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메타노에오"(34회)(회개하다)

by 갈렙 posted Feb 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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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noevw(3340, 메타노에오)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 회심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메타노에오(Antipho 이래)는 메타(metav, 3326)와 노에오(noevw, 3539: 지각하다, 인지하다, 생각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a)  메타노에오는 '후에' 또는 '나중에 알아 차리다'(때때로 '너무 늦게'라는 의미를 포함한다)(Epicharmus), '후에나 뒤에 동의하다'(BGU.).

(b)  그 다음에 메타노에오는 '마음(mind)을 바꾸다, 다른 견해를 채택하거나 받아들이다, 감정을 바꾸다'(Plut.), '결의나 의사를 바꾸다'(Diod.), '다른 의견에 이르다, 의견을 바꾸다'(Antiphon)를 의미한다.

(c)  (b)의 의미에서 만일 이전 견해가 어리석었거나 부적당하거나 악하였다는 인정에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유감으로 생각하다, 후회하다' regret,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 feel remorse, '한탄하다'(Xenoph.)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d)  고전 헬라어에서 메타노에오 어군은 신약성경에서 이 어군의 용법처럼 정확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계로까지는 발달되지 못하였다. 비록 그 의미에 회심에 속하는 몇몇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는 할지라도, 헬라 사회는 인간의 전 삶의 철저한 변화나 회심, 돌아옴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회심의 개념이 헬라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며, 그것의 기원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메타노에오는 70인역본에서 약 22회 나오며, 하나님에 관해서든지(참조: 삼상 15:29; 렘 18:8; 욜 2:13-15; 암 7:3, 6), 인간에 관해서든지(렘 8:6; 렘 13:19) 간에 히브리어 니함의 니팔형을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니함의 니팔형은 '어떤 일에 대해 죄송하게 여기다, 유감이다, 뉘우치다'를 의미한다.
돌아감(옴)의 사상은 특히 선지자들이 설교하였고, 히브리어 동사 슈브이며, 헬라어로는 에피스트레포(ejpistrevfw, 1994)로 번역되고 있다(암 4:6; 호 5:4; 호 6:1). 돌이키라는 예언적 요구에는 백성과 하나님, 그리고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반드시 인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놓여 있다. 죄와 배교는 이러한 인격적 관계를 방해하고 파괴한다. 돌이킴은 전인으로서의 그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악을 외면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쿰란 공동체는 모든 악으로부터 돌아설 것모세의 율법으로 모두 돌아갈 것을 성원들에게 요구함으로써 회개의 촉구를 계속하였다. 따라서 그 공동체의 성원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이스라엘의 회심자들로 칭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약을 회심의 언약이라고 불렀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메타노에오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오며, 요한계시록에 12회, 공관복음에 16회, 사도행전에 5회, 그리고 바울 서신에서는 고린도후서에 1회만 나온다.
신약성경은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르지 않고(70인역본은 슈브를 에피스트레포로 번역했다) 돌아오다(회전하다)를 의미하는 슈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메타노에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상의 변화는 구약성경의 다른 헬라어 번역본들과 헬레니즘 유대주의 속에서 이미 보여지고 있었다. 단어 선택의 변화, 즉 에피스트레포 대신 메타노에오를 선택한 것은 신약성경이 슈브의 구약적 용법 속에 내포되어 있는 구체적이며, 물리적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나 사상, 의지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회개하다, 회심하다'라는 관념(이와 마찬가지로 회개와 개종이라는 관념도)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신약성경에는 돌아온다는 전인에 의한 결단이 강조되어 있다. 우리가 단순히 겉모양의 변모나 지적인 관념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언어학적 이해: 대중적인 헬라 의미의 메타노에오는 눅 17:3에서 형제에 대한 잘못에 대한 후회를 나타낸다. 고후 7:9; 고후 7:10에서 메타노이아는 후회(양심의 가책)를 나타낸다.
다른 곳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는 '마음을 바꾸다, 마음의 변화' 또는 '회심하다, 개종하다', '회심, 개종'이다. 그러나 그 용어는 세속적 헬라어와는 유사성이 없기 때문에, 구약과 유대교의 개종의 개념의 경향을 따라 종교적 도덕적 의미를 지닌다.

메타노에오와 메타노이아는 '회개, 회심'에 대해 사용되었다.

