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생활 400년

by 갈렙 posted Aug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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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의 애굽생활 400년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세부적으로 따진다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430년(BC1876~1446년) 동안 거주하였다는 출애굽기 12장 40절의 성경구절을 제시할 수 있으며 ‘종살이’라는 말보다 ‘거주하였다’는 말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 애굽생활 사백년 가운데 『전반기 약 200년(BC 1876~1674년)』은 총리대신 요셉에 의해 이스라엘을 위해 다져놓은 공로(功勞)로 인하여 요셉 사후에도 이스라엘 12족속은 고센 땅의 사방팔방에서 각기 부락을 이루고 번성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중기 약 100년(BC 1674~1575년)』은 아시아계 셈족 힉소스인들이 가나안 에돔으로부터 들어와 이집트 14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집트 15왕조를 세우고 이집트 16왕조까지 군림하던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후기 약 100년(BC 1575~1446년)』은 이민족 힉소스 왕조의 지배에서 해방되기 위해 상(上)애굽의 테베에서 이집트 17왕조가 일어났으며 테베의 아흐모세가 기원전 1575년에 힉소스 정권을 몰아내고 이집트 18왕조의 초대왕 아흐모세 1세로 등극하였으며, 이후부터 애굽의 왕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벽돌과 기와를 굽게 하는 등 종살이시키던 시기였다.

 

애굽생활 전반기 200년

 

요셉이 바로왕 세누세레트 2세의 꿈을 해몽하여 애굽에 7년 동안 계속해서 풍년이 들겠고 이어서 다음 7년 동안은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뒤따르게 될 것을 예언하고 또한 이에 대한 대비책도 내놓았다. 그러자 바로왕은 자기 손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가락에 끼워 주면서 애굽 나라의 살림을 맡겼다(창 41:42). 이때 요셉의 나이가 서른 살이었다. 이렇게 임금의 옥새(玉璽)를 가진 요셉은 총리대신의 직책을 부여받았지만 실제로 왕에 버금가는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7년 연속풍년 중에 6년째에 세누세레트 2세는 세누세레트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요셉의 예언대로 세누세레트 3세의 바로왕 재위 첫해에 풍년이 듦으로써 7년 연속풍년의 햇수를 채우고 그 이듬해부터 여지없이 7년 흉년이 들기 시작하였다. 애굽뿐만 이웃나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7년 연속흉년이 졌다. 흉년을 대비하여 창고에 쌓아둔 곡식을 애굽 사람이나 가나안 사람에게 나누어줄 때, 총리대신 요셉은 그냥 주지 않고 돈을 받거나 가축과 교환하는 식으로 일처리를 했으며 심지어 돈과 가축마저 다 없어진 백성들일 경우에는 그들의 몸과 밭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7년 흉년이 있었던 세누세레트 3세의 치세 때에 지방 영주(領主) 즉 귀족들의 권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 이전에는 귀족들의 황금기(중왕국 시대)로 귀족들은 베니하산(Beni Hasan)을 왕족무덤과 같은 호화로운 무덤단지로 형성하였지만 세누세레트 3세 때부터 귀족들의 호화로운 무덤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는 총리대신 요셉에 의해 세누세레트 3세의 절대왕권이 확립되었다는 의미다.

요셉 마흔 살에 가나안에 계신 부친 야곱(130세)과 형제들을 고센으로 불러들였다(BC 1876년). 야곱은 고센에서 17년을 더 살다가 147세에 임종을 앞두고 그의 열두 아들을 불러놓고 그들이 당할 장래 일을 예언하였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이유로 장자상속을 받을 수 없으며,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할례까지 행한 세검 사람들을 도륙한 잔인함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흩으리라. 넷째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홀(왕권)이 함께 하되 실로(구세주)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 다음에는 다섯째아들이 되는 단에 대해서 장래 일을 예언해야 올바른 순서인데, 열째아들 스볼론과 아홉째아들 잇사갈을 중간에 끼워 넣고 의도적으로 7번째 순서에 “단은 그 백성을 심판하리라. 첩경의 독사가 되어 말굽을 물어 말 탄자를 떨어뜨리리라. 여호와여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고 축복했다(창49:16).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단을 일곱 번째로 축복한 목적은, 요한계시록에 마지막 나팔을 부는 자로서 일곱째 인을 떼는 자가 단지파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표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야곱이 임종하자, 애굽 사람들은 야곱의 죽음을 70일 동안이나 곡을 하며 슬퍼했다. 요셉은 아버지가 생전에 말씀한 대로 아버지의 시체를 헤브론의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안장(安葬)하기 위해 애굽 왕가의 신하, 그리고 야곱의 친족들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갔다. 먼 길을 갈 수 없는 어린이들과 양떼와 소떼만이 고센에 남고 전차와 기병들의 호위를 받은 그 행렬은 참으로 호화스러웠다. 사람들은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서 다시 한 번 크게 울며 슬퍼했으며, 요셉은 거기서 7일 동안 아버지를 위하여 애곡하며 상(喪)을 치렀다. 

