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중세의 삼위일체

by 갈렙 posted Jun 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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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삼위일체 (12세기-14세기)  삼위일체 논쟁  

2009.06.16. 16:19

복사 http://blog.naver.com/kaistq/150050239537
 


서       론

 

“삼위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의 단일성은 다른 어떤 주제보다 오류를 범할 때 더 위험하고, 탐구하기는 더 고역스럽지만, 어떤 것을 발견할 때는 유익이 더 크다”

 

중세의 페트루수 롬바르두스(1095-1164)가 그의 책 『명제집』 서두에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이것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아퀴나스의 스승인 대 알베르투스(1200-1280) 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삼위일체 인식에 있기 때문에 이 인식의 오류는 신앙과 신학의 모든 목적을 파괴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도 이렇게 말했다. “삼위일체를 아는 것은 전 인생의 열매이고 목적이다. 주님은 우리의 행복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아는 데 있다고 가르치었다. 삼위일체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아버지에게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영생은 이것이니 참되신 하나님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이처럼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전 생애를 걸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데  전 지성을 총 동원하여 열정적으로 탐구하였다. 여기서는 12세기에서 14세기 초까지 전개되었던 삼위일체 신학사상을 고찰 하는데 먼저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과 위격의 복수성 가운데 어느 것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을 말하고 그 다음에는 스콜라 신학자들이 본질과 위격들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보고 안셀무스와 아퀴나스의 신학방법론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필리오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Ⅰ.초기 스콜라 신학에 있어서 신적 본질의 단일성에 대한 강조

 

1. 로슬랭, 안셀무스, 아벨라르두스

아벨라르두스의 스승인 로슬랭(1050-1120)은 삼위가 하나의 실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삼위가 하나의 실재라고 말하면 세 위격 가운데서 아들만이 성육신하셨다는 신앙의 진리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성부 수난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는 삼위가 세 실재이지만 하나의 같은 의지와 하나의 같은 능력을 가졌다고 본다. 로슬랭에 있어서 인간이란 말은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고 이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각각 한 개인 곧 김씨 이씨 등 한 개인이 존재할 뿐이란 것이다.

안셀무스(1033-1109)는 로슬랭을 유명론자로 보고 비판하기를 “그는 세 신이 있다고 여기거나 자신이 하는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로슬랭의 문제점은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봤다. “여러 사람이 종(species)에 있어서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 매우 비밀스럽고 지고한 본성에서 각 위격이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또 여러 위격이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하겠는가?” 보편적인 실체가 단지 추상적인 단어로 그치는 자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는 공통적인 것(본질)과 구분되는 것(세 위격)사이의 구분을 통해 대답한다. “세 위격은 단 하나의 실재이다. 만약 우리가 세 개의 실재라고 말하기를 원한다면 실재라는 단어의 의미를 실체가 아니라 관계라고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안셀무스의 비판으로 로슬랭은 스와송 공의회(1092)에서 정죄된다.

 

아벨라루두스(1079-1142)의 삼위일체는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로슬랭 의 삼신론을 반박하면서 세 위격을 하나님의 세가지 속성 곧 능력, 지혜, 선하심으로 보았다. 하나님을 최고선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능력, 지혜, 선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였다. 곧 하나님의 본질은 능력, 지혜, 선하심이다. 그러면 이 본질에서 어떻게 위격을 구분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언어의 문법적인 구조에 호소함으로 대답한다. “단어들은그 자체로서는 정확히 동일한 가치를 가지거나 혹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등가적이다. 그러나 그 단어들이 하나의 구조 안에 들어간다면 이 가치들은 보존되지 않는다.” 곧 하나님의 본질이 능력, 지혜, 선하심인데 이것을 어느 위격에 고정시키면 본질의 의미를 잃어 버린다는 뜻이다. 곧 셋이 하나로 있을 때 만이 하나님의 본질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1121년 스와송 지역 공의회와 1140년 상스 공의회에서 사벨리우스주의자로 정죄받는다.

