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3(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9)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한 영적인 의미(02)(요1:29~5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uGt4yD3nMHw [혹은 https://tv.naver.com/v/28369698 ]
1. 들어가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것은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서 생명을 얻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요20:31). 더욱이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에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대체 누구시며, 그분이 보내셨던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기노스코'라는 단어로서 이는 배워서 아는 것이고 경험하여 아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 주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알아야 영생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가서 우리가 누리게 될 지위와 영광도 다 이 생명의 분량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서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이 고백했던 예수님이 누군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첫 번째는 지난번에 말씀드렸고 오늘은 2번째에서 5번째까지의 그의 신앙고백들을 살펴볼 것이다.
2. 요한복음의 주제는 무엇이며 이와 관련된 부주제는 무엇인가?
요한복음은 그 주제가 아주 선명하다. 그것은 곧 '생명'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1장부터 마지막 21장까지 생명으로 풍성하다. 요한복음에서 '생명'(조에)이라는 단어는 총 36번 등장하며 각 장에 나오는 말씀들이 모두 생명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나님인 말씀(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다(1:4).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었던 것처럼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있게 하셨다(5:26). 그러므로 예수님은 생명이요(14:6), 생명의 떡(6:35,48)으로서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10:10). 그리고 이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생명을 얻게 되며(6:40),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6:63). 그분을 따라가야 생명의 빛을 얻는다(8:12). 그리고 진짜로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자에게 주께서 생명을 주신다(10:28). 또한 그분을 믿게되면 죽어도 다시 생명을 얻게 되며(11:25~26),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갈 수도 있다(14:6).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은 한 분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셨던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17:3).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그렇다. 이처럼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생명이 무엇이며, 생명은 어떻게 얻으며, 생명을 얻는 자는 결국 어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생명과 더불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이 하신 일이다. 그것을 가리켜 요한복음에서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랑'이란 '아가페'를 가리키는데, 아가페 사랑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행하신 그러한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한 마디로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그러자 하나님께로부터 아들이 나오셔서 사람이 되셨고 공생애를 사신 후에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부주제는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생명'이 일종의 상태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사랑'은 행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사랑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를 보고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3:16).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다(1:14). 그리고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셨다(12:25). 그리고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한 가지를 부탁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35)". 그리고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바치면서 "다 이루셨다"(요19:30)고 말씀하셨다. 이는 인류를 위한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부탁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요21:15~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속성이 '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그분이 이 생명을 우리 인간들에게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아들로 오셔서 죽으신 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희생에 대해 세례 요한은 다섯 가지로 신앙고백을 했다.
3.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신앙고백을 했는가?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 그는 예수님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보내어진 인물이다. 그는 메시야를 소개하기 위해 이 땅에 오리라고 예언되었던 구약의 엘리야였고 그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는 메시야가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면서 자기에게 오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 앞에 어떤 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분 위에 내려와 머물렀다. 그러자 그는 그가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인 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 되었다. 그런데 그분이 그날에 자신에게 나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는 예수를 응시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들어올리는, 없이 하는) 하나님의 [희생 제물용의] 어린양(암노스)이로다"(요1:29).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이분은 나 자신이 말하였던 분에 대한 것입니다. 내 앞에 있게 된 채 있는 바, 내 뒤에 어떤 남자가 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보다 먼저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요1:30 헬라어 직역).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세례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이 누군지를 5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다섯 가지 순서는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29절). 둘째, 그는 먼저 계신 이이시다(30절), 셋째, 그는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이시다(33절). 넷째,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이시다(33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34절). 한편 이러한 다섯 가지 세례 요한의 신앙고백을 다른 방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의 본래적인 속성으로 볼 때 그분은 '먼저 계신 이'이시다(30절). 그리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로 볼 때 그분은 아들이 되셨고(34절), 성령께서 그분 위에 항상 머물러 계셨다(33절). 그리고 세상 죄를 지고 가셔서 그것을 없이 하셨다(29절). 이것이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분은 죽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주시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고 계신다(33절).
4. 예수께서 '먼저 계신 이'라는 고백은 무슨 뜻인가?
세례 요한은 두 번째로 예수님을 자기보다 '먼저 계신 이'라고 고백했다(30절). 여기서 '먼저 계신 이'라는 말의 본래적인 뜻은 '먼저부터 있어 왔던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먼저 있어 왔던 이였을까? 이것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먼저 있어 왔던 분이라고 친히 말씀하신다(요8:53). 이것은 요한복음 8장에 가서 더 자세하게 배우게 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물었다. "당신은 나이가 아직 50세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을 수 있느냐?" 그러자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이전에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요8:53). 그렇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이 곧 자존하신 이이셨던 것이다. 그분은 원래 한 분 하나님으로 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고 이 땅으로 들어오셨던 것이다. 그분만이 선재자이신 것이다. 사실 모든 피조물은 창조되던 날에 생기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셔서 인간이 되신 분이다. 그러므로 훗날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먼저 나신 이'라고 고백한다(골1:15). 여기서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토토코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먼저 계신 이'라는 말과 동일한 뜻을 가졌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더욱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는데, 그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였다는 것이다(골1:15). 그렇다. 그분은 모든 만물이 있기 전에 계셨던 이이셨다. 이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의 원형이요 으뜸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이 이분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이분을 위하여, 이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골1:1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분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7). 그리고 그분은 부활의 몸으로서도 첫 번째이시다(골1:18).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사신 첫 번째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5:20). 결국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이로서, 첫 번째 부활의 몸을 가지신 분이 되셨다. 이는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이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5. 예수께서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라는 고백은 어떤 뜻인가?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 번째로 '성령께서 머물러 계신 이'라고 고백하였다(33절).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분에게 세례를 줄 때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그분 위에 내려왔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33절). 그리고 성령께서 그분 위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은 사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바 그대로였다. 왜냐하면 대표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 위에 장차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사42:1). 그리하여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는 긍휼과 자비가 많아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예언이 당신을 위한 예언이라고 말씀하셨다(마12:18~21). 그리고 더불어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 위에 임하는 영은 주 여호와의 영으로서, 그 영이 머물러 계신 이가 나타나게 되면, 그분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갇힌 자에게는 놓임을 선포할 것이라고 하셨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인 희년을 선포할 것이라고 하셨다(사61:1~2). 그런데 그대로 되었다(눅4:18~19).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는 곳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들을 고쳐 주셨으며, 귀신들려 고통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셨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3대 0으로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마귀의 부하들인 귀신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분은 희년을 선포하셨다. 그래서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셨다. 왜냐하면 희년이 되면 노예는 해방시켜 주어야 하고, 땅과 집(가옥)은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율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레25장).