장례 행렬이 굳이 아닷을 경유한 것은 에서는 만나기 위해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애굽의 고센에서 출발한 야곱의 상여행렬이 중간에 가데스에서 브엘세바를 경유하는 지름길을 이용하지 아니하고 사해 동편을 타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점입니다(야곱의 장례 행렬 경유도 참조). 아마도 험악한 세월을 보낸 야곱이 147세의 일기로 애굽에서 임종할 당시에, 쌍둥이 에서는 사해 남쪽 에돔에서 생존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아버지 이삭이 180세의 수한을 누린 것을 감안하면 야곱의 형 에서는 족히 160세 이상을 살았을 것이다. 에돔을 다스리는 에서는 동생 야곱의 부고(訃告)를 접하고 조카들에게 부탁하기를, ‘야곱의 상여행렬이 에돔을 경유하기를 원하며 동생 야곱을 위해 베옷을 입고 곡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장례행렬의 코스는 에돔을 지나게 되었고 더군다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손들이 사는 모압과 암몬 땅을 경유하게 된 것이다. 

 

 

가나안에도 7년 흉년의 재앙이 덮쳤을 때, 애굽으로 이주하여 고센 라암셋에 살던 야곱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그의 성품으로 보아 에돔의 족장으로 있는 형 에서에게 식량을 지원하였음에 분명하다. 이렇게 동생 야곱의 물질적인 원조를 받은 에서는 가나안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번영한 에돔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 것이다(창 36:31). 이 에돔왕국과 교역을 하며 우호증진에 있던 이스라엘지파가 라암셋 근교 아바리스 성읍에 거주하던 유다지파로 보인다. 훗날 모세가 가나안 정탐꾼으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뽑은 12명 가운데 유다지파의 대표로 ‘갈렙’이 있는데, 그 갈렙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다섯째 아들 그나스의 후손이다. 이렇게 에돔족속이자 에서의 후손 갈렙이 유다지파의 일원이 되어 유다지파의 족장까지 한 것으로 보아 유다족속과 에돔족속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엿볼 수 있다. 

 

한편 단지파는 라암셋의 북쪽 타니스(Tanis) 성읍에서 지중해로 연결된 나일강 하류를 따라 지중해로 진출하여 해상무역의 상인으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다. 총리대신 요셉의 사후에도 단지파의 타니스 성읍과 유다의 아바리스 성읍은 애굽의 멤피스나 테베의 왕도(王都) 못지않게 번영을 구가하였다. 특히 유다의 아비리스 성읍은 『애굽생활 중기 약 100년(BC 1674~1575년)』에 애굽을 지배하는 힉소스 왕조의 수도가 된다.* 

[출처]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생활 400년 미스터리 2편|작성자 하나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생활 400년 미스터리 - 최종편

 

애굽생활 400년 가운데 전반기 약 200년(BC 1876~1674년) 동안 고센 땅에서 야곱의 자손이 번성하였다. 애굽의 고센 땅은 가나안으로 가는 통로였다. 이스라엘의 유다지파는 고센의 아바리스 성읍을 기업으로 삼고 번성하는 가운데 가나안의 에돔족속과 교역하였다.

 

에서가 세운 에돔왕국의 특성

 

에돔족속은 야곱의 형 에서후손이다. 에서는 비록 동생 야곱한테 장자권을 빼앗겼지만 아브라함에서 이삭까지 추적된 재산을 차지하였을 뿐만 야곱의 재산 일부를 차지하였다(창세기 33장 9~11절). 게다가 에서는 헷족속의 딸 유딧과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 그리고 히위족속의 딸 오홀리바마를 취하였다. 헷족속은 곧 세계 최초로 철병기를 사용한 히타이트 사람들이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첩 하갈의 자식으로 아라비아 광야를 지배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히위족속의 딸 오홀리바마는 에돔의 원주민으로서 세일에 거주하던 호리 사람의 자손이었다(창세기 36장 20~25절).

이렇게 에서와 혈연관계를 맺은 각 부족은 에돔이라는 기치 아래 마치 오늘날의 연방제 국가처럼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에돔을 대표하는 왕(王)도 세습제가 아니라 각 부족의 족장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애굽의 14왕조를 무너뜨리고 힉소스 왕조를 세운 주체세력 가운데 호리족의 사람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계의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힉소스인들의 특성을 보아, 그들은 그 당시 여러 족속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에돔왕국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다(힉소스 영토 지도 참조).

