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스라엘 남북왕조사(남북열왕조의 연대기)

by 갈렙 posted Sep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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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왕조사
분열 왕국의 역사는 히브리 성서 열왕기서의 나머지 부분(열왕기상 12:21∼열왕기하 25장)에 주로 나온다. 남유다 왕조의 20명의 왕들과 북이스라엘 왕조의 19명의 왕들, 총 39명의 왕(사울(재위 B.C.1050~1010), 다윗(재위 B.C.1010~970)과 솔로몬(재위 B.C.970~930)을 합치면 이스라엘의 왕은 총 42명이 된다)에 관한 동시대의 역사를 교차적으로 쓰고 있다. 개별적인 왕들에 대한 보도는 일정한 표현과 형식들로 표준화하여 작성되어 있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먼저, 공시적 연대기를 사용하고 있다. 공시적 연대기란, 왕의 통치 기간 옆에 기록되는 연대가 '~왕 ~년' 또는 '~세에 왕이 된 ~' 등의 방식으로 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열왕기상 15:9, 25, 33 등). 이러한 역사 서술 방법은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이 역사를 서술하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그들의 연대기와 비교하며 읽을 경우 이스라엘의 분열 왕국 시대의 연대기를 확정짓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남북의 통치 햇수 계산법은 서로 달라, 사실적인 연대 구분이 매우 어렵다. 북 이스라엘의 경우, 봄, 니산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고, 또 왕이 죽었을 때 그가 사망한 해를 그의 마지막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정상적으로 같은 해 새 왕이 즉위하면서 같은 해의 남은 기간을 첫 번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반대로, 남 유다에서는 아시리아의 계산법을 따라 가을, 티슈리 월을 새해로 지켰으며, 새로운 계승자가 왕위에 올랐던 그 해의 나머지 기간을 햇수로 셈하지 않고, 그 왕이 만 1년을 다스리게 되는 해부터 계산에 넣었다.
(2) 둘째, 왕들의 행적과 진술(陳述)에 대한 평가는 왕의 치적이 얼마나 크고 중요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수행되었던 예배를 허용하였느냐, 아니냐에 따라 철저히 내려졌다.
이러한 신명기 사가의 신학은 기원전 7세기 남 유다의 16대 요시야에 의해 확정된 것으로써 모든 역사를 그러한 시각에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내려진 결과였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신명기 사가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기록에 불과 140여 절밖에 할애하지 않았으며, 이는 솔로몬의 40년 통치에만 162절을 할애한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그 밖에 남 유다의 왕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3대 히스기야와 16대 요시야만은 무조건 인정을 받았다.
(3) 마지막으로, 왕의 기록에 대한 결어(結語) 공식은 사용된 자료의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남 유다 왕들에게는 '유다 왕의 실록'이, 북 이스라엘 왕들에게는 '이스라엘 왕의 실록'이 그것이다. 동일한 원칙에서 '솔로몬의 실록'도 언급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음은 매우 유감스럽다.

 

 

1. 북이스라엘의 역사(왕상12장~22장, 왕하1장~17장) (B.C.930~722)
세겜과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 이스라엘은 유다에 비해 영토가 넓고 비옥했으며 군사력에 있어 남 유다를 훨씬 능가했다. 다만 옛 지파 동맹의 중심에 위치하였으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동질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었으며, 지리적 여건도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세의 영향을 받기 쉬웠을 뿐만 아니라 왕조의 정당성과 이념의 부재 등으로 말미암아 국내 정세는 불안정하였다.
北 이스라엘(B.C.930~B.C.722(208년), 首都 사마리아)은  ‘9王朝 19왕’이 역성혁명(易姓革命)과 이신벌군(以臣伐君)으로 '여로보암의 길'로 달려가므로 19대 호세아(B.C.732~722) 때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B.C.722~705)에게 정복당한후 사르곤 2세(B.C.722~705)에게 B.C.722년에 멸망당함.
1대 여로보암 왕조, 22년간(①여로보암-②나답(여로보암의 둘째 아들)
2대 바아사 왕조, 24년간(③바아사(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로 왕위 찬탈)-④엘라(바아사의 아들)
3대 시므리 왕조, 7일간(⑤시므리(세라의 아들)
4대 오므리 왕조, 43년간(⑥오므리(엘라의 군대장군, 베냐민사람 베개의 아들)-⑦아합(오므리의 아들)-⑧아하시야(아합의 첫아들)-⑨여호람(아합의 둘째아들, 요람)
5대 예후 왕조, 89년간(⑩예후(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⑪여호아하스(예후의 아들)-⑫요아스(여호아하스의 아들)-⑬여로보암2세(요아스의 아들)-⑭스가랴(여로보암2세의 아들)
6대 살룸 왕조, 1개월간(⑮살룸(야베스의 아들)
7대 므나헴 왕조, 12년간(므나헴(가디의 아들)-브가히야(므나헴의 아들)
8대 베가 왕조, 20년간(베가(르말랴의 아들)
9대 호세아 왕조, 10년간(호세아(엘라의 아들)
B.C.930년 솔로몬 사후 등극한 여로보암 왕으로부터 B.C. 722년 앗수르에 멸망당할 때 마지막 왕인 19대 호세아(B.C.732~722)에 이르기까지 약 208년간 유지해 온 북이스라엘 왕조는 모두 19명의 왕을 낳았다. 4왕조 오므리 왕조와 5왕조 예후 왕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통치 기간이 짧았다. 19명의 왕 가운데 8명이나 암살되는 등 비교적 불안정한 파란의 역사를 겪었다. 구약 히브리 성서는 대부분 이들 왕들을 나쁘게 평가하고 있다. 남북의 동명이인은 다음과 같다.

남북왕조의 동명이인.jpg
남유다(시드기야(B.C.597~586)때 바벨론 느부갓네살2세(B.C.605~562)에게 B.C.586년에 멸망)
북이스라엘(호세아(B.C.732~724)때 앗수르 사르곤2세(B.C.722~705)에게 B.C.722년에 멸망)

남유다                                    북이스라엘

⑤여호람(요람)                        ⑨여호람(요람)
⑥아하시야                              ⑧아하시야
⑧요아스(여호아스)                  ⑫요아스(여호아스)
17여호아하스                           ⑪여호아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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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이스라엘
●1왕조, 1대 여로보암/Jeroboam(B.C.930~910, 왕상11:42~14:31, 22년 재위)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 이름의 뜻은 ‘백성이 많음’이다. 선지자 아히야가 여로보암이 장차 열 지파의 왕이 되리라는 것을 예언했듯이 그는 많은 백성의 왕이 되었다(왕상11:29~40).
①그는 솔로몬의 신하로 왕의 미움을 사서 애굽으로 도망가 당시 애굽 왕 시삭의 보호를 받다가 돌아와 열지파의 왕이 되었다. 솔로몬의 억압적인 정책과 시정 방침에 불만을 품은 자들의 소행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이 사건은 지파 동맹 시대부터 내려오던 남북 간의 구(舊) 동맹 관계가 깨지고, 사울 시대로부터 잔존해 있던 지파 간의 갈등이 재현된 것이었다. 그는 아주 작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그것이 그의 소외감을 자아내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②세겜을 수도로 정하여(왕상 12:25)열 지파의 반란을 주도해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였다. 그는 열지파의 왕이 되어 북 왕국을 세우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③열 지파들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남 왕국의 수도)에 있는 성전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고 사마리아 지방의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성전을 별도로 세웠다(왕상12:26,29). 세겜을 요새화하여 자기 거처로 삼았으며(왕상12:25), 그 후 요단 동편에 부느넬을 건축하여 수도를 옮긴다. 그 후 디르사로 수도를 다시 옮긴다(왕상14:17,15:21;15:21,23). 여로보암은 여호와께 충성하면 영원한 왕조를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왕상11:38) 약속을 따르지 않고 악을 행한다. 여호와를 섬김과 동시에 바알도 섬기고 금송아지도 섬긴다(왕상14:9,15). 이를 가리켜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한다. 그래서 징벌이 임한다.
④그의 이교 제단은 파괴되고 그의 팔은 마비되며 그의 아들은 그의 죄로 하나님의 치심을 당함. 그는 사제 계급인 레위인들을 몰아내고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임명하여 세웠으며, 절기의 날짜(달력)를 임의로 바꾸어 버렸다(왕상 12:31~33).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자 아히야에게 그는 이전에 그의 아내를 몰래 보내보지만 결국 아들이 죽는다(왕상14:1,2,10~16).
⑤남왕국의 2대왕 아비얌에게 전장에서 패함.
⑥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입어 사망.

