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신학사상과 성경해석에 있어서 '오리겐'과 '제롬'의 관계

by 갈렙 posted Jun 1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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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사상과 성경해석에 있어서 '오리겐'과 '제롬'의 관계

강대훈 / 총신대 신대원 1-1

 

 

Ⅰ. 시작하는 말

 오리겐(185-254)과 제롬(347-379년)은 백 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살았다. 그러나 제롬에게 있어서 오리겐은 결코 멀리 존재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제롬은 오리겐을 상당히 존경했고, 초기에는 그의 신학사상과 성경 해석 방법을 따랐다. 인생의 후기로 가면서 제롬은 오리겐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쪽에 서게 된다. 제롬은 한 때 오리겐을 추종할 때 함께 했던 동료들과 싸우며 그들을 정죄했다. 오리겐과 제롬의 관계는 단순히 두 인물만의 관계로 끝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2-5세기 신학사상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으며,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의 성경 해석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신학사상과 성경해석에 있어서 오리겐과 제롬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우선 두 사람의 신학사상과 성경해석에 대해 살펴 보았다. 그 다음 오리겐의 추종자들에 대한 제롬의 반응을 통해서 오리겐과 오리겐주의에 대한 제롬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고찰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오리겐에 대한 제롬의 입장이 '신학사상' 측면과 '성경해석' 측면에서 변하게 된 동기와 이유를 연구했다.


 Ⅱ. 오리겐의 신학사상과 성경해석

 1. 오리겐의 생애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선구자였다면 오리겐(주후 185-254)은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워놓은 인물이었다. 오리겐은 클레멘트(Clement)에 의해 시작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꽃이었다. 오리겐은 185년 이방인이 아니라 기독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리겐의 생애는 주로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데스는 202년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때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청년 오리겐은 진리에 대한 열정과 용기로 불타올라 아버지를 따라 순교자로 죽으려 했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옷을 섬겨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가 순교한 후 오리겐은 한 여인을 통해 묵상할 수 있는 거처를 얻어 학문에 전념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예비 신자를 위한 학교가 있었고 책임자는 클레멘트였다. 클레멘트가 기독교 박해를 피해 피신하자 학교의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이때 알렉산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감독(Bishiop Demetrius)이 18세의 오리겐을 학교 책임자로 추천했다. "오리겐의 교리는 생활이요, 오리겐의 생활이 곧 교리"였기 때문에 오리겐은 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좋았다. 그는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맨땅에서 잠을 잤으며 생명을 연장하는 데 필요한 음식 외에는 먹지 않았다. 그는 히브리어에 능통했다. 당시에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창설자인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의 강의를 듣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학생 수가 많아져 그는 고등 과목인 철학, 신학, 성경을 가르쳤다. 성경학자로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팔레스틴, 세사리아, 예루살렘 감독이 오리겐을 초청하여 설교과 성경 강해를 하도록 했다. 오리겐은 사제가 아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데메트리우스가 평신도인 오리겐이 설교를 했다고 비난하자, 예루살렘 감독인 알렉산더와 세사리아 감독인 테오티스투스는 오리겐을 사제로 안수했다. 데메트리우스는 화가 나서 노회를 소집하여 교회 법에 고자는 사제가 될 수 없다는 명목으로 오리겐을 사제직에서 파문했다. 파문을 받은 후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세사리아로 가서 그곳 감독의 권유로 신학를 세워 거기서 20년동안 봉직했다. 오리겐은 데시우스(Decius) 황제 박해 때, 심한 고문의 영향으로 253년 69세의 나이로 진리를 위해 싸우다가 순교했다.

 2. 오리겐의 신학사상
 오리겐의 스승인 클레멘트는 철학을 신학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오리겐은 철학은 신학을 위한 준비 과목이라고 했다. 클레멘트는 자신의 신학의 기초를 모든 지식의 원천인 로고스 교리에 두지만 오리겐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 오리겐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초대 기독교 교리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핵을 그은 하나님의 개념이다. 오리겐은 헬라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부가 직접 세상을 창조하기는 부적당한 것으로 보고 신플라톤주의적 로고스 신학을 발전시켰다. 오리겐에 따르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물질계를 창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오직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영적 존재들만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영적존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염증을 느껴 점차 열등한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영적 존재들이 타락하여 물질계는 존재하게 되었다. 이 물질계는 우연히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래 목적에 따라 지어진 것이다." 


