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남유다의 20명의 왕들의 역사

by 갈렙 posted Aug 13,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남(南) 유다(왕상14~15장.왕하8~25장.대하~36장)

    B.C.586년, 20대 시드기야왕 때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

 

①르호보암-②아비야-③아사-④여호사밧-⑤여호람-⑥아하시야-⑦아달랴 여왕-⑧요아스-⑨아마샤-⑩아사랴,웃시야-⑪요담-⑫아하스-⑬히스기야-⑭므낫세-⑮아몬-?요시야-?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같은 왕 이름(남,북): ?유다 5대왕(여호람,요람)=이스라엘 9대왕(여호람,요람)/ ?유다 6대왕(아하시야)=이스라엘 8대왕(아하시야)/ ?유다 8대왕(요아스)=이스라엘 12대왕(요아스,여호아스)/ ?유다 17대왕(여호아하스)=이스라엘 11대왕(여호아하스)/
 

 

●①르호보암 Rehoboam(B.C922~B.C915)(대하10장, 왕상 14:21, 31/17년재위):

  솔로몬 왕의 아들, 유다+베냐민지파로 즉위. “백성을 번성케 함”의 뜻.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겜에서 그를 왕으로 삼고자 했을 때 여로보암과 열 지파들이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역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왕상 12:3-4). 그러나 이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북쪽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지도자로 세웠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왕상 12:12-14; 20).
  유다와 베냐민에 의해 남유다의 왕으로 세워진 르호보암은 군대를 결성하여 북왕국을 치려고도 했으나 이를 막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듣고 포기하였다(왕상 12:21-24; 대하 11:1-4). 그 후 르호보암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대하 11:4) 북이스라엘로부터 레위 족속과 제사장을 받아들이는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대하 11:13-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3년 동안 그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를 세웠다(대하 11:12).
  르호보암의 아내는 마할랏, 마아가 등 18명이었으며 첩이 60명이었고, 여우스, 스마랴, 사함, 아비야 등 아들 28명과 딸 60명을 두고(대하 11:18-23) 호화생활을 하다가 결국 애굽왕 시삭의 침략을 받아 왕궁의 보물과 재물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왕상 14:21-28; 대하 12:1-8). 그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악을 행했다(왕상 14:22-24; 대하 12:1-15). 하나님의 뜻과 백성의 소리를 저버린 한 독재자의 마지막이 어떠하다는 교훈을 그에게서 배울 수 있다(대하 11:18-23). 17년 간의 남유다 통치의 막을 내렸다(왕상 14:31; 대하 12:13, 16).

이 팔찌는 성전에서 약탈해간 금으로 만든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르호보암 왕을 정복하고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탈취해간 애굽 왕 시삭에게 속한 것이었다.

 

르호보암의 선택의 결과(왕상12:1-17; 대하10:1-11)

  솔로몬 왕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이에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와서 솔로몬 왕의 통치에서 성전과 궁전의 건축으로 무거운 짐을 졌음을 말하면서 짐을 가볍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르호보암은 3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섬기던 노인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백성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하였다. 이에 르호보암은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보좌관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노인들과는 정반대로 백성들이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더욱 억압해야 된다는 의견을 말했다. 르호보암은 이 두 가지 방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3일 후에 백성들이 그에게 나아오자 그는 노인들의 의견보다 친구들의 의견을 선택해 그쪽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다윗의 집안과 자신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가 분리해 나가 여로보암을 이스라엘왕으로 세우고 분리했다. 결국 르호보암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스라엘은 둘로 나뉘어졌다.

 

범죄한 르호보암과 유다 백성(왕상14:21-28; 대하12:1-12)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위에 올라 17년을 통치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암몬 사람 나아마였다. 그는 왕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고 세력이 강해지자 여호와를 버렸으며 백성들도 그를 본받아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으며 조상들보다 여호와를 더 노하게 하였다. 결국 르호보암은 왕 5년에 이집트의 시삭 왕이(애굽22대왕조의 창시자,솔로몬에게 딸을 주므로 결혼동맹) 유다의 요새 성들을 급습하여 뺏은 다음 곧 예루살렘으로 밀어닥쳤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과 궁전에 있는 모든 보물과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를 모조리 약탈해 갔다. 그리고 유다는 이집트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르호보암의 요새화 정책(대하11:5-12)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왕이 된 르호보암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북쪽 지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예병을 소집해 그들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가 나타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니 싸우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에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남쪽 유다와 베냐민지파만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에 그는 방어의 필요성을 느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유다 땅에 방비성을 건축하였다. 그는 주요 성들을 요새화하고 각성마다 지휘관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식량과 포도주를 비축하고 무기들을 확보하여 각 성들을 매우 튼튼하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유다와 베냐민을 다스리며 방비하였다.

