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야드운동 무엇이 문제인가?_오덕교교수

by 갈렙 posted Jul 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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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야드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오덕교 교수교리/ 말씀과 함께

2013.10.3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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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야드운동」무엇이 문제인가 /오덕교 교수

조나단 에드워드 입장에서 본 '빈야드 운동'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 교회를 강타한 대표적인 신학적인 흐름을 든다면 '제 3의 물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제 3의 물결운동'은 1977년 존 윔버(John Wimber)에 의해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어 캐나다, 영국, 중남미 전역에 널리 퍼져 가고 있다. 특히 캐나다의 토론토의 에어포트교회는 소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어, [토론토 라이프](Toronto Life)가 지적하는 것처럼, 1994년 토론토의 최고 관광 명소가 되었다. 토론토 에어포트교회는 1994년 초반 랜디 클락(Randy Clark)과 200여명의 교인으로 시작하였는데, 1995년 1월 20일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와 4,000여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는 소위 거룩한 웃음, 진동, 동물적인 괴성, 넘어짐 등의 체험과 치유 사역을 강조하고, 히브리서 13:8과 요한복음 14:12에 근거하여 성령 역사의 현재성과 구원의 표징으로 표적과 기사를 주장하며, 이를 통한 지상 왕국의 건설(마 16:19)을 꿈꾸고 있다.


1. 빈야드 운동과 한국 교회

'제 3의 물결운동'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91년 존 윔버(John Wimber)의 [능력치유]가 이재범목사에 의하여, [능력 표적]이 도서 출판 나단에 의해 번역되면서 부터이다. 이러한 은사운동의 보급은 치유 목회에 대한 관심을 일으켜 한국교회의 관심을 끌었다. [목회와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인 조류를 인식하고 '제 3의 물결 운동'을 1993년 4월호에 특집으로 다루어 한국 교회에 알렸다. 그러나 기고자의 대부분이 은사주의 운동에 대한 진단이나 평가없이 소개하여, '제 3의 물결'은 한국 교회에 토착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지난 해 [목회와 신학] 6월호는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권두 좌담을 열면서 존 윔버의 '제 3의 물결 신학'을 거르지 않고 소개하였고, "능력 목회의 파도가 몰려온다"는 특집을 통해 빈야드의 은사 운동을 널리 알렸다.

(1) 빈야드 운동에 대한 신학자들의 진단

[목회와 신학] 6월호에서 한국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빈야드 운동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였다.
이재범 박사는 빈야드 운동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하면서 빈야드 운동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당면한 침체의 늪에서 나올 수 있는 "출애굽"운동이라고 극찬하였고(64),
한신대학교의 예영수교수는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토론토 축복'은 어거스틴(Augustine)과 성 프란시스(St. Francis), 존 웨슬레(John Wesley), 캐더린 쿨만(Catherine Kuhlman), 멜 태리(Mel Tari)와 같은 인물들이 체험한 바 있는 교회사적인 사건이므로(71) 이를 성급하게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74).
숭실대학교의 김영한 교수는 미국 장로교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와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 패커(J. I. Packer)의 사상을 비판하면서 은사 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75).
한국에서 보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고백한다고 하는 총신대학교의 이한수 교수도 특별은사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비판하면서(92), 빈야드운동이 "나름대로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하였다(97).
그러나 장신대학교의 현요한 교수는 은사주의자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치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기복신앙에 불과하며 복음의 본질과도 무관하다고 하였다. 복음은 영광의 신학이라기 보다는 고난의 신학이기 때문이다(104)

(2) 빈야드 운동의 확산

이와 같은 한국 신학자들의 무비판적인 평가 또는 찬양 가운데 수천명의 목회자들이 빈야드 운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로스앤젤레스의 빈야드 교회나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많은 영향을 한국 교회에 끼치고 있다. 어떤 교회는 기존의 예배 방식을 빈야드식으로 바꾸어 순서없이 진행하는가 하면 다른 교회는 예배를 치유 집회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유행에 보조를 맞추어 일부 여행사에서는 빈야드 집회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목회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내는 등 빈야드 열풍이 한국 교회 전역에 확산되어 가고 있다.

(3) 빈야드주의자들의 개혁주의 신학 비판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빈야드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을 중시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그들의 공격 목표로 삼고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 그들의 신학 운동이 건전한 개혁주의에 기초한 것처럼 위장하고, 다른 면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공격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다. 빈야드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요 심리학자인 존 화이트(John White)는 빈야드 운동이 복음주의적인 신학에 근거한 것을 입증하기 위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 Jones), 존 웨슬레(John Wesley)와 같은 신학자를 들먹였고, 다양한 신조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그 포괄적인 성격 때문에 윔버에게 가장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조라고 하였다.
그러나 빈야드주의자들은 19세기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를 중심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적인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매도하면서 성경 중심적인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공격으로 한국에서는 신학에 문외한인 평신도는 물론 신학자들까지 현혹되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가 일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혼동을 초래하고 있는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의 신학적인 배경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들의 주장과 그들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는 현상들이 성경적 기초를 갖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한국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 1740년대 초반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미국 교회가 극단적인 신비주의 운동으로 혼란 가운데 있을 때 은사 운동에 대한 건전한 진단과 평가를 내림으로 미국 교회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는 - 에드워즈의 입장에서 검토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존 윔버와 빈야드 운동의 신학적 기초