 

고센의 유다지파와 에돔왕국의 힉소스인들과 연맹

 

요셉을 죽으라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던 적이 있던 레아의 자식들 가운데 특히 유다는 ‘총리대신 요셉이 당장 보복을 하지 않는 이유가 아버지 야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고 생각하였다(창세기 50장 15절). 그리하여 요셉의 앙갚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다는 부친 야곱이 계신 라암셋과 가까운 아바리스에 거주하였다. 또한 아바리스는 가나안으로 가장 빨리 도주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만약을 대비하여 유다는 가나안에서 에돔왕국을 건설한 큰아버지 에서를 자주 찾아뵙고 큰아버지의 많은 손자들 중에 몇몇을 고센의 유다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인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당시 갈렙이라는 사람이 유다지파에 속한 사람이지만 분명히 그의 조상은 에서의 손자 그나스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 유다 가계 쪽에서 에서(에돔) 가계와의 혼인에 의한 혈연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애썼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장자축복을 받은 단은 그의 아들이 큰아버지 에서의 핏줄 가운데, 에서의 아내 즉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이 낳은 르우엘의 손녀와 혼인관계를 맺게 했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이 옮겨지는 장자축복의 계승은 노아의 아들 셈의 순수 혈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에서의 여러 아내들 중에 셈의 직계자손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는 마할랏은 아브라함의 손녀로서 장자축복을 계승하는 단지파와 혈연관계를 맺었던 것이다(창세기 28장 9절).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아내로 삼은 것은, 나홀이 아브라함과 형제지간으로서 셈의 순수혈통을 중요시 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데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삭의 아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딸을 아내로 삼은 것도 셈의 단일민족으로서의 순수혈통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선민(選民)을 통해 구세주를 배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 이래 6천년간 사망권세를 이길 수 있는 피(血)의 권세를 키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애굽생활 중기 약 100년(BC 1674~1575년)

 

총리대신 요셉은 이집트 12왕조 아메넴헷 3세 때 기원전 1805년에 110세의 나이로 임종했다. 요셉 사후 이집트 12왕조의 절대왕권은 급속히 약화되어 아메넴헷 3세를 계승한 아메넴헷 4세(BC 1797 ~ 1790년)의 재위기간이 7년 밖에 되지 못하였고 그 뒤를 이은 소백네페루 여왕(BC 1790 ~ 1785년)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이 채 안되어 12왕조는 망하였다. 이후 기원전 1785년에서 기원전 1674년까지 110년 동안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가 두 번이나 교체되었는데, 첫 번째로 13왕조에서는 왕이 30명이었으며 두 번째로 14왕조에서는 왕이 70명 이상이었다.

가나안에서 고센을 통과한 상인들 즉 힉소스인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 위해 애굽의 멤피스 도성 또는 테베 도성을 왕래하였다. 그들은 애굽 왕조의 무질서와 치안 부재로 안전한 상거래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무장한 전차를 앞세워 애굽을 치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하나의 걸림돌은 고센에서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애굽정복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애굽의 고센에 정착한지 2백년이 된 이스라엘 민족은 강대하였다.

그래서 힉소스인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 가운데 아바리스 성읍에 거주하는 유다지파와 동맹을 맺고 합세하여 애굽의 14왕조를 무너뜨렸다. 힉소스 군대에 유다지파가 합류할 때 르우벤지파도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보이며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는 중립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에돔왕국의 힉소스인들과 이스라엘 유다지파의 사람들이 애굽의 수도를 아바리스로 정하고 애굽을 약 100년(BC 1674~1575년)간 통치하였는데, 바로 이집트 15왕조와 이집트 16왕조에 해당된다. 이집트 15왕조의 초대왕은 에돔왕국에 속한 힉소스인 셰시(Sheshi)가 되었으며 그 다음 제2대왕은 고센에 거하는 이스라엘인 야쿱헤르(Yakubher)가 되었다.

힉소스 왕조로 알려진 15왕조와 16왕조에서 왕이 사용하는 인장은 12왕조 때 총리대신 요셉의 손가락에 끼여 있던 스캐럽 인장과 똑같은 나선형의 아리랑 문양을 새겼다(스캐럽 인장 사진 참조). 이는 힉소스의 주류가 가나안 사람으로 서부 셈어를 사용했던 야곱의 아들 요셉한테서 혈통적으로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어낸 것은 '나 여호와가 이집트 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기 위함이라(창15:18)'고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의 말씀이 힉소스 왕조 때에 성취된 것이다(힉소스 영토 지도 참조).

 

애굽생활 후기 약 100년(BC 1575~1446년)

 

이스라엘 민족의 400년 애굽생활 가운데 마지막으로 『후기 약 100년(BC 1575~1446년)』은 이민족 힉소스 왕조의 지배에서 해방되기 위해 상(上)애굽의 테베에서 이집트 17왕조가 일어났으며 테베의 아흐모세가 기원전 1575년에 힉소스 정권을 몰아내고 이집트 18왕조의 초대왕 아흐모세 1세로 등극하였으며, 이후 백 년 동안 애굽의 왕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벽돌과 기와를 굽게 하는 등 종살이시키던 시기였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애굽에서 압제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는데, 그때가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던 기원전 1446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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