 

▶이방 여인의 아들 르호보암의 가정과 생활(왕상14:21-31, 대하12:1-16요절 : 대하12:14)

1.르호보암의 어머니

1) 암몬 종교는 밀곰을 섬기는 우상종교였다.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한 암몬족들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상으로 미혹하였다.

(1) 그들의 종교는 무엇을 섬기는 것인가?(왕상11:5,7)

(2) 르호보암의 어머니는 솔로몬 왕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왕상11:4,7-8)

2) 남편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준 암몬족의 아내 나아마는 그의 자식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1) 르호보암이 17년간 나라를 다스린 기록에 참고로 덧붙인 기사는 무엇인가?(왕상14:21,대하12:13-14)

* 남편과 자식에 대한 영향력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2 르호보암의 정치가 실패한 배경

1) 르호보암의 정치에서 실패한 두가지 기록이 있다. 살펴보면 이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이 잘못된 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1) 르호보암의 정치 초기에 일어난 문제는 무엇인가?(왕상12:1-20)

(2) 르호보암 왕 재위 5년만에 일어난 문제는 무엇인가?(왕상12:1-3,9-12)

2) 르호보암은 충신들과 하나님의 선지자로부터 조언과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책이 실패하기까지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 르호보암의 나라가 애굽의 왕과 군사들로부터 약탈을 당하게 된 신앙적인 원인이 무엇 때문이라고 하였나?(대하12:1-2)

(2) 르호보암이 환란을 통하여 배운 것은 무엇인가?(대하12:6)

* 르호보암의 고집과 불신앙의 행동 그 이면에는 어머니 나아마의 이방종교 영향이 컸다(대하12:13-14).유다와 베냐민에 의해 41세 때 왕으로 세워진 남유다의 르호보암은 군대를 결성하여 북왕국을 치려고도 했으나 이를 막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듣고 포기하였다(왕상 12:21-24; 대하 11:1-4). 그 후 르호보암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대하 11:4) 북이스라엘로부터 레위 족속과 제사장을 받아들이는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대하 11:13-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3년 동안 그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를 세웠다(대하 11:12).

“그러므로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 년 동안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르호보암이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의 소생이라 그가 아들들 곧 여우스와 스마랴와 사함을 낳았으며)을 아내로 삼았으니 그 후에 압살롬의 딸 마아가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가 아비야와 앗대와 시사와 슬로밋을 낳았더라. 르호보암은 아내 열여덟 명과 첩 예순 명을 거느려 아들 스물여덟 명과 딸 예순 명을 낳았으나 압살롬의 딸 마아가를 모든 처첩보다 더 사랑하여 르호보암은 마아가의 아들 아비야를 후계자로 세웠으니 이는 그의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로 삼아 왕으로 세우고자 함이었더라. 르호보암이 지혜롭게 행하여 그의 모든 아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온 땅 모든 견고한 성읍에 흩어 살게 하고 양식을 후히 주고 아내를 많이 구하여 주었더라”(대하11:17~23).

그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악을 행했다(왕상 14:22-24; 대하 12:1-15). 선지자 스마야가 패하리라고 예고한 대로 결국 그는 5년에 애굽 왕 시삭의 침입을 받았으며(왕상 14:21-28; 대하 12:1-8), 17년간의 남유다 통치의 막을 내렸다(왕상 14:31; 대하 12:13, 16).

..................................................................................................................................................................

●②아비야Abijah,아비얌Abijam(B.C912~B.C913)(대하13장,왕상15장/3년재위):

  르호보암 왕은 아내가 둘이다(마할랏, 마아가), 모친 마아가(대하13:2, 기브아사람 우리엘의 딸/왕상15:2아비살롬의 딸), 역대기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속한 ‘야’가 그의 이름에서 탈락되어 ‘아비얌’이라고 불리고 있다.  “여호와는 아버시시다”라는 뜻, 아비야와 아사의 모친은 모두 마아가(왕상15:2,16). 아사의 선왕이었던 아비야의 모친도 마아가였으므로(왕상15:2,10)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아사왕의 모친 마아가는 계속 살아서 태후로 있었기에 그를 모친으로 표현했다.(대하15:16).

유다왕 르호보암의 아들. 모친은 압살롬의 딸 마아가. 왕상 15:31에는 아비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스라엘왕 여로보암과 싸웠다(왕상 15:7).