또한 그의 두 번째 특징은 삼위일체 신앙을 우리의 자연이성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벨라루두스는 『최고선에 관한 신학』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능력, 지혜, 선하심이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신앙이 그 누구에게도 결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스콜라 신학에서 유명한 문제였던 삼위일체가 자연이성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선두주자를 발견한다. 그는  여러가지 점에서 스콜라 신학의 문제제기에 토대를 놓았다. 삼위일체에서 논리학을 사용한 것,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위격 속성을 연관시켜서 생각한 것, 삼위일체를 최고 선 개념으로부터 생각 한 것, 하나님 안에서 수(數)의 의미에 관한 숙고의 밑그림을 그린 것, 자연 이성에 의한 삼위일체 인식문제 특히 그가 특정 속성을 한 위격에 부여하는 것 즉 appropriation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2. 질베르 드 라 뽀레(1070-1154)

 

12세기 신학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그는 샤르트르 학원의 총장과 파리대학의 교수를 역임한 후 쁘와띠에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보에티우스를 주석하면서 어떻게 삼위가 하나님의 단일성과 화해될 수 있는지 고심했다. 그가 많이 비판 받았던 두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문제는 그가 보에티우스로부터 자연적인 사물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주체와 그것에 의해 어떤 것이 그것이 되는 것, 즉 본질을 구분하는 것-예컨대, 한 개별 인간과 인간성의 구분-을 빌어서 하나님 안에 비슷한 구분, 즉 신과 신성을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을 통해 하나님 안에 어떤 실제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인식의 차원과 존재의 차원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을 분열시켰다고 비난 받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본질 사이에 차이를 설정했고 하나님의 위격과 속성이 다르다는 주장을 펼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에 대해 교황은 그를 정죄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교황은 신학 안에서 어떤 개념도 본성과 위격을 분리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단지 탈격의 의미로만 하나님의 본질로서 말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주격으로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한다” 하나님의 단순성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본질 사이의 절대적인 동일성, 위격과 본질의 동일성, 위격과 이 위격과 관련한 속성의 동일성은 이때부터 모든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부과되었다. 곧 홍길동과 홍길동의 캐릭터는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삼위일체와 하나님 단일성을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된다. 그는 각 위격과 절대적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세 위격이 하나님의 본질과 대립되지 않고 외부로부터 덧붙여진 관계에 의해 서로 구분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외부로부터’라는 단어로 관계는 본질의 차원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에 손상을 끼치지 않는 위격들의 구분의 차원과 관련됨을 의미하려고 했다. “실체는 단일성을 유지한다. 관계는 삼위일체 안에서 다수의 요소를 도입한다” 곧 그의 말은 세 위격이 실체로는 하나를 유지하지하며 본질안에는 어떤 관계도 없지만 외부로부터 관계가 덧붙여지면 삼위일체 안에서 구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관계는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덧붙여진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안에 구분을 도입한 것으로 비난 받는다.

 

 

3.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와 피오레의 요아킴(1132-1202)

 

페트루스는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의 최고의 실재”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신적 본질을 낳으셨다” 혹은 “신적 본질이 아들을 낳았다” 와 같은 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본질(essential) , 혹은 하나님의 실체(substantia)는 삼위 하나님의 실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페트루스는 이 본질에 관하여 그것이 낳는다, 그것이 출생한다, 그것이 발출한다와 같이 말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출생과 발출의 주체가 되는 것은 본질이나 실체가 아니라 위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페트루스의 말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성립되지만 “아버지가 신적 본질을 낳았다”거나 “신적 본질이 아들을 낳았다”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적 본질은 본질 그 자체이기에 무엇을 낳았다 할 수 없고 발출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요아킴은 페투르스의 말을  잘못 이해하여 큰 오해를 불러 일러켰다. 그럼 요아킴은 페트루스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요아킴은 “낳지도 않고, 출생하지도 않고, 발출하지도 않는 최고의 실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아킴의 눈에는 그런 최고의 실재는 낳는 실재, 낳아진 실재, 발출하는 실재, 즉 성부, 성자, 성령과 나란히 네 번째 실재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였다. 요아킴은 페트루스가 사벨리우스주위와 아리오스주의를 종합하여 하나님 안에 제 4위격을 설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제 4차 라테란 공의는 요아킴의 페트루스 해석을 강력하게 배척하고 요아킴이 신적 단일성을 집단적 통일성, 즉 여러 사람이 단 하나의 민족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인식했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 공의회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와 함께 세 위격의 각각은 바로 이 신적 실재이기 때문에 낳지도 않고 출생하지도 않고 발출하지도 않는 유일한 신적 실재를 고백하는 신앙 고백을 선언했다.