 

(a)  세례(침례) 요한.
회심은 세례(침례)요한의 메시지에서 기본적인 특징이었다(마 1:4과 병행구절; 마 3:2, 마 3:8과 병행구절, 마 3:11, 참조, 행 13:24; 행 19:4; 눅 1:16).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가 임박하였고 그의 심판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마지막 기간에 인간의 유일한 과제, 메타노이아가 있다. 요한이 진전시킨 것은 회심으로의, 불경건하고 죄많은 과거와의 단절로의, 하나님께로 돌아섬으로의 부름인데, 이는 역사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어떤 선지자의 입에 의한 것보다 더 절대적인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의 절박함 아래에 서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그의 표어로 삼은 그 용어는 같은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죄를 내던져 버리고 계명을 완수하려는 그들의 지치지 않는 다방면의 노력의 요약이다.
그러나 그 표어는 그 말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회심은 단호하다. 그것은 진심이어야 하며 외관상으로만이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단지 이름난 죄인들(눅 3:12 이하)이나 이방인들(눅 3:14)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그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요구된다(막 3:7 이하). 그것은 안으로부터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변화는 회심에 상당하는 생활(마 3:8; 참조: 마 3:10),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사랑과 의의 삶으로(눅 3:10-눅 3:14) 증명되어야 한다.
회심에 대한 설교와 함께 요한은 죄의 용서(마 1:4 병행구절)와 회심(마 3:11) 모두를 가져오는 정화의 성례인 회심의 침례(막 1:4 병행구절; 행 13:24; 행 19:4)를 연결한다. 그 의미하는 바는 오는 세계를 위한 인간 본성의 완전한 변화는 침례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침례)라는 종말론적 성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오는 구원 속에 한 자리를 얻은 회심한 공동체를 형성하신다.
메타노이아는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인간의 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침례)를 통해 회심을 수여하시고, 거기에 인간은 그것이 그에게 주어지게 하라, "이 시대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신의 존재의 신적 기초로서 그것을 유지하고 인증하라"는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소환받는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유대교를 초월하고 구약의 예언적 경건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력을 새롭게 하여 새로운 종말론적 확신을 갖게 한다는 회심의 개념을 발견한다.

 

(b)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공관 복음서의 기자들에 따르면 메타노에이테(2인, 복수, 현재, 명령)바실레이아(나라, 왕국)의 메시지가 지시하는 바와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명령이다(막 1:15; 마 4:17).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세례(침례)의 부름을 반복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회심을 그 분 자신의 인격 속에서 종말론적 바실레이아의 현존하는 실체로부터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기본적인 요구로 삼으심으로 그것을 수정하시고 초월하신다.
회심에로의 부르심은 그가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다(눅 5:32). 예수님의 회심에 대한 설교는 이전의 그런 설교 중 어떤 강력한 설교보다도 훨씬 능가한다(마 12:39 이하. 병행구절: 요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도 역시 회심에로의 부르심이다(마 11:20 이하. 병행구절 참조: 5:8).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메타노이아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구원의 방법이다. 그것은 취하여야할 방법이지 이론적으로 묘사된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회심의 선포, 특히 유대교의 개종 신앙을 초월하신다(참조, 눅 16:30 이하). 바실레이아의 도래를 생각할 때, 테슈바(8666: 돌아옴)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방식, 즉 예를 들면 뉘우침의 감정, 비통의 몸짓, 참회의 행위 또는 고행(참조, 마 11:21 병행구절) 등은 아무 가치가 없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는 인간 편에서의 최후의 무조건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회심, 본성의 변화,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돌아섬,  절대적인 복종으로 단호하게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요구한다(막 1:15; 마 4:17; 마 18:3). 회심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떨어진다(마 11:20 이하, 병행구절; 눅 13:3, 눅 13:5; 눅 19:40 이하; 눅 23:28 이하).
이 회심은 단호하다. 되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지금 선택한 길을 따라 신뢰할 만한 태도로 전진할 뿐이다. 그것은 전체 인간에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개인의 삶에, 그 다음은 필연적으로 항상 그의 행위에, 모든 상황에서 그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마 12:33 이하, 병행구절; 마 23:26; 막 7:15 병행구절).
예수님의 모든 선포는, 그것의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절대적인 요구(산상 수훈, 제자직에 대한 말씀)와 함께 메타노이아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을 때 조차도 메타노이아의 선포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라는,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것, 즉 단지 노골적인 악뿐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라는 선포이다(마 5:29 이하, 마 5:44; 마 6:19 이하; 마 7:13 이하, 병행구절; 마 10:32-39 병행구절; 막 3:31 이하, 병행구절; 눅 14:33, 참조, 막 10:21 병행구절 등).
종말론적 광신, 혹은 도덕주의, 혹은 결의론(casuistry) 등과 같은 종류와 달리, 회심의 요구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명령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차별없이 설교되며 구원이 있는 유일한 길을 가리키기 위해 보여주기 위해 가차없이 엄격하게 제시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항복과 헌신을 요구한다: 그 하나님은 죄인인 나에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눅 18:13).
그것은 의인보다는 죄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께로의 회심이다(눅 15:7, 눅 15:10, 참조, 눅 15:17 이하; 눅 5:32; 눅 13:3; 눅 13:5).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치명적인 갈등 속에서 그의 회심으로의 부르심의 본질을 나타내 보이신다.
예수님의 설교 속에서 믿음은 회심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인데(막 1:15), 그것은 그가 요구하는 두 번째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메타노이아의 실제적인 면의 성장이다.
예수님께서 이해하시는 회심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다. 그것은 종말론적 심판의 위협에 직면한 옛 본성과의 단절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의하여 요구되는 인간의 전체 발걸음을 포함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 즉 피스티온(믿음)의 관계를 세움으로 달성된다. '회심하다' to convert, '회심되다' to be converted는 하나님의 왕국의 서광(曙光)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요구는 인간 자신의 공로로 충족시킬 수 없다. 마 18:3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본보기로 들어 예수님에게 있어서 '회심하다, 다른 사람이 되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이다'라는 것(파이디온)은 작다는 것,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회심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작아지며(참조, 마 18:4),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일하시도록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은 단순히 그로부터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자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주신다(참조, 막 10:27 병행구절). 이것이 메타노이아의 본질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구속력있는 요구가 되기 위해 아직도 중단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일한 시간에 이 둘 모두이다; 이것은 다른 쪽에 대하여 한 쪽의 어떤 계산된 활동도 불가능하게 할 만큼 절대적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의 공표와 함께 선포하시는 회심을 위한 부르심의 배후에는 그가 이 통치를 가져오시는 자로서 이루시는 변화(transformation)의 약속이 있다(참조, 마 11:28 이하). 만약 예수님께서 요한의 신적 임무로 인정하셨던 요한의 물세례(침례)(막 11:30 병행구절)가 구원의 성취를 기다리던 자들의 회심을 가져왔다면(마 3:11), 예수님께서 완전한 능력으로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침례)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간, 즉 회심한 인간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메타노이아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의 가차 없는 신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를 참회하는 행위의 고통이나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위한 기쁜 복종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은 메타노이아가 이제 더 이상 유대교에서처럼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기 때문이다.

