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서방교부들의 삼위일체

by 갈렙 posted Jun 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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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교부들의 삼위일체  삼위일체 논쟁  

2009.06.09. 11:50

복사 http://blog.naver.com/kaistq/150048957797

 
 


서          론

 

4세기 삼위일체 논쟁에서 서방교회는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고 아타나시오스를 비롯한 동방교회의 니케아파를 지지하며, 결국 니케아 신앙을 동서교회의 공동의 신앙고백으로 확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는 테르툴리아누스와 노바티누스가 기초를 세우고 힐라리우스와 빅토리누스, 암브로시우스가 발전시키고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은 서방교회 삼위일체론의 규범이 되어 오늘날 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힐라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신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A.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295-367)

 

1. 그의 생애

그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푸아티에서 이방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쾌락적인 삶에 대한 혐오와 철학자들의 모순을 느끼고 성서를 통하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350년경 푸아티에의 주교가 되었으며  356년 베지르스 교회회의에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난다. 355년 열린 밀라노 교회회의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굴복하여 주교들이 아타나시오스를 정죄하자 이를 맹렬히 반대하다 프리기아로 유배당했다. 그는 356-360년까지 유배생활을 했으며,유배중 오리게네스의 저작을 접했으며  동방 교회의 유사본질파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게돤다. 그는 유배중 동방교회의 셀레우키아 교회회에 참석하여 유사파 신조를 거부하도록 했다. 361년 파리 교회회의를 주도하여 사벨리오스 주의를 거부하고 니케아 신앙의 고수를 선언 했지만 동일본질과 함께 유사본질론도 받아들었다.

유사본질파는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며"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에서 비슷하다는 파이며 유사파는 본질로부터를 빼고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본질에서 비슷하다는 파이다.

 

2. 그의 삼위일체

 

1)삼위일체의 방법론

 

힐라리우스는 동방의 아타나시우스의 전통과 연결되는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힐라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은 유배 이전과 이후에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유배 이전에는 테르툴리아누스와 노바티아누스의 연장선상에서 삼위일체론을 펼쳤지만 유배이후에 쓴 "삼위일체론"에서 아들의 출생과 나뉠 수 없는 신성의 일치,

삼위일체론의 구원론적 특징을 강조하여 아타나시오스의 영향을 보여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를 받아들였으며, 영원한 출생과 상호 내주를 토대로 삼위의 하나됨을 주장했다. 서방 주교들이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여 동일본질을 제외한 어떤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때, 그는 유배생활중 유사본질파의 신앙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의 저서"교회회의"를 통해 341-357년 까지의 시르미움 신학 선언을 제외한 동방의 모든 신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유사본질론과 동일본질론이 긍극적으로 같은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동일본질이 사벨리오스 주의로 오인될 수 있으며 아리오스 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사본질론도 받아들여야한다고 했다.

그는 먼저 부정신학적 입장을 강조한다. 철학적 신 인식은 하나님의 존재,유일성, 전능성,영원성을 확신한다고 하지만 이런 자연적인 이성은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아는데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아리오스 주의를 반대했다.

그는 계시신학을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수 있다. "그 분을 알때 아버지를 안다. 그 분을 볼 때 아버지를 본다. 그 분이 말씀하실 때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머물러 말씀하신다. 그 분이 일하실 때 아버지 자신이 일하신다. 그 분 자신이 아버지안에 있고 아버지께서그 분안에 있다." 그는 또한 성서를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에서 성서구절을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삼위일체를 전개한다. 그는 삼위일체를 전개하는 데 동방교부들처럼 철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서와 전통에 기초하여 시도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는 동방교부들에게는 시도되지 않았던 방법으로 후에 서방교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2)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과 하나됨

 