그렇다면 그때 예수님 위에 내려오신 성령은 어떤 영이었을까?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기를 장차 오실 메시야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은 6가지의 속성을 지닌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것은 '지혜와 총명의 영'이자, '모략과 재능(능력)의 영'이며,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라고 하였다(사11:2). 그래서 바로 이러한 성령께서 예수 위에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이러한 영과 더불어 사셨는데,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이렇게 고백하였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이렇게 고백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며,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신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이들의 병을 다 고쳐 주실 수 있었고 마귀로부터 다 자유롭게 해 주실 수 있었으며 심지어 죽은 자들까지도 살려 주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6.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라는 고백은 어떤 뜻인가?
그리고 네번째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의 일을 미리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에 성령을 한량없이 공급받으셨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못 하시는 일이 없으셨으며 못 아시는 것도 없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로 가셨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셨다. 그리하여 속죄사역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40일후에 하늘로 돌아가셨다. 그리고는 그분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요16:7).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 모든 믿는 이들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시게 된다(고전12:3,요3:5). 그분이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어 사람의 영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면, 모든 사람들의 영은 그때 살아나게 되는데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며, 이때 대부분 새로운 말을 하게 된다. 이것을 '방언'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때에 모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자신의 지체들이 되는 한 몸이 된다(고전12:13).
한편 성령께서 오실 때에는 보통 물을 붓듯이 오신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설교할 때에도,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믿는 자들 위에 부어주셨다고 설교하였으며(행2:33), 이는 부어주시겠다는 성령에 대한 구약의 약속 곧 요엘서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했다(행2:16~21). 그렇다면 성령께서 위에서 부어지듯 내려오실 때에는 어떤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가? 그때에는 보통 성령의 선물(은사)이 나타난다. 그래서 오순절날 120명의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를 부어주셨고, 이방인이었던 고넬료 가정 위에는 '방언'과 '방언찬양'의 은사가 나타났다(행10:44~46). 이것은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였을 때에 받는 선물들이다(행11:15~17).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지금도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중보자의 일을 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 것이다.
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어떤 뜻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고백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왜 그분을 아들이라고 부르게 되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분이 '아들'인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낳았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이 자식을 낳았다고 치자, 그때에 자식 속에 들어가는 영은 부모의 영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있는 영을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 자식에게는 부모의 영과 똑같은 영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낳은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예수님은 나오셨던 자신을 가리켜 '아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나오게 하신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즉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로서 말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요8:42) 자신은 보낸 자보다 크지 않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으며, 자신을 '아들'이라고 표현하셨다. 자신이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고 또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육체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신다. 그분이 성육신하신 것이다.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다(요1:14). 그러므로 그분은 육체적으로 보면 탄생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을 '아들'이라고 낮추어 말씀하셨지만 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분은 결코 아버지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천상에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찬양과 경배를 받고 계신다(계5:8~14).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계21:1,3).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분이 다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분이 심판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보좌에 앉으신 것이 하나님이 앉으신 것이며, 그분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 곧 하나님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8. 나오며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힘써서 알아야 한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 정도로만 알아서는 아니 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은 영원히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그분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의 품 속에 계셨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아들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요1:18).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말씀으로 계신 그분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요1:14). 그렇다면 왜 그분이 아들이 되셨는가? 그것은 오직 인류의 속죄(막10:45)와 더불어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었다(요일3:8).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속죄사역을 완성하실 때에는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 곧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요19:30). 이는 인류의 구속을 위해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죽으신 예수께서는 부활승천하셔서 얼마 안 있으면 재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악한 사탄마귀와 그의 부하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여 불못에 쳐넣으실 것이다(계19:20,20:10). 그러면 그분은 "이루었도다(게고난)"고 선언하실 것이다(계21:6). 이것은 "그것들이 이미 된 채 있다"는 뜻이다. 인류의 구속사역과 더불어 마귀까지 다 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이 되신 모든 목적이 이미 다 성취되었음을 "이루었도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 이 땅에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요한복음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부주제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이유가 순전히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은 무조건적으로 아들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그분은 성육신하신 것이고 또한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을 배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의 구속의 은총을 받을 수 있으며, 그분이 하늘에 준비해 놓고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 한 분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 감사를 드린다.
2022년 08월 03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