 

(c)  초기의 기독교
① 일반적으로, 사도의 선포(kerygma)에서도 역시 회심은 기본적인 요구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에, 그의 위임으로, 그의 제자들은 회심을 위한 그의 부르심을 위임받았다(막 6:12). 그 후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회심을 전파하도록 지시받는다(눅 24:47). 사도행전에 의하면 제자들의 전도의 핵심은 메타노이아의 메시지이다(행 2:38; 행 3:19; 행 5:31; 행 8:22; 행 11:18; 행 17:30; 행 20:21; 행 26:20). 히 6:1은 초기 기독교의 교리의 기본적인 조항 가운데 메타노이아에 관한 교훈을  들고 있다. 회심하지 않는 것은 그릇된 완고함의 표시이다(계 2:21 이하; 계 9:20 이하; 계 16:9, 계 16:11). 요한복음에서 회심과 세례(침례)는 관련되어 있다(참조, 행 13:24; 행 19:4). 유사하게, 명백히 초기의 관례와 일치하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회심과 세례(침례)를 연결시킨다(행 2:38). 회심의 본질은 구약의 예언서들의 회심에 대한 설교로부터 익숙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악으로부터 멀리 돌아섬(행 8:22, 참조, 행 3:26; 히 6:1; 계 2:22; 계 9:20 이하; 계 16:11)과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섬이다(행 20:21; 행 26:20; 계 16:9, 참조, 벧전 2:25). 그것은 인간의 과제이며(행 2:38; 행 3:19; 행 8:22; 행 17:30; 행 26:20, 변화된 삶의 방식의 증거를 포함함),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5:31, 참조, 행 3:26; 행 11:18; 계 2:21). 그렇지만 그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역사적 계시에 근거를 둠으로 말미암아 신약성경의 특성을 부여 받았다(행 5:31). 그것은 또한 종말론적 사실주의(행 3:19 이하; 행 17:30)와 함께 그리고 전인류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행 11:18; 행 17:30; 행 20:21; 행 26:20, 참조, 눅 24:47; 벧후 3:9). 메타노이아가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참조, 행 11:15 이하와 행 10:45과 함께 행 11:18)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례(침례)에 대한 요한의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가정 하에서만 설명된다. 예수님의 복음의 메시지에서처럼, 메타노이아와 피스티스는 결합되어 있을뿐 아니라 함께 전체를 이룬다.
요한계시록의 회심을 위한 긴급한 부르심(계 2:5, 계2:16; 계3:3, 계 3:19)은 임박한 종말의 예상에 기초한다.  이 부름은 그리스도교 교회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반성하게 하여 죄와 연약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고 그들의 이전 삶의 상태를 회복하게 한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회심하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철저하게 죄를 거절함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목표를 향하게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도 역시 회심의 목적은 궁극적인 구원이며(행 11:18), 특히 죄의 용서와 죄의 씻음이다(눅 24:47; 행 3:19, 참조, 행 8:22). 죄의 용서는 행 2:38에서 세례(침례)와 결부되고 행 10:43에서는 믿음과 결부된다. 그러나 종말론적 구원의 축복으로서 그것은 또한 행 5:31에서 메타노이아와 나란히 발견된다.

