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by 갈렙 posted May 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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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가. 8.15해방과 교회의 재건

 

1.북한의 정치정세 교회비극의 잉태

해방의 종소리가 울리던 날, 1945년 8월 15일은 삼천만 온 겨레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의 애국가를 목메어 부른 바로 그날이었다. 일본 군국주의는 꺾이었고 조국은 마귀의 사슬에서 해방되었다. 신음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압박이 변하여 영광이 되고 보니 그 누구인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치 않을 수 있었으랴! 더우기 70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이 날은 바로 민족의 해방과 동시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날이어서 그 기쁨은 한층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런고로 강한 의욕을 돋우어 교회 재건과 조국 건설에 서슴치 않고 총매진하였다. 교회 재건의 선두를 달린 곳이 종래 한국교회의 중심지였던 관서지방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일제 탄압에 의하여 투옥된 교역자 중 약 50명이 순교하였고 20여명이 출옥한 곳이 평양 감옥이었고 또한 지하에 숨어 있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재건을 위하여 분기한 곳도 관서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한 이른바 출옥 성도들은 출옥하자마자 집에 돌아갈 생각을 뒤로 한채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모여 교회져건에 대한 열의와 집념을 가지고 2개월간 합심 기도하였다.

1945년 9월 20일 저들은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다섯가지 원칙을 발표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하여 죄를 범하였으니 통회 자복한 후에 교역에 나설 것과 권징을 자책 혹은 자율의 방법으로 2개월간 휴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주요한 내용이었다. 여기에 대한 교회의 방향은 적지않게 컸다. 흔한 노회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이를 실시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건의 열의는 11월 14일 선천 월곡동 교회에서 모인 평북 여섯 노회의 연합 교역자 수양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총회시에 총회장이었떤 홍택기 목사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볼 모양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출옥 성도들과 현역 교역자들과 사이에는 냉전의 위기가 싹트게 되었다. 재건되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안으로부터 일어난 시험도 큰 것이었으나 밖으로부터 밀어닥치는 환난도 점차 고조되었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뜻하지 않게 그어진 3.8선으로 소련 군정의 감시와 공산당의 탄압이 심하여져 교회에 대한 적대는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시국하에서 교회의 단결과 일치는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필수 과제였다. 그리하여 1945년 12월 초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북한 오도연합노회를 조직하였다. 연합노회는 남한 교회와의 긴밀한 연락을 위하여 이인식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견하였으며 이러한 경위로 북한 교회는 먹구름이 짙게 덮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비장한 각오로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2. 남한에서의 교회 수습과 안정

남한에 있어서 교회 재건에 힘쓴 곳은 부산을 중심한 경상남도 지역이었다. 그것은 순교자 주기철,최상림 그리고 손양원,주남선,한상동 목사 등이 이 지역에서 출생 또는 목회한 영향이 적지않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18일 부산진교회에 모인 교역자들은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하였으며 11월 3일에는 제47회 경남노회를 개최하여 주남선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하여 교회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추종하여 남한 각 지역에서의 모든 교회가 복구 재건에 노력하여, 노회 형성의 실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1946년 6월 12일에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는 남한의 교회만이 모인 회합이라 해서 남부 총회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1947년 4월 대구에서 모인 남부 총회는 제33회 총회로서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것은 남북 통일의 희망이 희박해재고 또 불원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 독립 국가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남한에서만이라도 총회를 재건하는 것이 교회 발전을 위해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총회는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교역자들에게는 친지 목사의 3인의 보증과 추천으로 신분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개척 전도에 주력하여 남한 지역 도처에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해방 직후 감리교에서는 일제 당시에 교권을 장악하였던 목사와 초야에 묻혀 교회를 물러났던 교직자들과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면서 교회 재건의 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8일 남부 대회란 이름으로 교단 대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의 불법성을 지적한 이규갑 변홍규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등은 감리교 중앙재건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제시대에 교권을 남용한 인물들의 후퇴를 요구하면서 신도대회를 열어 맹렬히 통박하였다. 이는 재건 감리교회라 불려지게 되었다. 한편 남부 대회를 열어 교단 고수를 지지하는 교계 인사들은 1946년 6월 수표교회에 회집하여 부흥 감리교회를 형성하여 교회의 재건은 숙청이 아니라 신앙의 부흥을 통하여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서로 대립이 격화되었다. 감리교는 감독 정치인 고로 감독에게 교회의 영도권이 대폭적으로 부여되어 있다. 그런고로 자연히 감독 직의 획득을 위한 쟁탈의 분규는 우심할 수 밖에 없다. 재건과 부흥 양파의 세력은 백중하여 모두 자신의 정통을 주장하면서 양보하지 않았다. 이 이상 더 분규가 계속되면 감리교의 자멸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때, 재건파의 주장하는 합동안이 부흥파에서 받아 들여진 바 되어 1947년 1월 연합 총회가 회집되었다. 그러나 간부 선정에 있어 부흥파 인물들이 절대 다수가 되자 화해는 회의를 재개하였으나 또 다시 시행의 불철저로 깨어져 재건파는 단독 총회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분열을 통탄히 여긴 평신도들은 분연히 일어나 양파의 합동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1949년 4월 20일 통일 총회의 소집이 무르익어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함으로 양 파는 모두 납득한 바가 되어 감리교의 합동 통일은 성취되었다. 이 합동의 공은 평신도에게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교히 문제에 대한 평신도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일제 말 시대에 한국의 성결교는 해산 명령을 받아 전국 교회는 완전히 폐쇄되었고 교회당 건물은 군수 공장으로 징용되었다. 약 5만의 성결교 신도들은 해방될 때까지 장로교나 혹은 감리교로 가서 신앙 생활을 유지하는 방도를 취하였다. 해방과 동시에 3년간 폐쇠되었던 교회의 문은 열었으며 1945년 11월 9일 총회를 개최하여 사멸되었던 교회 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일어섰다.

