는데, 고통만 없어지면 또다시 죄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목자의 심정은 그 영혼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유함을 얻도록 인도하는 것이지, 단순히 고통을 제거해 주는 것만은 아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만약 내가 합법적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않는 일을 반복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징계하고 계신 때에 내가 왜 그 징계를 없애려 하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먼저해야 한다. 그리고 합법적인 회개를 거친 후에 합법적으로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한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으로 싸우는 합법적인 자세이다. 불쌍한 마음에 무조건 귀신을 쫓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올바른 과정을 밟도록 인도해주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광야에서 양을 치던 시절을 상상해 보라.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에서,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다윗은 양 한 마리를 위해 그 무서운 사자와 싸웠다. 그러한 훈련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맡기신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충실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충실한 것이다. 그러므로&amp;nbsp;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위험이 자신에게 불어 닥쳤을 때 나타난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도망가 버린다 (요10:12-13). 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영적 전쟁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강한 귀신이 나타나고 공격이 거세질 때, 뒤로 물러서는 자는 삯꾼이다. 하지만 맡겨진 양 떼를 살리겠다는 목자의 심정이 있는 자는, 두려워도 자리를 지킨다. 그 심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첫째 자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는 기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을 살려내기 위한 중보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성전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의 무게감이 그를 전쟁에 능한 자로 만든 원동력 중 하나였다. 기도 없이는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기 때문이없다.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는 양 떼를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도가 바로 전쟁의 동력이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6. 전쟁에 능한 자의 둘째 자세: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전쟁에 능한 자의 둘째 자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한다&lt;/strong&gt;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보여 준 자세이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을 앞세웠지만, 다윗은 그것과 전혀 것을 가지고 나아갔기 때문이다 (삼상17:4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뛰어난 체력이나 뛰어난 무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골리앗이 얼마나 크고 강했는가? 그 사람 앞에서는 이스라엘 군사들이 다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골리앗의 크기를 보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권위를 붙들고 나아갔던 것이다. 그 이름 앞에서는 어떤 적도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골리앗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자세는 오늘날 영적 전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악한 영과 싸울 때 승리하려면,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계급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계급이 낮을 때도 싸을 수 있어야 한다.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도록 의탁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물론 자신의 계급보다 높은 악한 영과 싸우다 보면, 공격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훈련의 과정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필자도 사탄마귀로부터 두 번씩이나 크게 공격을 받은 후에라야 비로소 주님께서 영적인 무기들을 더해주셨다. 그렇지만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강제로 귀신을 쫓으려 하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면 오히려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뱀은 물어뜯고, 귀신들은 공격해 들어온다. 그것도 다구리로 함께 하여 어마어마하게 공격해 들어온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쌓여야 그다음부터 합법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훈련을 해야만이 비로소 내 계급도 올라가고, 쓸 수 있는 무기도 점차 늘어나는 것이다. 사실 정상적이라면 20년, 30년 악한 영들과 싸울 때에 나의 계급도 올라가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나의 계급이 껑충 올라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점차 나에게 더 강력한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이 이곳에 보내셨다는 확신 위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 이름의 영적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lt;strong&gt;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른 영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마음, 내 능력은 부족하지만 주님이 하시리라고 의탁하는 마음&lt;/strong&gt;, &lt;strong&gt;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 둘째 자세의 핵심&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세 가지 자세 중에서 둘째 자세인 &amp;#39;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amp;#39;는 것은 실제 전쟁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싸우는 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평소에 그 이름을 깊이 알아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 강하고 능한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실재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이름 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이 담겨 있음을 알고, 그 이름으로 나아갈 때 담대함이 생기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단순히 주문처럼 &amp;quot;예수의 이름으로!&amp;quot;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서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이 이 전쟁을 이미 이기셨다는 믿음이 이름 뒤에 받쳐 주어야 한다. 그 믿음이 없는 이름 선포는 공허한 말이 된다. 반대로, 그 믿음이 있는 이름 선포는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능력이 된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때, 그 뒤에는 사자와 곰을 물리친 훈련의 역사가 있었다. 우리도 그런 역사를 쌓아 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작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큰 전쟁을 위한 믿음을 만든다. 처음에는 두통을 위해 기도했는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그다음에는 더 큰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믿음의 역사가 쌓이면 골리앗 앞에서도 &amp;quot;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amp;quot;고 선포하면서 전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그 이름의 권위를 온전히 믿고 그 권위 위에 서는 것이다. 그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악한 영은 없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7. 전쟁에 능한 자의 셋째 자세: &amp;#39;보냄 받은 자&amp;#39;의 자의식은 어떻게 전쟁을 가능케 하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전쟁에 능한 자의 셋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자세는 &amp;#39;자의식&amp;#39;&lt;/strong&gt;이다. &amp;#39;&lt;strong&gt;나야말로 하나님께서 전쟁하도록 이 땅에 보내신 자&amp;#39;라는 자의식을 반드시 가져야&lt;/strong&gt; 한다. 시편 24편이 이것을 선포한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우도록 보냄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한다 (시24:7-8).&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시 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금 내가 쓸 수 있는 무기가 작더라도, 방패가 조그맣더라도, 칼 하나밖에 없더라도 상관없다. &amp;#39;나는 전쟁에 능한 자다, 나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amp;#39;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자의식 없이는 싸울 수 없다. 저가 계급이 높으면 나를 공격할 텐데,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믿음은 제5차원의 능력을 3차원의 현실로 끌어다 쓰는 통로이다. 처음에는 귀신을 능력으로 쫓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쫓는다. 아직 경험이 없고 능력이 미약해도, &amp;#39;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amp;#39;는 믿음으로 선포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고 &amp;quot;주님, 제 손에 불을 주세요, 다 타 버려&amp;quot; 하고 선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에 합당한 결과를 주시고, 그 결과가 쌓여 계급이 올라가고 능력이 더해진다. 아침까지라도 끝까지 싸우는 자세,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전쟁에 능한 자를 만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대로, 영적 실제를 처음부터 눈으로 다 보면 오히려 두려워서 싸우지 못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영안이 열려 귀신의 실체를 눈으로 보게 되면 겁이 나서 싸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영안을 활짝 열어 두시지 않는 이유가 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훈련이 먼저 되어야, 나중에 영안이 열려도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 방식이다. 겁이 없어야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안 보이니까 겁 없이 싸울 수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막9:23). 겨자씨 하나만 한 믿음이면 산을 들어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셨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 겨자씨만 한 믿음도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자의식 위에서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크게 쓰신다. &amp;#39;나는 하나님이 귀신을 쫓도록 보낸 자다, 나는 전쟁에 능한 자다&amp;#39;라는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훈련이 될수록 교만해지지 말아야 한다. 몇 번 성공했다고 &amp;#39;나는 이제 다 됐다&amp;#39;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이 들어와 전쟁에서 지게 된다. 끝까지 겸손하게, 끝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 셋째 자세의 핵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39;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전쟁에 능한 자다&amp;#39;라는 자의식은 교만과 구별된다. 교만은 &amp;#39;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amp;#39;는 생각이지만, 올바른 자의식은 &amp;#39;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하신다&amp;#39;는 생각이다. 내 계급이 낮아도, 내 무기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부족한 무기를 채워 주시고, 낮은 계급을 높여 주시며, 없던 능력을 더하여 주신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보냄 받은 자의 자의식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다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쟁하도록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 결과가 하늘에서의 기업이 된다. 이 사명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삶의 모든 순간을 다르게 산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amp;#39;오늘 나는 어떤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가?&amp;#39;를 생각하게 된다. 사명이 있는 자와 사명 없는 자의 삶은 전혀 다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영적 전쟁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처음에는 두렵고 어색하고 확신이 없다. 그러나 &amp;#39;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amp;#39;는 자의식 위에서 한 발을 내딛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 역사를 경험하고 나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담대해진다. 그 담대함이 쌓이면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히 알고 나서 시작하려는 자는 결코 시작할 수 없다. 믿음으로 한 발을 내딛는 자가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처음 보내실 때 &amp;quot;가라&amp;quot;고 하셨지, 다 배우고 가라고 하시지 않으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8.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와 &amp;#39;전쟁에 능한 여호와&amp;#39;는 무엇을 선포하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천국의 역사방에는 각 성도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역사방에는 홍해를 가르는 장면이 벽에 새겨져 있고, 바라보면 동영상처럼 움직이며 그때의 소리까지 들린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 그 길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가면서 나누는 대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린다. 다윗의 역사방에도 그의 일생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장면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때, 수금을 타며 찬양하는 장면보다 골리앗과 싸운 장면이 더 유력하다. 이유가 있다. 다윗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흰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할 때, 그 깃발에는 사자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찬양을 잘한 것이 핵심이었다면 그 깃발에는 수금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자가 새겨져 있다. 이 사자는 어디서 온 것인가?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넷째 아들 유다를 축복할 때 선포한 말씀이 그 근거이다 (창49:9-1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창 49:9-10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찍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유다는 사자 새끼이며 왕의 지팡이를 가진 지파이다. 그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다윗이 왔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오셨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 49장의 유다 지파 예언이 다윗에게서 성취되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전한 성취에 이른다. 유다는 사자 새끼이며, 다윗은 그 사자 새끼의 후손이고, 예수님은 그 계보에서 오신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다. 이 연결 고리가 다윗의 깃발에 사자가 새겨진 이유이며, 그 사자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 사자의 자질을 이어받도록 부름 받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이십사 장로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계5: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계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이 이기셨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 역사의 미래가 기록된 그 두루마리를 뗄 수 있는 분은 오직 유다 지파의 사자, 전쟁에 능한 어린양 예수님뿐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깃발에 사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창세기의 예언이 요한계시록에서 성취되고, 그 중심에 다윗이 있으며, 그 다윗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것을 이 모든 성경이 함께 증언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을 잘한 것도, 수금을 아름답게 탄 것도 아니다. 전사(戰士)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찬양은 하늘에서도 계속될 것이지만,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사실이 그의 생명책과 역사방에 핵심으로 기록되는 이유이다. 성가대 4천 명을 만들고 찬양을 조직하고 수금을 탄 것도 다윗의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사실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이 사실은 신약에서도 확인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amp;quot;이기는 자&amp;quot;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철장으로 깨뜨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기는 자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찬양만 잘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싸워 이기는 자에게 왕의 권세가 주어진다. 이것이 기독론 강의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핵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열두 진주 문을 통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실 때, 천사들이 이렇게 선포한다. &amp;quot;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amp;quot; 그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이며, 이는 &amp;#39;여호와&amp;#39;와 &amp;#39;야샤(구원하다)&amp;#39;가 합쳐진 이름이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신 예수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이 바로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들이다. 그 흰 말 위에서 사자가 새겨진 깃발을 펄럭이며 퍼레이드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성도들을 향해 예정해 두신 영광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영광의 광장, 유리바다로 된 영광의 광장에서 마지막 퍼레이드를 하는 자가 누구인가? 이 땅에서 전신갑주를 갖추고 영적 전쟁을 수행한 자들이다. 그 날을 위해 지금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고, 그런 사람을 만들고 계신다. 우리가 그 영적 전쟁의 기수가 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마겟돈 전쟁은 예수님이 홀로 싸우시는 전쟁이 아니다. 백마 탄 예수님과 함께 천군도 따라오고,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들도 함께한다. 그 싸움에서 이기고 새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것이 이 강의 전체가 향하고 있는 최종 목적지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목적지를 붙들고 있으면 포기할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루살렘의 히브리어 어원을 살펴보면 &amp;#39;예루&amp;#39;와 &amp;#39;살렘&amp;#39;, 곧 &amp;#39;평화의 터&amp;#39;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솔로몬의 이름도 &amp;#39;샬롬(평화)&amp;#39;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화의 성읍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전쟁 없는 평화는 없다. 다윗이 사방의 원수를 다 물리쳤기 때문에 솔로몬의 시대에 예루살렘에 진정한 평화가 임했다. 오늘날 영적 예루살렘,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들이 있어야 진정한 평화와 샬롬이 임한다. 그래서 전쟁에 능한 자가 왕이며, 그 왕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금 이 세상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귀신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알코올, 음란, 폭력, 우울, 분노, 각종 중독 속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영혼들을 건져낼 자가 누구인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의사가 몸의 병을 고치듯이, 전쟁에 능한 자는 귀신을 쫓아내어 영혼을 자유케 한다. 이 땅에서 그런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늘의 왕직 수행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들이요, 유다 지파의 사자의 영적 후손들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9. 나오며&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으로서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의 두 번째 시간을 가졌다.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으며 날마다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편 7편과 요한계시록 2장을 통해 살펴보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윗의 삶과 솔로몬의 증언과 여호수아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다. 또한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와 천국의 무기고, 그리고 전쟁에 능한 자의 세 가지 자세인 목자의 심정으로 목숨을 건다는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 &amp;#39;보냄 받은 자&amp;#39;의 자의식으로 싸운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의 의미와 창세기 49장, 요한계시록 5장, 시편 24편이 함께 선포하는 &amp;#39;전쟁에 능한 여호와&amp;#39;의 의미도 살펴보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더 이상 아무런 준비 없이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고 계시며,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에 합당한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날마다 부지런히 회개하는 것이 영적 전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임을 잊아서는 아니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영혼을 살리려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며, &amp;#39;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전사이다&amp;#39;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훈련하는 삶이 필요하다. 계급이 낮아도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합당한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 처음에는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으로 시작해도 된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고, 훈련이 쌓이면서 점점 전쟁에 능한 자로 빚어져 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원수가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을 그치지 않은 다윗처럼,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 솔로몬처럼 아버지가 닦아 놓은 평화 위에서 안주하다가 우상 숭배까지 이르는 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반드시 타협이 따라오고, 타협은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신 예수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자, 그 흰 말 위에서 사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퍼레이드하는 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준비시키고 계신 하늘의 왕직 수행자이다. 이 땅에서 전신갑주를 온전히 갖추고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알고,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전사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 강의를 이어 나갈 것이다. 오늘 이 강의를 통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훈련해 나갈 것인가를 스스로 점검해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6월 11일(목)&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626d467aadbf8c6a43dd2c31d3a5877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78018057002ce82577252356012485c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1ac3551f069e1692333745f9cc73c21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ae2909bf571b08ece8fafe9fdf83299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f89e991ed38a3cf7943272ed1dddc4d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9e8c5a668e39834dc0e10a84642a1c2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c7cb6a6aaffa6fe432a4649c8c2a4d1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2a44b47f47baec9a4437ea26a9d6690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c724fa4f934fe514d6354b0a894c1d7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87b5f2978d65821b65abe631eeee234d.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48/256/cdd6de911ee4b7718507cb43a9ca6509.webp&quot; /&gt;&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18)]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4)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1)(시24:7~10)_2026-06-10(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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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0T09:14:03+09:00</published>
		<updated>2026-06-10T22:08:46+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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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8)]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4)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1)(시24:7~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HftS79XS4J8 1. 들어가며 지금까지 우리는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였고, 메시아를 가장 많이 예언한 자였고, 회개할 줄 아는 자였다. 또한 그는 저주시까지 기록하였고, 심판의 ...</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18)]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4)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1)(시24:7~10)&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HftS79XS4J8 &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HftS79XS4J8?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font-size: 15px; line-height: 1.9; color: #333; } .sermon-title { color: #38688c; font-weight: bold; font-size: 16px; margin: 20px 0 8px; } .sermon-verse { color: #854ba0; font-weight: bold; } .sermon-body { } &lt;/style&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지금까지 우리는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였고, 메시아를 가장 많이 예언한 자였고, 회개할 줄 아는 자였다. 또한 그는 저주시까지 기록하였고, 심판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았으며, 죄 앞에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선 자였다. 그런데 이 모든 특징들이 결국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수렴된다. 그것은 그가 바로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라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왜 회개를 배워야 하는가?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지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과 죄가 가득한 상태로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왜 메시아를 알아야 하는가? 전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저주시를 배워야 하는가? 진짜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정확하게 저주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공부는 이 하나의 목표, 곧 &amp;#39;전쟁에 능한 왕&amp;#39;이 되기 위한 과정들이었다.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그 모든 공부가 결국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 이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이 시리즈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 19장에 가면 아마겟돈 전쟁이 등장한다. 그 전쟁에서 예수님은 &amp;#39;만왕의 왕, 만주의 주&amp;#39;라는 이름으로 백마를 타고 나오신다. 그때 그분을 따르는 하늘의 군대도 함께 등장하는데, 그 군대는 천사와 부활한 성도 두 부류로 이루어진다. 그 군대의 옷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천국에서 그리스도인의 최종 신분이 &amp;#39;예배자&amp;#39;로 끝나지 않고 &amp;#39;왕이자 전사&amp;#39;임을 의미한다. 이 땅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할 신분은 왕이라는 신분이다. 그런데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해야 할 자들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만들어 내야 할 사람은 전쟁에 능한 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지금 우리는 왜 다윗을 공부하고 있는가? 다윗이 범죄했다가 회개했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가 메시아를 예언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가 천국에서도 왕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인정하신 왕, 하나님이 인정하신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왕의 최종 특징이 전쟁에 능한 자라는 것이다. 이 모든 공부는 결국 전쟁에 능한 왕이 되기 위한 자격과 과정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다윗의 생애를 통해 그 정체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번 말씀은 기독론 강의의 큰 흐름 속에서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 시리즈의 첫 번째 시간이다. 앞으로 이 주제를 여러 시간에 걸쳐 다루게 될 것인데, 오늘은 그 기초를 세우는 시간이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왜 그리스도인의 최종 정체성은 &amp;#39;전쟁에 능한 왕&amp;#39;이어야 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 19장 14절부터 1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19:14-16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칼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여기서 &amp;#39;만왕의 왕, 만주의 주&amp;#39;라는 칭호는 단순히 예수님이 최고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천국의 신분 구조를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천국에는 네 종류의 신분이 있다. 변두리에서 구경하는 자가 있다. 서서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배하는 자가 있다. 앉아서 예배드리는 십사만 사천 명이 있다. 그리고 따로 보좌에 앉아 있는 이십사 장로가 있다. 또한 그 십사만 사천 명 안에서도 두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왕 노릇 하는 자요 또 하나는 주인 노릇 하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amp;#39;만왕의 왕&amp;#39;이라는 호칭이 있고, &amp;#39;만주의 주&amp;#39;라는 호칭이 있다. 주님은 십사만 사천 명의 주인이 되시고 또한 왕이 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amp;#39;하나님의 종&amp;#39;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목숨을 바치는 자이다. 다윗의 용사들이 베들레헴의 물을 먹고 싶다는 다윗의 말 한 마디에 적진을 뚫고 물을 가져왔던 것처럼,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 중에서 왕 노릇 하는 자와 주인 노릇 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의 신분 구조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이 땅에 그리스도인을 두셨는가? 단지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게는 원수가 있다. 만세 전에 세우신 경륜을 어그러뜨리려는 자, 하나님의 뜻을 망가뜨리려는 자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원수 때문에 천국 백성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고, 그 원수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진전이 방해받고 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려 추수하려 하시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원수를 대적하는 자가 필요하다. 그 원수를 이기는 자가 필요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받은 성도의 최종 목표는 전쟁에 능한 왕이 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가나안 땅 정복의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 정복에 사용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기는 하였지만 전쟁에 능한 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혈기를 좀 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광야의 삶으로 마감하게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정복할 자는 전쟁에 능한 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우셨다. &amp;#39;여호수아&amp;#39;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amp;#39;예호수아&amp;#39;이며, 이것은 &amp;#39;호세아&amp;#39;와 어근이 같고 헬라어로는 &amp;#39;예수&amp;#39;와 동일한 이름이다. 자음 구조가 같고 모음 발음만 달라진 것이다. 호세아, 여호수아, 예호수아, 예수, 이것은 모두 같은 이름이다. 곧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예표이다. 전쟁에 능한 자가 가나안을 정복하듯, 예수님께서 영적 가나안을 정복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더불어 갈렙의 존재도 빠뜨릴 수 없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였다면, 갈렙은 평신도로서 그 전쟁에 참여한 자였다. 자기 몫이 많지 않았으나 주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이처럼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것은 지도자에게만 요구되는 사명이 아니다. 성도라도 누구든지 전쟁에 능한 자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하여 &lt;strong&gt;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사명은 바로 이 전쟁에 능한 자를 만들어 내는 일&lt;/strong&gt;이다. 회개와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결국에는 전쟁에 능한 왕을 세우기 위한 과정이다. 회개를 알아야 전쟁에서 이기고, 천국 복음을 알아야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을 공부하는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다. 전쟁에 능하지 못한 자는 천국의 낮은 신분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lt;strong&gt;천국은 단순히 구원받아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lt;/strong&gt;이다. &lt;strong&gt;천국 안에도 신분이 있고 지위가 있기 때문이다&lt;/strong&gt;. 마치 대한민국에도 대통령이 있고 장관이 있고 공무원이 있고 일반 시민이 있는 것처럼, 천국에도 신분의 구분이 있다. 그 신분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 이긴 자, 전쟁에 능한 자가 높은 신분을 얻는다. 단지 믿기만 하고 아무 싸움도 하지 않은 자는 변두리의 구경꾼으로 머문다. 이것이 천국의 공정한 질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시편을 읽을 때도 우리는 전쟁에 능한 왕, 전쟁에 능한 자가 누구인지를 찾아야 한다. 사무엘상하를 읽을 때도, 역대상하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이 걸어갔던 길 전체가 전쟁에 능한 자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 과정을 따라 배워 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천국의 신분 구조를 잘못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amp;quot;믿음으로만 구원받으면 되지 않나요? 신분이 무슨 상관입니까?&amp;quot;라고 묻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바깥 어두운 데에 내쫓으셨다. 마태복음 25장에서 &amp;quot;착하고 충성된 종아&amp;quot;라고 불리는 자들은 받은 달란트를 갑절로 만든 자들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될 때, 그 싸움의 결과가 천국 신분으로 영원히 연결된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를 배워야 하는 신학적 근거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하는 하늘 군대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변두리에서 구경하는 자로 머물러 있을 것인지는 이 땅에서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전쟁에 능한 자로 준비되는 것이 바로 지금 이 훈련의 목적이다. 이 시간이 그래서 소중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다윗은 전쟁의 여정에서 원수를 어떻게 단계적으로 깨달아 갔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strong&gt;&amp;nbsp;다윗은 처음부터 원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lt;/strong&gt;. 그러나 그는 베들레헴의 목동 시절부터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lt;strong&gt;그 전쟁의 대상에 대한 이해는 점진적으로 깊어졌다&lt;/strong&gt;. 이것이 이른바 계시의 점진적 발전이다. &lt;strong&gt;그의 원수는 처음에는 맹수인 사자와 곰이었고, 그다음에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었으며, 그다음에는 사방의 이방 민족들&lt;/strong&gt;이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을 계기로 하여 다윗은 드디어 진짜 자신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 번째 원수는 양떼를 해치려는 &amp;#39;사자&amp;#39;와 &amp;#39;곰&amp;#39;&lt;/strong&gt;이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기 이전부터 그는 아버지 이새의 양 떼를 지키는 목동이었다. 그 시절 그의 원수는 양 떼를 해치는 맹수들이었다. 당시 목동에게 사자와 곰은 생사를 건 대적이었다. &lt;strong&gt;두 번째 원수는 골리앗이었다&lt;/strong&gt;. 기름 부음을 받은 후 다윗은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워야 했다. 골리앗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이방 신을 섬기는 자의 대표자였다. 그리고 &lt;strong&gt;세 번째는 주변 이방나라들이었&lt;/strong&gt;다. 그렇다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은 과연 다윗의 원수였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다윗의 원수라고 분명히 말했다. &amp;quot;당신의 원수입니다. 단칼에 끝내십시오.&amp;quot; 그러나 다윗 자신은 사울을 원수로 보지 않았다. 사울의 겉옷 자락만 가만히 베었을 뿐,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결코 기뻐하지 않았다. 사무엘하 1장에 기록된 것처럼 그는 오히려 슬픔의 노래, 곧 활의 노래를 불렀다. 원수가 죽었다면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이후 다윗은 왕이 되어 주변 민족들과 전쟁을 벌였다. 서쪽으로는 블레셋, 남쪽으로는 아말렉과 에돔, 동쪽으로는 암몬과 모압을 정복해 나갔다. 약 십 년에 걸쳐 동서남북의 모든 적들을 정복하였는데, 성경은 이를 가리켜 &amp;quot;사방 원수에게서&amp;quot;, &amp;quot;사방 대적&amp;quot;이라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특히 시편 18편 표제어는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8:1-3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amp;hellip;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주목할 것은 표제가 &amp;quot;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amp;quot;라고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울은 그 모든 원수 중 하나로 열거되지 않았다.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사울이 단순히 다윗의 개인적 원수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자신의 원수를 처음에는 사자와 곰 같은 동물로 보았고, 그다음에는 골리앗 같은 이방의 장수로 보았으며, 그다음에는 주변 이방 민족들로 보았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원수의 정체를 정확히 알려 주셨다. 그때 다윗의 시야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원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원수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러면서 점차 배워 간다. 누군가를 원수로 생각했다가, 아니구나 하고 깨닫고, 더 본질적인 원수를 찾아가게 된다. 이것이 계시의 점진적 발전이다. 우리가 틀렸으면 틀렸던 것을 인정하고, 바로 배워 가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성장이다. 다윗도 점차 알아 갔다. 우리도 지금 이 공부를 통해 점차 알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작은 전쟁에서 시작해서, 점차 더 크고 근본적인 원수를 보게 하신다. 다윗도 사자에서 시작해서 적그리스도의 원형이 되는 이방 세력까지 알게 되었다. 우리도 지금 배워 가는 중이다. 포기하지 말고 배워 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특별히 다윗이 사울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담고 있다.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원수로 보았다. 그것이 육신의 눈으로 보는 방식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핍박하는 자, 나를 죽이려 하는 자를 원수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이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 곧 사울을 손대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울 뒤에 있는 더 근본적인 원수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가진 영적인 눈이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되려면 이 영적 눈이 열려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사무엘하 12장과 마태복음 13장은 &amp;#39;여호와의 원수&amp;#39;를 누구로 규정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밧세바 사건은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시점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계시가 임한 순간이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죄를 덮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의 최전선에 보내 죽게 만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 앞에 명백한 죄악이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때 나단은 이렇게 말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13-14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에 &amp;quot;여호와의 원수&amp;quot;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때를 보라. 이때는 다윗의 원수가 사울 왕이 결코 아니었다. 다윗의 죄악이 빌미가 된 것은 &amp;#39;여호와의 원수&amp;#39;였다. 하나님에게 원수가 있었고, 그 원수가 다윗의 죄를 통해 비방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계시를 통해 다윗의 시야는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려는 그 존재가 원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 안에 들어온 죄성, 나를 죄짓게 한 그 원흉, 그것이 진짜 원수였다.&amp;nbsp;예수님도 이 원수의 정체를 비유로 분명히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가라지 비유가 그 비유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13:24-28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amp;#39;밭&amp;#39;은 이 세상이고, &amp;#39;좋은 씨&amp;#39;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amp;#39;가라지&amp;#39;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그 가라지를 뿌린 자가 바로 원수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영을 이 땅으로 보내 사람 안에 집어넣고, 자유의지로 선택하게 하여 믿는 자를 다시 데려가려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런데 원수는 가라지를 뿌려 하나님이 영혼의 추수를 못 하게 만든다. 이 원수가 바로 사탄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원수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목표 지점이 달라진다. 목표가 다르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정치 지도자를 원수로 삼고,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싸우며, 같은 그리스도인끼리 서로를 적으로 삼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역사 속에서 이런 오류는 반복되어 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만약 스데반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원수로 여겼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사도 바울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고, 신약 성경 열세 권에서 열네 권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의 경륜이 크게 미루어졌을 것이다. 스데반은 죽어 가면서 &amp;quot;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amp;quot;라고 기도하였다. 그것이 이후 바울의 회심으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amp;quot;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amp;quot;고 명령하셨고, &amp;quot;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amp;quot;고 가르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람은 언제든지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이 원수가 아니다. 사람 안에 들어와 그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드는 악한 영이 진짜 원수이다. 사람이 마귀에 속한 자가 되어 결국 마귀가 지옥에 갈 때 함께 가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가 원수가 아니다. 이것을 정확히 알아야 우리가 진짜 원수를 향해 싸울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쓴 시편 51편은 바로 이 깨달음 위에서 기록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amp;quot;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amp;quot;라고 한다. 왜 &amp;#39;주께만&amp;#39; 범죄하였다고 하는가? 밧세바에게도 죄를 범했고 우리아에게도 죄를 범했는데, 왜 &amp;#39;주께만&amp;#39;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자신의 죄가 인간 관계를 넘어 여호와의 원수에게 비방할 기회를 준 죄임을 다윗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 위에서 다윗은 더 철저히 회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회개가 다윗을 다시 전쟁에 능한 자로 세워 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다니엘서 7장의 사자&amp;middot;곰&amp;middot;표범은 요한계시록의 짐승과 어떻게 연결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목동 시절에 그의 원수는 사자와 곰이었다. 