장자는 여우스(대하11:21)였으나 마아가를 총애하여 그녀의 아들 아비야를 세자로 간택. 아비얌은 본명이고 왕위에 오를 때 아비야를 취함. 르호보암의 아들로 유다의 두 번째 왕이다(왕상 14:31; 15:1, 7-8). 그는 3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아비야로도 불렸다(대하 13:21). 유다용사 40만(대하 13:3)이 이스라엘 군대 80만과 에브라임 산에서 대진하여 50만명을 죽이고 대승함.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 이스라엘이 택한 병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엎드러진 자들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아내 열넷을 거느려 아들 스물둘과 딸 열여섯을 낳았더라”(대하13:17,21)

 

마아가의 진짜 이름 : 아비얌의 어머니 ‘마아가’(Maacah)라는 이름이 역대하 13:2에서는 ‘미가야’(Micaiah.우리엘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대다수는 역대하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의아한 것은 마아가의 아버지 이름이다. 역대하 13:2에는 아비얌(Abijam. 아비야Abijah)의 외할아버지가 ‘우리엘’(Uriel)로 나오는데 열왕기상 15:2과 역대하 11:21에서는 ‘아비살롬’(Abishalom), ‘압살롬’(Absalom)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타당한 해석은 마아가가 압살롬의 손녀이며, 기브아사람 우리엘과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비살롬.압살롬(조부)⇒우리엘(부)⇒마아가.미가야(딸)⇒아비얌,아비야(왕)
 

 

●③아사Asa(B.C915~B.C913)(대하14장~16장,왕상15장/41년재위):

  아비얌의 아들, ‘헬‘ 아삽, 예루살렘에서 41년간 치리.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비얌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려고 선한 왕 아사를 세우셨다. 아사의 군대는 유다 군사30만과 베냐민 군사 28만으로 구스사람 세라의 군사100만과 병거300승을 그랄 까지 쫓아내고 승리함. 선지자 아사랴의 예언을 듣고 우상물을 제거하고 여호와를 찾으므로 평안을 주심. 모친 마아가가 만든 아세라 주상과 아세라상을 찍고 산당과 태양상을  제거했으나 아세라목상을 만든 모친 마아가는 태후(太后)의 위를 폐함. 이스라엘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오자 바아사와의 약조를 깨고 아람왕 벤하닷(헤시온의 손자.다브림몬의 아들)에게 뇌물을 보내어 매수하자  선견자 하나니가 책망하기를 "왕이 아람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이후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라" 고 하매 크게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둠. 벤하닷으로 이스라엘 북방을 공략하게 하므로 아사왕은 라마를 취하고 그곳의 물자를 이용하여 남북 왕국의 영구적인 분열을 지향하고 있던 이스라엘왕 바아사가 최남단에 있는 라마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건축을 중단하자 그 돌과 재목을 가져와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함. 아사왕 39년에 발이 중병에 걸려 죽음.

...................................................................................................................................................................

●④여호사밧Jehosaphat(B.C873~B.C849)(대하17장~22장,왕상15장/25년재위):

  “신의 재판”이란 뜻, 아사 왕의 아들, 35세에 즉위. 모친 아수바(실히의 딸). 여호사밧은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개혁운동을 철저히 진행시키고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레위인과 제사장들과 방백 가운데서 사람을 뽑아 유다 전역을 돌며 율법책을 가르치게 했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여 5개 군단(아드나,여호하난,아마시야,엘리아다,여호사밧)에 총116만 군사를 직속관할로 두고 각 성읍마다 수비대가 조직되어서 이방세력이 넘보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과 화해를 꾀하여 그의 재위기간 중 유다와 이스라엘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아합의 딸 아달랴를 정략적으로 자기의 아들과 혼인시킴으로써 훗날 큰 화를 부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7아들들(여호람,아사랴,여히엘,스가랴,아사랴,미가엘.스바댜. 대하21:2). 여호사밧 왕 때에 서쪽의 블레셋이 공물을 바침. 이스라엘 왕 아합과 더불어 연혼함. 연합하여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치러 가자 할때 앵무새처럼 한목소리로 지껄여대는 거짓 선지자 400인은 '올라 가서 치소서' 하였다. 반면 미가야 선지자는 정반대의 여호와의 말씀을 예언하여 아합이 전쟁에서 죽임을 달할 것이라고 하므로 미가야를 옥에 가둠. 연합한 두 왕은 미가야의 말을 무시하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오게 된다.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징벌로 패배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견자 예후(이스라엘 왕이 아님,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도 아사 왕 때에 잘못을 경고했는데, 아들 예후도 여호사밧 왕에게 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를 통해서 여호와의 책망을 듣고 깨달아서 개혁운동을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시킨다. 율법책을 가르치고 재판제도를개혁한다. 종교적인 문제의 송사는 대제사장(아마랴)이, 민사상의 송사는 유다 지파의 족장(스바댜)이, 관리는 레위인이 맡도록 했다. '다윗성'(본래 여부스(예루살렘) 사람의 산성인 '시온산' 성을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가 두목이 되었다. 다윗이 정복하고 거기에 머무름으로 인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대상11:4~7)에 장사됨.

