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Jerome, Eusebius Hieronymus, 347?-420)은 서방교회에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자로, 초대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성경 주석자로, 그리고 학문을 겸비한 자로 잘 알려져 있는 자이다.
그는 서방교회의 교부들 중 가장 탁월한 자로서 347년 아드리아해 상류 스트리도니우스(Stridonius)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아들 제롬을 위해 집에서 가정교육을 시킨 후 로마로 보내어 유명한 이교도 문법학자인 아엘리우스 도나투스와 기독교 수사학자인 빅토리누스에게서 배우도록 했다. 여기서 라틴어와 헬라어에 능통하도록 훈련받으면서 제롬은 문학작품들을 읽는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세속적 사상들을 배우는 가운데 제롬은 자신의 경건을 상실하였다. 그러면서 이교적이고 쾌락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비문들을 해석하는 일을 즐겼다: “주일날마다 내 또래 친구들과 함께 순교들과 사도들의 묘들을 방문하여 죽은 자들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습관을 나는 가졌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360년 로마감독 리베리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마에서 3년 동안 거한 후 제롬은 또 다른 세상을 탐험하는 욕구를 가졌다. 그래서 고향을 방문하여 죽마고우 보노수스와 함께 아퀼레이아로 갔다. 그 곳에 있는 수도사들을 사귀었다. 그런 후 고올 지방의 트레베스로 가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기 위해 세속적 모든 추구들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교부 힐라리가 쓴 시편 주석 등을 복사하면서 종교적 보고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 후 제롬은 고향 스트리도니우스로 잠시 되돌아 왔다가 아퀼레이아에서 거하였다. 학문적 추구를 계속하면서 고독을 추구하면서 점점 동방, 즉 시리아로 나갔다. 가는 도중 아텐, 비티니아, 갈라리아, 폰투스, 캅파도키아, 그리고 킬리키아 등을 방문했다.
제롬은 병약한 몸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다가 동반자들과 함께 373년 안디옥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이단자로 정죄받기 전의 라오디게아 감독 아폴리나리스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면서 근교, 즉 안디옥 동편 지역에서 4년 동안 거하면서 은자로서 금욕과 학문에 전념했다. 여기에서 그는 시오한 영적 체험을 가졌다. 어느 날 그는 이런 꿈을 꾸었다 : “한 재판관이 그에게 묻기를, ‘너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면 키케로인이야?’ ‘네가 그렇게 추구하는 것은 이미 너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 이후 그는 성경과 신학에만 자신을 헌신할 것을 굳게 마음먹었다. 더욱이 칼치스(Chalcis) 사막으로 옮겨 극한 금욕적 삶을 추구하면서 히브리어와 신학 연구에 전념했다. 병으로 고생하기도 했고 유혹을 받곤 했다. 유스토치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
제가 거했던 멀리 떨어진 황량한 광야는 돌들과 태양이 작열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살았던 수도사들조차도 두려워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저는 로마의 군중들 가운데 사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 . . 이런 곳에서 저는 지옥의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전갈과 야생동물을 친구로 삼고 로마의 친구들과 춤을 추듯 함께 지냈습니다. 금식하여 저의 얼굴은 핏기가 없게 되었고 욕정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죽음 직전의 모습인 차가운 육체와 다 말라빠진 몸을 가지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저의 열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서 저는 한 없이 눈물을 흘리며 수 주간 금식하곤 했습니다. 저는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매우 슬퍼하면서 받은 유혹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378년 사막에서 안디옥으로 되돌아온 제롬은 젊은 아폴리나리스(c.310-c.390)의 강의를 듣고 안디옥 감독 파울리누스가 주는 사제직을 받게 되었다. 379년 사제로 수임을 받은 일 년 후, 제롬은 380년 나지안주즈의 그레고리 밑에서 성경을 배우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곳에 거하면서 닛사의 그레고리와도 친분을 가졌다. 또 그곳에서 오리겐의 주석들을 탐독하게 되었고, 그의 작품들 중 일부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2년 후, 즉 382년, 그는 안디옥의 파울리니누스와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와 함께 로마로 되돌아와서 로마감독 다마수스가 주재했던 종교회의에 참여했다. 이 종교회의는 안디옥의 분파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모였다. 여기에서 제롬은 서기로 역할 했고 다마수스의 개인 서기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다마수스의 요구에 따라 헬라어로 성경을 기초로 하여 라틴어로 된 신약성경 개정판을 만들었다. 이러한 일은 앞으로 35년 동안 평생의 작업을 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제롬은 로마시에 거하는 귀족부인들의 금욕적 운동을 주도했다. 이 가운데 마르셀라, 파울라, 그리고 유스토치움 등이 있다. 이들은 마르셀라의 집에서 금욕적 생활을 일삼았다. 제롬은 이런 여인들과의 경솔한 관계, 그의 단호한 성경적 비평주의, 그리고 해이한 로마 성직자들의 비판으로 인해 많은 적들을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384년 로마감독 다마수스가 세상을 떠나자 시리키우스가 그 직을 이었지만 제롬과 그렇게 친하지 못했다. 더욱이 자신이 정죄했던 사악한 자들과 이교도들로부터 곤궁에 빠지게 되었고, 세속적 여인들로 인해 곤궁에 빠지면서 제롬은 개인적 경건과 학문을 위해 동방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 이 여행이 그의 두 번째 동방여행이었다.