그는 사자와 곰으로부터 양 떼를 지키었다. 그때 사자와 곰은 글자 그대로 맹수였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사자와 곰과 표범은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는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된다. 깨끗한 짐승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자와 곰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 세력의 상징하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계시의 결정적인 열쇠가 다니엘서에 나타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니엘서 7장 1절에서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서 네 바람이 불어 바다로 몰아쳤다. 여기서 바다는 요동치는 거대 세력을 상징한다. 역사 속의 모든 대제국은 항상 바다를 끼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태풍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거대 세력이 일어남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그 바다에서 네 짐승이 올라왔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단 7:3-7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첫째는 사자 같은데 &amp;hellip; 둘째는 곰과 같은데 &amp;hellip; 셋째는 표범과 같은데 &amp;hellip;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큰 이빨이 있어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 짐승인 사자는 바벨론 제국 느부갓네살 왕&lt;/strong&gt;을 상징한다. &lt;strong&gt;둘째 짐승인 곰은 메대와 바사 연합 제국의 고레스 왕&lt;/strong&gt;을 상징한다. &lt;strong&gt;셋째 짐승인 표범은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lt;/strong&gt;을 상징한다. 알렉산더는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세계를 정복했기 때문에 날개 달린 표범으로 묘사된다. 그리고&lt;strong&gt; 열 뿔을 가진 넷째 짐승은 일차적으로 로마 제국&lt;/strong&gt;이었고, &lt;strong&gt;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lt;/strong&gt;를 예표한다. 이 네 짐승은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세력의 대장들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 민족의 왕들을 상징한다.&amp;nbsp;이러한 사실은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완성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13:1-2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amp;hellip;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고로 &lt;strong&gt;마지막 시대의 적그리스도는 첫째 짐승(사자), 둘째 짐승(곰), 셋째 짐승(표범)의 모든 강력한 특징을 하나로 합친 존재&lt;/strong&gt;이다. 사자의 위엄과 권위, 곰의 강인한 발, 표범의 민첩성, 이 모든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자가 마지막 적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뒤에서 용, 곧 사탄 마귀가 있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적그리스도에게 준다. 용이 짐승에게 자기 능력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 이 짐승을 이길 수 없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 13장 5절부터 7절을 보면, 이 짐승이 42달 동안 활동한다고 기록된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곧 삼 년 반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삼 년 반이었던 것처럼, 사탄 마귀는 마지막 삼 년 반 동안 자신의 공생애를 살아간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13:5-7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하는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더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때는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시기다. 그 시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다 그 짐승을 경배하게 될 것이된다. 이것이 전쟁의 최종 국면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전 이 때에 전쟁에 능한 자를 만들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다윗이 사자와 곰을 쳤던 그 전쟁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탄의 공격을 막아 내는 영적 싸움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처음에 그것을 몰랐다. 그러나 점차 배워 가면서 알아 갔다. 그리스도인도 처음에는 모른다. 배워 가야 한다. 우리가 어떤 대적과 싸우고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 점점 더 깊이 깨달아 가야 한다.&amp;nbsp;시편 24편은 이 전쟁의 승리자를 &amp;quot;전쟁에 능한 여호와&amp;quot;로 묘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24:7-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amp;hellip;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전쟁에 능한 여호와&amp;quot;, 이것이 이번 설교의 핵심이다. 여호와 자신이 전쟁에 능한 자이시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 그분을 대표하는 자들이 함께 전쟁에 능하게 된다. 다윗이 목동 시절 사자와 곰과 싸운 것은, 사실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를 대표하여 싸운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 경험이 쌓이고 쌓여 다윗은 마침내 이 시편을 노래하게 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전쟁에 능한 여호와&amp;quot;, 이 표현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분임을 선언한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전쟁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이것이 시편 24편의 핵심 고백이며, 전쟁에 능한 자가 가져야 할 확신이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전쟁에 능한 여호와께서 이기고 돌아오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전쟁에 능한 자의 첫 번째 정체성&amp;mdash;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amp;mdash;는 무엇을 의미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전쟁에 능한 자로서의 첫 번째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amp;#39;목자&amp;#39;라는 정체성이다. 이것은 다윗이 사자와 곰으로부터 양 떼를 지킨 사건에서 비롯된다. 시편 23편 1절에서 다윗은 &amp;quot;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amp;quot;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경험한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다윗 자신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였다. 목자가 양 떼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되어야 했다. 고로&amp;nbsp;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사울 왕 앞에서 이렇게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17:34-37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당신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이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사자와 곰이 새끼를 물어갈 때 그냥 있지 않았다. 따라가서 치고 입에서 새끼를 건져냈다. 그것이 자신을 해하려 덤빌 때에는 수염을 잡고 죽였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목자는 양 떼를 사랑하기에 자기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리고 다윗은 이 경험에서 놀라운 통찰을 끌어낸다. &amp;quot;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amp;quot; 작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큰 전쟁의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로 성장하는 방식이다. 작은 싸움에서 이기는 경험이 쌓여 큰 싸움의 담대함이 된다. 고로&amp;nbsp;시편 23편 5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39;원수&amp;#39;는 바로 목자가 아닌 양 떼를 해치려 오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목동 시절의 다윗에게 원수는 &amp;#39;사자&amp;#39;와 &amp;#39;곰&amp;#39;이었다. 그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상을 차려 주신다는 것은, 목자로서 양 떼를 지키며 싸우는 자에게 하나님이 친히 보상을 베푸신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목동 시절부터 이 목자의 심정을 키워 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 이러한 목자 정체성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셨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0:11-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삯꾼은 이리가 오면 달아난다. 자기 목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lt;strong&gt;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의 첫 번째 본질&lt;/strong&gt;이다. 전쟁을 잘한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는 원수를 향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귀신 잘 쫓는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강력한 분노와 함께 백성을 건지겠다는 목자의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이 목자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인구 조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전염병으로 치실 때, 다윗은 이렇게 간구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24: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그러나 백성은 살려 주소서.&amp;quot;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왕이 되어서도 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의 마음을 유지한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amp;quot;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amp;quot;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다윗이 강포를 쓰지 않고, 원수를 직접 손대지 않으며, 백성을 사랑했던 것, 이 모든 것이 목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전쟁에 능한 자로 세우셨다. 목자의 마음이 없는 자는 전쟁에 능해지더라도 그 능력을 백성을 위해 쓰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그것이 삯꾼의 특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자를 전쟁에 능한 자로 세우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따라서 &lt;strong&gt;전쟁에 능한 자는 백성을 원수 취급하는 자가 아니다. 백성을 해치는 원수와 맹렬히 싸우는 자&lt;/strong&gt;이다. 나라의 지도자도, 교회의 지도자도 이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 잘못한 것은 정확한 재판을 열어 바로잡되, 항상 백성을 사랑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걸어서라도 양 떼를 지키는 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진정한 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목자의 마음을 점검해야 한다. 성도들을 가르치고 섬기는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양 떼를 위해 목숨을 거는 목자인가, 아니면 삯꾼인가를 진실로 점검해야 한다. 이리가 올 때 달아나는 삯꾼은 성도들을 버린다. 이단 사상이 들어올 때, 거짓 복음이 침투할 때, 악한 영의 공격이 올 때 목자는 물러나지 않는다. 다윗이 사자의 수염을 잡고 죽였던 것처럼, 목자는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 성도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이 목자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우리 가족을, 우리 이웃을, 우리 교회 공동체를 해치는 악한 영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것, 그것이 목자의 정체성을 가진 전사의 삶이다. 목자의 마음으로 싸우는 자에게 하나님이 상을 차려 주신다. &amp;quot;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amp;quot;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라! 원수와 싸우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친히 상을 베푸신다. 이 약속을 붙잡고 목자의 마음으로 싸워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전쟁에 능한 자의 두 번째 정체성&amp;mdash;하나님을 대표하는 자&amp;mdash;는 어떻게 싸움을 가능케 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전쟁에 능한 자의 두 번째 정체성&lt;/strong&gt;은 무엇인가? &lt;strong&gt;그것은 자신이 &amp;#39;하나님을 대표하는 자&amp;#39;라는 것&lt;/strong&gt;이다.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운 장면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생각해 보라.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어떤 인간적 조건이 있었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사울 왕도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었다. 아침마다 골리앗이 나와 이스라엘을 모욕해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요나단도 나서지 않았다. 다윗의 큰 형 엘리압도, 이스라엘의 어떤 병사도 나서지 못했다. 사울이 자기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 보았지만 갑옷이 너무 커서 입고 갈 수조차 없었다. 다윗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소년이었다. 모든 조건에서 다윗은 골리앗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그러나 다윗은 나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나아간 것은 자기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amp;quot;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amp;quot; 나아갔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lt;strong&gt;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 대표자로서 그에게 나아간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대표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lt;/strong&gt;이다. 이것이 다윗이 불가능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amp;nbsp;시편 20편 7절은 이 원리를 이렇게 표현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병거와 말은 당대 최강의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군대는 그것이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했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에 있지 않고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그 이름으로 싸워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lt;strong&gt;신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낼 때 &amp;quot;예수님의 이름으로&amp;quot; 떠나갈 것을 명령&lt;/strong&gt;했다. &lt;strong&gt;자기 능력으로 싸운 것이 아니었다&lt;/strong&gt;.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에게 이렇게 선포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이름은 바로 &amp;#39;여호수아&amp;#39;, 곧 &amp;#39;예호수아&amp;#39;이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lt;strong&gt;그분의 이름으로 싸울 때 승리가 임한다. 귀신과 싸울 때는 자기 능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 보내셨다는 정체성으로 싸워야&lt;/strong&gt; 한다. &amp;quot;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대표자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amp;quot; 이 정체성으로 싸울 때 악한 영은 물러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가나안 땅 최강의 대적이었던 아낙 자손의 후손 골리앗을 먼저 쳐야 했던 것처럼, 마태복음 12장의 원리대로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해야 그의 집을 노략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 사탄 마귀를 먼저 결박해야 주변의 귀신들을 물리칠 수 있다. 그것이 골리앗을 먼저 잡고 블레셋 군대를 격퇴한 사건의 영적 의미이다. 그러므로 귀신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정체성, 여호와의 이름을 앞세우는 믿음으로 싸워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이 두 가지 정체성 곧 목자와 대표자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목자의 마음이 있어야 대표자로서 싸우는 이유가 생긴다. 목자의 마음이 없이 대표자의 능력만 가지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반대로 목자의 마음만 있고 대표자의 정체성이 없으면, 이리가 올 때 감당하지 못하고 삯꾼처럼 달아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전쟁에 능한 자가 완성된다. 다윗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었다. 그것이 다윗이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었던 이유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고린도전서 9장이 말하는 &amp;#39;목표 있는 싸움&amp;#39;은 오늘 성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자가 되려면 반드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목표가 없는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방향이 없으면 상을 얻을 수 없다. 아무리 힘차게 주먹을 휘둘러도 상대방을 정확히 향하지 않으면 허공을 칠 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6절부터 27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9:26-27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amp;quot;, 이는 달리는 데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목표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다. &amp;quot;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amp;quot;는 상대방을 정확히 향해 치고 있다는 것이다. 헛스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투 선수가 아무리 힘차게 주먹을 날려도 상대방을 못 맞추면 자기 몸만 지치게 된다. 목표를 잘못 알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헛다리를 짚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자기 몸만 빠질 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원수를 잘못 정의하고 있다. 정치인을 원수로 삼고,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싸우며, 인간을 원수로 삼아 끌어내리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을 치는 것이다. 진짜 원수를 향해 싸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 악한 지도자를 원수로 삼아 싸우는 것, 이것은 결코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 길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정의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싸움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우리는 원수가 누군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원수를 나의 원수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방해하려는 자, 천국 백성이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려는 자, 천국에서의 아름다운 지위와 신분을 얻지 못하게 핍박하는 자, 그가 원수다. 그가 바로 마귀요, 마귀에게 속한 악한 영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원수를 원수로 삼아야 한다. 여호와의 원수가 우리의 원수가 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목표를 정확히 아는 싸움은 자기 자신을 먼저 다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바울이 &amp;quot;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amp;quot;이라고 말한 것처럼, 자기 육신과 정욕과 죄성을 먼저 다스리지 못하면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에서 자기 육신을 다스리지 못해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이 여호와의 원수에게 비방할 기회를 주었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되려면 자신의 내면을 먼저 정복해야 한다. 내 안의 죄성을 먼저 다스려야 밖의 원수와 싸울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를 아는 자가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다.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방치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즉시 돌이키는 자, 자기의 실수를 보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유턴하는 자가 전쟁에 능하게 된다. 악한 영들은 죄가 들어온 틈을 통해 우리를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회개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람을 원수로 삼는 것의 위험성은 역사 속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에 일평생을 쏟아부어도, 그것이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애국자가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하늘의 기업을 차지하는 길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령 속에 들어온 악한 영을 목표로 싸우는 자를 원하신다. 그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자기 절제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갑옷을 입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다. 다윗도 한 번 갑옷을 벗었을 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서울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밧세바를 보았을 때가 그것이었다. 전쟁에 나가야 할 봄에 전쟁에 나가지 않고 왕궁에 머물러 있었던 것, 그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전쟁에 능한 자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순간 원수에게 틈을 허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치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회개로 언제나 새롭게 하는 것이 전쟁에 능한 자의 일상이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울이 죽은 것을 다윗이 슬퍼했듯, 원수처럼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서 변화될 수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 사람 안의 악한 영이 원수이다. 그 악한 영과 싸우고,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오늘 성도가 정확히 원수를 정의하고 목표를 향해 싸울 때, 그 싸움은 반드시 의미 있는 싸움이 된다.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대상을 향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싸움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만왕의 왕을 따라 백마를 타고 나가는 군대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원수를 원수로 삼고, 여호와의 원수와 싸우는 진정한 전사가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당장 자신의 싸움을 점검하라! 나는 지금 진짜 원수와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허공을 치고 있는가? 나는 목자의 마음으로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사사로운 감정으로 싸우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내 능력을 의지하며 싸우고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해 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오늘은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의 정체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성도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편 24편의 표현대로 &amp;quot;전쟁에 능한 여호와&amp;quot;의 이름으로, 그분의 대표자로서 싸우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인의 최종 신분이 전쟁에 능한 왕임을 확인하였고, 다윗이 그 원수를 어떻게 단계적으로 깨달아 갔는지를 추적하였다. 사무엘하 12장과 마태복음 13장을 통해 여호와의 원수가 사람이 아니라 사탄과 그에게 속한 악한 영임을 밝혔다. 다니엘서 7장의 사자&amp;middot;곰&amp;middot;표범이 요한계시록 13장의 마지막 짐승으로 수렴된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전쟁에 능한 자의 두 가지 핵심 정체성 곧 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와 하나님의 대표자를 성경을 통해 살펴보았으며, 고린도전서 9장을 통해 목표 있는 싸움이 무엇인지를 점검하였다. 그리고 이번 시간에 이 공부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엉뚱한 원수를 향해 싸우고 있었는지, 또 얼마나 진짜 원수를 모르고 있었는지를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강의를 통해 배운 것들이 삶의 자리에서 실천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우리는 사람을 원수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 정치인을 끌어내리는 것을 일평생의 목표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서로를 적으로 여겨서도 아니 된다. 우리의 대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진짜 주적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자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의 원수를 우리의 원수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방해하는 사탄과 그의 세력을 우리의 대적으로 삼아야 &lt;/strong&gt;한다. &lt;strong&gt;다니엘서 7장의 사자와 곰과 표범,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 이 모든 세력의 배후에 있는 용을 우리의 원수로 삼아야&lt;/strong&gt; 한다. 그 싸움을 위해 우리는 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대표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하는 자기 절제가 있어야 하고, 회개를 통해 죄의 틈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원수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맞서 싸우는 담대한 전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 19장의 아마겟돈 전쟁에서 만왕의 왕을 따르는 하늘의 군대로 세워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음 강의에서는 전쟁에 능한 자의 또 다른 정체성을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 오늘 배운 두 가지 정체성 곧 목자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정체성을 마음에 새기고, 삶의 현장에서 이 정체성으로 싸우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허공을 치는 싸움이 아니라, 여호와의 원수를 정확히 겨냥하는 목표 있는 싸움을 싸워야 한다. 자기 몸을 먼저 다스리고, 회개로 늘 깨끗함을 유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성도가 전쟁에 능한 자이다. 다윗이 베들레헴 들판에서 사자와 싸운 그 마음, 골리앗 앞에서 &amp;quot;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amp;quot; 외쳤던 그 담대함이 오늘 우리 안에도 살아있기를 소망한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되라! 그것이 하나님이 이 마지막 시대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이다. 우리 모두 그 사명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사명을 붙들고 날마다 말씀 위에서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멘.&lt;/p&gt; &lt;p style=&quot;margin-top: 30px;&quot;&gt;2026년 06월 10일(수)&lt;/p&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인 다윗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amp;nbsp;&lt;strong&gt;영적 전쟁의 군사적 정체성&lt;/strong&gt;을 조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도의 최종적인 신분은 천국에서 제사장일지라도 이 땅에서는&amp;nbsp;&lt;strong&gt;전쟁에 능한 자&lt;/strong&gt;이자 왕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신앙의 초점을 영적 전투에 맞출 것을 촉구합니다. 다윗의 삶에서 나타나는 세 단계의 대적, 즉&amp;nbsp;&lt;strong&gt;사자와 곰, 골리앗, 그리고 내면의 죄&lt;/strong&gt;를 통해 원수의 실체가 단순히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는&amp;nbsp;&lt;strong&gt;사단 마귀&lt;/strong&gt;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영적 승리는 내 양떼를 지키는&amp;nbsp;&lt;strong&gt;목자의 심정&lt;/strong&gt;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amp;nbsp;&lt;strong&gt;대표자 의식&lt;/strong&gt;을 가질 때 가능하며, 이것이 곧 가나안 땅과 같은 천국 기업을 차지할 왕의 자격임을 역설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8af0e065a6cfdd59fb2bc2a0c63b3995.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eff46fecd084aa3e04b2e195cbe432a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f98ec1b85df62c154bf726487887799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a9b69304e22165bb4d8b29220cc826c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898e12d859de642732c63994fe6047f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3927b28acdb4306797a3cddd887a9a1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6cafa9cfe5b5bd32621edc882dbc722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c06b18a992f8d3ea1139dc98e81a5e3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d914f369ec311ab951676dcd612aae9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f6d9680640c12019e63f6cf88470827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f05546cbb4095bac0b67f44d21fea29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282cb40be1daa0c971740efa8c6c80f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Warrior_King_Blueprint.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3c96e5a40204daeb96a859f2db50ee93.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2cec0b86eaab07aedbf0e2b7e2d8a72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a713b54ad1584892f8e1344991021f7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936c23351f1ab4b04871cadf05cd7b2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7720bfa4bf6391ed35f5accfa45829c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8cbf839671e1f068bb908be872f6b06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8b55b5c10164c9004be2b99dea80704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68b3a5c8a0ff5248e52f65f91deb609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94446bf7a2d571ee553e0b98d5e4ad5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7a8464bc1f49da6f02b8bb7e1955968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045d878a0cd6913484dca54eecd5e71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afb3ca5b531dc5e22493c89c4e7e479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39b3fc5edec4a77834aa321ed6baa78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b2939a837691372a5a43bbab29266d9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2dd7bc2b9f9d0b26eaa54cbb916954d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8)] The_Warrior_King_Protocol.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176/256/d823f0c4d0accc50826ad02242b17fa7.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17)]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3)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5)(시51:1~19)_2026-06-09(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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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09T16:31:05+09:00</published>
		<updated>2026-06-09T22:28:39+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7)]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3)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5)(시51:1~19)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mQ8T-U8Veqw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은 구약의 기독론 시리즈 가운데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039;이기는 자&#039;의 예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야곱을 시작으로 마침내 왕 같은 제사장의 전형...</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17)]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3)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5)(시51:1~19)&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mQ8T-U8Veqw&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mQ8T-U8Veqw?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font-size: 15px; line-height: 1.8; margin: 0; padding: 0; } .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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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그도 사람으로서 흠을 가지고 있었다. 왕이 된 지 10년 정도 되었을 때에 그는 권력의 그늘 아래에서 간음과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을 &amp;quot;내 마음에 맞는 사람&amp;quot;이라고 부르셨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사실 그때 중죄인이었다. 왜냐하면 충성스러운 자신의 부하장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먼저 취하여 간음을 행하였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 장군마저 전쟁터 최전선에 내몰아 죽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간음죄, 살인죄, 도적질 죄, 탐욕의 죄가 한꺼번에 담겨 있는 패역무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지금 저 천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의 전형으로서 인정받은 채 살고 있다. 대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가 죄를 범한 이후 진정 용서받은 자였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우리는 다윗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기술서인 사무엘하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윗이 행한 회개의 실상을 가장 적나나하게 보여주는 책으로서 시편에 나오는 참회의 시편들을 통해서 다윗의 회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는 일생에 참회의 시를 최소 7편 이상 썼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은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이러한 일곱 편의 시를 면밀히 검토해 봄으로써, 다윗이 어떻게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가 단순한 감정적 참회를 넘어서 하늘의 기록 체계, 곧 행위책과 생명책의 존재를 인식하는 높은 차원의 영적인 회개였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시편 51편을 중심으로, &lt;strong&gt;다윗의 회개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특징 가운데 마지막 특징으로서, 그가 행했던 회개가 행위책에서 자신의 죄가 지워지는 회개와 악한 영이 쫓겨나가는 깨끗함의 회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lt;/strong&gt;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기독론 117강이 다루는 시편 51편은 이 시리즈 전체에서 어떤 신학적 위치에 있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번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문장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amp;quot;회개가 무엇인가를 알려면 다윗이 했던 참 회개를 한 번 들여다보자.&amp;quot;라는 것이다. 시편에는 다윗의 쓴 것으로 인정되는 &amp;#39;참회시편(Penitential Psalms)&amp;#39;이 총 일곱 편 나온다. 그것은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이다. 이 일곱 편의 시를 통해 다윗이 죄를 짓고 난후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에 관한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먼저, 다윗의 쓴 참회의 시편 가운데 시편 6편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가? 그것은 다윗이 뼈가 마르도록 지냈으며,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또한 시편 32편에서는 죄를 숨길 때 그가 겪었던 고통과 자백했을 때에 경험한 놀라운 자유와 해방을 생생하게 묘사해주고 있다. 그리고 시편 38편에서는 죄로 인해 몸의 성함이 없어지고 악취가 나며 상처에 화농이 생길 만큼 극한의 신체적 고통을 겪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시편 102편에서는 영혼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뼈가 불붙은 나뭇가지처럼 탄다고 고백하였으며, 그리고 시편 51편에서는 이 회개의 모든 차원을 집약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깊은 고백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시편 51편의 제목에는 &amp;quot;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온 때에&amp;quot;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이 시편이 구체적인 사건의 맥락에서 나온 실제 회개의 기록임을 알려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시편 51편은 단독으로 읽을 때보다 일곱 편의 참회의 시편 전체 흐름 속에서 읽을 때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드러낸다. 시편 6편에서 32편으로, 32편에서 38편으로, 그리고 마침내 51편에 이르는 이 회개의 여정은 단순히 한 사람의 감정적 고백을 넘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의 실존적 탐구다. 그러므로 &lt;strong&gt;이번 시간은 단순한 회개의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회개가 필요한지&lt;/strong&gt;를 가르쳐 주는 신학적 정수라 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참회의 시편들이 드러내는&lt;strong&gt; 다윗의 회개에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lt;/strong&gt;이 있다. &lt;strong&gt;첫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 제사가 아니라 회개의 진정성&lt;/strong&gt;이라는 것이다.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 곧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참된 회개의 출발점이다(욜 2:13). 다윗의 전임자인 사울은 범죄 후에 &amp;quot;내가 범죄하였나이다&amp;quot;라고 말하였으나, 그 고백에는 가슴을 찢는 통회가 없었고 백성의 눈치를 살피는 체면 유지만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지 않으셨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열 달이 넘도록 뼈가 흔들리고 몸이 떨릴 만큼 죄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욜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는 지(知)&amp;middot;정(情)&amp;middot;의(意)가 온전히 작동하는 회개, 곧 히브리서 &amp;#39;슈브&amp;#39; 혹은 헬라어 &amp;#39;메타노에오(metanoeō)&amp;#39;의 의미에 합당한 회개&lt;/strong&gt;라는 것이다. 유다는 자기가 무고한 피를 팔아넘긴 것을 알고 뉘우쳤으나(마 27:3), 그것은 헬라어로 &amp;#39;메타멜로마이(metamellomai)&amp;#39;, 즉 자신이 죄를 지은 결과에 대한 후회였을 뿐이다. 지(知)와 정(情)까지는 갔으나, 의지적 결단, 곧 두 번 다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방향 전환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죄가 무엇인지 알고 눈물로 뉘우쳤다 하더라도, 의지적 결단 없이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회개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다. 밧세바 사건 이후 노년에 후궁으로 들인 처녀와도 잠자리를 하지 않을 만큼 순결을 지키는 의지적 결단을 보여 주었다(왕상 1:4). 그것이 진정한 회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욜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가 이 시간에 집중적으로 다룰 내용이다. 그것은 죄가 행위책에서 지워지는 회개이며, 악한 영이 쫓겨남으로써 몸이 깨끗해지는 회개&lt;/strong&gt;라는 것이다. 시편 51편은 바로 이 세 번째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본문이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단순히 &amp;quot;내 죄를 용서해 달라&amp;quot;고 구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amp;quot;지워 달라&amp;quot;고, 그리고 &amp;quot;깨끗하게 해 달라&amp;quot;고 기도하였다(시 51:1, 7, 9). 그 두 가지 요청 속에는 천국의 영적 실재, 곧 하늘의 기록 체계와 악한 영의 존재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이 세 번째 특징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특징을 완성하기 때문&lt;/strong&gt;이다. 이는 진정성 있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회개(첫째)와 지&amp;middot;정&amp;middot;의가 온전히 작동하는 메타노에오의 회개(둘째)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회개가 하늘의 행위책에 기록되어 있는 죄의 목록을 삭제하고 몸 속에 있는 악한 영을 내보내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회개의 과정이 아직 완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윗이 바로 이 세 번째 차원의 회개까지 이른 것이, 그를 왕 같은 제사장의 모범으로 세운 핵심 비결이다. 그는 용서를 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기록이 지워지기를, 그리고 몸이 깨끗해지기를 구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완전한 회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다윗이 천국에서 왕복을 입은 왕 같은 제사장의 모범으로 인정받는 근거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천국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천국에는 크게 네 부류의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변두리에 있는 자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서서 예배드리는 자들, 14만 4천 명으로서 앉아서 예배드리는 자들, 그리고 24장로로서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 반 타원형으로 둥그렇게 앉아 있는 자들이다. 이 각 부류는 저마다 다른 찬송을 부른다.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있고, 특정 무리만 부를 수 있는 찬송이 따로 있다. 14만 4천 명만 배울 수 있는 새 노래가 따로 있으며(계 14:3), 공중에 떠 있는 천사들만 부르는 찬송도 있다. 이처럼 천국은 공산주의적으로 모두가 동일한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다(계 22:12). 주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인 은혜로 동일하나, 천국에서 누릴 지위와 상급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전혀 다르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어떻게 믿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천국의 위치를 결정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144,000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천국에서 왕복(王服)을 입고 다니는 자는 단 두 사람뿐이다. 다윗과 솔로몬이다. 다윗은 빛나는 왕복을 입고 다니고 있으며, 솔로몬은 빛이 나지 않는 왕복을 입고 다니고 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에는 흰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허용된 자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천국에 들어간 모든 자들이 입는 옷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마땅했으나 그렇지 못한 전형이 되었고, 다윗은 왕 같은 제사장의 모범으로 인정받은 전형이 되었다. 솔로몬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인들로 인해 마음이 미혹되어 우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이집트 바로의 딸을 비롯하여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사람의 여인 등 이방 여인 700명을 아내로, 300명을 첩으로 두었다. 성경은 그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이켰다고 기록한다(왕상 11:3). 그 결과 솔로몬은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같은 이방 신들을 위해 산당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하나님이 두 번씩이나 친히 나타나 경고하셨음에도 그는 돌이키지 않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1: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그러므로 솔로몬은 왕복을 입고는 있지만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마땅하였는데 그 기대를 배신한 자의 전형으로 천국에 서 있는 것이다. 반면 다윗은 큰 죄를 지었음에도 진정한 회개를 통해 왕 같은 제사장의 모범으로 인정받았다. 요한계시록 1장과 5장은 이렇게 선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사울왕보다 더 파렴치한 죄를 범한 다윗이 어떻게 왕 같은 제사장의 모범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는가? 그 답은 바로 그의 회개에 있다. 다윗은 범죄하였으나 그 죄를 감추거나 덮으려 하지 않았다. 죄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진정성 있는 회개를 하였고, 의지적으로 방향을 전환하였으며, 나아가 하늘의 행위책에서 그 죄가 지워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회개의 깊이와 진정성이 다윗을 왕 같은 제사장의 전형으로 세운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래서 다윗이 쓴 시편이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도들의 영적 좌표를 찍어 주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lt;strong&gt;하늘의 실재를 직접 본 자의 증언&lt;/strong&gt;이기 때문이다. &lt;span style=&quot;color:#d35400;&quot;&gt;&lt;strong&gt;다윗은 생명책을 보았고(시 69:28), 행위책이 존재함을 알았으며(시 51:1), 그래서 행위책에 기록된 죄라도 그것이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그 진리를 붙잡고 끝까지 회개의 길을 걸어간 것이 그를 왕 같은 제사장의 모범으로 만든 것&lt;/strong&gt;&lt;/span&gt;이다. 천국에서 다윗의 생명책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이름 위에 금 왕관이 얹혀 있었다고 한다. 그 왕관은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간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증표다. 