●2대 나답/Nadab(B.C.910~909, 왕상15:25~28, 2년 재위):
유다 왕 아사 2년에 왕이 되어 2년간 통치, 그의 이름은 ‘고상하다’이지만 이름값도 못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었다. 종교적으로 나답은 아버지를 따른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으로 있을 때에 블레셋사람들이 영토를 확장하려 분쟁을 일으킨다. 이들은 블레셋이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고, 나답의 수하 장군인 바아사가 반란을 일으켜 나답을 죽이고 왕이 된다. 나답이 죽음으로 여로보암왕조는 끝나고 바아사 왕조가 시작된다.
●2왕조, 3대 바아사/Baasha(B.C.909~886, 왕상15:27~16:7, 24년 재위)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①나답의 부하로 있다가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바아사는 20년간 3차례나 일어난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세습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폭력적인 권력다툼과 내정의 불안정이 이어졌다. 나답을 죽여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을 성취. ②남 유다의 왕 3대 아사가 통치하던 때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자, 아사는 다마스쿠스의 아람 왕 벤하닷에게 원군을 요청하자 벤하닷은 갈릴리 북부 지역을 정복하였다(왕상 15:16~22). 수도 디르사. ③여로보암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문도 그와 똑같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음. 그는 여로보암을 본받아 이스라엘의 백성을 우상숭배에 빠뜨린다. 라마 성을 건축하다가 중단한다. 아들 엘라 때 전멸 당한다.

●4대 엘라/Elah(B.C.886~885, 왕상16:6~14, 2년 재위):
①바아사의 아들. ②궁중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술에 취해서 시므리에게 살해당함.

●3왕조, 5대 시므리/Zimri(B.C.885, 왕상16:15, 7일 재위):
①바아사의 후손을 멸함으로써 예언을 성취.엘라의 장관으로 있다가 엘라왕을 죽이고 왕이 됨. ②군대장관 오므리의 공격을 받자 불을 놓고 자살함. 그의 이름은 주인을 살해한 자에게 붙여짐. 디르사에서 7일간 다스림.

●4왕조, 6대 오므리.Omri(B.C.885~874, 왕상16:15~28, 12년 재위)(⑥오므리-⑦아합-⑧아하시야-⑨여호람)
정국이 불안정한 틈을 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베냐민 사람 베개의 아들 오므리는 4년간에 걸친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군주 국가를 만들어 나갔다. 엘라의 군대 장관으로 있다가 왕을 모반하고 시므리의 반란시 백성들의 지지로 왕이 되었다. ①사마리아를 북왕국의 수도로 삼음. 그는 세멜에서 산을 사서 성을 건축하고 사마리아라 하고 화려한 상아궁을 건설하고 천도하였다(왕상 16:24, 22:39). ②이때까지의 왕 중 가장 막강한 왕. 페니키아, 다마스쿠스 및 유다와 군사 동맹을 맺고 왕성한 무역 활동을 개시하였다. 또 모압을 정복하고 봉신국으로 삼았다(열왕기하 3:4). 외국에서 볼 때도 '오므리 왕국'으로 표기될 정도로 그 위세를 떨쳤다. 오므리 왕조는 북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강대한 때였다. ③아들 아합을 이세벨과 결혼하도록 주선.

●7대 아합/Ahab(B.C.874~853, 왕상16:28~22:40, 22년 재위):
①그의 바알 숭배가 나라에 큰 기근을 초래함. ②두번이나 수리아군을 격파하도록 허락받음. ③경건한 왕 여호사밧을 꾀어 두 가지 타협:결혼 동맹과 군사동맹을 맺게함. ④무수한 죄로 인한 자신을 죽음을 세 예언자들로부터 들음. ⑤자신의 아내 이세벨의 죽음은 선지자 엘리야에 의해 예언됨. ⑥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회개를 함. ⑦수리아와의 전투에서 전사.
오므리의 아들 아합에 의해 완공된 수도 사마리아에 상아궁을 짓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왕상 22:39). 하솔과 므깃도의 마병장과 수로용 터널은 바로 이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왕상 16:31), 바알숭배를 공식적 종교로 받아들이고 신전을 지었다. B.C.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B.C.858~824년)에게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파견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성서는 그를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길르앗 출신의 선지자 엘리야와 동시대인(왕상 17장∼19장).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
므깃도의 마병장에서 발굴된 구유와 말을 묶어 두던 돌