윔버의 신학은 사도행전의 은사들이 역사 속에서 연속된다는 신학적 전제에 기초한다.
그는 사도행전적인 은사의 연속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표적과 기사는 결코 종식될 수 없는 것으로써,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도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성경과 교회사가 공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능력전도 167). 이러한 은사의 목적은 치유이며, 치유를 통하여 모든 질병과 연약함만이 아니라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능력 치유 278). 윔버는 말씀만으로는 믿지 않는 자들도 치유이적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에 돌아올 수 있으므로, 치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하였다. 윔버는 이와 같은 전제에 기초하여 영적인 체험을 강조하는데, 그 체험 가운데는 몸의 진동과 떨림, 고꾸라지는 현상, 몸부림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 울거나 웃는 현상, 장시간에 걸쳐 찬송하는 행위, 예언과 방언, 계시, 투시 현상이 있다.

(1) 퀘이커의 신령주의적 신학적 배경

윔버의 신학은 첫째로 퀘이커 교회의 신령주의적 신학에 기초한다. 윔버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퀘이커교도를 통해서였고, 목사 안수를 받은 단체도 바로 퀘이커 교회인 프렌즈 교단(Friends)이었다. 퀘이커 교회는 영국의 죠지 폭스(George Fox, 1624-91)에 의해 세워졌는데, 폭스는 신령주의자(Spiritualist)로 기성 교회들이 객관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다가 내적인 빛의 사역을 제한하여 신약의 가르침에서 떠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은 내적인 빛의 사역을 강조하는 참된 교회를 세우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요한복음 1:9-18에서 말하는 '내적인 빛'(the Inner Light)만이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형식이나 제도를 무시하였다. 또한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객관적인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내적인 빛'이라고 하였다. 폭스의 이러한 주관주의적인 신학은 농민전쟁을 부추긴 바 있는 토마스 뮌쳐(Thomas Muntzer), 내적인 종교를 주장한 한스 뎅크(Hans Denk), 직접 계시를 주장한 발타자르 후브마이어(Baltarsar Hubmaier)와 같은 16세기의 신령주의적인 재침례파교도의 사상과 맥을 같이하는데, 그들은 성경 계시의 객관성을 부인하고 환상이나 직관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주관적인 체험을 신앙의 기초로 삼았다.
윔버는 이러한 신령주의적 퀘이커 사상에 기초하여 그의 신학을 전개했다. 물론 그는 퀘이커처럼 '내적인 빛'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분별의 은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분별의 은사들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 분별의 은사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부여해 주는 은사들"로서, 그것들을 통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사물들을 파악하시듯이 사물을 파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상황에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계시해 주시는 것"으로, 특히 상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다고 하였다.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상황에 관하여 정보나 사실을 계시해 주시는 것"이며, 영 분별의 은사란 "어떤 사람에게 있어 특정한 동기를 유발하는 요인이 인간적인 것인가, 신적인 것인가, 혹은 마귀적인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말한다"(능력 치유 321-322)고 했다. 이와 같이 윔버는 주관적인 직관을 신학의 원리로 삼았는데, 이러한 '내적인 빛'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영감, 꿈, 환상, 성경 귀절이 있다고 하였다(능력치유 323).
윔버에게 퀘이커의 '내적인 빛' 개념은 그의 신학과 목회의 원리가 되고 있다. 그는 설교하거나 전도할 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적인 빛'의 지도를 받는다고 하였다(능력전도 88). 그는 이러한 직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은 육체적인 감각 기관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영적으로 감지하는 것, 또는 하나의 인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그때에 들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능력 치유 106).
윔버는 또한 [능력 전도]에서 그의 체험을 이렇게 말했다. "시카고 집회를 마치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업가로 보이는 중년 신사가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에게서 아무런 특별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나의 눈길이 그에게로 향하는 순간 나는 소스라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 위에 매우 분명하게 '간통'이라는 글씨가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글씨는 여전히 그의 얼굴 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간통' - 나는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이 글씨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비행기 안이 그 누구도 나처럼 이 글씨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는 성령께서 나에게만 보여주신 것이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이 이 사건의 현실성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능력전도 65-66). 여기서 윔버는 내적인 빛 - 그의 말로 표현하면 분별의 은사 - 을 주장하는데, 그 은사의 성격을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내게 보여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투시의 은사로 당뇨병에 달린 사람을 고치고(능력전도 102), 관절염에 걸린 여인을 치유하게될 영상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등 많은 직관의 예를 나열하였다(능력전도 104). 이처럼 윔버에게 내적인 인상이나 투시는 최고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퀘이커의 직관이나 윔버의 투시 현상은 기독교인의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한 현상들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할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적그리스도도 하늘에서 불이 땅에 떨어지게 하고, 귀신들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다고 말한다(계 13:13). 그러므로 직관과 투시는 사탄의 전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명저 [신앙과 정서]에서 말하기를, "마귀는 자신의 본 얼굴을 숨긴다. 그리고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나서 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를 경배하도록 만든다. 사단은 인간의 상상력이나 공상을 통해서 그런 모든 기만을 형성한다. 그래서 거짓된 종교와 가짜 은혜와 가짜 정서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야말로 이 방법은 마귀가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것이다. 마귀는 어리석고 기만당하는 심령에 보금자리를 튼다"고 하였다.
많은 거짓 종교는 이러한 직관과 상상력에 기초한다. 이교도 가운데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는 이상한 환각과 환희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신으로부터 온 영감이며, 하늘로부터 온 직접적인 계시라고 여겼다. 사도시대 이후 나타난 이단인 에세네파(Essenes)도 환상과 직관을 주장하였고, 고대 영지주의자(Gnostics)나 몬타누스파(Montanist)도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눈다는 상상에 빠지곤 하였다(신앙과 정서 298).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마귀들도 예수를 시험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그러한 인상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신비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성경 말씀을 떠올리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신앙과 정서 205).
성령의 보증은 "성령의 인침과 같은 것"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어떤 즉각적인 암시나 어떤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신앙과 정서 223). 설령 성령께서 이런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 주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반적인 성령의 작용이지, 성령의 특별하고 은혜로운 감동은 아니다"(신앙과 정서 201). 곧 그러한 이적은 구원 사역과 관련이 없는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에게 "사람의 기질과 체질을 관찰"한 후 "그의 공상에 암시를 집어넣고 불화살을 당기는"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신앙과 정서 302).

