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특집②] 방언받기 훈련을 하면 왜 안되는가?

by 갈렙 posted Jul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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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특집②] 방언받기 훈련을 하면 왜 안되는가?

2015.01.01. 20:26

 

복사 http://blog.naver.com/yoonh20/220226862110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08

 

어떻게 방언을 받는가?

-설교 잘하는 연습은 괜찮고 방언 받는 연습은 안 된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
정성욱의 잘못된 방언관, 성령관 비판 포함 -

▲ 방언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지만 본인이 사모하고 구하고 안수를 통해 받는 경우도 많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2-13).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

어떻게 방언을 받는가?

방언 받는 것은 넓은 의미의 성령 체험을 하는 것이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방언을 주 목적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 원칙은 대동소이하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앞에서 말한 대로 필자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방언은 받은 편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쉽게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기도한 후에 받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아는 어느 집사는 방언기도를 한 지 10여년 후에 받았다면서 좋아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언젠가 기도원에 참석할 때였다.
저녁 예배가 끝나고 각자 기도를 할 때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한 청년이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 성령세례 주옵소서, 성령 세례 주옵소서~”

그는 이 말만 계속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순복음 계통에서는 아직도 성령 체험을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행 1:5)로 표현한다.
그런데 얼마 후 갑자기 “랄랄라~”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성령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지만 대부분의 경우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비판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2-33).

이 구절에만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므로 당사자는 가만히 있어도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이 알아서 채워주신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무엇인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마 6:23). 그리고 나면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비록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아시더라도 구하는 자를 통해서 주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즉, 은사나 필요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지만 대부분의 경우 구하는 자를 통해서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은사를 주시겠지. 난 구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하나님이 은사를 주실 마음이 없으신가 보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
초기의 필자처럼 잘못된 영향,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기 이다. 그러나 제대로 알고 나면 구할 마음이 생기고 구하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주신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하-3상).

-말씀을 듣는 중에 주신다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찬양 중에 주신다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3).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 전에 늘 성전에 모여 기도하고 찬양했다.
찬양과 성령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찬양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상대적으로 쉽고 강하게 임한다.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왕하 3:15).


-안수를 통해 주신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행 8:18).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많은 경우, 간구와 안수가 병행될 때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한다. 필자도 집회할 때 뜨거운 찬양, 간절한 기도 후 안수를 하면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성령 체험도 하고 방언도 하고 음성도 듣는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여기 오면 쉽게 (방언이 터지고 음성이 들리는데) 되는 데 왜 혼자 하면 잘 안 되나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이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고 바울이 은사를 나누어 주듯, 어떤 사람이 안수하고 기도하면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더욱 강하게 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 기도의 분량, 영성 생활의 깊이의 정도에 따라 기름부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정이철은 안수하여 성령을 받는 임파테이션을 무당짓이라고 비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글로리아타임스/교육·자료/성경 Q &A/기름부음사역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하기 바란다.

-회개하는 자에게 주신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한 동안 방언을 대적하거나 방언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지다가 마음이 변하여 방언을 받고자 하면 방언을 잘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방언을 무시하고 대적한 죄를 회개하면 금방 쉽게 방언을 받는 경우가 많다.

방언 받기 연습을 하면 안 되는가?

아니다. 설교 잘하는 훈련을 하듯 방언 받기 훈련도 가능하다
‘은사는 성령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시는 것인데 왜 인위적으로 받으려고 노력하는가?’가 비판의 초점이다.

이는 요즈음 성령운동에 대한 비판 맥락을 같이 한다.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열심을 내어 무엇을 하면 마치 사람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반 펠라기아주의니 뭐니 하면서 비판한다. 이는 반 식자우환(半 識字憂患)이다.