(1)제4대 유대왕 (왕상 15:24, 마1:8). 아사의 재위 중에 즉위(아사왕39년. B.C.892년)

(2) 그 부친 아사왕을 본받아 정치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리었으나 이스라엘왕 아합과 화친하여 혼인하였다(대하18:1).여호사밧은 아합의 동맹군과 아람왕 벤하닷에게 전쟁했으나 이스라엘 선지자 400명은 출정을 권했으나, 정반대로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대로 아합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을 구함.

(3) 아합과 같이 길르앗 라못을 치다가 실패하였다(왕상 22:29-36)

(4) 모압 암몬 세일인이 동맹하여 공격해올 때 여호와한테 간구하니 자기들끼리 피차 살륙하게 하여 한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죽었다 (대하20:1,23:24).

(5) 그는 35세에 즉위하여 25년간 유대국을 치리하였다(대하20:1)

.......................................................................................................................................................................

●⑤여호람Jehoram(B.C849~B.C843)(대하21장,왕하8장/8년재위):

  '여호와는 존귀하심'. 요람, 32세에 즉위. 여호사밧 왕의  7아들들(여호람,아사랴,여히엘,스가랴,아사랴,미가엘.스바댜. 대하21:2)중의 장자. 이스라엘 9대왕도 여호람(아합의 아들). “여호와는 존귀하심”의 뜻, 재위중에 엘리야(그는 B.C.850년경 세상을 떠남)가 사역함(대하21:12)

[1] 유대왕, 여호람은 B.C.853년경 여호사밧이 죽기 전에 이미 섭정왕이 되었다(왕하8:16)

(1)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위를 32세에 계승하였다(왕하 8:16).

(2) 여호람이 아합왕의 딸 아달랴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여러가지 죄악을 범행하게 하고 그 동생을 죽였다. 그 모든 죄의 보응으로 립나와 에돔이 배반하였다(왕하 8:20,21,대하21:8-10).

아합은 시돈왕 엣바알(=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엣바알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을 겸임한 자)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은 뒤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신의 추종자가 되어 사마리아에 바알 산당을 세우고 아세라목상까지 세웠다(왕상16:31~33).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써 북왕국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만연되었듯이, 여호람이 아합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남왕국 유다에도 우상숭배가 들어오게 되었다.

(3)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왕궁의 재물과 처자를 탈취하므로 여호아하스만 남겨놓고 자신은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나오는 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분향도 하지 아니하고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도 않았다(대상21:16-20)

..................................................................................................................................................................

●⑥아하시야Ahaziah,여호아하스(B.C843)(대하22장,왕하8장/1년재위):

' 여호와의 소유'. 42세에 즉위. 모친 아달랴(오므리의 손녀). 아라비아 사람과 함께 왔던 침략군에게 여호람의 모든 형이 죽음. 여호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컸으므로 여호람 왕의 말째 아들 아하시야만 남김 (이스라엘 8대왕도 아하시야(아합의 아들). “여호와의 소유”란 뜻, 여호람은 B.C853년 경 여호사밧의 섭정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부친 여로람이 죽은 후에 아하시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으로 이스르엘로 돌아옴. 요람이 병들자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가 이스르엘로 내려가 방문함. 사마리아에 숨었다가 예후에게 죽다.

[1] 북 이스라엘 왕(B.C. 880-849). 부친 아합왕의 왕위를 계승. 부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대신에 바알신을 섬겼다. 그는 사마리아의 왕궁난간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재위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왕상1:2, 대하20:35-37).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죽었다(왕하 1:2).

[2] 남 유다왕 여호람의 막내아들(B.C. 842-841). 왕위에 있은지 겨우 1년만에 이스라엘왕 여호람과 연합하여 수리아를 치다가 북왕국의 개척자 예후에게 치명상을 입고 므깃도로 도망해 거기서 죽었다(왕하 8:29).

