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생생한 성지 이야기6_신들이 도시 버가모

by 갈렙 posted Sep 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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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성지 이야기 6] 신들의 도시, 버가모

▲페르가몬의 위치.

1. 페르가몬의 역사

 

우리에게 소아시아 7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로 익숙한 페르가몬(Pergamon)은 아주 오래된 도시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인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의하면, 그 기원은 트로이 전쟁이 있던 기원전 13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그리스 미케네 왕국과 트로이와의 전쟁은 10년간 지속되었고, 나중에 그리스 군사들의 ‘트로이 목마’ 전술로 최후 승리를 거둡니다(트로이 유적도 페르가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Akilleus)와의 대결에서 운명을 달리한, 위대한 트로이 왕국의 왕자이자 전사였습니다. 그러데 이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 군은 헥토르의 부인인 안드로마케(Andromache)를 전리품으로 끌고 가, 전사한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Neoptolemos)와 결혼시킵니다. 이 둘 사이에서 3명의 아들이 태어나게 되는데, 그 중 한 명 이름이 페르가모스(Pergamos)라는, ‘페르가몬’을 건설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베르가마(Bergama)라 불리는 페르가몬은, 로마 제국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가자마자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크로폴리스인데, 390m 높이의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 중에 요절하면서, 그의 제국은 사분오열되며 디아도키(Diadochi)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그의 수하 장군이던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페르가몬이 천연 요새임을 깨닫고 그 꼭대기에 성을 쌓는 등 이곳을 군사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리시마쿠스는 BC 281년, 코로페다움 전투에서 수하인 필레타리우스(Philetarius)의 배신으로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고, 이후 필레타리우스에 의해 페르가몬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페르가몬은 아나톨리아 지역이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되기 전에는, 소아시아 7교회 중 에베소·서머나를 제외한 5개 교회가 있던 지역을 포함한, 터키 아나톨리아 서부 중 상당 부분을 관할했던 왕국이었습니다.

이렇게 발흥한 페르가몬은 유메네스 1세, 유메네스 2세, 앗탈로스 2세를 거쳐, 기원전 133년 왕국의 마지막 왕인 앗탈로스 3세가 죽고 로마에 무혈 양도하며, 150년이라는 짧지만 큰 족적을 후대에 남기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는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르며 거대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2. 페르가몬 왕국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1) 페르가몬 도서관과 세계 최초의 양피지 책 발명

페르가몬은 세계 최초로 ‘양피지’를 발명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양가죽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는 ‘양피지’를 헬라어로 ‘페르가멘트’(Pergament), 라틴어로는 ‘페르가멘툼’(Pergamentum), 영어로는 ‘파르츠먼트‘(Parchment)라고 하는데, 모두 페르가몬(Pergamon)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성경은 이를 ‘가죽 종이’라 하였는데, 현재 유명 가죽 브랜드 중 ‘페라가모’라는 것 역시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도서관 중 가장 유명한 3곳이 있는데, 제일 규모가 컸던 곳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것으로 50만 권의 장서를 자랑했습니다. 그 다음이 페르가몬 도서관으로 당시 20만 권, 마지막이 에베소 셀수스 도서관으로 2만 권 정도 장서를 보유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250년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페르가몬 도서관 사이에 ‘정보 전쟁’이 벌어집니다. 당시는 이집트를 마케도니아 출신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가 ‘파라오’(Pharaoh)가 되어 통치하던 시기였고, 알렉산더 대왕의 충신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더의 뜻을 따라 알렉산드리아를 세계에서 가장 크고 뛰어난 문명 도시이자 학문과 지식의 도시로 만들려는 욕심이 있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B.C. 250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가 알렉산드리아의 전성기인데, 도서관에도 가장 많은 장서를 했던 시기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상상도. ⓒwww.ancientvine.com

