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중요성_신원균교수

by 갈렙 posted Oct 1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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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중요성/신원균교수 | 신원균목사연구자료
전체공개 2018.12.29. 10:47

 

 
 

개혁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중요성/신원균교수

 

[이단성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요즘 인터넷을 통해 은밀히 사도신경(신조)에 대한 거짓된 주장을 유포하여 많은 성도들에게 영적 혼란을 주고 있다. 그들은 사도신경의 역사성과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올바른 신앙을 뿌리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참고, 본문에서는 ‘신경’과 ‘신조’를 혼용함)

그 대표적 이단이 바로 말씀보존학회의 피터 러크만(Peter S. Ruckman)이다. 피터 러크만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해부터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조직신학에 의하면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을 인간의 영혼육(靈魂肉)에 비유하는 양태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부는 인간의 혼, 성자는 인간의 육체, 성령은 인간의 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이단적이며 비성경적인 이해다.

뿐만 아니라 불신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지극히 비성경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즉 불신자가 죽으면 그의 육은 무덤에, 혼은 지옥에, 영은 하나님의 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오류로 가득한 사람이 2000여년 기독교 역사에서 영적 거인들이 다 인정해온 사도신경의 정통 신앙고백을 부정하고 나온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염두에 두고 신조학(信條學) 박사 신원균 박사가 정확한 비판의 글을 온라인에 게재함으로써 혼란에 빠진 성도들을 돕고자 한다. ] [저널/개혁신앙 . . . . . . Reformed Faith]

 

시작하는 말

요즘 피터 럭크만(Peter S. Ruckman)의 주장을 빌어 한국에서도 사도신경이 마치 로마 가톨릭의 주된 신앙고백이며 개신교를 가톨릭화 시키는 위험한 교리처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로마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정교회 및 개혁교회 모두가 받아들이는 정통적이며 공통적인 고대 신조이다. 특히 루터, 츠빙글리,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그리고 정통 개혁교회의 신학자들 모두가 인정하고 수용한 성경적 신앙고백이다. 사도신경에 대한 비판자들의 잘못된 주장과 그들이 언급하는 각 본문의 번역에 대한 오류들을 소개하여 사도신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사도신경의 번역들

(1) 주후 750년 공인 된 사도신경(신조)

1)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 지낸 바 되시고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
5)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6)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고,
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8) 나는 믿기를 성령과
9) 거룩한 공(公) 교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
10)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11) 몸(육체)이 부활하는 것과
12) 영생을 믿는다. 아멘

 

(2) 한국 개신교회의 사도신경(신조)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5) 정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6)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8) 성령을 믿사오며,
9)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10)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11) 몸이 다시 사는 것과
12)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3) 한국 개신교회의 새 번역 사도신경(신조)

1)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2)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3)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5)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6)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7) 거기로 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8) 나는 성령을 믿으며,
9) 거룩한 공(公)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10) 죄를 용서 받는 것과
11) 몸의 부활과
12)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4) 한국 천주교회의 사도신경(신조)

1)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3)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4)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5)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6)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7)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8) 그리로 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9) 성령을 믿으며,
10) 거룩하고 보편 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으며,
11)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12)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5) 한국 성공회의 기도서(사도신경, 2004년)

1) 나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 나이다.
2) 하느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3)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
4) 본티오 빌라도 치하(治下)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5)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6)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7)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8)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 믿나이다.
9) 성령을 믿으며,
10) 거룩한 공교회와 모든 성도의 상통을 믿으며,
11) 죄의 용서와
12) 몸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아멘.

 

(6) 라틴어 원문 사도신경(신조, Credo)

1)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rae;
2) Et in Iesum Christ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3)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4)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descendit ad inferna,
5)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6) ascendit ad coelos, 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7) i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8) Credo in Spiritum Sanctum,
9)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10) remissionem peccatorum,
11) carnis resurrectionem,
12) et vitam aeternam. Amen.

 

(7) 영어 번역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

1)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2)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3)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4)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descended to hell,
5) on the third day rose again from the dead,
6) ascended to heaven,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7)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8)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9)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10) the forgiveness of sins,
11)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12) and eternal life. Amen.

