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_호라티우스 보나르(1808~1887)

by 갈렙 posted May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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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vs. 인간의 자유 의지>
  호라티우스 보나르 (Horatius Bonar, 1808 - 1887)

“주가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이 토기장이가 행한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보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야 18:6)

 

 

최근에 많이 논쟁이 되고 있는 주제의 상당부분은 하나님의 의지(예정)에 관해서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주된 논쟁은 하나님의 의지와 사람의 의지와의 관계에 관해서이다. 이 둘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 둘이 존재하는 순서는 어떻게 되는가? 어느 것이 먼저인가? 먼저 이 두 가지의 의지가 존재한다는 데에 있어서는 논란의 소지는 없다. 하나님에게 의지가 있으며, 또한 사람에게도 의지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사람도 계획한다. 우주에서 하나님의 의지(계획)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가 모든 일에 있어서 최우선으로 선행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대답은 “그렇다!”이다. 어떠한 선한 것도 하나님이 뜻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 어떠한 악한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의지는 모든 의지에 선행한다. 하나님의 의지가 다른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움직인다. 하나님의 의지가 다른 것들을 통제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하실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내가 원하노니가 온 우주의 크고 작은, 혹은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게 된 근원이 된다. 천사를 존재하게 한 것도 이 하나님의 ‘내가 원하노니’였다. 잃어버린 세상에 구원의 근원이 되었던 것도 하나님의 ‘내가 원하노니’였다. 구원자를 보내신 것도, 구원을 완성하신 것도 하나님의 ‘내가 원하노니’였다. 구원받은 영혼 안에서 그 구원을 시작한 것도 그리고 수행하고 완수한 것도 이 하나님의 ‘내가 원하노니’였다. 소경의 눈을 열어주신 것도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주신 것도 하나님의 ‘내가 원하노니’였다. 잠들어 있는 자를 깨운 것도 죽은 자를 일으키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내가 원하노니’였다. 나는, 단지 일반적으로 말해 하나님이 이 일들에 관해 그분의 뜻을 선포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 개개인의 변화와 그 안에 포함된 각각의 활동들 모두가 바로 하나님의 내가 원하노니’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치료하셨을 때,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 영혼이 거듭날 때도 이와 같은 독특하고 특별한 하나님의 의지가 선행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노니, 거듭날지어다.’ 사람에게나 우주에서 ‘선’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회심할 때 그 자신의 의지가 작용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행위, 생각, 느낌에 있어서 그 자신이 또한 바라고 뜻한다. 회개할 때도 그의 의지가 작용한다. 그가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데도 그의 의지가 드려진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며 어리석은 말일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해도 그 뒤에 여전히 흥미로운 문제가 남게 된다. 이러한 사람의 선한 의지의 활동은 하나님의 의지가 선행된 결과인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그 자신만의 의지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인가? 그가 움직인 것이 완전히 자신의 자유의지만으로 인해서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누군가의 설득 때문인가?

 

 

나는 주저함 없이 그가 의지를 갖게 된 것이, 또 다른 더 상위의 의지가 그의 의지를 움직여 그의 본성과 성향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새로운 성향은 우주의 모든 사건과 변화에 있어 유일하게 주권을 가지신 분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의 결과이다. 사람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의 활동을 따른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러한 의지를 갖도록 만드신다. 활동에 있어 하나님의 의지가 최우선으로 작용한다. 거룩하고 완전한 의지도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한다. 거듭날 때도 사람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에 뒤따른다. 사람의 의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다. 경건치 않은 의지는 그 성향이 먼저 변화되어야 하므로 하나님의 신성한 의지가 아니면 안된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권능의 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면 그 불경건한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이 사실이 하나님이 죄를 짓도록 하신 분으로 만드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에게서 선을 유발하도록 한 것이, 그와 같은 이치로 악도 유발하도록 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거룩하고 행복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그것을 창조하신 것임을 증거 한다. 불경건하고 불행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 상태로 떨어지게 허용하셨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과 미리 아심에 따라 넘겨지셨음을 들었다. 하나님의 의지가 거기 있었다. 하나님은 그 어두움의 일들이 행해지도록 허용하셨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의 결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유다와 헤롯이 죄를 짓도록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넘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유다가 배반하도록 그리고 헤롯이 조롱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가? 더 나아가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다. ‘진실로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그분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여 헤롯과 군병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 모였다.’ 이 구절을 예정에 관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데 이용하도록 곡해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여기에 언급된 행위들을 시키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계획이 미리 정하신 일들을 행하기 위해 모였다.’라고 쓰여 있으므로 하나님이 죄를 짓도록 시킨 분이라고 보아야하는가? 우리의 반대자들이 그러한 구절들을 이용하여 그것이 그들의 교리와 얼마나 잘 부합되는지 말하도록 해보자!