19세기 떼오도로 드 레뇽 신부는 삼위일체론을 연구하면서 그리스 개념은 삼위일체를 위격에 대한 고려로부터 출발하고 라틴적 개념은 본질의 단일성 또는 실체의 단일성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았다.  그럼 왜 라틴 신학은 이러한 삼위일체론을 단일성에 근거하여 발전시켰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4.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을 강조하게 된 역사적 배경

 

하나는 중세에 이슬람교와 유대교가 기독교에 대해 가한 비판 즉, 기독교가 삼신론을 주장한다는 비판은 기독교 신학자들로 하여금 ‘삼신론’ 이라는 비판에 맞서 엄격한 유일신론의 틀 안에서 삼위일체 신앙을 제시하도록(세 위격은 세 신이 아니라 단 하나의 신이다) 이끌었다.

두 번째는 기독교 내부에 있었는데 카타르파가 삼위일체의 단일성를 거부했던 사실이다. 12,13세기의 카타르파는 이원론을 통해서 유일신론을 수정했다. 카나르파는 두 가지의 주요한 교리 집단이 있었다. 아들과 성령을 피조물로 여기는 극단적 이원론자들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을 인정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보다, 성령은 아들보다, 열등하다는 식의 종속론적 이해를 주장하는 이원론자들이다. 삼위일체는 예수 탄생과 함께 시작해서 아들과 성령이 종말에 가서는 신적인 단일성 안에 다시 흡수된다는 양태론적 흐름도 있었다.

제 4차 라테란 공의회는 카타르파에 맞서 창조주 하나님의 단일성-“만물의 유일한 원리”-과 삼위의 단일성과 동일본질성_ “세 위격이지만, 단 하나의 본질, 실체 혹은 절대적으로 단순한 본질_을 강조한다.

그러면 그들은 신적 본질과 위격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Ⅱ. 신적 본질(단일성)과 위격들(삼위성)의 관계

 

질베르는 관계는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덧붙여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13세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관계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본질에 속한 것으로 본질 그 자체이다. 이렇게 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퀴나스는 신적 위격을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관계”로 파악했다. 하나님에게 적용된 단어 ‘위격’(persona)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 질문을 persona라는 단어가 실체를 의미하는가, 혹은 관계를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로 이해했다. 토마스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다양한 입장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의 위격을 말할 때, 우리는 아버지의 실체 외에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만으로는 위격은 실체를 의미하지, 고유하게 구분되는 세 위격을 의미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토마스는 위격이 단순히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킨다는 입장을 배격했다. 두 번째 입장은 위격이란 단어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간접적으로는 관계를 의미한다는 주장이었다.

세 번째 주장은 두 번째 주장과 반대로 위격은 일차적으로 관계를, 이차적으로는 본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토마스는 “인간에게 있어서 인격은 한 인간의 개인적인 원리인 ‘이’ 살 ‘이’ 뼈 ‘이’ 영혼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부여하는 persona 또한 하나님의 위격의 구분을 표현해야 한다. 토마스는 여기에 관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인간에게 관계라는 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나와 아들과의 관계는 부자지간의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없어지면 그런 관계도 없어진다. 이런 관계를 우연적 관계라 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곧 관계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초 위에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위격은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관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존속하는 hypostasis인 실체의 방식으로서의 관계를 의미한다. 비록 하나님의 본질 안에 존속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과 다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하나님 안에서 구분되는 위격들로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격은 관계 양식을 통한 관계를 의미하지 않고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관계를 의미한다. 위격은 먼저 관계, 그리고 본질을 의미하지 않고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관계를 의미한다. 관계는 본질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본질 안에 포함된 것으로 곧 본질이 관계가 된다. 이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관계개념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는 신학적 이해의 열쇠였으며 이 개념으로 그는 위격의 복수 성, 그들의 실제적인 타자성, 하나님 안에서의 수의신비, 관계와 위격의 본질과의 일치를 드러낸다. 토마스의 가장 독창적인 공헌중의 하나가 바로 위격을 관계의 용어로 규정한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 신학에서 위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를 묻고 보에티우스의 정의 “ 위격은 이성적 본성을 가진 개별적 실체이다”를 인용한다. 이 정의에서 보에티우스는 강조점을 실체에 두었는데 토마스는 이를 수정하여 관계에 강조점을 두었다. “위격은 이성적 본성을 가진 개별적 관계이다”