 

(8) 헬라어 번역 사도신경(신조)

Πιστεύω εις Θεον Πατερα, παντοκράτορα, ποιητην ουρανου και γης. Και (εις) `Ιησουν Χριστον, υίον αυτου τον μονογενη, τον κύριον ήμων, τον συλληφθέντα εκ πνεύματοσ άγίου, γεννηθέντα εκ Μαρίασ της παρθένου, παθόντα επι Ποντίου Πιλάτου, σταυρωθέντα, θανόντα, και ταφέντα, κατελθόντα εις τα κατώτατα, τη τρίτη `ημέρα `αναστάντα `απο των νεκρων, `ανελθόντα εις τοθσ ουρανούσ, καθεζόμενον εν δεξια θεου πατροσ παντο δυνάμου, εκειθεν ερχόμενον κρϊναι ζωντας και νεκρούς. Πιστεύω εις το Πνυμα το `Αγιον, αγίαν καθολικην εκκλησίαν, αγίων κοινωνίαν, άφεσιν αμαρτιων, σαρκος ανάστασιν, ξωήν αιώνιον. Αμήν.

 

 

2. 사도신경의 역사

최초의 신조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가 주후 107년에 작성한 것이며, 중요한 신조로서는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니케아 신조(주후 325), 아타나시우스 신조(주후 359), 칼케톤 신조(주후 451) 등이 있다.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고백한 사도신조의 원형으로 가장 중시되는 것은 4세기 말 루피누스(Lufinus)가 작성한 라틴어 본문이다. 그 동안 교회들은 서로 다른 세례 고백문을 사용해 왔지만 주후 390년경에 루피누스에 의해 작성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앙고백은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 비록 그 후에도 어느 정도의 첨가와 변화(예수의 음부 행, 공적인 교회, 성도의 교제)가 있었지만 최종 본문이 750년에 형성된 이후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거의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확장된 이유는 로마 가톨릭이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 이단을 배격하기 위해 좀 더 세밀한 고백이 추가된 것뿐이다. 따라서 초대교회 시대는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니케아 신조가 서방교회에서는 사도 신조가 대표적으로 공인된 교회신조로 인정되었다.

 

사도신경은 초창기에 12사도가 한 구절씩 나눠 작성한 것처럼 생각됐지만 후대의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서 저자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신경의 각 내용이 정통교회의 신앙을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교회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교파에서는 고대 신조의 한 부분으로 사도신경의 가치를 존중하고 있다.

칼빈은 사도신조가 오늘날도 얼마나 커다란 가치가 있으며 그 내용이 성경과 어느 정도나 일치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사도신조는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나는 신경이라고 부르지만 그 저자 문제는 전연 고려하지 않는다. 고대 저술가들은 신경을 사도들에게 돌리는 점에서 상당히 의견이 일치했다.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충실히 수집하며 요약한 것이므로 넉넉히 사도들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사도신조가 어디서 유래 되었든 교회의 바로 초창기 즉 사도 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것을 공적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쓴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확실히 모든 경건한 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권위로 인정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우리의 믿음의 역사 전체가 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 문제로 불안을 느끼거나 남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물론 성령의 진리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것을 말했다거나 썼다는 것까지 알지 못하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다르다.”

 

특히 칼빈은 사도신경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초판의 구조에 담았다. 초판은 본문을 크게 6장으로 구성했는데 각 장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1장 : 율법-십계명 해설포함,
2장 : 믿음-사도신경 해설포함,
3장 : 기도-주기도문 해설포함,
4장 : 성례,
5장 : 거짓 성례,
6장 :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과 정치 조직

이 중에 칼빈은 사도신경을 십계명이나 주기도문과 같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소개하는 성격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빙크(Herman Bavinck)도 사도신조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되는 줄의 역할을 했다고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신조는 가장 오래된 신조다. 그것은 사도들 자신들이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2세기 초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주신 삼위일체적인 세례 명령으로부터 발전되었던 것이다.(마 28:19) 근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짧지만 기초 형태는 같았다. 즉 그것은 기독교가 의존하고 있는 그 큰 사실들의 짧은 요약이었고 그와 같이 계속해서 그것은 공동체적인 근원이 되어 왔고 모든 그리스도 왕국의 통일의 끊을 수 없는 줄이 되고 있다.”

바빙크는 사도신조의 처음 논쟁이 되었던 주제는 “당신은 그리스도를 누구라 하느냐?”였다고 한다. 이것은 교회가 주님의 말씀 자체로부터 모든 세계에 대하여 대답해야할 전 지배적인 물음이었다. 현대의 대표적인 개혁파 신학자인 하지(A.A. Hodge)도 영국에서 소요리문답을 처음 출판했을 때 주기도와 십계명과 사도신조를 첨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들이 작성했다거나 성경의 일부분으로 여길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그리스도의 고대 교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첨부하였다.

