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막에 나타난 그리스도

by 갈렙 posted Oct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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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의 놀라운 모형


Ⅰ. 성전 뜰

2. 세마포장

3. 문 , 기둥, 놋바침, 갈고리와 가름대

4. 번제단

5. 물두멍


Ⅱ. 성소

6. 분향단

7. 떡상

8. 등대


Ⅲ. 지성소

9. 법궤

10. 제사장


1. 그리스도의 놀라운 모형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데, 성막의 모든 기구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모습들을 나타내고 있다.
성막에 관한 성경 말씀을 읽어보면, 외형적으로는 성막에서 아무것도 흠모 할 것이 없다.
사막에 있는 성막은 아주 길고 높은 흰 세마포 천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무 매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성막안의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면 사방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출애굽기 38장 24절에 보면 성소 건축비용에 들어간 금이 29달란트 730세겔인데, 이것을 kg단위로 환산하면 1 톤이 되며 돈으로 환산(순금 도매 1돈[3.75g]가격인 49.700원을 기준)하면 약 130억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이 외형적으로 볼 때에는 아무 흠모 할 것이 없는 세마포 천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 하시다.

이사야는 예수님을 소개 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이사야53:2)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성전 뜰


2. 세마포장

세마포장

세마포장은 성막의 구성요소중 가장 바깥부분이다.

성막은 제일 안쪽에 지성소가 있고, 그 바깥 부분에 성소가 있으며, 그 다음 바깥 부분이 뜰인데, 이 뜰은 모래 벌판위에 기둥을 세워 남쪽으로 100규빗, 북쪽으로 100규빗, 동쪽으로 50규빗, 서쪽으로 50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만들었다.

그리고 뜰을 둘러싼 포장은 희고 깨끗한 고운 삼베, 즉 세마포로 만들도록 했는데, 성막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듯이, 세마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고 깨끗하고 점이 없고 의로운 성품을 나타내 주고 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22, 23절에서,

"저는 죄를 범치 않으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 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라고 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실 동안 전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의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의로운데 반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성경이 말씀 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나 광야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옷이 헤어지지 않았고, 신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서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고 옷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40년동안 입은 옷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때가 묻어 더러웠다. 그러나 그들 중 몇 명만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옷이 더러운 줄을 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막에 가까이 와서 희고 깨끗한 세마포로 만든 성막의 바깥담을 보고서야 그들의 옷이 더러운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얼마나 추하고 악한지를 잘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하루는 사람들이 간음중에 잡힌 여자를 돌로 치려고 예수님 앞에 끌고 왔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고 하셨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오기 전까지 그들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악한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 속에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들 속에 감추어져 있던 추한 죄가 발견되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돌을 버리고 도망하게 되었다. 그들이 죄를 지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지 않았다면 죄를 깨달을 수가 없었으며, 그들 자신이 얼마나 추한지를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자신을 비추어볼 만한 눈이 없기 때문에, 자기와 같이 있는 교인들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고 '그래도 나는 김 집사보다는 양심적이다. 이 집사보다는 깨끗하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생각 속에 젖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깨끗한 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자신을 비추어보면 얼마나 형편없고 더러운 자인지를 알게 된다.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볼 수 있는 눈이 뜨여져야 한다



3. 문


 

성막의 바깥 담장은 동쪽과 서쪽이 각각 50규빗씩, 남쪽과 북쪽이 100규빗씩으로 그 둘레가 전부 300규빗이며, 성막의 동편은 가운데 20규빗의 문과 문 좌우로 15규빗씩의 담장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가운데 있는 20규빗의 문은 청색, 자색, 황색실과 고운 베실로 수를 놓아서 주위의 흰 세마포 담장과 선명하게 구별이 되므로 누구나 쉽게 문을 발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자색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심을, 가는 베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종이심을 나타낸다면, 청색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홍색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성막의 높이는 5규빗인데, 5규빗을 m로 환산하면 2m 25cm정도가 된다. 이 높이는 보통 사람이 그 너머로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넘어갈 수 없는 높이다. 즉, 성소 안에 들어가려면 어느누구도 담을 넘어서는 갈 수가 없으며, 반드시 문을 통하여 들어가야 한다. 이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 10:9)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들은 각기 나름대로 그 종교의 어떤 계율이 있어서 대부분 선한 생활을 강조하고 성실하고 참되게 살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신앙은 종교와 다르다. 종교는 선하고 도덕적인 삶을 통해서 교주나 신의 요구에 따라줄 것을 요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성실하게 살아서 어떤 위치에 도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자기 스스로의 도덕적인 행위, 또는 적선으로 말미암아 어떤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신앙은 우리의 수단이나 노력으로 거기에 도달 핳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과 종교의 차이점이다.

이 세상 종교의 어느 신이 우리를 대신해  죽어 줄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과 할 때, 그 죽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지고 거룩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절도요 강도라고 했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선하고 진실해 보여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라는 것이다.

문에서 양을 안수 하는 장면(그림)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막 바깥에 서성거리면서 성막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문 되신 부분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는 더러운 것이나 악한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려고 할 때 죄인된 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죄가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죄인이고, 사단의 자식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가 없고 거룩하며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편 1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신다." 고 했고, "의인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 고 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죄를 씻었느냐 씻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도 죄인이다.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유월절 이야기를 보면, 정월 14일이 유월절인데, 정월 10일에 어린 양을 구별해서 4일 동안 지켜본다. 이 양이 흠이 없는가? 점이 없는가?를  살펴서 점이나 흠이 없다는 것이 확인 되었을 때, 정월 14일에 유월절 양으로 잡아 고기를 먹고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4일 동안 지켜 보았을 때 아무 흠이 없었던 어린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켜보았지만, 그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는 구별 되었다.

성막의 다른 부분은 흰 세마포로 되어 있지만, 문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되어 있어 금방 드러나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셨지만,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들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 놓은 종교의 흐름 속에 함께 흘러 가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의 색깔은 항상 달랐기 때문에 배척을 받고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예수님도 인간들과 함께 흘러갔다면, 멸시와 배척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종교와 전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나님께 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서뜨려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한다.

성막의 문의 색깔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 종교인들이나 공자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지고 사셨기에,어디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시면 쉽게 구별되고 거부감이 일어났다.

이와같이 오늘날 참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세상과 색깔이 달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배척과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문 안에 들어가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사함받고, 크고 놀라운 사랑을 맛 본다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둥  

성막을 둘러싼 담장은  시멘트도 아니고, 철판도 아니고, 세마포장이다

그런데 남쪽으로 100규빗의 포장을 칠 때, 매 5규빗마다 기둥을 세워서 기둥 20개를 세우고, 북쪽에도 역시 100규빗의 포장을 치는데 기둥 20개를 세우고, 서편의 담장은 50규빗의 포장을 치는데 기둥 10개를 세웠다. 동쪽 가운데에 문이 있다.

문 오른쪽에 15규빗의 포장을 치는데 기둥 세 개를 세우고,문 왼쪽에도 기둥 세 개를 세우고 15규빗의 포장을 치며, 문은 기둥 네 개를 세운 뒤 거기에 20규빗의 포장을 쳐서 바깥 담을 만들었다.

성막을 둘러싼 담장의 총길이는 300규빗인데, 매 5규빗마다 기둥이 있음으로 성막에 세워진 기둥은 전부 60개이다.

하나님은 모든 성막 기구들의 규격을 정확하게 명시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쓰여지는 재료를 금이면 금, 은이면 은이라고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성막의 다른 모든 기구들은 재료가 명시되어 있지만, 유독 기둥만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전혀 그 재료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성막의 세마포장을 칠 때 사용되어진 기둥의 재료가 명시되어있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기둥은 바로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우리들을 가리키는데, 주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전혀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기둥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은 인간적인 어떤 조건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비워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질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가문이 좋든 나쁘든, 돈이 적고 많음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훈련하셔서 성전의 기둥으로 삼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기둥 스스로 '나는 금이기 때문에, 혹은 나는 은이기 때문에 쓰임을 받는다.' 는 소리를 할 수 없다.