아하시아는 북이스라엘의 제8대 왕이며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이다. 그는 유다왕 여호사밧 17년에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2년간(BC 854-853년) 이스라엘을 다스린 악명 높은 왕으로 알려져 있다. “유다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왕 아하시아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아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이었더라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더니”(대하20:35-36)

선지자 엘리에셀이 여호사밧과 아하시아의 결합을 못 마땅히 여긴 나머지 그 배가 순항치 못하고 파선될 것을 예언했다.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 하였더라](왕상 22:48-49)

그후 아하시아는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에그론에 있는 바알세붑(파리신으로 병충해와 기타 재해를 예방하는 신)에게 사자를 보내어 병이 회복될 수 있나 없나를 알아보게 했다(왕하1:2).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슥3:4.왕하1:8,마3:4,히11:37) 선지자의 복장은 ‘털옷’이었다)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바알세불’의 변형. ”파리떼의 주(主)“란 뜻. 바알숭배의 중심지인 시돈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고 유독 블레셋에 속한 에그론으로 보내려 한 이유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마 바알 신앙의 중심지들 중 에그론이 사마리아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에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왕하 1:3-4)

아하시아의 사자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을 때 왕은 즉시 오십부장과 수하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그를 체포해 오도 록 했다. 이들이 엘리야에게 가서 왕명을 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살라 버렸으며 두번째도 그렇게 했다(왕하 1:9-1 2).

결국 아하시아는 회개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여호와의 계명보다 금을 더 사랑하며, 여호와 신앙보다 이방신을 더 사랑하는 자의 말로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다.

............................................................................................................................................................

●⑦아달랴 여왕Athaliah(B.C843~B.C837)(대하22장,왕하11장/6년재위):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 오므리의 손녀로 유다집의 씨를 진멸하지만 아하시의 아들 요아스는 여호사브앗(여호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과 유모가 숨겨 성전에서 6년간 피신함. 외국인 용병의 지원을 받은 제사장들의 과감한 쿠데타였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안식일에 출번,입번하는 자들 중 1/3씩 성전문을 지키고 1/3은 왕궁에, 1/3은 기초문에 있고,벡성들이 성전 뜰에 있을때 병기를 든 제사장과 레위사람들만 성전에서 지키며 요아스를 호위하고 면류관을 씌우고 왕의 만세를 부르며 반역하다. 왕궁어귀에서 아달랴를 칼로 제거한 후 요아스(7세)의 반정으로 그가 즉위함. 바알제사장 맛단을 죽임.

............................................................................................................................................................

●⑧요아스Joash(B.C837~B.C800)(대하24장,왕하12장/40년재위):

  7세에 즉위. 아하시야의 아들, 아하시야의 왕족 중 생존한 아들,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을 동안 하나님 보시기에 정칙히 행함. 성전을 중수함. 여호야다는 130세에 죽고  요아스는 타락과 파멸로 충언하는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마저 무리에게 돌을 맞고 성전뜰에서 죽음. 여호와는 아람(수리아) 군대를 보내 징벌하심. 요아스는 모반으로 신하들에게 죽음. 이스라엘 12대왕도 요아스=여호아스(여호아하스의 아들)

..............................................................................................................................................................

●⑨아마샤Amaziah(B.C800~B.C783)(대하25장,왕하14장/29년재위):

  요아스의 아들, 25세에 즉위. 모친 여호앗단. 은100달란트로 이스라엘용사 10만을 삯내다. 유다 30만명과 이스라엘 10만의 남북연합군 40만으로 출정하려다가 선지자의 권유대로 이스라엘 용병을 돌려보내자 유다성읍을 쳐 노략질하고 앙갚음. 단독출정으로 남쪽 에돔 족속을 도륙하고 대승리. 염곡의 승리로 에돔 2만을 격파함.

..............................................................................................................................................................

●⑩아사랴,웃시야Azariah,Uzziah(B.C783~B.C742)(대하26장,왕하15장/52년재위):

  아마샤의 아들, 16세에 즉위.모친 여골리야(예루살렘 사람).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일을 다스림.

.............................................................................................................................................................