 
 
Ⅲ. 삼위일체 인식의 길들

 

 삼위일체의 인식 문제에 대해서 스콜라 신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삼위일체 신앙의 필연적 이유를 추구하는 입장, 신앙의 인식과 이성적 인식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입장, 구분을 넘어서 두 인식을 분리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1. 단일성에서 삼위일체로 : “필연적 이유들”

 

안셀무스의  『모노로기온』에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안셀무스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의 필연적 실존을 확립한다. 이 하나님은 창조해야 하는 모든 만물들의 원형이 되는 만물의 모범 형식을 창조주 이성 안에서 구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이성 안에 있는 말씀이다. 이렇게 해서 안셀무스는 유일한 창조주에 대한 숙고로부터 말씀의 위격을 인식하는데 이른다. 다음 단계로 아버지와 아들 상로간의 사랑을 나타나는 성령에 대한 숙고로 나아간다. 이런 방식으로 안셀무스는 말씀과 사랑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숙고로부터 일종의 필연적인 이유를 제시하면서 삼위일체 신앙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인식하게 된것은 자연이성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신앙 안에서 행해지는 숙고로써  “신앙의 이해에 대한숙고” 혹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보나벤투라는 『명제집주석』(1250)에서 아래에 나오는 신의 속성을 중심으로 위격의 복수성이 나오는 필연적 이유들을 제시한다.

 

1) 지복 ,선, 사랑, 기쁨 _리샤르가 제기했던 주제들

 

이 하나님의 속성들은 다 비슷한 말인데 이 속성들은 필연적으로 위격의 복수성을 상정하도록 이끈다.  하나님은 최고 선이다. 선에 대한 정의는 “선은 스스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누어 주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최고선이라 할 수 없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과 등등한 아들을 낳으면서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는 완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그의 선은 내적인 확산에 있어서 최고의 방식으로 나누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경우 우리는 아버지 보다 더훌륭하고 위대한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안셀무스는 만약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은 최고 선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 전체를 쏟아 붓지 않기 때문이다”

 

2) 완전성

 

최고의 완전성은 같은  본질의 존재를 ‘산출’하는데 있다. 이 증식은 하나님 안의 본질적 차이에 따러서는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적 본질은 필연적으로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증식은 동일본질인 위격들의 차이로 일어난다.

 

3) 수위성 (Primitas)

 

수위성은 최초의 실재가 다른 실재들의 원천이 됨을 의미한다. 보나벤투라에 따르면 성부의 태어나지 않으심(기원이 없으심)이 바로 이 원천의 충만성을 지칭한다. 첫번째 위격이신 성부가 바로 이 수위성을 소유하시는데, 그는 다른 위격으로 나오지 않으시고, 다른 위격들이 그로부터 출생하시고 발출하신다. 그러므로 최고 원리로서의 수위성은 삼위일체를 내포한다.  보나벤투라는 철학자들이 자연 이성의 힘만으로 삼위일체를 인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기독교인들에게 삼위일체를 긍정하는 것이 하나의 모순으로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가 말하는 단일성으로부터 삼위일체를 발견하고 확립한 지성은 “신앙에 의해 고양된 지성”이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한가지 중요한 사항은 보나벤투라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던 것처럼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확연하게 구별하지 않느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나벤투라의 접근법은 신비 체험 안에서의 이성적 인식이라 특징지어지기도 한다.  앙리는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를 알게 한 후에는 이성적 논증들을 통하여 그 필연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했다.  앙리는 아주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끌어낸다. 삼위가 없이 한 분인 하나님의 본질적인 지성과 의지만 존재했다면 하나님은 지혜와 자유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부의 지식의 현현, 표현으로 이해된 말씀의 위격은 창조행위를 파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생산적 사랑의 도약의 열매로 이해된 성령의 위격은 신적 의지의 창조적 활동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다. 아들과 성령의 발생은 창조적 활동성에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2. 삼위일체와 단일성: 신앙의 인식과 이성의 인식의 구분

