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루터의 시편 강해(서론)

by 갈렙 posted Feb 1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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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시편 서문 및 해설
김헌수  (대전: 성은교회 목사)

                                 루터의 시편 서문 

                                                                     (1528/1545)1) 

우리의 거룩한 조상들은 시편을 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였습니다. 시편 자체가 책의 주인이신 분께 충분한 찬양을 돌리고 있지만, 우리도 우리 입으로 감사하고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지난 시대에는 성인(聖人)들의 전설과 순교자들의 열전(列傳),2) 그리고 모범적인 이야기와 위인전들이 하도 많이 유포되어서 세상을 가득 채울 지경이 되었습니다. 시편은 그동안 책장 밑에 방치되고 캄캄한 가운데 있어서 한 편이라도 제대로 이해된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시편은 계속하여서 고상하고 고귀한 향기를 뿜어내었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그 알지 못하는 말에서 경건함과 힘을 감지하고 그 작은 책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성인들의 모범적인 이야기나 전설, 혹은 앞으로 나올지 모를 열전 가운데에서도, 시편보다 더 고귀한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범적인 이야기와 전설과 열전을 모조리 읽고 가장 좋은 것을 선별하여서 최상의 방식으로 제시한다면, 그것은 아마 현재의 시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성인 한두 사람의 행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聖徒)3) 머리이신 그분의 행적을 보기 때문이고 또한 모든 성도들이 지금 행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친구와 원수들에 대하여서 취한 태도를 보고, 갖가지 위험과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성하고 거룩한 가르침과 계명도 시편에 가득합니다.

 

시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서 매우 명백하게 약속하고 있고 그분의 나라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위와 본질에 대하여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고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시편은 ‘작은 성경’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작은 성경’에는 성경 전체의 내용이 가장 아름답고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어서 교리 교육을 하기에 좋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교리 교육용 작은 소책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성신님께서 작은 성경, 혹은 모든 기독교계와 성도들의 모범 책자를 편집하는 수고를 자원하여서 짊어지셨다는 생각까지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통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은 책이 있다면 성경 전체를 거의 완벽하게 편집한 요약본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에는 고귀한 품격과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책들은 이른바 성인들의 행적에 대하여서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지만 그들의 말에 대하여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시편은 고귀한 모범입니다. 시편은 읽는 사람을 감미로운 향기로 휘감습니다. 성도들의 행적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 시편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하였으며 지금도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시편과 비교하면, 다른 전설이나 모범들을 기록한 책은 순전히 벙어리 성인을 보여 줄 뿐입니다. 그러나 시편은 활기차게 살아 있는 성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말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벙어리는 사실 절반쯤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는 능력보다 사람에게 더 강력하고 고상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은 생김새나 다른 활동이 아니라 바로 말하는 능력으로 다른 동물과 현저하게 구별됩니다. 조각가가 나무로 사람 모양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동물도 사람처럼 보거나 듣고, 냄새를 맡거나 노래하고, 걷거나 서고, 먹고 마시고, 굶주림과 목마름을 느끼고, 배고픔과 추위와 딱딱한 잠자리를 상당히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시편은 성도들의 통속적이고 일상적인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뵙고 중요한 문제를 진지하게 아뢸 때의 언어, 곧 최상의 언어를 제시합니다. 그들의 행위보다는 그들의 말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보물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말과 행동의 이유와 근원을, 달리 말하면 그들의 마음속을 살필 수 있습니다. 갖가지 일과 위험과 고난을 만났을 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결심하고 행동하였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성인들의 행위와 이적만을 높이는 전설이나 모범적인 이야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또한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성인의 위대한 일들에 대하여서 보거나 듣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성인이 행한 것을 보기보다는 그가 말한 것을 듣기를 훨씬 더 원하고, 더 나아가서 그의 말을 듣기보다는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보물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시편은 성도들에 대하여 풍성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였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어떠한 말을 하였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사방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사나운 바다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배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임박한 파멸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에 휩싸이고, 다른 사람은 현재의 악 때문에 신음하고 비탄에 잠깁니다. 어떤 사람은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소망의 미풍(微風)으로 우쭐하고, 다른 사람은 현재의 재물을 신뢰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폭풍은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속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쏟아 놓으라고 가르칩니다. 두려움과 곤경에 빠진 사람이 불행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기쁨에 들떠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기쁨으로 가득 찬 사람이 기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말하자면, 슬픈 사람이 웃고 즐거운 사람이 우는 것은 진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마음 깊은 곳을 열지 않았고 깊은 곳에서부터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시편은 변화무쌍한 폭풍우 속에서도 진정으로 하는 말을 적어 두는데, 이것이 시편의 위대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찬양의 시편이나 감사의 시편보다 기쁨을 더 고상하게 표현하는 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아름답고 유쾌한 정원을 들여다보듯이, 마치 천국을 들여다보듯이, 우리는 시편에서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아름답고 매력적인 꽃들이 하나님께 대한 아름답고 즐거운 생각에서부터 다양하게 그 마음에 피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편으로, 탄식의 시편보다 슬픔을 더 깊이 참회하고 애통해 하는 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죽음을 들여다보듯이, 마치 지옥을 들여다보듯이, 우리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 생긴 온갖 종류의 암울함을 매우 어둡고 불안하게 그려 놓습니다. 또한 두려움과 소망에 대하여서 이야기할 때에도, 어떤 작가라도 그 두려움과 소망을 묘사해 낼 수 없는 그러한 언어를, 키케로나 다른 웅변가도 사용할 수 없는 그러한 언어를 구사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그러한 말로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말에 간절함과 생명력이 갑절이나 늘어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러한 문제를 호소하면, 그 말이 마음에서부터 강력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불타는 듯한 간절함과 생명력과 호소력이 없이 웅얼거릴 뿐입니다. 따라서 시편은 모든 성도의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성도는 자기가 어떠한 형편에 놓였든지 여기에서 자기의 경우에 맞는 시편과 말을 발견하고, 마치 자기만을 위하여서 이미 거기에 쓰여 있는 것처럼 적절한 말씀을 찾아냅니다. 스스로 더 나은 말을 만들지 못하고 찾지 못하며, 따라서 다른 말을 더 이상 원하지도 않습니다.

