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무엇이었을까?

by 갈렙 posted May 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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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유언] 성철스님의 마지막 말, 왜 성철스님은 천추의 한을 안고 떠났나? 류범삼 지음.

<도서출판 [삶과 꿈]-
왜 성철 스님은 천추의 한을 안고 떠났나?> (류범삼지음)

(성철스님의 유언)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 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초인적인 극기 수행과 용맹정진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어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성철 스님,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한평생 남녀무리를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속인 죄가 너무 커 지옥에 떨어진다." 고
회한으로 몸부림치며 천추의 한을 토로했다.

과연 그가 도달한 깨달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성철스님의 열.반.송.
근거 (조선일보 1993.11.15 15면), 동아일보(1993.11.5 31면)
경향신문 1993.11.5 9면, 중앙일보 1993.11.5 23면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성철스님은
일찍이 불교가 최상의 진리라고 믿고 큰 깨달음을 얻어 해탈성불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부처가 됨) 하고자
1934년 23세 때에 부모, 형제, 처자 다 버리고 출가, 입산하여 1993년
81세로 타계하기까지 오직 참선과 학문으로 일관한 최고의 선승이요, 학승이다.

그는 한때 8년간을 드러눕지 않고 장좌불와의 초인적인 극기수행을 하기도 하고,
또 한때는 10년간을 사람의 근접을 막기 위해 임자 주위에 철망을 쳐놓고 오직 홀로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다.
이는 참으로 세계 불교사에서도 보기 힘든,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극기수행과 용맹정진이다.

그리하여 그는 큰 깨우침을 얻어 견성성불(자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가 됨)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8백년간이나 이어져 오는 조계종의 선법의 법통인 "깨우침은 점진적으로 된다." 는
『돈오점수론』을 비판하고 "깨우침은 단번에 된다."고『돈오돈수론』을 주장했다.

이는 그의 깨달음의 경지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철스님은 불교사상 보기 힘든 학승중의 학승이다.
그는 불교의 교의학을 거의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현대학문인 서양철학이나 심리학이나 종교학이나 물리학 등도 널리 섭렵하였으며,
또한 영어, 독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도 효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성철스님은 불교사에 보기 힘든 최고의 선승이요, 학승이다.

그러므로 성철스님은 한국불교계의 큰 보배요,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래서 그는 온 불자들의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불자들은 그를 "우리 곁에 왔던 부처" 라고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성철스님은 말년에 와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내심 말 못하는 갈등으로 괴로워하며 방황하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회한으로 몸부림치며 천추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 그가 말년에 무엇을 깨달았는지 , 왜 천추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는지,
그의 말을 들어 보자.


☞ 퇴옹당 성철 큰 스님


① "내 말에 속지 마라" (성철스님의 말)
1993년 11월 4일 처음 출가한 그 방 퇴설당에서 열반에 들다
그러나 큰 스님은 삼십 년 남짓 한결 같이 다니던 가야산 포행 길을 언제부터인지 힘겨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야산 호랑이도 한 자락 가사 밑에 어느덧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뭐를?"
"일천 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한 말씀만?"
"내말에 속지 마라."
"자신의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 . . . ? "
"내 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 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 법어집'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되는 것을 보고나서
두 달 만인 그 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 스님은 열반하였습니다.

"내말에 속지마라" 는 말을 던져주고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그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 스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선 잘하라 !" 그 한 말씀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에 드니,
행운유수行雲遊水의 사문의 길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랍 59년, 세수 82세로 큰 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 지라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침내 생사를 벗어나 적멸에 든 큰 스님은 입적한 지 이레째 날
평생을 주석한 해인사 퇴설당을 떠나서 일주문 밖에 마련된 연화대로 향하였습니다.
그날, 퇴설당 위로는 일시에 새떼가 날고, 다비 장에서는 때늦은 낙엽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스님 떠나던 그 날도 그러더니,
백련암 뒷산 하늘에서는 마치 불꽃이 타 오르는 듯한 환한 빛이 피어올랐습니다.
이는 드물게 보는 방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시간이 넘게 걸린 다비는 일백여 과에 이르는 영롱한 사리를 남겼습니다.

다비식에서 사십구재에 이르는 동안 큰 스님의 떠남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뭇 대중의 발길은
해인사 앞뜰을 가득 메우며 끊일 줄 몰랐습니다.

②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요. (성철스님의 글)
조선일보 - 1987.4.23 7면
경향신문 - 1987.4.23 9면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사서실 [큰빛총서 1] - 서울사시연 1994년 p.56-59

물속에서 물을 찾는다. 사탄이여 ! 어서 오십시요.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 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처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다 없어지고
이 세계는 본래로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러운 뻘 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아 !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 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 악이 융화상통 할 때에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 마다 부처요 극락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로 볼 때입니다.

