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

by 갈렙 posted Feb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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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대성전 터 (글, 사진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1/6을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터. 지금은 이슬람의 바위돔 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지 약 3000년의 역사가 흘렀다. 그 역사의 중심에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3000년의 역사에서 그 주인공은 유대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이 지배하던 시대는 약 550년, 그리스도교는 약 400년 그리고 그 둘보다 훨씬 많은 약 1200년 기간 동안 이슬람이 통치했고, 나머지는 기타 외세에 의해 다스려졌다. 아브라함 시대에 예루살렘은 멜키체덱(멜키세덱) 왕이 다스렸다(창세 14,18). 예루살렘의 본래 이름은 ‘살렘’ 이었다. ‘살렘’은 ‘평화’라는 뜻이며,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만큼 평화가 간절한 곳은 없을 것이다. 세계 3대 종교의 각축장이었고, 세계열강들이 지나가야만 하는 길목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루살렘 대성전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삶의 중심이었다.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와 기도의 중심지였고 강력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느님이 현존 하시는 곳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 제사로 하느님께 다가가며 만나며, 하느님은 용서와 계시로써 기도에 응답하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탈출 25,22; 2역대 6참조). 그러나 그 삶의 중심을 한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지금은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다.

예루살렘 대성전 터 (Temple of Jerusalem)

가나안과 이집트 땅 온 지방에 기근이 심하게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의 가족들은 이집트로 가서 살았다(창세 41,53-50,26). 그 후 기원전 1230년경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야곱의 후손들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주한다(탈출 33,1). 그러나 이스라엘은 ‘약속된 땅’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민수 32,13; 신명 29,4). 그리고 모세는 ‘약속된 땅’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사해 근처 모압 땅 ‘느보 산’에서 죽게 된다(신명 34,1-8). 모세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후계자로 임명하였고(신명 34,9) 주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통수권을 맡기셨다(여호 1,1-9). 그는 요르단 강을 지나서(여호 3,1-4,24) 길갈에 진을 치고 가나안에서 첫 파스카 축제를 지낸다(여호 5,10-12). 여호수아는 예리코(여호 5,13-6,27)와 가나안을 점령(여호 11,16) 한 후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고(여호 12,7-19,51) 스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모아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웠다(여호 24,1―27). 그 후 여호수아가 죽고 가나안 땅은 판관들의 시대가 시작된다(기원전 1200-1000년). 사무엘이 예언자이자 판관으로 다스릴 때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지자 이스라엘 원로들은 사무엘을 찾아가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을 세워주기를 간청한다(1사무 8,5).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1030-1010년)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1사무 10,1)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운다. 사울은 그의 세 아들들과 함께 길보아 산에서 필리스티아인과 싸우다가 모두 전사(1사무 31,1-6)하였다. 사울이 죽은 뒤 다윗(기원전 1000-961년/1004-965년 재위)이 헤브론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와서 기름을 붓고 그를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2,3-4). 다윗이 헤브론에서 일곱 해를 다스린 후(1역대 29,27; 2사무 5,5) 이스라엘 12지파를 통합하면서 남쪽에 치우쳐 있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삼은 것이(2사무 5,4-5)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이다.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은 이민족인 여부스족이 사는 견고한 성곽도시였으나(2사무 5,6 참조) 다윗의 병사들은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과 연결된 지하 수로를 타고 올라가 여부스족의 성읍을 점령하고 ‘다윗 도성’(The City of David)라 불렀다(2사무 5,7-9). 그리고 정치적인 수도인 예루살렘은 키르얏 여아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다윗 도성에 옮겨 놓음으로써(2사무 6장 참조) 다윗 도성은 명실상부한 다윗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 12지파를 통합할 수 있는 최고의 상징물이었으며 왕권과 직결 된 것이었다.

솔로몬 성전 - 제1성전(Solomon's Temple - First Temple)

(사진) 다윗 도성과 모리야 산의 솔로몬 성전. 솔로몬 성전을 둘러싼 사각형의 영역은 헤로데 대왕이 넓힌 것. 검정색으로 표시한 성곽은 현재 예루살렘 성곽이다. 성전 아래쪽 검은 영역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고고학 발굴이 된 지역이다.