(2) 체험중심적 신학 사상

둘째로 윔버의 신학은 인간의 체험에 기초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을 통하여 성령과 그의 사역인 이적과 기사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윔버는 성경(text)을 그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상황(context)을 그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윔버의 다음의 증언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나는 성경연구 - 특히 복음주의적인 방식의 - 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갖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욱 중요한 것 - 표적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일 - 있음을 깨닫고 나서는, 성경연구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으면서도 이것만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갖추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둘째, 나는 믿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과, 이 가운데 기적에 대한 믿음을 내가 얼마나 경시해 왔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복음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 과정에는 교리적인 믿음과 인격적인 신실성이 작용하는 것으로 배워 왔다. 교리적인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사역에 관한 지식을 바르게 배워 나아감으로써 성장하는 것이며, 인격적인 신실성은 우리의 삶을 통해 각종 성령의 열매(갈 5:22-23)로 거두게 되는 성숙한 인격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이상의 두 가지 차원의 믿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능력 전도 79).
여기서 윔버는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고백해 온 성경의 유일 사상(Sola Scriptura)을 거부하고, 그의 치유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치유 신학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근거하여 만들어졌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근거로 삼지 않고 개인의 체험이나 이성이 판단의 기준이 될 때 항상 거짓된 사상이 출현했다는 교회사의 증언에 비추어 볼 때 윔버의 이러한 주관주의적인 신학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윔버의 거짓 증언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능력 전도]에서 자신이 4대째 불신자의 가정에서 자라났으며(능력전도 15), 기독교를 알게 된 때는 가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1962년이라고 하였다. 곧 그가 기독교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된 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단으로 간주하는 퀘이커를 통해서 였다고 증거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자신이 "복음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고 소개하여 독자를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윔버의 빈야드 신학이 거짓으로 가득 찬 '인간이 만든 종교'(man made religion)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윔버는 이러한 퀘이커의 직관 신학에 기초하여 치유 신학을 세워 나갔다.
그는 질병과 가난이 사단이 주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치유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그는 [능력 치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질병을 사람들의 적으로 이해하셨다. 그것은 악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으며, 사단의 왕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장 깊고도 무서운 병이 죄이며, 육체적 질병이나 가난과 같은 결과들은 죄를 그 원인으로 하고 있다"(능력치유 48). 또한 [능력 전도]에서 말하기를, "예수께서는 설교보다는 치유 사역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그 사역의 대부분을 할애하셨다"고 하였다(능력전도 85). 이처럼 윔버는 병과 가난을 죗값으로 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단지 치유로 제한하여 극단적으로 성경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병과 가난의 원인이 죄라고 단정하지 않으며, 치유(healing)보다 설교(preaching)와 교육(teaching)을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사역으로 간주하고 있다(마 4:23). 더구나 성경 기자들은 예수께서 병고침으로 사역을 시작한 후 마쳤다고 하지 않고 설교함으로 하였다고 증언하였다(마 4:17; 행 1:3-8).