신6:4,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라"를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 여겼다. 그는  한 하나님에 대해  '만물이 나온 하나님'과 '만물이 말미암아 나온 하나님'을 구분한다. 만물이 나온 하나님이란  만물의 창조주를 말하며 나시지 않고 영원하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아버지를 말한다. 그분의 존재는 자신에게 있으며 다른 것으로 받지 않고 자신 안에 지닌다. '만물이 말미암아 나온 하나님'이란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왔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들을 가리킨다. 아버지란 이미 아들을 전제하고 있다. 아버지를 고백한다는 것은 아들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아버지를 믿는 다는 것은 곧 아들을 믿는다는 것과 같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 두분은 초월적으로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귐 속에 있고 그 사귐은 인격의 합일이 아니라 본질의 하나됨으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힐라리우스는 철저하게 합일(unio)과 하나됨(unitatis)를 구분했다. 합일은 인격의 단일성을 뜻하며 사벨리우스처럼 하나님 안에서 복수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적인 구별은 남아 있지만 본질의 하나라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이 같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동일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란 책에서 이 동일본질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사벨리오스주의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이 하나이기 때문에 두 신이라 말할 수 없다. 아버지는 "나시지 않은 하나님" 아들은 "홀로 나신 하나님"이다. 아들은 무로부터나 질료로부터 나시지 않고 아버지의 본성에서 나셨으며 아들은 무시간적으로 영원히 나셨기 때문에 그분이 없었던 때가 없다. 아버지는 아들을 나았기 때문에 '홀로 있는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지 한 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에서 하나이지만 인격에서는 구별된다. 아들은 아버지만 제외하고 아버지의 모든 것이다. 골2:9에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아들은 아버지 안에 상호내주하셔서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행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 힐라리우스는 본성과 인격을 구분하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과 차이를 나태내는데 충분하다고 한다. 하나님,본성, 실체,본질,등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이다. 그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적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위격(hypostasis)이란 그리스어 단어를 실체와 연결시키지 않고 인격과 연결시켜서 본성과 달리 인격은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3) 성령론

그는 성령의기원에 대해 상세히 말하지 않지만 성령을 피조물이라는 자들에게 성령은 하나님께 속하며 이는 하나님이 본성과 다른 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은 본성상 하나님과 같으며  성령은 아들처럼 나시지 않아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통해 나온다고 했다. 성령은 세례때의 신앙고백으로 표현되는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근원이 되는분, 홀로 나신분, 은사에 대한 고백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이다.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아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졌으며 성령은 만물안에 있는 선물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는 '영원의 무한함, 형상의 현시, 은사의유익'이 있다고 했으며 이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서 인용되었다. 그는 성령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이해했다. 성령을 인격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본성의힘, 혹은 권능,본성의 실재라고 이해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지만 두 분의 공유하는 신성의 힘과 본성은 성령의 은사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이지만 또한 똑같이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분은 아들의 본성의 실재요, 똑같이 아버지의 본성의 실재이다"

 

 

B. 아우구스티누스(354-430)

 

1. 그의 생애

  그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불신자 아버지와 독실한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독학으로 수사학을 공부했다. 청년시절 타락한 생할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때 키케로의 “호로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눈을 뜬다. 그는 수사학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로마에서 유명한 수사학자가 된다. 그는 참 지혜를 구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나 성서의 소박한 문체와 카톨릭의 보수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빠지게 된다. 9년 동안 마니교에 있다가 회의를 느낀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된다.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388년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 수도원 생활을 하던 중 히포의 주교 발레리우스의 권고로 사제가 된다. 발레리우스가 396년 죽자 히포의 주교가 된다. 히포가 반달족에게 함락당하기 1년전 76세로 사망하게 된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기초를 세우고 힐라리우스가 발전시킨 삼위일체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종합되어 완성된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의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으며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이 책을 힘겨운 작업이라 불렀으며 12년 정도 오랜 기간에 걸쳐 420년경 완성했다.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세 가지로 요악될 수 있다. 첫째,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하나님인데, 세 신이라 말하지 않고 한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역은 나뉠 수 없는데, 어떻게 성육신은 아들의 고유한 사역이고, 변화산에서의 음성은 아버지에게 해당하고, 오순절 강림은 성령에 해당하는지, 셋째 성령의 고유성은 무엇이며 출생과 발출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는 이것을 서술하고자 삼위일체를 세 방면으로 전개해 나간다. 하나는 성서적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서술하고 둘째는 철학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마지막으로 심리적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서술하고 있다.

