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대제사장과 교회의 목사

by 갈렙 posted Apr 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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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과 목사

 

 

 

 

감히 기름 부음 받은 주의 종을 대적하다니


송인규 교수의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 제사장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교회에서 목사를 가리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이라 부르는 소리를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부흥회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초청 강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호칭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또 본 교회의 목사들도 자신의 권위가 도전을 받든지 일사불란했던 위계질서가 삐거덕거린다 싶으면, “감히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을 대적하느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규정하곤 했다.

 

부흥 강사건 해당 교회의 목사건 결국 주장하는 바는 동일하다.

즉 그들은 구약에 흔히 등장하는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들은 구약의 제사장 계층에 해당 되고, 일반 교우들은 평범한 백성과 같다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자신을 이렇게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밝히지는 않지만, 근본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와 ‘아니오’ 두 가지다.

말씀(율법)을 가르치고 신앙적(종교적)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측면에서는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연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조차 다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자신들만이 제사·축복·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도 안 된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나누어지는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이나 제사?축복?중보 기도의 기능 때문이 아니요, 단지 말씀을 가르치는 기능과 지도력을 행사하는 기능 때문이다.

그런데 말씀을 가르치고 지도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목회자’라고 부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가리켜 ‘평신도’라고 부를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보유하고 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축복·중보기도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는 목회자나 평신도가 동등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물론 앞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해 전혀 답변이 시도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 당시 주창한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 priesthood of all believers) 이론이 부분적으로는 이미 상기한 질문에 답변을 제시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인 제사장 이론만으로는 상기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한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런 상황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목회자와 구약의 제사장 사이에는 과연 어떤 함수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구약 시대 : 인간 중보자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 중보자’라는 개념부터 설명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다스리심-소위 신정 통치(神政統治, theocracy)라고 한다-에 있어 인간 지도자들을 활용하시기로 정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서서 맡겨진 종교적?정치적?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곤 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인간 중보자(human mediators)라고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모세를 들 수 있다.

 

성경(갈 3:19~20, 신 5:5)에 의하면 두 가지 사실이 명료히 드러난다.

 (i)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위치해 있는 존재이다.

(ii)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전달함에 있어 인간 중보자(이 경우에는 모세)를 활용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인간 중보자로서 율법뿐이 아니요 궁극적으로는 언약에 있어서도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예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인 것(히 8:5~6)과 마찬가지로 모세는 옛 언약의 중보자(출 24:3~8)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 인간 중보자는 모세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실은 제사장들이 모두 인간 중보자였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히 5:1, 4)

 

제사장이 인간 중보자라고 할 때 세 가지 사항이 포함된다.

(i) 그는 자기 스스로가 아니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러한 신분을 갖추게 된다.

(ii) 그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세움을 입은 것이다.

(iii) 그는 사람 가운데서 선택을 받아 사람을 위하여 일한다.

이렇게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위치하여 하나님께로 받은바 소임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제사장이 되면서부터 비(非)제사장 계층과 다른 독특한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아예 신분에 있어서조차 일반 백성과 구별이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기능의 출발을 기념하기 위해 그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 (출 28:41), (민 3:3)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성별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름 받음을 받는 일은 제사장 계층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왕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삼상 15:1), (삼하 5:3), (왕상 1:39)

또 선지자들 역시 사명자로 나섬에 있어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주-1).

이렇게 본다면 결국 구약에는 제사장·왕·선지자 그룹이 기름 부음을 받은 이들(히브리어로는 ‘마시아흐’로써 여기에서 메시야(messiah)라는 단어가 생겼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께 성별되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감당했는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인간 중보자로 자리매김을 함으로서 기능에 있어서 뿐 아니라 신분에 있어서도 일반 백성과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세 그룹 모두가 인간 중보자에 해당하지만, 이 글에서는 제사장의 직분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구약 시대 : 제사장과 일반 백성과의 차이점

 

위에서 언급했듯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일반 백성과 두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에 있어서 일반 백성과 달랐다.

제사장의 효시인 아론은 하나님의 선택과 소명에 의해 제사장이 되었고(히 5:4), 그 이후에는 세습에 의해서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시대에 제사장이 되려면 레위 지파에 소속되어 있어야 했고 레위 지파 가운데에서도 아론의 후손으로 태어나야만 했다. (출 40:15) 

이처럼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제사장은 아예 신분에 있어서조차 일반 백성과 차이가 나는 것이었고,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것”(왕상 12:31)은 그 근본부터가 크게 잘못된 일이었다.

둘째, 제사장들은 직분을 수행하는 기능의 면에서 일반 백성과 달랐다.

즉 일반 백성으로서는 할 수 없는 독특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제사장 고유의 기능이었는가?