우리는 부드럽거나 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손에 잡히게 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양대로, 기뻐하시는 뜻대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성전의 귀한 기둥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많이 배웠기 때문에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교만한 생각이지만, 반대로 나는 무식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역시 교만한 생각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쓰신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익할 뿐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비워져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듬으시고 훈련하셔서 귀한 일꾼으로 쓰시며, 그를 통하여 영광을 거두신다.


  놋받침

출애굽기 27장 9, 10절에,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편을 당하게 할지니,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즉, 남편에 있는 포장을 위하여 기둥 스물을 세우고, 북편 포장을 위하여 기둥 스물을 세우고, 서편을 위하여는 기둥 열을 세우고, 또 동편 문 입구 쪽에 기둥 열을 세우는데, 그 60개의 기둥에 60개의 받침을 만들어서 그 위에다 기둥을 세우라고 되어 있다

성막에 쓰이는 기둥은 반듯이 놋받침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기두의 받침이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기둥이라도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밑받침이 엉뚱한 곳에 있기 때문에 신앙의 밑받침이 온전치 못하여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흔들린다.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을 자기의 감정에 세워서 기분이 좋을 때는 믿음이 좋은 줄 알고, 기분이 나쁘면 믿음도 나쁜 줄로 생각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을 자기의 행위에다 세워서 행위가 좋을 때는 믿음이 견고하게 서 있지만, 행위가 나빠질 때는 믿음도 흔들리면서 나빠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가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놋받침 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아무리 구속함을 받은 형제 자매라 할지라도 실수를 하거나 범죄할 경우가 있다. 우리가 놋받침 위에 견고하게 서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우리가 범죄를 하거나 실수하게 되었을 때, 사단은 우리의 허물들을 하나님 앞에 참소 할 뿐아니라  우리양심에다가  '네가 그런 허물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고 정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서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할 수 있는가? 놋받침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우리가 죄를 범하거나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받으신 주님 위에 서 있을 때에라야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하고 범죄하고 실수했지만, 그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고, 능력을 상실한 죽은 죄이기 때문에 그 죄가 우리의 믿음을 흔들지 못하고 우리를 괴롭히거나 불행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을 때, 그 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심판을 받지 않으심으로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죄는 살아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이 자기의 의지나 결심, 선한 행위에 서 있다면, 사단이 쉽게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릴 수 있겠지만,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그 위에  서 있다면 결코 넘어뜨릴 수 없다.

  갈고리와 가름대

출애굽기 27장11절에,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기둥과 기둥을 서로 붙들어 주고 연결해 주는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하라고 되어 있다. 기둥이 놋받침 위에 세워졌다고만 해서 튼튼하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기둥의 받침은 그 기둥을 지탱하기에는 충분하겠지만, 바람이 불 때에는 그 받침만으로는 포장이 쳐져 있는 기둥을 견고하게 세워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막에 나타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또 다른 면으로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삶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기둥이 튼튼하게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 인간이 어떻게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가?

성막에 보면, 기둥과 기둥사이를 갈고리와 가름대가 연결시켜 주어서 기둥들이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은으로 되어 있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있다. 즉,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고, '나무' 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성품' 을, '놋' 은 심판을 의미하는데, '은' 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의미하고 있다.

죄를 범한 자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올 수가 있는가?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은혜는 모든 것이 온전한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하며 추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만일 허물이 없고 부족함이 없다면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다. 누가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가? 범죄하고 실수한 사람이다.

우리가 범죄할 경우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받으시는 은혜가 성막의 기둥들을 붙들어 주는 갈고리와 가름대처럼 우리를 붙들기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교만해지면 은혜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야말로 은혜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임을 알아야 한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은혜와 긍휼을 얻게 되는 것이다.


4. 번제단

 번제단

하나님께서도 예수의 피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를 원치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 우리가 성막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제단이 보이고, 그 제단 위에는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은 어린 양이 보이며, 어린 양이 불타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 제단에서 불 타고 있는 어린 양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 미하고 있다

인간들은 범죄한 이후에 계속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왔다. 인간들이 처음에는 죄를 미워하다가, 죄와 더불어 오래 사는 동안 죄와 친숙해져서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데에 아주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기보다는 범죄나 불의한 방법으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한다. 인간들이 즐거워하는 모든 곳에는 불의가 역사하고 있다.

우리가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실 때는 부담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할 때는  그 죄가 우리 양심 속에서 우리를 정죄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담대함을 잃게 만든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죄에 눌려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죄와 더불어 사는 것을 마음 아파하시며 안타깝게 여기셔서, 우리가 속히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떠한 어둠 속에 있든지 간에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마련 하셨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쏟아야 할 모든 진노, 우리에게 내려야 할 심판과 형벌을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은 곧바로 우리의 죽음이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곧바로 우리의 못박힘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고 죽어 불타고 있는 어린 양이 바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복되고 기쁜 삶을 살 수가 있다.

분리된 번제단(사각 모서리의 뾰족한 부분이 "단뿔")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출 27:1,2)

이 말씀에 보면 제단 사각 모퉁이에다가 뿔을 만들어 연하게 하라고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은 성막의 뿔들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성경에서는 무엇보다 단뿔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죄를 지어 두려움 속에 빠졌을 때 그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제단뿔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가끔 발견할 수 있다.

레위기 4장을 보면,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나 이스라엘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향단 뿔에, 족장이 죄를 범했을 때나 평민이 죄를 범했을 때에는 번제단 뿔에 짐승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바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레미아 17장 1절,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제단뿔에는 우리 죄를 기록해 놓았다고 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 안에 거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단 건너편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경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제단뿔이 가로놓여 있어서, 평상시에는 그들의 죄를 기억지 않다가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기만 하면 제단뿔에 새겨진 죄가 생각나 마음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속죄 제사를 드릴 때에는 죄를 범한 사람이 어린 양에게 안수한 뒤 그 어린 양이 죽음으로써 죄가 사해졌는데, 마지막으로 죄의 기록을 지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제단뿔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우리 보기에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전혀 보이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자신이 경건치 않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번제물인 소에게 안수를 하는 모습  

성경에 나타난 모든 숫자에는 깊은 뜻이 있다.

예를 들어, 3은 하나님을, 4는 고난을, 6은 인간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으며, 완전을 나타내실 때는 7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셨다. 5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낼 때 사용하셨다.

오순절에 성령을 값없이 은혜로 받았다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7장에는 50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데나리온 빚진 가 탕감을 받는 부분에 대하여 5라는 숫자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그들을 탕감해 주셨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요한 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행각 다섯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섯 행각이라는 부분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나타낼 때는 항상 5라는 숫자를 사용하셨는데, 제단의 사면 길이가 오 규빗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단을 통해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단은 동쪽에서 보든 서쪽에서 보든 어느 면에서 보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복을 주실 때에는 우리가 수고한 대가를 따라서 주는 것이 아니라, 값없는 은혜로써 우리들에게 베풀어주기를 원하신다. 이 제단은 십자가를 가리키는데, 그 십자가를 볼 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은혜를 받는 인간 사이에 받는 자가 아무 대가없이 받도록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 편에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셨다. 즉,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려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측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 씻음을 받을 때 우리가 무엇를 열심히 하고 눈물을 흘리고 각오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측인 하나님 편에서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번제 드리는 장면

제단에서 양이 피를 흘리며 죽어 불태워지고, 그 피가 제단 밑에 뿌려지는 것을 보면, 바로 어린 양 되신 에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며 죽으시는 보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셔야 하는가? 가장 먼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은혜, 죄 사함을 뱓는 은혜를 베풀어야 했다. 그렿기 때문에 우리 죄를 쌧기 위하여 100% 하나님께서 일을 해야만 우리가 온전한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우리가 구원뱓는 일은 1%라도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포함된 것이 아니라, 100%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번제' 는 양이나 소의 가죽을 다 벗기고 각을 떠서 그 각 뜬 고기를 불에 태우고, 그 피는 단 사면에 뿌리는데, 짐승의 내장은 전부 물로 씻어서 제단 위에 태워 버리는 제사를 말한다.