(3) 치유 신학의 혼합주의적 배경

성경을 보는 시각이 편협하다고 해서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사상을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이단 운동의 초보가 된다. 더구나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신학을 전개한다면 그러한 신학은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윔버의 신학이다. 그는 그의 치유 신학의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치유, 특히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나 있는 치유의 역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치유 사역에 관하여 매우 지적인 주장을 펴 나아간 맥너트(Francis MacNutt)를 포함하여 치유에 관한 그리스도교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내가 그렇게 했던 것은 병든 자를 위해서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방법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교인들 모두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무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능력 치유 102). 곧 그는 성경대로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오랄 로버츠의 오순절 모델, 성공회와 로마천주교회의 성례전적 모델, 치유를 강조하는 신오순절 모델, 마귀 축출 모델, 심리적 내적 치유를 강조하는 심리적 영적 모델과 같은 각각 상이한 견해를 지닌 여러 학파의 치유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신학과 그 실천 방안을 연구하였고, 이러한 모델들로부터 배운 바를 빈야드 그리스도인 교회에 적용하였다고 기술하였다(능력치유 284).
그러므로 우리는 윔버의 치유 신학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며, 성경을 교재(text)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참고서(reference)로 사용하여 발전시킨 인위적 사상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윔버는 이러한 인위적 배경에서 그의 신학을 세워가기 위해 루터와 칼빈과 같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보다는 로마 천주교회의 이적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다. 로마 천주교의 기적 신앙은 3세기에 "이미 이교 세계에서 유행하던 전설들이 그 주제와 심지어 내용까지 그대로 기독교의 형식으로 재현"되면서 나타난 것이다(기독교 기적론 131). 이러한 이적 신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씨시의 프란시스나 시에나의 캐더린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성흔(聖痕), 성물이나 성자의 화상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하는 기적, 마리아 상에서 흘러나오는 눈물 등이 있다.
로마 천주교도들은 이와 같은 성물이나 성상을 숭배하며 그것들을 통한 기적을 기대하며 성자나 성상을 순례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미신으로부터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로마 천주교회의 이적 신앙을 배척하여 왔다. 그러나 빈야드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모든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인정하면서 로마 천주교회가 주장하는 이적 신앙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상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개혁주의 교회의 은사 이해

윔버는 이 같은 신학에 근거하여 그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개혁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윔버는 초자연적인 치유와 기적이 사도시대, 곧 성경의 정경화와 함께 종료되었다고 믿는 개혁주의신학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성경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역사 속의 그리스도인 보다는 현대의 합리주의자나 물질주의자의 입장에 가까운 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능력 치유 43).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개혁주의자들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한 자세는 종교개혁 이후 "하나님 대신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로 왕좌를 차지한" "계몽주의적인 사고의 입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적과 기사의 역사를 부인하는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은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반은사주의적 신학의 대표자로 윔버는 벤자민 워필드를 지목하였다.(능력전도 10).

(1) 계시의 종료 사상

그러나 워필드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은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주의를 반대하였다.
신비나 이적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와 이적주의를 배척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개혁주의 신학자 벌코프(Louis Berkhof)는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기적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섭리를 일반 섭리(providentia ordinaria)와 특별 섭리(providentia extraordinaria)로 나누면서, 전자는 자연법칙에 따라 제 2 원인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역하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제 2 원인의 중재 없이도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역사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기적은 특별섭리에 속하는 것으로, 개혁주의 신학 체계 속에서 이적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기적이 존재하는 목적은 빈야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능력 전도나 능력 치유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였다.
개혁주의 교회는 빈야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적이나 은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은사주의를 배척한다.
그리고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지만,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은 은사나 이적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모든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한다면 불교도들이나 마호멧교도들이 이적을 통하여 어떤 은혜를 체험하였다는 주장도 하나님의 역사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혁주의자들은 허구에 찬 이적 신앙을 부인한다. 로마 천주교인들은 초대 교회 당시 예수 때문에 혀를 잘리운 아프리카 교회의 신자들이 말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믿지만, 우리는 이를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 요한 웨슬레가 지적한 것처럼 "누구든지 이런 허구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주전자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기독교 기적론 221).
워필드는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사상에 근거하여 사도들이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은사가 이미 중단되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은사들이 주어진 목적이 "교회 확장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 사자들로서 사도들의 권위를 확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사들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라고 권위를 부여하여 임명하신 대리인으로서의 사도들이 지닌 신임장"으로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기독교 기적론 12). 그는 부언하여 말하기를, "성경에서 기적은 합당한 이유없이 여기저기 무분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기적들은 계시 시기에 속하며(나타나며),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사자들을 통해서 자기의 은혜의 목적을 선포하시며, 그 분의 백성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만 나타난다. . . .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계시 능력의 표적인 기적은 그 본체인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계속되라고 기대할 수 없으며, 실질상 계속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기독교 기적론 34, 35). 여기서 우리는 워필드가 은사주의를 부인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곧 그는 현대에도 계시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직접 계시파의 위험성과 이적을 교회의 표지로 보는 로마 천주교회의 은사관을 배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워필드의 사상은 빈야드주의자들이 자주 그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인용하곤 하는 에드워즈의 사상이기도 하였다. 에드워즈는 고린도전서 13장 해석인 [사랑의 열매]에서 방언과 이적과 예언의 은사가 이미 종료되었음을 주장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 중에는 부여되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에만 주어진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 부여된 은사를 특이한 은사(extraordinary gift)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 은사들이 원시시대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 시대에 주어졌던 것이다. 특히 그 시대에 주어진 그러한 특이한 은사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건설키 위해 주어졌다. 그러나 정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완전히 성립되었을 때 그 특이한 은사는 멈추어졌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사상은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이기도 하다.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세운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은 말하기를, "병을 고치는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주께서 한 동안 나타내시기 원하셨지만, 그 치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선포를 영원히 놀라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 때에 사도들의 손으로 나누어주신 권능을 위해서는 도유가 하나의 성사였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행하라는 어떤 위임도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개혁자 루터도 "사도들은 말씀을 선포했으며, 자기들의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그들이 기록으로 남긴 것 이상의 어떤 것도 계시될 필요가 없으며, 새롭고 특별한 어떤 이적이나 계시도 필요 없다"고 하였다.

