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29)] 다락방강화(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요13:31~14:15)_2023-08-30(수)

by 갈렙 posted Aug 3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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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Q-xColgXlB0
날짜 2023-08-30
본문말씀 요한복음 13:31~14:15(신약 171면)
설교자 정보배목사
주제어 영광,새계명,제자도,거처,보혜사성령도래,기도응답,베드로와도마의질문,예수님과아버지의관계,

2023-08-30(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9)] 다락방강화(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요13:31~14:1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Q-xColgXlB0 [또는 https://tv.naver.com/v/40839383]

 

1. 들어가며

  우리는 요한복음 중에서 13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을 가리켜 다락방강화라고 부른다. 사복음서에는 3종류의 집중적인 말씀이 있으니, 산상수훈의 말씀(마5~7장)과 다락방 강화(마24~25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락방 강화(요13~17장)의 말씀이 있다. 오늘 우리는 이것들 중에서 지난 주에 이어 다락방강화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락방강화란 예수께서 인류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 자리인 마가락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그리고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가룟유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언급하셨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룟유다가 떠난 뒤,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언급하셨다. 그러자 걱정하는 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3가지 약속을 해주셨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면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해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 인류를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절절한 고백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 이후에 주신 다락방 강화의 첫번째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2.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자 왜 예수께서는 그 일로 인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대체 어떤 경우 영광을 받으시는가? 예수께서는 가룟유다가 자신을 팔려고 나가자 자신이 이제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들로 인하여 하나님도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다(요13:31~32). 왜 예수께서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자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인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이 영광인지를 알려준다. 요한복음은 크게 표적의 책(요1~12장)과 영광의 책으로 나뉜다(요13~21장). 그중에서 영광의 책은 다락방강화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는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라는 개념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크게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뤄지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좁은 의미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실행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탄마귀와 죽음이 정복되며,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여 원래 있던 영광스러운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서 부활승천하시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일이 직접적인 실행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것이었다.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순간에 인자가 영광을 얻었으며, 아버지도 그 일로 인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불법을 행한 사탄마귀가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에 떨어질 인류의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새 계명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가시면서 이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새 계명을 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사실 옛 계명을 축약한 것이다. 사실 옛 계명은 십계명을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단 두 계명들로 요약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신6:5, 레19:18).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들을 한 번 더 축약하셨다.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시간적으로 새로운 이라는 의미의 '네오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아니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이라는 의미의 '카이노스'가 쓰였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을 압축한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질적으로 새로운 계명이 되는가? 그것은 첫째로,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과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기 때문이요, 둘째로, 거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했던 것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과 범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것은 옛 계명에서 이웃사랑이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었는데, 새 계명은 그 범위를 제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서로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것고 같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요13:1). 귿들의 목숨이 끊어져 더이상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을 때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비근한 예로서,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자신을 배신하여 팔아넘긴 가룟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사건이다(요13:4~11).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목숨을 제자들을 위해 내놓는 것이었다(요15:12~14). 그렇다. 주님의 사랑은 이처럼 끝없는 사랑이요 조건없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용서해주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배워서 실천함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고로 예수께서는 제자도의 표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3:35).

 

4.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어디로 가신다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족식을 통해 보여주셨고, 가룟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부여하심으로 보여주셨다. 그래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비롯한 인류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놓으셔야 했다. 그러나 그분의 떠나심은 단순히 제자들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가졌던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시기 위한 떠남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 떠나가실 곳은 대체 어디인가? 다락방강화에 따르면, 그것은 4가지 표현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보내셨던 이'이자(요16:50, '하나님'이시며(요13:3), '아버지'를 향하여(요16:28)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는 곧 '아버지의 집'(요14:2) 곧 '천국'(요17:24)이다. 이것은 인자가 이전에 있었던 곳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땅에 창조되기도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스러운 존재로 아버지의 품 속에 계셨다(요1:18). 그러다가 때가 되어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전에 있던 곳으로 떠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서 "내가 가는 곳을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 올 것이다"(요13:36)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곧바로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과 사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마치게 되면 베드로도 주님의 뒤를 이어 죽음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지금 왜 주님을 따라갈 수 없느냐고 하시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이라고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의 용기를 가상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래서 실족하지 않도록 얼마 안 있다가 닭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해주셨다(요13:38). 

 

5.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몇 가지로 말씀하셨는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비록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지만 그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3가지 이유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첫째로, 주님의 떠나가심을 아주 버림이 아니라 잠시 떠나가는 것으로서 곧이서 자기를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는 일이므로 근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요14:16~19). 그러므로 오히려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그 단어가 뜻하는 바 대로 '돕는 자'로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자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주님이 비록 떠나간다고 할지라도 제자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하면 그 기도소리를 들으실 것이요 기도한 대로 시행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요14:13~14). 우리는 여기서 기도응답의 주체가 누군가를 보게 된다. 이전까지 기도응답의 대상은 하나님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시면 자신이 제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한 마디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실은 그분이 하나님 자신의 또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잠시 떠나가 있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관계를 청산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 곧 아버지의 집에 가서 그들이 살 장소를 마련하고 처소를 준비하러 가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요14:2~3). 그래서 거처가 준비되면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그리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떠나가심을 제자들을 처소를 준비하기 위해 떠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근심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인 것이다. 