그가 『삼위일체론』을 쓰게 된 이유는 “더 깊이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것이며”, “믿는 바를 지성으로 보려고 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약함을 고치시고 길을 열어주시면 당신을 더욱더 만나리라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삼위일체론』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에 대한 사랑, 힘을 다한 지적 탐구, 위대한 겸손이 잘 표현되어있다.

 

2. 그의 삼위일체

 

1) 성서와 삼위일체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삼위일체론』은 논쟁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고 전통적인 보편교회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삼위일체를 펼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나뉠 수 없는 동등함으로 하나의 똑같은 실체의 신적인 유일성을 보여주며 따라서 세 신이 아니라 한 신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삼위일체 신앙이 성서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첫번째 신학적 관심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하나님인데, 세 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한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그는 이문제를 성서의 토대 위에서 해설한다. 그는 성부를 출발점으로 삼는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신적인 본성 자체로써 시작한다. 이 단순하고 변치 않는 본성이야말로 삼위일체이다. 딤전6:16과 롬11:33-36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은 단순히 어느 한 위격이 아니라 본성의 하나님 곧 삼위일체다. 본성이 세 인격을 구성하기에 처음부터 종속설이 설 자리가 없고 성부가 신성에서 성자보다 클 수 없고 성부와 성자가 합해도 성령보다 클 수 없고 어느 한 인격도 삼위일체보다 작지 않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성서 구절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결합되어 ‘하나님이 여자로부터 태어 나셨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는 표현이 가능하며 신학적으로 정당하다고 하였다. 본성의 하나됨을 강조하는데서부터 몇가지 당연한 결과가 도출된다.

첫째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유에 속한 세 인간적 존재들과 같은 방식으로 별개의 세 개체들이 아니다.(김씨,이씨, 박씨) 오히려 각 개의 신적인 인격들은 실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인격들과 동일거나 혹은 신적인 실체 자체와 같다. 인격들이 따로따로 내주하거나 혹은 상호간에 성품을 함께 타고났다고 말할 수 있다.(성부 안에 성자, 성령이 내주하거나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내주)

둘째로 신적인 본성 그 자체에 속한 것은 무엇이거나 엄격히 말해서 그 본성이 유일하므로 단수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는 아타나시오스의 주장처럼 각 개의 인격들은 무한하고 전능하며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성부를 무한자, 성자를 전능자, 성령을 영원자라 할 수 없다.

셋째로 삼위일체는 분할할 수 없는 단일한 행동과 단일한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 ‘본성들의 차이가 없으므로 의지의 차이도 없다’.

넷째로 그는 자신의 이론이 시사하는 분명한 곤란점에 직면하게 된다. 즉 그의 이론은 세 인격의 몇 가지 역할을 말살하는 듯이 보인다. 그의 대답은 이러하다.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어 태어나서 고난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나, 성부는 성육신과 수난과 부활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성자와 협력하셨음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각 개 인격들이 특수한 방식으로 신적인 본성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신성의 외적 작용에 있어서 각 개 인격들에다가 그 기원의 덕분으로 그 인격에 특유한 역할을 귀속시키는 것이 적절하다. 이것은 서방의 신학자들이 특유화라고 묘사한 것의 경우이다.

