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칼빈주의의 오류_하워드 A. 반즈

by 갈렙 posted Oct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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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rrors of Calvinism (1): Introduction & Background
칼빈주의의 오류(1): 소개 및 배경

하워드 A. 반즈

In recent years there has been an upsurge in Calvinist (or Reformed) teaching among evangelicals in the USA, with Southern Baptists and Charismatics being to the fore, (Collin Hansen, Young, Restless, Reformed: A Journalist’s Journey with the New Calvinists, 2008, Crossway Publishers, Wheaton, IL). At the same time there has been a robust reaction against this teaching. However, this response sometimes disagrees with doctrines which have been “most surely believed among us” in assemblies, which are based, we believe, on “the whole counsel of God,” (Acts 20:27 RV). Given these circumstances, we shall be examining the teachings of Calvinism in a series of seven articles, seeking to compare and contrast them with what has been traditionally taught in assemblies for nearly two centuries. Other current doctrines, which diverge from the conventional position, such as corporate election, will be critically examined.

 

최근 남침례교와 은사주의자들이 부각되는 상태에서 미국에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칼빈주의자들(또는 개혁된) 가르침이 급격히 증가되었다(콜린 한센, , 쉼없는, 개혁된: 새 칼빈주의자들과 보도기자의 여행 2008, 크로스웨이 출판사, 휘튼, IL). 동시에 이 가르침에 반대하는 강한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이 반응은 때때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모든 뜻”( 20:27 RV)에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모임들에서 우리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믿어졌던교리에 때로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며 우리는 거의 두 세기 동안 모임들에서 가르쳐졌던 것과 비교하고 대조하고자 칼빈주의의 가르침을 일곱 기사로 연재하며 검토할 것이다. 현재 다른 교리들, 전통적인 위치로부터 빗나간 그러한 집합적인 택함 같은 것은 비판적으로 검토될 것이다.

 

What is Calvinism?

Calvinism is a form of systematic theology worked out by the French reformer John Calvin (1509?1564) and later expanded by his followers. Calvin was a great devotee of Augustine of Hippo (354?430) who had himself worked out the equivalent rational theological system which highlighted the sovereignty of God, setting aside human responsibility as of any consequence in the matter of salvation. (It is the very same Augustine and Calvin whom we have also to thank for spiritualizing away an earthly millennium, teaching that there was no future for the nation of Israel).

 

칼빈주의는 무엇인가?

칼빈주의는 프랑스 개혁자 존 칼빈 (1509-1564)에 개발되고 나중에 그의 추종자에 의해 확대된 체계적인 신학의 한 형태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던 것에 상응하는 합리적인 신학 체계를 세웠던 히포의 어거스틴(354-430)의 위대한 팬이었으며, 구원의 문제에서 어떤 결과라도 인간의 책임을 제쳐 두었다(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을 위한 어떤 미래도 없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또한 지상 천년왕국에 영적인 다른 방향으로 감사하려던 칼빈과 어거스틴은 매우 동일하다).

 

The Problem Exemplified

If any readers are wondering what the furor is all about, they only have to read one of Calvin’s own statements:

 

“All things being at God’s disposal, and the decision of salvation or death belonging to Him, He orders all things by His counsel and decree in such a manner, that some men are born devoted from the womb to certain death, that His name may be glorified in their destruction” (John Allen, ed.,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Philadelphia, 1841, p. 169).

 

Then, no doubt, they will quickly reach for their Bibles to turn up their favorite gospel verses which contradict such unscriptural teaching!

 

전형적인 문제

만약 어떤 독자들이 무엇에 열광하는 모든 사람에 관해 놀라워하는 경우 그들은 단지 칼빈 자신의 주장들 중 하나를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처분에 있는 모든 것들, 그분께 속해 있는 구원이나 죽음의 결정, 그분은 그러한 방법에 그분의 권고와 명령에 의해 모든 것들을 지시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죽음에 대해 태로부터 헌신적으로 태어난다, 그분의 이름은 그들의 파멸로 영화롭게 될 수도 있다”(존 알렌, , 기독교 종교 연구소. 출판물의 장로위원회, 빌라델피아, 1841, P. 169).

 

그런 다음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이러한 비성경적인 가르침에 모순되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복음 구절이 나타나게 하려고 그들의 성경에 신속하게 손을 뻗칠 것이다!