이 번제가 바로 제단 위에서 드려지는데, 양이나 소의 고기가 불태워져 재만 남고, 그 피가 뿌려지는 부분을 제단이라고 말한다. 이 번제는 제단 사면에다 피를 뿌리게 되어 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도 ,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심을 입은 귀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자신의 흔적을 남김없이 온전하게 불태워 드리셨는데, 그 모습을 이 제단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번제 드리는 장면(하나님의 임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뜻을 따라 살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구약의 말씀(뜻)에 따라서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을 당하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말씀에서도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구약시대에 제단에서 수없이 많은 양들이 희생을 당했을 때에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당신의 생각이나 뜻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뜻은 모두 사라져 버렸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귀한 뜻을 알려면 예수님처럼 자기 생각을 다 버려야 한다. 자기의 소욕이 꺽여지고 죽임을 당해야만 '내뜻대로 마옵시고 ‥‥' 하는 고백이 이루어질 수 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그 손에 피가 있어야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만일, 그 손에 피가 없으면 지성소에 들어가는 즉시 그는 죽고 만다.

 

제사장이 살기 위해서는 어린 양이 죽어서 흘린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살리시려고 피를 흘려 주신 것이다. 그 피가 제단 사면에 고여 있고, 단뿔에 발리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갈 담력을 얻는 것이다. 만일, 어린 양이 제단에서 죽임을 당해서 흘린 피와 불태워진 재가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실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희생 당한 어린 양이 우리를 위하여 흘린 피와 불타 없어진 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이다.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육신의 모든 소욕이나 생각이 불타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 세워졌듯이, 우리 육신의 모든 소욕이나 생각이 불타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으신다. 우리 육신의 제물은 빈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드려진 어린 양의 피와 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가득히 쌓여 있는 심판과 모든 진노를 쏟아버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주는 장소가 바로 제단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인 것이다.


5. 물두멍


 

 물두멍

제단에서 단번에 모든 죄를 영원히 씻고 의롭게 된 성도는 이제 하나님의 지성소를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을 내닫게 되는데, 제단을 거쳐서 지성소를 향해 들어가는 한가운데 물두멍이 놓여있다.

이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제단에 와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 그 물두멍에 손과 발을 씻어서 죽음을 면케 하는 역할을 한다.이 물두멍 자체는 우리의 손과 발을 씻는 곳이지 목욕을 하는 곳이 아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만일 죄 사함을 받고 난 후 범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를 사함받고 난 다음에는 죄를 막 지어도 괞찮습니까?" 라는  질문들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을 때, 어떤 죄는 씻어지고, 어떤 죄는 씻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죄를 영원히 완전하게 씻음받았다. 요한1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총망라해서 단번에 깨끗하게 씻어주신디.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죄를 적게 짓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 인간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강한 결심을 하더라도 죄가 우리를 끌고 다니면 꼼짝없이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범치 않으려면, 죄를 이길 수 잇는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이 함께 거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만 이기셨을 뿐 아니라 사단의 시험도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신 분 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고, 죄를 범치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아무 장벽이 없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깨끗하고 거룩한, 흠과 티가 없는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는 우리 자신이 그 죄를 처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 사람이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지만, 이 죄도 십자가에서 그 형벌이 끝났습니다." 하고 대언, 변호해서,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틈을 만들지 않도록 해 주신다. 사단은 우리의 범죄를 이용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으려 하지만,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서 그 죄가 이미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가 다시 회복된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도 범죄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 항상 대언자로 계셔서 그 죄도 해결해 주신다. 그러므로 '손발을 씻는다'는 것은 '내가 범죄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죄까지도 다 해결하셨구나.' 하는 믿음으로 깨끗함을 입는 것을 뜻한다.

분리된 물두멍

우리는 목욕하는 것과 발 씻는 것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함받고 거듭나는 일이 목욕이라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짓는 죄는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데,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은 발을 씻는 것이다.

요한 일서에서도,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말씀이 목욕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는 말씀은 발을 씻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종종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다  씻으셨지만, 날마다 죄를 짓는데 어떻게 감히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눈이 두 개가 있지만, 항상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지, 각기 다른 방향을 주시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눈도 한쪽 방향 외에는 볼 수가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바라보든지,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든지 어느 한쪽 방향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은혜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행위를 볼 수 없고, 반대로 행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주의 은혜를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놓으신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으시는데, 죄를 지을 때  우리 편에서 스스로 마음의 가책을 느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 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물두멍에 손발을 씻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죄를 사함받은 사람이 아니다.

만일, 나에게 빚이 있는데, 누군가 그 빚을 갚아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을 때는 여전히 빚에 대한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빚을 다 갚았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면 더 이상 빚 때문에 마음이 눌릴 필요도 없다.

그렇듯이 내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졌다는 믿음이 오게 되면 온전히 죄에서 해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으면 여전히 죄악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단, 향단, 법궤 등 성막의 모든 기구에는 규격이 정해져 있지만, 물두멍에는 규격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는 데는 어떤 제한이나 한계를 두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원죄, 자범죄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서 우리가 죄에서 해방을 받지 못하도록 미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범죄했을 때 즉시 죄악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는데, 아담 스스로 그 마음이 막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으로 숨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가슴 아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실제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놓으셨는데 우리의 마음이 죄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신다. 성경 66권 여러 곳에서 죄 사함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단은 성경 속에 나타난 구원의 깊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하여 우리의 마음을 죄악 속으로 사로잡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죄 사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께서 원죄만 사했기 때문에 자범죄는 우리가 씻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속여 왔다.

출애굽기 30장 19절을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 물두멍을 만든 이유가 '죽기를 면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두멍에서 성소의 쓸 물을 길어오는 모습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의롭게 봐 주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언 17장 15절에,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보고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미워하시므로, 하나님은 결코 악인을 보고 의롭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악인이지만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가 실제로 깨끗하게 씻어져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출애굽기 38장 8절에 보면,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었는데, 그 재료는 어디에서 취했는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회막에는 수종드는 여인들이 있었는데, 그 여인들이 바친 거울을 녹여서 물두멍과 받침을 만들었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날마다 자기의 잘못된 부분이나 허물을 보기 위해서 거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거울을 하나님 앞에 바쳤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의 잘못된 점이나 허물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그 거울이 드려져서 제사장들의 수족을 씻는 물두멍이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제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자기가 자기 모습을 쳐다보며 허물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 거울은 하나님 앞에 드려져서 제사장들이 수족을 씻고 죽기를 면하게 되는 물두멍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허물을 보면서 일일이 주님 앞에 고백하며 자신을 다듬던 삶에서 벗어나게 되면 '물두멍에서' 우리의 죄가 씻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죄가 많든 적든, 크든 작든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졌다는 사실을 물두멍이 가르쳐주는 것이다.

오늘날도 물두멍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하나님 앞에 거울을 드리기 전까지는 자기의 허물을 보며 그 허물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허물을 보고 그 속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얼굴에 때가 있으면 물로 씻어야 하겠지만, 우리 심령의 죄는 매일매일 들여다 본다고 해서 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죄는 이미 2000년 전에 흘린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영원히 온전케 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드린 거울은 다시는 그들의 손에 들리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감기워지고, 우리를 온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이 뜨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참 귀한 삶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는 이제 옛날의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 이상 죄악 속에 빠졌던 옛날의 우리를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바꾸시고 새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악을 이길 뿐더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이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왕의 자리에 앉아서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이다. 참된 신앙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그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입게 될 영광스러운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



<성소>



향 단

향 단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 단 상면과 전후 좌우면과 뿔을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를지며, 금태 아래 양편에 금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편에 만들지니, 이는 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 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출 30:1-7)

 성소에는 떡상과 등대와 향단이 있다. 향단은 성소의 떡상과 등대를 지나서 다시 지성소를 향하여 들어가는 장 입구에 있다. 이 향단은 장이 일 규빗, 높이는 이 규빗으로,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정금으로 싸게 되어 있다. 출애굽기 30장7절에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아침마다 아론은 그 향단 위에다  향기로운 향을 사르게 되어 있다. 이 향단은 성막에 있는 기구 중에서 가장 작은 규격의 기구 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시는 가까운 쪽에 두어서 항상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을 만족 하게 하는 역할을 하며,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기 때문에 비록 추하고 연약한 우리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고 계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히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소의 내부 모습(중앙 입구에 향단이 위치하고 있다.) 