그런데 이와 동시에 역시 알렉산더 대왕의 수하 장수였던 리시마쿠스가 세운 왕국인 ‘페르가몬’에서도, 유메네스 2세와 그 뒤를 이은 앗탈로스 2세도 정치보다 학문 연구에 치중해서 ‘페르가몬 도서관’을 만들어서 20만 권 정도나 되는 많은 책을 만들거나 모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페르가몬은 이집트에서 ‘파피루스’(Papyrus, 종이를 만들 때 사용하는 갈대)를 수입해서 책을 만들었었는데, 점점 몸집을 키워오는 페르가몬 도서관에 위기감을 느낀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페르가몬에 파피루스 수출을 전면 중단시켰습니다.

페르가몬의 유메네스 2세는 이집트 나일강 하구에서만 자라는 파피루스를 대체할 수 있는 재료를 개발하라고 신하들에게 지시, 얼마 후 양이나 송아지 가죽을 가공해 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양피지’를 개발합니다.

게다가 유메네스 2세는 획기적 발명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파피루스로 만드는 책은 휴지처럼 ‘두루마리 형태’였는데, 유메네스 2세는 옆에 구멍을 뚫어 꿰어 지금처럼 ‘옆으로 넘기는’ 책을 최초로 개발했던 것입니다.

덕분에 책의 내용을 찾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현격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데이터 신호 역사가 넘어가는 사건에 준한 것입니다. 현대의 스마트폰이 있게 한 주인공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개발했던 것처럼 혁신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다만 단점은 양피지로 만든 책은 비싸다는 것인데, 100페이지짜리 책을 만드는 데 양 10마리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터키에서 양 한 마리가 30만 원 정도 하니, 양피지로 100페이지 책 한 권 만드는 데 3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간 것입니다.

B.C. 48년에 로마 제국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이던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 패한 뒤에 이집트로 도망했고, 그 뒤 카이사르와 그가 지휘하던 로마군이 이집트에 입성했는데, 카이사르가 당도하기 전 이미 폼페이우스는 그 당시 파라오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명으로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는 우리가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헤게모니를 놓고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다투던 시기였는데, 클레오파트라가 정치적 목적으로 카이사르를 유혹해 자기 편으로 만든 후,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유일한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바로 카이사르의 로마 군대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이집트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중 일부가 소실되었는데, 책을 사랑했고 학문 연구에 열의를 보였던 클레오파트라의 상심이 컸다고 전합니다.

후에 카이사르가 원로원과 브루투스의 계략에 말려 암살당한 후, 로마의 상황은 카이사르의 부하 장수였던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 간의 내전으로 치닫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정치적 목적으로 결탁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두 사람이 정말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 때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있던 많은 책을 소실당하고 상심해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위해, 페르가몬 도서관에 있던 20만 권의 책을 전부 빼내 커다란 배에 싣고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2) 세계 최초의 병원과 의사 히포크라테스

버가모는 의료도시로 유명했는데, 당시 헬라의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온(Asclepion)의 신전이 이곳에 있어 병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활동했습니다. 아스클레피온은 신전이자 의학교였으며, 병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의 에피다우루스 및 코스섬 의료 기관과 유사한 형태의 이 아스클레피온은, 역사가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B.C. 4세기경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이 시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의료기관이었습니다.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의 이름을 붙인 이 병원은 현대 병원이 갖추고 있는 대부분의 것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약물 치료 시설 뿐 아니라 환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한 연극 공연을 했던 원형극장, 심리적으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터널 등이 있었고, 진흙 목욕과 마사지 그리고 도서관에서의 독서도 하고, 건강을 되찾게 해 준다는 샘물 등도 만들어 전인 치료에 사용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당시의 의학 수준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스클레피온의 유명한 의사는 바로 갈렌(Gallen)입니다. 그는 서머나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당대 왕의 주치의를 맡을 정도로 훌륭한 외과의사였고, 특히 해부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합니다. 그의 연구는 19세기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그 공적이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스클레피온의 입구 기둥에는 뱀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스클레피우스의 상징 동물이 바로 뱀인데, 이는 옛부터 치료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도 의학교와 의사협회 등 의학과 관련한 단체 마크에 뱀의 형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붉은 저택(City Hall).

