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김수로왕)가 기독교 국가였다_예수님의 12제자 중 도마가 a.d.41년에 한국에 왔었다

by 갈렙 posted Dec 2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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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도마가 한국에 왔었다.
 
좀 황당한 주장같지요?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이런 내용을 가르쳐 줄 리 만무하니 말입니다.
1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인도를 거쳐 한국까지 사람이 다녀갔다고?
 
자, 이제부터 설명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도마박물관 조국현박사의 설명에 다른 전문가들의 자료를 보완한 것입니다.
 
김병모박사 *크리스챤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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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현박사
1988년 가야국이 기독교국가임을 최초 발표. 삼국유사중 가락국기 해설, 가락국 20년 연구, 도마박물관 관장, 목회자
 
정학봉박사
한국역사철학자, 대신대 대학원원장, 인도 18회 방문하며 조국현 박사의 이론 입증.
 
이장식박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B.A), 장신대 신대원(Th.B), (Th.M), 서독 뮌스터대학 신학부
미국 하버드대학 신학부(Th.M), 미국 드류대학 대학원(Ph.D)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가 해양 실크로드의 마지막 항구인 땅끝 나라 한국 김해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습니다.
 
1. 도마의 행적
1) 도마는 40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하다 순교했습니다.
도마의 사역은 전반기 20년은 에데사 탁실라, 한국의 가야에
후반기 20년은 인도의 호칭, 챙나이에서 활동했습니다.(도마의 인도 선교는 수리아의 교부 에브라임과 다른 전승들에, 그리고 바돌로매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히브리 마태복음을 남겼다고 유세비우스 교회사 5권 10장에 나와있습니다.)
 
도마는 땅 끝이 인도인 줄 알고 왔었습니다
이 당시 인도 역시 로마의 동쪽 끝 속국이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인도까지 왔었는데 
막상 인도에 와서 보니 인도와 교역하는 더 땅 끝인 한국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가야와 인도는 많은 교역을 했답니다. 그 역사적 정황은 차차 설명)
 
2) AD 42~47년까지 한국에 6년간 머무르며 김수로왕에게 세례를 주고 인도로 돌아갔습니다.(삼국유사 기록된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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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D 48년에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했습니다.
도마는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 총회에 선교보고를 하러 가던 길에
인도에 들러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시켜주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4) AD 50년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했습니다.(서양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5) AD 52년 인도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선교하였습니다.(인도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6) AD 72년 인도의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2.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은 인도사람.
1) 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습니다.
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에 있는 겐지스강 아이오디아라는 조그마한 읍입니다. 
그 옆에 페자바드란 큰 도시가 있습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는 약초, 향신료 등을 수출하는 아유로베다 무역상을 했던 소왕국의 왕이었습니다.
아유타국에서 허황옥은 48년에 한국(가야)로 시집 왔습니다.
가락국기에 허황옥이 시집오면서 들고온 물품들을 보면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됐던 물품들이었습니다.
이런 물품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도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당시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교두보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 현금이 발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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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왕망은 신나라를 만들고 3차례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AD 23년 왕망 죽음).
대천오십(AD 7~14년), 화천/화포(14~40년), 특히 화천은 20년만 통용됐습니다.
아래는 그 화천이 발굴된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사도행전의 사역을 감당할 당시
이미 중국은 김해와 무역했고, 김해는 당시 최고의 해상무역 관문이며 철을 수출했지요(KBS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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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당시는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가 왕성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헬라의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통일했고, 페르시아 아하수에로왕 역시 그랬죠.
BC 1000년 전 이미 솔로몬 때도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어 해상무역을 활발히 했습니다.
그러니 바닷길도 엄연히 잘 발달돼 있음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경주에서 매년 열리는 [실크로드 축제] 팜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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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글라스 2000년전에 신라에 오다] -KBS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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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맞은 편에 있는 두 개의 고분(황남대총)에서 나온 것으로, 일본작가 요시미즈의 '로마문화 왕국 신라'에는 신라는 온통 로마문화라고 주장합니다. 그것도 단순히 물건을 들여온 정도가 아니라 사신이 왕래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2) 허황옥의 후손들
허황옥이 10왕자 2공주를 낳습니다. 그 후손이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입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로 부터 내려오는 왕손이 지금도 인도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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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중 한 분인 김종필씨가 아유타의 후손을 찾아 김해에 데려와서 허황옥릉에 참배도 하고
기념식수도 해놓았으며 이런 인연으로 페자바드시와 김해시는 자매결연까지 맺었습니다.
*실지로 한국어 속에는 인도어(드리비다어)가 400여개나 있습니다. 
특히 농사 관련 유사 단어 (쌀-Sal, 벼-Bya, 가래-Kalai, 메뚜기-Metti, 풀-Pul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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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락국기에서 밝히는 아유타국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 가야에 관해 가락국기에 보면 허황옥은 아유타에서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요디아란 말 자체가 인도 의학, 아유로베다 의학을 하는 사람의 옛 왕국이다보니 아유타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인도에서 아유로베다란 의학이 의료관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아유타국이 태국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허황옥이 가야에 태국 불교를 들고왔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유타국은 전세계에 두 곳이 있습니다. 
 (1) 태국의 아유타국은 AD15세기에 있었던 나라이지만, 
 (2) 인도의 아요디아는 BC 6세기부터 있었습니다. 
 -김병모박사(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 문학박사)
 