다섯 가지 사항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제사장들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린다는 독특한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레 4:20), (민 15:25)

제사장들이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써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죄를 누릴 수가 있었다.

② 제사장들에게는 백성을 축복하는 기능이 있었다. (민 6:23~24), (삼상 2:20)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집합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축복할 때, 축복의 대상들은 실제적으로 그 복의 내용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향유할 수 있었다.

③ 제사장들은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린다는 고유의 기능이 있었다. (삼상 7:9), (시 99:6)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을 포함하여 인간 중보자들만이 백성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주-2)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한 개인 기도는 누구든 가능했다.) 또 이런 중보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④ 제사장들은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신 33:8, 10), (스 7:10~11)

제사장은 백성에게 율법의 내용을 가르치는 기능이 있었기 때문에 에스라는 포로 귀환 후 이 책임에 착념했던 것이다.

⑤ 제사장들은 백성에 대해 종교적 리더십을 행사하는 기능이 있었다. (삼상 7:3), (스 8:15)

제사장들은 유사시에 백성의 지도자로서 필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러나 제사장을 포함하여 구약 시대의 인간 중보자들은 머지않아 쇠퇴를 맞게 된다.

제사장들 그룹만 하더라도 율법을 제대로 가르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부터 율법을 범했고(겔 22:26), 포로 귀환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에 거치게 만들었다(말 2:7~8).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참된 중보자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셨고(겔 22:30), 결국 스스로 대책을 강구하셨다(사 59:16).

이제는 인간 중보자의 완성이신 진정한 메시야 -기름 부음 받은 자 (시 2:2)-가 요청되었다.

그는 왕이시고, 선지자이신 동시에 제사장이시기도 할 것이었다.

 

신약 시대 : 만인제사장론의 요체

 

신약 시대로 접어들면서 제사 제도에는 총체적인 변화가 찾아 왔다.

다음 구절을 보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으로서 롬 12:1을 읽기 때문에 이 구절의 의미심장함을 너무도 빈번히 놓치고 만다.

만일 구약 식의 제사 제도에 인이 박인 유대인이 이 구절을 접하게 되었다면 그는 아마도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그가 경악한 이유는 최소 세 가지 사항에서 찾을 수 있다.


① 이방인을 향하여 제사를 드리라(제사장이 되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교회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을 향하여 제사를 드리라고 했으니 정통 유대인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살펴보았듯, 제사를 드리는 일은 유대인 가운데에서도 레위 지파에게, 또 레위 지파 가운데에서도 아론의 자손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요 사명이었다.

그런데 아론의 자손은커녕 유대인도 아닌 이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다니 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② 제물이 바로 자기의 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는 제물이 주로 소나 양 등 짐승이었다.

그런데 롬 12:1에서는 ‘너희 몸’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③ 제물과 제사장이 한 개인 안에서 통합되기 때문이다.

역시 구약 시대에는 제물과 제사장이 존재론적으로 일치될 수가 없었다.

제물은 제물[짐승]이고 제사장은 제사장[인간]이었다.

이것은 별개 제물(other-sacrifice)로서 구약 제사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물과 제사장이 한 개인에게서 통합되고 있으니 (즉 동일 제물(self-sacrifice)이라는 것) 참으로 경이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제사 제도에 이처럼 놀라운 변화가 찾아 왔단 말인가?

한 마디로 답하자면, 참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고 만인제사장론의 요체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메시아 중의 메시아요, 구약 시대 인간 중보자들(제사장, 왕, 선지자)의 완성으로 오셨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참되고 진정한 제사장이시기도 한 것이다.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왜, 그는 제사장으로 오셔야 했는가? 히브리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는 구약 제사 제도를 보완하시고 완성하시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두 가지 면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① 우선 제사장이 자꾸 죽고 갈리기 때문에 일사불란한 직분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히 7:l1), (히 7:23), (히 7:27, 28)

이처럼 구약 시대 제사장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야 했고, 그 때마다 제사장이 수시로 갈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 제사 제도가 안정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② 뿐만 아니라 제물 또한 문제였다. 근본적으로 범죄의 주체자는 인간인데(창 2:17) 어떻게 짐승이 대신 형벌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히 10:1, 3~4)

비록 짐승 제사가 일시적으로는 사죄의 방편 노릇을 했지만, 그것은 피상적 수준의 영향만 발휘했을 뿐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가 제사장과 제물 각각의 요소에 있어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제사 제도의 두 요소가 제사장과 제물임을 고려할 때)제사 제도 자체가 온전히 혁신되어야 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바로 이런 차제에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오신 것이다. (시 110:4), (히 6:20)

 이처럼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는 구약 제사에 있어 제사장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히 7:24~25) 

 