 

 

나. 공산당에 의한 교회의 수난

 

1.북한지역의 교회의 참변

1945년 11월 16일,기독교인들은 조국 해방의 감격을 살리어 보다 나은 국가의 건설을 의도하여 윤하영 한경직목사 등이 주동하여 평안북도 용암포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다. 공산당은 이를 파괴하기 위하여 연단을 뒤엎고 그 자리에 앉은 장로 한 사람을 타살하였으며 부근의 교회당에 방화하였다.이에 충격을 받은 신의주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시위를 벌이자 소련군이 비행기와 탱크를 동원하여 기총 소사를 가하여 수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것이 소위 신의주 학생사건이다. 1947년 11월에는 평양에서 김화식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결당식을 거행하려는 전 날,11월 18일에 북괴 경찰에 의하여 탐지되어 40여명이나 되는 교회 주동인물이 모두 체포되고 투옥 또는 시베리아로 유배되는 비운을 만났다. 북괴 공산당은 온갖 구실을 내세워 교회 탄압에 광분하였으며 지목되는 주동 인물의 제거를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다. 공산당은 1946년 11월 3일,주일을 기하여 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총 선거일로 정하고 기독교인이 여기에 찬동하는지의 여부를 주시하였다. 북한 오도연합노회는 그에 대하여 결사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성수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에 여하한 행사에도 불참한다는 것,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것,교회당은 예배 이외의 어떠한 경우에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성명하였다. 연합노회의 지시를 받은 대부분의 교회는 총선거를 거부하고 참가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얼마 후에 교회의 주요 인물들을 즉 회장인 김진수목사를 비롯하여 김인준,김철훈,이유택,허천기,김길수 목사 등을 체포하였다. 1950년 6월 25일을 기하여 남침 계획을 세운 북괴 공산정권은 기독교인의 철저한 소탕을 단행하였다. 그때까지 잔존하고 있던 이성휘,최지화,이학봉,강문구,김태복,장윤성 목사 등의 지도 인물들을 총 검거하였으며 교회는 모두 폐쇄하였다. 9.28 수복과 함께 국군과 유엔군이 북항하게 되자 북괴군은 후퇴하는 도처에서 기독교인을 학살하였다. 북한 지역에서의 기독교인 수난은 세계 교회사상 유래를 볼 수 없으리만큼 극한 상황이었다. 현재 북한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는 하나의 교회 한사람의 교인도 표면적으로 찾아 볼 수 없다. 그러하지만 기독교인의 움직임은 아직도 지하에서 계속되고 있다 .

평안북도 박천에는 원래 기독교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 지방 사람들은 공산당 정치가 통 마음에 맞지 아니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압제로 인하여 명령에 순종하고 있었다. 박천 국민학교에 여선생 한 분이 있었다. 이 여선생은 어렸을 때 어머님을 따라 교회학교에 잘 다녀서 그 마음에는 일찍부터 신앙이 깃들고 있었다. 그녀는 찬송을 부르고 싶었었으나 마음놓고 소리내어 부를 수 없음이 안타까왔다. 이 여선생은 한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찬송가 곡조로 동요를 만들어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 동요를 가르쳐 주었다. 어린이들은 집에 돌아가 이 동요를 노래불렀다. 속마음으로는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밖으로는 교인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은 동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들을 때에 찬송가의 곡조가 곧 연상되었다. 어른들은 은근히 마음에 기뻐하면서 너도 나도 이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되었다. 삽시간에 이 노래는 온 동네에 퍼졌다. 이상히 여긴 공산당 정보원들은 그 원인을 조사하고 또 조사한 결과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동요를 지어 가르친 여선생은 당장 체포되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일체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엄명이 내렸다. 이마만큼 북한 공산치하에서의 기독교인의 수난은 극도에 달하고 있다.

