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86) 할례, 그것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회개의 시작이었다(창17:1~14)_2021-05-02(주일)

by 갈렙 posted May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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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칭의가 곧 구원은 아니다(롬5:9, 미래형이다). 칭의란 구원의 여정에서 첫 발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칭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두 번째 실수가 가르쳐 주는 교훈의 핵심이다(롬4:11, 골2:11~12). 오늘날 우리도 온전한 칭의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 된 믿음에다가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할례'란 어떤 의미였을까? 언약 백성의 표시였나? 아니면 다른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인가? 여기 할례가 주는 본질이 있다.

1. 들어가며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후, 자기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곳에 그만 기근이 찾아왔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지 않은 채 애굽 땅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래를 후궁으로 삼고자 데려갔던 것이다. 힘도 없었던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사래가 아니라면 약속의 씨를 얻을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도 가만 있지 않으셨다. 즉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여 사래와 아브라함을 구출해 내셨다. 그리고 그를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하지만 그때 아브라함이 벧엘에 올라가 기도했다는 말은 있어도 그가 거기서 회개했다는 말은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실수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 한 번 더 그리고 나중에 또 한 번 더 발생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실수를 범한 아브라함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실수는 참으로 괴로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엄히 책망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고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그는 기뻐했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던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놀랍게도 아브라함의 반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그 가정에 드리워 있던 저주를 끝마치게 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때 두 번째 실수 후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고 난 뒤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비로소 회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75세 때에 부름받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은 아내가 임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고(창12:2), 그의 자손(씨)이 땅의 티끌 같이(창13:16) 그리고 하늘의 별처럼 많이 있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창15:5). 무엇보다도 그 방법은 양자를 삼는 방법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나오는 출생을 통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창15:4). 그렇지만 하란 땅을 출발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도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당시 고대 근동의 풍습을 따라가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면 첩을 들여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아내의 제안을 아브라함이 받아들임으로 결국 아브라함은 사라의 여종이었던 애굽 여인 하갈을 자신의 부인(히브리어 원문)으로 맞이한다. 그래서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에 아브라함의 기쁨은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1년, 2년, 5년, 10년이 지나갔다. 다시 3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타나시어 그가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불신앙적이었고 불순종적이었으며 이기적이었는지를 책망하신다(창17:1). 그러자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할례 언약'이라고 부른다. 

 