향단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출애굽기 30장 6절에 보면,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만나는 곳은 속죄소 위하고 하셨는데, 이 향단은 바로 속죄소 맞은편에 두라고 하셨다.

향단은 반듯이 속죄소 맞은편에 두어 그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우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속죄소 위에서 만나는데, 만일 향단을 속죄소에서 멀리 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날 째 향기로운 향을 맡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향단을 속죄소 가까이 둔 이유는,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냄새를 흠향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근본을 보신다면 우리는 추하고 더러워서 대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향단에서 불타오르는 그 향연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신다. 그 향기로운 연기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중보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기도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때마다 항상 작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보혈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끝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즐거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속죄소 맞은편에 있는 향단에서 향기로운 향이 탄 냄새가 속죄소를 덮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또 한편으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타내주고 있다. 우리가 지성소에 더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조각목인 향단이 금으로 싸인 것은, 연약한 우리 자신이 금, 즉 하나님의 영광으로 싸여서 우리의 연약함과 상관없이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모습을 나타내 죽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영광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신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향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향단에서의 제사 모습

조각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주고 있는데, 향단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더 깊은 부분을 나타내주고 있다.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향단은, 그 재료가 꼭 조각목이어야만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반드시 사람이어서 우리의 모든 형편과 연약함을 잘 알아야 되기 때문이다.

디모데 전서 2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고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심히 주리셨으며, 피곤하여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셨고, 행로에 곤하여 그대로 앉으셨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도 채찍에 맞아 찢기시고, 가시관에 찔리셨으며,마지막으로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운명하셨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신 분임을 잘 알 수 있다.

우리의 온전한 중보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서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무지함을 잘 아신다. 주님은 친히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향단을 금이나 은으로 만들라고 하시지 않고 조각목으로 만들게 하신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심을 나타내는 것이고, 조각목이 금으로 싸여 있는 것은 사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완전히 덮여져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0장에서 향단을 만들어서 속죄소 맞은편에 두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그 장 안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씩밖에 들어갈 수 없지만, 향연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의 전에 상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는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지만,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 또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려운 문제를 의논하고, 하나님의 손에 그 문제들을 맡겨 놓을 때 하나님은 어김없이 그 모든 일들을 이루어주신다. 그러므로 이 향단은 속죄소 바로 맞은편 장 밖에 두되 지성소 바로 앞에 두어서, 우리의 육체는 그  휘장을 넘어서 자주 지성소로 왔다갔다 못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기도로 항상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살 수 있다. 이제 이 기도를 통해서 늘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귀한 삶을 살게 되기를 ‥‥



등 대

   등대

출애굽기 25장 31절에서 40절까지 읽어보면,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이편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두멍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오른편에는 뗙상이 있고, 왼편에는 등대가 있으며, 그 앞부분에는 향단이 놓여 있다. 이 떡상은 우리가 아는 대로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고, 향단은 우리의 중보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으며, 등대는 우리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있다.

출애굽기 25장 31절에 보면, 등대를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쳐서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다. 등대는 오홀리압과 브살렐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등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금 한 달란트가 필요했다.

이 정금 한 달란트를 오홀리압과 브살렐이 망치로 쳐서 점점 등대의 모양으로 바꾸게 된다. 결국, 계속 망치로 쳐서 여섯 가지가 나오고, 드디어 일곱 촛대가 세워지며, 그 위의 등잔에 등불이 켜지는, 아름답고 찬란한 빛을 발하는 등대로 변하는 것이다.

이 등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뿐 아니라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그림자인데, 성도들이 빛을 내는 등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를 입어야 하는가? 처음에는 한 달란트의 정금인데, 금은 금이지만 각기 자기 모양을 가진 금덩어리의 모양이 네모난 것이었는지 세모난 것이었는지 그 모양에 대하여 전혀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일단 등대로 만들어질 금덩어리가 하나님의 종인 오홀리압과 브살렐의 손에 잡히게 되면 그 때부터 끊임없이 망치로 얻어맞게 되는데, 맞는 동안에 어떤 부분은 들어가게 되고, 어떤 부분은 나오게 된다. 그렇게 계속 맞다가 보면, 그것이 점점 등대의 모양으로 변해서 나중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빛을 발하는 등대가 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도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면, 자기가 열심히 애쓰고 노력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자기의 모양을 잃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등대를 만들 때 등대를 만들기 전의 금의 모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일단 거듭나고 나면 그 때부터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 모양이 달라지고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자기 자신을 벗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속에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망치질을 하고 계신다. 금덩어리가 자기의 모양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등대로 변하듯이, 우리 모습이 점점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모습으로 버뀌어져서, 결국에는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등대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성소의 내부 모습(좌측에 등대가 위치하고 있다.) 

출애굽기 25장 31, 32절에 보면, 등대는 등대를 받치는 밑판과 줄기, 거기에서 나온 여섯 가지와 가지의 끝부분에 살구꽃 모양의 잔 일곱 개, 잔의 받침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등대를 만들 때는 밑판에다 줄기를 따로 만들어 붙이고, 줄기에다 가지, 잔, 꽃받침을 따로 만들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정금 한 달란트, 즉 금덩어리 하나를 쳐서 밑판도 나오게 하고, 줄기와 가지와 잔, 꽃받침을 만들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다. 오홀리압과 브살렐이 등대를 만들 때, 밑판, 줄기, 잔, 꽃받침 등 등대의 각 부분을 다른 곳에서 따로따로 만들어서 조립한 것이 아니라, 정금 한 달란트를 쳐서 어떤 부분은 밑판이 되게 하고, 어떤 부분은 줄기, 어떤 부분은 가지와 꽃받침, 잔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꽃이나 꽃받침, 밑판과 줄기는 모두 한 덩어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기 전에 이방인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으며(엡 2:11, 12),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었고(롬 5:10),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였다고 성경은 말한다.

또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고(사 53:6), 우리 모두가 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우리 마음대로 살아왔다(엡 2:3)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서 한 몸인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서로 다른 조각들을 모아서 하나의 모자이크 작품을 이루듯이, 우리 개개인이 부르심을 받아 서로 다른 개성이 적당히 조화되어 교회를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각자 자기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께 돌아왔을 때, 성령을 모신 새 사람으로 변화된다.