4) 서울대학교 서정선교수의 DNA검사
김해 대성동 고분박물관에는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후손들의 유물이 있습니다. 
거기서 발견된 뼈의 DNA검사 결과 허황옥은 인도의 타미린과 같은 염색체로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허황옥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등 많은 설이 잠잠해졌습니다.
 
3. 김수로왕은 누구인가?
1)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교과서에는 이전까지는 알에서 나온 신화적 인물로 소개했지만 현재는 기마민족 정도로 본다고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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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흑해의 스키타이민족
김수로왕은 흑해 옆에 있는 스키타이 출신 왕자입니다.
스키타이민족은 문자가 없으면서, 금은세공이 굉장히 발달한 민족입니다.
신라의 금관, 귀고리 등에 보이는 점이 찍히는 '무금세공법'은 스키타이민족만 가능한 것으로 나중에는 신라에 전래됩니다.
*참고로 농경문화는 옥을 숭상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보물은 대개가 옥입니다. 실크로드를 타고 맨먼저
중국으로 들어온 보물도 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금을 숭상합니다. 가야가 멸망하고 신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신라는 백제,고구려,일본,중국에서도 없는 금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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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스키타이족은 황금장식과 함께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 목곽분이라는 무덤양식이 특징입니다(신라와 같음)
스키타이족은 흉노족 또는 훈족으로 불리는 북방 유목민족입니다. 
(수,당시대=돌궐(투르크=위구르=터키), 그리스시대=스키타이, 로마시대=훈족 등으로 불립니다.)
흉노(스카티아)가 인종학적으로는 아시아족에 속하는 황인종 퉁구스계열에 속합니다.
 
신라 문무왕 비문에도 김알지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KBS역사스페셜).
AD682 문무왕 사후 세워진 비석이 경주 선덕여왕릉 앞 사천왕사 터에서 발견됐습니다. 정조20년(1796년)에 조각발견, 1961년에는 비석 상단이 발견됐습니다.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는 문무왕 비문에는 신라의 조상이 흉노족이라고 밝힙니다. 김일제는 한무제시절에 흉노족을 토벌하다가 잡은 흉노왕 휴도왕의 아들입니다. 그는 말을 사육하는 노예로 잡혔다가 나중엔 한무제의 경호실장까지 됩니다. 고향이 알타이(금)지방에서 왔다고 해서 김씨 성을 붙여줍니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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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문헌의 근거는 고대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왕 손권이 고구려를 ‘흉노의 왕’이라는 ‘흉노의 선우’라고 지칭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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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이 경주 방문하면 꼭 들르는 곳입니다. 신라 원성왕릉(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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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입구. 왼쪽에 문인은 신라사람이고 오른쪽 무인은 흉노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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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괘릉에 있는 무인석상입니다.
신라 원성왕릉
(785~798,김경신) 앞에 있는 것으로 AD 700년 경 스키타이민족과의 교역을 잘 보여줍니다.
얼굴 모양이 중앙 아시아인 - 아시아에서 서진한 스키타이족(흉노)이 유럽인들과 피를 섞여 동진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김수로왕의 청동 솥
김수로왕의 유물 중에는 김수로왕이 들고 온 청동 솥이 있습니다. 
그 청동솥은 쇠꼬챙이로 꿰어서 고기도 삼고 차도 끓이는 유목민들의 것입니다.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에 김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고고학계는 김수로왕이 스키타이 사람이라고 다시 굳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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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향은 신라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신라 금관총에서도 기마인물형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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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수로왕은 유태계 스키타이인
신약성경 골로새서 3:11에 나오는 '스구디아인'이 바로 스키타이인입니다.
스구디아인은 흑해 야만족인데 유대인들이 그리로 와서 유대인 스쿠디아인이 됩니다.
이들은 철기 문명을 가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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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철기문화를 보급했죠. 김해박물관에 철기 유물이 굉장히 많이 전시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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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는 해마다 이렇게 철기문화의 가야를 알리는 행사를 엽니다.
청동기로 살던 한반도에 철기문명을 보급한 것은 김수로왕입니다.
1세기 당시 아시아의 반대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철연장을 사용했고, 로마에 끌려가 콜로세움을 짓습니다. 
이렇게 스키타이족은 철기를 사용하는 강력한 기마민족입니다. 이들이 북쪽으로 거쳐 중국까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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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실크로드는 육상과 해상이 이렇게 거미줄 처럼 연결돼 있었습니다.
정학봉교수에 의하면 거기서 성을 쌓고 정착 하다가
너무 힘드니까 남하하게 되었고 고구려, 신라, 백제 등에도 많이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김수로왕은 삼국의 틈새 땅인 오늘날의 김해지역으로 와서 가야를 세운 것입니다
김수로왕은 스키타이에서 이주해 중국의 소김천씨라는 마을을 거쳐왔기 때문에 씨 성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김해의 구지봉에 왔을 때에 얼굴도 다르고 말도 못하니 
가마 안에서 통역을 통해 얘기를 나누었고, 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삼국유사 가락국기).
 