(2) 특별은사의 제한성

개혁주의자들이 은사주의를 배척하는 것은 은사가 신앙의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은사를 일반은사(ordinary gift)와 특별은사(extraordinary gift)로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든지 예언하는 영을 주실 때나 직접적인 영감을 주셔서 이적적인 일을 행하게 하고, 병을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일은 큰 특권"이지만, 구원이라는 은혜보다는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사랑의 열매 35). 그는 이적을 행하는 은사를 옷과 보석으로 비유하면서, 옷을 입은 사람이 그 옷 때문에 성품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며, 보석이 몸을 우아하게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거룩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 하였다(사랑의 열매 39).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예언을 말하고 이적을 행하는 이상한 은사만을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는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동참자가 되지 못한다. 곧 그 자신의 성품 안에 신령한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면 특이한 은사만으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사랑의 열매 40).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병을 고치거나 예언을 하는 등의 특별은사가 불신자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가졌다고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이적을 체험한다거나 이적을 행하는 은사를 소유함이 구원의 표시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만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통하여 주어지는 성령의 일반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러나 이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는 그렇지 않다. 물론 하나님이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주시기 위해 성도들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경건치 못한 자에게도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를 주신다. 발람(벧후 2:15; 유 11; 계 2:14)과 사울과 유다(마 10:1-2, 8)의 예가 그렇다(신앙과 정서 216). "이런 점을 종합하여 볼 때 마음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보다도 더욱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랑의 열매 42). 이러한 교훈에 비추어 볼 때, 마태복음 7:22-23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빈야드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요건으로 강조하는 특이한 은사를 가지고도 마지막 때에 지옥에 갈 자들이 많은 것이다. 성도라 불리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신앙과 정서 171).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귀신들이 자기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고 좋아할 때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였다(눅 10:20).


4. 빈야드의 영적 현상에 대한 개혁주의적 평가

빈야드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성령의 일반 은사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특이한 현상, 또는 육체적인 신앙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능력 치유 351). 성령의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육체적인 체험 현상은 다음과 같다.

(1) 빈야드의 소위 '영적 체험 현상'

첫째는 몸의 진동과 떨림이다.
몸의 떨림에는 신체의 일부나 전체에 나타날 수 있고, 땀을 흘리거나 숨을 깊이 쉬거나 또는 맥박이 빨라지는 현상이 수반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떨림에는 평온한 진동과 격렬한 진동이 있는데, 전자는 "영적인 갱신이나 목회 사역을 위해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시는 일과 관련"이 있고, 후자는 "성령께서 악령과 대치하는 경우, 또는 어떠한 심각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죄나 마음의 상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능력치유 355).
둘째는 고꾸라지는 현상이 있다.
이 현상은 성직자들에게 나타나기도 하고, 규칙적으로 머리를 땅에 짓찧기도 하는 데 이를 체험하면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 윔버는 주장한다(능력치유 356).
셋째로 술 취한 듯한 행동이 있다.
이 현상은 "하나님의 은총을 새로이 깨닫거나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를 체험하고 난 후" 걸음걸이가 비틀거리고, 말조차 더듬거리게 된다고 한다(능력치유 359).
넷째로 몸부림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으로 "이런 현상에는 뛰어 오르내리거나 손발을 움츠리면서 개발처럼 만들거나 얼굴을 찌푸리거나 몸이 경직되는 등의 여러 형태"가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주로 성적인 범죄로 인한 내적인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에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다섯째로 웃거나 흐느껴 우는 현상이 있다.
갑자기 낄낄대거나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여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동안이나 계속되는 데, 이러한 경우는 정서적인 치유가 필요하거나, "새롭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한 데서 오는 반응(흐느낌), 또는 그 분의 은총을 체험한 데서 오는 반응(웃음) 일 수도 있다"고 한다(능력치유 362).
마지막으로 장시간에 걸쳐 열렬하게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행위가 있다.
윔버는 이러한 경우 "방언의 은사를 받는 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령의 능력을 새로이 부여받았다는 징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하였다(능력치유 363).