다윗 도성에 계약의 궤를 옮기고 난 후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음”을 안타까워한 다윗은 “하느님이 머무실 집”을 짓고자 하나 다윗의 후손에게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나탄의 예언을 통해 약속 하셨다(2사무 7,1-13; 1열왕 8,17-19; 1역대 22,7-10).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번제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창세 22,1-22참조) 모리야 산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사무엘서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 놓았다(2역대 3,1). 다윗은 이스라엘과 온 유다의 인구조사를 하여 주님께 죄를 지었고 다윗은 세 가지 벌 중 사흘 동안 흑사병이 퍼지는 것을 선택하였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치시고 주님의 천사가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려고 그쪽으로 손을 뻗치자 주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 하시며 명을 거두었을 때 주님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서 있었다.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은 50 세켈을 주고 타작마당과 소를 사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자 주님께서는 그의 간청을 들어 주시어 이스라엘에 내리던 재난이 그쳤다(2사무 24,1-25참조; 1역대 21,1-22,1참조; 2역대 3,1). ‘평화’라는 뜻을 가진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이 마련해(1역대 22,2-19;28,1-29,9 참조) 준 땅과 성전 재료를 토대로 대성전과 ‘레바논 수풀 궁’(1열왕 7,2; 2역대 9,16)이라는 화려한 왕궁을 지었다(2역대 3,1-5,1; 1열왕 5,15-7,51).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년째 되던 해인 기원전 968년에 모리야 산(해발 744m) 위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1열왕 6,1) 7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기원전 961년에 완공하였다(1열왕 6-8장; 2역대 3-5장 참조). 솔로몬은 티로 임금 히람에게서 레바논의 향백나무와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1열왕 5,15-32; 2역대 2,1-17 참조)

솔로몬 성전이 있는 모리야산의 단면도. 성전을 만들기 위해 동쪽과 서쪽 언덕을 메웠다.

솔로몬 성전

솔로몬 성전 단면도(글, 사진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사진) 솔로몬 성전의 단면도 : 1.곁방(창고방) 2.지성소 3.성소(본관) 4.현관방 5.커룹 6.계약의 궤 7.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바위 8.물두멍(받침대) 9.청동 바다 모형.

성전은 길이가 60 암마(약 28m. 1암마(cubit) : 고대 길이의 단위로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약 43-53cm. 성경에서는 약 46cm로), 너비가 스무 암마(약 9m), 높이가 서른 암마(약 14m)였다(1열왕 6,2). 주님의 집 성소 앞에 있는 현관은 좌우 길이가 그 집의 너비와 똑같은 스무 암마이고 집 앞으로 나온 그 현관의 길이는 열 암마였다(1열왕 6,3). 그리고 성전 건물의 현관 쪽을 제외한 세 면에는 성전의 보물이나 제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붙어 있었다(1열왕 6,5; 7,51 참조). 성전은 넓이 약 9m, 길이 28m, 높이 14m의 장방형 구조로 성전 건물은 동쪽을 향했고, 동쪽 현관 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곁방을 만든 구조였다. 성전 오른쪽 남동쪽에는 ‘청동 바다 모형’을 두었는데(1열왕 7,39; 2역대 4,10) 지름이 열 암마(약 4.6m), 높이가 다섯 암마(약 2.3m), 둘레가 서른 암마(약 14m)가 되는 청동 바다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 바다는 물 이천 밧(1밧은 약 40리터)을 담을 수 있었다. 이 바다는 황소 열두 마리 위에 놓여 있었는데 동서남북으로 세 마리씩 모두 엉덩이를 안쪽으로 향하게 놓여 있었다(1열왕 7,23-26). 바다에 담긴 물은 사제들이 몸을 씻는데 사용하였다(2역대 4,6). 청동으로 만든 물두멍(받침대)을 열 개 만들었는데 길이가 네 암마(약 1.8m), 너비가 네 암마, 높이가 세 암마(약 1.4m)로 한 암마 반이나 되는 청동바퀴 네 개와 청동 바퀴축이 있었다(1열왕 7,27-35). 성전 동편 오른쪽에 다섯 개, 왼쪽에 다섯 개를 두었는데(1열왕 7,39) 이 물두멍은 번제물로 바칠 것을 씻었다(2역대 4,6).