 

 

하나님이 의지를 변화시킴으로써 일한다고 하는 것은 논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권능이 특별하고 직접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그 방법들을 이미 인정하셨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주셨고, 하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으므로, 이러한 것들 안에서 하나님은 변화에 영향을 끼치신다.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 안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변화를 위해 위에 말한 것들을 선포하셨을 뿐이다.” 자, 그러면 이 말은 얼만큼 진리인가 보도록 하자!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는 한 복음은 그사 람 안에 어떠한 변화도 낳을 수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할 것이다. 약은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사람이 그것을 먹지 않으면 작용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의 의지는 복음을 거부한다. 사람의 의지는 하나님의 진리에 거역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변화가 있다(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묻고 싶은 것은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 사람이 어떻게 그만큼 변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질병을 앓는 환자의 최악의 국면은 약을 먹지도 만지지도 않으려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겠는가? “아! 그런 거부는 잘 설득해서 먹게 할 수 있어요!”라고 누구는 말할 것이다. 설득하면 된다고! 복음은 그 자체가 위대한 설득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거부되었다. 복음을 거부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다른 설명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른 설득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 모두를 거부하도록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싫어하지 않을 설득방법은 더 이상 없다. 그의 의지는 모든 좋은 진리들과 동기들을 거부하고 싫어한다. 그러면 이러한 저항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굽은 의지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변화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의 의지가 그보다 뛰어난 의지-그 저항을 제거할 수 있는, 그리고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고..’하던 그 전능한 의지-를 만남으로써만 가능하다. 의지는 그것이 거부하던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변화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무엇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사람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단지 그가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더 잘 설명한다면 그 거부감이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 말은 죄인이 결코 진리 자체는 거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그가 거부하는 것은 단지 착오일뿐이며 그 착오가 바로잡아지면 그가 바로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진리에 큰 적의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 아주 적은 부패함과, 그의 의지에 아주 적은 고집만 있으며 그 안에 진리를 사랑하고 오류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 진리가 잘 설명되기만 하면 그가 그것을 즉시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그가 이전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단지 진리가 제시될 때 그와 함께 잘 못 전달된 오류로부터 생긴 것이란 말인가! 어떤 사람은 이것은 단지 악행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무지이며 진리에 대한 적의라고 할 수는 없으며 단지 잘못 전달된 것에 대한 적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죄인의 마음과 의지의 주요한 문제는 진리에 대한 적의가 아니고, 잘못된 것에 대한 미움이며 그들은 진리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에게, 은혜의 하나님에게. 그러면 죄인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과 그 영혼이 어두운 것은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무슨 진리가 있겠는가! 나는 때로 그러한 경우도 있음을 인정한다. 나는 근심하는 영혼에게, 그 어두움의 이유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진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임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조금만 더 알게 되어도 그의 의심의 구름을 내어쫒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된 것이 사람의 적대감을 확신과 사랑으로 변화시킬것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은 인간의 의지는 복음을 거역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대해 적대적이다. 진리가 더 명확하게 더 가까이 전해질수록 그의 저항은 더 커질 것이다. 비록 그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진리가 선포되는 것은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더욱 격분시킬뿐이다. 그가 미워하는 것은 그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이 그 앞에 더욱 명확하게 제시될수록 그는 그것을 더 미워하게 된다. 그가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하나님이 그 앞에 더 생생하게 드러나면 그의 적의는 더욱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적의를 더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 자체로는 그것을 없애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되겠는가? 사람의 자유의지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 그것을 새롭게 해야만 한다. 그것을 만든 것은 전능자의 일이었다. 그것을 새롭게 하는 것도 그와 같아야만 한다. 다른 방법으로 그 악한 성향이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 안에 역사해야만 그 변화는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의지가 그 모든 활동가운데 우선이 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의지는 그것을 따를 뿐이다. 사람의 의지가 선행할 수 없다.

 

이 말이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최근의 어떤 이들은 우리를 그들과 같이 만들고자 한다. 그들에게 왜 위에 말한 진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인지 물어보자.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에 선행하므로 그것을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인가? 크고 작은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의지가 선행하며 사람의 의지는 따른다고 하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우리가 선을 위해 행하는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인가?

 

 

만약 그것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것은 사람에게서 선과 관련된 어떠한 부분조차도, 그리고 선을 향한 그의 의지의 작은 부분조차도 부정하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나는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그 교리에 대해 불평하는 은밀한 이유라고 믿는다. 사람은 완전한 반역자이며 아무 선한 것도 없는 존재이다. 그 교리는 사람을 단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하나님을 향해 적의의 마음으로 가득하고, 공의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만이 아닌 은혜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에게조차 적대적이며,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심히 벗어나고 그것에 반역하며 선과 거룩과 영적인 것을 향해서는 어떠한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죄인- 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전적으로 무가치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위와 같은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복되고 거룩한 의지가 우리의 비참하고 불경건한 의지를 앞서가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므로 그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 모든 부분에 있어 하나님께 받아야만 하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내 의지의 모든 활동은 아래로 땅으로 향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한 의지가 내려와 주권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위로 향하도록 하늘을 향하도록 하는 것을 보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만일 내가 하나님의 의지가 우주의 거대한 활동을 통제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나는 그분의 의지가 작은 일들까지도 동일하게 통제한다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내 의지의 순간의 활동도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통제된다. 나는 이 사실로 인해 기뻐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그와 같은 무한한 통제와 인도함을 부인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완전한 다스림이라는 개념을 싫어하게 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부분적으로 내 자신 스스로 다스리기를 바랄 것이다. 내가 더 큰 것들을 하나님의 통제에 순복하는 반면 나는 내 의지의 작은 영역에 있어서는 스스로 통제하기를 갈망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하나님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내 운명의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는 생각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분의 의지를 가지는데, 나는 나 자신의 의지를 가지지 못할까 두려워할 것이다. 더욱이 내가 늘 그분의 사랑에 대해 얘기하기 좋아하는 바로 그 하나님에게 나는 나의 영생을 전적으로 맡기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실제적인 진리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의심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완전한 주권을 부인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에게 사랑밖에 다른 것은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더 이해할수록, 나는 그분이 더 주권적인 분이심을 깨달으며, 그분의 그러하심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더욱 즐거워하게 된다.