 

시편은 다른 점에서도 유용합니다. 시편의 말이 자기의 마음에 맞고 그의 경우에 합당하다고 여길 때 그는 자기가 성도의 교제 안에 있음을 확신합니다. 모든 성도가 그와 함께 똑같은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모든 성도들에게도 일어난 것임을 확신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그도 그 말들로 하나님께 아뢰면 더욱 그러한 확신이 들 것입니다. 그러한 일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시편의 맛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시편에는 사람이 위험에 빠지지 않고 모든 성도를 안전하게 뒤따르게 하는 노련한 안내자가 있습니다. 벙어리 성인들의 모범이나 전설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사람이 따를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더 많은 행위를 요구하는데, 그것을 따라서 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대부분 분열과 파당을 일으키고 성도의 교제로부터 멀어지고 나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은 파당에서 건져서 성도의 교제로 이끌어 줍니다. 왜냐하면 시편은 기쁨이나 두려움이나 소망이나 슬픔 속에서도 한결같은 마음을 갖고 모든 성도들이 생각하고 말한 것처럼 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생동감이 있는 색채와 형태로 묘사된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작은 그림으로 보고자 한다면 시편을 읽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거울, 아름답고 맑고 순수한 거울을 얻은 셈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 그분과 모든 피조물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측량할 수 없는 복을 주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열심과 간절한 마음으로 시편을 사용하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기를 훈련하며, 감사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나쁜 것이 생기지 않도록 합시다. 이전의 암흑시대에 시편의 한 편이라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거나 그것을 이해하기 쉬운 독일어로 읽거나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큰 보물로 여겼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보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눈은 봄으로, 우리의 귀는 들음으로 복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늘의 양식에 대하여서 “우리 마음이 이 박(薄)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민 21:5) 하고 말하였던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그들이 염병으로 죽은 사실도 아울러서 기억하여야 합니다.

 

모든 은혜와 자비의 아버지께서 찬송과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를 영원히 도우소서. 이 독일어 시편과 주님의 셀 수 없는 영원한 복을 위하여서 그리하시옵소서.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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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의 시편 서문(1528/1545); D. Martin Luthers Werke, Die Deutsche Bibel, Weimarer Ausgabe, vol. 10, pp. 99-105. 영어 번역은 Luther"s Work, vol. 35 (Philadelphia, 1960), pp. 253-57.

2) 순교자 열전은 순교자들의 생애를 그린 그림과 해설이 있는 그림책이다. 위의 책, 99쪽 각주 3 참조.

3) 원문에서는 ‘성인’과 ‘성도’가 같은 단어이다. 엄격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부정적인 예로 사용한 경우는 ‘성인’으로, 긍정적인 예로 사용된 경우에는 ‘성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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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루터의 시편 강해와 번역, 그리고 종교개혁 
 

개혁자 마르틴 루터(1483-1546)의 개혁이 성경 번역과 함께 진행된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내가 여기 섰나이다. 달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나이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하고 신앙을 고백한 후에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은거하면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1521-22년). 루터는 계속하여 구약 성경도 번역하여서 1534년에 완간하였다. 그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각 권 앞에 ‘서문’을 썼는데 앞의 번역문은 시편을 독일어로 번역하여서 출판할 때 쓴 서문이다. 