 

2.남한에서의 적도(赤徒)들의 도량(跳梁)

남한 지역에는 조국이 광복되면서 미군이 진주하였기 때문에 미 군정 기간 3년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기독교인들은 마음놓고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전국 도처에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에도 공산당은 갖은 음모와 술책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면서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 발전을 애써 방해하였다. 때로는 게릴라대를 동원하여 폭동을 일으켜 내란을 음모하는 일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이다. 1948년 10월 20일,전라남도의 이 지역에서 공산 도배들은 무력으로 일어나 특히 기독교인들을 많이 살해하였다. 이 때에 손양원 목사의 두아들,동인과 동신 형제가 총살되었음은 너무도 비참하였다. 6.25의 전란을 전후하여 남한 각 곳에서 당한 교회의 참상은 북한교회의 그것과 비교할 바는 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치명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북괴군에 의하여 수 많은 교역자가 사살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북괴권에 의하여 수 많은 교역자가 사살되었으며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적도를 용서해 준 손양원 목사도 마침내 공산군에게 총살되어 순교하였다. 유능한 신학자 남궁혁,송창근,김영주 목사 등을 비롯한 1백여명의 목사가 북으로 납치되어 갔다.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수백의 교회당이 파괴되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 문화재의 집적소인 한국기독교 박물관과 기독교 사료의 보고인 언더우드 도서관이 파괴 되었음은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하여 큰 손실이었다. 1951년 1.4후퇴를 계기하여 한국교회는 수십만의 북한 피난 교인을 포함하여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의 걸음을 재촉하여 마지막 지점인 부산에 집결하였다. 이곳에서는 기독교인의 구호 대책을 모색하기 위하여 '기독교연합 전시 비상 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한경직 목사, 총무로서 김양선 목사가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위원회에서는 미국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과 맥아더 사령관에게 각각 메시지를 발송하여 한반도에서 유엔군이 철수하지 않고 한국 국민을 구원해야 한다고 호소하였고, 이러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한경직 류형기의 두 목사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편 부산 초량교회에 피난 교역자들은 뭉치어 밤을 새워가면서 죄를 뉘우치고 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얼마 후 미국의 트르먼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교회는 자유와 독립 수호의 생명력이 된다"라는 회답이 내도하였고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민은 한국민과 함께 창조의 기쁨에 끝까지 참여할 것이다"라는 희망에 넘친 서신을 보내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백성을 버리시지 않고 지켜주신 것이다.

 

 

다. 신앙로선 상충에 따른 장로교회 분열

 

1.출옥 성도들의 독선신앙 고조(高調)

일제하 신사참배 문제로 야기된 한국교회의 파문은 장로회나 감리교 할 것 없이 조국 해방과 함께 교회 기상도에 세찬 바람을 불러 일으켜 급격한 분열의 불씨가 되었음은 불행사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 후유증을 아물게 할 능력이 없었고 배후에 있은 선교사들의 보조가 불일치하였음도 교회 분열의 일단의 책임이 되었음을 면할 길이 없다. 주의 몸된 교회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과감한 개혁의 수술이 수행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어물 어물 넘어간 것이 두고 두고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음을 무시하지 못한다. 해방 후 잠시 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한 한상동 목사는 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북한에서의 교회 재건의 지난을 느껴 남하하였다. 그는 박윤선 목사와의 합의로 경상남도에 고려신학교를 세울 것에 합의하였다. 1947년 박형룡 목사가 신학교 교장을 수락하므로 이는 확정되었다. 박형룡 목사는 신학교는 반드시 전국의 교회를 배경으로 해야만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승락을 얻은 바 있었다. 그런데 그후 메첸파에 속한 선교사들이 귀국하므로 박형룡 목사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박목사는 메첸파의 신학사상이 건전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처음부터 한국 주재 선교회인 미국 북장로회,남장로회,카나다 장로회,호주 장로회의 선교사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고로 이러한 전국 교회 판도에 이상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그들과의 합작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소위 출옥 성도들은 박목사의 의견에 찬동은 하면서도 메첸파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드디어 박형룡 목사와 사이에는 신앙노선의 상위로 피차 결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박형룡 목사가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물러나자 경남노회 안에서는 심각한 분열의 위기가 감돌았다.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파와 이에 맞선 상대파와의 대립은 불가피한 사실이었다. 1951년 5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모인 제36회 계속 총회는 일선에서는 동족 상살의 6.25동란의 전쟁이 한창 계속되고 있는 와중이었고,피난 수도 부산에서 모인 눈물겨운 성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출옥 성도들을 여지없이 정죄하였다. 그러자 고신 계열의 출옥 성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선 신앙을 과시하면서 경남 법통노회를 조직하였다. 이와같은 분열의 여파는 양편이 다 막심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출옥 성도들이 주장하는 통회 자복, 진리 후소, 신앙 순화와 고조는 바람직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에게 아량과 관용이 너무나 부족하였다. 주의 몸된 교회가 언제나 거룩해야 함은 두 말할 것 없거니와 그러면서 죄인과 약한 자들이 모인 집단이 교회 임을 인식해야 한다.