*김해 박물관에 가면 스키타이인이 왔다는 유적이 있습니다.
김해지역과 경주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동복, 각배(ship), 황금장식 등 북방유목민들의 유골과 유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김수로왕은 혼혈로서 스키타이계 유대인이라 추정해봅니다.
사도들의 사역 방법은 어디를 가든지 흩어진(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사도 도마가 인도에 왔을 때 찾아간 아유타족 역시 유대인 혈족입니다.(당시 사도들의 전도전략상).
그런 연유로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왔을 때 김수로왕이 유대계 디아스포라였던 관계로 만난듯 합니다.
 
사실 BC 1000년 솔로몬 시대때부터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무역했습니다(왕상9:26,10:22).
그곳이 에시온게벨이란 항구입니다. 물론 지중해를 통해 유럽지역과도 교역을 했지만 에시온게벨은
그 위치상 교역 대상국이 다릅니다. 이곳이 실질적인 해양실크로드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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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얼마까지 전 세계를 다니면서 상업을 한 민족은 유대인 밖에 없었습니다.
유럽인들끼리의 해양무역 말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말입니다. 
심지어 불교 신문에서도 불경을 나른 사람은 100% 유대인이라고 한답니다.
정학봉박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6일을 그렇게 이동하다가 7일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려야하므로 크고 작게 모여서 집성촌을 이루고 회당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4. 허황옥은 어떤 사람?
1) 사도 도마가 에데사를 거쳐서 탁실라(터키 이슬라바마드 옆)에서 왕궁을 짓고
인도 아유타국을 거쳐올 때에 허황옥의 나이는 10살이었습니다.

참고로 도마는 왕궁건축기술자였습니다. 인도의 군다포러스왕의 왕궁터와 동전이 발견되고,
또 군다포러스 왕이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도마의 인도선교와 도마행전에 기록된 왕국건축가라는 사실은 학자들도 동의합니다.