 

2) 관계의 개념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이 없고 더할 나이 없이 좋으시며 모자람도 흠도 없으시며 모든 것을 다 갖추신다고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을 나타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속성과 삼위의 상호관계를 엄격히 갈라놓았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다른 인격과 연결시켜 말하는 것,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과 관계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며 한편은 아버지요, 한편은 아들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를 가지고 있어야 아들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인격들의 신적인 본질로 고찰해 볼 때 동일하지만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므로 아버지로서 구별되시고 성자는 태어나시므로 아들로서 구별되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부여'되시므로 구별된다. 그래도 삼위가 사실상 무엇이냐는 질문이 생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가 전통적으로 인격들(Persons)이라 지칭되어 왔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용어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 용어가 그에게는 별개의 개체들을 시사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그 용어를 인정했다면 이는 양태론에 반대하여 삼위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 비평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범주도식에 근거를 두고서 본성을 실체의 범주에 둔다면 삼위가 독립적 실체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곧 삼신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는 신성 안에서 신성이 일으키고 있는 낳음, 태어남, 발출이라는 요인들과 똑같이 실지적이고 영원한 관계라고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 개 인격이 무엇이든지 간에 각기 한 분이나 혹은 다른 두 분에 대해 관계되어 있다는 뜻에서 관계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면 이 둘사이에 관계를 설정한다. 곧 두 인격이 있고 그 사이에 관계를 정립할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면 관계가 있음으로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관계가 곧 인격이다. 그 관계가 실지의 존립체를 가지고 있다는 관념이 이상스럽게 들리지만 그는 이것으로 신격의 통일성과 복수성을 동시에 주장할 수 있었다.

 

3) 성령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발현이 무언인지 혹은 그것이 어떤 점에서 성자의 출생과 다른지를 설명하려면 언제나 당황하였다. 그러나 확실히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상호적인 사랑이요 양자를 연합시키는 공동실체적 결속(bond)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시종일관된 그의 가르침은 성령이 다같이 양자의 영이시라는 것이었다."성령은 양자 중 한 분의영이 아니라 양자 모두의 영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 대해 관계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단일원리를 형성한다. 그는 어느 서방 교부들보다 더 명백하게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현한다는 이중발현에 대한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성자와 성령이 모두 성부로부터 파생되시므로 두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반론에 대답하면서 "성자도 성부로부터 나시고 성령도 성부로부터 나신다. 그러나 성자는 태어나시고 성령은 발현하신다. 그러니까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시고 성부로부터 태어나시지만, 성령은 양자로부터 발현하시어서 양자의 영이시다. 성부는 성령발현의 창시자이시다. 그 까닭은 성부가 아들을 낳으셨고 그 아들을 낳으실 적에 성부는 성자를 성령이 발현하시는 근원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라고 진술하였다. 요점은 이것이다. 즉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실 것을 모두 주셨기 때문에 성령을 부여하는 능력을 성자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바는 그러니까 성령이 두가지 근원이나 원리를 가지셨다고 추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창조에 있어서 세 인격 모두의 행위가 공동적이듯이 성령을 부여하시는 데 있어서도 성부와 성자의 행위는 공동적이다. 더구나 이중발현에도 불구하고, 성자가 성령을 부여할 자신의역량을 성부로부터 도출해 내시므로 성부는 원초적인 근원으로 남아계신다.

그리고 성령을 두 분의 선물이라고 부른다. 곧 성부는 성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성자도 성부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므로 두 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제를 나누고 연합한다. 성령은 두 분을 하나로 만드는 끈과 같다. 또한 성령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로 하나로 만들게 한다. 성부와 성자가 성령으로 말리암아 하나가 된것 같이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또한 이 성령은 삼위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시는 끈이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공유된 그것을 통해 그분들은 우리들 서로간의 친교, 그분들과 우리와의 친교를 세우시기를 원하셨다. 둘을 하나로 만드는 그 선물을 통해 그 분들은 우리를 하나 됨으로 이끌기 원하셨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선물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며, 그 분을 통해 기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성령은

선물(donum)로 나타내고 신자와 교회와 관련된 경륜적인

의미의 성령은 주어진 것(donatum)이라고 말한다.

 

4) 심리적 삼위일체

 

우리는 이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신학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으로 공헌한 것을 다루게 되었다. 즉 그가 인간 영혼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유비를 사용한 것을 다루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삼위가 절대적으로 하나이시면서도 삼위로 구별된다는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삼위의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만물안에는 희미하게나마 삼위일체의 자취가 남아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참다운 형상을 찾으려면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 사람을 우리의 (즉 삼위)형상과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은 육체의 형상이 아니라 이성적인 혼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고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에게 참여하고 하나님을 관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여 영혼의 불멸성에 영원히 박혀있다.

