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본] 시내산 사본(가장 오래된 대문자사본)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by 갈렙 posted Dec 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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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 사본 발견 이야기

정양모 신부 / 신약학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교 성서학 교수 티셴도르프(Lobegott Friedrich Konstantin Tischendorf 1815-1874)는 성서 사본들을 발굴하고 비교 연구하는 일에 한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중동 여러 지역을 순방하여 많은 성서 사본들을 찾아냈다. 그가 시나이 산 아래 (略 S)을 발견한 경위는 웬만한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1844년 어느 날 티셴드로프 교수는 가타리나 수도원에 들렀다가 수사들이 땔감으로 쓰려고 광주리에 담아둔 너덜너덜한 양피지들을 보았다. 그리스어 대문자로 쓴 양피지 43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놀랍게도 구약성서 그리스어역 70인 역본의 일부였다(1역대, 예레, 느헤, 에스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감격해 마지않는 교수에게 한 수사가 이르기를, 그 비슷한 양피지 파지 두 광주리를 땔감으로 태워버렸다고 하였다. 티셴도르프는 수도원에서 70인 역본의 나머지 부분도 확인할 수 있었다(이사야, 마카베오 1서 및 4서). 티셴도르프는 양피지 파지 43장을 갖고 라이프치히로 돌아와서 1846년에 발간하고 그 양피지는 라이프치히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여 지금도 거기에 보관되어 있다. 1853년, 그가 재차 가타리나 수도원을 찾아갔으나 수사들은 사본의 값어치를 눈치 채고 그에게 도서관을 개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스 2세의 추천장를 갖고 1859년 세 번째로 수도원을 찾아갔으나 수사들의 냉대는 여전했다. 할 수 없이 수도원을 떠나기로 작심하고 떠나기 전날 수도원 책임자에게 1846년 라이프치히에서 간행한 70인역본을 보여주었더니, 책임자는 자기도 70인 역본을 한 부 갖고 있다고 으스대면서 자기 방 벽장에서 붉은 보자기로 싼 사본을 꺼내 보였다. 얼핏 보아도 매우 값진 사본임에 틀림없었으나 티셴도르프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하면서 심심파적으로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말하고 자기 방으로 가져와 밤을 꼬박 새워 검토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구약성서 70인역 일부, 신약성서 전부에다 바르나바의 편지와 헤르마스의 목자 전문까지 들어 있는 지극히 귀중한 사본임이 판명되었다.

 

다음날 아침 교수는 그 사본을 구입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실패하고 카이로로 돌아와서 마침 그곳에 와 있던 가타리나 수도원 원장에게 간청하여 시나이 사본을 카이로로 급송케 하고 부분적으로 필사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교수는 마침 카이로에 체류하던 독일인 약사와 서점상을 시켜 모조리 베끼게 하고 자신은 일일이 대조, 교정하는 일을 했다. 세 사람은 두 달에 걸쳐 무려 11만 행이나 되는 시나이 사본을 다 베끼기에 이르렀다.

 

티셴도르프는 시나이 사본 자체를 확보할 욕심으로 가타리나 수도원과 오랫동안 협상을 한 끝에 수도원은 시나이 사본을 당시 세계 정교회의 종주인 러시아 황제에게 선물하고, 황제는 그 대가로 당시 공석중이던 수도원 총원장 겸 대주교 선출권을 수도원에 부여함과 동시에 큰 선물을 주기로 하였다. 실제로 황제는 사본을 받고서 은으로 만든 성유물장(聖遺物欌)과 9천 루블을 선사하고 수도원 총원장 겸 대주교에게 러시아 작위를 수여했다. 티셴도르프는 러시아 황제의 하사금으로 1862년 라이프치히에서 시나이 사본 전문을 간행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정권을 쟁취한 공산정부는 성경 사본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데다가 이것을 팔아 경제위기를 해소코자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 이것을 10만 파운드에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박물관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어 영국 정부에서 절반을 부담키로 하고 나머지 절반은 거국적으로 모금하여 마침내 1933년 성탄 직전에 사본이 대영박물관에 도착했다. 관객이 대영박물관에 들어서면 맨 처음으로 대면하는 사본이다. 복도 한복판 유리장 속에 들어 있는 첫번째 사본이 시나이 사본이고 두번째 사본이 5세기에 쓰여진 알렉산드리아 사본(略 A)이다.

 

시나이 사본은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된, 역시 4세기에 쓰여진 바티칸 사본(略 B)과 함께 가장 값진 사본이다. 이 두 가지 사본은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사본군에 속하는 것으로서 가장 변질이 적게 된, 따라서 가장 믿음직스런 사본들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구약 70인역과 신약성경은 거의 이 두 사본에 따라 만든 것이다.

 

책으로 제본한 사본으로서 시나이, 바티칸 사본말고도 알렉산드리아 사본,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딴 베자 사본(略 D) 등이 있으나 이것들은 시나이, 바티칸 사본들에 비해서 질이 많이 떨어진다. 양피지에 써서 책으로 엮은 이들 사본들을 전후하여, 이집트 나일 강변에서 자라는 왕골로 만든 조잡한 종이 파피루스에 쓴 신약성경 필사지가 76편이 발견되었으나 대부분 신약성경 단편 조각들에 불과하다.

 

■ 참고문헌

Bruce M Metzger, Der Text des Neuen Testaments,

Stuttgart : Kohlhammer 1966,pp.42-46. 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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