 

2.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대두(擡頭)

한국 교회사의 흐름은 신학교가 걸은 역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무시하지 못한다. 선교 초창기 이래 40년의 장구한 역사 속에 보수 신학의 전통을 지켜온 장로회 평양신학교는 1938년 9월 3일 일본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무기 휴학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경영자인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본당국에 의하여 모두 강제 추방되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말하자면 한국 교회에서 교역자 양성은 중단 상태에 빠졌다. 그런고로 1940년 서울에서 조선 신학교가 개교되었음은 있음직한 일이었다. 물론 조선신학교는 일본이 요구하는 신사 참배에 찬동하였기 때문에 경기도 지사로부터 설립이 인가되었다. 조선신학교는 한국인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로서 선교사의 주도권에서 벗어나 세워졌기 때문에 보수주의 신학 노선을 탈피하려는 시도는 어렵지 않게 수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가 일제 말엽에 기독교가 탄압을 받고 있는 사정 하에서는 그러한 것의 실현이라든지 또한 그러한 문제의 거론조차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었다. 조국이 해방되고 신앙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자 이러한 문제는 활기를 띄며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조선신학교는 남부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의 직영을 허락 받았고 이때부터 교수로 있은 김재준은 보수 신학을 난타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신학교는 한국에 주재하고 있은 각 선교회와 유대 체졀과 후원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카나다 장로회를 제외한 다른 선교회에서는 모두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더우기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태도는 극히 강경하여 교수진의 총사퇴를 요구하면서 정통적인 성경 해석과 신학을 가르칠 것을 요청하여 사태의 추이는 대결 상태로 인도되었다. 때마침 죤 맥카이와 에밀 부룬너의 한국 내방이 있었는데 이것이 엉뚱하게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를 중심한 신학자들과 박형룡 박사를 중심한 교회 지도자들과 사이를 격리시켜 놓는데 주효하였다. 김재준 측이 이들의 이름을 번번히 사용한 것과 박형룡 측이 지나치게 신경을 쓴 것이 모두 좋지 않았다. 이 두 신학자의 대립 경향은 한국교회 전체를 양분하는 기세에 박차를 가하였다. 거기에다가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의 강의가 자유주의라고 하여 그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한 바 있었기 때문에 긴장은 더하였다. 이러한 과정으로 전국의 교회는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여 소위 진보계와 보수계의 두갈래가 급속도로 격화되었다. 1949년 6월,51명 학생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교가 서울 남산에서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되었다.이 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후신임을 자처하면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전국의 교회로부터 많은 동정이 집중되었다. 믹구 남장로회나 북장로회 선교부의 후원도 뒤따르게 되었다. 한 총회 안에 입장을 달리하는 두신학교의 존재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50년 제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 측을 다수의 힘으로 몰아치우려 하였다. 그러자심한 격론이 일어났고 그 도가 지나침으로 한국교회사 상 미증유의 경찰 동원이란 치욕적 사건마저 유발하기에 이르렀음은 일대 유감사라고 말 아니 할 수 없다. 1951년 9월, 총회에서는 직영 신학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구에서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계속되었다. 1952년의 제37회 총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하였다. 그리고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한다고 재확인 결의하였다. 1954년 6월,새로운 신학 사상의 수립을 지향한다는 조선신학교측은 그 명칭을 '한국 기독교장로회'라고 하면서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여 출범하였다. 이는 분열의 명분을 내세운 떳떳한 행동이기는 하였으나 새로운 신학의 선언으로 인하여 두 진영의 화해의 성립은 불가능사로 아주 굳어지고 말았다.