1987. 사월초파일

위 글에 당황한 불교 측에서는 사탄이 아닌 적불을 성철이 잘못 말했다고 둘러대기 바쁘다.
사탄이 아닌 적불이었다면 왜 굳이 '적불'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그 박식하신 분이
'사탄'이라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단어를 반복해서 썼겠는가?
악마라는 말도 나오는데 악마도 적불인가?
도대체 그가 무엇을 속였단 말인가!
그는 평생 자기 자신도 속아서 거짓말을 최상의 진리인 줄 알고 한 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지옥에 떨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무서운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뿐인가!
속고 속이고 한없이 이어질 것이니, 그 엄청난 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임종을 앞에 두고 어느 날 푸른 산에 걸려 있는 곧 떨어질 이글이글 불타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가야 할아비의 불지옥을 생각하고 회한으로 몸부림치며 천추의 한을 토로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지도자들은 순진한 불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그것은 성철스님의 겸손을 나타낸 것이라고 회유하고 호도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세상을 속인 죄가 너무 커서 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고

천추의 한을 토로한 것이 겸손을 나타낸 것이란 말인가!
사실 성철스님의 열반송은 과연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평생 그가 주장하고 가르친 것은 불교가 최상의 진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불교가 최상의 진리라고 믿고 불교에 귀의했고, 그리고 펴생 그렇게 믿고 주장하고 살았다.
그러므로 그의 평생의 모든 화두와 법어와 교설과 주장은 그것에 대한 설명이요, 해설이요, 논증이다. 다만 살을 붙인 것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불교가 거짓말이라는 말인가?
사실 성철스님의 평생에 남녀무리를 속인 죄가 너무 커서 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는
회한과 통탄의 고백과 토로는 본인이 그것을 의식하고 했건, 의식하지 못하고 했건
그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 정말 불교의 중요한 교리와 주장이 거짓말인가?
물론 불교의 삶의 교훈은 옳은 것이 많다.
그러나 사실인즉 불교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주장과 교리는 유감스럽게도 거짓말이다.
그것들이 왜 거짓말인가는 앞으로 제3부에서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인류공통적인 체험법칙을 통해서, 인간 속에 있는 내적 증거를 통해서 검증,
확인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불교는 수양이다, 선행이다 하는 근사한 포장으로 위장한 고차원적인 유사진리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면 그것이 최상의 진리인 줄 감쪽같이 속는다.
그러나 진리의 빛으로 정확하게 조명해 보면 그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진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전래되는 종교문화와 그 역사로 인해 올바른 진리를 접할 기회가 없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말인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잘못된 전통신앙을 진리인 줄 잘못 알고 그대로 답습하며 붙들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사람이 애초에 어떤 길에 발을 들여놓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세상에 길은 많고, 길마다 진리라고 근사하게 위장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잠 14: 12)




그러므로 성철스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다.
만일 그와 같은 수행자가 애초에 참 진리의 길, 곧 생명의 길에 발을 들여놓고
평생에 그런 노력과 수고를 했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었겠는가!
그랬다면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는 가치 있는 삶 속에
그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소망가운데 살다가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인 죄가 너무 커서 지옥에 떨어진다고
회한으로 몸부림치며 천추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 무슨 비극인가!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이사야 44: 15) - 지금부터 2700년 전 기사 -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 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편 115: 4-8) - 지금부터 3000년전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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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이 운명 전 지은 깨달음 '시'


석가는 원래 큰 도적이요,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서천에 속이고 동토에 기만하였네,
도적이여! 도적이여!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여를 속이고,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한마디 말이 끊어지니 일천성의 소리가 사라지고,

한칼을 휘두르니 만리에 송장이 즐비하다.

알든지 모르든지 상신실명을 면치 못하리니,
말해보라 이 무슨 도리인가
작약 꽃에 보살의 얼굴이 열리고,
종려 잎에 야차의 머리가 나타난다.

목 위의 무쇠간은 무게가 일곱 근이요,
발밑의 지옥은 괴로움이 끝없도다.

석가와 미타는 뜨거운 구리 쇳물을 마시고,
가섬과 아난은 무쇠를 먹는다.

몸을 날려 백옥 난간을 쳐부수고,
손을 휘둘러 황금 줄을 끊어버린다
산이 우뚝우뚝 솟음이여 물은 느릿느릿 흐르며,
잣나무 빽빽함이여 바람이 씽씽 분다.

사나운 용이 힘차게 나니 푸른 바다가 넓고,
사자가 고함지르니 조각달이 높이 솟았네.

위의 시는 성철의 운명 전 시사저널 김당 기자가 취재해 온 것이며,

이 시는 추상적인 시가 아니라
성철스님이 운명 전 영계를 직접보고 그리고 지옥의 석가와 달마와 가섬과 아난이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싯구로 잘 묘사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영계에서 직접 보지 않고는 자기가 평생 섬겼던 석가를 도적이라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극락 간다는 말은 원래 성경 시편 43편 4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라"하였다.
극락은 천국의 낙원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는 자들이 가는 곳이며
석가와 달마도 극락을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져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성철스님이 영계 속에서 직접보고 시로 옮긴 것이다. "

좋은 씨와 맑은 물" 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글


acesuh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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