 

Arminianism and “TULIP”

Calvin’s teaching was generally well received by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but it was strongly opposed there by a prominent theologian called James (Jacobus) Arminius (1560?1609). His arguments were centered mainly on human responsibility. Shortly after his death, his followers issued a summary of his teaching in five statements (The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1610), which, for our purposes, we can simplify as:

 

(1) election was determined by the faith of the believer, which God foreknew;

 

(2) the atonement, while adequate for all men, is efficacious only for believers;

 

(3) unaided by the Holy Spirit, no person is able to respond to God’s will;

 

(4) grace is not irresistible;

 

(5) believers can fall from grace and lose their salvation.

 

알미니안주의와 “TULIP”

칼빈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완전히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서 받은 것이었지만 그것은 제임스(야고보) 알미니우스(1560-1609)로 불렸던 두드러진 신학자에 의해 강력하게 반대되었다. 그의 주장은 주로 인간의 책임을 중심했다. 곧 그의 죽음 직후에 그의 추종자들은 다섯 조항의 그의 가르침 요약을 발표했다(항의서의 다섯 조항, 1610), 우리의 목적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단순한 것으로:

 

(1) 택함은 하나님의 예지하셨던 것에 신자의 믿음에 의해 결정되었다;

 

(2) 속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충분하며 신자들에 대해서만 효과가 있다;

 

(3) 성령에 의한 도움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뜻에 응답 할 수 없다;

 

(4) 은혜는 저항할 수 없지 않으며

 

(5) 신자들은 은혜로부터 떨어질 수도 자신의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

 

 (For a full version see www.theopedia.com/Five_articles_of
_Remonstrance).

To counter the spread of the teaching of Arminius, the Synod of Dort (Dordrecht, Holland) was convened by the Dutch Reformed churches in 1618. The outcome was The Decision of the Synod of Dort on the Five Main Points of Doctrine in Dispute in the Netherlands, commonly known as the Canons of Dort, conveniently summarized some time later in English (following re-arrangement of the order) by the acronym/mnemonic “TULIP.” This five-point statement has served as a summary of Calvinism (or the so-called Reformed position) ever since. It spells out:

 

T - Total depravity

U - Unconditional election

L - Limited atonement

I - Irresistible grace

P - Perseverance of saints

 

In succeeding articles we will use these points to construct a critique of Calvinism.

 

(전체 번역문에 대한 내용은 www.theopedia.com/Five_articles_of
_Remonstrance
를 참조하라).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도르트 종교회의(도르드레흐트, 네덜란드) 1618년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 의해 소집되었다. 결과는 네들란드에서 논쟁중의 교리의 5개 주요 요점에 도르트 종교회의 결의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도르트의 법규집처럼 알려졌으며 나중에 편리하게 TULIP이란 약어/연상기호에 의한 영어로 요약되었다(명령에 관한 배치에 따라). 이 다섯 요점 조항은 그 이후 칼빈의 개요로 제공되었다(또는 소위 개혁 입장). 그것의 철자를 펼치면:

 

T - 전적인 타락

U - 절대적인 선택

L ? 제한된 속죄

I - 저항 할 수 없는 은혜

P - 성도들의 궁극적인 구원

 

기사의 뒤를 이어서 우리는 칼빈주의의 비평을 구성할 이러한 요점들을 사용할 것이다.

 

Arminianism and Calvinism

Arminianism flourished alongside Calvinism and the two often became ? and still are ? the reason for considerable disputes among Christians. One outstanding example of this is the rift that occurred within early Methodism. This movement polarized into two groups under the respective leadership of John Wesley (1703?1791) and George Whitefield (1714? 1770); the former being an Arminian and the latter a Calvinist ? hence Wesleyan and Calvinistic Methodists. Both were active in preaching in the UK and North America. (The well-known preachers Jonathan Edwards (1703?1758) of North America and Howell Harris (1714?1773) of Wales, were close associates of Whitefield.) The present writer well remembers his own boyhood in Wales, with English and Welsh language variants of both kinds of Methodist chapels.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와 함께 번성하고 둘은 종종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에 대한 이유가 되었다 - 아직도 있다. 이 중 한가지 두드러진 예는 초기 감리교파 안에서 발생했던 균열이다. 이 운동은 존 웨슬리(1703-1791)와 조지 화이트필드(1714-1770)의 각각의 통솔력에 따라 두 그룹으로 양극화되었다; 전자는 알미니안파이며 후자는 칼뱅파가 되는 - 따라서 웨슬리파와 칼뱅파의 감리교. 모두 영국과 북미에서 전도에 활발한 활동을 했다. (잘 알려진 설교자 북미의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와 웨일즈의 하웰 해리스(1714-1773)는 휘트필드의 가까운 동료였다.) 현재 필자는 두 종류의 감리교 채플의 영어와 웨일즈의 언어 변화와 더불어 웨일즈에서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한다.