이 땅의 삶이 천국에서의 신분과 직결된다는 것을 다윗의 사례가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일한 원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도 얼마든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 핵심은 다윗처럼 진정한 회개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진정한 회개의 세 가지 특징은 무엇이며, 다윗은 그것을 어떻게 보여 주었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제는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던 바, &lt;strong&gt;다윗의 회개가 가졌던 세 가지 특징을 좀 더 구체적으로&lt;/strong&gt; 살펴보자.&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 그는 진정성이 있는 회개를 하였다&lt;/strong&gt;.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면 죄가 용서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다. 시편 51편 17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amp;#39;상하고 통회하는 마음&amp;#39;,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다. 사울의 회개가 거절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무엘 선지자 앞에서 사울은 &amp;quot;내가 범죄하였나이다&amp;quot;라고 말하였으나(삼상 15:24), 그 고백의 동기는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통회가 아니라 백성 앞에서의 체면 유지였다. &amp;quot;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나이다&amp;quot;라는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은 그 회개를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즉시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고 고백하였다(삼하 12:13). 그리고 그 고백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다. 시편 6편에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6-7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열 달이 넘는 세월 동안 뼈가 마르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는 고통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다. 시편 32편 3절과 4절은 그 고통을 이렇게 묘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2:3-4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진정성 있는 회개다. 죄를 짓고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은 악한 자의 표시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은 죄를 지을 때 아파하는 자, 그 죄 때문에 통회하는 자를 통해 일하신다. 통회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지 않으신다. 성경은 &amp;quot;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amp;quot;(시 34:18)고 약속한다. 마음이 상한 자, 통회하는 자, 이것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자의 조건이다. 형식적 종교 행위가 아니라 부서진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그는 지&amp;middot;정&amp;middot;의가 온전히 작동하는 회개, 곧 메타노에오의 회개를 하였다&lt;/strong&gt;. 그렇다. 회개는 다윗처럼 지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를 알아야 하고, 정적으로는 그 죄를 가슴 아파하며 눈물로 뉘우쳐야 하며, 의지적으로는 두 번 다시 그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단까지 나아가야 한다. 가룟 유다는 지적으로 알고 정적으로 뉘우쳤으나 의지적 결단 없이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감으로써 온전한 회개에 이르지 못하였다. 지정(知情)까지는 갔으나 의(意)까지 가지 못한 비극적 실패다. 반면 다윗은 범죄 이후 노년에 후궁으로 들인 처녀와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증언한다(왕상 1:4). 다윗은 의지적으로 죄를 끊어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4 그 소녀가 왕을 받들어 섬겼으나 왕이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금도 역시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 회개 기도문으로 회개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지 않으신다. 그런 자에게서 악한 영의 집은 파괴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들어 쓰시지도 않는다. 쓰다가 버리게 되면, 그를 쓰셨던 하나님의 이름이 먹칠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지적 결단 없는 회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회개로 인정받지 못한다. 운전 중에 중앙선을 넘어 다시 방향을 바꾸어 되돌아오는 것을 가리켜 유턴(U-turn)이라고 한다. 진정한 회개는 바로 이 유턴이다. 방향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입술로만 &amp;quot;죄송합니다&amp;quot;를 반복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 그는 행위책에서 죄가 지워지는 회개이며, 악한 영이 나가서 깨끗해지는 회개를 하였다&lt;/strong&gt;. 이것이 요번 시간의 핵심이다. 다윗은 시편 51편 1절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구했다. 하나는 &amp;quot;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amp;quot;이고, 다른 하나는 &amp;quot;나의 죄를 깨끗하게 하소서&amp;quot;이다. 이 두 가지 간구는 단순한 수사적 반복이 아니다. 각각 다른 영적 실재를 향한 구체적인 요청이기 때문이다. 지워지는 것은 행위책에 기록된 죄의 목록이 삭제되는 것을 가리키고, 깨끗해지는 것은 몸 안에 자리 잡은 악한 영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회개를 함께 이루어야 진정한 회개가 완성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행위책에서 죄가 지워지는 회개란 대체 어떤 것이며, 시편 51편은 이를 어떻게 증언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51편 1절을 이제 주의 깊게 읽어 보자.&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quot;지워 주소서&amp;quot;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amp;#39;마하(māḥ&amp;acirc;)&amp;#39;다. 이 단어는 기록된 것을 문질러서 지운다는 뜻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았고, 그 기록이 지워지기를 간구한 것이다. 그 &amp;#39;어딘가&amp;#39;가 바로 &amp;#39;행위책&amp;#39;이다.&amp;nbsp;요한계시록 20장은 마지막 심판 장면에서 두 종류의 책을 언급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펼쳐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펼쳐져 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는 &amp;#39;생명책&amp;#39;이고, 다른 하나는 &amp;#39;행위책&amp;#39;이다. 생명책에는 구원받은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행위책에는 이 땅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행위책은 단 한 권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 한 권씩의 행위책이 있다. 그 책에는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 다 기록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땅에 성령으로 보내심을 받은 일곱 영이 마음까지 알기 때문이다(계 5:6). 보고하는 기록 천사는 말과 행동만을 보고하지만, 성령은 마음까지 아신다. 그러므로 행위책에는 생각으로 범한 죄도 남김없이 기록되어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사실 이 땅에서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록 천사 한 명이 그에게 달라붙는다. 그 천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해가 지는 시간에 보고를 올린다. 거듭난 성도의 경우에는 기록 천사가 두 명으로 늘어난다.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기록하는 자도 하나가 더 붙는 것이다. 이것이 그저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영적 실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시간 개념에서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하는데, &amp;quot;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amp;quot;(창 1:5)는 바로 이 행위 기록이 마감되는 시간적 구조를 반영한다. 그렇게 보고된 내용을 하늘의 기록 천사가 받아서 행위책에 기록한다. 거기에는 글로 쓰인 기록이 있고, 영상으로 저장된 것도 있다. 그 영상은 행위책이 펼쳐질 때 마치 필름처럼 펼쳐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심지어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와 눈물까지도 기록하고 계심을 알았다. 시편 56편 8절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다윗은 하늘에 &amp;#39;책&amp;#39;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시편 69편 28절에서는 그러한 책들 가운데 생명책이 있고, 그 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도 언급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9:28 그들을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여기서 &amp;quot;도말하사&amp;quot;는 히브리어로 역시 &amp;#39;마하&amp;#39;, 곧 지우다는 뜻이다. 이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행위책에서도 죄가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시편 51편 9절에서 그는 다시 이렇게 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amp;quot; 이것은 단순한 용서의 요청이 아니다. 행위책에 기록된 죄의 목록이 삭제되기를 구한 것이다.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해도 그 죄는 행위책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이렇게 가르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자백하지 않으면 지워지지 않는다. 형식적 자백도 지워지지 않는다. 진심으로 자백하는 회개만이 행위책에 기록된 죄를 지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어느 목사님이 천국에서 자신의 행위책이 펼쳐져 보여지는 경험을 하였다. 영상 필름처럼 자신이 죄를 지었던 삶이 펼쳐지는데, 어떤 장면은 선명하게 나타나고 어떤 장면은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어떤 장면은 아예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진 것들은 회개기도는 하였으나 기도가 부족한 것들이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들은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들이며, 하얗게 지워진 것들은 진심으로 통회하며 자백하였기에 완전히 삭제된 것이었다. 나중에 주님께 여쭈니, 희미하게 보인 것은 회개하였으나 아직 온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이고, 하얗게 지워진 것은 진심으로 회개하여 완전히 삭제된 것이라 하셨다고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체험은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준다. 형식적 회개 기도는 흔적을 남긴다.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하면서 마음 속에서 그 죄를 즐거워하거나 다시 범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회개는 행위책에서 그 죄를 지우지 못한다. 오히려 그 기도마저 행위책에 기록되어 버린다. 하나님을 속이려 한 행위가 하나의 새 기록으로 남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엄중한 사실인가! 반면 진심으로 상하고 통회하며, 두 번 다시 그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적 결단까지 이른 회개는 그 죄가 완전히 삭제되어 하나님도 보지 못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행위책에서 죄가 지워진다는 것은 영적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기록이 삭제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것을 보지 못하신다. 지워졌기 때문이다. 수백 번 수천 번을 회개했는데도 불구하고 귀신이 나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만 행위책의 기록이 지워지고, 내 속에 있는 악한 영이 나가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다윗은 하늘에 &amp;#39;행위책&amp;#39;과 &amp;#39;생명책&amp;#39;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 성경에서 생명책을 직접 언급한 인물은 두 사람이다(신약에서는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 뿐이다). &lt;strong&gt;먼저는 모세&lt;/strong&gt;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한 후, 모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중보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는 하나님이 기록하신 책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음을 알았다. 이것이 구약에서 생명책의 존재를 증언하는 첫 번째 기록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 두 번째가 앞서 살펴본 &lt;strong&gt;다윗의 시편 69편 28절이다. &amp;#39;생명책&amp;#39;이라는 이름을 구약에서 명시적으로 사용한 것은 다윗이 처음&lt;/strong&gt;이다. 그렇기에 다윗은 단순한 왕이나 시인이 아니라 탁월한 영성가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lt;strong&gt;다윗은 어떤 통로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 그는 환상의 은사를 받은 자&lt;/strong&gt;였다. 시편 110편 1절에서 그는 천 년 후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미리 보았고(마 22:44), 시편 22편에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 동일한 &lt;strong&gt;환상의 은사로 다윗은 하늘의 실재, 곧 생명책과 행위책의 존재를 보았던 것&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오늘날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 자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방식이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 중에 느보산을 올라가는 길에서도 이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느보산은 모세가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던 곳이다. 그곳을 오를 때 어떤 이들은 자신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불처럼 솟아오르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이 장소를 통해 사람의 심령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그의 영적 눈을 열어 하늘의 실재를 보게 하셨을 때, 그는 단순히 정서적인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시편에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 기록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다윗은 &lt;strong&gt;시편 56편 8절에서 &amp;quot;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amp;quot;라고 물음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기록으로 남는다&lt;/strong&gt;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기록이 남는다는 영적 확신에서 나온 고백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행위책의 기록 방식에 관해서도 성경은 단서를 제공한다. 요한계시록 4장에 등장하는 네 생물을 보라. 사자 같은 얼굴, 송아지 같은 얼굴, 독수리 같은 얼굴, 사람 같은 얼굴을 가진 네 생물의 온 몸에 눈들이 가득하다(계 4:6). 이 눈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이 눈들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인류를 동시에 감시하고 기록하는 하나님의 눈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태어났다 죽은 사람의 수를 훨씬 초과하는 수의 눈이 네 생물의 몸에 박혀 있으며, 그 눈들은 말과 행동은 물론 마음의 생각까지 초선명으로 기록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땅에서의 하루가 끝나면, 기록 천사가 보고하고 하늘의 행위책에 그날의 기록이 남는다. 이스라엘의 시간 개념에서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한다. 다시 말해, &amp;quot;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amp;quot;(창 1:5)는 단순히 창조의 순서가 아니라, 행위의 기록이 마감되는 시간적 구조를 반영한다. 이 기록 구조를 이해하면 왜 성경이 해가 지기 전에 분을 해소하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권면하는지가 명확해진다. 하루의 기록이 마감되기 전에 그날의 죄를 청산하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삶이다. 그러므로 해가 지기 전에 그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베소서 4장 26절과 27절이 이렇게 권고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은 이 모든 영적 실재를 알았기 때문에, 단순한 용서의 차원을 넘어 행위책에서 기록이 지워지기를 간구하는 회개를 하였다&lt;/strong&gt;. 그리고 그 회개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 생명책에서도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도리어 그 이름 위에 금 왕관이 얹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완전한 계시가 임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다윗은 행위책과 생명책을 통해 많은 영적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그가 기록한 시편들이 오늘 우리 신앙의 방향과 좌표를 찍어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악한 영이 나가야 깨끗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요한일서 1장은 이를 어떻게 가르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제 시편 51편 7절을 다시 읽어 보자.&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amp;quot; 우슬초는 구약 의식에서 피를 뿌릴 때 사용하는 도구다(출 12:22). 유월절 밤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뿌릴 때 사용한 것이 우슬초였다. 그러나 다윗은 동물의 희생 제물이 자신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편 51편 16절에서 &amp;quot;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amp;quot;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우슬초로 피를 뿌려 정결하게 해 달라고 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훗날 흘려질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정결을 예표적으로 구한 것이다. 아직 예수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시대에 살았던 다윗이 그 실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죄가 깊은 차원에서 깨끗하게 씻겨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런데 이 깨끗함은 어떻게 받는가? 9절이 그 방법을 가르쳐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여기서 &amp;#39;자백(自白)&amp;#39;은 하나님 앞에 죄를 고하는 것을 가리킨다. &amp;#39;자백&amp;#39;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amp;#39;호모로게오(homologeō)&amp;#39;로, 문자 그대로 &amp;#39;같은 말을 한다&amp;#39;는 뜻이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시는 것을 나도 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내 행동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그것을 죄라고 부르시는 그 이름으로 나도 그것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lt;strong&gt;자백이 이루어질 때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 하나는 행위책에서 그 죄가 지워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속에 들어온 악한 영이 나가는 것&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마태복음 이후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귀신을 &amp;#39;더러운 영(unclean spirit)&amp;#39;이라고 부르신다(막 1:23). 귀신이 더럽다고 불리는 이유는, 귀신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이 사람 안에 들어와 있으면 그 사람의 몸도 더럽혀진다. 더러운 영이 나가야 그 사람이 깨끗해진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해 더러운 영이 나가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실제적인 영적 정결이다. 우리 몸이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성령이 온전히 거할 수 없고, 성령이 온전히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lt;strong&gt;다윗이 &amp;quot;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amp;quot;라고 구한 이유다.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의식이 상징하는 실재, 곧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악한 영이 쫓겨나고 몸이 깨끗해지는 것을 구한 것&lt;/strong&gt;이다. 다윗은 완전한 계시를 받지 못한 시대에 살았지만, 회개의 깊이가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지를 보았다. 단순히 죄책감을 해소하는 차원이 아니라, 몸 속에 자리 잡은 악한 영이 나가서 몸 자체가 깨끗해지는 차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회개는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하늘을 향하여서는 행위책에 기록된 죄가 지워지는 것이고, 내 몸을 향하여서는 악한 영이 나가서 몸이 깨끗해지는 것&lt;/strong&gt;이다. 이 두 방향의 정결이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amp;quot;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amp;quot;라고 선언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다. 더러운 영이 나간 깨끗한 몸에야 비로소 성령이 온전히 거하실 수 있다는 영적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다윗이 알지 못하였던 것, 사도 바울도 명시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을 이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알려 주셨다. &lt;strong&gt;더욱이 그것은 내 죄뿐만 아니라 조상이 물려준 악한 영들도 회개와 자백을 통해 내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 죄로 들어온 영들과 부모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영들을 함께 끊어 내는 것이 이 시대에 요구되는 온전한 회개&lt;/strong&gt;다. 다윗은 자신이 직접 지은 죄로 인한 영들만을 의식하였으나,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는 조상에게서 흘러내려온 악한 영들까지 포함하여 회개함으로 더 철저한 정결을 이룰 수 있다. 시편 51편 5절에서 다윗이 &amp;quot;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amp;quot;라고 고백한 것은 원죄의 보편성을 언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죄의 세력과 연결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깊이 있는 자기 인식이기도 하다.&amp;nbsp;다윗은 9절에서 다시 한번 &amp;quot;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amp;quot;라고 구한다. 행위책에서의 삭제와 악한 영의 축출,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질 때 회개가 완성되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살아 있는 동안 행위책을 백지 상태로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제 가장 실제적인 질문에 이르렀다. &lt;strong&gt;살아 있는 동안 이미 행위책에 기록된 채 있는 죄를 지울 수 있는가? 답은 &amp;#39;그렇다&amp;#39;&lt;/strong&gt;이다. 다윗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 &lt;strong&gt;그러나 중요한 단서가 있다.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죽으면 행위책은 영원히 고정된다. 천국의 도서관의 서가에 꽂혀 영원히 남는다. 죽은 이후에는 그 기록을 바꿀 방법이 없다. 그 행위책을 가지고 심판을 받는다. 천국의 낙원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심판이 이루어지고 상이 결정된다. 내가 변두리에 살 것인지, 집을 짓고 살 것인지, 얼마나 중심부에 가까이 살 것인지가 거기서 결정된다. 그때 행위책이 펼쳐지는 것이다. 반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진심으로 자백하고 회개하면 그 기록이 지워진다. 그리고 지워진 기록은 하나님도 보지 못하신다. 하얗게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회개를 했는데도 죄가 지워지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수백 번을 회개했는데도 여전히 그 죄가 남아 있는 것 같고, 귀신도 나가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회개가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회개 기도문을 읽은 것이다. 진심으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의지적 결단까지 동반한 회개만이 행위책의 기록을 지운다. 자백과 회개를 통해 행위책에 기록된 죄들이 점차적으로 지워져 가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9절의 말씀을 붙잡고 진심 어린 자백을 계속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을 생각해 보라.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후 열 달이 넘도록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셨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은 언제까지 지속하게 두셨는가! 어느 순간 하나님은 나단을 다시 보내어 &amp;quot;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amp;quot;라고 선언하게 하셨다. 그만하면 됐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지점까지 다윗을 내버려 두셨다가, 회개가 충분히 이루어졌을 때 사면을 선언하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해가 지기 전에 그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26절과 27절이 권고하는 대로, 날마다 쌓이는 죄의 기록을 그날 안에 지워 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삶이다. 수백 번 했는데 왜 안 지워지냐고 하나님께 따지지 말아야 한다. 다윗처럼 진심으로, 가슴을 찢으며, 의지적 결단까지 동반한 회개를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지워 주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또한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할 수 있다&lt;/strong&gt;. 다윗의 생명책에는 금빛이 빛나는 이름 위에 금 왕관이 얹혀 있었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신실한 삶이 천국에서의 영광과 직결됨을 보여 준다. 행위책에서 죄의 기록이 지워지고, 선한 행위의 기록이 쌓여 갈 때,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의 빛도 더욱 밝아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 천국에 있는 행위책에 내 기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은 행위책에 그가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들로 빼곡히 차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 아름다운 일들이 빼곡히 차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여 행위책에서 그 부분이 지워져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대로 기록으로 행위책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죄진 장면은 하얗게 지워지고, 선하게 행한 장면들만 가득한 행위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지향해야 할 목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lt;strong&gt;이러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구체적인 방법&lt;/strong&gt;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lt;strong&gt;그것은 하루를 시작할 때 그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이고, 하루를 마칠 때 해가 지기 전에 그날 지은 죄를 낱낱이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lt;/strong&gt;이다. 말로 범한 죄, 행동으로 범한 죄, 마음으로 범한 죄를 하나씩 떠올리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그 죄를 사하시고 행위책에서 지워 주실 것이다. 이것이 날마다 반복되어야 한다. 한 번의 거창한 회개 집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해가 지기 전에 그날의 장부를 청산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행위책은 점점 더 하얀 페이지들이 늘어 가고, 선하게 행한 기록들이 채워져 가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이 땅에서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기회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오늘의 죄를 오늘 자백하고, 오늘 회개하여 오늘 지워 버리는 것, 이것이 다윗이 가르쳐 준 지혜&lt;/strong&gt;다. 죽어서는 못 한다. 영원토록 그 기록이 그대로 남는다. 살아 있는 동안에만 지울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 천국에 들어갔을 때 부끄럽지 않은 자로 서기 위하여 지금 이 자리에서 내 회개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한 가지 더 생각해 보자. 행위책에는 죄의 기록만 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한 행위의 기록도 남는다. 나눔, 섬김, 헌신, 기도, 말씀 붙잡음, 이웃 사랑,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예배, 이 모든 것이 기록된다. 죄가 지워지는 동시에 선한 행위가 쌓여 갈 때, 그 행위책은 점점 더 하나님 앞에 드리기 부끄럽지 않은 책이 되어 간다. 그러므로 회개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죄를 지우는 것뿐만 아니라 선한 것을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적극적인 삶의 방향이다. 다윗이 참회의 시편 뿐만 아니라 감사의 시편, 찬양의 시편, 역사 시편을 함께 기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회개한 자리에는 반드시 새로운 헌신과 감사가 따라온다. 시편 51편 13절에서 다윗은 회개의 은혜를 받은 이후에 이렇게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3 그러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번 시간에 우리는 다윗의 참회의 시편을 통해 드러나는 회개의 세 가지 특징, 그 세 번째 특징인 &amp;#39;행위책에서 죄가 지워지는 회개&amp;#39;와 &amp;#39;악한 영이 나가서 깨끗해지는 회개&amp;#39;를 살펴보았다. 다윗은 시편 51편 1절에서 &amp;quot;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amp;quot;와 &amp;quot;나의 죄를 깨끗하게 하소서&amp;quot;라는 두 가지 간구를 통해, 회개가 단순한 정서적 해소가 아닌 하늘의 기록 체계와 관련된 실재적 사건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천국에는 생명책과 행위책이 있다. 생명책에는 거듭난 자의 이름이 기록되고, 행위책에는 이 땅에서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된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진심으로 자백하고 회개하면 행위책에 기록된 죄가 지워진다. 그것은 하나님도 보지 못하실 만큼 완전히 삭제되는 것이다. 이 은혜를 알았기에 다윗은 쉬지 않고 &amp;quot;지워 주소서, 깨끗하게 하소서&amp;quot;를 구하였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사실 완전한 계시가 임하기 천 년 전의 사람이다. 예수의 피가 흘려지기 전이었으므로 죄 씻음의 실체를 온전히 알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볼 수 있는 최대한의 영적 실재를 붙잡고 끝까지 회개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회개가 그를 천국에서 왕복을 입은 왕 같은 제사장의 모범으로 세웠다. 하나님은 다윗의 그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사면을 선언하셨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기억하셨으며, 시편이라는 불멸의 기록으로 후세에 그 진리를 전달하게 하셨다. 그것이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까지 닿아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을 사는 우리는 다윗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예수의 피가 흘려졌고(요일 1:7), 진심으로 자백하면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된다는 약속이 주어졌다(요일 1:9). 내 죄로 들어온 영들뿐만 아니라 조상에게서 내려온 악한 영들까지 회개를 통해 내보낼 수 있음을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알려 주셨다. 이 은혜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면서 형식적인 립싱크 회개에 머무는 것은 합당하지 아니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날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날의 죄를 자백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여, 행위책의 죄 부분이 하얗게 지워지고 악한 영이 쫓겨나 몸이 깨끗해지는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다윗이 시편 51편 10절에서 &amp;quot;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amp;quot;라고 구한 것처럼, 우리도 그 동일한 간구를 날마다 드려야 한다.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죄를 자백하고 악한 영이 나가야 비로소 성령이 새롭게 하시는 그 자리가 열린다.&amp;nbsp;&amp;nbsp;그리하여 천국에 들어갔을 때 부끄럽지 않은 행위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6월 9일(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천국에서&amp;nbsp;&lt;strong&gt;왕 같은 제사장&lt;/strong&gt;으로 인정받은 다윗의 영적 성취를 통해&amp;nbsp;&lt;strong&gt;진정한 회개의 본질&lt;/strong&gt;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이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수준을 넘어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amp;nbsp;&lt;strong&gt;회개의 진정성&lt;/strong&gt;과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amp;nbsp;&lt;strong&gt;의지적 결단&lt;/strong&gt;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합니다. 특히 천국에 존재하는&amp;nbsp;&lt;strong&gt;생명책과 행위책&lt;/strong&gt;의 존재를 강조하며, 회개란 곧 행위책에 기록된 죄가&amp;nbsp;&lt;strong&gt;하얗게 지워지고&lt;/strong&gt;&amp;nbsp;악한 영으로부터 심령이&amp;nbsp;&lt;strong&gt;깨끗해지는 단계&lt;/strong&gt;까지 나아가야 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들이 다윗처럼 살아 있을 때 철저히 자백함으로써, 심판의 날에 부끄러움이 없도록&amp;nbsp;&lt;strong&gt;죄의 기록을 말소&lt;/strong&gt;하는 삶을 살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76799ac097f5d7d7121b1c9f06fcab8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d1477e52b510ad1f39f4aaae54647de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7ed73be1bff2cc8f77ff19526a9f17f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8995294ee4ca6851af7690d82ffee49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ad603a1d7fbd8f77f22037be9f2503f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14a613ca577d9cbe9a7b3f0495dec31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48c7d2232c04c71234953f8f6ecab6a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9bc9e3a53ac4f73fe11c93c1153e783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e133d465b98556f57c73f7b8991b00f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08abbf77b35998ba967ba99729a8a83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07ff7788779fb30fa589eec3448a009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c74f81aad5190fb5d64c060412e74c3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a9aaa2b9e6544707d78573cbf9de20e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aade5218b3bc7227f401f9e3b791b28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8e6a6fb418781ce519d41d9537a8091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The_Repentance_Protocol.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ac889b63debcba04ec20662a708006c9.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d3e88f41f9ceb3aaa02d7a1526c99aa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fe7129053bf7c7001b827fe4d4922e3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8dd29c36e2b79dd0b4a0150eece6fa3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cd53a13681db22be1a00a9b8c1bca15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ee19d8bcc20960c805b42a965a7d273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a5accdbe191e1b4a016dcf750f6c0bb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18c69c884511374003c3ee5fe8c4a67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f8be5e4eb6979a7e9d6ae3f2fd027be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9f0604263e828362f8af2e3c8def53d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525c1323fed09fe09bf8f26562cfb2c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789acb9ec3d9213b47c4183afca152a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db68d41a846fd92c404385ff096ff05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05/256/5bafc17943dbed99da460255c2a3379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7)] David_s_Protocol.pdf_14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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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론(116)]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2)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4)(시51:1~19)_2026-06-07(주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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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08T17:24:14+09:00</published>
		<updated>2026-06-09T09:34:20+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6)]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2)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4)(시51:1~19)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R3lkAyHzK88 1. 들어가며 이번 기독론 연속 강해 116번째 시간이자 &#039;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39;으로서 스물두 번째 시간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구약의 기독론 강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다윗의 특징이 얼마나 독보적인가를 살펴왔다. 그 핵심 가운데 하나는 그...</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116)]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2)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4)(시51:1~19)&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R3lkAyHzK88&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R3lkAyHzK88?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번 기독론 연속 강해 116번째 시간이자 &amp;#39;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amp;#39;으로서 스물두 번째 시간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구약의 기독론 강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다윗의 특징이 얼마나 독보적인가를 살펴왔다. 그 핵심 가운데 하나는 그가 &amp;#39;진정 회개하는 자&amp;#39;였다는 사실이다. 이번 시간은 &amp;quot;회개를 하려면 다윗처럼 하라&amp;quot;는 주제를 다시 한번 깊이 들어가기를 원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는 신앙생활의 시작이자 끝이다. 회개 없이 구원도 없고, 회개 없이 성화도 없으며, 회개 없이 천국의 상급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회개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만연해 있다. 칼빈주의 계통에서는 &amp;quot;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amp;quot;이라는 교리를 앞세워 회개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이미 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것은 속죄와 자백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다. 속죄는 죄를 덮어 주는 것이고, 자백은 악한 영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 제거하는 것이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도, 이를 뭉뚱그려서 &amp;quot;회개하고 있으면, 네가 예수의 속죄를 안 믿는 것이야&amp;quot;라고 매도하는 것은 성경을 정확히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 다른 편에서는 회개와 자백, 후회와 회개를 구별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기도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가르쳐왔다. 회개 기도를 입술로 읽는다고 해서 악한 영이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모른 채 형식과 숫자 채우기에 급급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시편 안에 다윗의 회개시를 보존해 두신 것이다. 시편은 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은혜를 알고자 하는 자, 그리고 진정한 회개자로서 구원을 받고 저주를 몰아내고자 하는 자를 위한 영적 교과서다. 그래서 &lt;strong&gt;이 시간에는 다윗의 회개가 성경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진정한 회개란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lt;/strong&gt;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왜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의 필요성을 논하려면 먼저 인간의 실존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이 세상에 회개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분은 죄를 짓지 아니하셨고, 따라서 회개할 것이 없으셨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다 회개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구원과 심판의 문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온 인류에게 죄된 본성이 흘러들어왔고, 성경은 그것을 &amp;#39;뱀&amp;#39;의 침입으로 표현한다. 이 뱀, 곧 죄된 본성은 모든 인간의 속에 들어와 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흠 없고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내면에 이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의로운 행실로 인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욥이 보호받는 환경이 걷히자마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죄성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원망, 불평, 하나님께 대한 거역,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하나님께 대드는 모습이 쏟아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주님께서는 마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amp;quot;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amp;quot;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는 것이다(막 7:20-23). 즉, 인간의 내면에 더러운 것, 곧 죄된 본성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말씀이다. 이것들 하나하나에 영을 붙이면 다 악한 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를 통해 이 죄성을 날마다 덜어내지 않는다면, 악한 영은 점점 더 쌓여 가고 결국 우리의 영적 생명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막 7: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lt;/span&gt;&lt;/strong&gt;&lt;br /&gt; &amp;nbsp;&amp;nbsp;사실 인생에게 고난과 저주가 없다면 누구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방 땅에서 마음대로 살 때까지 그는 자신의 죄를 몰랐다. 이방 땅에 기근이 들어 굶주리게 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을 때 비로소 &amp;quot;이에 스스로 돌이켜&amp;quot;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를 움직여 호적 명령을 내리시고,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저주를 통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저주가 찾아올 때 원망할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한다. 그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집으로 데려오시는 길이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의 출발점이지, 회개의 종착점이 아니다. 예수를 믿은 그 순간부터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고후 5:1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lt;/p&gt; &lt;p&gt;&amp;nbsp;&amp;nbsp;&amp;quot;우리가&amp;quot;라는 단어에는 사도 바울 자신이 포함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행위 심판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첫 번째 심판, 곧 영벌의 심판은 면제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합당치 않게 생활한다면 죽는 날에 행위 심판이 다시 걸리게 된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lt;/p&gt; &lt;p&gt;&amp;nbsp;&amp;nbsp;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를 믿을 때 시작되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죽는 날에 결정된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믿음뿐만 아니라 그 믿음에서 나온 열매, 곧 행위를 보고 심판하신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회개가 필요하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는 &amp;#39;구원에 이르는 회개&amp;#39;이고, 둘째는 그 이후 일평생 지속해야 하는 &amp;#39;저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자백하는 회개&amp;#39;다. 이 두 번째 회개를 통해 우리는 점점 깨끗한 자가 되어 가고, 죄는 삭감되며, 충성도는 올라가고, 하늘나라에서 누릴 신분과 상급이 준비된다.&lt;/p&gt; &lt;p&gt;&amp;nbsp; 그러므로 회개를 빼고는 악한 영들이 나가지 않는다. 회개 없이 질병이 치유되거나 마음의 상처가 온전히 회복될 수 없다. 아무리 안수를 많이 받아도, 축사 명령을 많이 해도, 회개 없이는 변화가 없다. 오히려 회개 없이 안수를 받다 보면 성령의 역사는 희미해지고 악한 영은 더 축적되어 결국 완악한 자로 변해 가는 것이다. 회개는 신앙생활의 선택 과목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악한 영을 덜어내고, 날마다 충성도를 더해 가는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첫 마디를 이렇게 여셨다 (마 4:1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amp;quot;회개하라&amp;quot;는 동사 &amp;#39;메타노에오(&amp;mu;&amp;epsilon;&amp;tau;&amp;alpha;&amp;nu;&amp;omicron;έ&amp;omega;)&amp;#39;는 현재 명령형이다. 헬라어 문법에서 과거 명령형은 단호하게 한 번 하라는 것이고, 현재 명령형은 계속해서 꾸준히 하라는 의미다. 따라서 정확히 번역하면 &amp;quot;회개하고 있어라&amp;quot;, 곧 &amp;quot;지속적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라&amp;quot;는 것이다. 예수님의 첫 선포가 바로 이 말씀이었다. 회개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방식이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출발한 다음, 일평생 회개 생활을 통해 죄를 점차 없애 가고, 그 자리에 충성이 채워지는 과정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래서 신앙생활의 방정식은 이것이다.