 

김영규 교수는 기독교 강요와 사도신경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신앙의 구성요소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notitia)이 포함하고 있다. 즉 사도신경이 기독교 강요 전체 내용의 지변(池邊)을 이루면서 ‘ 우리가 믿는다.’(credimus), ‘나는 믿는다.’(credo)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처럼 사도신경의 시작 역사와 작성자는 비록 알 수 없지만 그 내용이 성경과 정확히 일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초대교회 이후로 모든 교파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종교개혁자들과 개혁교회에서는 제네바 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중심으로 사도신조 해설을 시도하여 기독교 교육의 기초내용으로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전통적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이다.

 

3. 사도신경 본문의 신학적 의의

사도신경의 본문과 관련해서는 번역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많다. 물론 어떤 부분은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전달 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만 피터 럭크만(Peter S. Ruckman)처럼 기존의 번역 자체가 마치 로마 가톨릭의 신앙형태로 변질 된 것처럼 언급하는 것은 사도신경의 역사와 신학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주장이다. 각각의 본문을 피터 럭크만의 비판과 대조하면 다음과 같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부분에 대해서 럭크만은 두 가지를 비판한다.

첫째, 삼위일체를 고백해야 하는 데 본문은 창조를 마치 ‘하나님 아버지 (성부, 聖父)’만 한 것처럼 고백하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한다.

이 비판은 사도신조 전체의 신학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비판이다. 칼빈은 제네바 교리문답에서 사도신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18문 : 사도신경은 어떤 것들입니까?

답 :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님께 대한 것입니다.
넷째로 교회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우신 행위들에 관한 것입니다.

칼빈이 언급한 것처럼 사도신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조화 있게 드러내기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 교회라는 4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삼위일체는 신적 본질(본체)에 있어서 동일하시지만 삼위의 신격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따라서 사역에 있어서 창조는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구원의 성취와 적용은 성령에게 돌리는 것이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이다. 바로 사도신조는 각 삼위의 위격이 갖는 고유한 사역을 구분해 주고 있는 것이지 창조에서 성자와 성령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이것을 말한다.

26문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 는 신앙고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버지 곧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 조하시고 영원한 경륜과 섭리로 그것들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둘째, 럭크만은 ‘천지를 만드신’이란 부분이 절대창조인 히브리어 ‘빠라’ 의 표현이 아니라 재료를 이미 가지고 시작한 ‘아솨’의 표현이라 고 비판한다.

이 지적은 그럴듯하지만 히브리어의 고유한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지적이다. 물론 구약학자들은 ‘빠라’와 ‘아솨’의 단어적 특징을 구분하여 창세기 1장의 절대창조를 강조한다. 하지만 이 히브리어 대한 적절한 영어나 한글 표현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히브리어는 하나님을 전제로 한 언어적 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에 이런 단어의 신학적 구분이 가능하지만 다른 언어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 없이 만들어진 언어이기 때문에 이런 창조의 특징을 구별할 수 있는 단어 자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하신(빠라)’이나 ‘만드신(아솨)’ 모두 언어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표현을 고백하던지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창조의 의미를 잘 교육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 부분에서는 럭크만이 ‘외아들’이란 번역을 문제 삼는다. 성경은 외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오직 ‘독생자(獨生子)’라고만 말했기 때문에 ‘외아들’의 번역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기독론에 대한 오해이다. 정통 기독론에서는 독생자에 해당되는 ‘The only begotten Son’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하지만 이 표현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Special Son’에 대한 첨가 주장이 많이 있어 왔다. 즉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한 분 아들이시기도 하지만 특별하고 위대한 아들임을 드러내려고 했다. 특히 한글 표현으로서 외아들이나 독생자(獨生子)의 번역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은 기독론을 번역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통적 기독론의 문제는 ‘신성과 인성의 균형문제’였지 ‘독생자’(Filium eius unicum, 獨生子)라는 번역의 차이가 아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에게 나시고”