 오리겐의 신학사상이 가진 특징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후대에 각각 다른 영향을 주었다. 오리겐의 넓고 응집력이 있는 신학 체계는 동방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근원'이 된 반면, 그의 담대한 이론에 기초를 둔 신학들은 계속적으로 정죄를 받게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두 그룹(좌파와 우파)으로 나뉘어서 한 쪽에서는 아들의 참된 신성과 아버지와의 동등성을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아들을 종속적 존재로 간주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려고 했다. 오리겐은 자신의 천재성으로 모호한 기독교 교리들을 예리하게 다듬었으나 지나친 사색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교리를 태동시킨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오리겐의 영향이 두 방향으로 나뉘자, 오리겐을 부정적으로 보는 쪽과 긍정적으로 보는 쪽이 생겼다. 


 오리겐의 부정적인 면을 보고 비판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오리겐이 일생동안 이단들과 싸우면서 기독교 신앙을 변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의 종속설, 이 세계의 영원성, 영혼 선재설과 재성육신설, 만인 구원론이 역사적 기독교를 왜곡시켰다고 질타했다. 리기아 지방 감독 메소디우스는 오리겐이 부활을 영적으로만 해석했다고 비난했다. 에피파니우스, '후기'의 제롬, 유스티니안 황제는 오리겐이 자신의 저술에서 이단적 이론과 정통 교리들을 혼합해 놓은 것은 오리겐이 대중을 혼란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리겐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추종한 사람들을 보자. 폰투스(Pontus)의 복음전도자인 기적의 사람 그레고리(Gregory the Wonderworker), 최초의 교회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헤라클레스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Great)가 있다. 그의 영향력은 동방 교회의 신학자들에까지 번져서 아타나이수우스, 바질,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니싸의 그레고리 등이다. 서방 교회에서는 힐라리와 밀란의 암브로스 등이 있다. 오리겐의 [제1원리]의 라틴역자요 오리겐 변호자 루피누스는 그를 충심으로 따랐고 존경했다. 오리겐의 금욕적, 지성적 삶은 이단들을 제지하고 이방 세계로부터 개종자들을 획득했다. 범교회적 대연합회의의 토대를 제공했고 수도원 운동이 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그의 생도 가운데 하나였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오리겐은 우리 모두를 날카롭게 만드는 돌이다."라고 했다. 이들은 오리겐의 신학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3. 오리겐의 성경해석
 오리겐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그의 성경 해석 방법을 고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리겐은 최초로 성경을 학적으로 주석했고 거의 모든 성경을 주석한 성경 신학자였기 때문에 오리겐의 주석이야 말로 그의 신학적 관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오리겐의 성경해석은 알렉산드리아 신학 전통에 서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경해석을 필로-클레멘트-오리겐 전통으로 보고, 오리겐의 성경해석관을 고찰해 보자.

 ⑴ 필로의 성경해석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경해석은 유대인들의 세 가지 해석 방법 중 하나이다. 이 해석 방법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개념을 성경 해석에 적용하여, 성경은 히포노이아(hyponoia)라고 불리는 보다 깊은 진리 또는 영적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영적인 의미는 단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풍유적 해석법으로 발견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풍유적인 성경 해석의 선구자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필로(주전 20년부터 주후 50년)였다. 예수님과 바울과 동시대에 살았던 필로는 플라톤의 철학 방법을 이용하여 성경 언어의 이면에 숨은 영적인 의미를 찾았고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풍유적인 의미가 더 진실하고 참된 의미라고 했다. 필로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헬라 문화와 유대 문화가 서로 적대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헬라 철학자들은 구약 성경을 조롱하고 비판했으며 랍비들은 문자 숭배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을 어떻게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중 구약성경을 풍유적으로 풀면 헬라문화권에 젖은 자들이 거부감 없이 성경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필로는 생각했다. 