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은 덜어내고, 충성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더해 가는 것이다. 회개가 줄면 충성도가 올라갈 수 없고, 충성이 올라가지 않으면 죄는 점점 더 쌓인다. 그러니 회개와 충성은 서로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질 때 신앙생활은 성공한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면서도, 그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겠다고 결단한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충성의 시작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후회(메타멜로마이)와 회개(메타노에오)는 어떻게 다른가?&lt;/p&gt; &lt;p&gt;&amp;nbsp;&amp;nbsp;회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lt;strong&gt;회개와 후회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해야&lt;/strong&gt; 한다. 이 두 개념은 성경 원어에서 전혀 다른 단어로 표현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구약 히브리어에서 회개에 해당하는 단어&lt;/strong&gt;는 크게 두 가지다. &lt;strong&gt;하나는 &amp;#39;나함(נָחַם)&amp;#39;&lt;/strong&gt;이고, &lt;strong&gt;다른 하나는 &amp;#39;슈브(שׁוּב)&amp;#39;&lt;/strong&gt;다. &amp;#39;나함&amp;#39;은 &amp;#39;뉘우치다&amp;#39;, &amp;#39;후회하다&amp;#39;는 의미다. 욥기에서 욥이 &amp;quot;내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amp;quot;라고 말할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나함이다. 욥의 회개는 나함에 해당하는 것으로, 온전한 슈브에 이르지 못한 회개에 해당한다. 반면 &amp;#39;슈브&amp;#39;는 &amp;#39;돌이키다&amp;#39;, &amp;#39;돌아가다&amp;#39;, &amp;#39;유턴하다&amp;#39;는 의미로, 완전한 방향 전환을 가리킨다. 죄를 짓다가 죄를 끊어 버리고 하나님께로 실제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슈브다.&amp;nbsp;따라서 회개한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동일한 죄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amp;#39;슈브&amp;#39;로서의 회개가 아니다. 회개를 하고 있는데도 혈기와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 역시 슈브로서의 회개를 한 것이 아니다. 천 번을 회개해도 죄성이 없어지지 않고 죄의 유혹이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닌 것이다. 회개했다는 것은 죄의 유혹이 사라지고, 죄의 습성이 끊어지고, 실제로 방향이 바뀌었다는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amp;#39;슈브&amp;#39;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strong&gt;&amp;nbsp;신약의 헬라어&lt;/strong&gt;에서도 이러한 구별은 그대로 이어진다. &lt;strong&gt;&amp;#39;메타노에오(&amp;mu;&amp;epsilon;&amp;tau;&amp;alpha;&amp;nu;&amp;omicron;έ&amp;omega;)&amp;#39;는 진정한 회개, 곧 슈브에 해당하는 단어&lt;/strong&gt;다. 그러나 &lt;strong&gt;&amp;#39;메타멜로마이(&amp;mu;&amp;epsilon;&amp;tau;&amp;alpha;&amp;mu;έ&amp;lambda;&amp;omicron;&amp;mu;&amp;alpha;&amp;iota;)&amp;#39;는 뉘우침, 후회, 양심의 가책을 의미하는 단&lt;/strong&gt;어다. 나함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바로 이 메타멜로마이가 된다. 마태복음 27장 3절에서 5절은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 준다 (마 27:3-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27:3-5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 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져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amp;quot;스스로 뉘우쳐&amp;quot;라는 표현이 바로 &amp;#39;메타멜로마이&amp;#39;에 해당한다. 가룟 유다는 분명히 뉘우쳤다. &amp;quot;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amp;quot;라고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았고,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며, 은 삼십 개를 돌려주려 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었다. 그가 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 주님께 직접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처분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뉘우침은 있었으나 돌이킴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옥으로 갔다.&amp;nbsp;고린도후서 7장 10절은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대조한다 (고후 7:1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amp;quot;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amp;quot;라는 표현에서 &amp;quot;구원에 이르는 회개&amp;quot;는 &amp;#39;메타노이아(&amp;mu;&amp;epsilon;&amp;tau;ά&amp;nu;&amp;omicron;&amp;iota;&amp;alpha;)&amp;#39;, 곧 메타노에오의 명사형이다. 그리고 &amp;quot;후회할 것이 없는&amp;quot;은 바로 &amp;#39;메타멜로마이&amp;#39;를 부정하는 표현이다. 고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나중에 다시 돌아보아도 후회하거나 뒤집을 것이 없는, 완전하고 온전한 돌이킴을 의미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amp;#39;후회&amp;#39;는 회개의 일부분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절대 아니 된다. 반드시 의지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주님의 처우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amp;#39;메타노에오&amp;#39;가 되고, &amp;#39;슈브&amp;#39;가 된다. 뉘우침에서 멈추는 것은 회개의 반쪽에 불과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수없이 회개를 반복해도 삶이 바뀌지 않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회개하고 또 회개해도 동일한 죄를 반복하는 이유는, 그 회개가 메타멜로마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슈브는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습성이 바뀌고, 삶의 패턴이 바뀌고, 죄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내면의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슈브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신약의 &amp;#39;메타노에오&amp;#39;라는 &amp;#39;회개하다&amp;#39;는 단어는 구약의 &amp;#39;슈브&amp;#39;로 번역하는 것이 그 뜻을 가장 잘 전달한다. 두 단어 모두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핵심으로 삼기 때문이다. &amp;#39;메타노에오&amp;#39;를 직역하면 &amp;quot;생각(&amp;nu;&amp;omicron;έ&amp;omega;)을 바꾸다(&amp;mu;&amp;epsilon;&amp;tau;ά)&amp;quot;이지만, 그 &amp;#39;생각을 바꿈&amp;#39;이 실제 삶의 방향 전환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완전한 회개가 된다. 생각만 바뀌고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메타멜로마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lt;/p&gt; &lt;p&gt;&amp;nbsp;&lt;strong&gt;&amp;nbsp;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lt;/strong&gt;할 때, 우리는 종종 베드로가 더 나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회개가 상달되었고 그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베드로도 결코 가룟 유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한 직후 그는 &amp;quot;주여, 십자가에서 죽지 마옵소서&amp;quot;라며 예수님의 구속 사역 자체를 정면으로 거부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베었으며,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에는 &amp;quot;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amp;quot;면서 자신의 맹세를 저버리고 세 번씩이나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했다. 이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과 본질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lt;strong&gt;베드로와 가룟 유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뉘우침 이후의 행동&lt;/strong&gt;이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마다 통곡했다. 그 뉘우침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뉘우침을 행동으로 이어갔다. 그때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amp;quot;갈릴리에서 보자&amp;quot;는 메시지를 남기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말씀을 붙들고 갈릴리로 갔다.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을 물으셨다 (요 21:15-1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21:15-17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lt;/p&gt; &lt;p&gt;&amp;nbsp;&amp;nbsp;주님께서는 그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세 번의 고백으로 씻어 주셨다. &amp;quot;내 어린 양을 먹이라&amp;quot;, &amp;quot;내 양을 치라&amp;quot;, &amp;quot;내 양을 먹이라&amp;quot; 이것이 주님의 처우였다. 베드로는 그 처우를 받아들였다. &lt;strong&gt;베드로는 주님의 용서를 수납하고, 주님의 사명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걸었다. 이것이 슈브, 곧 참된 회개&lt;/strong&gt;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 &lt;strong&gt;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책감 앞에서 주님께로 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손으로 자신의 죄값을 치르려 했다&lt;/strong&gt;. 대제사장들에게 은을 돌려주고, 성소에 던져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것은 주님의 속죄를 거부하는 행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바로 가룟 유다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였다. 주님께서 그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는데, 유다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자기의 죄값을 자기가 치르겠다고 한 것인데, 죄의 값은 사망이다 (롬 6:23). 그 사망의 값을 자기가 치렀으니, 심판 뒤에 남는 것은 영원한 형벌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lt;strong&gt; 회개의 세 단계가 모두 완성되어야 진정한 회개가 되는 것이고 그래야 죄용서를 받는다&lt;/strong&gt;는 것이다. 즉 회개에도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요소가 모두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라는 것은 지정의를 포함하는 회개여야 함을 알 수 있다. 그 요소로서 &lt;strong&gt;첫째는 지적 회개, 곧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lt;/strong&gt;이 필요하다. &lt;strong&gt;둘째는 감정적 회개, 곧 그 죄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통탄하는 것&lt;/strong&gt;이 필요하다. &lt;strong&gt;셋째는 의지적 회개, 곧 주님께로 돌아가서 주님의 처우를 받아들이는 것&lt;/strong&gt;이 필요하다. 가룟 유다에게는 지적 회개와 감정적 회개는 있었으나 의지적 회개가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세 가지가 모두 있었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나아가 베드로는 주님이 자기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붙들었다. 주님께서 그에게 &amp;quot;갈릴리에서 보자&amp;quot;고 하셨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주님은 여전히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소망을 붙들고 갈릴리로 갔다. &lt;strong&gt;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주님께로 나아간 것, 그것이 의지적 회개다. 유다는 자신이 회복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자기의 죄값을 자기가 치르는 길을 택했다. 그것은 주님의 속죄와 용서를 부인하는 것&lt;/strong&gt;이다. 이것이 회개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어떠한 죄도 씻을 수 있다. 간음죄도, 살인죄도, 배반의 죄도, 저주의 죄도, 그 어떤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 남아 있을 수 것은 없다. 이 문제는 죄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가 내 속에 그분의 속죄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죄값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속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교만함이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렇게 한 것이다.&amp;nbsp;결국 회개와 후회를 가르는 마지막 선은,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형식적 회개와 진정성 있는 회개는 어떻게 구별되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보시는 회개의 핵심은 역시 형식이라기보다는 진정성이다. 다윗은 시편 51편 16절과 17절에서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노래했다 (시 51:16-1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lt;/p&gt; &lt;p&gt;&amp;nbsp;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공식적인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amp;#39;제사&amp;#39;제도다. 그런데 &lt;strong&gt;다윗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제사보다 더 원하시는 것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amp;#39;상하고 통회하는 마음&amp;#39;이라는 것이다. 형식을 갖춘 제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마음&lt;/strong&gt;이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러한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다윗이 어마어마한 살인죄와 간음죄를 용서받게 된 비밀 중의 비밀이다.&lt;/p&gt; &lt;p&gt;&amp;nbsp; 그리고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지만, 다윗의 죄는 결코 가벼은 것이 아니었다. 레위기 20장 10절에 의하면 간음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기 때문이다 (레 20:10).&amp;nbsp;&amp;nbsp;&amp;nbsp;또한 레위기 24장 17절에 의하면 사람을 죽인 살인죄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레 24:1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레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레 24:17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은 이 두 가지 죄를 모두 다 저질렀다. 다른 사람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간음죄와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한 살인죄를 저질렀다. 여기에 탐심죄와 도둑질죄까지 더한다면, 다윗의 죄목은 레위기의 기준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죄들을 모두 다 용서하셨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다윗의 회개에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 그런데 성경에는 이와는 대조되는 인물이 있으니 그는 바로 &amp;#39;사울 왕&amp;#39;이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죄를 저지른 살인죄나 간음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용서해 주셨다는 기록이 없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사울의 회개에는 진정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회개는 형식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15장 24절에서 26절을 보라. 그러면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상 15:24-26).&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15:24-26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lt;/p&gt; &lt;p&gt;&amp;nbsp;&amp;nbsp;사울은 &amp;quot;내가 범죄하였나이다&amp;quot;라고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그가 진정 회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이유가 &amp;quot;백성을 두려워하여&amp;quot;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울 왕에게 회개의 이유는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것에 있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무엘에게 &amp;quot;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amp;quot;라고 요청했다. 겉으로는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장로들 앞에서 왕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사를 드려야 공식 행사가 마무리되는데, 사무엘이 자리를 떠나 버리면 왕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것은 진정성 없는 형식적 회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lt;/p&gt; &lt;p&gt;&amp;nbsp; 그런데 다윗이 처해 있던 상황은 정반대였다. 시편 51편 3절과 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시 51:3-4).&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3-4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amp;quot;내가 주께만 범죄하여&amp;quot;라는 고백은 요셉의 고백을 연상시킨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amp;quot;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amp;quot;라고 했다. 다윗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눈앞에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모든 시선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회개에는 백성의 시선, 신하들의 눈치, 왕으로서의 체면, 이런 것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아뢸 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lt;strong&gt;이 진정성의 차이가 왜 이토록 중요한가&lt;/strong&gt;?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아무리 화려한 회개의 언어를 구사해도, 아무리 성대한 제사를 드려도, 그 마음의 중심이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지 하나님을 향해 있는지를 하나님은 즉시 아신다. 그래서 형식적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효력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진정한 회개는 오직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완전히 쏟아질 때 이루어진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사울 왕의 회개가 용납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gt;&amp;nbsp;&amp;nbsp;앞 장에서 사울의 형식적 회개를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사울의 회개를 용납하지 않으셨는지를 더 깊이 파고들어 보자.&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사울의 근본적인 문제는 &amp;#39;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다&amp;#39;는 것&lt;/strong&gt;이다. 그는 &amp;quot;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나이다&amp;quot;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고백이자 동시에 변명이었다.&lt;strong&gt; 진정한 회개에는 변명이 없다. 진정한 회개는 오직 &amp;quot;내가 잘못했다&amp;quot;는 것뿐이다&lt;/strong&gt;. 그런데 사울은 &amp;quot;백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amp;quot;는 논리를 회개 안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희석시키는 행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더 나아가 사울은 회개한 이후에도 체면을 앞세웠다. 사무엘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 사울이 한 말이 무엇이었는가? 장로들과 백성 앞에서 자신을 높여 달라는 요청이었다. 옷자락이라도 잡으려 했다. 체면 때문에 회개를 흥정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만약 사울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장로들과 백성이 있는 그 앞에서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했어야&lt;/strong&gt; 했다. 왕으로서 더 무거운 책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 백성보다 천 배는 더 깊이 회개해야 했다. 지도자는 많이 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도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장면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반복된다. 형식적으로는 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면을 지키려 하고,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회개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그런 회개를 받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입술이 아니라 마음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사울은 불순종의 죄를 저질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다윗의 살인죄, 간음죄보다 가볍게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더 무거운 죄는 용서하시고 사울의 불순종은 용서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무게보다 회개의 진정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기록된 말씀이 그것을 선명하게 표현한다 (삼상 15:2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형식적인 제사보다 진정한 순종이 낫고, 외적인 의식보다 내면의 진실이 낫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회개 역시 마찬가지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그럴듯하게 회개의 형식을 갖추어도, 마음이 진정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지 않으신다&lt;/strong&gt;. 그래서 다윗의 시편 51편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 주기 위해서다. 사울의 비극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보다 백성의 시선 앞에 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이 그의 모든 실패의 근원이었다. 반면 다윗은 &amp;quot;내가 주께만 범죄하여&amp;quot;라고 했다. 모든 시선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었다. 이 차이가 용서받은 왕과 버림받은 왕을 갈랐다. 우리가 받아야 할 도전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회개는 사울의 회개인가, 아니면 다윗의 회개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신약에서 회개의 모범 사례들은 대부분 누가복음에 집중되어 있다. 누가복음 5장의 베드로 회개,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회개,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의 회개,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의 회개, 누가복음 23장의 오른편 강도의 회개가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 회개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lt;strong&gt;하나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lt;/strong&gt;는 것이다. 세리는 &amp;quot;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amp;quot;(눅 18:13) 자기 가슴을 치며 &amp;quot;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amp;quot;라고 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그 즉시 자신의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결단했다. 오른편 강도는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amp;quot;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amp;quot;(눅 23:41)라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로 돌아갔다. 이들 모두에게 형식은 달랐지만 진정성은 동일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다윗은 지&amp;middot;정&amp;middot;의(知情意) 입각한 슈브(שׁוּב)를 어떻게 실행했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회개가 진정한 슈브, 곧 완전한 돌이킴이었다는 사실은 지&amp;middot;정&amp;middot;의 세 차원 모두에서 확인&lt;/strong&gt;된다. &lt;strong&gt;진정한 회개는 지적 차원, 감정적 차원, 의지적 차원이 모두 통합되어야&lt;/strong&gt;&amp;nbsp;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던 회개임을 두 번째로 입증해준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 지적 측면의 회개&lt;/strong&gt;다. 다윗은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를 명확하게 알았다. 시편 51편 3절은 &amp;quot;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amp;quot;라고 고백한다 (시 5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는 열 달 동안 나단 선지자가 오기 전까지 죄를 자복하지는 못했지만, 그 죄가 무엇인지는 매 순간 의식하고 있었다. 십계명으로 보면 그는 6계명(살인하지 말라), 7계명(간음하지 말라), 8계명(도둑질하지 말라), 10계명(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을 어겼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죄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회개하려면 먼저 무엇이 죄인지를 알아야 한다. 십계명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서 회개를 논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일부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율법에서 자유하니 십계명을 알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마지막 날 천국에서는 모세가 행위 책을 들고 와서 십계명에 따라 죄를 판단한다. 십계명을 몰라서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면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을 안 지켰어도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지만, 십계명이 지켜지는 삶이 되어야 천국에 간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율법의 도덕법은 하나도 폐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무엇이 죄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지적 회개의 토대가 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감정적 측면의 회개&lt;/strong&gt;다. 다윗의 감정적 회개는 시편 6편 6절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시 6:6).&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셨다고 했다. 이것은 열 달에 걸친 기간의 최종적인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다윗을 떠나셨기 때문에 그 영적 공허함과 죄책감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겠는가! 사울 왕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셨다는 사실을 그렇게 아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나신 열 달은 죽음보다 더한 시간이었다. 다윗은 그 10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신뢰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뼈아프게 통회하며 보냈을 것이다. 사울왕이 잘못해서 패하고 자신을 왕으로 세워 주셨는데, 자기도 똑같이 권력을 남용했다는 자괴감이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나단 선지자가 왔을 때 다윗이 그토록 감사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32편 3절에서 5절은 그 고통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시 32:3-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2:3-5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lt;/p&gt; &lt;p&gt;&amp;nbsp;&amp;nbsp;뼈가 쇠하였다, 진액이 빠져 마름같이 되었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죄의 무게 아래 육체까지 피폐해질 정도로 회개의 고통이 극심했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자복했더니 하나님께서 죄악을 사하셨다고 했다. 나단 선지자가 오던 날, 다윗이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삼하 12:13) 그 열 달의 내면적 통회가 이미 무르익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신 것은 다윗의 마음이 준비되었다는 신호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도 왕의 죄를 사하셨나니 왕이 죽지 아니하려니와&lt;/p&gt; &lt;p&gt;&amp;nbsp; 또한 감정적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신구약을 통틀어 강조된다. 구약에서 요엘 선지자가 &amp;quot;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라&amp;quot;고 한 것이나, 다윗이 많은 시간을 눈물로 침상을 적신 것이나, 누가복음에서 베드로가 닭 울 소리를 듣고 통곡한 것이 모두 감정적 회개의 사례들이다. 진정한 죄의 인식은 반드시 가슴을 찢는 아픔을 동반한다. 눈물 없는 회개, 통회 없는 자백, 아픔 없는 반성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회개라 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감정적 표현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아픔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슈브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 의지적 측면의 회개&lt;/strong&gt;다. 지적으로 죄를 알고 감정적으로 통회한 것에서 멈추지 않고, 다윗은 의지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처우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amp;#39;슈브&amp;#39;(돌이킴)다. 요엘서 2장 12절과 13절은 이 세 차원을 모두 담은 회개를 이렇게 표현한다 (욜 2:12-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욜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lt;/p&gt; &lt;p&gt;&amp;nbsp;&amp;nbsp;&amp;quot;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amp;quot;라는 표현은 이것은 감정적 측면의 회개를 가리킨다. 그리고 &amp;quot;마음을 찢고&amp;quot;라는 표현은 회개의 진정성에 관한 표현이다. 그리고 &amp;quot;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amp;quot;는 표현은 의지적 회개, 곧 슈브를 가리킨다. 옷을 찢는 것은 외적 형식이고, 마음을 찢는 것은 내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옷이 아니라 마음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의지적으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처우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시편 51편 14절과 15절은 그 의지적 헌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시 51:14-1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4-15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여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는 이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겠다고 결단했다. 시편 143편 10절에서도 이 의지적 헌신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시 143:1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 그것이 의지적 회개의 완성이다.&lt;/p&gt; &lt;p&gt;&amp;nbsp; 이처럼 지&amp;middot;정&amp;middot;의 삼중 구조가 통합될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완성된다. 지적으로만 회개하면 관념에 머물고, 감정적으로만 회개하면 감상주의가 되며, 의지적으로만 회개하면 율법주의가 된다. 세 가지가 하나로 통합될 때 참된 돌이킴이 일어나고, 악한 영은 물러가며, 하나님의 영이 그 자리를 채우신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죄값을 치르려 했다. 하나님께서 가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단했다. 이것이 지&amp;middot;정&amp;middot;의 입각한 슈브인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다윗이 바세바 사건 이후 보여 준 진정한 돌이킴의 증거는 무엇인가?&lt;/p&gt; &lt;p&gt;&amp;nbsp;&amp;nbsp;진정한 회개의 증거는 삶이 실제로 바뀌는 것이다. 말로만 뉘우치고 또다시 같은 죄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 놀라운 일을 보여 주었다. 그는 두 번 다시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열왕기상 1장 1절에서 4절은 다윗의 노년을 이렇게 묘사한다 (왕상 1:1-4).&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1-4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게 하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왕을 받들어 모셨으나 왕이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lt;/p&gt; &lt;p&gt;&amp;nbsp; 늙은 다윗을 위해 신하들이 젊고 아름다운 처녀 아비삭을 데려왔다. 노년에 체온을 따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노쇠함이 아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의 다윗이라면 상상도 못 할 절제였다. 그는 회개 이후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었다. 그 절제가 죽는 날까지 유지되었다. 이것이 슈브의 증거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 장수들을 함부로 해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압살롬의 반란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으며 돌을 던져도, 아비새가 &amp;quot;저 죽은 개를 죽여버리겠습니다&amp;quot;라고 했을 때 다윗은 &amp;quot;그를 죽이지 말라&amp;quot;고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책망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밧세바 사건 이후의 다윗이다. 회개한 자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난과 수치를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안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회개한 다윗이라도 죄의 결과는 지불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통해 선언하셨다 (삼하 12:1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lt;/p&gt; &lt;p&gt;&amp;nbsp;&amp;nbsp;그 말씀대로 다윗은 넷의 배로 죄값을 치러야 했다. 첫째, 밧세바에게서 낳은 첫 번째 아들이 죽었다. 둘째, 셋째 아들 압살롬이 첫째 아들 암논을 죽였다. 셋째, 요압 장군이 셋째 아들 압살롬을 죽였다. 넷째,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네 명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충성스러운 장수들도 연이어 죽임을 당했다. 우리아 한 명을 죽인 것이 여러 명의 장수를 잃게 되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지도자에게 더 엄중한 죄값을 물으신다. 이 땅에서 징계를 받아야 천국에서의 징계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하신다 (눅 12:48).&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눅 12: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받을 것이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은 그 모든 징계를 받아들이며 끝까지 하나님 앞에 섰다. 이것이 다윗의 회개의 증거다. 회개 이후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징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진리를 시편으로 남겨 후대에 가르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윗의 회개가 진정한 슈브였음을 증거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는 또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죄를 자백하지 않고 품고 있으면, 그 죄에 속한 악한 영이 우리 안에 남아 있게 된다. 악한 영이 있는 한 치유는 온전하지 못하고, 회복은 불완전하며, 충성의 열매는 맺히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명하신 것이다. 회개는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죄를 비워 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와 충성이 채워지도록 하는 것이다. 다윗은 그것을 평생 실천했고, 그 결과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그의 시편은 온 세계 성도들의 영적 양식이 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는 &lt;strong&gt;다윗의 시편을 단순한 찬송시로 읽어서는 안 된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의 일지이고, 시편 32편은 회개 전 고통의 기록이며, 시편 6편은 회개하지 못하던 10개월의 울부짖음이다. 그리고 시편 143편은 회개 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결단의 시&lt;/strong&gt;다. 이 시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전 과정을 가르쳐 주신다. 죄의 인식에서 시작하여 통회하는 가슴을 거쳐, 의지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다시는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는 것까지가 온전한 회개다. 다윗은 그 모든 과정을 살아냈고, 그것을 시편에 남겼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시편들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존하신 것은 장차 오실 참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회개의 원형(原型)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윗의 아름다움과 멋짐은 자신의 죄를 회개한 다음에 두 번 다시 동일한 범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amp;quot;내 마음에 맞는 사람&amp;quot;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amp;quot;회개를 배우고 싶은가? 다윗을 보라. 다윗처럼 회개하라.&amp;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gt;&amp;nbsp;&amp;nbsp;지금까지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이 어떻게 회개했으며, 그 회개가 왜 진정한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제외한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해 죄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일평생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후회(메타멜로마이)는 회개(메타노에오)의 시작일 수 있으나, 거기서 멈추면 가룟 유다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지적으로 죄를 알고, 감정적으로 통회하며,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슈브(שׁוּב)의 삼중 구조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완성되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제사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신다. 사울 왕처럼 체면과 위신을 앞세워 형식만 갖추는 회개는 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다윗처럼 수 개월을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진심으로 통회하는 자에게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용서를 선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회개는 죄를 지은 이후에 하는 의식이 아니라, 죄된 본성과 맞서 싸우며 날마다 악한 영을 덜어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남의 아내를 두 번 다시 탐하지 않았듯이,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삶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 없이는 악한 영이 나가지 않고, 악한 영이 나가지 않으면 질병의 치유도, 마음의 상처의 회복도, 참된 성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의 신앙생활은 곧 회개와 충성의 삶이어야 한다. 죄는 삭감되어 가고 충성도는 올라가며, 날마다 하늘에서 누릴 신분과 상급이 준비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약의 회개는 구약의 슈브를 그 뿌리로 삼는다. 예수님께서 &amp;quot;회개하고 있어라&amp;quot;(마 4:17)고 현재 명령형으로 말씀하신 것은, 이 슈브가 일생에 걸쳐 지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베드로, 삭개오, 오른편 강도, 세리, 돌아온 탕자, 이 모든 신약의 회개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진정한 회개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회개가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이유가 있다.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회개가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어떻게 받으시는지를 다윗의 삶을 통해 배우라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칼빈주의의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에 안주하여 회개를 소홀히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회개하면 예수의 속죄를 안 믿는 것이냐는 공격에 굴복해서도 안 된다. 속죄와 자백은 다르고, 구원의 칭의와 성화의 과정은 다르기 때문이다. 다윗의 회개를 배우고, 다윗처럼 지&amp;middot;정&amp;middot;의 입각한 슈브를 실천하여, 하나님 앞에 날마다 진정으로 돌이키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08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amp;nbsp;&lt;strong&gt;진정한 회개의 본질&lt;/strong&gt;을 다윗과 가룟 유다, 사울 왕의 사례를 대조하며 심도 있게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구원이 단회적 사건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amp;nbsp;&lt;strong&gt;죄성을 씻어내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amp;#39;슈브(Shuv)&amp;#39;의 과정&lt;/strong&gt;이 동반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특히 다윗이 용서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후회를 넘어&amp;nbsp;&lt;strong&gt;지정의(知情意)가 포함된 전인격적 회개&lt;/strong&gt;와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는&amp;nbsp;&lt;strong&gt;삶의 결단&lt;/strong&gt;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신앙생활의 성패가 입술의 고백이 아닌,&amp;nbsp;&lt;strong&gt;상하고 통회하는 심령&lt;/strong&gt;으로 악한 영을 털어내고 하나님의 처분을 겸허히 받아들이는&amp;nbsp;&lt;strong&gt;회개의 진정성&lt;/strong&gt;에 달려 있음을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인포그래픽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f3cfb0ee8f7f89eb5db2cbf3ce3466f1.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0323bbe66ce4d44834e461a21e53bfa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ba8f52bda0d9b4b688cd9237c9cf5b2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b554c2df410ffa36fe252997c112e33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6df5204a322984f68bc4e64bc1a03c4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482946f81f2b398383f0d60d38870e4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3a3d6d7a5661cbfb0e8425fb554a7f3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ddca4a054bde0c428333ef7bc3ddf25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aad146325efc2acf398d9d81271cf72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eca529541fbcb864d266896b4968bca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9f0ffd812220fedc9c2a55cb0757ebd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c5da1e509569efc964cc83d8da95bca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7d5fabffb150969ae3e3b199ea26596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a4d85698c8e31ca170fbd91acc20efa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e7f30cafbcd0a9358b772d13b2e9234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Blueprint_for_True_Repentance.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27fa02b875f01bca32d5b2b8a73ce781.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e8dd208c99b2ba6ce38761613701c10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c5c3afc1f2d053c955120cd56267aaf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8c48133e79e089bf1f45853a542c7dd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68ccd85c22cd4289f66093be637b956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69768d7b5766c2588e69ec828f6f5bf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7a2e6bf30072f43243a225edaefeba2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b88686807a65350c64bb1f167f3b1e2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3faee9ff6852686b998b98b92584b9e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b0e5eadc96ca81a79137abc2f71598b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6)] Repentance_Forensics_(2).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37/256/a3dec6a16541d2bfd222a8eadcd5d68e.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15)]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1) 그는 회개하는 자였다(03) (시편32:1~11)_2026-06-07(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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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07T21:20:45+09:00</published>
		<updated>2026-06-08T21:33:11+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2026-06-07(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기독론(115)]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1) 그는 회개하는 자였다(03)(시편32:1~1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nxSJCvdRCl8 1. 들어가며 &#039;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39;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다윗이다. 그런데 다윗의 일대기를 살펴보니, 그에게는 어떤 특징들이 있었다. 첫째,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서 왕으로 이땅에 보내어진 자였다...</summary>