사마리아에서 발견된 상아 그룹

●8대 아하시야/Ahaziah(B.C.853~852, 왕상22:40~왕하1:1, 2년 재위):
①아합과 이세벨의 첫째아들.(여호람(요람)은 아합의 둘째아들), ②여호사밧을 설득하여 에시온게벨에서 공동으로 배를 건조하도록 하였음. ③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궁전에서 떨어져 병들었음. ④치유를 위하여 이방 신 바알세불에게로 돌아섬. ⑤이로인해 엘리야로부터 비난을 받자 그 선지자를 체포하려고 하였음.
아합의 후계자로 남유다의 왕 5대 여호람에게 자기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줌으로써 남북 관계를 우호적으로 이끌어 갔다. 두 나라 사이에는 군사 지원을 요청할 수 있을 만큼 관계가 개선되었다. 사실상 북 이스라엘이 오므리 왕조가 쌓아 둔 힘을 이용하여 남북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고 이를 행사한 것이었다(왕하 8:16~24). 북 이스라엘에서는 오므리 왕조에 대한 반감이 계속 고조되고 있었다. 이 저항 운동은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이끌었다. 그는 국가 정책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면서 '선지자 집단'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왕하 2:3). 에시온게벨에서 파선된 배를 재건해 다시스와 무역하기를 원함. 왕궁 다락난간에서 떨어져 심한 부상을 입고 엘리야의 예언대로 병상에세 죽음. 아하시아의 죽음은 남 유다와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이러한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 와해로 북이스라엘은 물질적인 번영의 주요 원천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이스라엘에게 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제무대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아시리아의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은 아람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굴욕적인 경험과 아람의 그늘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9대 여호람(요람)/Joram(B.C.852~842, 왕하3:1~9:25, 12년 재위):
①아합과 이세벨의 둘째 아들.②여호사밧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수리아와 대항. ③엘리사가 전쟁에서 이기도록 기적을 베품. ④후에 엘리사로부터 수리아의 복병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음. ⑤엘리사는 그가 초자연적 사건으로 눈이 멀게 된 수리아의 군대를 도륙하지 말도록 말림. ⑥나아만이 문둥병을 낫고자 하여 왔을 때 여호람은 왕위에 있었음. ⑦하나님이  문둥병자4명을 시켜 사마리아를 기근에서 구출하도록 하셨을 떄 왕위에 있었음. ⑧아람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장군 예후의 활에 죽임을 당하고 나봇의 포도원에 던져짐.
●5왕조, 10대 예후/Jehu(B.C.841~814,왕하9:1~10:26, 28년 재위)(⑩예후-⑪여호아하스-⑫요아스-⑬여로보암2세-⑭스가랴) :
약 43년간 유지해 오던 오므리 왕조는 극심한 타락과 호화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백성들과 점차 멀어져 갔으며, 민중들의 불만은 계속 커져 나갔다. 급기야 길르앗 출신의 선지자 엘리사는 그의 제자를 보내 길르앗 라못에 사는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로 왕을 세움.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숭배를 근절(바알선지자와 숭배자들을 살해함)하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완전치 못하여 비난받음(왕하10:29,31).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예후 왕조가 바알 숭배를 근절하기 위해 사마리아의 바알 제단에 모든 사제들을 불러 모은 후, 신전을 부수고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왕하 10:18~27). "이렇게 하여 예후는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로부터 쓸어 버렸다."(왕하 10:28). 외형적으로 혁명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종교 개혁을 통하여 고대의 신앙을 회복하였으나, 피 흘림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호세아서 1:4).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예언자 아모스(소수에게 편중된 부와 권력 구조를 비판하였으며, 경제적 착취를 날카롭게 고발), 호세아는 그의 착취와 불의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여호와의 심판을 선언하였다. 예후는 곧 군대의 장군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북 이스라엘의 요람과 남 유다의 6대 아하시야를 처형하고(열왕기하 9:14~29), 아합의 왕비인 이세벨과 아합 가문의 모든 남은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왕하 9:30~10:11). 예후 왕조의 피의 숙청은 오므리 왕조의 정책에 의거하고 있던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를 한꺼번에 파괴시키고 말았다. 이세벨의 처형으로 두로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11대 여호아하스/Jehoahaz(B.C.814~B.C.798, 왕하 13:1~9, 17년 재위):
①예후의 아들. 휘하 군대가 수리아군에 의하여 거의 섬멸됨.아람 왕 하사엘에게 패배. 아람군대의 공격을 받을 때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음. ②자신의 죄에 대하여 짧은 기간 동안 후회하였으나 진정한 회개는 하지않음.
●12대 요아스(여호아스)/Joash/Jehoash(B.C.798~B.C.782, 왕하 13:10~14:16, 16년 재위):
여호아하스 왕의 아들, ①병상에 누운 엘리사를 찾아가 울었고 엘리사의 예언대로 부왕이 잃었던 성문들을 아람 왕에게서 빼앗고 세 번쳐서 이김. 아람 왕 하사엘이 죽고, 아들 벤하닷(Ben-Hadad)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함. 자기의 장자를 이스라엘의 창건자 여로보암의 이름을 땀. 유다의 요아스와 싸워 승리함. ②전장에서 아마샤를 패배시킴. ③아마샤의 오만한 요구를 조롱하기 위한 구약성서의 우화를 말함. ④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많은 인질과 재물을 가져감.

●13대 여로보암 2세/Jeroboam(B.C.793~753, 왕하14:23~29, 41년 재위)
요아스의 아들, 그는 북쪽 다마스쿠스와 동부 아람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경을 넓혀 나갔다(왕하14:23).
①북왕국왕 중 최장기 통치. 가장 막강한 왕중 하나. ②이스라엘이 상실한 영토중 상당 부분을 회복. 솔로몬 시대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번영을 누렸으나 이러한 번영은 사회 내부의 부패로 이어져 망국병으로 번져 나갔다. 두드러진 빈부의 격차는 부패의 표상이었다. 부자들의 탐욕은 부정적인 관행을 낳았으며, 권력을 이용한 재산의 강탈과 토지의 몰수는 가난한 자들이 생활고에서조차 구제받을 길을 차단해 버렸다(아모스서 2:6, 5:10~12, 8:4~6). 사회적 부패는 종교적 부패와 보조를 같이하였다. 대부분의 성소에는 예배자들로 붐볐지만, 순수한 형태의 여호와 신앙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가나안의 토착 신 바알과의 혼합주의는 야훼의 신앙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혼합되어 있었기에 드고아 목동 출신의 아모스, 사랑했던 아내의 배반을 경험한 호세아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북이스라엘의 몰락과 멸망
B.C.752년 예후 왕조가 붕괴된 이후 국제 정세는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해지기 시작하였다.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를 동원하여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B.C. 743년, 그는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였으며, 북시리아의 아르파드 왕국과 하맛 왕국을 정복하고 동부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그는 이집트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반(反)아시리아 연합군을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 -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였다.

●14대 스가랴/Zechariah(B.C.753~752, 왕하14:29~15:12, 6달 재위):
①예후의 4대손. 여로보암2세의 아들, ②살룸이라는 폭도에게 피살. 하나님이 예후에게 내린 예언이 성취됨.단지 6개월만에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가랴는 야베스의 아들 살룸에게 암살당하고, 이후 다섯 왕들 가운데 4명이 암살당하는 등 북 이스라엘의 말기는 매우 불안정하였으며, 이로써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되던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5대 살룸/Shallum(B.C.752,왕하15:10~15, 1달 재위):
①므나헴이라는 잔인한 병사에게 살해됨.
예후 왕가를 무너뜨렸으나 불과 한 달동안 왕위에 있다가 혁명을 일으킨 가디의 아들 므나헴에게 죽음.

●16대 므나헴/Menahem(B.C.752~742, 왕하15:14~22, 10년 재위):
①이스라엘의 지독한 독재자 중의 한 사람. ②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불’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1,000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치도 매수.
●17대 브가히야/Pekahiah(B.C.742~740, 왕하15:22~26, 2년 재위):
①므나헴의 아들.부하 군대장관인 베가에게 피살.
●18대 베가/Pekah(B.C.740~720, 왕하15:27~31, 20년 재위):
①752-740동안 므나헴과 공동섭정기간. ②앗수르에 대항하여 연합할 것을 거절한 유다에 보복하기 위해 수리아와 연합하였으나 실패함. ③앗수르가 이스라엘 북부와 동부의 성읍들을 함락시킨 일이 그의 치세기간에 있었음. ④호세아에게 피살.
디글랏빌레셀은 북방 팔레스틴을 침입하여 납달리를 점령함. 나라 전체는 내란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북이스라엘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호세아서 9:11~17, 13:9~13).