 

루터의 시편 강해와 종교개혁 

 

루터의 시편 서문은 “우리의 거룩한 조상들은 시편을 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였습니다”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루터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는 1512년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는데, 교수로서 행한 첫 강의는 바로 시편 강해이었다. 루터는 수도사 생활을 할 때부터 시편을 친근히 여기고 사랑하였다. 그때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호소하는 시인의 말에서는 굉장한 갈등을 느꼈고(시 9:5 이하; 31:1; 71:2 등) 시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는 시편이 뿜어내는 고상하고 고귀한 향기에 끌려서 “그 알지 못하는 말에서 경건함과 힘을 감지하고 그 작은 책을 사랑”하였다.

 

루터는 1513년부터 1515년까지 시편 전체를 주해하였고, 이어서 로마서(1515-16), 갈라디아서(1516-17), 히브리서(1517-18년)를 강의하였다. 그는 시편과 바울 서신을 강의하면서 점차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를 내걸었던 것도 이러한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루터는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를 강의한 다음에 더 큰 확신을 갖고 1519/21년까지 2차 시편 강해를 시도하였지만 1521년에 보름스 제국 의회에 참석하면서 21편까지만 마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루터의 초기 강의, 곧 시편-바울 서신/히브리서(1513-18), 그리고 다시 시작한 시편 강해(1519-21)는 루터의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의 뼈대를 구성하였다. 루터는 1531-33년에 3차 강해를 하였고, 이후에도 몇몇 시편에 대한 강해를 계속하였다. 초기의 확신은 평생 동안 더 발전하는데, 후기에는 25개의 시편을 그리스도를 예언한 시편으로 분류하고 더 깊이 주해하였다.

 

루터의 시편 번역은 1524년에 완결되어 몇 차례 출판되었고, 1531년에 ‘성경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서 최종본을 출간하였다. 루터의 시편 번역은 그의 시편 찬송과 짝을 이루었고, 루터가 일생 동안 힘을 기울인 분야였다. 루터가 출판한 최초의 책도 “7개의 참회 시편에 대한 주해”였고(1517년 4월), 소천할 때에도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 31:5)는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주님께로 갔다. 따라서 루터의 생애와 그의 개혁 활동은 그가 ‘작은 성경’이라고 부른 시편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시편은 그리스도의 노래

 

루터는 시편에서 복음을 발견하였고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그는 시편 서문에서 시편을 성인들의 모범이나 열전과 대비하여서 이야기하다가 다음 문단에서 곧바로 시편이 그리스도의 시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시편에서 성인 한두 사람의 행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聖徒)의 머리이신 그분의 행적을 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시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서 매우 명백하게 약속”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시편에서 뿜어내는 고상하고 고귀한 향기의 근원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깨닫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루터의 시편 강해가 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은 그의 시편 강해에서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가 작곡한 시편 찬송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루터가 46편에 근거하여서 쓴 찬송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다. ‘종교개혁의 찬송’이라고 불리는 이 찬송에서는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유의 주로다”라고 직접적으로 고백한다. 그는 67편을 토대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찬송 지었다. 이 시편 찬송에서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에게 구원과 능력이 되시리니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리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처럼, 루터에게도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이다.

 

시편은 ‘작은 성경’  

 

시편은 모든 성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노래’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이 책에는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 성인들의 행적은 사람들이 편집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노래는 성신님께서 편집하여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시편을 ‘작은 성경’이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작은 성경’에는 성경 전체의 내용이 가장 아름답고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어서 교리 교육을 하기에 좋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교리 교육용 작은 소책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성신님께서 작은 성경, 혹은 모든 기독교계와 성도들의 모범 책자를 편집하는 수고를 자원하여서 짊어지셨다는 생각까지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통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은 책이 있다면 성경 전체를 거의 완벽하게 편집한 요약본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시편은 그리스도인의 노래  

 

루터가 시편을 ‘작은 성경’이라고 부른 것은 거기에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것을 성인의 선행과 시인의 말로 설명한다. 중세에서는 성인의 전설과 순교자들의 열전과 모범적인 이야기가 유행하였지만 모두 그들의 ‘선행’에 대한 것이고 시편의 시인과 같은 ‘말’이 없다. 따라서 말로 표현되는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없다. 루터의 표현을 빌리면, 선행의 모범을 보인 성인은 “순전히 벙어리 성인”일 뿐이고, “사실 절반쯤 죽은 사람”이다. 중세 시대에 시편을 바르게 강해하지 않고 한 편이라도 제대로 해석하여서 가르친 일이 없는 것은 ‘선행에 의한 구원’이라는 로마 교회의 교훈에 근거한 것임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이것은 시편에서 복음을 발견한 사람만이 지적할 수 있는 통찰력이다.  