	<content type="html">&lt;p&gt;2026-06-07(일) 주일오후찬양예배&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15)]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1) 그는 회개하는 자였다(03)(시편32:1~11)&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nxSJCvdRCl8&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nxSJCvdRCl8?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div style=&quot;margin:0;padding:0;font-family:&#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font-size:15px;line-height:1.8;&quot;&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amp;#39;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amp;#39;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다윗이다. 그런데 다윗의 일대기를 살펴보니, 그에게는 어떤 특징들이 있었다. 첫째,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서 왕으로 이땅에 보내어진 자였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왕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과 은사(영 분별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도 같이 주셨다는 것이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는 자였다는 것이다. 넷째, 그는 메시야에 대한 최고의 예언자로서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알린 자였다는 것이다. 다섯째, 그는 진실로 회개하는 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는 다윗이 진정 자신의 죄를 시인한 후에 즉시 죄사함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았다. 사실 그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이후부터 열 달 동안 엄청난 육체적&amp;middot;영적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 그가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면 범죄 후에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것이 맞다. 그래서 범죄후 열 달동안 다윗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가 쓴 참회시의 하나인 시편 6편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번 시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윗이 어떻게 회개했기에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해 주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다윗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사울왕은 자기 잘못을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왕위를 빼앗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고 고백하자 나단 선지자가 즉시 &amp;quot;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amp;quot;라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다윗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열 달 동안 처절한 고통의 세월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무엘하는 그 과정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시편은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 열 달의 과정을 쭉 전부 다 보고 계셨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그 문제를 좀 더 깊이 파고든다. 다윗의 회개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특징을 살펴보되,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그의 회개에 대한 진정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그가 했던 회개의 진정성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구약 성경에서 &amp;#39;회개&amp;#39;라는 단어의 뿌리와 의미를 짚어볼 것이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회개의 대명사인 욥의 회개와 다윗의 회개를 비교해 가면서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 회개는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회개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실천해야만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떠나보낼 수 있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 없는 신앙생활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즉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해도, 내 속의 죄가 처리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회개에 대한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드리고 있는 회개가 과연 진정한 회개인지를 점검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하나님이 사울은 용서하지 않으시고 다윗은 용서하신 것이 불공평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오해를 어떻게 풀 수 있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무엘하 11장과 12장만에 나오는 내용만 읽으면, 다윗의 용서가 쉽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나단이 &amp;quot;당신이 그 사람이라&amp;quot;고 하했을 때에 다윗이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고 고백했는데, 그 즉시 나단이 &amp;quot;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amp;quot;라고 응답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다윗의 한 마디 고백에 즉시 용서가 그에게 임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사울왕의 경우를 보면 사뭇 다르다. 사울도 사무엘에게로부터 책망을 들었을 때에 즉시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다. &amp;quot;내가 범죄하였나이다&amp;quot;(삼상 15:24)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울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그에게서 왕위를 빼앗으신다. 이것을 보면 두 사람의 처우가 너무 다르게 느껴진다. 사울은 안 되고 다윗은 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것은 &lt;strong&gt;회개의 진정성에 있어서 두 사람이 차이를 보인다&lt;/strong&gt;는 것이다. 사울의 고백에는 진정한 통회를 찾아보기 어렵다. 사울이 &amp;quot;내가 범죄하였나이다&amp;quot;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정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통회가 아니었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고백이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듯이(삼상 16:7), 하나님은 사울의 입술이 아닌 그 마음을 보시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그가 &amp;quot;내가 범죄하였나이다&amp;quot;라고 했지만 그 뒤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amp;quot;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amp;quot;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백성이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사무엘에게 &amp;quot;청하건대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amp;quot;여 주십사(삼상 15:30)고 부탁한다. 자기 체면을 세워 달라는 요구인 것이다. 고로 죄에 대해 책망을 듣고 있었던 그 순간에도 그의 관심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백성 앞에서의 체면이 중요했다. 이것이 그가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 다윗의 회개는 이와 달랐다. 사무엘하의 기록만 보면 그가 단 한 마디로 회개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니다. 다윗이 직접 썼다고 알려진 시편 5편들 곧 시편 6편과 32편, 38편과 51편 그리고 143편을 통해 보면 그 열 달 동안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고통받으면서 통회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뼈가 흔들리고, 몸이 수척해지고,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기도의 막힘 속에서 그는 무려 열 달을 보냈다. 고로 그것은 이미 깊은 회개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더 나아가, 두 사람이 지은 죄의 본질도 다르다&lt;/strong&gt;. 사울의 죄는 하나님을 직접 거역한 것이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좋은 짐승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의 눈치를 더 중시한 것이다. 반면 다윗의 죄는 사람에 대한 자범죄였다.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심각한 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의 차이가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직접 거역하는 죄를 더 엄중히 다루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사실 공평하시다. 다윗이 즉시 용서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열 달의 고통이 들어있었고, 용서받은 후에도 아들 네 명을 잃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기 입술로 &amp;quot;마땅히 죽을 자요 네 배나 갚아야 한다&amp;quot;(삼하 12:5-6)고 선고했던 그의 말대로, 밧세바가 낳은 첫째 아이가 죽었고, 첫째 아들 암논이 죽었고, 셋째 아들 압살롬이 죽으며, 넷째 아들 아도니야도 죽었다. 죄의 결과는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다. 비록 사울과 같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다윗에게도 온전히 시행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에서 배워야 한다. &lt;strong&gt;하나님의 용서는 죄의 결과까지 다 없애 주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관계의 회복인 것이지, 결과의 소멸이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결과를 자신이 감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죄를 지었다면 즉시 자복하여 더 이상의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구약 성경에서 &amp;#39;회개&amp;#39;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어디이며, 회개의 히브리어 원뜻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 성경에서 &amp;#39;회개하다&amp;#39;라는 표현이 한국어로 처음 등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놀랍게도 그것은 욥기 42장 6절에 처음 나온다. 욥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amp;quot;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amp;quot;라고 한 것이 구약 성경에서 한국어로서 &amp;#39;회개&amp;#39;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여기서 &amp;#39;회개하나이다&amp;#39;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amp;#39;슈브&amp;#39; 가 아니라, &amp;#39;나함&amp;#39;이라는 단어이다. &amp;#39;나함&amp;#39;은 &amp;#39;뉘우치다&amp;#39;, &amp;#39;후회하다&amp;#39;의 뜻에 가까운 단어이다. 반면 구약 성경에서 회개의 뜻으로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는 &amp;#39;나함&amp;#39;이 아니라 &amp;#39;슈브&amp;#39;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amp;#39;슈브&amp;#39;는 &amp;#39;돌이키다&amp;#39;, &amp;#39;돌아오다&amp;#39;는 뜻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에스겔 18장에서 하나님이 &amp;quot;악인이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amp;quot;라고 하실 때 &amp;#39;슈브&amp;#39;라는 단어가 나온다. 요엘서 2장 12절에서도 &amp;quot;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amp;quot;고 하실 때도 &amp;#39;슈브&amp;#39;라는 단어가 쓰였다. 그리고 신약에서 &amp;quot;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amp;quot;(마 4:17)에서 &amp;#39;회개하라&amp;#39;는 단어는 헬라어어 &amp;#39;메타노에오&amp;#39;이다. 이는 &amp;#39;마음을 바꾸다&amp;#39;, &amp;#39;생각을 돌이키다&amp;#39;는 뜻으로, 구약의 &amp;#39;슈브&amp;#39;와 의미상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회개하고 있어라) [이는]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느니라 하시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엘서 2장 12절에서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회개하기를 원하시는지가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욜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여기서 &amp;quot;너희의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amp;quot; 옷을 찢는 것은 외형적인 슬픔의 표시이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옷을 찢는 것은 큰 슬픔이나 충격을 나타내는 행위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옷을 찢는 행위가 아니라 실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행위보다 마음의 진실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면에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회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회개 기도 모임에 나오는 것,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면서 진정으로 마음을 찟는 기도를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lt;strong&gt; &amp;#39;나함&amp;#39;과 &amp;#39;슈브&amp;#39;의 차이이다. &amp;#39;나함&amp;#39;은 뉘우치고 후회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회개의 일부이지만 실은 회개의 전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lt;/strong&gt;. 가룟 유다도 자신이 죄 없는 피를 팔았다고 뉘우쳤다(마 27:3). 그러나 그 뉘우침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죄값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스스로 자살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lt;strong&gt;그에게도 스승을 팔아먹은 죄에 대한 뉘우침과 후회(&amp;#39;나함&amp;#39;)는 있었지만, 돌이킴(&amp;#39;슈브&amp;#39;)이 없었던 것이다. 즉 그에게는 &amp;#39;유턴&amp;#39;이 없었던 것&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27:3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 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lt;strong&gt;진정한 회개는 뉘우침을 넘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히브리어 원뜻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핵심&lt;/strong&gt;이다. 우리가 회개 기도를 드릴 때, 단순히 잘못했다는 감정적 느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뉘우침은 있는데 돌이킴이 없는 회개는 반쪽짜리 회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욥은 죄를 지었는가, 짓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시험받도록 허용하신 두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 성경에서 욥기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욥기의 저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욥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즉 독자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화를 알고 있고, 욥이 왜 시험을 받는지를 안다. 그러나 욥 자신은 끝까지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 그에게는 사탄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이 갑자기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느껴진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그럼, 욥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욥기 1장 1절에서 욥의 인물됨은 이렇게 정의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에스겔서는 욥을 노아, 다니엘과 함께 의인의 대표로 언급한다(겔 14:14). 그래서인지 욥기 1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이 직접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럼, &lt;strong&gt;욥은 언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는가?&lt;/strong&gt; 구약의 헬라어역인 70인역 성경에 따르면, 욥이 시험을 받을 때는 70세였고, 그 시험을 30년 동안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lt;strong&gt;그는 70세부터 100세가 되기까지&lt;/strong&gt; 종기와 구더기, 친구들의 비난, 아내의 조롱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아내마저 &amp;quot;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amp;quot;(욥 2:9)고 했을 만큼 극한의 고통의 시험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자랑하실 만한 사람도 30년의 극한 고통 앞에서는 불평하고 원망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럼, 욥은 언제적 사람인가? 그는 율법이 아직 명시되지 않았던 아브라함 시대와 같은 시기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다. 자녀들의 생일 잔치 후에도 혹시 그들이 죄를 지었을까 하여 아침마다 번제를 드릴 만큼 죄에 민감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처럼 의로운 욥을 사탄에게 시험받도록 허용하셨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1:10-11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의 진심에서가 아니라 복을 받기 때문이라고 참소했다. 하나님이 울타리로 둘러 보호하고 복을 주었기 때문에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울타리를 걷어내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그의 도전을 허용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lt;strong&gt;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받도록 허용하신 이유&lt;/strong&gt;는 무엇인가? &lt;strong&gt;첫째, 스스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욥 스스로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lt;/strong&gt;이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때문에 복을 받고 잘 산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울타리로 그를 보호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었다. 울타리가 없었다면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롬 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둘째, 하나님이 욥을 시험받도록 허용하신 두 번째 이유는, 욥의 속에 잠재된 죄성이 있다는 것을 욥 자신이 인정하게 하려는 것&lt;/strong&gt;이었다. 욥은 시험받는 날 동안 내내 자신은 의롭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속에도 죄된 본성인 불평, 원망, 낙심, 교만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평온한 환경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 씨앗들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하나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평온한 삶을 살 때는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 보인다. 그러나 극한의 어려움이 찾아오면, 평소에 숨어 있던 죄성이 드러난다.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내가 죄를 적게 짓는 것이 내가 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울타리로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욥이 시험 가운데 지은 죄는 무엇이며, 욥이 회개한 내용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사탄이 준 1차 시험에서 욥은 자녀들과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잃었다. 그때 욥은 &amp;quot;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amp;quot;(욥 1:21)라고 고백하며 인내하였다. 성경은 &amp;quot;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amp;quot;(욥 1:22)고 기록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2차 시험이 그에게 허락되어졌다. 그러자 그의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종기가 나서 구더기가 생겼다. 이에 아내마저 그를 버렸고,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와서 날마다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비난했다. 그리하여 종기로 고통받고 있은지 여러 달이 지났을 때 드디어 욥에게도 변화가 생겼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욥기 7장 11절을 보면, 그때부터 욥은 &amp;quot;나는 불평하겠습니다&amp;quot;라고 선언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욥기 10장 1절에서도 &amp;quot;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amp;quot;고 말했다. 불평과 원망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3장에서는 이미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amp;quot;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amp;quot;이라고 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3:1-3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욥기 34장 5절에서 6절에 보면, 그는&amp;quot;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였다&amp;quot;고까지 말한다. 자신은 의로운데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이었다. 30년에 걸친 극한의 고통이 결국 교만의 죄, 불평의 죄, 원망의 죄를 끌어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34:5-6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내가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지만 화살로 상처를 입었다 하는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욥은 훗날 과연 무엇을 회개한 것인가? 욥기 42장 1절에서 6절을 보면, &lt;strong&gt;욥은 다음의 두 가지를 고백&lt;/strong&gt;한다. &lt;strong&gt;첫째는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했다&lt;/strong&gt;. 자기에게 어려움이 불어닥친 것은 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었던 것이었는데, 자신이 그것을 미처 몰랐다고 고백했다. &amp;quot;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amp;quot;고 말한 것이다. 즉 자신이 잘서 잘 살고 있었고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울타리로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는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 있던 죄성을 인정했다&lt;/strong&gt;.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미워했던 것,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했던 것들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친구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다. 그 순간 하나님이 욥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셨다. 잃었던 것의 두 배를 돌려주셨고, 새로운 10남대의 자녀들을 허락하셨으며, 170년을 더 살아 총 240세에 향수하게 하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42:10 여호와께서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을 주신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언제 욥의 회복시켜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욥이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였다.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의 완성이었다. 왜냐하면 그들고 자기처럼 모른 채 말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 용서받은 자라면 그는 남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주기도문에서도 &amp;quot;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amp;quot;라고 가르쳐주고 계신다. 그렇다. 회개의 측면은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회복으로도 이어져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욥의 회개와 다윗의 회개는 어떻게 다르며, 왜 다윗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의 모범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욥도 회개했고 다윗도 회개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회개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를 아는 데 중요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로, 욥의 회개는 인간의 의로움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앞에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lt;/strong&gt;이었다는 사실이다. 욥은 실제로 죄를 저질러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lt;strong&gt;자신 속에 잠재된 죄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회개한 것&lt;/strong&gt;이다. &lt;strong&gt;그리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 불평하고 원망했던 것,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했던 것을 회개한 것&lt;/strong&gt;이다. 이것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회개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죄악을 저지르고 그것을 자백하는 회개와는 다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lt;strong&gt;다윗의 회개는 구체적인 죄악 앞에서 이루어진 회개&lt;/strong&gt;였다. 간음죄, 살인죄, 도둑질의 죄, 탐욕의 죄, 이 모든 것을 명백히 알면서 그 죄로 인한 고통을 감내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간 회개였다. 구약 성경에서 &amp;#39;회개&amp;#39;라는 단어가 욥기서에 처음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회개의 온전한 모습, 즉 죄를 명백히 인정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진정한 회개의 전형은 다윗에게서 발견된다. 다윗의 참회 시편들, 특히 시편 51편은 회개가 무엇인지를 가장 완전하게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amp;nbsp;&lt;strong&gt;둘째로,&amp;nbsp;욥의 회개는 30년의 고통 끝에 이루어진 것&lt;/strong&gt;이었다. 처음에는 &amp;quot;내가 의롭다&amp;quot;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붙잡다가, 결국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신 후에야 회개에 이르렀다. 반면 &lt;strong&gt;다윗의 회개는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통해 지적받는 순간 즉시 이루어졌다&lt;/strong&gt;. 비록 열 달의 고통이 있었지만, 그 고통 자체가 이미 회개의 과정이었고, 나단이 &amp;quot;당신이 그 사람이라&amp;quot;고 하는 순간 즉시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고 자복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lt;strong&gt;셋째로, 무엇보다 다윗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의 모범이 되는 이유는, 그의 회개가 하나님의 용서라는 명확한 약속을 이끌어 냈기 때문&lt;/strong&gt;이다. 나단이 &amp;quot;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amp;quot;라고 즉시 선언한 것은,&lt;strong&gt; 다윗의 회개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온전한 회개였음&lt;/strong&gt;을 보여 준다. &lt;strong&gt;욥의 회개가 회개의 물꼬를 튼 것이라면, 다윗의 회개는 회개의 진면목을 완성한 것&lt;/strong&gt;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회개 기도를 드리려면, 다윗의 회개를 배우고 따라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우리에게 남겨 준 참회 시편들,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43편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죄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의 교과서이다. 어떻게 자복하고, 어떻게 통회하며,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어떻게 새 마음을 간구하는지를 보여 준다. 회개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다윗의 참회 시편을 읽어야 한다. 이 참회 시편들이 성경에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것을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배우도록 보존하신 것이다. 다윗의 수치스러운 죄와 그로 인한 고통의 기록을 감추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회개의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다윗의 회개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첫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amp;mdash;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회개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데는 세 가지 특징&lt;/strong&gt;이 있다. 이번 시간에는 첫 번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lt;strong&gt;상하고 통회하는 심령&lt;/strong&gt;으로 회개했다는 것이다.&amp;nbsp;다윗은 시편 51편 16절에서 1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amp;quot; &amp;#39;상한&amp;#39;이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amp;#39;샤바르&amp;#39;로, &amp;#39;부서지다&amp;#39;, &amp;#39;깨어지다&amp;#39;는 뜻이다. 마음이 완전히 부서진 상태를 가리킨다. &amp;#39;통회&amp;#39;는 &amp;#39;닥카&amp;#39;로, &amp;#39;짓눌리다&amp;#39;, &amp;#39;으깨어지다&amp;#39;는 의미이다. &lt;strong&gt;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제물이나 번제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이 부서지고 짓눌린 상태에서 드리는 회개라는 것&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왜 이토록 중요한가? 그것은 다윗이 저지른 죄는 구약의 율법 체계 안에서는 제사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기 때문이다. 고의적 살인죄는 반드시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위기에는 속죄제와 속건제라는 제도가 있었다. 죄를 지으면 짐승을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림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처럼 고의적으로 간음하고 살인한 것은 제사의 범위를 넘어선 죄였다. 제물을 드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의 아내와 간음한 자는 간음한 남자와 여자를 다 죽이라고 했다(레20:10). 그리고 &amp;quot;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amp;quot;(민 35:16)고 율법은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범한 죄들은 제사를 드린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윗은 용서를 받았다. 왜인가? 그가 제사의 형식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산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민 35: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살인자니 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제사를 하나님이 결코 받지 않으신다. 여기서 형식적인 제사라는 것은, 마음은 없이 의무를 이행하듯이 제물을 드리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로 말하면, 죄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이 아프지 않은 채 입으로만 &amp;quot;잘못했습니다&amp;quot;를 반복하거나, 혹은 마음의 회개는 없이 예물만 드리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겠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오늘날 회개 기도를 할 때에도 역시 숫자만 채우는 방식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회개 기도문을 읽으면서 몇 번 했는지 동그라미만 치고 계산할 뿐이다. 그렇다고 회개의 숫자를 채우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숫자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리면 아니 된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없이 입술로만 하는 회개는 형식적 회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요를 띄울 만큼 많이 울었다.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마음이 진정으로 많이 아팠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34편 18절도 이와 같은 진리를 증언한다. &amp;quot;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amp;quot; 마음이 상한 자, 영 안에서 통회하는 자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렇나 진술들은 우리의 죄에 대한 감각과 관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문과 죽음을 당하셨다. 우리의 간음죄, 살인죄, 탐욕죄, 교만죄, 거짓말의 죄가 그분을 고통스럽게 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진정으로 마음으로 느끼는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주님이 그런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그 아픔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원천이다. 단순히 &amp;quot;내가 잘못했습니다&amp;quot;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로 인해 주님이 고통받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눈물로 통회자복을 할 때 진정한 회개의 제사가 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바로 그것을 알았다.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자신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주님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셨다. 그러자 그 진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다윗이 회개할 때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띄울 만큼 울었다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가 얼마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는지를 시사해 준다. 15~18살 정도밖에 안 되었을 밧세바를 유린하고,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를 죽게 만들고,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린 그 죄에 대해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는지가 바로 그의 날마다 흘리는 눈물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형식적 제사(예물)와 진정한 회개는 어떻게 다르며, 오늘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회개를 실천해야 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제는 형&lt;strong&gt;식적 제사와 진정한 회개의 차이&lt;/strong&gt;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죄를 지으면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리도록 명령받았다. 속죄제는 죄 자체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이고, 속건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하며 드리는 제사이다. 레위기에 자세히 기록된 이 제사 제도는,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공식적인 방법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다윗이 저지른 간음죄와 살인죄는 이 제사 체계 안에서 단순히 제사를 드린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수준의 죄가 아니었다. 고의적 살인은 율법상 반드시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윗이 용서를 받으려면 단순히 황소를 끌고 와서 제단에 드리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 죄에 상응하는 철저하고 진심 어린 회개가 필요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형식적 제사의 문제는 마음 없이 행위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회개하기가 싫은데 회개는 해야한다는 것을 알기에 예물을 더 드리는 것으로 회개를 대신하려 한다. 물론 회개와 함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그렇지 않고 회개하는 것보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회개하는 마음 없이 예물만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 자녀가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지, 물질로 자신의 회개를 무마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 &lt;strong&gt;진정한 회개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에서 시작&lt;/strong&gt;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lt;strong&gt;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회개를 실천할 때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회개하는 것이 입술로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그 죄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주님께 죄송한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다.&amp;nbsp;&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내가 진정한 회개를 실천하는 것을 도와주는 방법들이 있다. &lt;strong&gt;첫째, 구체적으로 지은 죄를 떠올려서 회개하는 것이다&lt;/strong&gt;. 막연하게 &amp;quot;나는 죄인입니다&amp;quot;가 아니라,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 조상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하나씩 떠올린다. 우상숭배의 조상죄, 제사의 죄, 억압과 폭력의 죄, 음행의 죄, 혈기 분노의 죄, 거짓말의 죄를 하나씩 떠올리며 그것이 주님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그 죄가 얼마나 주님을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했는지&lt;/strong&gt;를 생각한다. 내가 지은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내가 지은 죄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식으로 태어나, 나 또한 부모님과 선조들의 죄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통회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 그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과 통회를 하나님께&lt;/strong&gt; 드린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이다.&amp;nbsp;다윗은 말년에 아비삭이라는 아름다운 수냄 여인을 곁에 두었다. 하지만 그녀와 동침하지 않은 것(왕상 1:1-4)은 그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였다는 증거가 나이었겠는가!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그에게 삶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회개하고 나서 또 같은 죄를 반복하는 것은, 그 회개가 얼마나 깊지 않았는지를 보여 주는 신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1-4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한 명을 구하여 그 아이가 왕을 모시고 또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게 하소서 하고 이스라엘 사방에서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에게 데려왔으나 왕이 그를 알지 못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 기도를 할 때 숫자를 채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꾸준히, 그리고 많이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숫자 채우기가 목적이 되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아니 된다. 진심 어린 회개 한 번이 입술만 움직이는 천 번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닿기 때문이다. 오늘 회개 기도를 마치고 나서,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아팠는가를 점검해 보라! 그 죄에 대해 내 마음에서 무언가 무거운 느낌이 들었는가? 주님께 정말 죄송하다는 느낌이 들었는가? 그것이야말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것이다.&amp;nbsp;그러므로 오늘도 회개 기도를 드릴 때 그 죄에 대해 진심으로 마음이 아파해야 한다. 주님이 그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며 드리는 눈물 어린 회개, 그것이 다윗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정한 회개의 첫 번째 특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회개의 참 뜻, 욥의 회개와 다윗의 회개의 차이 그리고 다윗의 회개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첫 번째 특징인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에 대해 살펴보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는 단순한 어떤 행위가 아니다. 확실한 돌이킴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후회(뉘우침)는 있었지만 돌이킴이 없었던 가룟 유다의 회갤르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이 부서지고 짓눌리는 경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은 죄가 주님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를 할 수 있다. 그때 흘러내린 눈물과 통회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되게 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탄의 시험을 통해 자신 속에 잠재된 죄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30년의 고통 끝에 가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무지와 죄성을 인정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윗은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이라는 구체적인 죄를 저지르고 열 달의 처절한 고통 끝에 나단이 찾아오자 즉시 자복했다. 그런데 그 자복은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었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충분히 무르익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터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34편 18절의 약속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amp;quot;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amp;quot; 하나님은 화려한 예물이 아니라 부서진 마음을 지금도 원하신다.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신다는 것은, 그 부서진 마음이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온다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도 회개 기도를 드릴 때, 숫자를 채우는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먼저 마음이 부서져야 함을 알라. 내 죄로 인해 주님이 고통받으셨다는 사실이 뼈져리게 느낄 수 있을 때, 그는 눈물과 통회로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어렵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저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면 된다. 가룟 유다처럼 뉘우치기만 하고 돌이키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욥처럼 자신의 한계와 죄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윗처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amp;quot;네 죄를 사하였다&amp;quot;고 응답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의 사함을 받고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07일(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본 설교는&amp;nbsp;&lt;strong&gt;회개하는 왕&lt;/strong&gt;으로서 다윗이 지닌 영적 특징을 조명하며, 구약의 인물인 욥과 사울의 사례를 대조하여&amp;nbsp;&lt;strong&gt;참된 회개의 본질&lt;/strong&gt;을 규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이 사울과 달리 즉각적인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하면서, 회개는 단순한 후회나 뉘우침을 넘어&amp;nbsp;&lt;strong&gt;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전인격적 변화&lt;/strong&gt;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다윗의 회개가 지닌 핵심 가치는 형식적인 제사나 예물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처절히 아파하며 낮아진&amp;nbsp;&lt;strong&gt;상하고 통회하는 심령&lt;/strong&gt;에 있음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학습자들에게 입술의 고백을 넘어&amp;nbsp;&lt;strong&gt;부서진 마음의 제사&lt;/strong&gt;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할 것을 독려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fb8d9e787a282aaa05da87ef2fd98eed.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4d484b34faba78487adfa132af98d60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62d29c30818c093731436c81cafa66e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c708200550e8a20c794d54abdf6c410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e2df63aada112ebb768e00c3c892a46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d711468a8cb2cadaaca6fd0cfb6c542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407bcbc1529aed3eff7b91c4bafd037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e0b6cad2c383bc3c11e183f43d74e89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26c9f33b48565b03977fca9d9e0407c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be3533114c7c2708d1e5a4d5d592372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Golden_Fractures_of_Grace.pdf_10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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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인포그래픽_진정한_회개_다윗의_상한_심령.pn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7258a2438383a94d0b0aa36a2567d185.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7696955da7a078e582f0a1c64d2854b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6e3a7f02927659f6468f64f5b0e7707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a00ce705fec86e6aad0e903f20c7a37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72eba818a55277e89fb14f0d39da584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507d811b2c63a6ebb4d35705c84ef5a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b21a6fde3a3c5e48e5b84be12b33fb9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4d2d789935bd9cf205d5c55fe2f921e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94184dc2e8066e5c2de5ac5bdba59b9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32b58793c15f3c0fd4ebaa0a36bcbab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4cfdc18909b05ab9a9f5abb5ca39e44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8d862b28152752ce94eedd4fd48a2b6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831e352efc97a53799833767c6bf158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5)] True_Repentance_Decoded.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64/256/aecc9410fa2464f9585acba6f3e630af.webp&quot; /&gt;&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14)]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0) 그는 회개하는 자였다(02)(시편6:1~7)_2026-06-07(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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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07T21:15:54+09:00</published>
