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서, 어떤 책인가?

by 갈렙 posted Nov 0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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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Ruth)

 

2020. 5. 20. 21:56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세 번째 여인은 BC 4세기경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집안으로 시집온 어린 과부 룻이다. 룻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의 한권의 책으로 기록할 만큼 아름답고 감동스런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룻기는 또한 모세 5경과 여호수아 그리고 사사기 다음, 8번째 책으로 편집하여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룻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내용 상, 사무엘이나 에스라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BC 1050~970년 경 다윗 왕이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룻에 대한 아름다운 덕목을 기리고 장려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오순절이나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룻기 전체를 읽었다고 한다. 룻기는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룻 때문만이 아니라 보아스와 그 외의 인물들의 삶이 주는 덕목과 교훈이 어떤 이야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가 단지 어린 과부 며느리가 자기를 희생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살다가 복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라면, 한 권의 책으로 엮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효(孝)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덕목이기는 하지만 룻기를 이스라엘 역사서 가운데 둘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을 올린 것을 생각해 볼 때, 효에 관 것 외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어떤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예술가의 상상력을 통해서 살펴본다면 그 의미를 혹시 알 수 있지 않을까.

룻의 삶은 매우 극적이면서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많은 화가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 그림의 대부분은 룻의 두 번째 남편이 된 보아스와의 만남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젊은 룻을 그리고 있다. 성경의 룻기를 읽지 않고 그 그림을 본다면 그 작품이 룻의 이야기라고 알아보기 쉽지 않다. 그저 남녀의 만남이나 농장 주인과 하녀 또는 농촌의 전원풍경 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중심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좀 더 주의 깊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면 숨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룻이라는 이방인 여인이 어떤 이유로 메시아의 계보에 그 이름을 기록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룻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룻기에 나오는 인물을 분석해 본다.

◼ 작품 배경 : 룻기 전체

기원전 400여년 경 사사(족장과 같은 지도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기근을 피하여 모압 지방으로 이사 온 유대인 엘리멜렉의 둘째 며느리로 시집온 모압 여인 룻(Ruth)의 효성을 내용으로 한다.

룻기의 줄거리 및 주요 인물 분석

베들레헴에 살던 유다 지파의 엘리멜렉이 심한 기근이 들자 그 아내 나오미와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모압 :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의 멸망을 피하여 탈출한 후 그의 맏딸이 아버지와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들의 이름으로 훗날 모압 족속을 이룸.) 지방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남편 엘리멜렉이 죽자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압 족속의 딸들과 혼인시킨다. 그러나 두 아들도 죽어 나오미와 맏며느리 오르바와 작은 며느리 룻 3 명의 과부만 살아가던 중, 이스라엘의 기근이 풀리고 양식이 많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갈 준비를 한다. 나오미는 젊은(어린) 두 과부 며느리에게 각자 친정집으로 돌아가서 더 낳은 삶을 살아가라고 한다. 시어머니인 자기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도 젊은 과부며느리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고 맏며느리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둘째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아 살겠다’며 시어머니를 따라 빈털터리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돌아온 때는 마침 추수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룻은 생계를 위해 추수하는 소년들을 따라다니며 떨어진 이삭을 줍는다. 그러던 중 룻은 우연히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된다. 보아스가 룻이 자기의 친족 엘리멜렉의 며느리라는 것을 알고 룻에게 어려움이 없도록 호의을 베풀고 도와준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이 사실을 알고 룻을 보아스의 아내가 되도록 일을 꾸민다. 결국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삼게 되고 룻은 보아스와 혼인을 하여 자식을 두고 살게 된다.

룻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주인공인 작은 며느리 룻과 그의 남편이 된 보아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큰며느리 오르바 네명이다. 이 외에 이 집안의 가장인 엘리멜렉이나 두 아들 그리고 맏며느리 오르바에 대한 자세한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들을 제외하고 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룻, 보아스 그리고 나오미의 3인에 대한 인물의 특징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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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이 룻을 왜 그렇게 칭찬하고 기리는 것일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고생하면 살던 어린 과부가 복을 받아 부자인 착한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뻔한 이야기다. 룻 이야기는 이렇게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의미가 깊고 아름답다. 어린 과부로서 시어머니를 공경하려는 효심만을 강조한다면 그 의미는 축소될 것이다. 룻이 받은 축복은 효의 보상이 아니라, 룻이 가지고 있는 사랑, 순진무구함, 겸손, 그리고 믿음이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룻은 시어머니를 지고지순하게 따르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기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기 1:16)라고 고백하는 룻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여 보신 것이다. 자기의 행복을 우선하지 않고 룻은 자기가 있어야할 곳, 가야할 곳과 머물러야 할 곳을 시어머니의 하나님께 맡기는 큰 믿음을 가진 것이다. 이 말은 룻의 효심의 표현을 넘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인 것이다. 불행한 상황을 어떤 불평도 없이 받아들이며 자신이 해야할 옳은 것을 선택하고 실천한다.