요담Jotham(섭정시대)(B.C750~B.C742)(왕하15장/16년재위):

●⑪요담Jotham(King)(B.C742~B.C735)(대하27장,왕하15장/16년): 25세에 즉위. 웃시야(아사랴)의 아들, 모친 여루사.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암몬과의 전쟁승리(암몬자손이 은100달란트,밀1만석,보리 1만석을 드렸고 제2년,제3년에도 그와 같이 드림(대하27:5).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3세의 세력확장에 대비하여 동맹후 함께 유다를 손아귀에 넣고 앗수르에 대응하고자 함. 이러한 계획은 요담왕 때 시작되어 아하스왕때에 본격적으로 침략이 나타남(왕하16:5, 사7:1~9).

........................................................................................................................................................

●⑫아하스Ahaz(B.C735~B.C715)(대하28장,왕하16장/16년재위):

  요담의 아들, 20세에 즉위. 아하스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그 자녀를 불사르고"(대하28:3)는 베니게인들의 예배의식의 일부였다. 모압(그모스=몰렉)과 암몬인 등의 의식에서도 자주 보인다. 이들은 인간의 최고의 제물은 자신들의 맏아들(왕세자)이라고 생각했다(왕하3:27,미6:7). 이스라엘 왕 베가(르말랴의 아들)의 침략을 받아 용사12만명이 죽고 아내와 자녀 20만명을 사로잡아 감. 아람과 이스라엘의 공격과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이 자기 잘못임을 알지 못하고 앗수르 왕(디글랏빌레셀3세=‘불‘.B.C74746~728. 대하28:20.왕하15:19)에 원군을 청하나 앗수르가 아람보다 더 혹독한 압제자가 되어 유다백성을 괴롭히고 약탈함. 친앗수르정책을 고수하여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치는 것에 대항코자 할때 이사야 선지자는 두려워말고 여호와를 섬기라고 외친다. 아람왕 르신이 엘랏을 쳐 유다사람을 쫓아내고 오늘날까지 아람사람이 엘랏에 거주함.

................................................................................................................................................................

●⑬히스기야Hezekiah(B.C715~B.C687년)(대하29장,왕하18장~19장/29년재위):

  아하스의 아들, 25세에 즉위. 모친 아비야(스가리야의 딸). 주상(가나안사람들이 섬기던 '돌기둥'. 남성신인 바알의 상징)과 아세라상(가지를 잘라낸 '나무기둥'. 바알을 상징하는 주상(돌기둥)과 함께 산당의 대표적인 예배대상을 부수고 '느후스단'(놋뱀에 붙인 이름으로 놋조각이란 뜻='놋으로 만든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이라 불렀다. 앗수르왕을 배척. 블레셋을 침. 왕 4년에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사마리아 침략으로 국내는 히스기야의 개혁을 반대하고 집안에 우상을 몰래 숨겨두고 섬기며, 국외는 침략으로 재난을 당함. 왕 14년에 앗수르왕 산헤립(B.C705~681)의 침공을 받음, 살만에셀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이 죽자 히스기야는 애굽의 후원을 얻어 두로와 에글론 등과 함께 반앗수르정책을 실시하자 이에 반발한 앗수르의 새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해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성전의 금은을 제공하며 회유함. 산헤립의 제2차 예루살렘 침공때 이사야의 예언대로  앗수르군 18만 5천명이 죽음.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이 왕이 됨. 발라단의 아들(바벨론왕 부로닥발라단=므로닥발라단(사39:1)이 정확한 이름)이 앗수르를 고립시키기 위해 신흥바벨론은 우다와 동맹을 맺고 병든 히스기야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냄. 운명의 적인 바벨론은 신성한 예루살렘과 영광스런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하고 언약궤를 옮겨가며 고국을 떠나온 백성을 흩어놓고 다윗왕국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70년동안 황폐하게 내버려 둘 것이다. 산헤립 왕 자기 아들들에 의해 죽임을 하는데 그 시기는 예루살렘 원정에서 돌아온지 20년이 지난 B.C.681년경으로 산헤립의 본국철군과 죽음을 동일선상에 둔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히스기야 왕14년에 앗수르왕 산헤립의 제2차 예루살렘침공에도 선지자 이사야는 산헤립이 반드시 물러갈것이라 예언한다. 이후 예언대로 앗수르군은 하룻밤에 18만5천의 군대가 전멸하고 산헤립이 죽고,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에 오름. 

..............................................................................................................................................................

●⑭므낫세 Manasseh(B.C687~B.C642)(대하33장,왕하21장/55년재위):

  '잊어버림'. 12세에 즉위했으나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군신들의 권유와 자문으로 국정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히스기야의 아들. 모친 헵시바. 남북조를 통틀어 가장 오랜 재위기간인 55년간이나 통치한 왕.