 

A Balanced View

The generally accepted view in assemblies has been that divine sovereignty and human responsibility coexist, however illogical this might seem to our limited human minds. A summary of the outcome of such an interpretation might be stated as:

 

? Unsaved people are spiritually dead, but still responsible/able to repent;

 

? Our election is personal and not just dependent on God knowing about our faith beforehand;

 

? The death of Christ was on behalf of all, but is only effective for believers;

 

? Men are dependent on, but can refuse, the striving of the Spirit in the gospel;

 

? Once a person is truly saved, he can never be lost.

 

균형 잡힌 시각

모임들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관점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논리적인 이것이 우리의 한정된 인간의 마음에 보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해석의 결과의 요약은 다음과 같이 진술 될 수 있다:

 

?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었지만, 여전히 책임/회개 할 수 있다;

 

? 우리의 택함은 사전에 우리의 믿음에 관해 개인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바로 의존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두를 대신했지만 신자에 대해서만 유효하다;

 

? 사람들은 의지하지만 복음 안에서 성령의 노력을 거부 할 수 있다;

 

? 일단 사람은 참으로 구원받으면 그는 결코 잃을 수 없다.

 

Conclusion

In terms of the continuing war of words between Calvinists and Arminians,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in the arguments they use, but it is nevertheless well worthwhile restating the assembly position on this matter. One thing is clear - the prayers in the prayer meeting before the gospel meeting usually highlight divine sovereignty, asking that God would work in the hearts and minds of the unsaved, while the gospel preaching itself emphasizes the responsibility of the sinner to repent and believe.

 

결론

칼뱅파와 알미니안파 사이에 단어에 관한 지속적인 충돌의 관계에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그들이 사용하는 주장이지만 그것은 이 문제에 모임의 자세를 다시 언급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치가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 복음집회 전에 기도 모임에서 기도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구원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서 역사하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며, 동시에 복음 설교 그 자체는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죄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http://www.truthandtidings.com

The Errors of Calvinism(2): Total Depravity
칼빈주의의 오류(2): 전적인 타락

하워드 A. 반즈

On the face of it, the Calvinistic doctrine of total depravity sounds quite convincing: it seems to say that man could not be any worse. This has Scriptural support, as David said: “I was shapen in iniquity; and in sin did my mother conceive me” (Psa 51:5), and Paul later added “as by one man sin entered into the world, and death by sin; and so death passed upon all men, for that all have sinned” (Rom 5:12). Man is spiritually dead; in darkness and at a distance from God. Can we ask, “Are all men and women, without distinction, able to respond to the gospel message?”

 

그것의 표면상으로 전적인 타락에 관한 칼뱅파의 교리는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것은 그 사람이 더 악화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다윗이 말했던 것처럼 성경의 지지를 가지고 있다. “내가 불법 가운데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가운데서 나를 수태하였나이다( 51:5), 그리고 나중에 바울도 추가하기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5:12).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어둠 속에서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모든 남성과 여성은 차별없이 복음의 메시지에 응답 할 수 있는가?”

 

Based on this doctrine of total depravity, Calvinistic orthodoxy’s answer to the question is “No! Adam’s offspring are born with sinful natures; they do not have the ability to choose spiritual good over evil” [Thomas Steele, Five Points of Calvinism, Presbyterian and Reformed, Phillipsburg, 1963, p. 25]. This includes choosing Christ for salvation. This teaching goes on to say that only the elect are enabled by God to carry out the gospel commands to repent; believe; receive Christ; obey the gospel, etc., when they hear the gospel preached. But we might ask, “Does human responsibility have no part at all to play in the gospel?”

 

전적인 타락의 교리를 바탕으로 칼뱅파 정통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돼! 아담의 자손은 죄 많은 본성으로 태어났다; 그들은 악함 위에 영적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토마스 스틸, 칼빈의 다섯 가지 요점, 장로교와 개혁, 필립스버그, 1963, P. 25]. 이것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르침은 오직 택함은 회개를 수행하려면 복음의 명령 밖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복음이 전파됨을 들을 때 믿음; 그리스도를 받아들임; 복음을 순종 등등. 그러나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인간의 책임은 복음 안에 참가할 어떤 역할도 없는가?”