추수할 시기에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와 추수가 끝난 밭에서 이삭을 주워 연명한다. 이삭을 줍는 일에 있어서도 열심히 쉬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러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의 눈에 띠게 된다. 보아스는 룻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굶주리지 않도록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하며 많은 이삭을 많이 주울 수 있도록 룻을 배려하고 호의를 베푼다.

보아스에 대한 룻의 태도 또한 더 없이 겸손하다. 룻은 자신을 보아스의 시녀보다 못한 자로 자기를 낮추며, 자기를 선대하는 보아스를 ‘주’라 부르며 진심어린 감사를 표한다. 이러한 룻의 태도는 결코 부자 친척에게 잘 보이려는 계산된 의도도 아니며, 값싼 유혹의 제스츄어도 아니다. 보아스에 대한 존경과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아스의 인자함과 부요함을 알게 된 룻의 시어머니가 꾸민 가문의 기업을 잇는 일에 대해서도 묵묵히 시어머니의 지시를 따른다. 이미 노인이 된 보아스에게 가라는 시어미니의 지시에 대해서도 어떤 반발이나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룻의 순수하고 믿음 있는 태도에 보아스의 마음이 움직였다. 보아스는 룻을 배려하여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후사를 생산하는 아내로 삼게 된 것이다.

룻의 덕목은 단순한 효성을 넘어서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를 주관하는 존재에 대하여 의심없이 온전히 믿으며 따를 줄 아는 겸손을 지닌 순수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과 시어머니의 백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던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시어머니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고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지혜가 아닐까? 룻은 순수, 겸손, 지혜 그리고 참된 믿음을 고루 갖춘 여인이었던 것이다.

-. 보아스

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영어 성경에는 보아스에 대하여 'man of standing' 출세한 사람이라고 쓰고 있다. 보아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그 안에 능힘이 있다’라는 뜻이며, 사사시대 살몬의 아들로서 여리고 성의 기생이 었던 라합이 그의 어머니다. 라합(참고: https://blog.naver.com/noransonamu/221970800720) 또한 이방여인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른 여인이다. 보아스는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과부가 된 룻과 혼인하여 엘리멜렉 집안의 대를 이어준다. 그는 룻과의 사이에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즉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어 훗날 예수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는 유대인 중에 부자였고 많은 농경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수년간의 기근에도 불구하고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이 있다. 그는 자기가 고용한 일꾼들을 살피고 배려하며 축복하는 마음이 부요한 사람이었다. 일꾼들을 무심히 대하거나 거들먹거리지 않고 노동력을 사고 대가를 지불하는 관계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선대할 줄 하는 너그러운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룻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난다. 또한 가난한 친족을 모른 체하지 않고 친절을 베풀고 도울 줄 아는 선한 사람이다.

룻이 자기 잠자리에 숨어들었을 때조차도 매우 놀라며, 나이 많은 자신이 어린 룻에게 적합하지 않다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신중함과 고상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다. 나오미 가정의 궁핍함을 알고 잠자리에 숨어든 룻에게 곡식을 들려 보내는 세심한 배려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 일을 대충 편의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1순위를 찾아서 합당한 절차에 따라 공식적인 일로 진행하여 나오미와 룻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보아스는 어린 룻을 품고자 하는 욕정의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친족의 불행에 대해 모르는체 하지 않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기업 무를 책임을 다하는 의로우며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손해를 기꺼이 무릅쓰며 룻을 돕기 위해 엘리멜렉 집안의 기업을 잇는 일을 감당한다. 그는 선한 방법에 따라 룻을 아내로 삼아 룻으로 하여금 다윗 왕의 할아버지 오벳을 생산하게 된다.

룻의 이야기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룻 때문만은 아니다. 룻의 효성과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룻을 대하는 의롭고 자비로운 보아스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 나오미 :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의 시어머니로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고향의 토지를 버려두고 남편과 두 아들을 따라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남편이 죽자 두 아들을 그 지방의 이방 여자와 결혼을 시켜 10년 쯤 살다가 두 아들도 죽고 만다.