이 부분에서는 신조가 동정녀 마리에 대한 부분을 로마 가톨릭적으로 변질시켰다고 럭크만은 비판한다. 즉 영어로 ‘He was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nd born of the Virgin Mary.’라고 고백한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이 마리아 숭배를 강조하기 위해서 특정한 마리아를 지명하듯이 관사를 사용하여 ‘the Virgin Mary’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인 마리아에 대한 고백이 되려면 ‘a Virgin Mary’라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적은 영어의 관사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된 생각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일반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때로는 ‘a Virgin Mary’란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마리의 동정녀 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표현할 때는 ‘the Virgin Mary’를 즐겨 사용해 왔다. ‘a’와 ‘the’의 차이는 신학적 차이라기보다는 영어권의 예수님 탄생에 대한 설명방식의 특징을 구분한 것뿐이다. 오히려 라틴어나 헬라어 판은 관사 없이 무관사로 ‘ex Maria Virgine’, ‘εκ Μαρίασ’라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이런 비판을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한국어 새 번역에서는 관사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현재 번역대로 ‘마리아’라고 고백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부분에서는 럭크만은 빌라도가 고난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쳐야 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죄론에 대한 오해이며 하이델베르 요리문답은 이렇게 답한다.

38문 :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재판관인 본디오 빌라도 치하(治下)에서 고 난당하셨습니까?

답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비록 죄가 없을지라도 지상의 재판관에 의해 서 유죄 판결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으 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설명을 보면 누가 예수님께 고난을 가했는가에 대한 주체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기 위한 신적 법정을 대변하는 성격으로써 인간 법정인 빌라도의 법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신적(神的) 공의(公儀)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심판하셨고, 이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당시 이 땅의 최고 법정인 로마법정의 형식을 빌어서 자신의 죄 없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 대속의 의미를 완성하신 것이다.

 

따라서 빌라도에 대한 고백부분은 하나님의 신적 법정을 대리하여 죄와 무죄에 대한 선언을 고백한 것이지 예수님께 개인적으로 고난을 가한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다. 다만 번역에서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에게’보다는 ‘아래서, 치하(治下)에서’ 등의 단어를 선택하면 좋을 것이다.

칼빈은 이와 같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네바 교리문답을 통해서 드러내주고 있다.

56문 : 왜 당신은 한 마디로, ‘그분이 죽으셨다’고 말하지 않고 본디오 빌라도에 관하여 말하며 또한 그에게서 고난을 받았다고 말합 니까?

답 : 그것은 단순히 이 이야기의 확실성(객관성)을 우리에게 증명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의 죽음이 정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57문 : 어떻게 해서 그렇습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징벌을 스스 로 담당하시고 이를 통해 우리를 이 징벌로부터 구해내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악행자로서 죄를 가지 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지상의 심판자 앞에 출두하여 그분의 입을 통해 정죄 받기를 원하셨는데 이는 하늘에 계신 재판관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죄 없다’라고 해 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이 고백은 연옥에 대한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임에도 피터 럭크만은 오히려 이 부분이 삭제된 것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내용도 실제로 예수님이 지옥을 방문한 것처럼 해석한다.
이 주장 중에 복원되어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대부분의 교리문답과 개혁교회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들어있지만 한글 번역에는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감리교와 선교하면서 감리교가 교리적 논쟁이 될 부분을 빼자는 주장을 수용하여 삭제되었다. 또한 개혁교회는 그 뜻을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파처럼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의 깊이를 강조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을 칼빈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65문 :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는 말이 가르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영과 육체의 분리를 뜻하는 자연적인 죽음의 고통만을 겪으신 것이 아니고 그분의 영혼이 베드로가 ‘죽음의 고 통’이라고 말한 것처럼 상상하기 힘든 괴로움 속에 갇혀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제네바 교리문답)

44문 : 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는 귀절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 내가 개인적인 유혹과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주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상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영혼의 슬 픔과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지옥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나를 구 원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원문에는 이 부분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Dei Patris omnipotentis)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넣어야 한다고 락크만은 말한다.

이것은 사소한 번역의 차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굳이 넣고자 하면 아버지를 넣으면 되고 혹 넣지 않더라도 사도신조에서는 삼위의 각 위를 구분하여 아버지 하나님은 보통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번역도 무난하다.