인도에 간 도마는 한국에도 왔습니다. 한국에 와서 김수로왕에게 세례를 주고, 부활절에 가야국을 기독교국으로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 선교보고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인도에 들립니다(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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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도로 간 도마는 허황옥의 아버지에게 가야에 김수로왕이 모든 혼처를 마다하고 허황옥을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를 주게 됩니다. 허황옥의 나이가 16세 때 김수로왕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합니다(가락국기). 
가락 국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허황옥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동시에 꿈을 주었다고 합니다.
허황옥이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죽으면 죽으리란 심정으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함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베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짝을 삼게
   하라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니라...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 -일연스님-)
(*상제란 말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성경에도 하나님을 '상제'로 번역했습니다.
'엘 샤다이'를 중국 광동어로 번역할 때 '상제(샹다이)'로 번역함.)
사도 도마는 이렇게 중매선 후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여 선교보고 하려고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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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허황옥이 시집 오면서 타고 왔던 배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싣고 왔던 돌이 있습니다.
김수로왕은 공주가 오는 날짜에 맞춰 크게 환영행사를 열었고,
공주를 태워온 20여명의 뱃사공들에게 큰 선물을 주어 보냅니다. 8월 1일 돌아가는 배에 벼 150석을 실어주었습니다.
선물들을 다 실으려고 배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싣고 왔던 돌들은 강변에 내려두고 가게됩니다.
그 돌을 탑으로 쌓아놓았습니다. 물론 이 돌들은 인도 산으로 판명됐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대로 구지봉을 비롯하여 파사석탑이 있는 일대가 모두 바다였습니다.
김해박물관에 전시된 조개무덤 패총은 지금의 김해가 옛날에는 전부 바다였다는 증거입니다.
김해평야가 만들어진 것은 3세기입니다. 가야의 철기 문화로 산에 나무를 베고 개간이 가능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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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교계에선 '허황후가 불교를 들고 들어왔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려 말(AD 1281년) 일연스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이 당시에는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제3권 [금관성 파사석탑] 
"그때 (김수로왕과 허왕후 시대) 해동에서는 아직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부처님 화상과 교리가 이르지 않았던 까닭으로 토박이 사람들이 신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本記)에는 절을 창건하는 기록이 없었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에 이르러 비로소 
그 땅에 절(왕후사)를 세웠고..."

일연에 의하면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된 시기는 가락국의 건국(AD 42년)보다 훨씬 이후입니다.

삼국유사는 불교가 우리나라 들어온 때를 고구려 372년, 백제418, 가야 452, 신라 527년 이라고 밝혔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67년입니다. 그 영향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때(372년), 백제는 384년에 전파되었습니다.
 
가야는 452년 (8대 질지왕 2년) 왕후사란 절을 세웠습니다. 
 
신라는 418 년(신라 눌지왕 2년)에 고구려의 스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하려 했으나 신라왕가에서
 
반대하여 3년간 숨어 지내다 끝내 허락받고 흥륜사를 지으며 불교를 전파하였으나 신라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후 신라는  527년 법흥왕 때 하급관리 이차돈이 순교하고 다음 해 528년 불교를 공인합니다.
 
이것은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올 때 상당한 저항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신라가 어떤 신앙을 가졌기에 감히 법흥왕이 불교를 믿고 싶었는데도 신하들 왜 일제히 반대를 했을까요?
 
단순히 미신을 섬겼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한반도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이미 기독교가 뿌리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승자의 불교가 패자인 기독교의 역사를 다 제거한 것입니다.
 
 
5. 경북 영주의 도마상
1) 경북 영주에는 도마의 상도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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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처음 발견한 분은 당시 서울관악고등학교 역사교사였습니다. 
순복음교회집사님이셨는데, 어느 날 기도 중에 경북 영주 이곳에 가보라는 음성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들과 함께 막상 가서 보니, 이끼와 숲으로 뒤덮힌 바위덩어리였답니다.
아무런 무속행위가 없었고, 넝쿨에 묻혀있었답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대나무와 붓을 가지고 하나하나 청소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다 상단부에서 히브리글자를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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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우멤] = 바로 [도마]입니다.
히브리어 글자를 가장 먼저 학술화 한 분은 이장식 박사입니다.
이 분은 도마연구를 위해서 영국 멘체스터 대학에서 1년간, 미국 예일대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갔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아시아 고대기독교회사]란 책을 내고
도마상의 [타우멤]이 도마란 사실을 학계에 공식 보고하였습니다.
 
도마상의 왼쪽 밑을 보면 [지전행]이라는 한자가 씌여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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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는 여러 서체가 있습니다. 
갑골문이 있고, 전서, 해서, 초서, 예서체가 있는데 
이 서체는 예서체입니다. 예서체는 중국 한나라시대(BC 206년~AD 220년)에 사용한 것이라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석상임을 입증합니다. 또한 가야 건국이 바로 중국 한나라시대입니다.
 
그리고 불상에는 발가락이 이렇게 묘사된 것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발가락이 선명히 묘사된 것은 바로 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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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의 이런 주장이 일자 불교계는 문화재청에 요청해[마애보살입상]이라는 팻말을 갖다 붙여 놨습니다.
불교계에서는 이 도마상을 옛부터 미륵불상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한 동네에 미륵불은 두 개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도마상은 방치된(?) 미륵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넝쿨에 묻혀서 고스란히 잘 보존되었던 것입니다.
 