기근을 피해 풍요로운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났지만, 남편도 자식도 모두 잃고 소망 없이 살아가던 중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향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려한다. 그녀는 두 며느리에게 과부인 자신을 따라가도 소망이 없으니 각기 친정으로 돌아가라 하여, 큰 며느리는 돌아가고 작은 며느리 룻은 한사코 시어머니를 따라 가겠다 하여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나오미는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과부 막내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린 며느리 룻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던 나오미는 친족 보아스의 도움을 받는다. 며느리가 보아스를 통하여 낳은 손자들로 대가 끊긴 집안의 기업을 삼아 다시 행복을 찾는다.

기근으로 인하여 고향을 떠난 것, 어린 아들들을 이방 소녀들과 혼인 시킨 것, 며느리를 보아스의 잠자리에 보낸 것을 볼 때, 나오미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임에 틀림없다. 나오미는 그녀의 탄식처럼 복된 여인은 아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모압 여자를 아내를 삼아 10년을 살았지만 후손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는다. 풍요와 행복을 찾아서 고향을 떠났지만 그들에겐 모든 소망이 사라진 것이다. ‘나의 기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녀의 이름은 불행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나오미는 자기의 불행을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오미에게 그리하셨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다. 풍족하게 나갔다는 것은 욕심으로 따라 나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기근으로 고생할 때 자기만 살겠다고 고향을 버리고 떠난 것이 잘 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라는 것은 욕심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자 하기 보다는 세상적인 상황을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아마도 나오미와 그 남편 엘리멜렉은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치심을 당하고, 징벌을 받고, 괴로움을 겪으며 비어 돌아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오미와 달리 룻은 그러한 인간적이고 현실적이고 세상적인 계산이 없다. 소망이 없이 가난과 고생만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시어머니를 따라 나서는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닫고 믿는 바를 따라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오미는 사람의 계획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았지만 룻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호의를 전해 듣고, 보아스가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 자기의 집안의 기업무를 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보아스가 부자이고, 선한 사람임을 알고 며느리 룻을 통해서 보아스로 하여금 기업무를 자가 되도록 일을 꾸민다. 나오미의 계획은 자기 집안의 기업 무를 자를 찾고, 착한 며느리의 행복을 찾아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오미는 세상적 판단을 버리지 못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룻을 보아스에게 접근시키지만, 의로운 보아스는 나오미의 세상적인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 결국 보아스로 하여금 기업을 잇게 되었지만 그것은 나오미의 인간적인 계획의 성공이 아니라 룻의 순수한 신앙과 보아스의 의로움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믿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미가 기뻐하며 룻이 보아스에게서 낳은 아들을 양육하지만 그 아들 오벳은 엘리멜렉의 아들이 아니라 보아스의 계보를 잇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이르게 된다.

 

기업을 무른다는 의미 : 유대인은 혈통이나 재산은 반드시 후손들에게 불려주어야 한다는 규례가 있었다. 만약 자식이 없다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만약 어떤 이유에서 재산 즉 땅을 팔았거나 다른 사람의 종이 되었을 경우 땅 값을 지불하거나 속전을 지불하고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친족이 부당한 피해를 당하게 될 경우, 그 죄 값을 대신 받거나 복수할 권리를 갖게 된다.

■ 작품 감상

룻에 대한 많은 작품 중에 여기에 소개할 작품은 푸생(Nicholas Poussin)의 <사계-여름, 룻과 보아스(The four Seasons-Summer or Ruth and Boaz)>, 독일 작가 캐롤스펠드(Julius Schnorr von Carolsfeld)가 1828년에 제작한 <보아스 밭에 있는 룻(Ruth in Boaz's Field)>, 프랑스 화가 밀레(Jean François Millet)의 1852-3년경의 작품 <추수군의 휴식 - 룻과 보아스(Harvesters Resting-Roth and Boaz)> 3점의 그림을 소개한다.

이 작품들은 작가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림의 내용에 많은 차이가 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그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전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이해나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메시지가 확대 축소 왜곡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유명한 예술가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성경을 해석하여 이미지로 보여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신의 영역에 속한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 성경은 인간의 목적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해왔고, 이기적인 목적에 따라 이현령비현령의 수난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를 극복하고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 여러 작품을 감상해 보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메시지를 구별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들 3인의 화가들은 룻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 어떤 오류와 왜곡이 있는지 살펴본다.