 

3. MAE 대 에큐메니칼 논쟁

한국의 최대 교파를 자랑하는 장로회는 또 세번째로 크게 갈라지는 불행을 만났다. 복음동지협회 (NAE=National Assembly of Evangelists)란 단체에 의하여 주도권 중상 모략이 의외로 주효하여 1959년 제44회 총회 시에 교회가 분열되는 비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이 분열 원인에 관하여 총회신학교의 기지 확보를 위한 3천만환의 행방을 추궁한데서 박형룡 교장의 진퇴를 지지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과 사이에 충돌로부터 발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나 결정적인 요소는 보수 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한다고 하는 NAE 계통의 목사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신학으요 용공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여론을 악화시키는데 크게 기인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세계교회협의회(WCC=World Council of Churches)와의 단결을 주장하다가 총회원 다수의 찬동을 얻지 못하게 되자 총회를 정회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따로[합동총회]를 열어 분리하였다. 한편,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끊을 수 없다고 판단한 총회원들은 [통합총회]를 열었으며, 그러나 형제 사이의 분열의 비극은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 하겠다는 노력의 표시로 세계교회협의회의 잠정적 탈퇴마저 감행하면서 하나가 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거절 당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표면상의 양보보다 근본적인 동기가 앞서고 있다는 사실이 여기에 있으며 신학이 아닌 노선의 차이로 분열한 교회의 양상을 여기에서 뚜렷히 볼 수가 있다.

 

 

라. 영도권 장악을 위한 감리교회 분규

1.재건총회와 부흥총회의 대립

선학 방법론의 차이 또는 신앙 노선의 상위보다는 교회 정체나 교권의 쟁탈 문제로 분열한 것이 한국의 감리교회라고 하는데 흥미가 있다. 감리교에서는 6.25 동란으로 김유순감독 이하 40여명의 중진 교역자들이 공산군에 의하여 남북 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감리교에서는 이로 인하여 교회 운영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러므로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모인 임시 총회에서 당시 신학교 교장인 류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류형기 목사는 감독의 자격으로 연회 회원으로 계속 6년간 지냈어야 한다는 법규에 걸려 불가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눈치빠른 그는 재빨리 사퇴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한국 감리교의 재건을 위하여 내한한 모어(Moore)감독은 "현재 한국교회의 실정이 비상 시기에 있으니만큼 이번 총회에 한하여 6년 계속 시무의 조항을 보류하자"라고 피력하여 총회원 일동이 총 기립하여 찬동하는 의사를 표시하므로 극적인 타개를 이루었음은 가관이었다. 그후 2년이 지나 감독의 임기가 만료되는 1953년에 소집된 총회에서 류형기 감독의 재선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 교회의 재정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한국 감리교가 류형기 감독의 존재를 계속 필요로 하고 있었을런지 모르지마는 임시 편법을 자주 사용함은 부당하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청리원 측의 태도에 견제를 가하게 되었다. 이들이 주로 부흥파에 속한 인물들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해방 직후에 크게 노출된 부흥파와 재건파의 대립의 양상을 이해하기가 쉽다. 분규의 주인은 계속하여 교계의 영도권 장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2. 호헌(護憲) 주장으로 인한 불협화 발음

1954년 3월의 정기 총회는 마침내 부흥파와 재건파의 대립의 각축장으로 화하게 되었고 종교불 흑막의 폭로등으로 공격의 화살은 맹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원 측의 위세는 다수의 힘을 빌어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헌법 개혁안의 통과와 함께 류형기 감독의 재선을 강행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다수결에 밀려난 회원들은 개헌의 목적이 일부 인사들의 교권 장악에 있는 것이라고 단정하여 1955년 3월에 천안에서 전국 신도대회를 열어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여 분리를 선언하였다. 이를 소위 호헌총회라고 부른다. 류형기 감독은 1958년 10월 총회시에 자신의 부족을 말하면서 분리된 양 교회의 합동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이것이 주효하여 양측의 대표 위원들은 수차에 걸친 회합 후에 무조건 합동하기로 합의하여 1959년 연합 총회에서 하나가 되었고 김종필 감독이 이를 사회하였다. 이리하여 4년만에 분리되었던 감리교 총회는 4년이 지나면서 또 다시 합동하여 일종 순환식 현상과 같은 묘한 특이성을 노증시켰다. 한국의 감리교는 교회의 바탕을 신학적인 것 보다는 도덕적 신령적 차원에 두고 있기 때문에 행정의 기략과 높은 경건의 결의만 있으면 장로회에서처럼 심각한 분열을 지속하지 않으며 언제나 통합의 여지가 있음이 다행이라 하겠다.  

 

출처 :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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