 

6. 장차 제자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가?

  예수께서 천국에 먼저 가신 이유는 천국에서 제자들이 살 처소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천국에 집을 잘 지어보려고 이 땅에 사실 때에 그의 직업으로 목수의 일을 하셨다. 그래서 목수의 아들로 30년을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집을 잘 지어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우리 성도들이 거주할 처소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2층천에 있다. 사도 바울은 고후12장에서 자신이 셋째하늘(삼층천)에 다녀왔다고 간증했다. 그렇다면 3층천은 또 어디인가? 천국에 가보시지 않은 분은 이것을 잘 모르겠지만 천국은 두 개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지구 위의 새들이 날아다니며 은하계의 별들이 있는 하늘이 1층천이라며, 천국은 두 개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래층(2층천)에서 사람들이 거주한다. 그리고 윗층(3층천)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천국 성도들은 평소 때에는 2층천에서 살다가 예배드릴 때에 3층천으로 올라가서 예배드린다. 참고로 천국의 마을은 총 24개의 마을로 구획이 나눠져 있으며, 거기에는 24장로들이 왕노릇하고 있다. 이들이 예배 때가 되면 자신의 마을 사람들을 이끌로 3층천으로 올라와서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절기가 되면 24마을에 사는 모든 천국성도들이 다 3층천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린다. 이 모든 사실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 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이다. 

 

7. 왜 예수님만이 하늘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기 위한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인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딘지를 알려주신다. 그것은 그 길을 모른다고 도마가 언급했기 때문이다(요14:5). 그때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자기선언 가운데 6번째 선언으로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신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올 수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가 예수님 없이는 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살 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며, 아버지의 집을 어떻게 가는지 가르쳐주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때, 당신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때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면,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수가 없으시다. 자기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니 자기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를 이미 본 채 있었는데도 자신의 실체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언급하셨다. 고로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을 아는 채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도 아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또한 보았다면 이미 아버지도 안 것이고 또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7). 그러자 빌립이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달라고 했다(요14:8).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인데 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면서,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또한 아버지 안에 예수께서 계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10). 고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시고 있는 레마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거하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또다른 자기 계시이자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예수께서는 이미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자신이 누군지를 알려주셨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여호와로 믿고 있는 바로 그분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자기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자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8:24,28,5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미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10:30).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두 분인가 한 분인가?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쉽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분이셨다(신6:4).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정하시고 아들 안에서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와서 천국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도록 하실 계획을 세우셨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할 줄도 아신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방도를 고민하셨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을 속죄제물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흠없는 속죄제물이 될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사람이 되셔서 인류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래서 아들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이므로 예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늘에는 보내신 아버지가 계시면서 동시에 이 땅에 보내어진 아들로 존재할 수 있었다.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아들인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려고 죽기 위해 사람이 되어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했다(행20:28).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를 흘리실 수가 없다. 그런데 죄속함은 오직 피흘림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흘리기 위해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또다른 자기 계시이자 또다른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내 말은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으려면 유일하신 한 분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보내셨던 또 다른 하나님의 표현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다(요17:3). 

 

9. 왜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시기 전에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을 허락하셨는가?

  예수께서 떠나가시기 전, 주님은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을 받아주셨다. 베드로의 질문은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 그곳을 알 수 없기에 그곳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요13:36). 그리고 도마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자신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요14:5). 그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자신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그 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진리이며, 그 길로 들어서도록 해주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14:6). 그리고 바로 아버지되신 그분이 자기 안에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자기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는 결국 제자들이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이며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을 통해 예수께서 아버지로께로 가는 중보자이심과 동시에 하나님 자신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베드로의 고귀한 질문을 통해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마16:16), 도마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요20:28). 바로 이 두 사람의 질문이 있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며 왜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10. 나오며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죽음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바로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 죽음은 영광의 부활을 위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당신이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을 기뻐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남겨두고 떠나가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그들이 당신이 떠나가면 근심하고 두려워할까봐 그들에게 유언으로 말씀을 남기셨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3~17장에 나오는 '다락방강화'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남기고 간 이 말씀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잠시 떠나가시면 조금 있다고 보혜사 성령을 당신을 대신하여 돕는 자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때라도 필요한 것이 있어나 위험한 일이 있을 때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기도다. 그리고 예수께서 천국에 먼저 가신 것은 우리가 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기 기뻐할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 잠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간 것은 제자들을 아주 떠나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버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미래를 준비해주기 위함이요, 또한 영이 되셔서 항상 제자들의 곁에서 제자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떠나가신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것마다 채워주시기 위해 떠나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신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보혜사 성령을 환영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금이라고 기도하여 필요한 것을 얻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비록 잠시 떠나가심이 영원한 떠나가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를 배려하시는 방법의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응답을 자신이 해 주신다는 말씀 속에서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요14:14).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인들에 대하여 나타내신 사랑이 곧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신성만 가지고 있어 결코 죽으실 수 없으셨기에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기 위해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한 분 하나님, 곧 예수님께 영원히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할렐루야. 

 

 

2023년 08월 30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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