니콜라스 푸생의 <사계 - 여름, 룻과 보아스>

푸생, 4계-여름, 보와스와 룻, 캔버스에 유채, 118X160cm, 1660~1664, 루브르박물관

이 작품은 1660년 초에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그가 1660년부터 1664년 사이에 프랑스 리슐리에 공작의 주문을 받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린 4개 연작 중 하나이다. 이 작품 <4계 -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모두 성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봄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인간, 여름에서는 보아스를 통한 하나님의 선택, 가을에서는 하나님의 약속, 겨울에서는 심판을 주제로 삼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범죄와 구원 그리고 심판의 과정을 4계절이라는 풍경화로 표현한 연작이다.

당시의 푸생의 화풍이 잘 드러나는 <4계 - 여름, 룻과 보아스>는 추수가 한창 진행 중인 농장에서 보아스와 룻이 만나고 있는 이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푸생은 자연 풍경을 역사화의 배경으로 자주 사용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한 여름의 밀 추수 때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지만, 푸생의 다른 그림들처럼 인물들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풍경의 한 요소로 삼아서 추수 풍경 전체가 중심이 되도록 한다. 작품의 명제를 참고하거나 성경의 배경을 알지 못한다면 그저 주인과 일꾼들이 만나는 아름다운 추수 풍경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배경이 되는 풍경을 주인공들보다 정성스럽게 표현한 이 작품에서 푸생은 추수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주인공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위쪽 가운데 멀리 높은 산이 보이고 그 아래 베들레헴 성으로 보이는 곳에 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산과 연결되어 오른 쪽 앞 언덕 위에 요새처럼 보이는 성이 보인다. 아마도 이 성은 그림의 아래 앞쪽의 터번을 쓴 노인으로 보이는 보아스의 부를 나타내고 구별된 가문임을 상징하고 있다. 황금 빛 밀밭이 멀리까지 펼쳐지고 있고, 그림 아래 왼쪽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고 그 아래 두 명의 여인이 점심으로 보이는 빵을 준비하고 있다. 그 빵을 덮었던 붉은 천이 보인다. 이 나무는 메시아가 오실 다윗의 혈통과 하나님의 확고한 약속을, 나무 아래 빵과 붉은 천은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 이 그림에서 특이한 점은 추수하는 일꾼의 대부부이 여인들이라는 것이다. 물을 마시는 여인, 밀을 베고 있는 여인, 아이를 앉고 수유를 하는 여인, 보아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 등 모두 8명이다. 그 중 주목해 볼 인물은 보아스로 보이는 남자 앞에 무릎을 꿇은 여인 룻과, 멀리 아기를 앉고 있는 여인이다. 룻의 자세와 시선에서 그녀의 태도를 알 수 있고, 멀리 강보에 싸인 아기가 미래에 오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멀리 5마리 말을 몰며 추수를 하고 있는 한 남자, 단을 묶고 옮기는 2명의 남자, 그리고 막대기를 들고 경의를 표하는 젊은 남자, 그리고 보아스 등 5명이고 여인이 앉고 있는 아기가 남자라면 남자는 모두 6명이다. 말을 몰고 있는 장면은 평화를 상징하고, 막대기를 들고 경의를 표하는 남자는 미래의 다윗을 나타내고, 다윗의 자기의 선조인 보아스와 룻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체적인 그림에서 메시아가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을 나타내며, 오실 메시아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자기 살과 피 즉 생명을 주실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서 보아스와 룻의 모습을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림의 맨 아래 중앙에 3사람이 보인다. 왼쪽에 두 주인공이 보아스와 룻이 보인다. 보아스 앞에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 말을 하는 룻, 룻을 바라보지 않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젊은 일꾼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지시하며 동시에 오른 손으로 룻을 가리키고 있다. 성경을 기초로 하여 살펴보면 일꾼인 젊은 청년에게 룻를 선대할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보아스의 이러한 선대에 룻이 감사하며 무릎을 꿇은 모습이다. 메시아의 조상이 될 인물 앞에서 자신을 ‘종’이라 칭하며 보아스 앞에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고하고 있는 것이다. 무릎을 꿇은 룻 뒤 쪽에 떨어져 서있는 청년은 시종으로 보이지만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와 모습에서 훗날의 다윗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의 후손 다윗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보아스와 룻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푸생이 그린 룻은 좀 나이가 들어 보인다. 성경에서 보아스는 룻에게 “딸”이라고 하기도하고 소년이라고 표현할 만큼 젊다기보다 어리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나오미가 두 아들을 혼인시키고 10년을 살았다고 하니 룻이 매우 어린 나이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룻이 나이든 여인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푸생 특유의 표현방법 때문일 것이다. 그는 늘 인물의 인체 비율을 길게 하여 동작이나 자세를 우아하게 보이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작품의 크기가 118×160cm로 작은 편은 아니지만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서 인물 개인의 특성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고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푸생 특유의 길고 야윈 것 같은 인물 묘사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보아스와 룻이 아버지와 딸이 될 정도의 나이 차이가 있을 터인데, 이 작품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은 없다. 등장인물의 외모에 대해서는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내용상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푸생은 인물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상세하게 표현하지 않고 인물들의 위치와 몸짓, 그리고 놓여 있는 물건들의 상징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 표현하고 있다. 보아스가 얼마나 관대하게 생겼는지, 룻이 얼마나 아름답고 젊은 여인이었는지에 관한 것보다 룻과 보아스가 만났다는 이 사건의 의미, 이 두 사람이 다윗의 조상이며, 훗날 메시아의 조상이 이들에게서 태어나게 된다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푸생은 성경의 룻의 이야기를 전원풍경을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그림 속에는 당시의 상황과 이들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의 한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과 연작인 푸생의 다른 작품 3점 또한 하나님의 인간의 범죄와 구원에 관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캐롤스필드(Julius Schnorr von Carolsfeld)의 <보아스 밭에 있는 룻>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Ruth in Boaz's Field, 59cm × 70cm, oil color on canvas, 1828, National Gallery London