●19대 호세아/Hoshea(B.C.732~722, 왕하15:30~17:6, 9년 재위):
①베가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됨. ②앗수르에 대항하여 애굽과 연합. 이로인해 앗수르에 감금당함. 유프라테스 강 서편 지역과 지중해 연안을 공격하기 시작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의 공격을 받아 3년간 포위되어 수도 사마리아는 B.C.722년에 함락되었다(왕하 17:1~6). 아시리아의 속주 체제에 편입된 이 지역은 아시리아의 총독이 다스렸다. 더구나 귀족들은 아시리아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며, 이 지역에는 아시리아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통혼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과 종교적 전통은 말살되어 갔다. 앗수르 사르곤 2세에 멸망했다.
솔로몬의 억압 정치로부터 벗어나려고 독립하였던 북 이스라엘은 왕들의 계속되는 억압과 권력 남용으로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히브리 성서는, 멸망의 원인은 북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타 민족의 신을 섬기므로 여호와의 눈에 벗어났기 때문이었다(왕하 17:7~18). 이제 열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2의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호세아서 2:14~15).
▶분열시대의 활동한 선지자들
유다지방(요엘.미가.이사야.예레미야.하박국)/ 이스라엘지방(엘리야.엘리사,아모스,호세아)/ 앗수르지방(요나)/ 에돔지방(오바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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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南) 유다(왕상14~15장.왕하8~25장.대하~36장) (B.C.930~586)
남유다는 20대 시드기야 왕( B.C.597~586) 때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 B.C.605~562)에게  B.C.586년에 멸망함.
①르호보암-②아비야-③아사-④여호사밧-⑤여호람(요람)-⑥아하시야-⑦아달랴 여왕-⑧요아스(여호아스)-⑨아마샤-⑩아사랴(웃시야)-⑪요담-⑫아하스-⑬히스기야-⑭므낫세-⑮아몬-요시야-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①르호보암 /Rehoboam(B.C.930~B.C.913)(대하10장, 왕상 14:21, 31/41세 즉위, 17년 재위): “백성을 번성케 함”의 뜻.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됨.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겜에서 그를 왕으로 삼고자 했을 때 여로보암과 열 지파들이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역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왕상 12:3-4). 그는 백성의 요청을 무시하므로 이스라엘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나뉨(왕상 12:12-14; 20).   르호보암은 남 왕국 유다(유다+베냐민 지파)의 1대왕이 됨. 그는 이스라엘을 정벌하려했으나 예언자 스마야가 말림. 그 후 르호보암은 유다를 안정시키고 곳곳에 요새를 세워 국방을 강화함. 게다가 이스라엘에 있던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유다는 더욱 강해짐.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백성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막으려고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우상을 섬기게 하므로 정 책에 반발하여 많은 레위사람이 유다로 왔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왕권과 나라가 튼튼해지자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자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이집트의 공격을 받게 함. 르호보암과 지도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해서 멸망을 간신히 피했지만 다시 악한 일(우상숭배)을 했다.
    유다와 베냐민에 의해 남유다의 왕으로 세워진 르호보암은 군대를 결성하여 북왕국을 치려고도 했으나 이를 막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듣고 포기하였다(왕상 12:21-24; 대하 11:1-4). 그 후 르호보암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대하 11:4) 북이스라엘로부터 레위 족속과 제사장을 받아들이는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대하 11:13-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3년 동안 그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를 세웠다(대하 11:12).
르호보암의 아내는 마할랏, 마아가 등 18명이었으며 첩이 60명이었고, 여우스, 스마랴, 사함, 아비야 등 아들 28명과 딸 60명을 두고(대하 11:18-23) 호화생활을 하다가 결국 애굽왕 시삭의 침략을 받아 왕궁의 보물과 재물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왕상 14:21-28; 대하 12:1-8). 그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악을 행했다(왕상 14:22-24; 대하 12:1-15). 하나님의 뜻과 백성의 소리를 저버린 자의 마지막이 어떠하다는 교훈을 그에게서 배울 수 있다(대하 11:18-23). 17년 간의 남유다 통치의 막을 내렸다(왕상 14:31; 대하 12:13, 16).
●②아비야/Abijah,아비얌/Abijam(B.C.913~B.C.910)(대하13장,왕상15장/3년 재위):
르호보암 왕은 아내가 둘이다(마할랏, 마아가), 모친 마아가(대하13:2, 기브아사람 우리엘의 딸/왕상15:2아비살롬의 딸), 역대기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속한 ‘야’가 그의 이름에서 탈락되어 ‘아비얌’이라고 불리고 있다.  “여호와는 아버시시다”라는 뜻, 아비야와 아사의 모친은 모두 마아가(왕상15:2,16). 아사의 선왕이었던 아비야의 모친도 마아가였으므로(왕상15:2,10)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아사왕의 모친 마아가는 계속 살아서 태후로 있었기에 그를 모친으로 표현했다.(대하15:16).
유다왕 르호보암의 아들. 모친은 압살롬의 딸 마아가. 왕상 15:31에는 아비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스라엘왕 여로보암과 싸웠다(왕상 15:7).
장자는 여우스(대하11:21)였으나 마아가를 총애하여 그녀의 아들 아비야를 세자로 간택. 아비얌은 본명이고 왕위에 오를 때 아비야를 취함. 르호보암의 아들로 유다의 두 번째 왕이다(왕상 14:31; 15:1, 7-8). 그는 3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아비야로도 불렸다(대하 13:21). 유다용사 40만(대하 13:3)이 이스라엘 군대 80만과 에브라임 산에서 대진하여 50만명을 죽이고 대승함.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 이스라엘이 택한 병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엎드러진 자들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아내 열넷을 거느려 아들 스물둘과 딸 열여섯을 낳았더라”(대하13:17,21)
●③아사/Asa(B.C.910~B.C.869)(대하14장~16장,왕상15장/41년 재위):