 그러나 필로의 풍유적 해석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그는 두 차원의 의미, 즉 표면적 의미는 이면적 의미라는 실체에 대한 그림자이므로 표면적 의미에서 풍유적 의미로 전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로는, 감각세계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라고 본 플라톤의 사상에 따라, 표면적인 의미 배후의 이면적인 의미의 실체를 추구하고자 했다.

 ⑵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풍유적 방법론을 증진시키는 센터의 역할을 해 온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기독교 교리 문답 학교의 책임자였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박해로 유배되기까지 필로처럼 성경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가르쳤다. 영과 육을 가진 인간처럼, 성경도 문자적인 의미 이면에 숨겨진 혼(영)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육적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 숨겨진, 영적인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그는 가르쳤다.  

 ⑶ 오리겐의 성경해석
 "오리겐은 지금까지 기껏해야 아마추어 연습에 불과했던 신약주석에 한 사람의 대가로 접근했다." 그는 히브리어에 능통했으며 유대인들의 수중에 있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본을 수집했다. 오리겐은 성경의 원문을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성경의 참된 의미는 문자적 해석을 통해서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리겐은 인간이 몸, 혼, 영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성경도 삼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삼중적인 의미는 '문자적 의미'(본문의 사건, literal or physical meaning), '도덕적인 의미'(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 숨겨진 원리들, moral meaning), '영적인 의미'(교리적 진리, spiritual meaning)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깊은 의미는 영적인 의미라고 했다. 그러나 오리겐은 한 본문의 의미를 항상 문자적, 도덕적, 영적인 3분법적 의미로 정확하게 나누어서 조직적인 방법으로 진행하지 않았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그는 복음서 본문에 대해서 문자적, 율법적 해석을 엄격히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성장애자가 되었다. 그는 성경의 기적을 접하면 먼저 그 사의 역사적 실재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나서 그 사건의 의미에 담긴 우의적 해석으로 넘어갔다. 한편, 어느 경우에는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아주 무시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경의 모든 본문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모든 본문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오리겐은 자신이 유태인들처럼 레위기 본문을 주석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셨다고 주장하기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레위기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이 틀림없지만, 모든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태인들과 말시온주의자들의 오류라고 보았다. 


 오리겐의 해석이 본문을 갖고 노는 듯한 인상을 주자 오리겐은 하나님은 원래의 성경 저자를 영감하셔서 풍유적인 의미를 그의 저작 속으로 통합하도록 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러기에 오리겐이 성경의 최고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보다 깊은 영적인 진리를 말한다. 그것은 이미 성경에 암시되어 있는 것이지 해석자가 고안한 그 무엇이 아니라고 했다.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스럽게 단순한 의미를 무시하는 성경해석이다. 오리겐은 성경 자체보다도 성경이 말하는 그 이상의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데 있어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은 다른 초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Ⅲ. 제롬의 신학사상과 성경해석