3. 할례 언약의 주된 내용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나타나시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을 일컬어 우리는 '할례 언약'이라고 부른다(창17장). 할례 언약은 할례 조항만 들어 있는 언약은 아니다. 할례가 이 언약의 주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4개 혹은 많게는 5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 중에서 첫째와 셋째 조항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그들의 이름을 바꾸라는 것이었다(창17:4~8, 15~16). 아브람('고귀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으로, 사래('나의 왕비')에서 사라('왕비' 즉 '모든 사람들의 왕비')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때부터 그들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둘째 조항이 가장 중요한데,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더러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었다(창17:9~14).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두 번째 실수는 그의 고추를 사용하여 육체를 따라서 자식을 낳은 것이기 때문에, 그 끝의 포피를 잘라 냄으로 자신의 잘못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하는 표시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넷째 조항은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장차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하여 앞으로 또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것이었다(창17:19,21). 하지만 부차적으로 이미 태어난 이스마엘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이 있었으니, 그도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받게 하여, 그가 열두 지도자들을 낳는 민족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4.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행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따라서 자식을 산출해 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가족 중 남자들더러 할례를 받으라고 한 것은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의 모든 남자들이 결단코 세상적인 방법이나 인간적인 방법을 따라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갈 것이며, 두 번 다시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겠다고 하는 표시였던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르며 '세례'라고 칭하였다(골2:11~12). 왜냐하면 세례와 할례가 그 방법과 뜻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세례나 할례는 과거에 죄를 짓고 살았던 자기 자신을 수장하고, 이제부터는 새롭게 시작하시는 주님만 붙들고 살겠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당시 어떠했을까?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듣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주시겠다고 해도 피식 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다(창17:18). 이것은 무슨 뜻인가? 사라를 통하여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므로, 기왕 이미 태어난 채 있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장자로 인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그럴 수 없다고 하셨다. 그의 아내 사라가 낳은 아들이라야 그의 씨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었던 아브라함은 최종적으로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왜냐하면 그의 불신앙과 신앙이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감사하게도 아브라함은 그날 즉시 자기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 곧 자기의 아들 이스마엘과 자기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남자들과 그리고 외부에서 사온 종들이나 할 것 없이 남자들을 다 데려다가 할례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때부터는 하나님이 기뻐하고 바라시는 인생을 살겠다고 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신약성경에서는 '회개'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으로 향하던 자신의 발길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표시가 바로 회개의 본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두고, 그가 단지 언약 자손이 되겠다는 표시를 했다는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물론 그러한 뜻도 포함된 것이지만, 할례의 원뜻은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구원을 위한 참된 믿음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에게서 저주가 끊기기 시작한 시점이 어디였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후에 곧바로 사래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연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 돌아와 25년을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에게서 불임의 저주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여전히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주가 끝마쳐지고 자식을 낳게 될 때, 비로소 그때부터 복이 시작되는 것이요 그것이 구원의 여정에 들어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만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 재고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종교 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개신교(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믿음만 있으면 칭의도 받고 구원도 받고 천국에까지 넉넉히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지금 천국에 들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칭의를 구원의 완성으로 보아서는 절대 아니 된다. 왜냐하면 저주로부터 벗어나 복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칭의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6에서 받은 칭의는 이제 구원의 노정에 첫 발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우리도 온전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을 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칭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무할례 때에 받았던 칭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이다(롬4:1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 받은 칭의를 우리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99세가 되기까지 주님으로부터 할례 언약을 받기 전까지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창17:1). 그러므로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게 되면서 그리고 자신의 고추 끝의 포피를 잘라 내는 할례를 시행할 때부터 비로소 그의 믿음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칭의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믿음이 견고해지고, 더욱이 회개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온전한 칭의는 온전한 믿음에다가 회개가 동반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을 수 있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주장은 반드시 재고해야만 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칭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회개가 동반되지 아니한 칭의를 결코 온전한 칭의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만 읽어 보면, 칭의는 믿음으로만 얻는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이 말씀하신 칭의는 간과하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만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우리의 신앙의 표준은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칭의를 주실 분은 사도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의 말도 맞기는 맞지만 그때 언급하지 않은 것도 볼 수 있어야 온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서 비로소 칭의를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18:9~14). 그것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바리새인과 어느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 나온다. 이때 바리새인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교만함과 거만함은 참으로 가관이다. 하지만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세리는 그와 같지 않았다. 그는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한 채 다만 가슴을 치면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와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회개가 동반되지 아니한 믿음을 두고 온전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의 단적인 예가 바로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할례 사건이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실수를 통해 그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배워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장차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도 배우게 된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에는 아브라함 혼자만 불러내신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내까지 한 몸 안에서 그를 불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했다. 그래서 아내로부터 자식을 얻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의 아내도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자기만 저주에서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았을 때 그는 다 된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그를 엄히 꾸짖으신 것이다. 자신의 믿음도 교정되어야 했지만 사래에게 드리워진 불임의 저주까지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에 모든 일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은 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다루셔야 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 앞에 굴복하여 회개할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을 책망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즉시 엎드렸다. 그가 비로소 하나님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할례를 시행함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또한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그와 사래의 저주로부터 그들을 풀어 주셨다. 고로 할례를 시행하던 그날, 아브라함은 아내와 더불어 저주로부터 벗어나 복받는 시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실수는 아브라함 자신을 참된 믿음으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실패의 수업을 통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개의 효능을 그때부터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약하여 넘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참된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지금도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2021년 05월 0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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