(2) 빈야드의 영적 체험 비판

그러나 우리는 윔버가 주장하는 현상들이 성경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
론 윔버는 그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지만, 그의 성경 인용은 대부분의 경우 적절하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윔버는 넘어지는 현상이 은혜 체험의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에스겔서 1:28을 인용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엎드린 것은 성령이 임해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고 스스로 엎드린 것이다.
또한 고꾸라지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들(요 18:6), 무덤을 지키던 파숫군(마 28:4), 귀신이 고꾸라진 것(막 9:20)을 제시하였지만(능력치유 359), 이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이었으므로 성령의 증거와 무관한 것이다. 또한 윔버는 소위 거룩한 웃음을 예증하기 위하여 사라의 웃음(창 21:6)을 열거하였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사라의 웃음과 빈야드의 웃음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빈야드주의자들의 '거룩한 웃음'은 소리내어 깔깔대며 웃지만, 사라는 "속으로" 웃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지 못하는 가운데 약간은 조롱하는 투의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윔버의 성구 인용은 문법적으로 볼 때 많은 과오가 있다. 그러므로 윔버의 주장은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하겠다.
둘째로 윔버의 영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지적할 수 있다. 곧 진동의 경우 평온한 진동
은 목회의 소명과 관련된 것이며 격렬한 진동은 악령과 대치하는 경우라고 하였고, 고꾸라져 머리를 땅에 찧는 현상을 체험하면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인 배경도 없는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에 근거한 것들이다.
셋째로 은사를 가진 인간을 신격화하고 있는 점이다.
윔버 부인은 윔버의 사역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78년 4월 경 "존은 방을 돌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했는데 믿을 수 없는 능력이 그의 손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가 사람들을 건드리면 그들은 바닥에 뒹굴었다. 마치 전류처럼 영적인 능력이 존의 손으로부터 나왔다"(제 3의 물결을 타고 56). 여기서 윔버 부인은 윔버를 은혜의 통로로 간주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빈야드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상 성경의 가르침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성경은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반해, 제 3의 물결을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의 손 끝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처럼 말하면서도 인간을 이적의 근거로 설명하였다. 모든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즉각적인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기 위해 손으로 밀기도 하고, 넘어지지 않으면 30분이고 1시간이고 계속 기도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인위적인 작용은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감화와 작용과는 무관한 것이다.

(3) 영적인 체험에 대한 개혁주의적 진단

윔버의 신비주의적 은사 운동은 18세기 중반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이후 조나단 에드워즈가 체험한 미국 교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에드워즈는 그 때의 미국 교회의 혼란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대각성운동 이후, "사람들이 그저 크게 감동하고 깨우침을 받아 종교적인 대화로 꽃을 피우고, 뜨거움과 열심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매우 충만해 있거나 온전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나타내기만 하면, 더 점검해 보지도 않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크게 체험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내려 버리는 투의 자세가 아주 편만하였다.
3, 4년전만 해도 그러한 극단이 아주 우세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구분없이 모든 종교적인 정서들을 높이 평가하거나 찬탄하는 대신에 구분없이 모든 정서들을 거부하고 무시해 버리는 분위기가 더 더욱 크게 우세하다"(사랑의 열매 61). 곧 신앙적인 판단 기준이 흐려지면서 은사주의자들이 나타났고, 은사주의자에 반대하여 합리주의자가 등장하여 교회가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은사주의 운동을 교회 몰락의 징조로 간주하였고, 이러한 은사주의로 인한 신앙적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1744년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라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신앙과 정서]에서 정서를 "혼의 성향과 의지가 보다 활발하게 그리고 예민하게 움직이는 행위"(신앙과 정서 25)라고 정의한 후, 참된 신앙적인 정서(religious affection)는 격정이 나 흥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감동과 감화를 통해 오기 때문에(64), 육신에 나타나는 반응이 참된 정서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75). 또한 찬양하고 복음을 촉구함이 신앙적인 것들이나 그런 행위가 바로 정서의 본질이 아니며(124), 유창하게 기도하거나(272), 몸의 뜨겁게 달아오르거나(279-300), 이적(329, 348), 시끄러움(427)이 참된 은혜의 표시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에드워즈는 몸의 떨림 현상을 영적인 체험으로 보지 않았다. 몸의 떨림 현상은 인간의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은 어떤 경우든지 어느 정도 몸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몸에 나타나는 현상을 가지고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본성과 몸과 영혼이 연합의 법칙이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몸에 어떤 영향이 미치게 된다. 몸은 마음에 복종하고, 마음의 움직임과 마음 씀에 따라 몸의 체액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75).
그리고 에드워즈는 고꾸라지는 현상, 술 취한 듯한 현상, 몸부림을 치는 행위, 웃거나 슬퍼하는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비록 이것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유의 은혜로운 정서에는 가짜가 끼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형제를 향한 사랑에도 가짜가 존재한다. 또한 바로와 사울 왕, 아합과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의 경우처럼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삼상 24:16, 17; 26:21, 왕상 21:27; 민 14:39, 40). 열왕기하 17:32이 묘사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그러한 거짓으로 나타난다"(97)고 하였다. 돌밭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신령한 기쁨도 가짜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또한 에드워즈는 찬송을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 간주하는 윔버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찬송을 즐겨 부른다고 해도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소유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찬송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지만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며, 나사로의 부활을 본 사람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때 호산나 찬송하며 영광을 돌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를 배신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성경을 많이 읽거나 찬송을 즐겨하고, 설교를 듣는 일에 많은 시간을 내는 등 종교적 열정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거듭난 신자임을 증거 하는 표식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도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를 모이는 것과 그들의 손을 펴는 것과 많은 기도를 하는 것에 열렬히 참여"하였기 때문이다(123).
외식자들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대단히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또 형제에 대한 사랑을 보일 수 있고,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감탄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죄에 대한 슬픔과 경외심과 복종심과 자기를 낮추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기쁨, 종교적인 갈망들, 종교와 영혼의 유익을 위한 열심 등의 모습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151). 이와 같이 "모든 은혜로운 정서를 흉내내는 모조품적인 정서가 존재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정서의 표출이 반드시 은혜로운 정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125).