 1. 제롬의 생애
 제롬은 스트리돈(Stridon)에서 347년에 태어났다. 그의 인생의 첫 시기는 347-379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주로 '형성과 준비'기간이었다. 그는 고향 스트리돈에서 12년을 보낸 뒤에, 문학공부를 마치기 위해 359년 로마로 갔다. 그후 8년 동안(359-367년)은 문법, 인문학, 수사학, 변증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헬라와 라틴 고전들, 철학자들과 시인들, 특별히 풍자시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런 공부는 충동적이고 성급하고 비판과 반대에 민감한 그의 본성을 지닌 제롬을 순화시키기보다 그런 성격을 더 자극한 것 같다. 그는 로마를 떠나 트라이어(Trier)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고 수도승이 되기를 원했다. 트라이어에 잠시 머문 후에, 7년 동안 아퀼레이아(Aquileia)에 가서 머물면서 공부했다.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에서 주교 발레리아누스를 중심으로 모인 금욕주의 엘리트 집단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 집단에는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의 저서들을 번역한 저자 겸 학자인 '루핀'도 있었다. 373년경 이 집단이 흩어지자 동방을 통해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372년, 제롬은 팔레스틴으로 갔고 안디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했다. 거기서 제롬은 헬라어 지식을 습득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지적 관심과 수도의 열망 사이에는 큰 간격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적 관심과 수도생활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제롬에게 꿈 속에서, 하나님의 법정에 끌려가 주님에게서 기독교인이라기 보다는 키케로주의자로 고소를 당했다. 이것이 제롬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그는 이교학문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각오하게 되었다. 그는 꿈 이후에 수도승이 되기 위해 칼키스 근처의 시리아 사막(the Syrian desert)에 갔다. 제롬의 수도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는 늘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수도원 속에서 마저 악몽에 시달렸고 로마에 있는 무희들의 환상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 안디옥에서 회심한 한 유대인의 도움으로 히브리어 공부를 했다. 그는 정욕과 유혹을 잊고 자기의 마음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히브리어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알파벳과 문법이 야만적으로 보였지만 성스러운 면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얼마되지 않아 히브리어 능력은 경지에 달하게 되었다. 제롬의 히브리어는 서방교회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벌게이트 성경을 태동시키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러나 제롬은 그 지역 수도승들이 수용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는 379년, 제롬은 칼키스 사막을 떠나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안디옥에서 장로로 안수를 받은 후 제롬과 공교회와의 연결은 계속되었다. 콘스탄틴노플에서 잠시 체류한 제롬은 382년부터 385년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제롬이 로마의 감독 다무수스에게 발탁된 것이 이때였다. 감독은 제롬에게 시편과 복음서의 라틴어 번역을 의뢰했고 제롬은 이것을 계기로 22년 동안 필생의 번역사업을 완수하여 구약전체를 라틴어로 완역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귀족층, 특히 여성들의 영적 지도자요 성경선생으로 활약하면서 로마 기독교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직선적인 성격, 세속적인 교회의 모순들과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태도는 로마의 미움을 받게 만들었다. 로마 감독의 요청으로 로마를 떠나 팔레스틴 성지를 방문했다. 


 386년, 제롬 일행(마르셀라, 파울라, 유스토키움)은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수도원 운동과 성경번역 사업을 추진했다. 이때 파울라가 제롬과 함게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남자 수도원과 여자 수도원을 설립했다. 베들레헴에서 사역하는 동안 제롬은 히브리어에 기초한 성경 번역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자신의 최대 업적인 구약성경 완역을 이룩했다(405년경). 그가 번역한 벌게이트 성경은 공교회로부터 권위있는 라틴어역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2. 제롬의 신학사상
 제롬은 안티니처럼 성스러운 인격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며, 아타나시우스처럼 명철한 신학적 통찰력으로 알려진 것도 아니며, 암브로스와 같은 용기와 신념으로 명성을 얻었던 것도 아니고, 크리소스톰과 같이 설교에 뛰어난 인물도 아니었다. 성 제롬은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기 보다는 오히려 거만하고 격정적이고 자조적이기까지 했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과 정통지향적인 성품으로 서방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지만 직선적인 언행과 성품 때문에 자주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롬의 동정녀 탄생, 수도원 운동, 성인 숭배 등은 서방 교회 전통이 되었고 펠라기우스 반박 역시 당시 서방교회 정통의 이정표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이유로 제롬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 이후 탄생한 앰브로스, 어거스틴, 그레고리 대제와 함께 네 명의 위대한 라틴 카톨릭 학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3. 제롬의 성경해석
 ⑴ 초기 :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의 영향
 379년, 제롬이 칼키스 사막을 떠나 다시 안디옥으로 가서 382년까지 거의 3년 동안 제롬은 성경연구를 하면서 지냈다. 제롬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니사의 그레고리와 신학자 이코니움의 암필로키우스에게서 그리스어 실력을 쌓았고, 오리겐의 주석에 대해 점점 더 감탄하게 되었다. 오리겐의 '구약성경' 설교들 가운데 14편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연대기'(Chronicon)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378년에 마쳤다. 로마의  교황 다마수스의 비서가 되어 로마로 간 후(382-385) 로마에서 성경연구를 계속하면서 금욕생활을 보급했다. 이 무렵 오리겐의 '아가' 설교 2편을 번역했다. 그는 오리겐의 책을 연구하고 번역하면서 오리겐의 풍유적인 성경해석의 영향을 받았다.