이 그림은 독일 화가 캐롤스펠드(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의 작품이다. 캐롤스필드는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여 빈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1817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즉 15세기 이탈리아 회화 특히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작품을 연구하며 그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 후 나사렛운동(Nazarene Movement)에 참여하여 르네상스 스타일에 성경의 내용을 주로 그렸으며 소묘화를 즐겨 그린 화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한 성당의 스텐드글라스 창문을 디자인하고 성당의 대규모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825년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1세(Lu dwig : 재위1825-48)의 초청으로 뮌헨으로 옮겨 왕궁의 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1846년 드레스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으며, 대표작은 <가나의 혼례, 1820> <이집트로 피난, 1828> 등이 있다.

캐롤스필드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세밀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표현을 연구하고 그의 화풍을 따랐지만, 후일 나사렛파 운동에 참여하며 작품에 영성을 부여하려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 작품 <보아스 밭에 있는 룻>은 그가 나사렛운동에 심취했던 시기의 작품이다. 보아스가 그의 밭에서 룻을 만나는 장면을 사진을 찍은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의 모습과 배경은 사사시대의 베들레헴 사람들과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전체적인 배경이나 인물 묘사는 르네상스의 표현기법을 따르고 있으며, 인물의 묘사 또한 르네상스 전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룻의 이야기를 보다 영적으로, 보다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나사렛파 운동에 충실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캐롤스필드는 푸생의 작품 <사계-봄>과 대조적으로 주인공인 보아스와 룻을 부각시키고, 풍경은 주인공의 시공간을 나타내는 배경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멀리 산지가 보이고 보아스와 청년의 뒤쪽으로 베들레헴 마을을 그리고, 마을길에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작게 그려 넣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이 그림 속의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의 중앙 위쪽에 나무를 그려 넣어 수평구도의 단조로움에 리듬감을 주고 도래할 메시아 집안의 미래를 나타내고 있다. 그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거나 물을 마시는 사람을 작게 그렸는데, 푸생의 그림에서도 물을 마시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즉 생명수, 생명나무로 상징되는 오실 메시아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캐롤스필드의 작품에서는 푸생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보다 서사적인 상징성 보다는 보아스와 룻의 만남 그 자체의 덕목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보아스의 복장, 특히 모자와 토가(왼쪽 어깨에 걸쳐 입는 모직 천의 길고 넓은 겉옷으로 장방형의 케이프)는 로마시대의 귀족의 외출복을 연상케 한다. 보아스의 얼굴 또한 젊은 남성으로 그리고 있으며 온화하고 배려있는 성품이라기보다는 엄격한 젊은이로 보인다. 룻의 복장도 농부나 일꾼들의 복장과는 차이가 있어보 인다. 다만 보아스가 샌들을 신고 있는 것과 달리 농부들과 룻은 맨발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간의 신분의 차이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아스 옆에 있는 어리게 보이는 소년은 푸생의 작품에서 보이는 청년과 같은 모습으로 막대기를 들고 있는데, 성경에서 막대기 즉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리의 수장이나 인도자를 의미한다. 이 어려보이는 청년이 보아스의 손자 다윗 즉 메시아의 집안의 수장이 될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즉 야곱의 12아들 중 유다 지파의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조상이 될 보아스와 룻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3사람은 표정에는 성경에 나타난 어떤 관대함이나 훈훈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인가 엄격한 지시를 내리는 것 같은 신중한 표정을 하고 있다. 작가 캐롤스필드는 아마도 보아스가 감당할 엘리멜렉 집안의 기업 무를 자로서의 엄중한 역할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단순히 마음씨 좋은 부자가 불쌍한 친족을 만나 도움을 주려는 훈훈한 장면이 아니라 메시아의 선조가 될 운명의 순간을 엄숙하게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푸생과 마찬가지로 캐롤스필드도 주인공인 보아스와 룻이 함께하는 자리에 막대기를 든 청년을 그려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 청년을 단순히 보아스의 시종이라 여긴다면 그림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이다. 보아스와 룻이 만나서 이어지는 메시아의 계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의 엄중한 순간을 그린 것이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에 대한 표현방법은 다르지만 푸생과 캘롤스펠드 모두 다윗의 선조라는 데 초첨을 두고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밀레(Jean François Millet)<추수군의 휴식 - 룻과 보아스>