 

루터는 시편의 성도가 중세의 벙어리 성인과 달리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보임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말미암은 기쁨의 말을 읽을 때에는 마치 천국을 돌아보는 것과 같고, 지은 죄를 참회하고 애통하는 말을 읽을 때에는 지옥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 자기의 잘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중세의 성인들과 달리 시편의 시인은 약한 모습과 통회하는 모습도 감추지 않고 정제된 말로 아뢰면서 주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용할 언어를 가르쳐 준다.   

 
이 점에서 시편은 ‘그리스도의 노래’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노래’이다. 루터의 표현을 따르면, 시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위와 본질에 대하여서 정확하게 묘사”한다. 시편에서 그리스도인 자기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언어를 배우는데, 복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시편의 말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죄와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중세의 성인을 따라서 자기가 행한 일들만 자랑할 것이지만,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통회와 감사의 말을 배워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시편은 ‘벙어리 성인’이 부를 수 없는 노래이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시편은 성도의 교제를 위한 책  

 

루터는 시편에서 모든 성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금 행하는 것을 본다. 그는 시편에서 모든 성도가 자기의 경우에 맞는 말을 발견하고, 마치 자기만을 위하여서 기록된 것과 같은 적절한 말씀을 찾는다. 따라서 “시편의 말이 자기의 마음에 맞고 그의 경우에 합당하다고 여길 때 그는 자기가 성도의 교제 안에 있음을 확신”한다. 모든 성도와 함께 똑같은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모든 성도에게도 일어난 것임을 확신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맛을 도무지 알지 못하지만 참된 믿음이 있는 성도는 모든 성도와 함께 한 가지 노래를 부른다.  

 

시편에서 복음을 발견한 루터는 벙어리 성인들의 모범을 강조하면 “사람이 따를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제시”하고 “더 많은 행위를 요구”하며, 따라서 “대부분 분열과 파당을 일으키고 성도의 교제로부터 멀어지고 나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복음을 바르게 깨달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통찰력이다. 선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은 성도의 교제를 파괴한다. 그러나 시편의 말로 기쁨 뿐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사람은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고, 성도의 교제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시편에서 “생동감이 있는 색채와 형태로 묘사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발견한다.  

 

시편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알려 주는 책  

 

루터는 작은 성경인 시편이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거울’이라고 한다. 그 거울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 그분과 모든 피조물도 발견할 것”이라고 하였다. 중세의 성인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착한 행위에서 자기를 발견하였지만,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마음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아뢰면서 자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시편에 나오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의 언어는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그분께 나아오도록 성신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언어이다. 모든 성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말로써 하나님께 나아가셨고 모든 그리스도인도 시편의 말로써 하나님께 나아간다.  

 

시편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인가를 알려 주는 책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셈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만 우리의 근원적인 모습을 알 수 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죄인이고 동시에 의인임을 깨닫는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근원적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성인의 모범과 순교자의 열전을 강조하는 중세의 신학을 종결짓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시편 찬송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릇된 중세 신학을 무너뜨리신 것이다(참조. 시 8:2)  

 

격려와 경고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면서 의인인 자기의 모습을 발견한 루터는 시편을 애독(愛讀)하고 애창(愛唱)하기를 권한다. ‘작은 성경’인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나아가라고 격려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고 큰 보물을 경시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의 양식을 가볍게 여겼다가 염병으로 죽은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경고의 말을 덧붙인 것이다.   

 

루터의 격려와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시편을 가르치고 부르는 일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활동은 많이 강조하지만 시편을 깊이 있게 가르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것은 시편에서 복음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면서 이 문제를 풀고 나아가야 하겠지만, 동시에 시편에서 복음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시편은 ‘그리스도의 노래’이고 ‘그리스도인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부기: 성약출판사에서 간행한 주옥과 같은 시편 강해집이 두 권 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에 나오는 시편을 몇 편 주해한 것이고, 『높이 되신 그리스도』는 시편 110편을 기독론적으로 주해한 것이다. 이 책들이 애독되는 정도가 개혁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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