성령은 주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을 보신 자들은 외형적인 모습에 상관없이 동일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정금 한 달란트로 등대가 만들어졌듯이, 정금 한 덩이에서 가지와 꽃과 꽃받침과 잔이 모두 나온 것처럼, 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 안에서 어떤 형제는 가지, 어떤 형제는 밑판, 어떤 형제는 꽃받침, 어떤 형제는 꽃의 직분을 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지 아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섞이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반발을 일으키고 부딪치며 거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등대의 모든 것이 한 덩어리에서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다. 등대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지듯,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덩이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

등대의 밑판

31절에 보면,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하는 부분이 나온다. 등대는 불을 켜기 위해서 줄기에 나온 여섯 가지가 일곱 등잔을 받치고 있는데, 이 모양대로 그냥 세운다면 그것은 서지 못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등대가 넘어지면 등잔에 담겨진 기름은 쏟아지고 등불은 꺼지고 만다. 등대가 서서 빛을 내기 위하여는 구조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중에 등대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밑판이다. 밑판이 든든하게 서 있고, 그 밑판으로부터 시작해서 줄기와 가지가 세워지며, 꽃과 등잔이 달린 하나의 등대가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 밑판은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아름다운 복음의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그 밑판이 든든치 못하면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밑판이 든든한 등대는 절대로 넘어질 수 없다.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도 때때로 시험을 만나서 절망에 빠지거나 좀 흔들릴 때가 있지만 그리스도는 우리 신앙의 든든한 밑판이 되어 주신다. 그 날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반열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게 된다.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자기의 수단이나 재주나 노력으로 말미암아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게 되면 우리가 주님을 견고하게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밑판이 되셔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잡고 계신다는 것이다

만일, 등대에 밑판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지나 줄기가 자기의 기술이나 재주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서 있으려 한다면, 그것은 너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밑판이 든든히 세워주기 때문에 줄기나 가지들은 서 있으려고 의식하지 않아도 그냥 서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밑판으로 삼고 그리스도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서 있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 다만,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든든하게 서 있지 않고 넘어져 버린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잠언 24장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의인이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죄를 손끝만큼도 남김이 없이 씻음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바로 의인은 밑판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견고하게 서 있으려고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아도 견고하게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모양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모양대로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라면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구속함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변하려고 애를 써도 여전히 껍데기뿐이고, 속은 악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본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구원을 받고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과 너무 다라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등대의 가지

등대를 만들 때는 원줄기에서부터 이편으로 세 가지, 저편으로 세 가지가 나오게 하여 원줄기와 합하도록 하였다. 이 여섯 가지가 원줄기와 합하여 일곱이 되었을 때, 아름다운 빛을 비추는 등대가 된다.

등대에 관한 말씀을 읽어보면 6이라는 수가 자주 나오는데, 성경에 나타나는 6이라는 숫자는 바로 인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 인간을 만드셨다.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왕이 높이가 60 규빗, 폭이 6 규빗인 금신상을 만든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도 60, 6 이라는 숫자가 등장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에도 짐승에게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죽게 되는데 그 짐승의 수가 666 이다. 결국 그 6이라는 인간이 강성하게 되어졌을 때,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등대의 여섯 가지는 원줄기에서 나와서 그 줄기와 함께 나란히 있어야 비로소 성소의 어둠을 비추는 아름다운 등대가 된다. 그러나 만일, 여섯 가지가 원줄기를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나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의 결정에 따르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게 될 때, 우리는 등대가 되어 아름다운 빛을 나타내는 귀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세상의 빛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은 등대의 여섯 가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살구꽃 형상

등대에서 나오는 세 가지마다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뱓침과 꽃이 있게 하라고 했다. 성경에서 '살구' 라는 단어가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전도서 12장에는 살구나무에 꽃이 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이 자기 외삼촌 라반의 양을 칠 때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껍질을 벗긴 그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물을 먹으러 온 양들이 그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히브리어로는 '살구나무' 와 '지킨다'는 말의 음이 비슷하다.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샤카드'라는 말인데, '살구'라는 말과 '내가 지킨다.'는 말의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살구'라는 말 속에는 '지킨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목자가 그 지팡이로 양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막에 나타나는 이 살구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막 자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이 성막에 있는 등대도 세상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등대의 줄기에 '살구꽃 형상의 잔을 새기라'고 한 것은 등대가 빛을 비춤으로써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키고 계심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동안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계신다.

꽃받침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주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만, 구약에서는 여러 가지 사물을 통해 그림자와 모형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주고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물을 통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숨져져 있지만 꽃이 지탱되도록 뒷받침해 주는 꽃받침은, 바로 우리 신앙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을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답고 예뻐도 그 꽃을 받치고 있는 꽃받침이 떨어지거나 없다면, 그 꽃의 꽃잎은 한 잎 두 잎 떨어지거나 바람에 날려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이, 아름답고 귀하고 놀라운 믿음과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남들보다 잘나거나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들 위에 보이지는 않지만 꽃받침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덮게가 덮혀있는 성소의 모습

우리가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꽃받침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구원을 받고 난 후의 신앙 생활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꽃받침이 되심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그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이름 외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받침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를 받으시기 때문에 그 분 외의 것들을 받으실 수 없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의로 뒷받침해 주신다면 십자가의 강도도 의로워질 수 있고, 간음한 여자도 의로워질 수 있다. 그리스도가 뒷받침이 되어진다면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를 포함해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어떤 죄인이라도 의롭고 거룩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뒷받침이 된다면 아무리 무식한 자도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의롭다, 거룩하다'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 신앙의 뒷받침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보다 우리의 노력으로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인 것이다.하나님께서 등대에 아름다운 살구꽃 형상의 잔을 만들라고 하셨을 때  다른 것으로가 아닌 꽃받침으로 그 꽃을 유지하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다른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받침이 되게 하셔서 우리가 아름다운 신앙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하셨다.

등 잔

등대가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등잔을 만들어 등불을 켜지 않는다면 그 등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등대는 성소 안의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어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주위를 잘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등대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나아가야 할 길을 밝게 비추어주는 빛의 역할을 하신다. 만일 성소 안에 등대가 없다면 제사장들은 어둠으로 인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를 모르고 이런저런 일에 부딪쳐 넘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일곱 등잔에서 빛이 밝게 비췸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있었다.

등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33년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어두운 종교인들의 세계를 밝게 비추고, 그들의 죄악을 들추어내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 속에 찔림과 아픔을 주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참된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어서 그들에게 거스림이 되고, 거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밝게 비추어서 어둠에 속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빛을 보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등대 위의 일곱 등잔이 성막 안을 비추어 줌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어두운 세상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아 내고 빛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명인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떡 상

  떡 상

성소의 남편에는 등대가 있고, 북편에는 떡상이 위치해 있다. 출애굽기 25장 23절에서 29절에 보면 떡상의 제도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떡상 역시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들라고 하였다.

성소에 있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 떡상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 떡상 위에 진설되어 있는 떡 역시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떡상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신 것이다.

레위기 25장에 나타난 이 떡상은 바로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제사장들이 새 떡을 올리고 먼저 진설했던 떡을 먹는 것처럼,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면, 그것이 바로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한 생명이 되어 주길 원하신다.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레24:5, 6)

여기서 진설병은 하나님 앞에 보이기 위하여 진설하는 떡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따라서 한 지파에 하나씩 열두 개의 떡을 여섯씩 두 줄로 진설하는데, 이 떡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 재료는 '고운 가루'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떡은 둥근 모양이든 네모난 모양이든 모양에 상관없이 재료는 고운 가루여야만 한다. 고운 가루는 아주 미세하게 부숴진 밀이다. 밀이 자기 껍질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자기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는 고운 가루가 되어질 수 없다. 우리는 빵이나 국수 등 밀가루 음식들을 별 생각없이 먹지만, 그것들은 먼저 밀의 껍질이 벗겨지고, 온전히 깨어져서 형체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고운 가루가 되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이 고운 가루로 만든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 그리스도는 육신의 껍질이 온전히 벗어지고 당신의 모양이 부인되어져서,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체로 빚어져 인간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생명의 떡이 되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한번도 육체의 소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문자 그대로 고운 가루로서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지고 아름다운 생명의 떡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귀한 떡으로 쓰임을 받으려면 우리의 육신의 모든 소욕이 깨뜨려져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육신의 소욕을 깨뜨리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다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때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충만하게 거할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떡으로 빚어질 것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줄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ㅡ14)

성소의 문에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정금으로 싸고."(출 25:23, 24)

