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141) 요셉은 성령의 시대에 이기는 자의 예표다(창37:12~24)_2021-07-05(월)

by 갈렙 posted Jul 05,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egcbW_NDgaQ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41) 요셉은 성령의 시대에 이기는 자의 예표다(창37:12~24)_2021-07-05(월) 

https://youtu.be/egcbW_NDgaQ

 

1. 창세기에서 요셉이야기는 경 륜적으로 볼 때 어떤 이야기인가?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창세기에서 그의 이야기는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되어 50장까지 나온다. 그런데 창세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살펴보면 요셉 이야기로 끝을 맺기는 하지만 같은 장에 야곱의 장례가 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요셉의 장례가 기술되면서 끝난다(50:1~3, 22~26). 다시 말해, 우리가 얼핏 예상하기로는 창세기는 요셉 이야기로 끝나야 할 것 같은데, 야곱 이야기와 함께 끝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창세기는 야곱 이야기가 끝까지 계속되면서 요셉과 함께 마쳐지는 것일까? 그것은 창세기가 예표론적으로 볼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 시대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마지막 꽃이 요셉 이야기로 끝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지만, 야곱 이야기 속에 요셉 이야기가 기술되고 있다. 고로 창세기의 전반부(1~11)가 창조와 타락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면, 창세기의 후반부(12~50)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야곱 이야기가 자신의 탄생과 더불어 장자의 명분을 샀던 팥죽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는 25장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창세기 36장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50장에 가서야 비로소 끝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이야말로 성령 시대의 사람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표론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이삭은 성자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으며, 야곱 이야기는 성령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성령 시대에 교회를 세워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2명의 아들들은 바로 성령시대의 열매로서 하늘의 완전 숫자인 열 둘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요셉 이야기는 예표론적으로 볼 때 교회(성도) 중에서 이기는 자(성도)를 예표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도 땅에 있는 일곱 교회를 말하지만 각 교회의 끝부분에 가서는 그 교회에 이기는 자들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각 교회의 이기는 자들이란 대체 누구이며, 또한 그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말해준다(2~3). 그러므로 성경을 통전적인 관점에서 보지 못하면 창세기 이야기는 창세기만의 이야기로,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는 요한계시록만의 이야기로밖에 보지 못한다.

 

2. 요셉이 성령 시대의 이기는 자의 예표라고 할 때, 그에게 붙은 별명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불렀다(37:19). 이것은 요셉을 성령 시대의 이기는 자의 예표라고 가정했을 때에, 성령 시대에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구약의 요엘 선지자도 말하기를, 말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실 텐데 그런 때가 되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젊은이들은 환상(이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요엘2:28~29, 2:17~18). 그러므로 이 예언은 빈 말이 전혀 아니다. 고로 우리는 말세를 만날수록 그리고 성령 시대에 이기는 자가 되기 원한다면, 꿈꾸는 자 요셉을 주의해서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삶이 곧 이기는 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부를 때에 '꿈꾸는 자'로 불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참고로, '꿈꾸는 자'라는 말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그냥 단순히 '꿈을 꾸는 자(dreamer)'가 아니다. '꿈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 단어가 '(dream)의 바알(baal)'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알'이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바알 신의 이름인 그 '바알'이다. 우리에게 바알신은 이방신을 대표하는 신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원래 그 단어는 '주인, 소유주, 남편, 지배자, '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 그러므로 '꿈꾸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를 원문을 살려 번역해 본다면, '꿈의 전문가', '꿈의 왕', '꿈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셉은 정말 꿈을 많이 꾸었던 꿈쟁이였기 때문이다.

  

3. 요셉의 꿈과 야곱의 꿈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사실 족장들 중에서 꿈은 야곱이 처음으로 꾼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벧엘에서의 야곱의 사닥다리 꿈이다(28:10~15). 그러나 야곱이 꾼 꿈은 '환상'은 아니었다. 야곱이 꾼 꿈은 꿈 속에서 영적인 세계를 직접 본 것이고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 때 영안이 열린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그가 눈을 뜨고도 볼 수 있었던 바로 그것을 그가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 그가 꿈 속에서 본 사닥다리나 그 사닥다리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본 것은 실제의 모습을 꿈에서 본 것이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도 역시 실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요셉이 꾼 꿈은 이것과는 많이 다른 꿈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은 장래에 되어질 일들을 상징적으로 보는 환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37:7,9). 정말 요엘 선지자의 말처럼 늙은이로서 야곱은 꿈을 꾼 것이 맞지만, 젊은이로서 요셉은 환상을 본 것이 맞다(2:28~29).

  

4. 요셉은 2가지 꿈만 꾼 것일까?

  그렇다면 요셉은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2가지 꿈들, 곧 곡식단이 절하는 꿈(37:7)과 해와 달과 별들이 절하는 꿈(37:9)만 꾸었을까? 성경에 보면 요셉이 꾼 꿈은 딱 2가지만 등장하고 있다. 나머지 이야기는 요셉이 다른 사람들이 꾸었던 꿈을 해석해 주었다는 말씀 뿐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형들이 요셉을 부르는 별명이 나온다. 그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꿈쟁이)"고 불렀다(37:19). 그들이 요셉을 가리켜 "꿈쟁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가 그동안 수많은 꿈을 꾸었고 또한 그것을 자기들에게 말해주었음을 증언해 준다. 이는 요셉이 그동안 자신이 꾸었던 꿈을 얼마나 많이 형제들에 말해주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 때 요셉의 형들이 이렇게 말했다. "요셉이 말했던 곡식단 꿈과 해와 달과 별들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는지, 우리가 한 번 지켜보자(37:20)" 그리고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져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되면 요셉이 죽게 되어 요셉의 꿈은 안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로 요셉의 형들은 그동안 요셉의 꿈을 많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꿈대로 많이 되어졌음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지 한 번 지켜보자고 한 것이다. 다행히 큰 형 르우벤의 제안으로 요셉은 죽지 않았지만 그의 옷은 벗겨졌고 구덩이에 던져졌다.

  

5.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요셉이야기를 무엇을 말해는가?

  고로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요셉 이야기는 상당히 중요한 교훈을 들려준다. 특히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꿈이나 환상, 예언이나 방언통역, 혹은 성령의 신령한 은사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성도들로 하여금 귀신의 장난에 속아 넘어가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세기 37~50장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성령 시대의 이기는 자에 대한 말씀으로서 그 핵심은 환상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는 꿈과 환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으로 인하여 그의 신분이 수직 상승하게 되며, 요셉의 원가족들이 기근 중에도 살아남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울러 요셉을 국무총리로 둔 애굽도 세상의 모든 나라 위에 높여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꿈과 환상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보는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 요엘 선지자나 사도 베드로도 말세에는 사람들이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꾼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라면 우리는 환상이나 꿈을 터부시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를 잘 대비할 수가 있어야 한다.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세계적인 기근이 우리에게 불어 닥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세계적인 재앙과 환난이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도 함께 찾아올 텐데, 우리도 역시 그날을 잘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우리도 계시적인 환상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그럴려면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도 요셉처럼 계시적인 환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역시 영이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마음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꿈을 꾸고 환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배를 따라 이 땅에 보냄받은 자로서 계시적인 환상을 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열심히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가짜 꿈과 가짜 환상을 보게 될 것이고, 혼란은 더욱 더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짜에 속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보다 더 철저히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20210705()

정병진목사

 

[꾸미기]20210705_072702[크기변환].jpg


Articles

4 5 6 7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