② 바울. 회심의 개념은 바울 서신들에도 나타난다. 롬 2:4에서 마지막 심판을 예상하는 인간의 회심(참조, 롬 2:3, 롬 2:5 이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는 목적지이다; 딤후 2:25에는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함"이 하나님의 선물로 묘사된다. 고후 7:9 이하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메타노이아는 바울이 그들 속에 불러일으킨 근심의 결과이다. 그러나 바울은 메타노이아를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고후 7:9)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한다(고후 7:10). 헬라적 표현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표현으로, 그는 메타노니아를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는 생각과 뜻의 변화"로 생각한다. 바울이 회심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그런 의미를 자신의 특유한 신학적 용어로 표현한다. 만약 예수님께 있어서 회심이 믿음을 포함한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메타노이아는 그의 구원의 교리에서 중심적인 개념인 피스티스(믿음)에 포함된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인간의 본성과 행위의 완전한 개조로서의 회심의 개념을 그 자신의 독특한 죽음과 생성을 나타내는 단어, 즉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다시 살아남, 새로운 창조, 새롭게 함 등으로 진술한다. 바울이 기독교의 경건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이런 식으로 다시 고쳐 말한 것에 대한 다른 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회개의 습관에 의해 평가 절하된 용어에 대한 혐오와 함께 우리는 바울 자신의 기독교적 경험의 명확한 주제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변화의 개념은 여전히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전체 신학의 기초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예수님께서 이해하신 것과 같은 회심에 대한 사상이다.

③ 요한. 요한은 부담되는 용어인 메타노에오와 메타노이아를 피하지만 그도 역시 바울에 못지 않게 그 문제 자체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도 역시 믿음은 회심을 포함한다. 세례(침례) 요한의 설교, 요한 복음에서의 예수님 자신의 설교, 그리고 요한일서에서의 요한 자신의 권고는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며, 따라서 그에게로의 회심을 요구한다. 그 이면에 악으로부터 돌아섬이 있음은 요한복음의 예수님과 요한일서의 기자가 빛과 어두움, 진리와 허위, 사랑과 미움, 생명과 죽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그어 놓은 선명한 선을 볼 때 자명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인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남이라는(요 3:3-요 3:8) 개념은 마 18:3의 사상의 다른 표현이며, 그것의 배후에는 공관복음서의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똑같은 확신이 서있다.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회심의 사상의 내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

④ 히브리서에 나오는 둘째 번 메타노이아의 불가능성은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기독교적 신앙에 태만하게 되어 둔한 무관심에 빠지게 될 명백한 위험과 관련하여 고려할 때, 회심에  수반되는 완전한 변화의 중대함을 강조한다. 인간은 메타노이아를 자기 뜻대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히 12:7 예를 들면), 참으로 배교자를 새롭게하는 메타노이아는 없다(히 6:4-히 6:6). 권고하는 문맥에 나타나는 둘째 번 회개의 불가능성에 대한 언급에 의해 제기되는 어려움은, 만약 우리가 결의론(決疑論)이나 유대교나 구약성경의 관습이 의미하는 의식적(ritual) 회개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해결될 수 없다.
신약성경의 회심에 대한 견해를 배경으로 하는, 기자의 생각과 염려는 이해할 만하다. 그의 삶에서 이 결정적인 변화를 한때 경험하고 새로운 창조가 되어 종말론적 구원이 계시된 무리에 들어간 사람은 그 때문에 영원한 성장을 시작한다. 만일 그가 이 성장을 멈춘다면,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완전한 자각과 의지를 가지고 범죄하며(히 10:26), 따라서 종말론적 심판을 받게 된다(히 6:8; 히 10:27 이하). 이 경우에는 다시 그를 회심하게 할 인간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수한 경우에 대한 날카로운 목회적 경고의 형식에서 히브리서는 메타노이아가 총체적(totality)이며, 그것의 포기는 결과적으로 전체의 포기라는 확신을 표현한다.
(참조: Behm;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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