혹자는 도마가 왜 십계명에서 금한 형상을 만들었을까란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마도 도마가 쓴 '지전행'이란 글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지전행이란 '땅 끝까지 다닌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행1:8 명령을 따라 주의 복음을 정말 땅 끝까지 전한 도마 사도의 고백일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도마는 40년간 주로 강과 바다쪽으로만 다니며 선교했습니다.
유브라데스, 인더스 강, ...남인도에도 가보면 사도 도마가 가장 오래 산 곳은 수로가 많은 케롤라지역입니다.
그 곳에는 사도 도마가 세운 7개의 교회가 지금도 있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후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콜로세움 경기장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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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는 왕궁건축기술자였습니다. 에뎃사와 북인도에서 선교 하며 군다포러스 왕궁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다가 실크로드의 땅 끝인 한국의 낙동강 지역을 선교하게 되었습니다(가락국기에 기록된 연대 AD 42년).
AD 48년에 김수로왕과 허황옥을 중매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AD 50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합니다(서양역사 연대).
AD 52년 인도의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선교하다가(인도역사에 기록된 연대), 
AD 72 인도의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순교합니다.
이렇게 도마의 일생은 한국과 서양과 인도에 기록된 연사적 연대가 한 사람의 이력서처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도마상의 머리가 없습니다. 
정학봉교수의 책에 의하면 사람들이 머리를 인근 제변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그 얼굴이 한국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의 골격과 같다고 보고합니다.
(일제시대 때 많은 불상의 목이 훼손됐습니다. 경주 일대 불상들이 목이 없습니다)

2) 나뭇결 무늬 유리잔(황남대총남분,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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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황남대분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스라엘제로 판명이 났습니다.
현재 김해박물관에는 수많은 성찬기를 볼 수 있고, 그 흔한 불상 하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3) 쌍어문 =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김수로왕능 입구 현판입니다. 당시 백제,신라,고구려에는 이런 국기 같은 마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가야에서만 사용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왕능 입구의 현판의 원래 모습은 왼쪽이데, 지금은 오른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원 그림은 김해박물관 옛날 홍보자료(브로슈어)에도 실려 있습니다. 
나무 목판이다보니 보수를 하면서 저렇게 원형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교회가 이런 주장을 하니 불교에서 마치 석탑처럼 왜곡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왼쪽)는 떡과 물고기를 입으로 먹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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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까지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가 기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313년 이후부터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이 쌍어문의 이 그림은 바로 오병이어를 먹는 모습입니다.
빨간 점들은 유월절 양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고, 입 모양에 떡과 물고기 두마리를 둔 것은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물고기의 등지느러미 형태는 이스라엘의 타부가(가버나움)에 있는 오병이어 물고기의 모양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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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쌍어문에 대한 연구는 김병모박사가 40년을 연구하여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는 어떤 쌍어신앙을 가진 무리들이 이스라엘에서부터 인도~ 한국~ 일본까지 갔다는 보고를 학계에 냈습니다.
김병모박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쌍어문의 흔적들은 저 루트를 지나는 나라들 마다 다양하게나타나 있답니다.
김수로왕비 허황옥(쌍어의 비밀 : 김병모, 조선일보사. 1994)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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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쌍어신앙이 이 루트를 따라 1세기에 일본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박사는 그 기원을 BC 2700년 페르시아까지 거슬러 올라갔는데 너무 나가셨지요.
다시피 페르시아의 다곤신(오안네스)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김병모박사가 주장한 '쌍어신앙'은 사실 오병이어, 즉 기독교의 표식입니다.
결국 바울이 로마를 찍고 스페인(서바나) 서쪽 끝으로~
가장 의심많다고 타박했던 도마가 동쪽 끝까지 복음들고 와 주었습니다
 
2천년 전의 역사를 무슨 수로 100% 고증시켜주길 바라겠습니까?!!
몇몇 납득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8세기 말 통일신라의 국제무역항 울산에 등장한다. 고려 속요 쌍화점에 이슬람의 존재가 나타나고, 세종대왕은 무슬림에게 조선 복장을 입으라고 명했다고 세종실록 9년 4월 4일에 실려있다. 그렇다면 이슬람보다 600년 먼저 생겨난 기독교는 언제 한반도에 유입되지 않았다면 아이러니다-최상한박사-
"행1:8 땅끝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못 이루나 하나님은 이루실수 있습니다. 
또 신약성경이 정경화 되기 전이니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땐 내용적으로도 많이 아쉽지만
여튼 그 믿음의 대를 잇지 못하고 고려 불교에 완전히 먹혀버렸습니다.
기껏 동짓날 팥죽이나 쑤어 뿌리고, 북어 두 마리 묶어서 액땜하는 미신 정도로 전락해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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