반 펠라기우스주의는 사람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이 사람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것인가? 아니다. 성령충만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 대명령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위적으로 구원을 받는 반 펠라기우스주의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비판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므로 사람이 열심을 내면 ‘인위적이다, 펠라기우적이다’라면서 비판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지 말라”는 명령은 없어져야 한다. 비판자들처럼 주권적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므로 현상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
첫 사랑을 회복하라(계 2:1-7), 미지근하지 말고 열심을 내라(계 3:14-22)라고 책망하실 것이다.

은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그러면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아서 척척 나누어주시는가?

방언 같은 초자연적 은사를 부인하고 비판하는 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성경도 모르고 은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은사는 한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이지만 주로 사모하여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구원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진만 가만히 입만 벌리고 있으면 언젠가 하나님이 알아서 구원해주시는가? 아니다. 장로교 식으로 말하면 비록 그 사람이 예정되고 선택되었더라도 누군가의 전도에 의해 자신이 하나님 앞의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정성욱은 방언 훈련을 비판한다. 은사는 연습을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어떤 집회에서는 방언을 연습시키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방언의 은사가 성령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연습을 통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은사라는 말 자체가 연습이라는 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임에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 연습을 하는 해괴한 일들이 대낮에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이런 자들이 한국교회 내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지 이미 꽤 오래 됐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1)

성경은 분명히 은사는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전 14:1)고 기록한다. 그런데 정성욱은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을 편파적으로 보는 대표적인 오류이다. 실제로 성령운동파들이 반성령운동파보다 더 잘나서 초자연적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사모하고 구하니까 받는 비율이 높은 것이다.

또한, 방언하기 위해 훈련하면 왜 안 되는가?
필자도 이전에는 이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선물)라면 우리는 가만이 있어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완벽하게 주시는 것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이런 가정을 게 된 자체가 잘못된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때로는 주권적으로 모든 은사를 한꺼번에, 또한 때로는 완벽하게 주시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유명한 축구 선수 박주영의 예를 들어보자.
박주영은 분명히 누구보다도 뛰어난 축구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박주영이 하루 아침에 위대한 선수가 된 것은 아니다. 언젠가 그를 주제로 한 TV를 통해, 그는 주차해 놓은 수많은 자동차 사이로 축구공을 요리조리 차면서 등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
스포츠나 예술의 전문가는 재능을 갖고 태어나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연습(훈련)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비록 박주영이 뛰어난 축구 재능을 타고 났지만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그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줄 수 있는 코치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나 재능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설교가가 하루 아침에 탄생하는가? 뛰어난 예술가나 문장가가 하루 아침에 탄생되는가? 끊임없는 모방과 노력과 실패를 거쳐 탄생되지 않는가?

이름난 설교가인 곽선희 목사는 자기가 설교를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다. 그의 문장력, 그가 사용하는 예화는 보통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책을 보고 요약한 설교이다.

설교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그가 방언을 하기 위해 연습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는 말을 했다.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 훈련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방언 잘 하기 위해 연습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가.

오히려 성경을 보면 신령한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전 14:1)는 구절은 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고, 말씀 전하는데 전무하겠다는 말은 있지만 ‘설교 잘 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은 없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대부분이 즉흥적인 설교를 했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배우고, 설교 준비 하기 위해 주석을 보고 예화집을 보는가? 이렇게 설교하라는 성경 구절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곧 방언 받기를 훈련해도 되는 대답이다.
(필자는 설교 준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 받기 위해 훈련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의 잘못된 논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성령의 은사를 받았지만 신학적 이유, 남들의 눈치 등의 이유로 묻어두거나 잘 계발하지 않으면 사장(死藏)되어 있거나 잠자기 마련이다. 이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한 사람이 조금만 터치(touch)해주면 사장되었거나 잠자고 있던 은사가 계발되고 활성화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딤후 1:6).

“불일 듯하게 하다”는 말은 ‘부채질로 불씨를 키워서 활활 타오르게 하다’(fan into flame, NIV), ‘다시 불이 타오르게 하다’(kindle afresh, NASB)는 뜻이다. 디모데가 다소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점을 염두에 두고 이미 받은 은사를 다시 불일 듯일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 1:11).