2. 붉은 저택(Red Hall)

버가모 교회는 A.D. 2세기 초반 하드리안 황제 때 이집트의 신인 ‘세라피스’ 신전으로 지어졌으며, 이후 ‘붉은 저택(Red Hall)’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내부 길이 60m, 폭 26m, 높이 20m인 웅장한 구조의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라피스’는 어떤 신일까요? 이집트에서는 태곳적부터 아피스를 숭배했었는데, 이는 고대 이집트의 황소 신을 말합니다. 이집트에서는 많은 동물들이 신으로 숭배됐는데, 그 중 아피스는 오시리스와 결합하여 세라피스라고 불렸습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습니다.

A.D. 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된 후 바닥을 높여 페르가몬 시민들을 위한 기독교 교회로 사용하다,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자 13세기 이후 이 역시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3. 버가모 교회사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 버가모는 그리스의 제우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아테나 신전과 함께 전 아시아 로마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신전에서 버가모 주민들은 황제를 숭배함과 함께 로마 제국에게 충성을 다짐해야 했습니다. 바울과 요한을 통해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그들에게 황제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언제부터 버가모에 교회가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할 때(행 19:26), 이곳에도 복음이 전해졌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버가모 교회 최초 감독은 사랑하는 가이오였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안디바가 감독이 되었는데, 후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터툴리안이 A.D. 3세기 버가모에서 발견한 어느 조각에서 안디바의 이름(계 2:13)을 찾아내, 안디바가 실제로 버가모에서 순교했음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붉은 저택(Red Hall).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요한의 편지(계 12:12-17)

예수님은 요한을 통해서 버가모 교회에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계 2:14,15)

발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머물 때, 우상의 제물을 먹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도록 꾄 사람입니다(민 31:15,16).

니골라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72명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안수까지 받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따르며 복음을 배웠고 안수까지 받은 집사가, 왜 이렇게 변질돼 계시록에 와서 예수님도 미워하는 교리를 만들었습니까?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교회 박해가 있을 때, 니골라는 은둔했다고 합니다. 은둔생활에서 그가 정립한 교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구원에서 행위를 부정하는 사상이었습니다. 니골라의 사상은 “구약의 율법적 제도와 교리들은 신약 교회 안에서는 필요치 않으므로, 율법의 행위에 제약받지 않고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만이 구원받으며(벧전 1:9) 몸은 땅에 묻혀 썩으므로, 육신은 마음대로 즐겨도 된다며 행위를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에 물들어도 좋으니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면 안 된다고, 먹고 마셔도 영만 순수하면 된다는 것이 니골라당의 교훈입니다.

니골라의 교리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는 우상숭배와 음란 등으로 타락했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이러한 습관에 물들어 성적 행위도 죄로 깨닫지 못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에 좌우되거나 끌려들지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교훈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타협하지도 아니하고, 철저히 미워했던 교회가 에베소 교회라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버가모 교회 신자들 중에서 “믿기만 하면 영혼은 구원되므로, 술과 도박과 음란을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습에 대해 안디바 감독이 책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회개할 생각은 아니하고, 로마 정부에 안디바 감독을 고발했습니다.

로마 제국 황제들이 정치적인 욕심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극심하게 박해하는 환경 속에서,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순교의 신앙을 가진 안디바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극심한 박해를 견디지 못해 세상과 타협하는 발람(민 22:5-3:12)이나 니골라(행 6:5)와 같은 무리도 있었습니다.

세속화와 음란, 맘모니즘 등 현재 한국 교회가 해결해야 할 난제와 숙제가 아주 많습니다. 아무도 그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대신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지선교회] 이스탄불에서 원제연 선교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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