현관(ulam)에는 현관에는 두 기둥을 세웠는데 오른쪽에 세운 기둥의 이름은 야킨이라 하고 왼쪽에 세운 기둥의 이름은 보아즈라 하였다. 그리고 그 기둥 꼭대기에는 나리꽃 모양으로 만든 것을 얹었다(1열왕 7,21-22;2역대 3,17참조). 중앙에 있는 성소(hekhal)에는 분향 금 제단과 제사 빵을 차려 놓는 금 상, 안쪽 성소 앞 오른쪽에 다섯 개 왼쪽에 다섯 개씩 두는 순금 등잔대들(1열왕 8,48-49; 2역대 4,8)이 있었다.

솔로몬 성전 성소

(사진) 3번 성소 본관에는 1.분향 금 제단 2.제사 빵을 차려 놓는 금 상, 3.양쪽에 다섯 개씩 열개의 순금 등잔대들이 놓여 있다. 집의 온 벽은 안팎으로 돌아가며 커룹과 야자나무와 활짝 핀 꽃을 새겨 넣고, 집의 안쪽 방과 바깥쪽 방바닥을 금으로 입혔다.

솔로몬은 성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지성소(debir)를 마련하고 그곳에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셨다(1열왕 6,19). 계약의 궤는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하느님의 현존 자체를 나타내고 그분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안쪽 성소의 길이는 스무 암마(약 9m), 너비가 스무 암마, 높이가 스무 암마인데 순금으로 입혔다(1열왕 6,20). 솔로몬은 집 전체를 온통 금으로 입히고, 안쪽 성소에 딸린 제단도 모두 금으로 입혔다(1열왕 6,22). 그는 안쪽 성소에 올리브 나무로 높이가 열 암마(약 4.6m)나 되는 금으로 입혀진 커룹을 둘 만들어 놓았다(1열왕 6,23-28). 커룹은 하느님의 위엄 있는 현존을 상징했다. 집의 온 벽은 안팎으로 돌아가며 커룹과 야자나무와 활짝 핀 꽃을 새겨 넣고, 집의 안쪽 방과 바깥쪽 방바닥을 금으로 입혔다(1열왕 6,29-30). 이 커룹의 한쪽 날개는 아래로는 계약의 궤를 지켜 주고 다른 한쪽 날개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옥좌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 지성소는 대사제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대 속죄일에 들어가 자기와 백성이 모르고 지은 죄를 없애는 희생 제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레위 16,32-34; 히브 9,7). 성소에서 지성소로 통하는 문은 올리브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혔으며 현관과 성소를 구분하는 문도 마찬가지였다(1열왕 6,31-35; 2역대 4,22 참조). 성전 건물에는 사제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고 일반 백성은 들어갈 수 없었다. 솔로몬은 계약의 궤를 다윗성에서 새로운 성전으로 옮겨 성대한 봉헌식을 올렸다(2역대 5,2-7,10; 1열왕 8,1-66참조). 사제들이 주님의 계약의 궤를 집의 안쪽 성소인 지성소에 놓았다(1열왕 8,6). 계약의 궤 안에는 두 개의 돌 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둔 것이었다(1열왕 8,9; 2역대 5,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1열왕 8,10-11; 2역대 5,13-14). 이제 솔로몬의 성전은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지내야 하는 3대 축제 즉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과월절-무교절(파스카)과 씨를 뿌려 얻는 노동의 맏물을 바치는 수확절(오순절) 그리고 노동의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연말에 드리는 추수절(초막절)에 모이는 중심이 되었다(탈출 23,14-17; 34,18-23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다니 6,11) 풍습이 생겨났고, 유대교 회당의 주요 부분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지어졌다. 기원 후 2-3세기의 회당을 보면 회당 정면 입구가 그리고 5세기경에는 설교단 부분이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만들어졌다.

