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하나님과의 연합
‘One Story’에서는 성경의 이해를 우리가 가진 성경 순서를 기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성경을 기록된 시간 순서대로 보기도 하고 성경의 배경이 되는 사건 순서대로 보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든 서로 다른 관점일 뿐 틀리지는 않습니다. 단지 ‘One Story’에서는 우리가 가진 성경 순서대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서는 성경 66권의 한 권으로 시가서 5권 중의 한 권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역’과 ‘패역’의 역사가 결국 ‘멸망’과 ‘포로’라는 결과를 낳았고 포로에서 귀환이 일어나지만 다시 이스라엘이 나라로서 재건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성경은 이제 이스라엘을 나라로서 재건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나님의 행하심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사역을 펼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에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시편에서 이스라엘의 연단과 고난 중에 여전히 함께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할 것을, 잠언에서 이제 참 지혜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 백성들의 삶을, 전도서에서 사람의 본분이 이 세상에 마음을 두고 이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바라는 삶을 살 것을 말하고 나서 아가서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이제 이 세상에서의 up and down을 통해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께 집중하는 ‘나그네의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저자
아가서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아가서 안에서 ‘솔로몬의 아가라’(아 1:1)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가서의 해석
아가서는 창세기부터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사적 관점인 예표적, 모형적 관점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 결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예표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말씀인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아가서에는 성경에 들어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표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 한 여자 수녀원의 원장은 성경에서 이 아가서를 빼버렸다고 합니다. 또한 너무 풍유적, 영적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역시 아가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됩니다. 아가서에서 기록자이자 왕으로 등장하는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여성 명사인 ‘술람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가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 그리스도인, 교회와의 사랑 그리고 죄인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구성
아가서는 먼저 이제 세상의 허무함을 깨달은 주의 백성과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아 1:2-3:5). 그리고 마침내 주의 백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 19:1-10)의 풍성함을 노래합니다(아 3:6-5:1).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 잔치를 치른 신부 된 하나님의 백성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성숙한 하나 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아 8:5-14).
아가서의 기록 목적
이제 아가서가 끝나면 이사야서로 시작하는 선지서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또 다른 표현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섭섭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토해내듯이 드러내실 것입니다. 아가서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가서에서 이제부터 하나님이 행하실 모든 징계가 ‘미워서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 늘 변함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실 만큼 그 크신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받는다 해도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 그 하나님의 중심을 발견할 수 있고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 자체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술람미 여인
이미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여성 명사형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로 간주되고 있으며(사 54:5,6/ 렘 2:2/ 겔 16:8-14/ 호 2:14-23)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고후 11:2/ 엡 5:23-25/ 계 19:7-9, 21:9)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가서안에서 밝히는 술람미 여인은 그다지 왕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아가서는 술람미 여인에 대해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5,6)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얼굴이 하얀색이고 피부가 고운 여인들을 말합니다. 그에 반해 술람미 여인은 ‘게달의 장막’처럼 ‘검은 피부’를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오빠들의 성화에 자신의 포도원도 돌보지 못한 채 오빠들의 포도원을 돌보느라 햇볕을 너무 많이 쬐여서입니다. 