장프랑스와 밀레, Harvesters Resting-Roth and Boaz, Oil on canvas, 67.3 x 119.7cm, 1851~ 1853, 보스턴 미술관소장

이 작품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작품이다. 밀레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가이다. 밀레는 농부의 아들로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지방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은 초등학교 외에 다닌 학교가 없다. 그러나 그는 베르길리우스 등 고전과 당대의 문학을 즐겨 탐구했다고 한다. 그림은 1835년부터 그의 고향 그레빌에서 가까운 쉘부르에서 몇몇 화가들에게 개인지도를 받으며 시작했다. 셀부르시의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가서 ‘에콜 데 보자르’의 폴 들라로슈의 화실에 들어갔지만, 살롱 전에 여러 번 출품을 했지만 계속 낙선하다가 1840년 초상화 한 점이 당선되자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의 결혼과 9명의 자녀를 둔 밀레는 빈궁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비평가로부터 좋은 평가도 받지 못했다. 그는 늘 가난에 허덕이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즈음인 1830년대 일군의 화가들이 파리 근처 퐁텐블로 숲가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으로 이주하여 자연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를 ‘바르비종화파(Barbizon School'이라고 하는데 밀레도 이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화풍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밀레는 풍경보다는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인물 중심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밀레의 가장 큰 특징은 신화나 종교, 성경 속의 이야기를 상상해서 그리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평범한 인물들, 특히 일하고 있는 농부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농부들의 일상을 과장하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노동 행위를 표현함으로 삶의 무게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엄숙한 모습을 그려냈다. 이러한 이유로 밀레를 풍경화가 보다는 사실주의 화가에 포함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노동의 즐거움이나 그 의미를 담아내기 보다는 생존을 위한 힘겨운 일상에 순응하는 농부들이 순진무구함을 포착한다. 농장의 풍경을 전면에 배치하고 한두 명 혹은 소수의 인물을 단순화하여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순간의 정지된 동작으로 표현한다. 그 모습은 평화롭기 보다는 의식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고 엄숙하다. 그림 속 인물의 얼굴표현은 세부묘사를 하지 않고 이목구비의 구분만을 주로 하고 있지만 인물 전체에서 느껴지는 노동의 고단함과 엄중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밀레 그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작품 <추수군의 휴식-룻과 보아스> 또한 그러한 밀레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나 배경 지식이 없다면, 이 그림이 이스라엘 사사시대에 있었던 룻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그림의 배경이나 인물을 볼 때, 이 그림은 19세기 유럽의 어느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를 그린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레는 왜 이 작품에 “룻과 보아스”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그는 무엇을 표현하려 했으며 무엇을 상징하고 의미하려 했던 것일까?

그림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림의 왼쪽의 수줍고 주저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 룻은 밀 이삭 단을 앞자락에 싸안고 수줍은듯 고개를 숙이고 서있고, 그 오른쪽 옆에 있는 남자 보아스는 룻을 팔을 잡아당기며 농부들 있는 쪽으로 가라고 권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 넓은 부분에 농부들이 둥근 그릇을 중심으로 편안한 자세로 앉아 음식을 먹으며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의 표정이 자세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3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룻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의 뒤 배경에는 산처럼 높이 쌓아올린 밀 낟가리(노적가리)들과 노적가리에 기대 놓인 사다리들이 보인다. 멀리 있는 노적가리 앞에도 아직 일을 하고 있는 농부가 소를 부리고 있다. 그 소의 새끼로 여겨지는 송아지가 룻의 뒤를 따르고 있다.