아비야가 죽자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됨. 그는 조상들이 만든 산당과 우상을 없애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따르도록 했으므로 하나님이 유다 땅에 평화를 주셨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도 큰 승리를 얻었고 다시 한 번 종교개혁을 실행함. 아사 26년 (역대하에서는 36년 기록) 이스라엘이 위협하자 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과 동맹을 맺고 또 하나님의 예언자를 감옥에 가두고, 이 일을 반대하던 백성을 학대, 결국 아사는 발에 심한 병이 나서 2년 만에 죽었다.
르호보암이 죽자 그의 아들 아비야가 왕이 됨. 아비야와 여로보암이 큰 전쟁을 치렀는데 여로보암의 군대는 아비야의 군대보다 2배나 많았지만 아비야가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유다는 대승을 거둠.
아비얌의 아들, ‘헬‘ 아삽, 예루살렘에서 41년간 치리.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비얌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려고 선한 왕 아사를 세우셨다. 아사의 군대는 유다 군사30만과 베냐민 군사 28만으로 구스사람 세라의 군사100만과 병거300승을 그랄 까지 쫓아내고 승리함. 선지자 아사랴의 예언을 듣고 우상물을 제거하고 여호와를 찾으므로 평안을 주심. 모친 마아가가 만든 아세라 주상과 아세라상을 찍고 산당과 태양상을  제거했으나 아세라목상을 만든 모친 마아가는 태후(太后)의 위를 폐함. 이스라엘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오자 바아사와의 약조를 깨고 아람왕 벤하닷(헤시온의 손자.다브림몬의 아들)에게 뇌물을 보내어 매수하자  선견자 하나니가 책망하기를 "왕이 아람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이후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라" 고 하매 크게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둠. 벤하닷으로 이스라엘 북방을 공략하게 하므로 아사왕은 라마를 취하고 그곳의 물자를 이용하여 남북 왕국의 영구적인 분열을 지향하고 있던 이스라엘왕 바아사가 최남단에 있는 라마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건축을 중단하자 그 돌과 재목을 가져와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함. 아사왕 39년에 발이 중병에 걸려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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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여호사밧/Jehoshaphat(B.C.871~B.C.847)(대하17장~22장,왕상15장/35세 즉위, 25년 재위):
아사의 뒤를 이어 여호사밧이 왕이 됨. 그는 종교개혁으로 우상을 없애고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친 결과 유다는 솔로몬시대의 번영에 버금가는 강성한 나라가 됨. 그러나 그의 잘못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동맹을 맺고, 예언자 미가야의 말을 듣고도 아합과 연합하여 아람을 공격한 결과 그 전쟁에서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을 건짐. 이에 여호사밧은 회개하고 종교개혁을 실시함.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모압, 암몬, 마온의 공격도 이길 수 있었으며 그동안 유다는 늘 태평했다.
“신의 재판”이란 뜻, 아사 왕의 아들, 35세에 즉위. 모친 아수바(실히의 딸). 여호사밧은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개혁운동을 철저히 진행시키고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레위인과 제사장들과 방백 가운데서 사람을 뽑아 유다 전역을 돌며 율법책을 가르치게 했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여 5개 군단(아드나,여호하난,아마시야,엘리아다,여호사밧)에 총116만 군사를 직속관할로 두고 각 성읍마다 수비대가 조직되어서 이방세력이 넘보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과 화해를 꾀하여 그의 재위기간 중 유다와 이스라엘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아합의 딸 아달랴를 정략적으로 자기의 아들과 혼인시킴으로써 훗날 큰 화를 부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7아들들(여호람,아사랴,여히엘,스가랴,아사랴,미가엘.스바댜. 대하21:2). 여호사밧 왕 때에 서쪽의 블레셋이 공물을 바침. 이스라엘 왕 아합과 더불어 연혼함. 연합하여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치러 가자 할 때 앵무새처럼 한목소리로 지껄여대는 거짓 선지자 400인은 '올라 가서 치소서' 하였다. 반면 미가야 선지자는 정반대로 여호와의 말씀을 예언하여 아합이 전쟁에서 죽임을 달할 것이라고 하므로 미가야를 옥에 가둠. 연합한 두 왕은 미가야의 말을 무시하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오게 된다.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징벌로 패배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견자 예후(이스라엘 왕이 아님,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도 아사 왕 때에 잘못을 경고했는데, 아들 예후도 여호사밧 왕에게 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를 통해서 여호와의 책망을 듣고 깨달아서 개혁운동을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시킨다. 율법책을 가르치고 재판제도를 개혁한다. 종교적인 문제의 송사는 대제사장(아마랴)이, 민사상의 송사는 유다 지파의 족장(스바댜)이, 관리는 레위인이 맡도록 했다. '다윗성'(본래 여부스(예루살렘) 사람의 산성인 '시온산' 성을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가 두목이 되었다. 다윗이 정복하고 거기에 머무름으로 인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대상11:4~7)에 장사됨.
(1)제4대 유대왕 (왕상 15:24, 마1:8). 아사의 재위 중에 즉위(아사왕39년. B.C.892년)
(2) 그 부친 아사왕을 본받아 정치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리었으나 이스라엘왕 아합과 화친하여 혼인하였다(대하18:1).여호사밧은 아합의 동맹군과 아람왕 벤하닷에게 전쟁했으나 이스라엘 선지자 400명은 출정을 권했으나, 정반대로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대로 아합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을 구함.
(3) 아합과 같이 길르앗 라못을 치다가 실패하였다(왕상 22:29-36)
(4) 모압 암몬 세일인이 동맹하여 공격해올 때 여호와한테 간구하니 자기들끼리 피차 살륙하게 하여 한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죽었다 (대하20:1,23:24).
(5) 그는 35세에 즉위하여 25년간 유대국을 치리하였다(대하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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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여호람/Jehoram(B.C.847~B.C.840)(대하21장,왕하8장/32세  즉위, 8년 재위):
여호사밧이 죽자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됨. 여호람은 왕권을 견고히 하고 독재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자기 형제들과 신하들을 숙청, 여호람은 아내 아달랴(아합의 딸)의 영향을 받아 우상을 숭배, 얼마 후 에돔(다윗 시대에 정복되어 여호사밧 때는 이스라엘에서 임명한 섭정왕이 통치함)과 립나가 반란을 일으킴. 여호람은 악을 행했고 예언자 엘리야의 경고에도 회개하지 않아 결국 블레셋과 아라비아사람들의 침략으로 유다는 예루살렘까지 유린당함. 그후 여호람은 창자가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병으로 죽음.