 

 

나의 출생일을 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였다. 또한 나의 죽을 날을 정하신 것도 같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리고 나의 회심의 날을 정하신 것도 같은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겠는가? 바보 말고는 하나님이 우리의 출생과 사망의 날은 정하셨지만, 우리의 회심의 날은 우리 자유의지에 남겨놓으셨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가 회심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을 말이다. 만일 우리의 회심의 날도 정해졌다면 그 일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되도록 남겨질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우리가 태어 날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거듭날 것인지도 하나님이 정하신다. 만일 그렇다면 믿는 일에 있어서 그분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에 선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믿게 된 것은 그분의 의지가 우리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의 의지가 그와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의 의지에 앞선다면 나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세상을 그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도록 허락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회심의 때를 정할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에 놓인 일을 간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가 회심할 것인지의 여부조차도 정할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그 자신과 자신의 의지에 맡겨진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얼마의 사람이 회심할 것이지도 정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구원으로의 초청을 조롱거리로 만들뿐일 것이다. 그분은 궤도를 벗어난 별을 권능의 직접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제 궤도로 옮기어 자연의 법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팔을 펴 길을 떠난 사람의 뜻을 사로잡아 다시금 거룩함으로 돌려놓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무슨 세상이란 말인가! 사람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고, 하나님은 개입할 수 없는 곳! 이 무슨 세상인가! 모든 것이 사람의 의지에 놓이는 곳, 세상과 교회의 모든 일들이 오직 사람의 의지에 의해 통제되고 형성되고 움직이는 곳, 하나님의 의지는 단지 두 번째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은 일어나는 사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그리고 사람의 의지가 걷는 길을 따르는 것뿐인가! 사람이 의도하고, 하나님은 그에 아멘! 이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반대하는 이 모든 주장들 속에서 나는 마지막 때의 자기 의지가 드러나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은 처음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고, 그 싸움을 마지막까지 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앞서도록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에게서 이 자기 의지는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그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원조이며, 왕이다. 그리고 오늘날 자유의지의 논쟁에서 우리는 같은 영이 작용함을 본다. 우리에게 자신의 독립을 자랑하도록 부추기며 말하는 것은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자기의지는 적그리스도의 핵심이다. 자기의지는 쓴뿌리의 근원이며 오늘날의 교회들에서 자라나고 있다. 그것은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아래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이며 육체적이며, 마귀적이다.

 

 

 

 

 

 



호라티우스 보나르 (Horatius Bonar, 1808 - 1887)

cf) 통일 찬송가에는 보나르가 지은 7곡의 찬송이 실려 있습니다.   (90, 149, 203, 285, 335, 426, 467장) 

스코틀랜드 복음 전도자요 찬송가 작사자인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무려 364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많은 목사를 탄생시킨 경건한 집안에서 1808년 열한 명의 형제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형제들, 그 중에서도 형 제임스의 다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형 제임스(John James), 동생 앤드류(Andrew)와 더불어 목사가 되었다. 그는 에딘버러 대학(Edinburgh University)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토마스 찰머스 밑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833년 설교할 자격을 획득하였다. 그의 첫 번째 사역은 리스(Leith)에 있는 성 요한 교구에서 전도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사년 동안 전도 사역을 감당한 후에 그는 켈소(Kelso)에 있는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었다.

소위 ‘스코틀랜드 교회 분열’(Great Disruption)이 일어날 당시에 보나르는 복음적인 목사들과 장로들의 편에 굳게 서 있었고, 1843년 5월 그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를 탈퇴하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는 1830년대와 40년대 스코틀랜드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영적 운동에 크게 쓰임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찬송시를 작시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찬송시들은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 것으로, 거의 600편에 달하는 등, 그는 스코틀랜드 찬송가 작시가 중 제 1인자로 꼽히고 있다. 한국 찬송가 공회에서 발행된 찬송가에도 보나르의 찬송시가 일곱편이나 실려 있다. 신학적인 진리들을 참으로 경건하게 표현한 그의 찬송시는 가사만 읽어 보아도 은혜가 될 만큼 참으로 뛰어나다. 특별히 보나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제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인간의 교만함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역과 찬송 작시와 저술에 있어서 오직 한가지 목적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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