 ⑵ 후기 : 안디옥 학파의 문자적-역사적 해석의 영향
 제롬은 인생의 후기에 문자적 성경해석 방법을 택했다. 제롬이 안디옥에서 배운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하고,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직접 받으면서 문자적 성경해석의 우위성을 확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안디옥 학파에 대해 살펴 보자.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 방법에 반대한 사람들은 주후 4세기에 시리아에 있는 두 번째 기독교 교리 문답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알레고리 대신 성경에 대한 역사적-문법적 이해를 가르쳤다. 즉 본문은 문법과 단어들에 의해 전달되는 하나의 평이하고 단순한 의미를 갖는다고 가르쳤다. 이 학교의 선생들로는 데오도르(Theodore of Mopsuestia, 주후 약 350-428)와 데오도레트(Theodoret, 주후 약 393-460년),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주후 약 347-407) 등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지적 분위기가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접근법을 구체화시켰듯이 안디옥 학파(Antiochene school)는 안디옥에 있는 유대 공동체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데오도레트는 그의 스승인 데오도르를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그가 기독교적이라기보다 유대적이기 때문이었다. 안디옥 학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보다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열쇠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위 데오리아(theoria, 통찰력)이다. 이것은 본문의 문자적인 역사적 사실들과 이 사실들이 지시하고 있는 영적인 실체 모두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안디옥 학파는 숨겨진 영적인 의미를 선호하여 문자적인 의미를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의미는 직접적으로 영적인 의미와 상통한다고 주장했다. 


 풍유적 해석을 철저하게 배격함으로써 안디옥의 학자들은 교회에 의해서 널리 받아들여진 몇몇 해석들과 이별하게 된다. 예컨대, 데오도르는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해석한 풍유적 해석을 따르지 않고 솔로몬이 자신과 한 이집트 공주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쓴 사랑의 시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형론을 충분히 활용했기 때문에 융통성없는 문자주의가 아니었다. 안디옥 학파의 성경 해석은 제롬을 통해서 다음 세대에 계승되었다. 제롬의 처음 주해는 풍유적 해석이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라이디게아의 아폴리나리어스의 가르침을 받아 문자적-역사적 방법 아래 서게 되었다. 원전 연구와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의 성경 해석에 대한 지식이 늘어감에 따라 그는 초기에 자신이 극찬한 풍유적 해석에서 벗어나 성경의 내용과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제롬은 성경의 깊은 의미는 '문자' 위에 세워졌으며 '문자의 의미'에 모순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성경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은 실제로 발생했으며 동시에 역사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소유한 것으로 보았다. 이 의미는 히브리어로 표현된 진리인 히브리 백성에게 보여주신 진리(Hebraica veritas)에 기초한다. 해석자는 자신의 지각을 넘어서는 영적 이해를 구비해야 하는데, 영적 이해는 육신의 지각과 모순되지 않는다. 제롬이 '벌게이트'를 만들어 내는 데 거의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안디옥 학파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어거스틴처럼 데오돌은 제롬이 희랍어 70인역에서 이탈함을 유감스럽게 여겼다. 


 4세기와 5세기의 신학적 논쟁들-네스토리우스 논쟁(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관한 논쟁)-로 인해 일부 안디옥 학자들은 정통주의를 벗어났다고 비판을 받았다. 이로써 문자적 해석을 시도했던 안디옥 학파는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풍유적 해석이 어거스틴을 통해 중세로 이어졌고 그 기간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천 년 동안이나 되었다.