		<updated>2026-06-08T15:19:03+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2026-06-07(일) 주일낮1부예배 제목: [기독론(114)]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0) 그는 회개하는 자였다(02)(시편6:1~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W6GQEGXDhzU 1. 들어가며 다윗은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역사 최고의 왕이다. 그는 하나님이 친히 &quot;내 마음에 합한 사람&quot;(행 13:22)이라고 부르신 인물이었으며, 사울왕이 폐위된 자리를 채울 유일한 적임자로 선택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은 남의 아내를...</summary>
	<content type="html">&lt;p&gt;2026-06-07(일) 주일낮1부예배&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14)]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0) 그는 회개하는 자였다(02)(시편6:1~7)&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W6GQEGXDhzU&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W6GQEGXDhzU?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div style=&quot;margin:0;padding:0;font-family:&#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font-size:15px;line-height:1.8;&quot;&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역사 최고의 왕이다. 그는 하나님이 친히 &amp;quot;내 마음에 합한 사람&amp;quot;(행 13:22)이라고 부르신 인물이었으며, 사울왕이 폐위된 자리를 채울 유일한 적임자로 선택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은 남의 아내를 빼앗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계획적으로 죽이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사람이기도 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모두 감추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13:22 하나님이 그를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지난 시간에 우리는 다윗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그 죄의 뿌리와 네 가지 원인을 살펴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그 죄를 지은 이후 열 달 동안 다윗의 몸과 영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들여다본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무엘하는 일종의 역사책이다. 그래서 사무엘하는 다윗이 죄를 지은 후의 내면 상태를 기록하지 않는다. &amp;quot;아내를 취하여 열 달 후 아이를 낳았다&amp;quot;는 사실만 기록하고, 그 열 달 사이에 다윗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침묵한다. 역대상하는 그보다 더 좋은 일만 기록한 것이어서 다윗의 범죄 장면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침묵을 채워 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시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으로 구성된, 다윗이 쓴 일곱 편의 참회의 시편들은, 다윗이 범죄한 후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를 뼈저리게 증언한다. 특히 시편 6편은 그가 나단 선지자를 만나기 직전이나 직후의 심경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죄를 지은 후 인간의 몸과 영혼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다윗은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그도 실수했다. 사람은 완전히 온전할 수 없고 언제든지 잘못할 수도 있고 타락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잘못된 것을 어떻게 교정하는지를 알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윗의 범죄와 회개는 우리에게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장 생생하게 가르쳐 준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잘못된 방향을 교정하고, 다윗의 참회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다윗이 하나님이 세우신 특별한 왕이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다윗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흠과 실수를 살피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가 얼마나 탁월하게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의 죄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동시에 그의 회개가 얼마나 깊고 진정성 있는 것이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하나님이 세우신 특별한 왕이었다는 &lt;strong&gt;첫 번째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lt;/strong&gt;는 것이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압축하여 설명하면서 다윗에 대해 하나님이 &amp;quot;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amp;quot;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홀대받았던 어린 시절, 아버지 이새조차 선지자 사무엘 앞에 그를 데려오지 않을 만큼 무시당했던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여기며(시 89:26) 그 사랑에 의지하여 성장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두 번째 증거는 그가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었다&lt;/strong&gt;는 사실이다.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오벳에돔의 집에 임시로 보관되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면서, 그는 레위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도록 하고 아삽, 헤만, 여두둔을 찬양 대장으로 삼아 행렬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 자신은 왕복을 벗고 에봇만 걸친 채 법궤 앞에서 기뻐 뛰며 춤을 추었다. 그것을 창문에서 내려다보던 사울의 딸 미갈이 그 모습을 업신여겼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이 왕의 체면보다 훨씬 중요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세 번째 증거는 성전 건축에 대한 간절한 열망&lt;/strong&gt;이다. 다윗은 자신이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는 휘장 가운데 있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나단 선지자를 불러 성전 건축의 뜻을 밝혔다. 그때 하나님의 반응이 사무엘하 7장에 나온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지금까지 내내 텐트와 휘장 가운데 계셨지만 단 한 번도 당신의 집을 지어 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는데, 다윗이 자신을 위해 집을 지으려 한다고 오히려 말씀하신다. 그 마음이 갸륵하다는 것이다. 비록 다윗이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직접 성전을 짓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다윗은 좌절하지 않고 그때부터 성전 건축을 위한 모든 만반의 준비를 한다. 이것을 위해 자신의 전리품, 목숨 걸고 전쟁에서 얻어 온 모든 금은을 성전 건축을 위해 내놓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네 번째 증거는 메시아 예언&lt;/strong&gt;이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가장 많이 한 인물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그 사람은 이사야 선지자가 아니라 다윗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시편 2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였고, 시편 22편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고난받는 종, 시편 23편에서 선한 목자로서 양 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분, 시편 110편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요 원수 위에 앉으실 왕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영분별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탁월하고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으나, 그도 죄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다윗은 왜 밧세바 사건이라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되었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저지른 죄는 단순한 그런 실수가 아니었다. 남의 아내를 강제로 취하였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부하를 전장 최전선에 세워 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죄는 간음죄, 살인죄, 도둑질의 죄, 탐욕의 죄가 한꺼번에 중첩된 중대한 범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났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우리는 그 이유를 지난 시간에 네 가지로 살펴보았다.&lt;strong&gt; 첫째는 내면에 이미 죄성이 있었기 때문&lt;/strong&gt;이다. 시편 51편 5절에서 다윗은 &amp;quot;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amp;quot;라고 고백했다. 어머니가 부정한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로 인해 음란의 속성이 대물림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거짓말의 속성이 이삭, 야곱에게 대물림된 것처럼, 다윗에게도 어머니로부터 음란의 속성이 전해졌을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는 육체와 안목의 정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lt;/strong&gt;이다.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게 된다. 보는 순간 소유하고 싶은 육체와 안목의 정욕이 발동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말하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그 첫 번째 문을 연 것이다. 그것은 그가 요셉처럼 그 자리를 피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신하가 &amp;quot;그 여인이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니이까&amp;quot;라고 분명히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범죄를 멈추지 않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는 정신적 해이가 찾아왔기 때문&lt;/strong&gt;이다. 당시 요압 장군과 군대는 암몬 족속의 랍바 성을 공격하는 마지막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부하 장수들은 부왕의 등불이 꺼지지 말라며 다윗을 예루살렘에 남겨 두었는데, 전장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부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야 했던 다윗은 낮잠을 잔 후 저녁에 일어나 옥상에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목욕하고 있는 여인을 본 것이다. 그러자 그는 범죄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목적에 대한 사명감이 흐려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 순간, 죄가 그에게 파고들어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넷째는 그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탄의 공격이 있었기 때문&lt;/strong&gt;이다. 역대상 21장을 보면,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에 대해 &amp;quot;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였다&amp;quot;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일수록 사탄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된다. 다윗이 해이해진 그 순간을 사탄은 결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대상 21: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네 가지 이유가 맞물리면서 다윗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다. &lt;strong&gt;아무리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도, 메시아를 예언한 선지자적 인물이라도, 영분별의 은사를 받은 신앙인이라도 이 네 가지 조건이 갖춰지면 무너질 수 있는 것&lt;/strong&gt;이다. 신앙의 경력이 아무리 화려해도 죄 앞에서는 안전 지대가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amp;quot;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amp;quot; 이것이 다윗의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엄중한 교훈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아를 불러 귀가시키는 방법으로 은폐하려 했으나,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동료들이 전장에 있는데 자신만 집에 들어갈 잘 수 없다며 왕궁 문 앞에서 잠을 잔다. 결국 다윗은 요압에게 우리아를 최전선에 세우고 물러나도록 지시하는 편지를 써 보냈고, 그 편지를 우리아 자신이 들고 전장으로 갔다. 자신의 사형선고문을 손수 들고 간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저지른 죄의 전말이다. 고로 사무엘하 11장 27절에는 &amp;quot;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amp;quot;는 한 줄의 평가가 덧붙여져 있을 뿐이다. 이 한 줄 속에는 다윗의 모든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이 그 일을 다 보고 계셨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그 죄를 묻겠다는 의지가 이 짧은 문장 안에 모두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1:27 그 애도하는 기한이 지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을 자기 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그러나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을 때 다윗은 왜 즉시 자복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가서 &amp;quot;당신이 죄를 범하였소&amp;quot;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대신 한 비유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부유한 자가 넘치는 양 떼가 있으면서도 가난한 자의 단 하나뿐인 어린 암양 새끼를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것은 지혜로운 접근이었다. 왕에게 직접 &amp;quot;잘못했다&amp;quot;고 하면 방어적 태도를 취할 수 있겠지만, 비유를 통해 스스로 판결을 내리게 함으로써 그 양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하며 즉시 판결을 내렸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5-6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암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마땅히 죽을 자라&amp;quot;, &amp;quot;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amp;quot;는 선고가 자기 자신의 죄를 향한 것임을 다윗은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런데 나단이 &amp;quot;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amp;quot;고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다윗은 즉시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고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이때 다윗의 자복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다윗은 그순간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호위대장을 불러 나단을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왜인가? 그것은&amp;nbsp;열 달 동안 그에 겪어야 했던 고통 때문이었다. 다윗은 그 범죄 이후 열 달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영적&amp;middot;육체적 고통 속에 있었다. 몸은 말라가고 있었고, 뼈는 흔들렸으며, 눈은 흐려지고 있었고, 잠을 이루지 못하며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고, 기도는 하늘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 자체가 다윗에게는 이미 깊은 회개의 몸부림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나단이 &amp;quot;당신이 그 사람이라&amp;quot;고 하는 순간, 다윗은 오히려 감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10달동안 나를 떠나계시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나를 찾아오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야말로 하나님께 자신의 허물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매우 감사했을 것이다. 입으로는 말하기가 너무 부끄러웠던 자신의 죄를, 나단이 대신 들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시 엎드려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즉각적인 자복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나단의 응답에서 확인된다. &amp;quot;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amp;quot; 자복하는 순간, 그의 죄가 사해졌다. 열 달의 고통이 그 한 마디 자복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죄를 숨기면 고통이 길어지고, 자백하면 즉시 용서가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백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자백을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녀가 죄 가운데서 수척해지고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 달을 기다리신 것은 다윗을 포기하셔서가 아니라, 다윗이 스스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복 이후에도 자신의 범죄에 대한 결과는 그를 따라왔다. 왜냐하면 자기 입술로 &amp;quot;네 배나 갚아야 한다&amp;quot;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었고, 첫째 아들 암논이 죽었으며고,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다가 죽었고, 넷째 아들 아도니야도 역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다가 죽는다. 그리하여 정말 네 명의 아들이 죽는 것으로 다윗의 선고가 그대로 이행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죄를 짓고 난 후 다윗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1)&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밧세바와의 불륜 이후 열 달 동안 그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런데 사무엘하는 그것에 대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편은 달랐다. 시편 말씀 가운데,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을 통해 그때의 다윗의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다윗이 죄를 지은 후 다윗에게 일어난 일들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그를 누르고&lt;/strong&gt; 있었다. 시편 6편 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이미 책망과 징계가 그에게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미 주님의 진노가 다윗 위에 내려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에게서 이미 진액이 빠져 나가고 있었으며(시32:4), 그러자 주님 앞에 제대로 설 수도 없게 되었다고 고백했다(시102:2).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겨버렸기 때문에, 그아 아무리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응답이 없게되었다고도 말했다(시102:2).&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두 번째는 무척 수척해졌다&lt;/strong&gt;는 것이다. 시편 6편 2절에서 &amp;quot;내가 수척하오니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amp;quot;라고 한다. 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눈이 움푹 들어갔다(시6:7). 음식도 맛이 없었다(시102:4)&amp;rdquo;. 또한 그의 머리는 무거웠고(시38:4), 몸이 아파왔다(시38:5-6). 온 몸이 몹시 피곤하고 지친 상태에 있었으며(시38:8, 143:7), 그럴수록 심장박동은 빨라졌고(시 38:10), 허리에 열이 나고 몸은 성한 곳이 없어졌다(시38:7). 그리고 마침내 그의 기력은 완전히 쇠하여졌으며(시38:10), 그의 눈에서는 빛이 나지 않았다(시38:10). 눈빛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편 6편 7절에서 &amp;quot;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amp;quot;라고 한다. 죄를 지으면 눈빛이 흐려진다. 동태 눈처럼 초점을 잃어버린다. 주님과 친밀한 사람의 눈에서는 빛이 나지만, 죄를 품고 있는 사람의 눈에서는 그 빛이 사라진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책망을 받은 직전의 눈빛이 얼마나 흐려져 있었을지 짐작이 된다. 나중에는 뼈까지 흔들리게 되었다고 말했다(시6:2).&amp;nbsp;시편 6편 2절에서 &amp;quot;나의 뼈가 떨리나이다&amp;quot;라고 했고, 시편 32편 3절에서 4절은 더욱 생생하게 그 상태를 묘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8:5-6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니 내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음이로소이다 내가 구부러지고 심히 낮아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2:3-4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 &amp;quot;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amp;quot;고 했다. 이는 온몸의 생기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말라비틀어진 상태를 말해준다. 그렇다. 그것이 열 달 동안 죄를 은폐하며 살아간 다윗의 육체적 상태였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또한 그는 자신의 눈물이 그의 침상을 적셨다고 말했다. 시편 6편 6절에서 &amp;quot;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amp;quot;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amp;#39;띄운다&amp;#39;는 표현이 주목된다. 적신다는 것은 어느 정도 눈물이 고인다는 뜻이고, 띄운다는 것은 침상이 눈물 위에 뜰 정도로 많이 흘렸다는 과장적 표현이다. 이처럼 다윗이 밤마다 얼마나 통곡하며 울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낮에는 왕의 위엄을 지키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았겠지만, 밤이 되면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는 그가 침상을 적실 정도가 아니라 침상을 띄울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열 달 동안 겪어 낸 육체적 고통의 실상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죄를 짓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그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죄를 짓고 난 후 다윗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2)&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죄를 지은 다윗에게는 육체의 고통만이 그에게 있지 않았다. &lt;strong&gt;그의 영혼과 내면 세계 더욱 깊은 곳에서부터 또한 고통이 가중되고 있었다&lt;/strong&gt;. 시편 6편 3절에서 &amp;quot;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amp;quot;라고 했다. 영혼이 떨린다는 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층에서 불안과 공포가 밀려온다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래서 &lt;strong&gt;첫째, 마음이 극도로 불안해졌다&lt;/strong&gt;. 시편 38편 8절에서 &amp;quot;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amp;quot;라고 한다. 죄를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평안할 수 없다. 아무도 모른다 해도, 하나님이 알고 계심을 그 내면 깊은 곳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이 저지른 일의 무게, 우리아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끊임없이 그를 짓눌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8:8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우울과 혼돈이 몰려왔다&lt;/strong&gt;. 시편 143편 4절에서 &amp;quot;그러므로 내 심령이 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황폐하여지나이다&amp;quot;라고 한다. 시편 38편 6절에서는 &amp;quot;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amp;quot;라고 했다. 마음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삶의 의욕과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날마다 찬송을 불러도 기쁨이 안 되고,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43:4 그러므로 내 심령이 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황폐하여지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죄는 기쁨을 앗아간다. 날마다 찬양을 불러도 감격이 없고,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고, 구원의 기쁨이 사라진다. 살아 있지만 사는 것 같지 않은 상태가 된다. 다윗이 시편 51편 12절에서 &amp;quot;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소서&amp;quot;라고 간구한 것은, 그 즐거움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 기도가 막혔다&lt;/strong&gt;. 시편 102편 2절에서 &amp;quot;나의 고통의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amp;quot;라고 간구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고 계심을 전제로 한 기도이다.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얼굴이 이미 숨겨진 상태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열 달 동안 기도해도 하늘이 닫혀 있는 것 같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02:2 나의 고통의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넷째,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떠나버리신 것 같은 공포가 찾아왔다&lt;/strong&gt;. 시편 6편 4절에서 &amp;quot;여호와여 돌아오사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amp;quot;라고 한다. &amp;quot;돌아오사&amp;quot;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미 떠나버리셨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육체의 방법으로 아이를 얻은 후 13년 동안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던 것처럼, 다윗에게서도 하나님이 침묵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3-4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오사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섯째, 성령마저 떠나갈까 두려워했다&lt;/strong&gt;. 시편 51편 11절에서 &amp;quot;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amp;quot;라고 한다. 사울왕에게서 성령이 떠나갔던 것을 다윗은 직접 목격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도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밤마다 그를 사로잡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여섯째, 악한 영들이 그를 비방하고 공격했다&lt;/strong&gt;. 시편 102편 8절에서 &amp;quot;나의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amp;quot;라고 한다. 죄를 지으면 악한 영들이 그것을 구실 삼아 더욱 가중하게 공격한다. 잘됐다며 비방하고 압박해 온다. 그 영적 공격이 더해지면서 다윗의 내면은 더욱 피폐해졌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처럼 죄는 이처럼 몸과 영혼과 영 모든 차원에서 동시에 파괴를 일으킨다. 육체의 병, 마음의 불안, 영적 침묵, 성령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 악한 영들의 공격이 모두 한꺼번에 몰려온다. 죄를 짓고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환상에 불과하다. 특히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온다. 다윗의 증언이 그것을 증명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다윗은 열 달 동안 왜 즉시 회개하지 못했는가? &amp;mdash; 죄의 무게와 침묵의 고통&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우리가 다윗의 참회의 시편을 읽을 때에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것은 다윗이 이처럼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왜 열 달 동안 즉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복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다윗은 왜 자신의 죄를 입으로 고백하지 못한 채 홀로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lt;strong&gt;다윗이 저지른 죄의 무게는 다른 사람이 죄를 지은 무게보다 더 큰 것이었음을 다윗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lt;/strong&gt;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친히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르신 자였고, 영분별의 은사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아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할 정도로 깊은 영성을 가진 자였다. 그런데 이렇듯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사명이 클수록,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도도 그만큼 더 많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사실 다윗이 아히도벨의 손녀인 밧세바의 육체를 취했다는 것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측근의 가족을 범한 것이었다. 헷 사람 우리아는 이방인 출신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다윗의 37인 용사 중 하나가 된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그런 사람의 아내를 그가 빼앗았고 그를 죽게 만들었다. 고로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lt;strong&gt;오히려 그 무게 앞에서 입을 열기가 힘들었던 것&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그런데 시편 32편 3절의 말씀은 다윗이 그때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amp;quot;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amp;quot; 그렇다. 그는 자신의 범죄를 하나님께 말하고 싶어 했으나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lt;strong&gt;하나님이 너무 크게 실망하셨을 것 같아서, 내가 너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래서 조금 더 기다렸다가 말해야지 하다가 그만 한 달이 지나가고 또 한 달이 지나가서 열 달이 되어버린 것&lt;/strong&gt;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러한 침묵은 다윗에게 더 큰 고통을 불러들였다. 주의 손이 주야로 그를 눌렀기 때문이며, 진액이 빠져 여름 가뭄의 마름같이 되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바로 그가 죄를 은폐한 것에 대한 결과다. 죄를 숨기면 이처럼 고통은 더 길어진다. 죄는 결코 침묵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무게는 더 무거워지고, 몸은 더 상해 가며, 영혼은 더 황폐해지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lt;strong&gt;다윗이 열 달을 침묵 속에 고통당한 것은, 우리더러 죄를 지었을 때에 뒤로 미루지 말고 즉시 자백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 주는 산 교훈&lt;/strong&gt;인 셈이다. 그렇다. 죄를 은폐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는 계획을 요압에게 맡김으로써, 이후 요압은 그 비밀을 알고 있었고 이것이 훗날 다윗이 요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게 된 원인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죄를 감추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더 큰 문제가 터져 나온다. 그러므로 죄는 지은 즉시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lt;strong&gt; 이 침묵의 열 달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다윗에게는 그 고통 자체가 이미 깊은 회개의 과정이었기 때문&lt;/strong&gt;이다. 죄가 너무 무거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 그것이 고통이 되어 몸과 영혼을 찌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다윗이 그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나단이 왔을 때 즉시 자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열 달의 고통으로 마음이 충분히 상하고 통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열 달의 고통을 보시면서, 다윗이 그 죄로 인해 진심으로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나단이 자복을 끌어낸 그 순간, 즉시 &amp;quot;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amp;quot;고 응답하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죄를 지은 후 즉시 자백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경험은 죄를 지은 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그 교훈은 단순하다. 죄를 지으면 즉시 자백하라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면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시편 32편 5절이 그 답을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amp;quot; 자복하는 즉시, 하나님이 사하신다. 열 달의 고통이 자복하는 그 순간에 끝났던 것이다. 자백은 이처럼 죄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고통에서 벗어나는 문을 여는 열쇠이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이 약속을 분명히 선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반드시 용서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조건부 약속이 아니다.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즉 자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의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단순히 &amp;quot;잘못했습니다&amp;quot;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의 회개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 하나님 앞에서의 자복&lt;/strong&gt;이어야 한다. 사무엘하 12장 13절에서 다윗은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고 했다. 나단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사람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strong&gt;&amp;nbsp;둘째, 구체적인 자복&lt;/strong&gt;이 있어야 한다. 시편 51편은 매우 구체적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내용을 분명히 인정하며 정결하게 씻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막연하게 &amp;quot;나는 죄인입니다&amp;quot;가 아니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분명히 아뢰어야 한다. 조상의 죄도, 나 자신의 죄도 구체적으로 하나씩 아뢰어야 한다. 우상숭배의 조상죄도, 억압과 폭력의 죄도, 음란의 죄도, 혈기 분노의 죄도 모두 구체적으로 자백할 때 그 죄를 근거로 들어와 있던 악한 영들이 합법적 근거를 잃고 떠나가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2 나의 죄악을 깨끗이 씻으시며 나의 죄를 정결하게 하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lt;/strong&gt;이 있어야 한다. 시편 51편 17절에서 &amp;quot;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amp;quot;라고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다. 단지 의무를 이행하듯 자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해 진심으로 마음이 아프고 상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넷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에 근거한 간구&lt;/strong&gt;이다. 시편 51편 1절에서 다윗은 &amp;quot;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amp;quot;라고 한다. 자신의 노력이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호소한다.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껴져도, 하나님의 자비가 죄의 크기보다 크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은 회개의 시대이다. 어떤 죄든지간에 회개하면 용서가 임한다. 다윗의 그 무거운 죄도 용서받았다면, 우리의 죄도 반드시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를 짓게 되면 열 달을 기다릴 필요 없이,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자백해야 한다. 죄를 지을 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악한 영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회개로 그 근거를 없애버리면, 들어오다가도 돌아서게 된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 간밤에 지은 죄를, 저녁에 자리에 누우며 그날 지은 죄를 하나님께 아뢰는 습관이 신앙을 지키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범죄한 후 열 달 동안 겪은 고통, 나단이 찾아왔을 때의 즉각적인 자복, 그리고 진정한 회개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다윗의 경험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자백이 얼마나 빠르고 확실하게 그 고통을 끝낼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죄를 지으면 마음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다윗의 증언은 정반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그가 지은 죄를 비밀스럽게 감추고 있어도, 몸은 수척해지고, 뼈는 흔들리고, 눈은 흐려지고, 밥이 들어가지 않으며, 괴로움에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는 멀어지고, 기도는 막히고, 악한 영들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것이 죄를 품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의 실상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죄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교훈이 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자백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시편 32편 5절의 다윗의 고백처럼, &amp;quot;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amp;quot; 즉각적인 용서가 임한다. 밤마다 눈물로 적시던 침상이 기쁨의 눈물로 바뀐다. 이것이 자백의 능력이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실상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죄를 범하는 연약한 존재이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불린 사람도 죄 앞에서 무너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과 함께, 죄를 지었을 때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 자백하는 것이다. 열 달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자백해야 한다. 죄를 지은 그날 회개하면, 그날로 용서가 임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자백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그 죄로 인해 수척해지고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51편 12절에서 다윗은 용서받은 이후의 소망을 이렇게 고백한다. &amp;quot;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amp;quot; 범죄 전에 누렸던 하나님과의 친밀함, 구원의 기쁨, 자원하는 헌신의 마음이 회복되기를 구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죄를 자백하면 이 모든 것이 돌아온다. 흐려졌던 눈빛이 맑아지고, 멈췄던 기도가 열리고, 멀어졌던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죄 앞에 솔직하게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다시 힘차게 일어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07일(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의 결정적 특징을&amp;nbsp;&lt;strong&gt;회개하는 자&lt;/strong&gt;로 정의하며, 그가 범죄 이후 겪었던&amp;nbsp;&lt;strong&gt;처절한 영적&amp;middot;육체적 고통&lt;/strong&gt;과 회복의 과정을 다룹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기까지의 열 달 동안,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을지라도 실제로는&amp;nbsp;&lt;strong&gt;뼈가 깎이는 듯한 고통과 하나님과의 단절&lt;/strong&gt;로 인해 수척해진 상태였음을 시편의 고백을 통해 입증합니다. 이 설교는 죄를 숨기는 것이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amp;nbsp;&lt;strong&gt;영적 징벌&lt;/strong&gt;임을 경고하며, 다윗이 지적을 받는 즉시 자신의 과오를&amp;nbsp;&lt;strong&gt;자복하고 통회&lt;/strong&gt;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복구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 설교의 목적은 성도들이 죄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하고&amp;nbsp;&lt;strong&gt;회개를 통해 거룩한 신분을 회복&lt;/strong&gt;하여 하늘나라의 소망을 품도록 독려하는 데 있습니다.&lt;br /&gt; &lt;br /&gt; &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1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9)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1)(시38:1~13)_2026-06-05(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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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05T09:15:07+09:00</published>