 

토마스 신적 본질(단일성)은 자연이성에 이해 인식될 수 있는 반면, 삼위의 구별은 신앙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철학적 방법으로 하나님은 피조물의 제일 원리이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존재들은 그것을 존재케 한 바로 위 존재들이 있다. 그 위 존재들은 그것을 존재케 한 위 위 존재들이 있다. 이런식으로 계속 올라가면 한없이 올라갈 수 없음으로 제일 존재 곧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계시는데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다. 토마스는 이처럼 철학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것은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그것은 신앙의 인식에 속한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 속에 실체 혹은 위격들의 복수성이 있다는 것을 그것에 대한 논리적인 증명 때문에 아니라, 그것이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에 긍정해야 한다.”

 

3. 삼위일체와 단일성 : 두 가지 인식의 분리

 

삼위일체 인식에 관한 세 번째 입장은 생 뿌르쌔쌩 디랑(+1334)에게서 대표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뒤랑은 인식의 두 가지 길, 즉 학문의 길과 귄위를 따르는 인식의 길을 분리한다. 그는 신앙과 신학을 후자에 해당하지 학문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하나의 신앙조항은 정확히 비증명성과 비학문성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며 토마스의 신학적 인식론을 거부한다. 그는 삼위일체를 논박하는 주장에 대해 삼위일체 신앙이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곧 삼위일체와 단일성에 관한 것은 이성에 속한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것이라는 뜻이다.이렇게 뒤랑은 14세기에 일어난 신앙의 인식과 이성적 인식 사이의 깊은 단절과 신앙의 고립화를 보여준다.

 

Ⅳ.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방법

 

1.안셀무스의 신학 방법

 

안셀무스의 신학 방법은 흔히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일컬어진다.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고,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즉 믿음으로 받아들인 소여로부터 출발하여, 이 소여를 이성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2.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방법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신론을 다룰 때 어떤 구분을 사용했는가를 자신의 말로 이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 고찰은 세 부분을 포함할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들을, 둘째로 위격들의 구분에 속하는 것들을, 셋째로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들이 발출하는 것에 속한 것들을 고찰할 것이다.”   곧 그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거기서 파생되는 삼위를 다룬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질을 다루면서 신 존재 증명을 다루는 부분이 있다. 그는 거기서 신 존재 증명의 다섯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만물의 모든 존재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최고의 원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그가 신을 증명하는 이 부분은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철학적이고 이성적이다. 토마스 자신도 하나님의 본질은 철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삼위는 신앙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긴 해도 이 논증에서 토마스의 의도는 철학자들의 하나님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앙의 대상인 성서의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토마스 자신이 신학대전 전체가 계시의 관점에서 기획된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Ⅴ. Filioque (그리고 아들로부터) 문제에대한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1. 안셀무스

 

안셀무스는 1100년 캔터베리에서 『성령의 발출에 관하여』를 완성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령은 성부와 동시에 성자로부터 발출한다’고 한다. 그는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본질의 동일성과 신성의 동등성이라는 틀 안에서 본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성령이 나오거나 아들에게서 성령이 발출한다고 말하지 않고 성부의 신성으로부터 성령이 나온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성자에게도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있기에 성자의 신성으로부터도 성령이 발출한다. 그는 그리스 교부들이 사용한 표현인 ‘아들을 통해 아버지로부터’라는 이 정식화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그리스 교부들에게서 발견되는 강을 통해 호수를 만들어 내는 샘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주석한다. 호수는 강으로부터 나온다. 이렇게 성령도 성자로부터 나온다. 만약에 어떤 그리스 주교가 호수가 엄밀하게 말해서 강이 아니라, 샘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면 안셀무스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질의 차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성자에 대해 성부와 다르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자는 성부 안에 있고 본질에 있어서 성부와 조금도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샘, 강, 호수, 가 셋이라 해도, 이 셋 안에 존재하는 것은 동일한 물, 다시 말해 신적 본질, 신성이다.”