밀레는 이 작품에서 푸생과 캐롤스필드가 나타내려 했던 룻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덕목과 역사적 상징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이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 만들어 낼 다윗과 그 후손 메시아에 대한 의미보다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노동의 가치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자비를 표현하는 의도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으로 단련된 농부들 몸의 근육, 룻을 바라보는 표정들, 일하고 있는 어미 소와 송아지, 하늘에 닿은 것처럼 높이 쌓아올린 밀 노적가리, 그리고 더 높이 쌓아야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다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지속되는 노동과 그 노동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이야기속에서 삶의 참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으로 보이는 보아스와 룻을 강조하여 앞쪽에 크게 배치하지도 않고 아름답게 표현하려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농부들의 위치보다 조금 뒤쪽에 배열하고, 룻과 보아스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다 더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밀레의 이 작품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룻과 보아스의 아름다운 이야기, 메시아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굳이 이 내용의 의미를 찾아본다며, 인간의 삶은 노동을 통해서 유지되며 그 노동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매일의 분요한 일상 속에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하지만 바람 한 줄기, 풀잎 하나, 돌멩이 하나에도 창조자의 섭리가 운행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이다. 보아스와 룻 또한 자기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중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성실한 일상 속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 배려, 관용, 그리고 선한 베품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밀레는 보여주고 싶어서 이 작품의 제목을 <추수군의 휴식 - 룻과 보아스>라고 붙였을 것이다.

 

◼ 룻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

▸엘리멜렉 가문의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서 많은 토지를 가지고 부유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기근이 들자 자기가 살던 곳을 버리고 풍요를 찾아 이방으로 떠나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더 편하고 더 잘 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려고 한다. 떠나간 곳에서 잘 되는 사람도 있고 일이 더 안되어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엘리멜렉의 집안은 풍요와 행복은커녕 그 집안의 모든 남자가 타지에서 죽는 비극을 맞는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나오미는 그 원인과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이라고 고백한다.

세상의 모든 일, 과거 현재 미래까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그 무엇도 피할 수 없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필연인지 우연인지 굳이 구분할 필요 없이 묵묵히 그 때와 그 일을 살아내는 것이 지혜임을 알려준다. 베들레헴이 모든 사람들이 겪었을 고난을 못 견뎌서 피했거나 더 편하고 풍요한 것을 찾아 떠났거나 그 결과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보아스와 베들레헴이 남아있었던 사람들은 풍년을 맞았지만 엘리멜렉은 돌아오지 못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것, 그것은 인간의 지혜, 아무리 깊은 사유를 통해서도 알아낼 수 없는 그 섭리는 그저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오미는 어떤 사람인가? 나오미의 인간적 계획이 효과가 있었을까?

전혀 없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상관없이 자신을 지혜롭고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판단,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되는 지름길임을 나오미가 잘 보여주고 있다.

나오미의 태도를 보면 베들레헴의 흉년이 들었을 때, 아마도 베들레험을 떠나자고 남편을 부추겼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남편이 죽자마자 베들레험으로 돌아왔을 것이고,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로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오미에게도 분명 선한 면도 있다. 과부가 된 어린 며느리들을 친정으로 돌려보내려는 것이 그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도 두 며느리를 먹여 살리는 것이 힘겨워 그랬을 수도 있다. 그녀가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친절을 이용하는 것은 그녀의 사람됨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분명 자기 남편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순위를 알고 있었을텐데, 룻에게 보아스에게 들어가라고 그 방법까지 일일이 지시하는 것은 나오미의 본성을 잘 보여준다. 보아스를 통하여 룻이 남편 가문의 기업을 물게 되었고, 룻이 보아스를 통해서 낳은 아들을 품에 안고 행복해 하지만, 그것은 나오미의 이러한 잔꾀가 통한 것이 아니라 보아스와 룻으로 인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섭리에 따른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늘 평안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고 그 섭리가 가장 선한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비록 때로는 고난과 불행이 있다 해도 말이다.

룻의 결정과 행동은 어떠했나?

룻은 자기의 생각만으로 자기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삶을 살았다. 거기에는 어떤 이기적인 계산도 기대도 없었다. 그러나 오르바는 룻과 달리 자기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결정하고 떠났다. 인간에게는 늘 룻과 오르바의 결정이 앞에 놓이게 된다. 룻의 결정이나 오르바의 결정 중 누구의 결정이 하나님의 섭리에 부합하는 것일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늘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결정의 기회를 두신다.