'여호와는 존귀하심'의 뜻, 요람, 32세에 즉위. 여호사밧 왕의  7아들들(여호람,아사랴,여히엘,스가랴,아사랴,미가엘.스바댜. 대하21:2)중의 장자. 이스라엘 9대왕도 여호람(아합의 아들). 재위 중에 엘리야(그는 B.C.850년경 세상을 떠남)가 사역함(대하21:12)
[1] 유대왕, 여호람은 B.C.853년경 여호사밧이 죽기 전에 이미 섭정왕이 되었다(왕하8:16)
(1)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위를 32세에 계승하였다(왕하 8:16).
(2) 여호람이 아합왕의 딸 아달랴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여러가지 죄악을 범행하게 하고 그 동생을 죽였다. 그 모든 죄의 보응으로 립나와 에돔이 배반하였다(왕하 8:20,21,대하21:8-10).
아합은 시돈왕 엣바알(=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엣바알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을 겸임한 자)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은 뒤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신의 추종자가 되어 사마리아에 바알 산당을 세우고 아세라목상까지 세웠다(왕상16:31~33).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써 북왕국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만연되었듯이, 여호람이 아합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남왕국 유다에도 우상숭배가 들어오게 되었다.
(3)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왕궁의 재물과 처자를 탈취하므로 여호아하스만 남겨놓고 자신은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나오는 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분향도 하지 아니하고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도 않았다(대상2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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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아하시야/Ahaziah,여호아하스(B.C.840)(대하22장,왕하8장/42세 즉위, 1년 재위):
여호람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어 (형들이 모두 죽은 덕분에 막내로서 왕이 됨) 그 역시 어머니 아달랴의 영향을 받아 악한 짓을 하고 이스라엘의 요람왕과 동맹을 맺어 아람왕 하사엘과 전쟁을 치름. 그후 아하시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스라엘 왕 예후에게 죽임을 당함.
' 여호와의 소유'란 뜻, 42세에 즉위. 모친 아달랴(오므리의 손녀). 아라비아 사람과 함께 왔던 침략군에게 여호람의 모든 형이 죽음. 여호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컸으므로 여호람 왕의 말째 아들 아하시야만 남김 (이스라엘 8대왕도 아하시야(아합의 아들). 여호람은 B.C853년 경 여호사밧의 섭정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부친 여로람이 죽은 후에 아하시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으로 이스르엘로 돌아옴. 요람이 병들자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가 이스르엘로 내려가 방문함. 사마리아에 숨었다가 예후에게 죽다.
[1] 북 이스라엘 왕(B.C. 880-849). 부친 아합왕의 왕위를 계승. 부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대신에 바알신을 섬겼다. 그는 사마리아의 왕궁난간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재위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왕상1:2, 대하20:35-37).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죽었다(왕하 1:2).
[2] 남 유다왕 여호람의 막내아들(B.C. 842-841). 왕위에 있은지 겨우 1년만에 이스라엘왕 여호람과 연합하여 수리아를 치다가 북왕국의 개척자 예후에게 치명상을 입고 므깃도로 도망해 거기서 죽었다(왕하 8:29).
아하시아는 북이스라엘의 제8대 왕이며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이다. 그는 유다왕 여호사밧 17년에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2년간(BC 854-853년) 이스라엘을 다스린 악명 높은 왕으로 알려져 있다. “유다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왕 아하시아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아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이었더라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더니”(대하20:35-36)
선지자 엘리에셀이 여호사밧과 아하시아의 결합을 못 마땅히 여긴 나머지 그 배가 순항치 못하고 파선될 것을 예언했다.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 하였더라](왕상 22:48-49)
그후 아하시아는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에그론에 있는 바알세붑(파리신으로 병충해와 기타 재해를 예방하는 신)에게 사자를 보내어 병이 회복될 수 있나 없나를 알아보게 했다(왕하1:2).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슥3:4.왕하1:8,마3:4,히11:37) 선지자의 복장은 ‘털옷’이었다)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바알세불’의 변형. ”파리떼의 주(主)“란 뜻. 바알숭배의 중심지인 시돈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고 유독 블레셋에 속한 에그론으로 보내려 한 이유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마 바알 신앙의 중심지들 중 에그론이 사마리아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에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왕하 1:3-4)
아하시아의 사자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을 때 왕은 즉시 오십부장과 수하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그를 체포해 오도 록 했다. 이들이 엘리야에게 가서 왕명을 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살라 버렸으며 두번째도 그렇게 했다(왕하 1:9-1 2).
결국 아하시아는 회개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여호와의 계명보다 금을 더 사랑하며, 여호와 신앙보다 이방신을 더 사랑하는 자의 말로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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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아달랴 여왕/Athaliah(B.C.840~B.C.835)(대하22장,왕하11장/6년 재위):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유다왕족들을 죽이고 우상숭배와 악행을 저지름. 다윗의 후손 중 요아스만 겨우 살아남아 6년간 성전에서 숨어 지냄. 유다의 아달랴 여왕 7년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반역을 일으켜 요아스를 왕으로 삼고, 아달랴는 병사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함. 여호야다는 우상들을 파괴한 뒤 제사를 회복시키고 왕권을 확립. 아달랴가 죽은 후 예루살렘은 평화를 되찾음.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 오므리의 손녀로 유다집의 씨를 진멸하지만 아하시의 아들 요아스는 여호사브앗(여호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과 유모가 숨겨 성전에서 6년간 피신함. 외국인 용병의 지원을 받은 제사장들의 과감한 쿠데타였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안식일에 출번,입번하는 자들 중 1/3씩 성전문을 지키고 1/3은 왕궁에, 1/3은 기초문에 있고,벡성들이 성전 뜰에 있을때 병기를 든 제사장과 레위사람들만 성전에서 지키며 요아스를 호위하고 면류관을 씌우고 왕의 만세를 부르며 반역하다. 왕궁어귀에서 아달랴를 칼로 제거한 후 요아스(7세)의 반정으로 그가 즉위함. 바알제사장 맛단을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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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요아스/Joash(B.C.835~B.C.796)(대하24장,왕하12장/7세 즉위, 40년 재위):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따라 선정을 베풀고 성전을 보수했으나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우상을 숭배하고 예언자 스가랴를 처형함. 하나님은 요아스의 죄악을 심판하기 위해 아람군대를 보내어 이때의 전쟁으로 심한 부상을 당했고, 자신의 신하들에게 배신을 당해 살해됨.
7세에 즉위. 아하시야의 아들, 아하시야의 왕족 중 생존한 아들,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을 동안 하나님 보시기에 정칙히 행함. 성전을 중수함. 여호야다는 130세에 죽고  요아스는 타락과 파멸로 충언하는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마저 무리에게 돌을 맞고 성전뜰에서 죽음. 여호와는 아람(수리아) 군대를 보내 징벌하심. 요아스는 모반으로 신하들에게 죽음. 이스라엘 12대왕도 요아스=여호아스(여호아하스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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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아마샤/Amaziah(B.C.796~B.C.767)(대하25장,왕하14장/25세 즉위, 29년 재위):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는 왕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왕권이 확고해지자, 아마샤는 아버지 요아스를 살해한 신하들을 처단하고, 여호람 때 유다를 배반했던 에돔을 정벌해 에돔사람들을 학살하고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와 섬기므로, 이에 크게 노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왕 여호아스(요아스)를 보내 심판하시어 아마샤는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에 끌려간 후 포로에서 돌아온 아마샤는 반역자들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요아스의 아들, 25세에 즉위. 모친 여호앗단. 은100달란트로 이스라엘용사 10만을 삯내다. 유다 30만명과 이스라엘 10만의 남북연합군 40만으로 출정하려다가 선지자의 권유대로 이스라엘 용병을 돌려보내자 유다성읍을 쳐 노략질하고 앙갚음. 단독출정으로 남쪽 에돔 족속을 도륙하고 대승리. 염곡의 승리로 에돔 2만을 격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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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아사랴/Azariah,웃시야/Uzziah(B.C.791~B.C.739)(대하26장,왕하15장/16세 즉위, 52년 재위):
아마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웃시야(아사랴)가 왕이 되어 예언자 스가랴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라를 다스림. 웃시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토 확장. 건축 및 농축산업의 부흥과 군대정비 등의 업적을 이루지만 스가랴가 죽자 교만해진 웃시야는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레위지파 중에 아론자손만이 성소에서 분향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까지 향을 피우러 들어가는 죄를 저질러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병에 걸렸고, 죽을 때까지 별궁에 격리됨.
아마샤의 아들, 16세에 즉위.모친 여골리야(예루살렘 사람).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일을 다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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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담/Jotham(섭정시대)(B.C750~B.C735)(왕하15장/16년 재위):
웃시야가 죽자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됨. 요담은 성전의 문과 성, 요새 등을 건축했고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승리. 요담이 하나님께 항상 복종하므로 나라는 점점 강해짐.