1.물두멍(받침대) 2.청동 바다 모형 3.보아즈 기둥 4.야킨 기둥

하느님의 집을 봉헌하면서 주님의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드리는 솔로몬의 기도는 한편의 대서사시와 같이 장엄하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성전에 머무르실 하느님이 아니시다. 현인 솔로몬은 주님의 집인 성전을 짓고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우상숭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신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겠다고 하신 이곳’(1열왕 8,27-29; 2역대 6,18-20)을 기도에서 언급하면서 논쟁을 피해 갔다. 온 우주의 하느님은 솔로몬의 성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시라 당신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이루시려 현존하시는 곳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이방인들의 하느님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의 하느님은 우주의 유일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이방인들까지 아우르는 보편적이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주 저의 하느님!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고 말씀 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 계시는 하늘에서 들어 주시어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께 죄를 지어 이 땅에 기근이 들 때, 흑사병과 온갖 환난과 질병이 번질 때 이 집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무엇이나 기도하고 간청하면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어 용서해 주시고 행동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그 모든 행실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비록 이방인이라도 그가 당신 이름 때문에 먼 고장에서 찾아와 이 집을 향하여 기도하면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이방인이 당신께 호소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십시오. 죄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지은 이 집을 향하여 기도하면 당신이 계시는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청을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돌보아 주십시오’(1열왕 8,22-61; 2역대 6,12-42 참조). 솔로몬의 치세는 약 40년간 계속 되었으나 솔로몬이 유지하려 했던 국가적 통합은 기원전 931년 솔로몬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다윗과 솔로몬의 지도 아래 약 80년간 통일 왕국은 정치와 신앙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 약 350년은 정치적 분열의 역사요 군사적 패배의 역사이며 종교적 분쟁의 역사였다. 솔로몬은 하느님 대신 군사력에 의존하면서 외국의 많은 여자들을 후궁(왕족출신 아내 700명과 후궁 300명)으로 맞아들이면서 그들의 이방신들을 허용하고(1열왕 11,1-8 참조) 모세의 법을 정면으로 위반하였다(신명 17,3.17; 18,9-14 참조).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할되었고(1열왕 12장), 북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기원전 721년에 멸망한다(2열왕 17,6). 남 유다는 히즈키야 왕의 개혁(2열왕 18,1-8;2역대 32,1-8 참조)과 요시아 왕의 개혁(2열왕 22,1-2; 23장)과 노력이 있었지만 므나쎄 왕 시대(기원전 697-642년 재위)에 유다 땅은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기원전 605-562년 재위)이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유다인들은 바빌론 땅으로 가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2열왕 25장; 2역대 36,17-20). 바빌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은 모두 파괴되었고, 유다인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의 기물들은 전리품으로 빼앗겼다(2열왕 25,1-21; 예레 52,13.17-23). 이렇게 처녀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짓밟히고 말았다(애가 1,1-4,22 참조).

@ 제2차 성전 시대(기원 전 515-기원 후 70년), 바빌로니아 유배에서 귀한 후의 성전


페르시아 아카이메니아 왕조의 창시자이자 바빌로니아를 무너트린 키루스(고레스) 2세는 기원전 538년 칙령을 내려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다(2역대 36,22-23; 에즈 1,1-5). 바빌론으로의 유배를 모면하고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토착민들과의 갈등 속에서 즈루빠벨에 의해서 어렵게 성전을 재건 ? 봉헌한 것은 기원전 515년(에즈 5,1-6,18)이었지만 70여년 만에 재건한 예루살렘은 예전의 화려했던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1성전에 비하면 규모도 적었고 볼품도 없었으며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져 있었고 성문들은 불탄 채였으며 귀향민과 토착민간의 갈등은 여전했다(느헤 1,1-4). 그리고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계약의 궤는 안치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예언자가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신탁을 받고 천막과 계약 궤를 들고 모세가 죽어 묻힌 느보 산 어느 동굴에 숨기고 입구를 막아 버렸는데 그 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2마카 2,4-8). 이 제2성전 시대에 예식은 의식화 되고 희생제사가 중시되게 되면서 예루살렘은 잠시 평온을 되찾게 된다(느헤 3장). 기원전 332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으로 팔레스티나 전역은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기원전 332-167년). 팔레스티나에는 그리스식 도시들, 극장과 목욕탕, 경기장들이 건설되었고 시민들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정신문화까지 급속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의 현현’이라고 불리는 시리아 왕 에피파네스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년 재위)는 기원전 167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이교제사를 거행하고 유다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전을 짓고 숭배하도록 강요하였고, 더 나아가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먹도록 했으며 안식일을 위반하도록 하고 할례를 금지시켰다(마카 상 1,44-50).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원전 167년에 급기야 마카오베오 형제들이 이끄는 독립군은 3년 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 제의를 회복하였으며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지만 이들은 왕가의 후손도, 제사장인 사독 가문의 출신도 아니었기에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급기야 여러 종파간의 갈등 속에 예루살렘은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 Pompeius Magnus, 기원전 106-48)에게 정복되고 로마의 지배하에 머물게 된다. (글, 사진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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