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는 섬이었는가 아니면 육지의 항구였는가?

by 갈렙 posted Sep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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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의 로마유적지 (레바논 티레 고고유적) 

 

 

 

 

 

                                                                                                                     http://blog.daum.net/sunghwa/13026670 복사

 

 

 

 

                                                 

                                                           현재의 레바논 티레(Tyre, 티르,두로) 지도

 

 

 

예루살렘 서북쪽 약 226㎞ 지점, 악고 북쪽 약 45㎞ 지점, 레바논의 시돈에서는 남쪽으로 약 40㎞ 떨어진 곳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국경에서는 불과 20㎞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지만 이스라엘에서 레바논으로 넘어가는 국경이 없어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거치거나 요르단을 통해 들어가야만 한다.

 

현재 지명

 

 

 

현재의 티레(Tyre)  전경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현재의 티레 전경

 

현재의 티레 전경

 

성서시대의 두로 지역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베니게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성서의 도시 두로는 오늘날 반도에 위치한 수르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본토와 맞은편 섬에 두로 성읍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토사가 쌓여 지금은 반도로 바뀌었다. 본래 이 둘을 합해서 두로라고 했으나 두로의 중심 성읍은 섬에 있는 것이다(겔 28:2). 이 섬의 옛 항구는 남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방파제가 수면 밑 15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 방파제는 히람왕(솔로몬 왕과 동시대)에 의하여 BC 10세기에 축조되었다. 길이가 897m이고 너비가 9.8m이다. 두로는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소아시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이자 중심 무역항이었다. 두로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 부요해지자 국방을 강화하고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다(겔 27:25 참조). 그리고 두로 왕 히람은 백향목과 함께 목수와 석공들을 보내 다윗이 왕궁을 짓는 데 협조했으며(삼하 5:11) 솔로몬 왕 때에는 레바논산에서 벌채한 백향목을 뗏목으로 만들어 지중해 남쪽에 있는 욥바로 보내 성전 건축을 도왔다(왕상 5:10). 그러나 이런 두로도 “부귀 영화가 한여름 밤의 꿈같이 물속에 잠기고 그물 말리는 한적한 어촌이 되리라”(겔 26:14)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때 비참한 종말을 맞고 무역의 왕자 자리를 시돈에 내주었다. 이후 느헤미야 시대에 다시 회복되었으나(느 13:16) 7개월 동안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함락됐다. 신약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꼭 한번 두로와 시돈 지경에 들렸으며 이때 귀신 들린 이곳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다(마 15:21∼28). 또 두로 지방인들은 교만한 헤롯에게 아첨했다(행 12:20∼25). 그리고 바울이 제자들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곳도 이곳이다(행 21:3∼4). 베니게 지역의 히람 왕이 세운 무역의 도시 두로. 그러나 오늘날 부의 상징이었던 옛 항구터는 사라졌다. 

 

두로(티레·Tyre) 로마 유적지

 

두로는 고대 페니키아(성서명: 베니게)의 주도(主都)로, 지중해를 주름잡는 무역의 중심지로 자주물감 산업과 조선사업, 카르타고를 비롯한 중동 각국과의 해상무역으로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의 꽃을 피웠던 역사적인 상업도시이다. 세라큐레스란 사람이 자기가 기르던 개의 입에 붉은 물감을 보고 처음으로 자주색 물감을 발견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의 자주색 물감의 값은 금의 가격과도 같았다고 하니, 성경이 특별히 루디아를 두아빌라 성(터키)에서 자주장사를 했다고 기록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당시 해상의 여왕과도 같았던 두로는 경제적인 풍요속에 주변 지중해의 많은 섬들을 식민지로 거느리는 부유한 왕국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두로의 이러한 번영은 열강의 야욕을 부추기는 촉매제가 되어, 이 아름다운 바다의 도시는 그 자신 끊임없는 침입과 찬탈의 목표물이 되곤 했다. 옛 두로의 유적지는 로마인들이 두로에 남긴 자취들이다. 198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두로(티레·Tyre) 로마 유적지

 

 

성경 에스겔서(27장)는 두로와 교역하는 수많은 나라들과 그 통상품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두로가 해상무역을 통해 얼마나 화려한 경제적인 부를 일궈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다시스는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너와 통상하였음이여 은과 철과 상납과 납을 가지고 네 물품을 무역하였도다.... 너의 제조품이 많고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다메섹이 너와 통상하였음이여... 다시스의 배는 떼를 지어 네 물화를 실었음이여, 저가 바다 중심에서 풍부하여 영화가 극하였도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이러한 풍요의 탑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릴 날이 올 것을 예언한다. B.C. 586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자, 두로는 무역의 경쟁국이었던 유다왕국의 멸망이 자국에게 상업적 이익이 된다고 여겨 오히려 반겼다. 예루살렘으로 갈 무역량이 그 성의 멸망으로 두로에게로 올 것을 기대하고 크게 기뻐한 것이다. 타인의 불행을 딛고 부를 더 쌓기를 원한 두로의 비열한 태도를 지적하며 선지자는 두로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을 쳐서 이르기를 아하 좋다, 만민의 문(예루살렘)이 깨어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무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로 흉용케 함같이 열국으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에스겔 26장 2,3절] 화려하게 떠올랐던 섬 위의 도시, 두로. 선지자의 예언대로 두로는 예루살렘이 함락 당한 이듬해 침공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유린당한다(B.C 585-573년). 에스겔서는 두로의 멸망의 원인이 그의 교만함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찌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 그런즉 내가 외인 곧 열국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로 바다 가운데서 살륙을 당한 자의 죽음같이 바다 중심에서 죽게 할찌라" [에스겔 28장2, 5, 7-8절]. 지중해를 중심한 강대국들의 교역의 중심이며 교통의 요충지로 주변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된 두로. 이러한 두로의 번영은 주변 강대국들의 침입 야욕을 부추기게 된다. 