다음은 ‘앉아 계시다가’라는 부분이다. 앉아 있는 것은 일을 쉬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우편에서 일하시다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기독론 부분에서 승귀에 대한 오해이다. 우편에 앉으심은 중보사역의 지속성에 대한 의미도 있지만 승귀의 가장 높은 표현으로서 하나님이 예수님께 세상에 대한 주권적 통치와 심판의 권한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부분이 성취된 것을 선언하는 고백이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 참 사람으로서 새롭게 높아지셔서 온 세상의 주인이며 통치자며 심판주로 높아지시는 최고의 승귀를 얻으셨다. 이 승귀의 영광을 초대교회는 권위를 상징하는 왕의 보자를 빌어서 표현한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이렇게 고백한다.

50문 : 왜 그다음 구절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입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그곳 은 그분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성부께서 그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 리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서’는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곳으로부터’라고 고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번역의 차이일 뿐 신학적인 의미는 없다. ‘저리로서’는 고어적(古語的) 번역일 뿐이다. 오히려 ‘그 곳으로부터’라고 번역해도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두 표현 다 신학적 의미를 바르게 설명해 주지 않고 단지 표현적으로만 이해하면 문제가 된다.

이 고백은 권위의 문제와 예수님의 몸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기독론을 드러낸다. ‘저리로서’는 하나님보좌 우편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장소로부터 심판을 위해서 오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심판 주와 재판장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승천의 마지막 내용으로서 예수님의 몸을 재림 전에는 다시 볼 수 없다는 내용을 포함한 고백이다. 즉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6문 : ‘하늘에 오르사’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올 라가셨으며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때 까지 우리를 위해 그곳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리로서’는 예수님의 승천과 관련된 연결 고백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몸은 승천을 통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는 장소로 옮겨 가셨고 그곳으로부터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거기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을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오늘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 신비주의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된다. 제네바 교리문답은 이렇게 말한다.

83문 : 다음을 말해 보십시오.

답 :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이 말은 그리 스도께서 언젠가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나타나 실 것인데 이 때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그분의 승천 시 본 모 습 그대로 오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어떤 이들은 이 부분에서 성령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영접의 대상이기 때문에 ‘성령을 모셔드리오며’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주 그럴듯하지만 이것은 신론과 구원론에 대한 무지이다. 사도신조는 초대교회의 핵심적 이단이었던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배격하기 위해서 삼위의 각 위를 자세히 균형 있게 드러냈다. 특히 삼위는 모두 믿음의 대상이며, 영접의 대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는 믿는다.”(Credo)라는 고백 뒤에 삼위 각각에 대해서 ‘in Deum’(성부), ‘in Iesum Christum’(성자), ‘Credo in Spiritum Sanctum’(성령)이라고 동일하게 고백했다.

오히려 초대교회 때는 어느 한 위(位)를 분리해서 한 위만을 믿음의 대상이나 영접의 대상처럼 생각하여 삼위일체를 파괴하려는 많은 이단들의 주장이 있었다. 이처럼 성령을 믿음의 대상과 영접의 대상으로 분리하여 사고하는 자체는 초대교회 이단들이 삼위를 분리하여 생각하려고 했던 주장과 유사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거룩한 공회”

피터 럭크만이 사도신조를 비판하는 내용 중 가장 비중이 큰 부분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연상케 한다는 ‘공회(公會)’에 대한 지적이다. 원문은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로 되어 있는데 로마 가톨릭에 의해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형태로 변질되어 로마 가톨릭을 믿는 고백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론에 대한 오해이다. 오히려 ‘catholic Church’(sanctam Ecclesiam catholicam, αγίαν καθολικην εκκλησίαν)라는 표현은 로마 가톨릭이 신부들을 중심으로 한 유형 교회만을 참된 교회로 주장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정통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사용했던 표현이다. 즉 이 표현은 교회 본질은 불가시적이며 전 세계 모든 곳에 흩어져 있는 그리고 모든 시대를 통해서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를 포함하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며 하나인 신앙공동체를 나타내는 중요한 고백이다. 다만 언어의 혼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를 ‘Roman-Catholic Church’라고 했으며 정통교회는 ‘Catholic Church’라고 분리해서 사용했다.

 

특히 한글로 ‘Catholic Church’를 번역할 때도 선교사들과 신학자들은 위의 의미를 연결시켜 주기 위해서 성도들이 주관적으로 단순히 모여서 교제한다는 의미로 비춰질 수 있는 ‘공회’(共會)라는 한문표현을 제거했다.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공적(公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특별한 사명을 받아 선택되고 부름 받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신앙공동체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서 공적(公的) 교회라는 ‘공회’(公會, catholicam)로 표현했다. 제네바 교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93문 : 공동적 교회(Catholic Church)란 무엇입니까?