그 말은 오빠들의 사랑도 관심도 보호함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게달의 장막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 중 한 명인 ‘게달’(창 25:13) 족속이 유목 생활을 하며 사용하던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장막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장막은 오랜 시간 햇볕을 받고 비를 맞은 검고 칙칙한 모양으로 볼품이 없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해석은 여러 가지 일수 있으나 이 솔로몬의 휘장은 솔로몬이 성전 밖을 나갈 때 사용한 고급 세마포로 아름답게 만들어진 장막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무시하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자신의 외모는 ‘게달의 장막’과 같아도 자신의 모습은 ‘솔로몬의 휘장’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 왕의 사랑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사랑은 총체적인 사랑입니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아 4:1, 6:5), ‘눈’은 비둘기 같고(아 1:15),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아 7:8), ‘입술’은 홍색 실 같고(아 4:3), ‘입’은 어여뻐서 좋은 포도주 같고(아 4:3, 7:9),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아 4:2, 6:6), ‘두 뺨’은 석류 한쪽 같고(아 1:10, 4:3, 6:7),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아 4:4), ‘목소리’는 부드럽고(아 2:14), ‘얼굴’은 아름답고(아 2:14),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고 종려나무의 열매 같으며 포도송이 같고(아 4:5, 7:7,8), ‘몸매’는 종려나무 같다고 합니다(아 7:7). 솔로몬의 눈에 술람이 여인은 너무 아름다워서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아 4:7). 정말로 술람미 여인이 그처럼 아름답고 완벽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그동안 우리가 보고 또 보았던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죄인들을 계속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가죽 옷으로 덮어 주셨고(창 3:21)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방주로 덮어주셨고(창 7:7,23) 노아 이후 세대들을 무지개로 덮어 주셨고(창 9:8-17)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구름으로 덮으셨으며(시 105:39) 성막 안, 지성소 안 언약궤를 시은소로 덮으셨고, 과부인 시어머니를 모신 이방 모압 출신의 과부 룻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보아스의 겉옷으로 덮었고(룻 3:9)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죄인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혈로 덮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아가서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술람미 여인의 당당함
술람미 여인의 외적인 조건은 분명 좋지 않았습니다. 단지 피부가 검고 매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빠들을 어머니의 아들들로 표현하고(아 1:6)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친아버지는 죽고 현재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기에 오빠들의 횡포를 묵인했다고 보기도 하고 아니면 어머니는 친어머니이지만 힘이 없는 노인이고 술람미 여인을 못살게 구는 오빠들은 사촌 오빠들로 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술람미 여인에게 부모로서 또는 형제자매로서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에게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아 4:9)로 말하는데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오늘 나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대의 눈짓 한 번 때문에, 목에 걸린 구슬 목걸이 때문에, 나는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아 6:8-10)라고 하는데 이 표현을 다시 새번역으로 보면 ‘왕비가 예순 명이요, 후궁이 여든 명이요, 궁녀도 수없이 많다마는 나의 비둘기, 온전한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뿐, 어머니의 외동딸, 그를 낳은 어머니가 귀엽게 기른 딸, 아가씨들이 그를 보고 복되다 하고,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이 여인이 누구인가? 새벽처럼 밝고 보름달처럼 훤하고, 해처럼 눈부시고, 깃발을 앞세운 군대처럼 장엄하구나’라고 합니다.
이런 왕의 전폭적인 무조건적인 진실하고 순전한 사랑을 받은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가치를 예루살렘 딸들의 시선에 두지 않고 자신을 못살게 굴어 뙤약볕에 자신들의 포도원 돌보는 일을 시키는 오빠들에게도 두지 않고 오직 왕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눈으로 우리는 우리를 바라보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교’와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잠시 머무는 광야와 같은 인생 여정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이 바로 시편과 전도서의 중심 내용이었습니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연합