성막의 모든 기구, 즉 제단이나 떡상, 향단이나 법궤, 성막을 세우는 널판 등은 모두 조각목으로 되어 있다. 이 조각목은 싯딤나무, 즉 아카시아 나무로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오는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는 말씀에서 '줄기'는 바로 아카시아 나무, 즉 조각목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단을 만들 때 조각목에다 놋을 씌워 만들라고 하셨다. '놋'은 '심판'을 의미하는데,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그 육체에 받으셨다. 이 제단을 지나고 물두멍을 통과하여 성막 안에 들어가면 떡상, 향단, 법궤가 있다. 이것들은 똑같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지만, 그 위에는  놋이 아닌 금으로 씌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히2:9)

라는 말씀처럼,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대신 받으신 후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조각목이 황금으로 싸이기 전에 먼저 놋으로 둘러 싸이는 것은,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앉기 이전에 먼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고 사랑하는 아들이 된 것은,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성막은 성도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고난이 온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이나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우리가 영원한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해 이 땅에서 잠시 동안의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율법은 우리에게 무섭게 보여진다. 제사장들은 성소 안에서 조금만 잘못해도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성소 안에 들어갈 때마다 그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서야 했다. 안식일에 나무하러 간 사람이 돌에 맞아 죽었듯이, 율법은 긍휼이나 자비를 허락하지 않고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신 19:21) 갚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 속에서도 당신의 은혜로운 마음을 드러내셨다. 진설병을 먹은 다윗은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을 기뻐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향해 다윗의 이야기를 하신 것을 보면, 다윗이 법에 매여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는 것보다, 진설병을  먹고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성막의 떡상에는 인간과 교제를 가지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숨겨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먹으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나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이겨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와 질고를 담당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율법을 통해서는 두려운 하나님을 발견하지만, 떡상을 통해서는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성소의 내부 모습(우측에 떡상이 위치하고 있다.) 

성막의 기구 가운데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놋이나 금으로 싼 것이 있는데, 성막에 들어가면 처음으로 보이는 제단,성소 안의 떡상과 향단, 지성소에 있는 법궤가 그렇다. 제단에는 사람들이 죄를 씻음받을 때 염소나 양을 잡아 제단뿔에 피를 칠하고, 향단에도 속죄제사를 드릴 때 피를 가지고 그 향단뿔에 바르며, 지성소에 있는 법궤에도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가서 그 속죄소 위에 뿌린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 떡상에는 피가 전혀 발려지지 않는다. 아카시아나무로 만든 것 중에서 떡상만 피와 전혀 상관없는 곳이라는 것이다.왜 떡상에는 피가 발려지지 않는가? 제단에 흘린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여길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 앞에서 손톱만한 흠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우리의 죄를 씻어 놓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신다면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도 뭔가 거리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다 기억하신다면 하늘나라에 가서 반갑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얼마나 부끄럽겠으며, 자유롭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울며 괴로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떡상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과 어긋난 것이다. 우리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하다가도 제단에 와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음 받으면, 그 죄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된다. 매일매일 죄를 씻음 받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죽으사 단번에 사했네"하는 찬송가사처럼 제단에서 우리의 죄를 단번에 씻은 후에는다시 죄를 들먹거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사면에 손바닥 넓이 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출 25:25)

하나님께서 손바닥 넓이 만한 턱을 만드신 이유는, 떡상 위에 진설된 떡이 혹시 미끄러지더라도 땅에 떨어질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진설된 떡이 잘해서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턱이 있어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열두 떡덩이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셨고 지키셨다. 이것은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손길로 보호하고 계심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떡상 위의 떡이 자기의 수고로 말미암아 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턱이 있음으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시며 보호해 주심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일단 떡상 위에 올라간 떡은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듯이, 일단 거듭난 사람은 천국에 가기까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 죄에 빠지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노력으로 서 있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죽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그는 즉시 주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잡혔을 때 그는 비로소 귀한 종으로 쓰임을 받았다. 연약하고 부족한 육체 안에 살면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셔서이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때 가장 안전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자기가 의로워지고 거룩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내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 나의 거룩함이 아닌 예수님의 거룩함,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나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빈다.

지성소


법 궤

 법 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후에 그들 가운데서 행하시며, 그들을 지키시고 축복하시면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은 그들 중에 거하실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와 분리된 거룩한 장소를 지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 25:8)

성막은, 백성들 중에 죄악이 관영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불편함이 없는 곳이었다. 하나님은 성막의 기구중에서 가장 먼저 법궤를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출 25:10)

법궤는 조각목, 곧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싼 하나의 상자이다.

법궤의 뚜껑은 속죄소인데, 속죄소는 정금으로 새겨진 그룹 둘고 덮여 있다. 하나님께서 법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를 넣으라고 지시하셨다.

법궤는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인데, 법궤에 담겨진 영적 의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영어 성경에 법궤를 'Ark'라고 했다. 'Ark'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 세 번 나온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도 'Ark'라고 되어 있고, 출애굽기 2장에 나오는 모세를 담은 갈 상자도 'Ark'라고 되어 있다.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시려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던 장소는 안팎으로 역청이 칠해진 방주였다. 그리고 바로가 모든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보세의 부모는 모세를 숨겨 키우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나일 강에 버려야 했는데, 아이를 담은 상자는 역청을 칠한 갈상자였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건져냄', 곧 '구원'이라는 의미이다.)왜 법궤를 'Ark'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Ark'들의 공통점은 구원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궤는 볼품없는 조각목으로 만든 상자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거하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외형적으로 볼 때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지만,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메고 전쟁터로 나아가서 승리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사단과의 어떠한 싸움에서도 이긴다. 다시 말하지만, 노아의 방주나 모세의 갈 상자와 같이 법궤는 별 모양이 없는 상자에 불과하지만, 구원의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 법궤이다.

분리된 법궤(아론의 싹난 지팡이,금항아리,십계명 돌판을 볼 수 있다.) 

법궤는 하나의 상자로 되어 있다. 그 상자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들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상자 안에 십계명 돌판을 넣어 두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 돌판을 넣어 둔 상자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상자의 뚜껑이 속죄소가 되며, 그 상자를 법궤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십계명을 새긴 돌판 두 개를 법궤 안에 넣어 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빠져 고통하고 있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그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죄에 빠진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일하셔야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무엇인가 열심히 해서 구원을 받으려는 생각 속에 젖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는데도, 사단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적인 선행'에 우리의 마음이 빠지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먼 삶은 살도록 속여 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행위 속에 빠져 있는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시기 위해, 우리의 행위와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셨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얼마나 선한 일을 행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수고하면 얼마나 거룩해질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에게 무한한 능력이 있는 줄로 착각한 채, 노력한 만큼 거룩해지고 선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느낌이 아니라 사단의 속임수이다. 우리의 행위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 행위의 한계와 우리 노력이나 수고의 결과를 보여주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율법은 노력하면 잘 지킬 수 있는 것 같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십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즉 십계명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지키실 수 있지 인간은 어느 누구도 지킬 수가 없다. 만일, 인간이 십계명을 지킬 수 있다면,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속죄소

출애굽기 25장 10절부터 15절에 보면, 성막에 있는 법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어내지 말지며,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여기에서는 법궤의 규격이나 모양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 17절부터는 속죄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성막의 중심은 법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있었을 때 법궤를 메고 전쟁터에 갔던 일이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때 법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았던 일, 요단 강을 건널 때 법궤를 멘 제사장의 발이 요단 강물에 닿았을 때 강물이 멈추었다는 이야기등을 보면, 성막의 가장 핵심이 법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눕힌 법궤의 뚜껑(속죄소) 

출애굽기 25장 17절부터는 법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법궤를 덮는 속죄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이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에게 이르리라."(출 25:17~22)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5장 10절에서 22절까지 법궤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속죄소'라는 단어를 여덟 번이나 말씀하셨다.

"속죄소를 만들고, 그룹들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라."

"속죄소와 그룹들을 한 덩이로 하고, 그룹들의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라." 

"그룹들의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으라."

"속죄소에서 내가 너와  만나겠다." 

등등 속죄소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아 하나님의 마음은 속죄소에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내려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많은 죄가 거하고 있었다. 모세가 이른 아침부터 밤이 늦도록 재판을 해도 끝이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많았고, 죄에 대한 시비가 많이 일어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내려주셨다.