Ⅳ. 오리겐의 추종자들과 제롬의 관계

 1. 루핀과의 논쟁
 오리겐과 제롬은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므로 오리겐의 추종자들과 제롬의 관계를 통해서 오리겐 사상에 대한 제롬의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제롬의 논쟁들 중에서 그가 가장 길고도 아프게 개인적인 논쟁을 한 대상은 '루핀'(Tyrannius Rufinus, 345-411)이었다. 루핀은 로마의 사제, 작가, 신학자였다. 그는 서방에서 헬라 지식이 쇠퇴해갈 때 헬라어로 된 신학책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로마에서 제롬과 함께 공부했고, 두 사람은 오리겐의 열렬한 추종자들이었다. 루핀은 로마에서 공부를 한 뒤 아퀼레이아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고 제롬이 수도원을 방문하곤 했다. 그들은 가까운 친구사이였다. 루핀은 373년경 오리겐의 저술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390년대초 루핀과 제롬은 오리겐의 가르침에 관한 논쟁에 관여했다. 이 무렵 그들은 정통 신학자들에 의해 신학에 이단적 요소를 주입한다고 의심받았다. 393년에 두 사람은 오리겐주의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고발되었다. 이때 루핀은 오류라고 주장되는 것들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은 반면 제롬은 즉시 포기했다. 스승인 오리겐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두 사람의 불화는 생겨났고 397년에 가서야 누그러졌다. 그러나 루핀이 로마에서 오리겐의 저서 '제1원리에 관하여'(De principiis)를 번역하여 출판했는데, 그는 책 서문에 제롬이 오리겐의 찬양자라고 썼다. 이 사건으로 루핀은 제롬에게서 무자비한 비판을 받았다. 루핀은 그의 정통성이 의심받게 되자, 그를 로마로 소환한 교황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변증론(Apologia)]을 썼다.

 2. 요한과의 논쟁
 요한(Johannes of Jerusalem, 356-417)은 5세기 동방교회의 교리논쟁에서 플라톤적인 알렉산드리아 전통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그는 예루살렘 기독교 신조에 관한 유명한 교리문답회의 기록 모음집의 공동 저자이다. 어린 나이에 수사가 된 요한은 387년경 예루살렘의 키릴루스에게 주교직을 물려받았다. 393년 그가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의 견해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제롬와 에피파니우스에게 공격을 받았다. 에피파니우스가 팔레스타인의 수사들을 부추겨 오리겐주의에 반대하도록 했을 때 요한은 그들을 예루살렘의 성지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거나 죽은 자를 장사 지내지 못하게 함으로써 보복했다. 396년 가을 제롬은 요한을 비난하는 성언서를 발행했다. 요한을 비난하는 일련의 사건이 그리스 교회와 서방교회를 통해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397년 부활절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의 중재를 통해 제롬과 화해한 요한은 제롬과 그의 전임 신학자 동료 루핀 간의 오리겐에 대한 논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요한과 제롬은 인간은 신의 도움 없이도 도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둘러싸고 다시 논쟁했다. 제롬과 히포의 어거스틴이 보낸 사절은 415년 7월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요한을 이단자로 고발했다. 어거스틴의 제자들이 펠라기우스에 대항해 그들 스승의 정통성을 주장했을 때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자신만이 기독교 정통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성실한 인간에게 죄를 피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타협안을 고안했는데, 이것은 제롬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펠라기우스는 교리상 죄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고, 이것은 415년 12월 디오스폴리스 수도대주교 공의회에서 확정되었다. 그 직후 요한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강력한 반(反)펠라기우스주의의 중심지인 베들레헴의 수도원을 약탈하는 것을 묵묵히 허용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는 요한의 행동을 크게 비난했다. 제롬은 오리겐주의에 대한 입장 차이로 요한과 심하게 논쟁했고, 이어 요한이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했다.

 3. 디디무스과 제롬
 디디무스(Didymus the Blind, 313-398)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동방교회의 신학자요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교리학교 교장이었다. 5세기의 주교이며 역사학자인 팔라디우스에 따르면, 디디무스는 어릴 때부터 눈이 멀었으며 일생을 평신도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가장 해박한 수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는데 그중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는 그를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 교장으로 삼았고, 제롬는 그를 자신의 스승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제2공의회에서 디디무스는 그의 작품이 오리겐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자 제롬은 그의 작품들에 대한 존경을 취소했다. 유죄판결을 받은 까닭에 그의 저서 대부분은 중세 때 사본으로 만들어지는 일이 없었고 점차 소실되었다.