 

Human responsibility and the gospel

This subject is best understood when we examine the following opposite choices in the context of the gospel: obedience and disobedience; reception (or acceptance) and rejection. All of these are, one way or another, the obvious expressions of the human will.

 

인간 책임과 복음

이 주제는 우리가 복음의 맥락에서 선택에 따르는 반대를 검토할 때 잘 이해할 수 있다: 순종과 불순종; 영접(또는 받아들임)과 거절. 이들 중 모두는 인간 의지의 명백한 표현의 한 가지 또는 다른 방법이다.

 

Let us look first at the words allied with obedience. We first find the thought in the Acts of the Apostles, where God’s gift of the Holy Spirit is promised “to them that obey Him” (Acts 5:32). Such obedience was shown when “a great company of the priests were obedient to the faith” (Acts 6:7). However, the use of this idea comes out most clearly in Paul’s great masterpiece of evangelical explanation, the epistle to the Romans. He starts by saying that his apostleship was for “obedience to the faith among all nations” (Rom 1:5; cp 15:18). Then he spoke about those who “do not obey the truth, but obey unrighteousness, indignation, and wrath” (Rom 2:8). Then he points out that it was originally “by one man’s disobedience many were made sinners” (Rom 5:19), but having received the gospel, the Roman believers “have obeyed from the heart that form of doctrine which was delivered you” (Rom 6:17). However, with regard to those Jews who had heard the gospel, “they have not all obeyed the gospel” (Rom 10:16). Indeed, it was the (largely Gentile) Roman believers’ obedience that all had heard about (Rom 16:19). Paul ends his use of this word with a statement of God’s presently revealed purposes in the gospel: “made known to all nations for the obedience of faith” (Rom 16:26).

 

우리는 먼저 순종과 함께 유사한 단어들을 바라보자. 우리는 먼저 사도들의 사도행전에서 생각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는 약속된 것이다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5:32). 이러한 순종이 나타났을 때 제사장들의 큰 무리도 믿음에 순종하니라(6:7). 그러나, 이 개념의 사용은 복음의 설명 중에 바울의 위대한 대표작인 로마서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는 그의 사도직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믿음에 순종하게” ( 1:5; 15:18 비교)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말하며 시작한다. 그 다음 그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불의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격노와 진노로 갚으시리라”( 2:8)고 말했다. 그 다음 그는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5:19), 그러나 로마의 신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달된 교리의 그 틀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6:17). 그러나 복음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에 관해서 그들이 다 복음에 순종하지는 아니하였나니”( 10:16). 실제로, 모두가 들었던 것은 로마 신자들(주로 이방인)의 순종이었다( 16:19). 바울은 복음에서 하나님의 현재 드러내신 목적의 진술과 함께 이 단어에 관해 그의 사용을 마친다: “믿음에 순종하게 하려고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지게 된 신비의 계시에 따라”( 16:26).

 

Equally, disobedience is an act of volition, and this is the root of the problem, as Paul wrote of Adam, “As by one man’s disobedience many were made sinners” (Rom 5:19), and also of Israel, who were “a disobedient … people” (Rom 10:21). Not so, of course, for Paul who said to Agrippa, “I was not disobedient unto the heavenly vision” (Acts 26:19). He looked back with the Ephesian believers and said they were then, as unbelievers are now, “the children of disobedience” (Eph 2:2). In fact, this would bring “the wrath of God upon the children of disobedience” (Eph 5:6; see also Col 3:6).

 

그와 동시에 불순종은 의지의 행위이고,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며, 바울은 아담에 관한 기록으로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5:19), 또한 이스라엘은 불순종한 사람들이었다”( 10:21). 그렇지 않고 물론 바울이 아그립바에게 말했던 것에 관해 내가 하늘에 나타난 그 환상에 불순종하지 아니하여”( 26:19). 그는 에베소 성도들과 함께 돌아 보았으며 그들이 그 때 믿지 않는 자들같이 불순종의 아들들”( 2:2)로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하나니를 가져올 것이다(5:6, 또한 골 3:6을 보라).