또 동시에 그가 온전한 인간으로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제물의 약점 또한 개선할 수 있었다. (히 2:14), (히 10:10)

그가 이처럼 구약의 제사 제도를 완성하기 위해 오셨고 또 그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사 제도가 종언을 고했다는 증거는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지성소로 통하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두 동강이가 난 사건에 반영되어 있다.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오신 결과


이상의 내용에 의거하건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으로 오셨을 때 그로 말미암아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① 예수께서는 유다 지파에 속해 있어서 아론의 후손이 아니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셨다 (히 7:14~15)

② 예수께서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다. (히 7:27; 9:12, 25~26; 10:10, 12)

③ 그는 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제물이 되심으로서(히 7:24~27; 9:11~12, 24~27; 10:10~12, 19~21) 제사장과 제물이 한 개인에게서 통합되도록 하셨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항목은 바로 롬 12:1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이점들이었다.

즉 ①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셨으므로 우리도 제사장이 되었고,

② 그리스도께서 제물이셨으므로 우리도 제물이 되었으며,

③ 그리스도 개인에게서 제사장과 제물이 통합되었기 때문에 우리 개인에게서도 제사장과 제물이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때문에 이와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을 허락 받은 셈이다.

우리는 본래 제사장도 제물도 될 수 없었지만 (더구나 우리 자신에게서 제사장과 제물의 역할이 통합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한 바가 되었고, (cf. 롬 6:3~6)

이 신비로운 연합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 제물 되심, 제사장과 제물이 한 개인에게서 통합되심과 같은 사항들이 우리에게서도 똑같이 재현되도록 유익을 끼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복음의 유익의 내용으로부터 만인제사장 교리가 발원한 것이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오늘날의 목회자

 

앞에서 필자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 신분 및 기능에 있어서 일반 백성과 차이가 남을 설명했다.

 

제사장의 남다른 기능은 다섯 가지로서 ① 속죄 제사를 드림,

② 백성을 축복함,

③ 중보 기도를 함,

④ 율법을 가르침,

⑤ 종교적 리더십을 발휘함이었다.

 

예수께서도 제사장으로서 오셔서

① 제사를 드렸고 (히 7:24~27; 9:11~15, 24~27; 10:10~12),

② 사람들을 축복하셨으며 (막 10:16; 눅 24:50),

③ 중보 기도를 하셨고 (눅 22:32; 23:34; 요 17:9, 15, 20),

④ 율법을 가르치셨는가 하면 (마 5:18~19; 12:5; 22:37~40; 눅 10:25~26),

⑤ 신앙적 지도력을 행사하셨다 (마 23:10; 막 10:35~45; 요 10:10~15; 13:12~15).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연합하여 제사장이 되었을 때 우리 또한 제사장이 되었음은 지난 분단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제사장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을 신분과 기능의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분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 되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둘째, 그렇다면 기능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① 제사를 드리는 기능에 있어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함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 13:15~16)

② 복을 비는 기능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4)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③ 중보 기도를 하는 기능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다.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엡 1:16)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엡 6:19)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약 5:16) 

지금까지 세 가지 기능(제사, 축복, 중보기도)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게 허락되어 있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기능은 그렇지 않다.

④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능이 아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 6:6)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1)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 3:2)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⑤ 신앙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것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능이 아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롬 1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28)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살전 5:12) 

목회자는 신분이 아니라 기능으로 구분한 것일 뿐

그렇다면 두 가지 기능(말씀을 가르침, 지도력을 행사함)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 가운데 어떤 이는 말씀을 가르치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지도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나누어지는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이나 제사?축복?중보 기도의 기능 때문이 아니요, 단지 말씀을 가르치는 기능과 지도력을 행사하는 기능 때문이다.

그런데 말씀을 가르치고 지도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목회자’라고 부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가리켜 ‘평신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공통점은 두 계층 모두 ① 하나님 앞에서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② 제사·축복·중보기도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목회자의 경우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기능과 신앙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기능이 보유된 반면 평신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초반에 언급했듯이 ‘목회자들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와 ‘아니오’ 두 가지로 구성이 된다.

① 오늘날의 목회자들이나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나 똑같이 말씀(율법)을 가르치고 신앙적(종교적) 리더십을 발휘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연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② 그러나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매우 다르기도 하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일반 백성들과 신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기능(제사·축복·중보기도)을 수행하지만, 구약 시대 제사장들은 자신들만이 이런 기능을 수행했을 뿐 일반 백성은 그 수혜자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일반 그리스도인과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조차 다른 것처럼 잘못 생각하든지 거들먹거려서는 안 된다.

또 자신들만이 제사·축복·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양 오해해서도 안 된다.

단지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신앙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면에서는 경험·지식·기술이 뛰어남으로써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차별화가 되어야 하고, 이로써 다른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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