여기서 말하는 은사(카리스마)는 선물, 은혜도 되지만 성령의 은사도 된다.

이처럼 설교 세미나를 통해 설교 잘 하는 법을 가르치듯, 방언 세미나를 통해 방언 받는 훈련을 시키는 것은 하등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잘못된 것이다.

-누가의 성령과 바울의 성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

정성욱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이 착각하는 것은 필자가 다른 곳에서 누차 말했듯이 주로 바울의 인격적인 성령과 누가의 사역적인 성령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적중지론에 젖어있다 보니 누가의 성령은 사도시대에 없어졌다고 잘못 전제하고 있으니 성령운동이 제대로 이해될 리가 없는 것이다.

“또 극단주의자들은 성령이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진리에 대해 무지하거나 이를 무시해 버린다. 성령은 인격자이시기에 지성, 감성, 의지, 관계성, 도덕성을 가진 분이시다. 무한히 깊고 넓은 지성을 가지신 성령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은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하고, 성령을 단순히 비인격적인 능력이나 힘이나 기(氣), 에너지나 영향력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신들의 뜻에 따라 이 비인격적인 능력과 힘과 에너지인 성령을 자기 멋대로 부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래서 자신들이 언제 어디서든 성령을 불러 내리면 성령이 자신들의 말에 순종하여 그곳에 임한다고 믿으며, 성령을 조종해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방자하게 행한다. 한 마디로 말해 성령을 자신의 종들 부리듯 부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문제는 이런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이 성령집회나 은사집회 또는 신유집회라는 이름으로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성도들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2)

성경은 성령에 대해 인격적인 성령(Holy Spirit as Person)과 사역적인 성령(Holy Spirit at Work)을 구분한다. 전자는 주로 바울의 성령인데 회심과 성화와 관련이 있고 후자는 주로 누가의 성령인데 사역이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성령운동파들이 바울의 성령을 간과한 잘못도 있지만 반성령운동파들은 누가의 성령을 무시한 죄를 철저하게 회개해야 할 것이다.

사실 반성령운동파들은 바울의 성령에 대해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성령의 열매를 제대로 맺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한국에서 바울의 성령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장로교가 대세를 이루는데 왜 이렇게 윤리도덕적인 말썽을 많이 부리는가? 말로는 인격적인 성령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말처럼 못 살기 때문이 아닌가?

왜 그런가?
필자는 그들이 누가가 말하는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성령을 체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령은 한 성령이시지만 인격과 사역의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시는데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강한 성령 체험이 없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일 보다는 전통과 학문에 매이고 ‘두렵고 놀라운 하나님 체험’이 결여되어 윤리도덕적인 삶도 잘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령운동에 대한 정성욱의 비판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는 줄 모르고 상대방만 비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고 상대방의 티만 보는 격이다.

정성욱은 전형적인 기적중지론자의 입장에서 필자가 말하는 바울의 성령은 강조하면서 누가의 성령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성욱의 주장대로 라면 사도행전의 사도들도 “언제든지 자신들의 뜻에 따라 이 비인격적인 능력과 힘과 에너지인 성령을 자기 멋대로 부렸다”는 말이 된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행 8:17-18).

필자가 이 구절을 오늘날 신자들의 모범이라고 주장하면 반대자들은 난리를 부린다.

“그것은 구속사의 독특한 과정에서 사도들만이 행한 독특하게 행한 계시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모범이 될 수 없다.”

“네가 사도냐? 사도와 사도의 안수를 직접 받은 자만이 안수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런 거짓말을 거창한 신학인 것처럼 포장하여 초자연적 은사를 구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오히려 이렇게 하는 사람을 성령중개상, 성령을 부리는 자라고 비판한다.

잘 난 체 하는 신학자들이여,
엉터리 신학에 안주하지 말고 성경 있는 그대로 해 봐라. 생각보다 쉽게 된다.