그 율법이 내려오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율법이 내려오자마자 죄에 대한 심판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죽임을 당해야 했다. 안식일에 나무를 하다가 죽임을 당한 일이라든지, 율법이 내려온 날 금송아지를 만든 것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는 등 계속해서 죽는 역사가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숫자보다 가나안에 들어간 숫자가 훨씬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광야 사십 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늘어났는데, 율법을 받은 이후로는 도리어 줄어든 것을 보면, 율법의 저주로 인해 이들에게 멸망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던 것이다. 제단이나 물두멍, 향단, 등대, 떡상 이런 기구들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성막에 있는 다른 모든 기구보다도 법궤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다. 법궤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법궤에 속죄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 귀한 하나님의 성전 안에 속죄소가 없었다면, 죄를 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죄로 인해 저주를 받고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속죄소이다. 이 속죄소는 법궤를 덮는 뚜껑을 말한다. 그 뚜껑 양쪽편에 그룹들은 속죄소와 한 덩이로 붙여 망치로 쳐서 만드는데, 그 날개를 펴서속죄소를 덮고, 그 얼굴은 속죄소를 향하게 만들라고 하셨다. 그 속죄소에 피가 뿌려져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5장 21,22절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속죄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겠다고 하셨다. 죄 속에 빠진 인간들은 죄를 그냥 두고는 하나님과 만날 수 없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죄는 잇지만,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한다. 죄가 있는 사람은 먼저 속죄소 앞에 나아와서 죄를 씻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 마음 속에 죄를 두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출애굽기 25장에서는 하나님이 속죄소 위에서 너희와 만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할 모든 말씀을 속죄소 위에서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소가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속죄소가 없으면 죄를 사함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은 비밀을 깨우쳐주시는 것이다.

속죄소 위에 뿌려지는 어린 양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 흘려졌기 때문에, 우리가 속죄소에 가서 죄를 사함받고 눈 같이 희게 된 뒤에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속죄소가 없다면 우리는 죄 사함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다.

  영원한 속죄

속죄소에서 피 뿌리는 모습

땅에 있는 성막은 하늘나라에 있는 성막을 그대로 본따 만든 모형이었다. 그러므로 성막에 제단, 물두멍, 향단, 떡상, 등대, 법궤, 속죄소 등이 있듯이 하늘나라의 성막에도 동일하게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죄가 없는 사람이 가는 하늘나라에 왜 속죄소를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늘나라에는 죄인도, 죄를 범하는 일들도 물론 없지만, 많은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이끌기 위해 속죄소가 필요한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1,1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소에서가 아니라 참 장막인 하늘나라의 성소에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당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죽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높이 들려서 죽으신 사실은 하늘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나라에 있는 성막의 속죄소 앞에 예수님이 당신의 피를 가지고 나아가 뿌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신앙 생활은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해야 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표범처럼 용맹스럽거나 코끼리처럼 크고 힘있게 만들지 않으셨고, 여러 부분으로 약하게 만드셨다.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연약하게 만드셨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우리가 아주 강하고 튼튼하며,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전혀 실수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은혜를 입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완벽하고, 풍족하여 범죄를 하거나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나 십자가, 속죄소 같은 것들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속죄소를 두신 것은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것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것들을 들고 은혜를 입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을 이루실 때 속죄소에서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성소 뜰에 있는 제단에 나아가서 양을 잡아 피를 제단뿔에 바라서 그들의 죄를 속하였다. 7월 10일 대속죄일에는 성소 바깥뜰에 있는 제단이 아닌 지성소에 대제사장 아론이 들어가 온 백성들의 죄를 사했다.

대제사장 아론은 1년에 한 차례씩 자기 죄를 먼저 속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모든 회중의 죄를 위하여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속죄소까지 들어가서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사했던 것이다. 바로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리기 때문에, 속죄소 위에 날개를 덮고 그 속죄소로 얼굴을 향하고 있는 두 그룹은 속죄소에서 죄를 속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두 그룹은 그렇게 좋은 위치에 있지만, 불행하게도 속죄소에서 뿌리는 피를 보고도 구원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이 큰 구원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구원은 하나님이 감추어 놓으신 비밀이다. 이 구원은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통해서만 깨닫게 하셨다. 이 구원의 놀라운 비밀은 하나님이 숨겨 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사함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의 비밀을 깨닫게 하여 주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구원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아무에게나 주신 것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에게 주셨다.우리가 죄를 사함받는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와서, 우리는 비로소 구원의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놀라운 구원의 비밀은 우리가 그냥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을 때 알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성령이 들어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구원을 인쳐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과거에 범한 모든 죄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대적했고 원수되었던 일들을 기억하신다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울 것이며, 하나님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사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에서 제하여 버리셨다.

성막의 중심인 지성소는 황금으로 되어 있는 귀하고 찬란한 곳이지만, 성막의 겉모양은 아무 무늬가 없는 세마포 포장에 불과하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도 외형적으로는 흠모할 만한 것이 없지만, 그를 맛보고 경험하며, 그를 깊이 알면 알수록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와 같은 분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성경을 읽고 신앙 생활은 하지만, 하나님의 참 뜻과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해 마음에 고통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고 그분의 참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죄의 고통과 절망 가운데 빠져 헤매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죄에서 해방을 얻고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를 바라보며 죄와 고통과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 빠져 헤맬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는 우리가 범한 죄보다 훨씬 더 큰 구원의 능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죄의 가책과 두려움에서 온전히 해방시킬 수 있고, 우리는 그 보혈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갈 수가 있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사 40:2)

예수님께서 심판을 받으실 때 우리가 범한 모든 죄에 대한 벌을 배나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마음이 죄에 빠져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추하고 악한 자신의 모습만 알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후, 자신을 깨끗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 자신의 모습만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면 더러운 죄 속에 늘 얽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깨닫고 경험하면 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성막 봉사자의 의상

그림 : 정장한 대제사장의 모형(암스텔담 성경박물관) : 가장자리로 둘려가며 금방울과 석류 모형을 교대 로 단 청색의 예봇받침 겉옷과, 그 보다 짧은 에봇과 그 위에 매ㅐㄴ 에봇띠 그리고 열 두 지파 를 각각 대표하는 열 두 보석이 달린 흉패가 보인다. 손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쥐어져 있다 (민17장).

제사직을 행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제복으로 이 제복을 입지 않고는 제사를 드리려고 성막에 들어 가지를 못했고 제사도 드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엄히 명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반드시 제복을 입고야 백성을 위한 제사나, 백성의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다른 제사도 마찬가지로 제사장들에게 제복은 귀중하고 큰 뜻이 있다. 그 뜻에 대하여는 후에 생각하겠다.

먼저 대제사장의 제복은 "대제사장이 입고 있던 것과 머리에 쓰고 있던 것들을 모두 합하여 일곱가지이다. 7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 수이다. 일곱가지 중에서

a) 속옷(고의-하체를 가리우는 것)(출28:4).

출애굽기 39장 27절에도 "그들이 또 직조한 가는 베로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짓고"라고 하였다. 이 속옷은 대제사장만 입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들도 입었다. 그 재료는 직조한 가는 베이다(출28:39). 그 베 속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띠게 되어 있다.

b) 긴 옷(겉옷)

"그가 에봇 받침 긴 옷을 전부 청색으로 짜서 만들었다(출39:22)라고 하였고,또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같이 짓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하고 그 옷 가장 자리로 돌아가며, 청색,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 놓아 간격하여 금장울을 달되 그 옷 가장 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한석류..."(출28:32-34).

c) 에봇

에봇은 긴 앞치마와 같이 생겼는데 대제사장이 흉패 밑에 입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제복의 특징으로 금실,자색,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되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의 재료들과 같은 것으로 에봇에 붙여 짜며 호마노 두 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 금 테에 물리고, 에봇 견대에 달게 하였다.

d) 흉패

금실,청색,자식,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되 장광이 한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박되 각 줄에 세 보석씩, 합계 열두 보석을 물리체 하였다. 이것은 열두지파(야곱의 열두 아들들과 그 후손들을 의미함)의 이름대로 이다. 정금으로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두 고리에 매어 에봇 앞 두 견대의 금테를 매고, 또 두 고리를 만들어 에봇에 닿은 곳에 매게했다. 그리고 그 흉패를 가슴에 부치고 그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게 했다(출 39:828:15-29).

e) 허리띠

이 띠는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수놓아 띠를 만들었다. 이 띠는 허리에 띠는 것으로 에봇 속에 맨 것이다(출28:39-4039:39-).

f) 금패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그 패를 청색끈으로 대제사장의 관 전면에 맨 것이다(레8:9).

g) 성관

이것은 대제사장이 쓰는 관이다(출28:40)15).