5. 맺는 말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존 윔버를 비롯한 빈야드주의자들은 내적으로 들려오는 음성이나 투시, 또는 직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여 신앙을 주관화하고, 진동이나 넘어짐, 낄낄대며 하루 종일 웃어대는 웃음, 몸부림치는 것과 같은 육체에 나타나는 현상을 영적인 체험으로 간주하여 체험만이 신앙의 기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체험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주관화하거나 체험주의화 하는 것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체험이 신앙적인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하면, 기독교는 더 이상 계시의 종교가 될 수 없으며 모든 판단의 기준이 인간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 아래 태어나므로 죄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단의 지배를 받을 확률이 높다. 죄 없던 아담이 사단의 꼬임에 빠졌다면,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이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은 부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을 강조하는 주관주의는 부패한 죄성의 영향을 받는 자율주의로 나가게 되고 자율주의는 극단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표적인 예가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는 토론토의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이다. 존 윔버는 최근에 극단적인 체험주의로 나가는 토론토의 빈야드 교회를 그들의 모임에서 제명하였는데, 이는 빈야드주의자들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신앙의 주관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도 객관적인 면을 중요시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수직적인 체험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기 위한 수평적인 체험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곧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면서도 말씀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그래서 칼빈은 신학의 원리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내세웠고, 청교도들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신학적인 전통에 서서 말씀만을 강조하여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고, 성령만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곧 개혁주의자들은 교회 사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한국 교회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도 균형 잡힌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다.
칼빈과 청교도, 개혁주의자들처럼 말씀과 성령을 신학의 원리로 삼아 말씀과 성령이 왕노릇 하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예배가 단순히 집행되는 의식이나 신비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배에서 찬송과 기도가 살아나야 하고, 하나님과 말씀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생활의 영역에서 성령의 은사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쓰신 말씀에 깊이 묻혀서 그의 뜻을 발견하는 균형 잡힌 신앙을 세워 가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신앙과 삶의 원리가 되고 균형 잡힌 신앙이 한국인의 가슴을 지배할 때, 한국 교회는 여전히 21세기 세계 교회의 중심적인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주(註)--------

1) '제 3의 물결'이라는 용어는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에 의하여 창안되었다. 그러나 풀러신학교의 피터 와그너 교수가 이를 은사운동에 적용하면서 기독교계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와그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일어났던 오순절 운동을 제 1의 물결, 1960년대에 개신교의 여러 교파의 은사 운동이 로마 천주교회에 미친 은사 갱신운동을 제 2의 물결, 존 윔버의 은사운동을 제 3의 물결이라고 칭하였다. John Wimber, Power Evangelism [능력전도], 이재범 역 (서울: 도서출판 나단, 1988), p. 169.

2)존 윔버(John Wimber)는 1934년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그는 편모슬하에서 외아들로 자랐다.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전문대학에 진학하여 1954년 졸업한 후 Righteous Brothers라는 보컬 그룹을 만들어 라스 베가스(Las Vegas)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62년 이혼 직전에 기독교와 관련을 맺게 되고, 퀘이커교도(Quaker)들이 인도하던 성경 공부반에 참석하여 기독교를 배웠다. 그는 1970년 퀘이커 교회인 형제교단(Friends)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70년에서 73년 사이 아주사 퍼시픽 성경대학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신학을 더 배우기 위하여 1974년 풀러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교회 성장학 교수인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의 만남은 그의 생애를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White 212-218). 그는 1977년 요르바 린다 갈보리 채플(Calvary Chapel of Yorba Linda)을 설립하였고, 치유 사역과 은사 운동으로 급격한 교인수의 증가를 체험하였다. 그 후 1982년 피터 와그너의 주선으로 풀러신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표적과 기사와 교회 성장"(Signs, Wonders and Church Growth)을 강의하면서 '제 3의 물결'운동을 주도하였다.