므낫세는 불행하게도 친 앗수르파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앗수르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됐다. 훌륭한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지 못하고 잘못된 신하들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이방신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됐다. 부친 히스기야와는 반대로 악정을 행하고 바알 숭배를 장려하여 자기 아들까지 희생 제물로 바쳤다.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을 죽인 죄악으로 앗수르에 의해 쇠사슬로 코를 꿰고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감.

저가 말년에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인해 그토록 탈선한 왕인데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게 됐고 왕위가 지속되는 은혜를 받았다.

첫째, 므낫세가 어린 나이에 주변 인물을 잘못 만난 것이 불행이었다. 돌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자.

둘째, 잘못된 통치와 사상은 중간에라도 고쳐야 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큰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궁궐 동산 곧 웃사(Uzza)의 동산에 장사됨.

.............................................................................................................................................................

●⑮아몬Amon(B.C642~B.C640)(대하33장,왕하21장/2년재위):

  22세에 즉위. 므낫세의 아들(헬‘ 아모스). 모친 므술레멧. 신복들이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임. 웃시야(Uzza)의 동산 자기 묘실에 장사됨.

.............................................................................................................................................................

●?요시야Josiah(B.C640~B.C609)(대하34장~35장, 왕상13장. 왕하22장/31년재위):

  아몬의 아들. 8세에 즉위. 모친 여디다. 선지자 스마야로 하여금 출생 이전에 그의 사역과 이름이 예언됨(왕상13:1~2). 이 예언을 한지 300여년 후에 출생한 인물이다(왕하23:15~16). 여기서 그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예언한 점은 참으로 놀랍다.(바사왕 동방사람 고레스에 대한 사41:1~ 44:28의 예언도 B.C538년 바벨론을 정복함으로써 정확히 성취된다. '부름받은 고레스'에서 '기름받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시야'이므로 고레스를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인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방인으로서(사45:5) 여호와를 알지못하는 사람이므로 그를 메시야의 예표적 인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인준을 받아, 바사와 바벨론을 정복해 유다백성을 귀환시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자라른 것이다.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준행케 함. 종교개혁 스바냐의 예언활동. 요시야의 아들은 맏아들이 요하난이요, 둘째가 여호야김이요, 셋째가 시드기야요, 넷째가 살룸이다(대상3:15~18).

아마겟돈(계16:16,히브리 음)은 이스라엘 골짜기 맞은 편에 있다. 왕하9:27 역사적인 전투지(대하35:22,슥12:11,삿5:19).기원전 1468년 애굽왕 투트모세 3세는 이곳에서 가나안 연합군을 무찌름. 당시 앗수르는 신흥 바벨론 제국의 세력에 밀려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애굽왕 바로 느고(Pharaoh-nechoh, 주전609-579, 느고 2세. 스에즈 운하를 제일 먼저 계획한 사람)가 신흥 바벨론 왕(나보폴라살)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무너져 가는 앗수르를 돕고자 팔레스타인을 거쳐 갈그미스로 향했다. 만일 이전쟁에서 바벨론을 이긴다면 애굽은 메소포다미아 전지역을 장악하는 대국이 될것이었다. 그러난 요시야왕은 바벨론의 세력을 확장하고, 앗수르가 몰락하는 것이 유다왕국에 이로울 것으로 판단해서 바로느고의 출정을 막기 위해 진격했으나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요시야가 바로느고의 경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B.C709년경의  일이다. 기원전 609년 요시야는 애굽왕 느고(제26대 왕조의 2대왕 삼메디고의 아들 느고 2세. 그는 B.C609~594년까지 다스렸다)를 막다가 므깃도(Megiddo, 가나안 땅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전투가 가장 많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스르엘 평야지역 하이파(Haifa) 남동쪽으로 약 32km 지점, 예닌(Jenin) 북서쪽 약 17.6km 지점, 애굽에서 다메섹으로 통하는 통로로서 나사렛으로부터 18km 지점에 있으며 많은 전쟁을 치룬지역이다)에서 전사(왕하23:29. 대하35:20~27). 므낫세와 아몬의 시신이 매장된 묘지에 장사됨. 예레미야도 그의 죽음을 맞아 특별히 그에 애가를 지음으로써 그의 죽음이 백성들엑 얼마나 심각한 재난인가를 암시해 주고 있다(대하35:25). 기원후 1917 제1차 세계대전때 영국군은 터키군을 이곳에서 무찌름. 계16:16(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Armageddon)’= '므깃도산((Har megiddo)’이라는 히브리 말을 희랍어로 옮긴 말이다)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

............................................................................................................................................................