이상의 일곱가지는 대제사장과 또는 제사장에게 속한 제복의 용품들이다. 물론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제복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것에 대하여는 후에 기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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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론과 그의 아들의 제사직

대제사장 아론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히4:14-15,벧전2:9). 아론의 사역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 되었다(히9;11-).그러나 아론은 죽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론과 같이 주근 자가 아님으로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른 것이다. 그 이유는 그는 대제시장이나, 그는 영원한 죽음이 없음이다(히7:15-25). "대제사장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거룩한 옷은 우리 대제사장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금실(신성)의 여러가지 색채(5,6,15,33)들, 즉 "푸른색"은 피를, 그리고 "흰색"은 순결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나 그의 아들들은 이 세대의 신자들의 예표인 것이다(벧전 2:9,레1:6) 58).

2. 에봇(출28:6-14)

에봇은 앞에 말한바와 같이 겉옷 위에 있는 긴 앞치마와 같이 생긴 것으로 대제사장의 어깨에 걸치게 되었다. 그리고 에봇에는 매는 띠가 있는데 금실,청색,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짠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잇음을 뜻하며 그 교회의 성원인 성도 두 호마노에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이 의미는 12사도들의 신앙과 그들이 전한 복음에 선지자들-인 중생한 사람들이 모이는 성전의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메워 그의 앞에 있다 59).주님의 어깨는 주님의 능력을 의미, 즉 성도들이 그들의 일생을 주님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감을 의미한다. 또 주님의 감찰과 가호가 떠나지 않고 밤과 낮으로 항상 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을 높이고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 띠는 진리의 띠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띠이다. 그 진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의 띠를 삼아 힘을 얻고 경성하여 영적 파수군이 되는 것이다.

3. 흉패(출 28:15-29)

흉패는 대제사장의 가슴에 달았고, 대제사장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요, 대제사장이 늘 살피는 것이다. 우리도 대제사장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 흉패에는 네 줄의 보석이 있는데 각 줄에 셋씩 12보석이 있다. 12보석은 12지파이다. 이는 선택된 성도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계20:)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구약의 12지파는 신약의 12사도에 해당하고 12지파의 성원은 12사도의 신앙을 계승한 성도에게 해당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가슴, 즉 주님 안에 있다.60) 그러므로 성도는 보석이 흉패에서 벗어 나서는 안되는 것과 같이 교회에서 떠나서는 의와 진리안에 안전하게 있을 수 없다.

"대제사장인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하였던 것과 같이 주님께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때 우리의 이름을 기록하여 그 앞에 간수케 하신다."61) 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같이 천국에 들어 감도 의미한다. 끝으로 "보석들이 대제사장의 가슴에서 빛남과 같이 우리들을 통하여 주가 영광을 받으시게 함이다.62) 그 방법은 우리들이 주의 거룩하고 큰 뜻을 깨달아 주의 큰 일을 성취함이다.

4. 우밈과 둠밈(출28:30).

대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흉패 속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다. 우림은 "빛"이라는 뜻이고, 둠밈은 "완전함"이란 뜻이다. 이것들은 12보석이 있는 흉패 속에 간수되어 있었다. 이는 교회의 성원된 우리 신자들은 주님 안에서 살며,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나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런 때는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 주님께 해결하여 주실 것을 도고하고,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 또 주님께서느니 그것을 성령님의 인도함을 통하여 신, 구약 성경에서 해결하여 주신다. 성령님의 역사는 완전하시니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통하여 지도하신다(시119:105,잠6:23) 64). 즉 빛 되신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인도하신다.

5. 에봇 받침(겉옷=출28:31-35).

에봇 받침은 겉옷인데, 그 색은 푸른색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 하늘의 제사직을 표현한다. 그 옷의 끝에 방울과 석류는 그리스도의 중재의 증거의 말씀과 충실을 보여 준다.65) 주님의 중재의 증거의 말씀은 성경이다. 지금도 그것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석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재 사역의 성취를 말씀하신다. 즉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의 열매를 보여 주는 것이다(행1:1-4).

6. 반포 옷(속옷=출28:439)

이 속옷은 가는 베실로 짜서(레8:7).만든 속옷이다(출28:39). 그 속옷에는 띠가 있어서 띠를 띠라고 했다(출39:27-29). 이 옷의 특징은 통으로 짠 것이며, 반드시 이것을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게 되었다. 또 대제사장만이 아니라 제사장도 입게 되어 있었다(출39:27).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속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다. 허물과 부끄러움을 가리우는 속죄와 칭의의 옷이다. 성경 이사야 53장에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심을 말씀하는데, 그대로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군병들에게 속옷이 벗기우고,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시고, 그의 의의 속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이다(시22:18). 띠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진리로 무장할 것이다.

7. 금패(출28:36-38).

금패는 대제사장의 성관이 붙이는 패이다. 이 패는 [여호와성결]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청색끈이 매여 성관 앞에 달게 되었다. 이것은 첫째로."모든 일에 조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경고이다...그리고 둘째는,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별된 대제사장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와 선지자를 만지지 말라"고 했다(대상 16:22). 다윗은 신앙과 진리의 사람인데, 그는 기름부음 받은 사울왕에게 손대지 않은 모범된 자이다. 그 이유는 기름부음 받은 자는

(1) 하나님의 대리자 이고,

(2) 하나님이 쓰는 자이고,

(3) 하나님이 쓰는 자이다.

주 예수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여 성령의 기름을 부어 세운 유일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일 뿐 아니라 그는 그의 만사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행하신 분이시다. 또 하나님의 뜻과 성업을 완성하고 67) 그 일을 위하여 지사충성한 분이다. 주님 시대 이후에는 그리스도가 세우신 사도들과 교역자들이다(벧전 5;5,히13:17,갈6:6).

8. 성관

출애굽기 28장 40절에 기록된 성관은 영광과 존귀를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영광의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그 직분이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이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스가랴 3장)(출39:28,히2:9,계19;12,7:9),"영광과 존귀를 입은 자"라고 말씀했다.68) 특별히 히브리 2장 9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일 뿐 아니라 왕의 영광과 존귀도 포함된다고 하겠다. 그는 만왕의 왕이요, 대심판장이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아 주관하는 만주의 주이시고, 장차 왕중의 왕으로 오셔서 모든 것을 다스릴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입은 자로써 스스로 낮아지시여 神人 양성을 가지시고,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 지성소에 들어 가시여, 자신의 찢긴 살과 흘린 피와 그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속죄 제물이 되셨을뿐 아니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죄와 담을 존재하는 하나님의 참 택한 백성을 사랑하고, 지키고,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시고, 또 신령한 생명의 떡과 생수로 먹이신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 언제나 그의능력으로 보호사시고, 간수하여 주신다. 또 위에 생각한 성막의 구조만 아니라 성막의 기구들과 제사 직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즉 기독론적 입장에서 인격과 사역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나타낸다. 구약의 성막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성막의 완성이다. 또 구약의 성막의 구조와 기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성품과 성취하신 하나님의 뜻과 구속 역사이다(히3;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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