		<updated>2026-06-08T21:39:22+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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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9)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1)(시38:1~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NMuZ0Ly2igs 1. 들어가며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된다. 그는 골리앗 앞에서 물맷돌 하나로 승리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며 기뻐 춤춘 예배자였으며, 수많은 시편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눈 사람이었다. ...</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1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9)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1)(시38:1~13)&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NMuZ0Ly2igs&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NMuZ0Ly2igs?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div style=&quot;margin:0;padding:0;font-family:&#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font-size:15px;line-height:1.8;&quot;&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된다. 그는 골리앗 앞에서 물맷돌 하나로 승리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며 기뻐 춤춘 예배자였으며, 수많은 시편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눈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amp;quot;내 마음에 합한 자&amp;quot;(행 13:22)라고 부르셨을 만큼, 그는 분명 탁월한 신앙인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13:22 하나님이 그를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다윗의 생애를 정직하게 살펴보면, 그도 결코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찬란한 믿음의 면모만큼이나 치명적인 죄악의 순간들이 있었다. &lt;strong&gt;성경은 이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를 시편이라는 그 자신의 기도와 고백을 통해 세상에 영원히 남기도록 하셨다. 위대한 왕도 죄인이었음을 감추지 않는 것, 이것이 성경의 정직함이며 하나님의 방식&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한 사람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그의 좋은 면만을 이야기할 때 완성되지 않는다. 다윗의 믿음과 헌신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하고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그 죄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 죄가 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정직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만 그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올바르게 들을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신앙인이라도 그 삶 전체를 들여다봐야 올바른 교훈을 얻을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 땅에서 온전한 자는 없다. 다윗도 그러했고, 모세도 그러했으며, 요셉과 같이 흠 없어 보이는 사람조차 그 삶에 빈틈이 있었다. 성경이 이처럼 인물들의 실패와 죄악을 감추지 않고 기록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인물이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범죄를 정면으로 살펴보는 것은 다윗을 깎아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함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기독론 강의 113번째 시간이자, &amp;#39;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amp;#39;을 살펴보는 19번째 시간에는 그 특징 중 하나인 &amp;quot;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다&amp;quot;의 첫 번째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lt;strong&gt;다윗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왜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죄 앞에서 그가 어떤 상태로 무너졌는지를 시편 38편을 중심으로, 그리고 참회 시편 전반의 맥락 안에서 살펴보고자&lt;/strong&gt;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다윗의 범죄를 성경이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한 사람을 평가할 때 좋은 면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이미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다윗을 설교할 때 그의 믿음과 헌신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 성경은 다윗의 범죄를 정면으로 다루며, 그가 얼마나 심각한 죄를 저질렀는지를 감추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무엘하는 다윗의 범죄 사실 자체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무엘하의 기록은 그 상황에서 다윗이 내면적으로 어떤 상태였는지까지 세밀하게 보여 주지는 않는다. 선지자 나단이 와서 책망했을 때 다윗은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삼하 12:13)라고 단 한 마디로 고백한다. 사무엘하의 본문만 읽으면 그 고백이 얼마나 깊은 고통과 회한에서 나온 것인지를 짐작하기 어렵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 역대상하는 더욱 미화적 표현이 많아서 다윗의 죄악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역대상하는 이스라엘 왕정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성전 예배와 관련된 제도들에 초점을 맞추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의 범죄는 비교적 짧게 다뤄지거나 생략되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면 &lt;strong&gt;다윗의 내면, 곧 그가 범죄하고 은폐하며 고통받던 그 시간의 실상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바로 시편이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신의 범죄 상황을 시편에 기록하도록 하셨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와 고백이 시편에 그대로 남아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죄 가운데서 어떤 상태에 빠졌었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을 &amp;#39;참회 시편&amp;#39;이라고 한다. 이 참회 시편들은 다윗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로서, 그 고통과 통회와 간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lt;strong&gt;다윗의 범죄를 시편에 남기신 데는 분명한 이유&lt;/strong&gt;가 있다. &lt;strong&gt;첫째로, 지도자의 죄는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lt;/strong&gt;는 것이다. 다윗이 왕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이 세우신 자라는 이유로 죄가 감춰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큰 해악을 낳는다. 성경은 철저하게 공정하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예외가 없다. 죄는 반드시 드러나야 하고, 드러난 죄는 반드시 회개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로, 지도자의 범죄는 더 크게 징계받는다&lt;/strong&gt;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모세 때부터 이것을 분명히 하셨다. 더 많은 권위를 받은 자에게는 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다윗이 그 범죄에 대해 네 명의 아들을 잃는 엄청난 대가를 치른 것은, 지도자의 죄가 얼마나 크게 물어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이것을 감추면 안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로, 이 시편들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교훈&lt;/strong&gt;이 된다. 신앙의 경력이 아무리 화려해도 죄 앞에서는 안전 지대가 없다는 것, 그리고 범죄 후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지를 다윗의 참회 시편을 통해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이 다윗의 수치스러운 죄를 감추어 주지 않고 성경에 영원히 기록하게 하신 것은, 그것이 후세대를 위한 살아 있는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왕의 실패가 기록으로 남아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목회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잘못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그 비리는 결국 약점이 되어 자신을 옭아매는 올무가 된다. 다윗이 요압에게 비리를 알게 한 것이 이후 요압을 제압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듯이, 숨겨진 죄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해야 하고, 잘못이 있으면 즉시 드러내고 회개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다윗의 죄는 사울의 죄와 어떻게 다르며, 무엇이 더 심각한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죄와 사울의 죄를 비교할 때, 표면적으로 보면 다윗이 저지른 죄가 결코 사울보다 가볍지 않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lt;strong&gt; 왜 하나님은 사울은 폐위시키시고, 다윗은 그 왕위를 계속 허락하셨는가? 여기에는 두 사람의 죄의 본질적인 차이&lt;/strong&gt;가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amp;nbsp;사울의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lt;/strong&gt;였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어겼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왕 아각을 살려두고 좋은 짐승들을 남겼다(삼상 15:9). 그 이유를 묻자 사울은 &amp;quot;백성이 두려워서&amp;quot;라고 대답한다. 하나님보다 백성의 눈치를 더 보았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반역, 곧 우상숭배에 가까운 죄였다.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까지 찾아가서 자신의 미래를 물었다(삼상 28:7).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자 이방의 점쟁이에게로 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위에 다른 것을 두는 행위로서, 1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죄였다. 그는 일평생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백성의 눈치를 보며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 이것이 사울의 근본적인 문제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28:7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반면에 둘째, 다윗의 죄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한 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범죄&lt;/strong&gt;였다. 밧세바와의 간음,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만든 살인, 권력을 남용한 도둑질과 탐욕이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자범죄였지, 하나님 위에 다른 것을 두는 죄는 아니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돌아왔다. 사울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갔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되 인간에 대해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우상숭배의 죄와 자범죄 사이에는 엄연한 구분이 있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보다 다른 것을 위에 두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 십계명의 제1계명이 &amp;quot;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amp;quot;(출 20:3)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을 향한 자범죄는 물론 심각하고 반드시 징계받지만, 하나님 자신을 직접 거부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행위는 하나님이 더 근본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죄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윗이 훨씬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남의 아내를 빼앗았고, 충신을 죽였고, 권력으로 모든 것을 은폐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에서 보면, 사울은 하나님을 직접 거역했고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이것이 핵심적인 차이&lt;/strong&gt;이다. 다윗의 죄는 더 나쁘게 보일 수 있지만, 사울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단절한 죄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물론 이것이 다윗의 죄를 가볍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엄하게 물으셨다. &amp;quot;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amp;quot;(삼하 12:10)고 하셨다. 그 결과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의 후처들을 범하는 일이 생겼고, 암논이 죽고, 압살롬이 죽고, 아도니야가 죽는 등 네 명의 아들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나단 선지자가 부자가 가난한 자의 어린 암양 새끼를 빼앗아 음식을 만들었다는 비유를 들었을 때, 다윗은 분노하며 &amp;quot;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다.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어린 양을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amp;quot;(삼하 12:5-6)고 스스로 판결했다. 자기 입술로 네 배를 갚겠다고 했으니, 그대로 네 아들이 죽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지도자의 말은 이처럼 무섭다. 설교자가 말한 대로 정확히 그 대가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5-6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어린 양을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다윗이 저지른 네 가지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범죄는 흔히 &amp;#39;밧세바 사건&amp;#39;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뭉뚱그려 불리지만, 실상 그 안에는 여러 층위의 죄가 겹쳐 있다.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는 간음죄&lt;/strong&gt;다. 이것은 십계명의 제7계명, &amp;quot;간음하지 말라&amp;quot;(출 20:14)를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출 20:14 간음하지 말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데려온다(삼하 11:2-4). 밧세바는 다윗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다. 뿐만 아니라 밧세바는 다윗의 모사(謀士)였던 아히도벨의 손녀였다. 즉 그녀는 자신의 측근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의 가족이었다. 나이 차이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1:2-4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들을 보내어 그 여인을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인이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다윗이 그와 동침하매 그 여인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신하가 &amp;quot;그 여인이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니이까&amp;quot;라고 분명히 경고성 발언을 했다. 그것을 들으면서도 다윗은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죄의 무서움이다. 한번 욕망이 점화되면 이성적인 경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는 살인죄&lt;/strong&gt;다. 이것은 제6계명, &amp;quot;살인하지 말라&amp;quot;(출 20:13)를 어긴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출 20:13 살인하지 말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밧세바가 임신하자 다윗은 이를 은폐하려 했다. 전장에 있던 우리아를 불러내 집에 가도록 유도했으나,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동료들이 전장에 있는데 자신만 집에서 쉴 수 없다며 왕궁 문 앞에서 잠을 잔다(삼하 11:9). 다윗은 그를 취하게 만들어 다시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모든 은폐 시도가 실패하자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우리아를 전투 최전선에 배치하고 물러나도록 명령하는 편지를 보낸다(삼하 11:15). 이것은 사실상 계획된 살인이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 편지를 우리아 자신이 직접 들고 전장으로 갔다는 점이다. 자신의 사형선고문을 손수 들고 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1: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장 세우고 너희는 그를 떠나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아는 원래 이스라엘 민족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헷 사람, 즉 가나안 족속이었다. 자신의 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한 사람이었고, 다윗의 용사 37인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될 만큼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다(삼하 23:39). 그 충성스러운 사람을 다윗은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전장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것이 권력 남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는 도둑질의 죄&lt;/strong&gt;다. 이것은 제8계명, &amp;quot;도둑질하지 말라&amp;quot;(출 20:15)를 어긴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출 20:15 도둑질하지 말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권력을 사용하여 남의 아내를 빼앗았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과오가 아니라, 권력을 도구로 삼은 탈취였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의 어린 암양 새끼를 빼앗은 비유를 들었을 때(삼하 12:1-4), 그것이 바로 다윗이 저지른 도둑질의 본질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부자는 자기 것이 넘치도록 있음에도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았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아내가 있음에도 남의 아내를 빼앗은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4 그 부자에게 한 행인이 왔으되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잡기가 아까워서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넷째는 탐욕의 죄&lt;/strong&gt;다. 이것은 제10계명, &amp;quot;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amp;quot;(출 20:17)를 어긴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이미 여러 아내를 두고 있었다. 신명기 17장은 왕이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명백히 경고하고 있었음에도(신 17:17), 다윗은 최소 여덟 명 이상의 아내를 두었다. 그런데도 또 다른 여인을 탐한 것은, 그 욕망의 뿌리가 탐욕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신 17: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다윗이 밧세바 사건에서 저지른 죄는 단순히 간음 하나가 아니었다. 간음죄(7계명), 살인죄(6계명), 도둑질(8계명), 탐욕(10계명), 이 네 가지 죄가 하나의 사건 안에 중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죄의 공통된 뿌리는 &amp;#39;권력 남용&amp;#39;이었다. 권력이 없었다면 이 죄들은 이처럼 대담하게 저질러질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은 섬기라고 주신 것이지, 착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권력을 가진 지도자는 더욱 자신을 낮추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섬기는 데 그 권위를 사용해야 한다. 다윗의 죄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참회 시편 일곱 편은 어떻게 구성되며, 왜 반드시 살펴봐야 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교회 역사에서 &lt;strong&gt;전통적으로 &amp;#39;참회 시편&amp;#39;이라 불리는 시편&lt;/strong&gt;은 &lt;strong&gt;일곱 편&lt;/strong&gt;이다. &lt;strong&gt;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lt;/strong&gt;이 그것이다. 이 일곱 편은 &lt;strong&gt;죄로 인한 고통과 하나님 앞의 통회, 그리고 용서를 간구하는 기도&lt;/strong&gt;로 이루어져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중 &lt;strong&gt;다섯 편, 곧 6편, 32편, 38편, 51편, 143편은 표제어에 &amp;quot;다윗의 시&amp;quot;라고 명시&lt;/strong&gt;되어 있다. 102편과 130편은 표제어에 다윗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 작자 미상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전체 일곱 편이 모두 참회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죄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장 직접적이고 절실하게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특히 이 일곱 편 가운데&lt;strong&gt; 51편은 표제어에 구체적인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단연 핵심&lt;/strong&gt;이다. 시편 51편의 표제는 다음과 같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편 표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시편은 나단이 다윗을 책망한 그 사건 이후에 기록된 것이다. 사무엘하의 기록에는 다윗이 나단에게 책망을 받은 후 &amp;quot;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quot;는 짧은 고백만 나온다. 그 말 한마디 뒤에 어떤 깊은 통회와 눈물이 있었는지를 사무엘하 본문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시편 51편과 시편 32편, 시편 6편을 함께 읽으면 그 내막이 드러난다. 세 편의 시편이 서로를 보완하면서 다윗이 그 사건 전후에 어떤 내면의 여정을 걸었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참회 시편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다른 사람이 쓴 참회 시편은 존재하기 어렵다. 왕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범죄를 기록하여 만인이 읽는 시편에 남길 권위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범죄한다 해도, 그 죄의 기록을 시편에 남기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lt;strong&gt;다윗만이 자신의 범죄와 참회를 시편으로 남길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영감된 말씀으로 보존&lt;/strong&gt;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이 참회 시편들은 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죄를 은폐할 때 사람의 내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 주는 자료&lt;/strong&gt;다. 신앙의 성장을 원하는 성도라면 다윗의 참회 시편을 반드시 깊이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도 언제든지 다윗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참회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그 참회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면, 우리도 동일한 길을 따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각 참회 시편이 담고 있는 메시지도 조금씩 다르다. &lt;strong&gt;시편 6편은 죄로 인해 육체까지 병들고 쇠약해진 상태&lt;/strong&gt;를 묘사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한다. &lt;strong&gt;시편 32편은 죄를 숨겼을 때의 고통과 자백했을 때의 해방을 대조&lt;/strong&gt;하면서, &lt;strong&gt;숨기지 않고 자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lt;/strong&gt;를 보여 준다. &lt;strong&gt;시편 38편은 죄로 인해 온몸이 고통받는 상태와 친구들과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처절한 상황&lt;/strong&gt;을 묘사한다. 그리고 &lt;strong&gt;시편 51편은 참회의 정수(精髓)로서, 내면 깊은 곳에서 올려드리는 가장 철저한 통회와 간구&lt;/strong&gt;를 담고 있다. 이 시편들을 함께 읽을 때 비로소 다윗의 회개가 얼마나 깊고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다윗이 범죄할 수밖에 없었던 네 가지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죄는 갑작스럽게 터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lt;strong&gt;왜 그 죄를 저질렀는지를 시편의 참회 고백을 통해 네 가지로 정리&lt;/strong&gt;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는 죄성(罪性), 즉 내면에 이미 악한 본성이 자리잡고 있었다&lt;/strong&gt;는 것이다. 시편 51편 5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원죄를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 다윗 자신의 출생 환경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취약성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어머니가 음란의 속성을 지닌 여인이었을 가능성, 그래서 그 악한 영의 영향이 다윗 안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다윗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아내들을 두었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천 명의 후궁을 두는 데까지 이른다. 세대를 거치며 그 욕망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그 아들 이삭도 동일하게 행하고, 야곱도 그랬다. 악한 영이 대물림되는 양상이 이처럼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인간은 각자 취약한 영역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음란에 취약하고, 어떤 사람은 거짓말에 취약하며, 어떤 사람은 권력에 취약하다. 이러한 취약성의 뿌리에는 악한 영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영역에서 특히 취약한지를 알고, 그 부분을 더욱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취약성을 아는 것이 곧 자기 방어의 첫걸음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lt;/strong&gt;이다. 특히 눈의 정욕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다윗은 저녁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다(삼하 11:2). 눈앞에 유혹이 펼쳐졌을 때, 그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오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 자리를 뿌리치고 도망쳤던 것(창 39:12)과 정반대의 반응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창 39: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하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람은 죄를 짓게 될 장소와 상황을 미리 알고 피해야 한다. 특히 음란의 죄는 그것의 유혹 앞에서 버텨 이기려 하는 것보다, 유혹이 시작되는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더 지혜로운 방법이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유혹에 넘어지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남녀가 단둘이 있는 상황, 욕망을 자극하는 장소와 환경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다. 이것은 상대방이나 상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지혜의 문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는 정신적 해이(解弛), 곧 경각심이 풀어진 것&lt;/strong&gt;이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다. 요압 장군과 군대가 암몬과 싸우는 동안(삼하 11:1),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자신의 부하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상황에서, 왕은 낮잠을 자다가 저녁에 일어나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1:1 그 해가 돌아와서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의 신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었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목적, 즉 백성을 섬기고 보호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흐려졌을 때, 죄가 파고들었다. 지도자가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고 긴장을 잃을 때, 그 자리에 죄가 들어온다. 더 나아가 권력이 있으면 주변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면서 경각심이 더욱 흐려진다. &amp;#39;내가 하는 것은 다 옳다&amp;#39;, &amp;#39;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amp;#39;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그것이 바로 무너지기 직전의 신호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넷째는 사탄의 공격에 넘어진 것&lt;/strong&gt;이다. 성경은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에 대해 &amp;quot;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amp;quot;(대상 21:1)고 기록한다. 이는 다윗의 삶 전반에 걸쳐 사탄이 그를 넘어뜨리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대상 21: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탄은 항상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벧전 5:8). 특히 하나님의 일을 맡은 지도자일수록 사탄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지도자일수록, 영향력이 클수록 더욱 기도하고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사탄의 속성을 따라가는 것이 곧 권력 남용이다. 높아지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통제하고 싶은 욕망은 사탄이 루시퍼 시절 가졌던 것과 동일한 욕망이다. 이사야 14장에서 루시퍼가 &amp;quot;내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amp;quot;(사 14:14)고 했듯이, 그 높아지려는 욕망을 쫓아가는 것이 결국 사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사 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다윗이 권력을 남용하여 사람을 착취하고 죽인 것은, 결국 사탄의 속성에 자신을 내어 준 것&lt;/strong&gt;이었다. 이 네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때,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인간의 세 가지 근본 약점은 무엇이며, 다윗은 어디서 무너졌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도 요한은 인간이 세상을 사랑할 때 작동하는 &lt;strong&gt;세 가지 근본 욕망을 명확&lt;/strong&gt;하게 정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는 육신의 정욕&lt;/strong&gt;이다. 이것은 &lt;strong&gt;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육체의 욕망&lt;/strong&gt;이다. 먹고 마시고 성적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윗의 간음죄는 바로 이 육신의 정욕에서 비롯되었다. 옥상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때, 그 욕망이 이성과 양심을 이긴 것이다. 육신의 정욕은 채울수록 더 강해진다. 다윗이 여덟 명 이상의 아내를 두었음에도 또 다른 여인을 탐한 것은, 육신의 정욕이 결코 만족을 모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비단 다윗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지도자들이 권력을 가진 이후 육신의 정욕 앞에서 무너졌다. 권력이 있으면 욕망을 채울 수단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은 욕망을 채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을 망각한 순간, 지도자는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는 안목의 정욕&lt;/strong&gt;이다. 이것은 &lt;strong&gt;소유욕, 곧 보이는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lt;/strong&gt;이다. 다윗은 옥상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amp;#39;보고&amp;#39; 갖고 싶어 했다. 눈으로 보는 순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점화된 것이다.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인 탐욕의 죄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amp;quot;보기에 좋고 먹음직하다&amp;quot;(창 3:6)고 느끼는 순간 손을 뻗었던 것처럼, 안목의 정욕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안목의 정욕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끊임없이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눈앞에 보여 주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안목의 정욕에 노출되어 있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타인의 것을 탐내는 마음, 그것이 안목의 정욕이 낳는 죄의 출발이다. 만족을 모르는 소유욕은 결국 타인의 것을 빼앗는 죄로 이어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는 이생의 자랑&lt;/strong&gt;이다. 이것은 &lt;strong&gt;자신을 높이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lt;/strong&gt;이다. &lt;strong&gt;자신의 업적을 드러내고, 권위를 확인받으려 하며, 자기 이름을 기억시키려는 욕망&lt;/strong&gt;이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이와 관련이 있다.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얼마나 큰지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생의 자랑이다. 나의 자리, 나의 지위, 나의 업적을 통해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욕망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세 가지 욕망은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종종 합쳐져서 더 강력한 죄로 이어진다. 다윗의 경우, 육신의 정욕이 안목의 정욕을 자극했고, 그것이 권력을 통한 탐욕으로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이생의 자랑 곧 아무도 왕인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자만심이 합류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다윗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우리는 스스로 어떤 욕망에 가장 취약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욕망이 자극받는 상황과 장소를 미리 알고 피해야&lt;/strong&gt; 한다. 다윗이 저녁 산책을 하며 옥상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 욕망은 점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죄는 대부분 그렇게 시작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자극이 거대한 죄의 출발점이 된다. 마가복음 10장 42절에서 44절까지 예수님은 이방인의 지도자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과 달리, 제자들 가운데서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막 10:43-44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다. 크고자 할수록 섬겨야 하고, 높아지고자 할수록 낮아져야 한다. 세상의 원리와 정반대다. 다윗이 이 원리를 잊었을 때 그는 무너졌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죄를 은폐한 열 달 동안 다윗이 겪은 내면의 고통은 어떠했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한 후 약 열 달 동안 그 죄를 은폐&lt;/strong&gt;했다. 밧세바의 임신이 알려졌을 때부터 아이가 태어나고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기까지, 다윗은 겉으로는 왕의 자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속으로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다윗의 그때의 그 고통을 시편 32편에 생생하게 남겨놓았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2:3-4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뼈가 쇠하였다&amp;quot;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극심한 내적 고통이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날 만큼, 다윗은 죄로 인해 피폐해졌다. &amp;quot;여름 가뭄에 마름같이&amp;quot;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극도로 수척해지고 생기를 잃은 상태를 가리킨다. 열 달 동안 이런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종일 신음하는 상태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6편에도 같은 고통의 흔적이 나타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는 밤마다 침상을 적실 만큼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내면 상태였다. 죄를 은폐하고 있었지만, 그 죄의 무게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하나님의 손이 그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이고 밤이고 죄의식이 그를 짓눌렀다. 눈물이 침상을 둥둥 뜨게 할 만큼, 즉 요를 완전히 적실 만큼 운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내면에 반드시 이런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양심은 죄를 기억하고, 하나님은 그 죄인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죄를 지으면 성령이 근심하신다(엡 4:30). 그 근심이 사람의 내면에 고통으로 나타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고통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었다. 죄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요압 장군에게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후 요압을 통제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요압은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의 반란에 가담하는데(왕상 1:7), 다윗은 이 요압을 끝내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 자신의 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을 제압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7 요압은 스루야의 아들로서 아도니야와 모의하여 따랐고 제사장 아비아달도 아도니야를 돕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죄의 은폐는 단기적으로는 문제를 덮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문제를 낳는다. 은폐된 죄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새어 나와 더 넓은 범위의 손상을 입힌다. &lt;strong&gt;다윗이 열 달 동안 겪은 내면의 고통은, 죄를 은폐하는 것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온몸으로 증거&lt;/strong&gt;하고 있다. 그러므로&amp;nbsp;나단 선지자가 왔을 때, 다윗은 즉시 자복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열 달간 쌓인 고통이 눈물과 통회로 터져 나온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amp;quot;는 고백 속에 다윗의 회개가 얼마나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는지가 담겨 있다. 죄를 자복하자마자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다. 이것이 회개의 능력이다. 은폐는 고통을 만들고, 자복은 회복을 만든다. 다윗의 열 달간의 고통이 이것을 정직하게 증언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범죄와 그 내면의 고통, 그리고 참회 시편이 남겨진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도 육신의 정욕과 권력의 남용 앞에서 무너졌다. 그가 저지른 죄는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이라는 네 가지 계명의 위반이었으며, 그 모든 죄의 뿌리에는 권력 남용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lt;strong&gt;다윗의 범죄의 배경에는 악한 죄성, 유혹에 넘어간 것, 정신적 해이, 사탄의 공격이라는 네 가지 근본 이유&lt;/strong&gt;가 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신앙의 경력이 아무리 화려해도 죄 앞에서는 안전 지대가 없다&lt;/strong&gt;.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불린 사람도 죄 앞에서 무너졌다는 사실은, 인간 누구도 자신의 의로움을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 10:1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lt;strong&gt;죄를 은폐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을 낳는다&lt;/strong&gt;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윗이 열 달 동안 뼈가 쇠하고 진액이 빠져나갈 만큼 고통받은 것은, 죄를 감추면 반드시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죄는 회개할수록 빨리 치유되고, 감출수록 더 깊이 곪는다. 바로바로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회개할 때 악한 영이 발붙이지 못한다. 시편 32편 5절의 다윗의 고백처럼, 자복하는 즉시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울러 권력과 지위는 섬기라고 주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윗의 죄는 하나님이 주신 왕의 권력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친히 &amp;quot;섬기러 왔다&amp;quot;고 하셨고, 자기 목숨까지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지도자는 더욱 낮아져야 하고, 더욱 섬겨야 한다. 권력을 착취에 사용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을 따르는 것이고, 권력을 섬김에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성을 따르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인간의 세 가지 근본 약점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앞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lt;/strong&gt; 한다. 이 욕망들이 자극받는 상황을 미리 피하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며 기도하는 것이 죄를 예방하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이다. 위대한 다윗도 이 욕망들 앞에서 무너졌다. 그러므로 누구도 자신은 괜찮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라도 항상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 10:12). 다윗의 참회 시편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교훈이 되어, 죄 앞에서 더 지혜롭게 서며 하나님 앞에 더욱 투명하게 나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05일(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성경 속 인물 다윗을 완벽한 성군으로 미화하기보다, 그가 가진 인간적인 결함과&amp;nbsp;&lt;strong&gt;권력 남용의 죄&lt;/strong&gt;를 정직하게 드러내며 참된 회개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아를 살해한 사건을 통해, 신앙의 경력이 오늘의 거룩함을 보장하지 않으며 누구든&amp;nbsp;&lt;strong&gt;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lt;/strong&gt;&amp;nbsp;앞에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특히 지도자가 갖춰야 할 본분은 군림이 아닌&amp;nbsp;&lt;strong&gt;희생과 섬김&lt;/strong&gt;에 있음을 강조하며, 다윗이 시편에 남긴 고통스러운&amp;nbsp;&lt;strong&gt;참회의 고백&lt;/strong&gt;들을 통해 죄를 은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오직&amp;nbsp;&lt;strong&gt;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lt;/strong&gt;만을 따르며 날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amp;nbsp;&lt;strong&gt;철저한 회개의 삶&lt;/strong&gt;을 촉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3661eb3c45128f213aba7f24ade06731.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2244cf5a4931e4b98dc8aa2c36fc976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ffe5cc6a43713e0b0f806bf0228a8d0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76f70e0c489105c2a598c84afb68d1b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3faab2a45ec982fc6fa867b5b21eef8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d207e4568c0f2f7b8de7a50c3ee9d34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e4168ac201841e0a598801ecd002fb0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69be0e5af8500b6689656367d6cc3ae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f447d90c2dd2f14b9830d20e6cdd2b9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72a439ba44b81259c9da384b791efa1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4b12fe2fece00b622d5f6451346f1d9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1e844422834b0268b282383dfd81361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8ddb17fe5f2239ace43efd5507f7bf0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3f2c8799a7612b77205d8278749ebae3.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a6d193364d780a21d657d6808c25b5f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b0f99971904945ab6b3600cc8edb2b5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8cd4fdbf8b659e5f3cda02e02f8efcc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adf083d6b75d43c0d7d56b18eee5804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e0380245918d1aced44821a8126efe4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e3d300c977cbb27745aea0845b00690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f510a4ad86e18565c1f69591b4e0513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34027387934a06c73d53022beef4ae8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288429d0648295e23c92f18f0586b60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3)] David_s_Fall_and_Restoration (1).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295/256/9e171391f6fab2733c8ee603406a03fa.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12)]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8) 다윗의 저주시,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시51:10~12)_2026-06-04(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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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04T09:16:28+09:00</published>
		<updated>2026-06-04T14:04:21+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2)]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8) 다윗의 저주시,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시51:10~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Bu-ht_hrNmM 1. 들어가며 시편을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믿음의 위인으로 존경해 온 다윗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한 저주의 말을 쏟아낼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원수의 혀를 잘라 달라고, 그의 자녀들이 고아가 ...</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12)]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8) 다윗의 저주시,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시51:10~12)&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Bu-ht_hrNmM&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Bu-ht_hrNmM?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을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믿음의 위인으로 존경해 온 다윗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한 저주의 말을 쏟아낼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원수의 혀를 잘라 달라고, 그의 자녀들이 고아가 되어 유리걸식하게 해 달라고, 그의 후손을 이 땅에서 끊어 달라고 기도한 다윗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amp;quot;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amp;quot;의 형상과는 너무도 달라 보인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문제는 오랫동안 많은 신학자와 설교자들을 난감하게 만들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한 대답은 &amp;quot;다윗이 악인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한 것&amp;quot;이라는 설명이었다. 직접 심판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 것이니, 그 정도는 용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다. 심판을 청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amp;quot;주여, 저를 벌하여 주옵소서&amp;quot; 정도는 우리가 아뢸 수 있는 기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과 수위를 정하여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징계의 수위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지, 피조물인 인간이 그 내용을 정하여 아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시편의 저주시는 단지 다윗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편은 공동체의 예배서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서 함께 부르던 노래였고, 레위 지파 찬양대가 큰 소리로 노래하던 예배의 내용이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양대장으로서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을 세우고 이들로 하여금 노래를 짓고 부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저주의 언어가 예배의 자리에서 울려 퍼졌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개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의 고백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우리가 공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말씀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저주시 안에 우리 모두에게 전하실 메시지를 담아 두셨다는 것을 뜻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더욱 중요한 문제는,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 저주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신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원수를 선대하라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향해 &amp;quot;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amp;quot;라고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행 7:60).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amp;quot;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amp;quot;라고 기도하셨다(눅 23:34). 그런데 다윗은 원수의 자녀들이 고아가 되게 해 달라고, 그들의 후손을 이 땅에서 끊어 달라고 기도했다(시 109:9-13). 이 간격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시들을 시편 150편 정경 안에 그대로 보존하셔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 주셨다. 이것이 단순히 한 인간의 개인적 감정 표출에 불과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성경 안에 남겨 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보존하신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가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lt;strong&gt; 다윗의 저주시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경륜을 네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lt;/strong&gt;한다. &lt;strong&gt;첫째는 어릴 때부터 쌓인 마음의 깊은 상처&lt;/strong&gt;, &lt;strong&gt;둘째는 그 상처를 타고 들어온 악한 영들의 역사&lt;/strong&gt;, &lt;strong&gt;셋째는 메시아 예언의 도구로 저주시를 쓰신 하나님의 섭리&lt;/strong&gt;, &lt;strong&gt;넷째는 구약 경륜상 성령이 인간 속에 내주하지 않았다는 한계&lt;/strong&gt;가 그것이다. 이 시간에는 다윗의 저주시가 기록된 이 네 가지 이유를 성경적으로 살펴보고, 성령을 받은 오늘의 신약 성도가 원수를 향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다윗의 저주시는 오늘의 성도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 준다. &lt;strong&gt;첫째,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 주는 반면교사의 가르침&lt;/strong&gt;이다.&lt;strong&gt; 둘째, 그 상처와 분노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면 메시아 예언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경륜&lt;/strong&gt;을 보여 주는 가르침이다. &lt;strong&gt;셋째, 성령을 내 속에 받은 오늘의 성도는 구약의 경륜적 한계를 넘어서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신약의 은혜를&lt;/strong&gt; 보여 주는 가르침이다. 이 세 가지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다윗의 저주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오늘의 삶에 바르게 적용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다윗의 저주시가 오늘날까지 성경에 남겨진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안에는 이른바 &amp;#39;저주시&amp;#39;라 불리는 본문들이 여럿 존재한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으로&lt;strong&gt; 시편 35편, 55편, 69편, 109편&lt;/strong&gt;을 꼽을 수 있다. 이 본문들은 원수가 일찍 죽어 그 아내가 과부가 되고, 자녀들이 고아가 되어 유리걸식하게 되기를 바라며, 그 후손이 이 땅에서 끊어지기를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시 109:9-13). 시편 150편에서 저주시의 대부분은 다윗이 썼다. 아삽의 이름이 붙은 것도 있지만, 그것 역시 다윗이 찬양대장으로 세운 아삽, 헤만, 여두둔과 같은 자들이 노래하도록 세운 것이었으니 다윗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다윗의 개인적 감정 폭발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을 시편 정경 안에 보존하셨는가? 