학문과 신학이 일부 신학자들의 전유물이던 옛날에는 신학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영적인 체험한 사람들을 얕잡아보고 업신여겼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이 아직도 많은 한국인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 같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누가 한 마디 하면 마치 그것이 성경의 진리인 양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요즈음에는 평신도도 조직신학이나 전문신학 서적을 보고 원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도 공부하는 정보 공유의 시대가 되었다. 이런 책들을 몇 권만 보면 신학의 줄기가 보인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은 절대다수가 기적중지론 신학이다. 이제는 이런 신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잘 난 체하다가는 큰 코 다치는 세상이 되었다. 어지간한 평신도도 이런 신학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교리 신학, 명제 신학이 아니라 경험 신학, 영성 신학을 해야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이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주변에서 반대하면 약방감초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이봐, 해봤어?"

필자도 반대자들에게 묻고 싶다.

“이봐, 해봤어?’

해봐라. 생각보다 쉽게 된다. 필자는 기도와 안수기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방언, 방언 통역의 은사, 예언 및 다른 은사나 능력을 받게 한 경험이 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언젠가 세미나를 할 때이다.
목사 한 분이 친구 목사를 데리고 참석했다.
강의가 끝나고 기도 시간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교단은 이런 은사를 인정하지 않고 나도 은사에 대해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기도는 받겠느냐?”

받겠다고 해서 간절히 기도를 해주었다. 그리고 잊었다.
나중에 신기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 목사는 음성듣기와 방언 은사를 한꺼번에 받았다고 너무나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못 받는 자들이 알지도 제대로 못하면서 '신포도 신드롬'처럼 비판하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기타 방언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이유들

-위험하고 말썽 부리면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잘못된 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초능력적 은사는 위험하다’, ‘은사 보다는 말씀 중심으로 신앙 생활 해야 한다’는 잘못된 지도를 받아서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은사를 소멸하거나 사장시켜 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은사에 찬물을 끼얹는 성령 소멸자들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소멸하다’는 말은 ‘타오르는 불에 물을 끼얹는다’는 뜻이다.

위험하다고 해서 선교를 중지해야 하는가?
위험하다고 해서 자동차를 타지 말아야 하는가? 위험하지만 유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제약을 가하고 통제를 하지 않는가?

은사도 마찬가지다. 위험하지만 영적 유익이 너무 많다. 이 때문에 고전 13장은 사랑으로 은사를 구하고 사랑의 동기로 사용하라고 권면하고, 고전 14장은 구체적인 사용 방법까지 자세히 제시한다.

-고린도교회는 가장 말썽 많은 교회였다?

그러므로 은사는 말썽을 일으키므로 지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말썽 부리는 교인, 말썽 부리는 당회, 말썽 부리는 목사는 모두 제명시키고 단죄해야 하는가?

마찬가지다. 인간 세상에서 유익하면서 말썽 부리지 않는 것은 드물다. 그런데 왜 은사만 갖고 그처럼 가혹하게 대하는가? 이런 사람들은 유익 보다는 폐해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다. 본질은 모르고 주변적인 것만으로 본질을 부인하는 자들,『교회가기 싫은 이유 77가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은사 보다는 말씀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이 왜 은사를 구하고 사용하라고 하는가?
기도, 전도, 봉사가 말씀의 적용인 것처럼 은사도 말씀의 적용이다.
만일 은사 보다는 말씀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려면, 마찬가지로 ‘기도 보다는 말씀이 중요하다,’ ‘봉사 보다는 말씀이 중요하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은 하지 않는가.

성경은 우리가 은사의 소멸자가 아니라 부채질 하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한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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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1) 정성욱, “’열심히 연습하면 방언을 받을 수 있다는 사람들,’ [시론] 한국교회 위기의 탈출구 : 다른 복음을 몰아내라(4):신비주의,” 『크리스천 투데이』(2014.06.02)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section_code=oc&id=272358&from=mobile

2) 정성욱, 같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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