3)LA 빈야드교회 한인 담당목사인 민병길에 의하면, 존 윔버가 주관하는 로스앤젤레스 빈야드 세미나에 참석한 한국인 목사가 800여명, 평신도가 200여명이다. 민병길, "능력목회의 새로운 장을 연 아나하임 빈야드 크리스챤 펠로우쉽," [목회와 신학] (1995, 6), p. 117. 여기다가 토론토 에어포트의 빈야드 교회에서 실시한 세미나에 참석한 숫자를 더하면 적어도 2,000명의 목회자가 참석하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4)존 윔버는 그의 신비 체험을 에드워즈의 성령 체험과 동일시하였다. John Wimber, Power Evangelism, [능력 전도], 이재범역, 서울: 나단출판사, 1993, p. 56. 그는 또한 [능력 치유]에서 말하기를, "1726년에서 1756년까지 진행되었던 대각성운동에 에드워즈, 웨슬레, 그리고 휫필드와 같은 사람들 모두 그들에게 기도를 받았던 사람들에게서 격렬한 감정의 분출이나 기이한 육체적 상태를 목격하였다. 그로 인해 종교지도자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라고 하였다. John Wimber with Kevin Springer, Power Healing, [능력 치유] 이재범 역, (서울 나단 출판사, 1991), p. 351. 또한 그는 자신이 비판을 받은 것처럼 에드워즈도 박해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에드워즈의 체험은 바로 자신의 신비 체험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Ibid., p. 353.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의 한인 담당목사인 김승환도 [목회와 신학에 투고한 "토론토 불레싱으로 퍼지는 영적 메아리,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라는 글에서 "1730년대의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목사의 사역의 기록을 보면 [빈야드 운동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목회와 신학] (1995, 6), p. 119.

5)John White, When the Spirit Comes with Power: Signs and Wonders Among God's People [능력 표적] 나단출판부 역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1), p. 222.

6) 그는 그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저스틴 마터(Justin Martin), 이레니우스(Irenaeus), 터툴리안(Tertullian), 노바티안(Novatian), 암브로스(Ambrose), 어거스틴(Augustine)과 같은 초대교회 지도자들, 그레고리 1세(Gregory I), 성 프란시스(St. Francis), 왈도파(Waldenses)와 같은 중세시대의 인물, 종교개혁 시대의 인물로는 루터(Luther), 로욜라(Loyola),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퀘이커(Quaker), 얀센주의자(Jansenist)를 꼽고 있으며, 근세에 와서는 웨슬레(Wesley)의 체험과 아주사 지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등을 예로 든다. [능력전도] pp. 213-234. 그러나 그가 열거한 인물들은 몇을 제외하고는 은사를 인정하였을 뿐, 그와 같은 은사주의자는 아니었다.

7)폭스의 이러한 주관주의적인 신학은 그의 후계자인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 1648-90)와 18세기 대표적인 학자인 조셉 거니(Joseph John Gurney, 1788-1847)와 같은 신학자에 의하여 퀘이커 신학을 형성하였다.

8)여기서 윔버가 말하는 직관의 모호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간통'이라는 글자가 얼굴 위에 쓰여 있어서 그의 눈을 비비고 쳐다보았다고 말하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한 후, 이를 성령이 자신에게 보여준 영적인 체험이라고 말하고 있다.

9)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s, [신앙과 정서] 서문강역 (서울: 지평서원, 1993), p.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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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그는 오랄 로버츠(Oral Roberts)와 코플랜드(Kenneth Copeland)와 같은 부흥사나 복음 전도자에 의하여 실시되는 오순절 모델, 영국 성공회 주교인 매독스(Morris Maddocks)와 매사추세츠의 로마 천주교 신부인 맥도나우(Edwards McDonough)와 같은 이들이 사용하는 전례적 - 성례적인 모델, 치유 훈련과 특별 집회를 강조하는 맥너트(Francis MacNutt)와 디오리오(Ralph DiOrio)와 같은 사람이 주장하는 신오순절 모델, 복음전도와 마귀 축출에 사용하는 마귀 축출 방법, 과거에 입은 상처와 원한의 치유에 주된 관심을 두는 심리적 영적 모델 혹은 내적인 치유 모델을 참고하여 치유 신학을 발전시켰다고 하였다(능력치유, 309-311).

11) 로마 천주교회는 빈야드주의자들 처럼 은사의 절대성과 은사 운동의 가능성을 주장해 왔다. 로마 천주교 신학자 프랜시스 맥너트는 말하기를, "실제로 치유는 개신교보다는 카톨릭 교인편에서 훨씬 이해하기 쉽다. 카톨릭 교인들은 신유를 포함한 기이한 은사들로 축복을 받은 성자들의 전통 속에서 성장해 왔으며, 신유는 아직도 성자로 시성되기 위한 하나의 시금석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인들은 신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고 하였다. Francis MacNutt, Healing (Notre Dame, IN: Ave Maria, 1974), p. 13.

12) 존 윔버, 피터 와그너, 찰스 크래프트, 앤 왓슨, 존 화이트 외 13인 공저, [제 3의 물결을 타고] 변진적 변창욱 옮김 (서울 도서출판 무실, 1991), p. 33.

13)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4), pp. 176-177.

14)Benjamin. B. Warfield, Counterfeit Miracles [기독교 기적론] 이길상 역 (서울: 도서출판 나침판, 1989), p. 30.

15)Jonathan Edwards, Charity and Its Fruits, [사랑과 그 열매], 서문강 역, (서울: 정음출판사, 1984), p. 34.

16)John Calvin,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IV. xix. 18.

17)Martin Luther, "Sermons on the Gospel of St. John," in Luther's Works. ed. Jaroslav Pelikan. vol. 24.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3), p. 367.
(월간<교회와신앙> 199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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