385년 남동생 파울리니안과 여러 명과 함께 출발하여 사이프러스로 갔다가 안디옥에 나아갔다. 그곳에서 아마도 파울라와 다른 여인들을 만난 것으로 여긴다. 당시 그녀들은 예루살렘 방문을 위해 떠났던 여인들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그리고 여성 파울라의 도움으로 남성들을 위한 수도원을 제롬은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의 출생지를 기념하는 성전 근교에 지었다. 또한 여성들을 위한 세 곳의 공동체도 세웠다. 파울라로 하여금 한 공동체를 주관하도록 하다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딸 유스토치움이 그 책임을 맡았다. 당시 제롬은 주님의 탄생지로 알려진 근교에 있는 큰 동굴에서 일하면서 거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유학교를 개설하고 예루살렘 방문자들을 위해 여행숙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일을 할 때 파울라가 어느 날 이렇게 물었다 :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 다시 방문한다면 이곳에 머물게 되겠죠?”
수년 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팔레스타인의 풍경과 아름다움을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여러 야만족들의 대이동으로 인해 얼룩져 있었고, 오리게니즘과 펠라기아니즘과의 논쟁으로 격화되어있었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루피누스, 조비안, 그리고 비질란티우스와 논쟁했다. 제롬의 성격은 빈정대고, 성급하고, 그리고 자만하였다.
로마감독 다마수스는 마리아가 결혼하지 않고 동정녀로 지내지 않았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요셉의 다른 자녀들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헬비디우스에 반대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영속적 동정녀성을 위한 책을 편찬했다. 이것은 어느 수도사의 글과 유사했다. 그래서 파울라의 조카인 팜마치우스는 이런 이단적 서적을 제롬에게 보냈다. 이때가 393년 이었다. 이에 대해 제롬은 「팜마치우스를 변호하면서」(Apology to Pammachius)를 써서 이단성을 가진 책자를 비판했다.
수년 후 다시금 금욕주의(celibacy)를 변호하는 글을 썼다. 395-400년 제롬은 오리게니즘(Origenism)에 반대하는 앞장섰다. 친구였던 루피누스가 예루살렘에 거하는 동안 오리겐의 여러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오리겐의 학문을 칭송했다.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도 제롬과 루피누스간의 언쟁으로 큰 불편함을 가졌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논쟁에 마지못해 관련을 맺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제롬의 명성을 알리게 된 것은 논쟁에서라기보다는 성경본문에 관한 그의 비평적 노고였다. 교회는 그를 하나님 말씀을 분명하게 했던 모든 박사들 중 가장 위대한 자로 칭송한다. 제롬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곳에 살면서 생동감 있게 성경을 이해했다. 히브리어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유대인 학자인 바르 아나니아스를 고용하여 낮이고 밤이고 히브리어를 그에게서 배웠다. 연구, 참회, 명상으로 시간을 주로 보내는 제롬은 마침내 성경적 해석의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제롬은 이미 로마에서 라틴어역 신약성경을 개정하고 시편을 개정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는 히브리어에서 구약성경의 대부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런 위대한 일을 촉구했던 주위 사람들과 친구들은 원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에게 고무시켰다. 그는 열왕기로 시작하여 다른 책들을 하나씩 번역하기 시작했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학문적 열정이 아니었다면 그 일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시작된 라틴어역본 성경을 가리켜 ‘불가타’(Vulgate)라고 부른다. 이런 가운데서 제롬은 히브리어 연구에 몰두하며 자신을 유혹하는 불타는 사악한 잡념을 잊으려고 했다.