Ⅴ. 오리겐과 제롬의 관계

 1. 신학사상
 오리겐 신학은 그의 생존시에나 사후에나 양면성을 갖고 있어 양쪽의 반응이 생겼다. 5세기의 비잔틴 신학자인 스콜라리우스(Scholarius)는 오리겐에 대해서, "오리겐이 옳을 때는 아무도 더 이상 더 옳을 수 없고 오리겐이 잘못 될 때는 아무도 그 이상 더 잘못 될 수 없다…오리겐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진리의 초석이 되는 동시에 모든 잘못된 교리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오리겐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여, 기독교를 플라톤주의에 팔아넘긴 사람, 성경신학의 창시자, 아리안주의의 창시자, 삼위일체 정통주의의 아버지, 수도원주의의 창시자 등으로 불린다. 오리겐의 좌파적 경향은 아리우스에게서, 우파적 경향은 아타나시우스에게서 발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롬의 초기에, 제롬은 친구 루핀과 함께 오리겐의 제자였다. 오리겐의 삶과 신앙을 보고 존경했던 사람들처럼 제롬도 오리겐의 존경했던 것이다. 특히 수도원 생활과 성경 번역에 관심을 가졌던 제롬은 오리겐의 긍정적인 면을 따랐다. 신학사상과 성경해석에 있어서 오리겐의 방법론을 빌리기도 했다. 켈리(J. N. D, Kelly)는 제롬은 394년까지만 해도 오리겐주의의 제자였다고 본다. 제롬은 초기에는 다른 교리들 가운데서도 자연적인 몸이 사라졌다가 부활 때에 선택받은 자들이 순전히 영적인 존재로 변형된다고 하는 스승의 이론을 지지했다


 제롬의 인생 후기로 가면서 그는 오리겐의 언제나 선망했으나 오리겐의 신학적 사명에 회의를 느끼고 오리겐에 대한 정죄 쪽에 섰다. 오리겐에 대한 제롬의 정죄는 4세기 후반, 오리겐을 대항한 길고도 삼킬듯한 비난이 교회에 일어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리겐에 대한 반대는 오리겐의 제자들-한 때는 오리겐을 함께 추종했던-루핀, 요한, 디다무스와 심하게 논쟁하며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과의 논쟁, 관계 단절은 오리겐이 이단으로 정죄받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오리겐의 부활 사상에 대해서도 제롬은 이전에 존경했던 스승의 부활 사상에 가장 탁월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제롬이 오리겐의 성경 해석과 신학에 대해 그의 존경심을 돌이키고 오리겐의 추종자들과 논쟁하게 된 것은 제롬이 공교회의 정통 교리를 지키는 것에 대단히 열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롬이 공교회의 교리 수호하기 위해 이단 사상과 싸워야 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것은 칼키스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할 때였다. 제롬은 완성된 삶을 열망하여 374년에는 아퀼레이아를 떠나 안디옥 동쪽에 있는 칼키스(Chalcis)의 사막에 갔다. 거기서 처음으로 이단들과의 싸움에 휘말렸다. 사벨리안 이단이 안디옥 교회를 당혹스럽게 할 당시 제롬은 세 본체(hypostases) 대신에 세 위격(persons)으로 삼위일체를 언급했기 때문에 사벨리안주의자(Sabellianian)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제롬은 교황 다마수스에게 이 문제로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분명한 표준과 권위있는 규율이 설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교회는 성경을 분별하고 전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은 제롬의 후기에 제롬이 교회의 원수들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도록 의무감을 주었다. 교회의 원수는 곧 자신의 원수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단과의 첫 싸움을 통해서 교회의 교리적인 권위를 보호해야 하고 보편적 신앙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어떤 이단에 대해서도 기꺼이 공격할 준비를 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공교회의 교리 수호라는 관점에서 제롬은 오리겐과 그 좌파적 추종자들을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롬이 오리겐을 무조건 비판한 것이 아니라 오리겐의 사상 속에 담겨져 있는 이단성을 비판했다. 제롬은 오리겐을 전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리겐의 사상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리겐의 추종자들이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사색이나 담대하게 말한 부분을 너무 강조하면 잘못된 사상을 전개시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추종자들이 정통교리에서 심하게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상의 뿌리가 되는 오리겐의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제롬은 오리겐이 성경해석과 수도원적 금욕주의 등, 자신의 삶에 준 영향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다.