●⑪요담Jotham(King)(B.C742~B.C735)(대하27장,왕하15장/25세 즉위, 16년 재위):  웃시야(아사랴)의 아들, 모친 여루사.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암몬과의 전쟁승리(암몬자손이 은100달란트,밀1만석,보리 1만석을 드렸고 제2년,제3년에도 그와 같이 드림(대하27:5).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3세의 세력확장에 대비하여 동맹후 함께 유다를 손아귀에 넣고 앗수르에 대응하고자 함. 이러한 계획은 요담왕 때 시작되어 아하스왕때에 본격적으로 침략이 나타남(왕하16:5, 사7:1~9).
●⑫아하스/Ahaz(B.C.731~B.C.715)(대하28장,왕하16장/20세 즉위, 16년 재위):
요담이 죽자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어,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 우상의 제물로 바치자, 하나님이 여러 나라를 보내 아하스를 공격하게 하심에도 아하스의 악행이 멈추지 않자, 하나님은 크게 노하심. 아하스는 죽어서 다윗성에 묻혔지만 왕들의 묘지에는 묻히지 못했다.
요담의 아들, 20세에 즉위. 아하스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그 자녀를 불사르고"(대하28:3)는 베니게인들의 예배의식의 일부였다. 모압(그모스=몰렉)과 암몬인 등의 의식에서도 자주 보인다. 이들은 인간의 최고의 제물은 자신들의 맏아들(왕세자)이라고 생각했다(왕하3:27,미6:7). 이스라엘 왕 베가(르말랴의 아들)의 침략을 받아 용사12만명이 죽고 아내와 자녀 20만명을 사로잡아 감. 아람과 이스라엘의 공격과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이 자기 잘못임을 알지 못하고 앗수르 왕(디글랏빌레셀3세=‘불‘.B.C74746~728. 대하28:20.왕하15:19)에 원군을 청하나 앗수르가 아람보다 더 혹독한 압제자가 되어 유다백성을 괴롭히고 약탈함. 친앗수르정책을 고수하여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치는 것에 대항코자 할때 이사야 선지자는 두려워말고 여호와를 섬기라고 외친다. 아람왕 르신이 엘랏을 쳐 유다사람을 쫓아내고 오늘날까지 아람사람이 엘랏에 거주함.
●⑬히스기야/Hezekiah(B.C.715~B.C.686년)(대하29장,왕하18장~19장/25세 즉위, 29년 재위):
아하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자 가장 먼저 종교개혁을 실시함(성전정화, 성전제사제도 회복, 유월절 지킴. 우상파괴, 제사장과 레위인의 조직회복. 십일조의 헌납과 분배), 그후 앗시리아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하자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앗시리아 군대를 물리쳐 주심. 또 죽을 병에 걸렸지만 주께 간구하여 15년간 생명을 연장 받음. 그러나 히스기야는 교만해져 예언자 이사야에게 책망을 받기도 함.
아하스의 아들, 25세에 즉위. 모친 아비야(스가리야의 딸). 주상(가나안사람들이 섬기던 '돌기둥'. 남성신인 바알의 상징)과 아세라상(가지를 잘라낸 '나무기둥'. 바알을 상징하는 주상(돌기둥)과 함께 산당의 대표적인 예배대상을 부수고 '느후스단'(놋뱀에 붙인 이름으로 놋조각이란 뜻='놋으로 만든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이라 불렀다. 앗수르왕을 배척. 블레셋을 침. 왕 4년에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사마리아 침략으로 국내는 히스기야의 개혁을 반대하고 집안에 우상을 몰래 숨겨두고 섬기며, 국외는 침략으로 재난을 당함. 왕 14년에 앗수르왕 산헤립(B.C705~681)의 침공을 받음, 살만에셀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이 죽자 히스기야는 애굽의 후원을 얻어 두로와 에글론 등과 함께 반앗수르정책을 실시하자 이에 반발한 앗수르의 새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해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성전의 금은을 제공하며 회유함. 산헤립의 제2차 예루살렘 침공때 이사야의 예언대로  앗수르군 18만 5천명이 죽음.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이 왕이 됨. 발라단의 아들(바벨론왕 부로닥발라단=므로닥발라단(사39:1)이 정확한 이름)이 앗수르를 고립시키기 위해 신흥바벨론은 우다와 동맹을 맺고 병든 히스기야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냄. 운명의 적인 바벨론은 신성한 예루살렘과 영광스런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하고 언약궤를 옮겨가며 고국을 떠나온 백성을 흩어놓고 다윗왕국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70년동안 황폐하게 내버려 둘 것이다. 산헤립 왕 자기 아들들에 의해 죽임을 하는데 그 시기는 예루살렘 원정에서 돌아온지 20년이 지난 B.C.681년경으로 산헤립의 본국철군과 죽음을 동일선상에 둔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히스기야 왕14년에 앗수르왕 산헤립의 제2차 예루살렘침공에도 선지자 이사야는 산헤립이 반드시 물러갈것이라 예언한다. 이후 예언대로 앗수르군은 하룻밤에 18만5천의 군대가 전멸하고 산헤립이 죽고,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에 오름.
●⑭므낫세 /Manasseh(B.C.696~B.C.642)(대하33장,왕하21장/12세  즉위, 55년 재위):
히스기야가 죽자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었는데 우상을 숭배하고 성전 안뜰에까지 우상제단을 쌓으므로 하나님이 앗시리아 군대를 보내 치게 하심. 결국 므낫세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회개하므로 므낫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유다를 다스리게 함. 그후 므낫세는 우상은 물론 우상을 위한 제단 또한 모두 없앰.
'잊어버림'. 12세에 즉위했으나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군신들의 권유와 자문으로 국정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히스기야의 아들. 모친 헵시바. 남북조를 통틀어 가장 오랜 재위기간인 55년간이나 통치한 왕.
므낫세는 불행하게도 친 앗수르파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앗수르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됐다. 훌륭한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지 못하고 잘못된 신하들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이방신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됐다. 부친 히스기야와는 반대로 악정을 행하고 바알 숭배를 장려하여 자기 아들까지 희생 제물로 바쳤다.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을 죽인 죄악으로 앗수르에 의해 쇠사슬로 코를 꿰고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감.
저가 말년에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인해 그토록 탈선한 왕인데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게 됐고 왕위가 지속되는 은혜를 받았다.
첫째, 므낫세가 어린 나이에 주변 인물을 잘못 만난 것이 불행이었다. 돌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자.
둘째, 잘못된 통치와 사상은 중간에라도 고쳐야 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큰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궁궐 동산 곧 웃사(Uzza)의 동산에 장사됨.
●⑮아몬/Amon(B.C.642~B.C.640)(대하33장,왕하21장/22세 즉위, 2년 재위):
므낫세가 죽자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자 아몬의 신하들이 반역하여 그를 왕궁에서 죽임. 백성은 반역한 신하들은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8살)를 왕으로 세움.
22세에 즉위. 므낫세의 아들(헬‘ 아모스). 모친 므술레멧. 신복들이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임. 웃시야(Uzza)의 동산 자기 묘실에 장사됨.
●요시야/Josiah(B.C.640~B.C.609)(대하34장~35장, 왕상13장. 왕하22장/8세 즉위, 31년 재위):
왕이 된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실시함. 그때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율법책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너무 슬퍼서 자기 옷을 찢음. 요시야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세우고 우상은 모두 태워버리고 유월절을 지키지만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이집트 왕 느고와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함.
아몬의 아들. 8세에 즉위. 모친 여디다. 선지자 스마야로 하여금 출생 이전에 그의 사역과 이름이 예언됨(왕상13:1~2). 이 예언을 한지 300여년 후에 출생한 인물이다(왕하23:15~16). 여기서 그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예언한 점은 참으로 놀랍다.(바사왕 동방사람 고레스에 대한 사41:1~ 44:28의 예언도 B.C538년 바벨론을 정복함으로써 정확히 성취된다. '부름받은 고레스'에서 '기름받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시야'이므로 고레스를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인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방인으로서(사45:5) 여호와를 알지못하는 사람이므로 그를 메시야의 예표적 인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인준을 받아, 바사와 바벨론을 정복해 유다백성을 귀환시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자라른 것이다.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준행케 함. 종교개혁 스바냐의 예언활동.
요시야의 아들은 맏아들이 요하난이요, 둘째가 여호야김이요, 셋째가 시드기야요, 넷째가 살룸이다(대상3:15~18).
아마겟돈(계16:16,히브리 음)은 이스라엘 골짜기 맞은 편에 있다. 왕하9:27 역사적인 전투지(대하35:22,슥12:11,삿5:19).기원전 1468년 애굽왕 투트모세 3세는 이곳에서 가나안 연합군을 무찌름. 당시 앗수르는 신흥 바벨론 제국의 세력에 밀려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애굽왕 바로 느고(Pharaoh-nechoh, 주전609-579, 느고 2세. 스에즈 운하를 제일 먼저 계획한 사람)가 신흥 바벨론 왕(나보폴라살)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무너져 가는 앗수르를 돕고자 팔레스타인을 거쳐 갈그미스로 향했다. 만일 이전쟁에서 바벨론을 이긴다면 애굽은 메소포다미아 전지역을 장악하는 대국이 될것이었다. 그러난 요시야왕은 바벨론의 세력을 확장하고, 앗수르가 몰락하는 것이 유다왕국에 이로울 것으로 판단해서 바로느고의 출정을 막기 위해 진격했으나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요시야가 바로느고의 경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B.C709년경의  일이다. 기원전 609년 요시야는 애굽왕 느고(제26대 왕조의 2대왕 삼메디고의 아들 느고 2세. 그는 B.C609~594년까지 다스렸다)를 막다가 므깃도(Megiddo, 가나안 땅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전투가 가장 많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스르엘 평야지역 하이파(Haifa) 남동쪽으로 약 32km 지점, 예닌(Jenin) 북서쪽 약 17.6km 지점, 애굽에서 다메섹으로 통하는 통로로서 나사렛으로부터 18km 지점에 있으며 많은 전쟁을 치룬지역이다)에서 전사(왕하23:29. 대하35:20~27). 므낫세와 아몬의 시신이 매장된 묘지에 장사됨. 예레미야도 그의 죽음을 맞아 특별히 그에 애가를 지음으로써 그의 죽음이 백성들엑 얼마나 심각한 재난인가를 암시해 주고 있다(대하35:25). 기원후 1917 제1차 세계대전때 영국군은 터키군을 이곳에서 무찌름. 계16:16(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Armageddon)’= '므깃도산((Har megiddo)’이라는 히브리 말을 희랍어로 옮긴 말이다)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
●여호아하스/Jehoahaz(B.C.609)(대하36장,왕하23장/23세 즉위, 3달 재위):
요시야의 뒤를 이어 그의 넷째아들 여호아하스(살룸)가 왕이 된지 3개월후, 이집트왕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사로잡고 폐위시킨 후 여호아하스의 형,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이름을 바꾸어 왕으로 세움.
   23세에 즉위. 요시야 왕의 아들, 모친 하무달. 치리한지 석달만에 애굽 왕이 예루살렘에서 그 위를 폐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하며 애굽 왕 느고가 또 그 형제 엘리아김을 세워 왕으로 세움. 바로느고가 립나에서 가두어 왕이 못되도록 하고 애굽으로 끌려가 죽음. 이스라엘 11대왕도 여호아하스(예후의 아들).