 

Again, acceptance is an act of choice, as we read in the first chapter of John’s gospel;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power to become the sons of God” (v12; cp Col 2:6). On the other hand, it is also clear that sinners can reject the gospel, with equal responsibility. In His lifetime there were those who rejected the Lord Jesus Christ, particularly the national Jewish leaders, since He was “the stone which the builders rejected,” (Matt 21:42; Mark 12:10). This was to the extent of wanting to kill Him, “Who was rejected of the elders, and of the chief priests, and scribes” (Mark 8:31; Luke 9:22). In fact He was “rejected of this generation” (Luke 17:25). This would lead to Him being their Judge since “he that rejecteth Me, and receiveth not My words, hath One that judgeth him: the word that I have spoken, the same shall judge him in the last day” (John 12:48).

 

다시 우리가 요한복음의 첫 장에서 읽었던 것에 따라 받아들임은 선택의 행위이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12; 비교 골 2:6).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죄인들이 같은 책임과 더불어 복음을 거절할 수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분의 생애에서 특히 유대인 민족 지도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자들이었으며, 이후 그분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 바로 그 돌”( 21:42; 12:10)이었다. 이는 그분을 죽이고 싶어하는 정도였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아”( 8:31; 9:22). 사실 그분은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 17:25). 이는 이후 그들의 재판관이 있는 그분에게로 데려갈 것이다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심판하는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말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12:48).

 

Paul reminds Titus that before being saved, “we ourselves also were … disobedient” (Titus 3:3). Then Peter spoke of those who rejected Christ as “them which be disobedient” (1Peter 2:7, 8), just like those who rejected God’s witness before the flood, “which … were disobedient” (1Peter 3:20). Human responsibility in the Old Testament often came down to the exercise of individual choice (Deut 30:19; Josh 24:15).

(We could also have examined more examples of human responsibility, such as believing and not believing, in John chapter 3.)

 

바울은 디도서에서 구원받기 이전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도 한 때는 불순종하며”( 3:3). 베드로는 불순종하는 자들”(벧전 2:7,8)이라고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자들에 관해 말했으며, 바로 홍수 전에 하나님의 증거를 거절했던 자들같이 불순종하던 자들…”(벧전 3:20). 인간의 책임은 구약에서 종종 개인적인 선택의 실행으로 내려왔다( 30:19; 24:15).

 

(우리는 또한 요한복음 3장에서 그와 같이 믿고 믿지 않는 인간의 책임의 더 많은 보기를 살펴 볼 수 있다.)

 

From the plain statements of Scripture (read without overlaying it with any Calvinistic presuppositions) we see that man is certainly responsible in the context of the gospel. So when God commands all men everywhere to repent (Acts 17:30), He really means it, because He is “not willing that any should perish, but that all should come to repentance” (2Peter 3:9)! Thus God’s Word ends by saying, “He who is willing — let him take the water of life freely” (Rev 22:17 YLT).

 

성경의 명백한 표현에서 (어떤 칼뱅파의 전제조건으로 가지는 그것을 감추지 않고 읽는다) 우리는 그 사람이 확실히 복음의 환경에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본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처에 모든 사람을 회개하도록 명령하실 때( 17:30), 그분은 그것을 실제로 의미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마지막 말씀하심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22:17 YLT).

 

Of course, we are not saying that people are able to respond to the gospel independently of God working in their lives – but more of this later when we examine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salvation.

 

물론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복음과 관계없이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것의 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우리가 구원에서 성령의 사역을 검토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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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rors of Calvinism(3): Unconditional Election
칼빈주의의 오류(3) : 절대적인 택함

하워드 A. 반즈

Anyone reading the New Testament cannot escape the conclusion that God has elected (chosen) certain persons and predestined (predetermined) them for eternal blessing. The thorny question is, “How and why did He choose them?” Did it depend on Him alone, or only on the gospel decision of the people concerned, which, of course, He knew about beforehand anyway? If it depended on God alone, the election (choice) is called “unconditional,” but if it actually depended on the faith of the individuals concerned, it is called “conditional.” Arminius’s argument was the latter, i.e., that God chose those whom He knew beforehand would choose Christ. This was meant to counter Calvin’s earlier contention that men being dead were unable of themselves to choose Christ. So in effect Calvin said, God chose the believers, then they – and only they – could choose Christ as Savior.