●?여호아하스Jehoahaz(B.C609)(대하36장,왕하23장/3달재위):

  23세에 즉위. 요시야 왕의 아들, 모친 하무달. 치리한지 석달만에 애굽 왕이 예루살렘에서 그 위를 폐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하며 애굽 왕 느고가 또 그 형제 엘리아김을 세워 왕으로 세움. 바로느고가 립나에서 가두어 왕이 못되도록 하고 애굽으로 끌려가 죽음. 이스라엘 11대왕도 여호아하스(예후의 아들). .............................................................................................................................................................

●?여호야김Jehoiakim(B.C609~B.C598)(대하36장,왕하23장/11년재위):

  25세에 즉위. ‘엘리아김’을 여호야긴으로 개명. 요시야왕의 둘째아들.여호야김의 아들은 여호야긴과 시드기야이다(대상3:16). 모친 스비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을 3년간 섬기다가 배반함. 갈대아(신바벨론제국을 형성한 여러 소국가들중에서 중추국임. 고대에는 '시날'이란 이름으로 알려짐)와 아람과 모암과 암몬 자손의 군대에 침략당함.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치고 저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다. 느부갓네살의 성전기명약탈은 여호야김 재위 3~4년경부터(단1:1)이고, 그후 점차 약탈이 강화되어 11년후인 시드기야 통치 말기(왕하25:13~17)에는 아무것도 남지않고 예루살렘 시가와 성전과 궁궐 등이 모두 불태워짐.

............................................................................................................................................................

●?여호야긴Jehoichin(B.C598~B.C597)(대하36장,왕하24장/석달 재위):

  18세에 즉위. 여호야김의 아들, ‘헬’ 여고냐(마1:11). 포로로 잡혀 간 여호야긴의 아들은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이다(대상3:17~18). 모친 느후스다. "여호야긴이 잡힌지 37년"(왕하25:27)이란 시드기야11년(예루살렘이 함락당한지 26년이 되는 해)+26년동안이나 포로로 옥에 갇혀지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신바벨론제국의 창시자 나보폴라살의 아들,B.C.605~562)이 죽고 에윌므로닥(원명은 '아윌마르둑'=느부갓네살에 이어 왕위에 올라 2년을 통치했으나 처남 네리글리살에게 살해당함)이 바벨론왕이 되자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

●?시드기야(Zedekiah)(B.C597~B.C587):(대하36장,왕하24장/11년재위):

  21세에 즉위. 모친 하무달. 느부갓네살왕은 여호야긴의 숙부,요시야왕의 셋째아들인 ‘맛다니야(여호와의 선물)’를  시드기야(여호와의 의)로 개명함. 요시야의 아들은 맏아들이 요하난이요, 둘째가 여호야김이요, 셋째가 시드기야요, 넷째가 살룸이다(대상3:15). 왕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섭정자로 본다. 왜냐하면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은 여호야긴을 계속해서 유다왕으로 대접했기 때문이다(왕하25:27~30).

예레미야의 예언(렘25:11, 29:10)을 듣지 않음으로 갈대아왕(느부갓네살을 가리킴. 갈대아사람의 본고장은 바벨론 남동쪽 해안지방이었는데 거기서 바벨론으로 점점 밀고 들어갔다.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살도 갈대아 종족이었는데, 그 당시의 갈대아는 바벨론을 뜻함)의 손에 붙여 바사국이 주재할때까지 이름.

70년(유다가 갈대아에게 처음으로 굴복한 때는 B.C601~600년이었다(왕하24:1). 그리고 첫번째 바벨론 강제 이주시기는 여호야긴 또는 시드기야의 1년. 곧 598년 또는 597년이었다(왕하24:8~12). 예레미야의 예언에 나타난 70년이란 숫자는 분명히 첫번째 이주의 경우에서는 상징적인 뜻으로 쓰였다. 70이란 수를 고집한다면 첫번째 이주는 여호야긴 3년에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은 렘25:11, 29:10에서 유다백성이 포로로 잡혀간지 70년만에 바벨론은 메대-바사군에 의해 멸망하고 바사의 고레스왕이 실권을 장악하게되므로 70년 뒤에 바벨론 왕을  징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는 에윌므로닥과 다른 가문에서 나온 왕위 찬탈자인 네르갈사레셀(느부갓네살의 사위), 나보니두스 등이다.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B.C.538년이다.  바벨론의 예루살렘 포위공격은 B.C.587년 1월. 남유다 멸망(B.C.586년)


Articles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