답 : 공동적 교회(Catholic Church)란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 정하시고 선택하신 성도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97문 : ‘공동적’(Catholic)이란 무슨 뜻입니까?

답 : 성도들의 머리는 오직 한 분뿐이시라는 것과 모든 사람들은 이 한 몸 안에서 연합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교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단 하나의 교 회가 있을 뿐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이 부분에서 피터 럭크만은 ‘교통(交通)’은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죽은 성도들(성인숭배)과 교제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성도들과의 친교를 나타내는 ‘교제(交際)’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 말은 본래 ‘성인(聖人)의 통공(通功)을 믿으며’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숭배의 근거로 삼고 있고 또한 산 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교회론에 대한 오해이다. 원문에서 말하는 ‘교통’(the communion of saints, sanctorum communionem)의 의미는 오히려 이 부분은 로마 가톨릭이 죽은 자와의 교통을 말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고백이다. ‘교통(交通)’을 의미하는 ‘communionem’는 초대교회 때에 라틴어나 헬라어 모두 살아있는 성도들의 영적 교통과 물질적인 삶의 나눔을 모두 포함한 살아 있는 자들의 교제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이것을 말한다.

55문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첫째, 신자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들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각 신자들은 자신의 은사들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감사함으로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이 부분에서 럭크만의 비판은 예수님의 죄 사함은 이미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처럼 진행형으로 번역해서는 안 되고 과거적 표현으로 ‘죄를 용서하신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비판이다.

이것은 구원론의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한 오해이다. 본 고백은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되어 의롭게 되는 칭의와 성화를 통해서 자범 죄의 계속적인 용서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고백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56문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에 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나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내 죄와 나를 미혹 하는 죄성에 대하여 정죄치 아니하심을 믿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께서는 은혜로 말미암아 내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셔서 심 판으로부터 나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

이 부분에서는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지가 분명하지 않고 애매하게 고백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아니라 ‘몸이 예수님처럼 다시 사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종말론에 대한 오해이다. 물론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첫 부활로서 모든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모범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님은 육체의 부활이 어떤 형식과 형태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하지만 그 성도들의 부활체 모두는 동일하게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본질적 성격은 예수님의 부활체를 닮으면서도 성도 각각은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몸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현재와 완전히 다른 몸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개인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예전의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는 신령한 몸이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위의 주장은 자칫 성도들 모두가 개인의 육체의 부활을 무시하고 예수님과 동일체가 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 부분에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장소가 선명하지 않아서 로마 가톨릭의 연옥도 생각될 수 있는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천국에서’를 꼭 넣어야 한다고 럭크만은 비판한다.

성경에서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지옥(地獄)보다는 천국(天國)에 대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런 방향을 사도신경에서도 그대로 이어받아서 지옥에 대한 경고보다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더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고백에는 이미 성도의 부활은 천국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넣어도 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개혁교회의 종말론은 천국의 장소적 개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성도들이 예배하는 천국의 상태에 대해서도 강조하기 때문에 장소적 의미가 강하게 드러날 수 있는 표현은 오히려 종말론의 균형을 파괴할 수 있다.

 

결 론

지금까지 사도신경 비판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사도신경은 지난 2000여년을 기독교회가 지켜 온 소중한 보물이다. 특히 어거스틴뿐만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은 이 사도신경의 구조와 내용을 따라 자신들의 신학체계를 확립할 정도로 매우 귀한 것이다.

단지 오해가 있는 표현은 좀 더 좋은 번역으로 수정하면 되는 것이지 비판자들처럼 사도신경 자체가 마치 로마 가톨릭의 유산물인 것처럼 주장하면 안 된다. 오히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사도신조를 버리거나 강하게 비판했던 분파는 주로 이단들이었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또 다시 사도신조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는 그가 믿는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정확해야한다. 내가 누구 를 믿으며 무엇을 믿는지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분명해야 한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두 외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내용을 가장 잘 요약해 놓은 사도신경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둘째, 사도신경은 이단 침투를 막고 기독교의 진리 수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해석은 워낙 다양하고 여러 주장들이 있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을 통한 바른 믿음인지 거짓된 믿음인지는 개인과 공 동체의 객관적 신앙고백을 통해 명확히 분별된다.

 

신원균 교수(한마음개혁교회, 웨스트민스터 신학회 회장,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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