●여호야김/Jehoiakim(B.C.609~B.C.598)(대하36장,왕하23장 /25세 즉위, 11년 재위):
여호야김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행하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와 여호야김을 포로로 잡아가고 또 성전기구를 가져다가 바벨론의 신당에 두었다.
25세에 즉위. ‘엘리아김’을 여호야긴으로 개명.
"요시야의 아들은 맏아들이 요하난이요, 둘째가 여호야김이요, 셋째가 시드기야요, 넷째가 살룸"(대상3:15~18).
요시야왕의 둘째아들. 여호야김의 아들은 여호야긴(여고냐)과 시드기야이다(대상3:16). 모친 스비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을 3년간 섬기다가 배반함. 갈대아(신바벨론제국을 형성한 여러 소국가들중에서 중추국임. 고대에는 '시날'이란 이름으로 알려짐)와 아람과 모암과 암몬 자손의 군대에 침략당함.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치고 저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다. 느부갓네살의 성전 기명 약탈은 여호야김 재위 3~4년경부터(단1:1)이고, 그후 점차 약탈이 강화되어 11년후인 시드기야 통치 말기(왕하25:13~17)에는 아무것도 남지않고 예루살렘 시가와 성전과 궁궐 등이 모두 불태워짐.
●여호야긴/Jehoiachin(B.C.598~B.C.597)(대하36장,왕하24장/8세,18세 즉위, 석달,석달열흘  재위):
이어서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고니야)이 왕이 되었으나 역시 악해서 다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와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가고 남아있던 성전기구도 다 가져가버림. 바벨론왕은 여호야긴의 삼촌 시드기야를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세웠지만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행하자 제사장들과 백성도 이방민족의 악한 일을 따라하며 죄를 짓고 심지어 예루살렘의 성전을 우상숭배로 더럽히기까지 함에도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를 보내 회개를 촉구했지만 유다 백성은 예언자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죄의 길에서 돌아오지 않자, 결국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 끝에 유다를 심판하기로 하여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18세에 즉위. 여호야김의 아들, ‘헬’ 여고냐(마1:11). 포로로 잡혀 간 여호야긴의 아들은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이다(대상3:17~18). 모친 느후스다. "여호야긴이 잡힌지 37년"(왕하25:27)이란 시드기야11년(예루살렘이 함락당한지 26년이 되는 해)+26년동안이나 포로로 옥에 갇혀지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신바벨론 제국의 창시자 나보폴라살의 아들,B.C.605~562)이 죽고 에윌므로닥(원명은 '아윌마르둑'=느부갓네살에 이어 왕위에 올라 2년을 통치했으나 처남 네리글리살에게 살해 당함)이 바벨론왕이 되자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시드기야/Zedekiah(B.C.597~B.C.586):(대하36장,왕하24장/21세 즉위, 11년 재위):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바벨론은 예루살렘성전을 완전히 파괴한 뒤 성전기구를 모두 가져갔다. 그리고 약49년 후, 페르시아왕 고레스 1년. 예레미야(유다백성이 처음 느부갓네살 왕(B.C.605~562)에게 포로로 끌려간(B.C.605년)부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린(B.C.538년)까지 70년이 지나면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고레스왕은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리고, 글로 적은 조서(詔書)(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B.C.586년) 약49년이 지나(B.C.538년) 고레스왕은 유다백성에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는 조서를 선포한다. 이 조서에 따라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 예수아와 다른 지도자들이 약 5만명의 백성들과 노예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와 고레스 왕 2년(B.C.536년)에 성전건축의 기초를 놓았다. 하지만 사마리아와 주변 민족들의 악의적인 고소로 인해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스3:8;4:5). 유다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유다를 재건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유다의 정통성이 회복될 수 있었다.)를 올림.
“나 페르시아 왕 고레스(메대와 페르시아를 통합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세움)가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내게 주시고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이제 유다의 예루살렘에 그분의 성전은 건축하려고 명령하셨다. 그러니 너희중 하나님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모두 올라가라. 너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모친 하무달. 느부갓네살왕은 여호야긴의 숙부,
"요시야의 아들은 맏아들이 요하난이요, 둘째가 여호야김이요, 셋째가 시드기야요, 넷째가 살룸"(대상3:15~18).
요시야 왕의 셋째아들인 ‘맛다니야'(여호와의 선물)를  '시드기야'(여호와의 의)로 개명함. 왕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섭정자로 본다. 왜냐하면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은 여호야긴을 계속해서 유다왕으로 대접했기 때문이다(왕하25:27~30).
예레미야의 예언(렘25:11, 29:10)을 듣지 않음으로 갈대아왕(느부갓네살을 가리킴. 갈대아사람의 본고장은 바벨론 남동쪽 해안지방이었는데 거기서 바벨론으로 점점 밀고 들어갔다.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살도 갈대아 종족이었는데, 그 당시의 갈대아는 바벨론을 뜻함)의 손에 붙여 바사국이 주재할때까지 이름.
70년(유다가 갈대아에게 처음으로 굴복한 때는 B.C.601~600년이었다(왕하24:1). 그리고 첫번째 바벨론 강제 이주시기는 여호야긴 또는 시드기야의 1년. 곧 598년 또는 597년이었다(왕하24:8~12). 예레미야의 예언에 나타난 70년이란 숫자는 분명히 첫번째 이주의 경우에서는 상징적인 뜻으로 쓰였다. 70이란 수를 고집한다면 첫번째 이주는 여호야긴 3년에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은 렘25:11, 29:10에서 유다백성이 포로로 잡혀간지 70년만에 바벨론은 메대-바사군에 의해 멸망하고 바사의 고레스왕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므로 70년 뒤에 바벨론 왕을  징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는 에윌므로닥과 다른 가문에서 나온 왕위 찬탈자인 네르갈사레셀(느부갓네살의 사위), 나보니두스 등이다.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B.C.538년이다. B.C.587년 1월에 바벨론의 예루살렘 포위공격. 남유다 멸망(B.C.5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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