404년 자신을 열심히 돕던 파울라가 세상을 떠난 후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몇 년 후, 제롬은 고트족의 알라릭이 로마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통해 했다. 그래서 그의 저술활동은 매우 힘들었다. 야만족들이 이집트를 지나 팔레스타인까지 진격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밀려 펠라기안 이단자들이 홍수 때처럼 밀려들었다. 제롬은 이들에 반대하는데 늘 힘을 쏟았다.
얼마 후, 파울라의 딸 유스토치움 마저 유명을 달리했다. 나이가 들은 제롬은 곧 병에 들었다. 2년 동안 병에 시달렸던 그는 일어날 기력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411년 인생의 마지막 장소에서 그는 수도사가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모든 것을 접어두고 하나님에게만 자신을 헌신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노환으로, 가난으로, 그리고 친구들의 사망으로 매우 힘들었던 그는 80세 이상이 되어 420년 9월 30일 평화로운 부르심을 받았다. 13세기 그의 시신은 시스틴 성당으로 옮겨졌다.
저서
제롬의 최고의 걸작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e)를 빼놓을 수 없다. 405년 완성된 불가타는 1546년 로마 카톨릭의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로마 카톨릭 공식 성경으로 제정되었다. 흠정역과 같은 현대 영어판 성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세상을 떠나기 전 15년 동안 제롬은 성경주석들을 썼다. 그리고 그는 구약성경 전체를 다루기보다는 주로 오리겐이 쓴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이사야 등에 관련된 것을 번역하는 것이었고, 신약성경 가운데 빌레몬,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디도서, 마가, 누가, 요한, 그리고 요한 계시록 등에 대해서 썼다.
그리고 여러 서신들을 들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예루살렘의 존을 반대하여 써서 팜마치우스에게 보내는 것(Letters to Pammachius Against John of Jerusalem), 파울라의 딸 유스토치움에게 보내는 서신(Letters to Eustochium), 그리고 힐라리온의 생애(Life of St. Hilarion), 조비안에 반대하여, 펠라기안들에 반대하여, 등등을 볼 수 있다.
특별히 325-378년까지 쓴 「위인들의 생애」(Lives of Illustrious Men)를 통해 제롬은 134명의 위인들에 대한 간략한 생애를 더듬는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야고보, 마태 등부터 시작하여 그가 살았던 당시까지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 연대기를 첨단화했다고 여겨진다.
본문
다음에서 제롬은 성경 읽는 것의 중요성을 기독교인들에게 권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런 성경말씀 가운데 살고, 그들을 묵상하고, 이것들 외에 다른 것들을 알지 말고 추구하지도 말 것을 간절하고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하므로 지상에서라도 하늘의 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단순하다고 하여 공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말씀들은 번역적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또 보다 깊은 의미를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못한 회중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얻을 수도 있으며, 배운 자들이나 배우지 못한 자들이 함께 같은 본문에서도 다른 뜻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늘에 뿌리를 둔 나무들의 열매들을 지상에서 따기를 원하는 것을 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백하기로는 누구든 그렇게 딸 수 있기를 바랍니다(II.xxxix).
다음은 전도서 주석에 관한 말씀입니다.
만일 옛 뱀, 즉 사탄이 비밀적으로 누군가를 물게 되면, 그는 죄의 독에 물리는 것입니다. 만일 물린 사람이 침묵을 지키고 참회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형제들과 스승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고백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스승은 그를 치유할 수 있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픈 사람이 의사에게 자신의 상처에 대해 고하기를 꺼린다고 하면 약은 결코 그에게 투여될 수 없을 것입니다(IV.iv).
평가
로마 카톨릭인들은 그를 칭송하여 성인으로 받들지만 프로테스탄트들은 그의 저서들을 그렇게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애매모호한 사상은 그의 삼위일체의 개념에 있다고 하겠다. 제롬은 신적 본체에 있는 세 히포스타세스(hypostases, 위격)라고 말하는 멜레티안들, 세 위격과 함께 하는 한 히포스타시스라고 말하는 파울리안들과 유사한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또 현대판 ‘교황권 지상주의’(ultramontanism)만 아니라 맹신을 추구하는 제수잇(Jesuit)의 선구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면은 어거스틴과의 서신왕래에서 잘 드러난다.
출처] 제롬|작성자 bennyp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