누구도 오르바의 결정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어머니가 허락하고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룻의 결정은 시어머니의 말을 거역한 것이다. 평안과 행복의 기회를 버리고 고난을 택한 것을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결정의 차이는 누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했는가에 달려있다. 오르바는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에게 유익하고 행복한 쪽을 택했고, 룻은 시어머니를 중심으로 시어머니의 평안을 염려하고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역할에 충실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즉 룻은 자기의 평안과 행복을 위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평안과 행복을 먼저 생각한 결정이었다. 오르바의 결정은 이기적이고, 룻의 결정은 이타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만물을 아마도 룻과 같은 결정에 따라 섭리하시는 것이고, 그것을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여기시는 것 같다. 오르바도 친정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지로 이기적인 판단을 하는 인간은 주목해 보시지 않는 것 같다. 즉 하나님과 무관하게 알아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인간에게 지혜와 능력을 이미 주셨기 때문이고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칭송을 받는 것은 자기 개인의 평안과 행복을 따르지 않고 이타적인 결정과 하나님의 섭리를 순수하게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룻은 시어머니와 달리 잔꾀를 내며 쉽게 살아가려들지 않고, 시어머니의 부당한 지시에도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기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기 1:16)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룻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평안과 행복을 찾아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하는지를 아는 지혜를 터득하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충실하게 살게 되고 그 결과로 주어지는 며느리의 역할과 여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충실하게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 삶은 하나님과 인간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만 좋은 것, 자기만 편안한 것을 추구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아무리 큰 권력과 부 그리고 명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세속적인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그들이 칭송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 같다.

물론 물질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마음이 허전해져서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필요한 누군가는 유명한 사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사랑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가늠해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룻과 같은 삶을 통해서 깨닫고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다.

▸보아스는 인격과 행위는 어떠했나?

사람은 그 행위로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게 된다. 보아스는 가난한 일꾼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그들을 이용해서 일을 하는 데만 관심을 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농부들에게 축복을 하고, 낯선 룻에게 관심을 가지고 호의를 베풀 만큼 자비로움과 친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오미의 계략으로 잠자리에 숨어든 룻을 대할 때에도 욕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룻을 먼저 염려하고 룻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는 어른다운 높은 도덕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당시의 유대인의 율법과 절차를 따르며 어떤 불법도 저지르지 않고 자기의 손해를 무릅쓰고 자신의 친족 엘리멜렉 가문의 기업을 이어나가도록 돕는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곧 그의 마음이며 그 마음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보아스는 자기의 부와 권위를 이용하여 룻을 자기 품에 들어온 젊은 여인으로 탐하지 않았으며, 자기가 룻과 자기 친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했을 뿐이다.

높건 낮건 간의 어떤 지위에 오르고 작건 크건 간의 힘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늘 알게 모르게 대접을 받으려 들고, 작은 것을 베풀며 자기를 과시하기를 즐긴다. 이런 천박함을 보아스에게서는 볼 수 없다. 룻이 그 빛을 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롭고 훌륭한 인격의 보아스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가지 더 주목해 볼 것이 있다. 룻기가 다윗의 조상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가 된 것은,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이방여인과의 혼인은 금지되었지만,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방 여인과 혼인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망하게 된 왕들이 많다. 그러나 룻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선택받은 민족에 국한 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민족이며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보시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지를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통해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 3명의 작가 소개

•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푸생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아려지지 않은 화가이지만 미술을 전공하거나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명한 초기 바로크 시대의 화가이다. 푸생의 작품세계는 인터넷포털 사이트 검색이나 미술사 서적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특별한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 율리우스 반 캐롤스펠드(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

율리우스 슈노르 반 캐롤스펠스드는 우리 모두에게 조금 낯선 화가이다. 이 작가에 대해서는 "라합"편에서 이미 소개했다.

(참고 : https://blog.naver.com/noransonamu/221970800720)

그의 나사렛파에 속한 다른 작품 2점을 소개한다.

• 장 프랑스와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

밀레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잘 알려진 화가이지만 밀레가 추구한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못한 화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비평은 인터넷포털 사이트 검색이나 미술사 서적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특별한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단 그가 정말 자연주의 화가가 맞는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도록 그의 몇몇 작품 5점의 이미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일하는 농부를 그린 밀레의 작품들

[출처] 룻(Ruth)|작성자 noransona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