 

2.     토마스 아퀴나스

 

1) Filioque 를 말할 수 있게 하는 성서적 근거

 

첫째, 성령이 성자의 영이라는 속성이다. 소유격 ‘의’ 가 붙은 것은 그 영이 아들에게서 나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이 아들의 영이기에 이는 신성과 관련됨을 보여준다.

두 번째, 아들을 통한 성령의 보내지심을 고찰하면서 영원한 발출과 시간상의 발출을 구별한다. 아들에 의해 보내진 성령은 영원히 그로부터 발출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이 아들에 의해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가 영원히 성자로부터 발출하기 때문이다. “정교회 신학은 영원한 삼위일체의 교리에 있어서 구원의 경륜에 동일한 자리를 부여하진 않는다.”

세 번째는 요16:14을 이렇게 해석한다.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출한다는 것은 성서에서 문자적으로는 발견되지 않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발견된다. 특별히 성자가 성령에 대해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니 이는 그가 나의 것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그러하다”

 

2) 교부와 공의회의 자료

 

그는 라틴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힐레르를 인용하고 그리스 교부 키릴루스와 위-아타나시오스 신조, 맹인 디디무스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는 성령이 성자로부터 시간적으로 보내지심뿐만 아니라 영원한 기원을 가진다는 주장은 라틴교부뿐 아니라 동방교부들에게도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에베소 공의회 회의록의 번역 분문에 따라 이를 인용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 불린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로부터도 나온다”

 

3)신학적 이유

 

토마스는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과정에서 필리오케를 이끌어 들인 것은 이단들에 맞서서 신앙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리오스 주의와 관련된 것이다. 성령이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되었다고 고백함으로써 성자가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성자와 성령이 창조물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양자론에 대한 대응이 필리오케를 주장하게 한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없던 표현인 필리오케를 첨가한 문제를 토마스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암묵적인 것의 명시화’는 그가 이 문제에 답변하는 열쇠다. 다시 말해 라틴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명시화했다는 것이다. “이후의 공의회는 이전 공의회에 의해 확립된 신조를 해석할 권한을 가진다”는 명제에 의지하여 니케아 신조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해석을 하였다. 이제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시대에 맞게 명시화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필리오케이다. 그러한 첨가를 결정할 능력이 있는 권위는 교황이다. 그러므로 교황에 의해 이것은 확정할 수 있다.

성령의 발출은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적 구별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격적 행위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발출의 주체들을 생각한다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그들이 구별된다는 점에서 발출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들로부터 그들을 연합시키는 사랑의 방식으로 발출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 발출한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그와 함께 성령을 발출한다”. 달리 말하면 이 정식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질서를 분명히 해준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아들의 기원관계에 있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발출시킴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성령을 발출시킨다고 하거나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 발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정식화는 성령의 발출이 전적으로 위격적이라는 특징을 부각시킨다. 그것들은 위격적 행위의 차원에서 아버지에게만 귀속되는 귄위를 표현한다. 말하자면 삼위일체 안에서 기원을 갖지 않는 기원이요, 원천으로서의 아버지의 특별한 위상을 표현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발출시키면서 섞여 혼합되어지지 않고 구별된다. 안셀무스는 성령의 발출이 신성의 본질로부터 나왔다고 하는데 토마스는 위격에 귀속시킨다는 점이 다르며 또한 그는 그리스 전통을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     론

 

스콜라 신학자들이 씨름했던 문제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제기하는 문제 즉 어떻게 하나님이 세 위격이시면서 동시에 한 하나님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을 인식하기에는 마치 태양을 보는 올빼미의 눈과 같이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았지만 분수에 맞지 않게 신을 알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라는 고대의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556-468BC)와 같은 사람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최고의 실재에 대한 아주 약간의 인식도 아무리 그 것이 작고 희미할지라도 최고의 기쁨을 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록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무리 적다 하더라도, 열등한 대상에 대한 수 많은 인식 보다는 이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 사유할 때 두 가지 오류를 피해야 한다. 첫째 오류는 하나님 안에서 단일성과 위격을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는 것이다. 둘째 오류는 첫째와 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위격과 분리하여 마치 제4의 어떤 것으로 만들어, 공동의 본질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출처] 중세의 삼위일체 (12세기-14세기)|작성자 kais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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