아가서에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 매우 노골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단어의 표현에 제한되지 말고 그 중심에 넘쳐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먼저 아직 왕 솔로몬과 혼인 잔치를 치르기 전에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과의 연합을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아 2:16)라고 고백하는데 이것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이라는 연합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다시 왕 솔로몬과 혼인 잔치를 치르고 나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과의 연합을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아 6:3)라고 고백을 하는데 다시 이것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나는 임의 것, 임은 나의 것’이라는 연합의 표현입니다. 또한 다시 한 번 더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과의 연합을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라고 고백하는데 다시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나는 임의 것, 임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로 연합의 완성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연합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지만 세상의 풍요를 즐기며 하나님을 잊은 백성들에게 바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희는 내 백성이다’(출 3:7,10, 5:1, 6:7, 7:4,16, 8:1,20,21,22,23, 9:1,13,17, 10:3,4)하셨고 광야에서(레 11:44,45, 18:2,4,30, 19:3,4,10,25,31,34,36, 20:7,24, 23:22,43, 24:22, 25:17,38,55, 26:1,13,44,45/ 민 10:10) 그리고 가나안에서(창 17:8/ 삿 6:10/ 슥 10:6)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은 ‘너희는 내 백성이다’ 하셨고(삼상 2:29, 9:16/ 삼하 3:18, 5:2, 7:8,10,11/ 왕상 6:13, 8:16, 14:7, 16:2/ 대상 11:2, 17:7,9,10/ 대하 6:5,6, 7:13,14) 선지서에서도 수 없이 반복하셨으며(사 3:12,15, 28:5/ 렘 2:11,13,32, 4:22, 5:26, 6:14,27, 7:12, 12:14,16, 13:11, 18:15, 23:2,13,22,27,32, 29:32, 30:3, 31:14, 33:24/ 겔 13:18,19,23, 14:8,9, 21:12, 25:14, 33:31, 36:8,12, 38:14,16, 39:7/ 호 11:7/ 욜 2:26, 3:2/ 암 7:8,15, 8:2, 9:10,14/ 옵 1:13/ 미 2:4,8,9, 3:5, 6:3,5/ 습 2:9/ 슥 2:11, 8:7) 신약 시대에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마 2:6/ 행 7:34, 18:10/ 롬 9:25,26).
하나님은 끊임없이 광야에서(레 26:12/ 신 29:13) 선지자들을 통해(렘 7:23, 11:4, 30:22, 31:1,33, 32:38/ 겔 11:20, 14:11, 20:19,20, 34:30,31, 36:28, 37:23,27/ 호 1:10, 2:23/ 욜 2:27/ 슥 8:8, 13:9) 그리고 신약에서(고후 6:16/ 히 8:10)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의 연합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입니다(요 14:20, 15:4,5,7).
하나님의 사랑
그래서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요 ‘복음’인 것입니다. 구약 역사를 지나오면서 한 사람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을 만큼 자격이 있었던 사람이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한 번도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행위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그 변함없으신 사랑, 그 불붙는 사랑은 변하지도 식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아가서 이후 이어질 선지서 중 하나인 호세아서는 말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라고 합니다. 바로 그 사랑, 보잘것없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왕 솔로몬의 전폭적인 사랑, 바로 그 사랑이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자신의 생명을 다 주기까지 희생하신 큰 사랑, 누구도 끊을 수 없어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술람미 여인을 향한 왕 솔로몬의 전폭적인 사랑을 통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요 8:1-11)과 같고 12년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마 9:20-22/ 막 5:25-34/ 눅 8:43-48)과 같고 중풍병이 심해 네 명의 친구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이 계신 곳 지붕을 뚫고 가야만 했던 중풍 병자(마 9:1-8/ 막 2:1-12/ 눅 5:17-26)와 같던 우리를 덮어주신 그 사랑을 찾아야만 합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
아가서는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고 합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자는 더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마 25:13, 26:41/ 막 13:35, 14:38/ 살전 5:6/ 벧전 5:8). 깨어 있어야만 소리도 없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이 사랑을 나누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깨어 있어야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은혜의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서 오세요
아가서는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13,14)로 끝이 납니다. 이 본문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바로 앞절은 왕 솔로몬이 한 말이고 마지막 절은 술람미 여인이 한 말입니다. 이렇습니다. 솔로몬 왕이 ‘동산 안에서 사는 그대, 동무들이 귀를 기울이니 그대의 목소리를 들려 주오’(아 8:13)라고 하니 술람미 여인이 ‘임이여, 노루처럼 빨리 오세요. 향내 그윽한 이 산의 어린 사슴처럼, 빨리 오세요’(아 8:14)라고 합니다. 바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향한 마음,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을 고대하는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뒤로하고 이 땅에서의 허무함을 그들의 삶을 통해 증명해 낸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가서를 넘어 선지서를 통해 본격적으로 심판을 선언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그 변함없으신 사랑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 그 열심의 이야기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