겉 사람일지라도 삼위일체에 대한 일종의 유사성을 제공해준다. 첫째 요소는 어떤 의미에서 둘째요소를 낳고 세째요소는 이 둘을 결합시킨다. 즉 외부적 객관과 그 객관에 대한 정신의 감각적 표상과 그 정신을 초점으로 삼는 행위 즉 의도가 그것이다. 여기에 그림이 있다. 정신이 그것을 인식하고 감각적으로 좋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지갑을 열어 그림을 산다. 여기서 외부적 객관을 제거하면(곧 그림을 제거하면) 우리는 제2의 삼위일체를 가지게 된다. 기억과 그기억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의지의 설정으로 한층 더 우월한 삼위일체를 가진다. "따라서 기억과 이해와 의지, 이 셋은 세 생명이 아니며 한 생명이며, 세 정신이 아니라 한 정신이므로 필연적으로 세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이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적인 신성의 참다운 형상을 찾으려면 속사람 즉 영혼을 보아야한다. 속 사람중에서도 인간의 이성적 본성인 정신을 보아야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가장 높은 그리고 매우 하나님다운 부분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의 말을 시발점으로 사랑이라는 관념을 삼위일체의 유비로 삼는다. 사랑하는자(amans), 사랑받는 대상(quod amatur), 과 그 양자를 연합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랑(amor)으로 분석함으로 드러난다. 그는 존재, 지식,의지의 삼위성을 숙고하면서 이러한 자기정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세 가지 연속적 단계로 상승하여 결국 하나님을 향한 정신활동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a) 정신과 자신에 대한 정신의 지식과 자신에 대한 정신의 사랑 (b) 기억 혹은 더 적절한 표현으로는 자신에 대한 정신의 잠재적 지식과 오성 즉 영원한 이성의 빛에 비추어 본 오성의 자기파악과 의지 혹은 자신에 대한 사랑 (c) 하나님 자신을 기억하고 깨닫고 사랑하는 정신으로서의 삼위일체이다. 그는 정신이 기억하고 깨닫고 사랑하는 모든 능력으로써 그것의 창조주를 향해 초점을 맞출때에만 그 정신이 창조주에 대해 지니고 있는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될 수 있다고 추리했다. 그러나 이런 유비들도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커다란 제한이 있다. 첫째로 인간 정신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어느 경우에나 멀고 불완전하다.'과연 닮은 모습이지만 멀고 먼 형상이다. 성자 안에 나타난 형상과 거울 속에 나타난 형상은 전혀 다르다.' 둘째로 인간의 이성적 본성이 위에 언급한 삼위일체들을 보여주지만 신성의 삼위일체가 존재하는 방식이 인간의 존재방식과 전혀 다르다. 신적인 본성은 완전히 단순하다. 세째로 이것에서 나온 논리적 결론으로는 기억과 오성과 의지가 제각기 작용하지만, 세 인격은 상호적으로 성품을 공동으로 타고난 것이고 인격들이 행동으로 하나의 나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성에 있어서는 삼위일체의 세 지체들은 인격들이지만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는 한 인격이다. "인간의 정신에 나나탄 삼위일체 형상은 한 인격이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 그 자체는 세 인격이다" 그렇지만 인간 정신속에있는 삼위일체보다는 성삼위가 더 불가분리적으로 하나임을 성찰할 때 그것은 하나의 파라독스이다. 그러나 이같은 파라독스가 우리가 지상에 있을 동안에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거울 속에서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나중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볼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결   론

 

카파도기아 교부로 대표되는 동방의 삼위일체론과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서방의 삼위일체론은 공동의 신앙 유산에서 발전되었지만 ,일정한 차이를 보여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성령의 이중발출 문제는 중세를 거치면서 동,서방교회의 신학적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출처] 서방 교부들의 삼위일체|작성자 kais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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