이것이 우리가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할 질문이다. 성경의 어떤 내용도 우연히 그 안에 들어온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보존하신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저주시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이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목적을 발견하는 결정적 열쇠는 뜻밖에도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만나신 후, 열한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이렇게 선포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라 하시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시편은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것&lt;/strong&gt;이라고. 이 말씀은 시편을 단순히 인간의 노래나 기도로 보던 시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lt;strong&gt;고로 시편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서다. 이 관점을 가지고 저주시를 다시 읽으면 그 해석이 전혀 달라진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저주시의 대표적인 네 편을 살펴보면, 그 안에 &lt;strong&gt;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놀라운 정밀함으로 예언되어 있음&lt;/strong&gt;을 발견하게 된다. 시편 35편에는 거짓 증인이 등장하여 예수님을 고소하게 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시 35:11). 시편 69편에는 까닭 없이 미워하고 쓸개와 초를 마시게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69:4, 21). 시편 55편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 아히도벨이 배신하게 되는 내용이 나오는데(시 55:12-14), 이것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는 것이다. 시편 109편에는 머리를 흔들며 조롱당하고 수욕을 당하게 될 것이 기록되어 있다(시 109:24-25).&lt;strong&gt; 이 네 편의 저주시는 공통적으로 메시아가 고난받고, 버림당하고, 조롱당하는 내용을 정밀하게 예언&lt;/strong&gt;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억한 심정에서 쏟아진 저주의 언어들이 실은 장차 메시아가 당하실 고통의 목록&lt;/strong&gt;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상처와 분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붙드셔서 메시아 예언의 정밀한 그릇으로 만드셨다. 다윗이 저주의 말을 쏟아낼 때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신 이유가 여기 있다. 장차 메시아가 그런 고통을 당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 예언을 허용하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저주시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가장 본질적인 이유다. 그것은 &lt;strong&gt;하나님의 놀라운 경륜&lt;/strong&gt;이다. 인간의 상처와 분노조차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저주시는 웅변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다. &lt;strong&gt;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윗의 저주 기도는 과연 일치하는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신약의 가르침은 용서하는 것이고(마 18:21-22),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며(마 5:44), 원수를 선대하는 것&lt;/strong&gt;이다(롬 12:20-21, 마5:39-42). 저 사람의 혓바닥을 잘라 달라거나(시 55:9), 저 사람의 자식이 고아가 되게 해 달라는 것(시 109:9)이 신약의 기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성도가 다윗의 저주시를 보며 &amp;quot;그렇구나, 하나님께 심판을 청하는 것은 괜찮구나&amp;quot;라는 식으로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 &lt;span style=&quot;color:#d35400;&quot;&gt;&lt;strong&gt;저주시는 그 당시 구약 경륜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허용된 것이었지, 오늘의 성도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남겨 준 기도의 모델이 아니다.&lt;/strong&gt; &lt;/span&gt;인간의 상처와 분노조차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된다. 저주시 안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숨겨져 있고,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저주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단순히 한 인간의 분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곧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실 메시아의 발자취를 읽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메시아 예언에 있어서 독보적인 예언자였다. 선지자로서는 이사야를 최고봉으로 꼽을 수 있지만, 내용의 풍성함과 분량에 있어서는 다윗이 이사야를 능가한다. 다윗은 시편을 통해 메시아의 탄생, 사역, 고난, 죽음, 부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생생하게 예언하였다. 저주시도 그 예언의 일부였다. 누군가는 이 고난의 내용을 예언해야 했다. 다윗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생생한 언어로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없었다. 상처가 있으니까, 그 상처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토록 날카롭고 구체적인 예언이 가능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다윗은 왜 그토록 강렬한 저주의 말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그토록 강렬한 저주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lt;strong&gt;첫 번째 뿌리는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lt;/strong&gt;에 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이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왕을 기름 붓기 위해 찾아왔을 때, 이새는 다윗을 부르지 않았다. 양을 치러 보낸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일일이 댈 때 다윗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사무엘이 &amp;quot;이 아이들이 다냐&amp;quot;고 물었을 때 비로소 이새는 &amp;quot;아직 막내가 있는데 양을 치나이다&amp;quot;라고 대답했다. 아버지 이새에게 다윗은 왕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아이,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막내였다. 이것이 다윗의 출발점이었다. 시편 27편 10절에 다윗은 스스로 이렇게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짧은 고백 안에 다윗의 생애 전체가 담겨 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상처다. 부모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녀에게 주어진 존재다.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의 존재는 곧 세상 전부다. 아무것도 없어도 부모만 있으면 아이는 안전하다. 어디서 넘어져 이마가 깨지고 피가 흘러도, 엄마 품에 안기면 울음이 그치고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그러한 품이 없었다.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외면당한 경험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새겨졌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상처는 이후의 삶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건드려졌다. 사울왕에게 발탁되어 등용되는가 싶었지만, 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는 도망자가 되었다. 광야 어디를 가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갈멜산의 나발에게 양 떼를 지켜 준 대가로 도움을 청했다가 무시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이 놉의 제사장 무리를 몰살시키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 주변 사람들마저 하나둘 두려워하며 피해 갔다. 십황무지에서도, 아둘람 굴에서도, 사방이 막혀 버린 것 같은 고독과 버림받음의 감각이 다윗을 끊임없이 짓눌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이처럼 깊은 상처를 지닌 사람에게는 특유한 반응 패턴이 형성된다. 잠깐의 침묵, 응답의 지연, 조금의 외면조차도 완전한 버림받음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lt;/strong&gt;.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모든 것을 최악으로 읽어 내는 것이다. &lt;strong&gt;다윗의 저주시에 담긴 격렬함은 바로 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 가운데 그렇게 강렬한 저주의 언어가 터져 나온 것은 악한 본성 때문이 아니라, 거듭 버림받아 온 영혼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쏟아낸 절규였기 때문이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어릴 때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이 새겨지는지를 우리는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상처는 단지 기억 속에 머물지 않는다. 삶의 모든 영역, 관계의 방식, 말의 패턴, 위기 상황에서의 반응 방식 속에 뿌리를 내리고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다윗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상처를 안고 평생을 걸어간 사람이었다.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어떤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저주의 말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에게 상처를 가장 직접적으로 입힌 인물 중 하나가 도엑이었다. 에돔 사람 도엑은 사울의 신하로서, 다윗이 놉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을 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것을 사울에게 고발하였다. 그 결과 아히멜렉을 비롯한 놉의 제사장 85명 전부가 사울의 명령 아래 도엑의 손에 의해 몰살당하였다. 다윗이 도피 중에 잠시 머물렀던 그 장소에서, 자신을 도운 사람들이 전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죄책감과 분노가 시편 35편, 55편, 109편 등에 담긴 격렬한 저주의 언어를 낳았다. 직접 손을 쓴 것은 도엑이었지만, 그 뒤에는 사울이 있었고, 그 앞에는 무고한 피가 흘러 있었다. 다윗의 저주시에는 이처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상처가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다윗에게는 뛰어난 모사 아히도벨이 있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나중에 밧세바를 취하면서 우리아를 죽이게 되는 그 밧세바의 친할아버지였다. 그는 다윗의 생각을 백 가지나 미리 읽어 내는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런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면서 다윗을 배신하고 말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 가장 깊이 신뢰하던 자의 배신은 어떤 원수의 공격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시 55:13-14). 다윗에게는 그런 상처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상처들이 한계에 달하여 터져 나올 때, 저주의 시편이 탄생한 것이다. 다윗의 인생 전체가 저주시의 배경이었으며, 그의 상처의 총량이 저주의 언어들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시 55:13-14&amp;nbsp;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amp;nbsp;&lt;/span&gt;&lt;/strong&gt;&lt;br /&gt; &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어릴 때 받은 상처와 악한 영은 어떻게 연결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상처의 문제는 심리적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lt;strong&gt;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악한 영이 들어오는 문이 된다. 억울함을 당하게 하는 영, 배신당하게 하는 영,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영, 앞길을 막는 영들이 그 상처를 타고 들어와&lt;/strong&gt;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삶이 다시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마다, 그 영들은 상처를 건드려 더 강렬하게 폭발하게 만든다. &lt;strong&gt;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타고 들어온 악한 영들이, 그가 위기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강한 저주의 말을 쏟아내게&lt;/strong&gt; 하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다윗만의 문제가 아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 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목회자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로 강단에 서면, 그 상처에서 비롯된 독이 말을 통해 회중에게 흘러나간다. 은혜를 전해야 할 설교가 오히려 듣는 이의 가슴에 비수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설교가 나올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걸맞지 않은 폭력적 행동이 드러날 수 있다. 폭력의 영, 살인의 영, 미움의 영, 갈라치는 영들이 그 상처에 달라붙어 역사하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목회자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그 독을 빼내야 한다. 눈물은 독을 씻어 내는 영적 정화의 통로다. &lt;strong&gt;이 악한 영들의 영향은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흐름,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의 경로, 그리고 살면서 스스로 불러들인 영들이라는 세 경로를 통해 축적&lt;/strong&gt;된다. 이 세 경로가 합쳐지면 그 영향력은 더욱 강해진다. 다윗 역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영들, 어릴 때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 사울왕의 핍박 아래 도망자로 살던 삶이 서로 맞물려, 영적 나이가 높지 않았다면 그 감정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 앞에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 상처에서 비롯된 독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죄가 있고 자신도 악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면, 그 독이 더 많이 쌓여 있을 것이므로 더욱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상처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이 권력이나 지위를 얻게 되면 그 위험은 더욱 커진다. 공적으로 주어진 권한이 개인적 원한을 갚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울왕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주어진 삼천 명의 군사를 다윗 한 사람을 제거하는 데 쏟아부었다. 나라의 진정한 적을 향해 쓰여야 할 군사력이 개인적 시기와 원한을 위해 쓰인 것이다. 지도자에게 주어진 권력은 백성을 섬기기 위한 것인데, 상처받고 악한 영에 사로잡힌 지도자는 그것을 자기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 사용한다. 그런 지도자 아래에서 백성은 참으로 불행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순간적으로 억한 심정이 폭발하여 저주의 말을 내뱉기도 했지만, 실제 삶에서는 끝내 원수를 직접 갚지 않았다.&lt;/strong&gt;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왕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고, 압살롬의 반역 앞에서 피신하면서도 &amp;quot;그 청년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amp;quot;고 신신당부했다. 시무이가 저주하며 돌을 던질 때도 &amp;quot;하나님께서 그리하게 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amp;quot;고 했다. 나발을 죽이러 가는 도중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 한마디에 즉시 마음을 돌이켰다. 아도니아의 반역에 참여한 자들(요압장군, 아비아달 제사장)도, 압살롬에게 가담한 아마사도, 다윗은 죽이지 말라 했다. &lt;strong&gt;다윗이 자기 손으로 직접 처단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그의 영적 깊이를 증명한다. 그는 말로는 폭발했지만 행동으로는 절제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영적 나이가 높았기 때문&lt;/strong&gt;이다. 상처가 있고 악한 영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성숙함이 그 충동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을 막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영적 나이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영적 나이가 낮은 사람은 그 충동을 바로 실행에 옮긴다. 사울왕이 그랬다. 다윗이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자 즉시 시기심이 폭발하여 그를 제거하려 행동으로 옮겼다. 반면 영적 나이가 높은 사람은 충동이 일어나도 멈출 줄 안다. 아비가일이 나발의 어리석음을 사과하며 찾아왔을 때, 다윗은 이미 4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복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아비가일의 한마디 말에 즉시 멈추었다. &amp;quot;당신이 하나님이 세운 왕이 될 때, 이것이 당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amp;quot; 그 말 한마디에 다윗은 돌이켰다. 이것이 영적 성숙함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다윗은 시편 109편에서 도액을 향해 그토록 강렬한 저주를 퍼부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손으로 단 한 명도 처단하지 않았다. 말로는 쏟아냈지만 행동으로는 절제하였다. 하나님 앞에 억울함을 토로하고 심판을 요청하는 것과, 자기 손으로 직접 심판을 집행하는 것 사이의 선을 다윗은 끝까지 넘지 않았다. 이것이 다윗을 사울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차이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다윗의 저주시를 그냥 용납하거나 옹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표현이었다. 다윗 자신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시편 51편에서 하나님께 정한 마음을 새로 창조해 달라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다(시 51:10). 상처와 악한 영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저주시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한계 가운데서도 섭리 가운데 메시아 예언의 역사를 이루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저주시 네 편(35, 55, 69, 109편)에 감추어진 메시아 예언의 비밀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strong&gt;&amp;nbsp;다윗의 저주시&lt;/strong&gt;가 단순한 감정 표출이 아니라 &lt;strong&gt;메시아 예언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시편 35편, 55편, 69편, 109편&lt;/strong&gt;이다. 이 네 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놀라운 정밀함으로 예언되어 있다. 이것이 다윗의 저주시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남겨 두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이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 시편 35편&lt;/strong&gt;에는 거짓 증인들이 등장하여 의인을 고소하는 장면이 나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35:11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예수님의 재판 장면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 거짓 증인들을 세워 정죄하였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 증인들의 말이 서로 맞지 않을 정도로 거짓이었지만,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그 거짓 증거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 아무 죄도 없는 자가 거짓 증거로 죽음에 넘겨지는 그 고난이, 다윗이 원수들을 향해 쏟아낸 저주의 언어 안에 이미 천 년 전에 새겨져 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둘째, 시편 69편&lt;/strong&gt;에는 까닭 없는 미움과, 쓸개 및 초를 마시게 되는 장면이 예언되어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나를 끊으려 하는 자, 내 원수들이 강하오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내야 하나이다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신포도주를 마시게 되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25절에서 직접 시편 69편을 인용하시며 &amp;quot;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amp;quot;고 하셨다. 다윗이 쏟아낸 저주의 언어는 정확히 메시아의 수난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윗이 도액을 향하여, 자신을 박해하는 원수들을 향하여 던진 고통의 언어들이, 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경험하실 그 고통을 예언하는 말씀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셋째, 시편 55편&lt;/strong&gt;은 가장 가까운 친구의 배신을 예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5:12-14 나를 책망한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라면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라면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언한다. 예수님의 품 안에서 함께 먹고 마셨던 제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가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아 넘긴 그 배신의 아픔이 다윗의 시편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원수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밥상을 함께하고 성전에 함께 다니던 자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쓰라린 상처다. 다윗이 아히도벨에게서 그것을 경험하였고, 예수님이 유다에게서 그것을 경험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넷째, 시편 109편&lt;/strong&gt;은 저주가 메시아 자신에게 임하고, 머리를 흔들며 조롱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담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09:25 나는 또 그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나이다 그들이 나를 볼 때에 그들의 머리를 흔드나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십자가에서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조롱하던 장면이 마태복음 27장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시편에는 저주가 자신에게 임하고 금식으로 수척해지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모습의 예언이다. 예수님은 다윗의 저주시에 담긴 그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저주받을 우리를 구원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시편 109편에는 저주가 자신에게 임하고 금식으로 수척해지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모습의 더 깊은 예언이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amp;quot;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amp;quot;라고 선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도액을 향해 퍼부은 저주의 언어가 메시아에게 임하게 되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를 메시아가 대신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이것이 저주시 안에 담긴 가장 깊은 비밀이다. 저주시는 그 자체로 복음의 예언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저주시 네 편은 한결같이 메시아의 고난을 향해 있다. 거짓 고소, 까닭 없는 미움, 쓸개와 초, 친구의 배신, 머리를 흔드는 조롱. 이 고통의 목록들이 다윗이 원수에게 퍼부은 저주의 언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통의 정밀한 예언이기도 했다. 다윗의 상처와 격분이 없었다면, 이토록 생생하고 구체적인 예언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상처와 분노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붙드셔서 메시아 예언의 통로로 삼으셨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시편 51편은 구약 성도의 한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저주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열쇠가 있다. 그것은 시편 51편이다. 이 시편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이후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고 쓴 회개의 시다. 죄를 짓고도 1년 가까이 침묵하던 다윗이 나단의 직면 앞에서 마침내 무릎을 꿇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51:10-12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영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고백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lt;strong&gt; &amp;quot;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amp;quot;라는 간구다. 다윗은 왜 성령이 자기를 떠날까 봐 두려워했는가? 그것은 구약 시대의 성령 역사 방식에 대한 다윗의 깊은 이해에서 비롯&lt;/strong&gt;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사람들 속에 내주하지 않았다. 성령은 그들 위에 임했다가 그들이 죄를 지으면 떠나는 방식으로 역사하셨다. 사울왕이 그 대표적인 예&lt;/strong&gt;다. 또한 구약 시대의 성령 역사는 선택적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삼손&amp;middot;기드온&amp;middot;사울&amp;middot;다윗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사람들에게만 임했다. 그들에게 임한 성령도 그들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 머무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죄를 짓는 순간 그 성령이 떠나 버리고, 그 자리에 악한 영이 들어오는 일이 벌어졌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16:14-15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령이 사울을 떠나자, 악한 영이 그 자리를 채우고 그를 번뇌케 하였다. 한때 예언을 하며 하나님의 사람처럼 행동하던 사울이, 성령이 떠난 후에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시기하고 죽이려 하는 자로 전락하였다.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도, 죄를 분별하는 영적 감각도 없다. 그것이 구약 경륜의 구조적 한계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눈앞에서 사울왕의 최후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같은 길을 걸을까 두려웠다. 구약 시대에 단 한 사람 귀신을 알아보고 수금으로 그것을 쫓아낼 수 있었던 다윗이었다. 구약에서 귀신을 분별하고 음악으로 그것을 쫓아낸 사례는 다윗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영 분별력을 가졌는지를 보여 준다. 그 영 분별력이 가능했던 것도 위에 임한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었다. 그는 성령의 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밧세바와의 죄를 지은 후 1년 가까이 침묵한 것도, 나단 선지자가 그를 직면하기 전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도, 성령이 내 속에 없기 때문에 죄의 심각성을 즉각적으로 깨닫는 내적 감각이 없었음을 보여 준다. 오늘의 성도라면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죄를 짓는 순간부터 내면 깊은 곳에서 양심 곧 영의 가책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다윗에게는 그 내주하시는 성령이 없었기 때문에, 예언자의 직면이 있기 전까지 그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구약 성도의 한계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범죄 이후에 위에 머물러 있는 성령이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구한 것이다. 그 성령이 있어야만 영 분별의 은사도 있고, 지혜의 말씀도 있고, 지식의 말씀도 있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다윗의 저주시를 이해하는 네 번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lt;strong&gt;다윗이 저주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구약 경륜상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속에 내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이 내 속에 없으면 무엇이 죄인지를 내부에서 가르쳐 주는 기능이 없다&lt;/strong&gt;. 어떤 상황이 왔을 때 그 안에 있는 상처와 악한 영이 거름막 없이 폭발하게 되어 있다. 다윗의 저주는 악한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 없이 살아야 했던 구약 성도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 한계 안에서 다윗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따랐지만, 성령의 내적 통제가 없다는 구약의 한계가 저주시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구약과 신약의 경륜 차이에서 성령의 내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이 한계를 영원히 그냥 두지 않으셨다. 다윗의 시대로부터 약 40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새로운 경륜을 약속하셨다(B.C.585) 성령이 인간 안에 들어가 거하게 하겠다는 약속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내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amp;quot; 이것이 신약 경륜의 핵심이다. 성령이 밖에서 임했다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속에 들어와 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령이 &amp;quot;너희 속에&amp;quot; 계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성령이 내주하심으로써 무엇이 달라지는가? 요한복음 16장 8절 이하에 따르면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성령이 내 속에 계시면 무엇이 죄인지를 내부에서 즉각적으로 깨우쳐 주신다. 원수의 혓바닥을 잘라 달라거나 그 자식이 고아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려 할 때, 성령이 그것이 죄임을 즉시 가르쳐 주신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결정적인 차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더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이 한번 들어오면 절대로 떠나지 않는가? 히브리서는 이에 대하여 엄중하게 경고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 6: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을지라도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될 수 없다는 경고다. 신약 시대에도 성령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주하시는 이 은혜를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행동을 반복하면 결국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되고, 성령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된다. 양심은 영이고, 그 영이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는 기관이다. 회개하지 않아서 악한 영이 양심을 덮어 버리면, 양심이 어긋난 행동과 말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구약 성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강렬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 시대 내내 성령 없이도 하나님을 따르려 했던 성도들의 몸부림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한계를 끝까지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십자가,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라는 일련의 구원 경륜을 통해 마침내 새 언약의 시대를 여셨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를 끝까지 놓지 아니하고 회개시키겠다는 뜻을 새로운 경륜으로 선포하셨다. 구약 시대에 성령이 위에만 머물다가 죄를 지으면 떠나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한 길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속에 넣어 주시는 새로운 경륜을 세우셨다. 이것이 신약의 은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에 날마다 순간순간 순종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삶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 시대에도 삼손, 기드온, 사울, 다윗처럼 특별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역사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 임하는 방식이었고, 그것마저도 죄를 지으면 떠났다. 노아의 시대 이전에는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세기 6장에서 인간의 악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amp;quot;내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amp;quot;라고 결정하셨다. 그 이후로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가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하셨다. 그 한계 안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살았고,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령이 내 속에 없으면 죄가 죄인지를 내면에서 즉각적으로 알려 주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상처가 폭발하고 악한 영이 역사할 때 그것을 막아내기가 훨씬 어렵다. 구약 성도들에게 그것이 한계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성령이 내주하는 오늘의 성도는 원수를 향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령이 내주하는 신약 시대의 성도는 원수를 향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다윗처럼 저주시를 쓰는 것이 허용되는가? 그렇지 않다. 신약의 경륜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나를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하셨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무리를 향해 무릎을 꿇고 &amp;quot;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amp;quot;라고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amp;quot;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amp;quot;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이 신약이 보여 주는 원수를 향한 기도의 표준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오늘의 성도가 원수에게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억울함, 그 고통, 그 분노를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은 기도다. 자백은 허용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구체적인 저주의 내용을 청원하는 것은 신약 성도에게 허용되지 않는다&lt;/strong&gt;. 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게 해 달라거나 저 사람의 혓바닥을 잘라 달라는 기도는 성령이 허용하지 않는다. 심판의 내용과 수위는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amp;quot;주여,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amp;quot;다. 그것이 신약 성도에게 허용된 한계선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시편 109편의 저주시에 담긴 고아의 이미지를 예수님이 직접 역전시키신 것이다. 다윗의 가장 뼈저린 아픔이 고아처럼 버려진 것이었고, 그 아픔이 시편 109편의 저주로 터져 나왔다. 원수의 자식들이 고아가 되게 해 달라는 그 저주의 언어 안에는 다윗 자신이 고아처럼 버려진 상처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amp;quot;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amp;quot;고 하신다. 다윗의 저주 속에 담긴 고통이 결국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약속의 뿌리가 된 것이다. 저주시는 메시아 예언이 되었고, 그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더 나아가 진정한 신약적 기도는 그 한계선조차 넘어선다. 사울을 바울로 바꾸신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는 저 사람도 바꾸실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그가 변하여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기를 기도하는 것이 신약 성도의 기도&lt;/strong&gt;다. 원수의 죄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용서해 달라고, 그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음성에 따른 기도다. 가장 악독하게 나를 핍박하고 교회를 멸하려 했던 사울이, 누구보다 뜨겁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되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바로 그 사울일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 자, 인생을 돌이킬 수 없이 상처낸 자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일이다.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 사람, 자신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람을 향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다. 스데반도 혼자의 힘으로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7장 55절은 그가 &amp;quot;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amp;quot;았다고 기록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스데반이 원수를 용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원수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 없이 원수를 향한 축복의 기도는 위선이 된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원수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임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 기도를 가능하게 하신다. 다윗처럼 저주의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축복하고 중보하는 것, 그것이 성령을 받은 신약 성도의 삶이다. 저주하는 말 하지 말고, 저주했다면 그것을 고백하고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를 축복하고 그가 사울처럼 귀중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마땅한 삶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저주시가 기록된 네 가지 이유와 그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lt;strong&gt;다윗의 저주시는 단순히 한 신앙인의 실수나 감정 폭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쌓인 버림받음의 상처가 낳은 절규였고,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타고 들어온 악한 영들의 역사였으며,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메시아 예언의 도구로 허용하신 것이었고, 구약 경륜상 성령이 사람 속에 내주하지 않았던 경륜적 한계가 드러난 것&lt;/strong&gt;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령이 내주하시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구약의 성도들이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특별한 은혜다. 구약의 성도들이 그 속에 성령 없이도 그토록 하나님을 따르려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반면 오늘의 성도들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이 엄청난 은혜를 받고도 구약 성도보다 못한 삶을 살기도 한다.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성령의 음성을 외면하고, 저주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것은 신약의 경륜을 오히려 구약보다 후퇴시키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 우리는 다윗과 다른 시대, 다른 경륜 아래 살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새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보내 주신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죄인지를 내면에서 즉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lt;span style=&quot;color:#d35400;&quot;&gt;&lt;strong&gt;구약의 경륜적 한계는 신약의 성령 내주로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도는 저주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 억울한 감정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저주의 내용을 청원하는 것은 성령의 통치를 벗어난 행위다.&lt;/strong&gt; &lt;/span&gt;신약의 성도에게 성령이 허용하시는 최대치의 기도는 &amp;quot;주여,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amp;quot;이며, 그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원수가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되기를 중보하는 것이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오늘의 성도가 드려야 할 기도는 원수를 향한 저주가 아니라 원수를 향한 중보다&lt;/strong&gt;. 나라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악한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하나님이 느브갓네살을 하루아침에 미치게 만들어 권좌에서 쫓아낸 것은 백성들의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이었다. 나라를 살리고 전 세계를 살리는 마지막 열쇠는 우리 자신의 회개에 있다. 믿는 자들이 자기 집에서부터 회개 기도를 드리고, 그것이 전 세계 선교를 통해 확장될 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마지막 사람들을 세워 가실 것이다. 이것이 저주시 안에 담긴 하나님의 최종 메시지다. &lt;strong&gt;저주시를 제대로 이해한 성도는 저주의 기도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본문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고, 치유되지 않은 것들을 회개의 눈물로 녹여내며, 성령의 내주에 감사하게 된다&lt;/strong&gt;. 다윗이 상처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들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원수까지도 품어내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가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며 나아가 이 나라와 전 세계를 살리는 마지막 열쇠가 된다. 다윗의 저주와 상처가 메시아의 고난 예언이 되었고, 그 메시아의 고난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으며, 그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제 원수까지도 품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다윗의 시대는 저주시가 필요했던 시대였다. 그러나&lt;strong&gt; 우리의 시대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시대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그만큼 결정적인 경륜의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아는 성도는 저주하지 않는다. 성령이 속에서 허용하지 않기 때문&lt;/strong&gt;이다. 성령이 가르쳐 주는 대로 죄를 자백하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원수를 위해 중보하며, 그것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기도의 물결이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lt;span style=&quot;color:#d35400;&quot;&gt;&lt;strong&gt;저주시는 구약의 산물&lt;/strong&gt;&lt;/span&gt;이다. 성령 내주의 은혜를 받은 오늘의 성도에게 저주시는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그 자리에 중보가 서야 한다. 그리하여 저주 대신 축복을 선택하고 원수를 위해 중보하며, 나를 핍박한 그 사람이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04일(목)&lt;/p&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시편에 나타난&amp;nbsp;&lt;strong&gt;다윗의 저주 시편&lt;/strong&gt;을 어떻게 기독론적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지 그 근거와 이유를 네 가지 핵심 원리로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의 격렬한 분노가&amp;nbsp;&lt;strong&gt;어린 시절의 거절감과 상처&lt;/strong&gt;, 그리고 그 틈을 타고 역사한&amp;nbsp;&lt;strong&gt;악한 영의 영향력&lt;/strong&gt;에서 비롯된 인간적 한계임을 밝히면서도, 하나님께서 이를&amp;nbsp;&lt;strong&gt;메시아의 고난을 예고하는 예언적 도구&lt;/strong&gt;로 섭리 가운데 사용하셨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구약 시대는 성령이 인간 내면에 거주하지 않았던&amp;nbsp;&lt;strong&gt;구속사적 경륜의 한계&lt;/strong&gt;가 있었음을 지적하며, 성령이 내주하는 신약의 성도들은 원수를 저주하기보다&amp;nbsp;&lt;strong&gt;용서와 사랑의 법&lt;/strong&gt;을 따라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다윗의 개인적 감정 토로를 넘어, 그 고통의 고백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amp;nbsp;&lt;strong&gt;예수 그리스도의 비참한 희생&lt;/strong&gt;을 미리 보여주는 정밀한 계시였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8e0f053325d7d6b0471e8df094a8a9b4.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4f288ea16589aa2ab27ab7d30c8b6cf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832c0f27df90df530e9d32440260f9e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d81c527aab19320a69d433178f14787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76666a6fa1e00f6bb56988e872aec8e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ddb08a53c93ca16b16a83953df41b1e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f8b7c941494c1fa3d5922de747f5982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907d07e040fb61205aa177b20fc7fa6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b35397227f03fb4676c26d02238c81b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115f5b083719f892081e424bfc852a9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3936e0ee4335cf4e7b4ae07345aa9c9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ff48a2dab923550689d643fcd91a289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74a1378982e34f83804799a1d453a60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366f87ddd6e932224bf740392559ea7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Redeeming_David_s_Curses.pdf_14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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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f862305741ed82ced0deea8f0ad3a5a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f80f35bc135f308744b193f0459f576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5854c8a3579ff69b18f0c646de99ebc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9d6324af3b885bc2854f63b59365bee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121bef4b1106b56b0574572d60aad9c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ad67bdbf8678cdfe40ef6659be855b4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929f437ec2ff3106582f930c46bc398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181b3e08e14fa951862f23e59dbe2e8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8e07cd270155c50ef077c13dbed8638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02cd6743da2d4f6cd1640290b259715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af7aed1605ee3ac9da68fe42e6c2a3a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2)] The_Anatomy_of_David’s_Curses.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256077/320/256/62cb822c39498b8227391e982b901ad8.webp&quot; /&gt;&lt;/p&gt;</content>			</entry></fe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