 

두로(티레·Tyre) 로마 유적지, 바다로 향하는 메인 열주 도로

 

바벨론 다음엔 페르시아의 침입을 겪어야 했고, 그 이후엔 알렉산더 대왕, 로마제국 등이 두로라는 바다의 도시에 새로운 정복자로 등장한다.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은 이 전략적인 해변의 도시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친다. 페르시아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었던 두로사람들은 새로운 지배자 알렉산더를 환영했지만, 그가 그들의 성스런 섬 도시 두로로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7개월간 두로를 포위하고 있었던 알렉산더는 드디어 섬에 이르는 방죽을 건설하여, 섬과 육지를 연결한 후 두로 성읍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 공격으로 섬에 거주하던 6천명이 살육 당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버린다. "항해자의 거한 유명한 성이여 너와 너의 거민이 바다 가운데 있어 견고하였었도다. 해변의 모든 거민을 두렵게 하였더니 어찌 그리 멸망하였는고.....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로 거민이 없는 성과 같이 황무한 성이 되게 하고 깊은 바다로 네 위에 오르게 하며 큰 물로 너를 덮게 할 때에.."[에스겔 26장 17, 19절] 에스겔서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사건이었다.  

  

두로(티레·Tyre) 로마 유적지  

 

두로(티레·Tyre) 로마 유적지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B.C. 64년, 새로운 정복자가 된 로마인들은 두로를 그들의 제국에 편입시키고 이곳에, 수로와 개선문, 거대한 히포드럼(전차 경기장) 등 이 도시의 중요한 조형물들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먼저 섬 도시에 이르는 길을 닦아놓는다. 황제를 위한 길이다. 길 좌우로 발굴된 옛 도시의 잔해들이 그 기초석들을 드러낸 채 누워있다. 로마식의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목욕탕, 물과 관련된 경기를 하던 풀장, 비잔틴 시대의 유적인 우아한 무늬의 모자이크 길, 비록 밑동이 잘라져 나가긴 했지만, 코린트 양식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기둥조형물도 눈에 뜨인다. 두로인들은 1세기 경, 최초로 유리를 제조해 사용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폐허의 한 구석은 유리공장이었던 곳으로 그릇, 항아리, 컵 등을 만들어 썼는데 아직도 그 유리의 잔해들이 남아있다.

 

 

두로의 네크로폴리스(죽음의 성읍)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두로 성읍의 동편에서 서편으로 이어지는 로마 가도(街道)를 따라 두로의 네크로폴리스가 놓여 있다. 옛 공동묘지이다.  성문 앞에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당시 로마의 관습이었다. 이 공동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네크로폴리스로, 로마와 비잔틴 시대 (AD 2세기부터 7세기까지)의 유적이다. 멋지게 장식된 거창한 돌관들. 어떤 석관들에는 고인의 이름과 직업을 새겨놓기도 했다. 대리석으로 된 여러 개의 석관들도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관들이 그리스나 소아시아에서 직수입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부유층의 무덤들이다. 그러기에 이곳의 무덤들은 귀중품을 훔치려는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 당시, 시체들의 입에 동전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 동전들이 도굴꾼들의 유혹물이 되었다. 이것을 훔치느라고 도적들이 공동묘지에 와서 동전과 함께 다른 귀중품들도 가져갔다. 

 

개선문  

 

네크로폴리스가 끝나는 곳에 20m 높이의 아치가 있는 개선문을 통과한다. 로마황제 세브러스 셉티무스를 기리기 위해 B.C. 2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로마황제 세브러스 셉티무스

 

히포드럼

 

개선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같은 시기에 이룩된 고대 로마의 거대한 전차경기장 히포드럼이 펼쳐진다. 두로의 히포드럼은 그 길이가 480m이고 폭이 160m이다. 3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던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보전된 전차경기장이다. 경기장 양편에 있는 오벨리스크와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돌 대야를 7바퀴 도는 경주가 벌어졌다고 한다. 거석들로 쌓아올려진 관중석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곳 히포드럼은 오늘날 국제적인 페스티발, 음악회들이 열리는 공연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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