 2. 성경해석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제롬은 초기에 오리겐의 성경해석을 따랐다. 초기 활동에서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법을 환영했다. 그러다가 제롬이 히브리어 원문 연구을 하고, 라이디게아의 아폴리나리어스에게서 문자적-역사적 해석방법을 배우면서 오리겐의 해석이 가진 결함을 발견하고 자신의 주해 작업들 속에서 그것을 공격했다. 제롬의 성경해석이 바뀐 것을 '오바댜' 주석에 대한 자신의 고백에서 알 수 있다. 칼키스 사막에서의 꿈 이후 제롬은 최초의 해석학 저서, 즉 성경의 '오바댜'에 대한 알레고리 주석을 썼다. 오리겐의 영향을 받은 주석이었다. 그러나 21년 뒤에는 이 책을 젊었을 때 무지한 열정으로 쓴 것으로 간주해 평가절하했다. 제롬은 안디옥에서 히브리어를 배우고 안디옥 학파의 문자적 해석의 영향을 받으면서 알레고리칼 해석을 한 알렉산드리아 학파, 곧 오리겐의 반대 편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롬이 그의 후기 작업에서 오리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파러(Farrar)는 제롬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자신이 앞뒤가 꽉막힌 문자주의와 풍유적 해석법 사이를 안전하게 조화시킬 수 있다고 자만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의 '다중적 의미'와 '영적 의미들의 전체 숲'은 원문의 한 구절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제롬이 계속해서 풍유적 해석법을 고수했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이 초기의 방법론의 영향을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에버렛 퍼거슨(Everett Ferguson)은 "제롬의 주석들 중에서 창작품은 적다. 그는 전반적으로 그리스 주석가들, 특히 오리겐으로부터 빌려왔다."고 했다. 그의 초기 주석들은 주로 풍유적 해석을 보여주지만 후기 주석은 보다(more) 역사적이고 보다 철학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제롬의 해석은 유대주의적 방법론과 오리겐의 방법론에서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Ⅵ. 나가는 말

 오리겐이 생존했던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사후에도 추종자들과 비판자들이 동시에 존재했다. 제롬은 초기에는 오리겐의 삶과 신앙, 신학사상, 성경해석을 따랐다. 그러나 제롬은 자신의 인생 후기에는 오리겐의 삶과 신앙은 존중했지만 신학사상과 성경해석에 대해서는 다른 쪽에서 서서 비판했다. 추종자의 쪽에 섰다가 비판자의 편에 선 것이다. 제롬이 신학사상에 있어서 오리겐을 비판하게 된 이유를 '공교회의 정통교리'를 수호하려는 강렬한 열정에서 찾을 수 있다. 제롬은 이미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할 때부터 공교회의 정통교리를 지켜야 하겠다는 결심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오리겐의 신학사상은 양면성이 있어 좌파와 우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제롬은 오리겐의 신학사상이 가진 양면성을 비판하고 좌파 쪽에 선 추종자들을 비판하고 이단으로 정죄했다. 제롬은 그들과 싸울 때 매우 격렬했고 정죄에 있어서는 그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그렇게 된 것은 정통교리에 대한 제롬의 열정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인격적인 약점때문이기도 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제롬은 히브리어 원어를 배워 히브리어 원문을 연구하고 번역하면서, 그리고 문자적-역사적 해석을 시도한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안디옥에서 받으면서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 방법의 문제점을 찾게 된다. 결론적으로, 오리겐과 제롬의 관계는 오리겐의 추종자들의 신학사상이 변함에 따라, 제롬의 신학사상과 성경해석의 견해가 변함에 따라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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