 

신약 성경을 읽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택하셨다는 것과 영원한 축복에 대해 그들을 (미리 결정된)예정하셨다는 결론을 벗어날 수 없다. 어려운 질문은 어떻게, 왜 그분께서 그들을 선택했는가?”이다. 그것은 홀로 또는 단지 관련된 사람들의 복음의 결정에 그분을 의존했는가? 물론, 그분은 사전에 어쨌든 알고 계셨는가? 만약 그것이 하나님만 의존하는 경우 (선택)택하심은 절대적이라고 불리지만 만약 그것이 실제로 관련된 개인의 믿음에 의존하는 경우, 그것은 조건적이라고 불린다.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후자이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들을 사전에 알고 계셨던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었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을 칼빈의 이전 논쟁에 대응하기 위한 의미였다. 그래서 칼빈이 말했던 결과에 하나님은 신자들을 선택하고 동시에 그들은 오직 그들만이- 구주로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다.

 

In the previous article we showed that man is a responsible creature – indeed the sovereign God chose to make man so! Thus, man could choose Christ, but would he choose Christ? Of course God knew who would be saved, but did this prior knowledge determine His choice?

 

이전 기사에서 우리는 사람이 책임이 있는 피조물인 것을 나타내었다 - 실제로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을 그렇게 하도록 선택하신다! 따라서 사람이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가? 물론 하나님은 구원받을 것을 알고 계셨겠지만 이 사전의 지식은 그분의 선택을 결정했는가?

 

Do we, in trying to understand the basis of election, have to make our selection between God choosing because man could not, and man choosing because he could? We argue here that such a choice is unnecessary and that both divine sovereignty and human responsibility coexist even though they are irreconcilable to our finite, human minds. So we can say, God chose the elect, and all who hear the gospel can choose to be saved.

 

우리가 택함의 기초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하고, 사람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하는 사이에 우리의 선택이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러한 선택의 여지가 불필요하다고 여기서 주장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모두는 비록 그들이 우리 한정된 인간의 마음에 타협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택함을 선택하시고,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기를 선택할 수 있다.

 

Election

God the Father had blessed Paul and the Ephesian believers “with all spiritual blessings in heavenly places,” just as He had chosen them out of the mass of humanity for Himself (Eph 1:3). Paul is writing in the first place about the Ephesians and himself as individuals. God had chosen them in Christ, just as all His dealing in grace had, and always will be, “in Him.” In the same way He would also head up all things “in Him” in millennial days (see Eph 1:10). The latter verse shows us that the expression “in Him” is not exhausted by thoughts of the membership of the church which is His body, as those who favor corporate election claim.

 

택함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울과 에베소 신자들에게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1:3) 복 주셨으며, 마찬가지로 그분께서 그분 자신에 대한 인류의 집단 밖으로 그들을 선택하셨다. 바울은 개인으로서 에베소인들과 그 자신에 관해 먼저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선택하셨고 마찬가지로 그분의 모든 은혜 안에 관계는 항상 그분 안에서가 될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그분은 또한 천년왕국 시대에 그분 안에서모든 것의 머리가 되실 것이다( 1:10). 후자의 구절은 그분 안에서표현이 집합적인 택함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자들로 그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의 생각에 의해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인다.

 

In the same way, Paul wrote to the Thessalonian believers saying that he, Silas, and Timothy, “give thanks alway to God for you … because God hath … chosen you to salvation through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and belief of the truth: whereunto He called you by our gospel” (2Thes 2:13, 14). Here we find divine sovereignty and human responsibility brought together, but not apologized for or explained! We also see how God works out His eternal purposes in time through the work of the Holy Spirit - God chose, the Holy Spirit set apart, and the Thessalonians believed the truth of the gospel. Paul, Silas, and Timothy had already given “thanks to God always for you all … knowing … your election of God” (1Thes 1:2-4). They knew about the election of the believers in Thessalonica by their clear conversion, when they, at great expense to themselves, had “turned to God from idols to serve the living and true God” (1Thes 1:9, see also 2Peter 1:10). James also brings the two thoughts together: “Has not God chosen the poor as to the world, rich in faith, and heirs of the kingdom, which He has promised to them that love Him?” (James 2:5, Darby).

 

같은 방법으로, 바울은 그가 실라와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해 기록했다 너희로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과 진리를 믿는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이라 이것을 위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살후 2:13,14).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함께 가져온 것을 발견하지만 사죄하지 않거나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때에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는지 본다 하나님은 선택, 성령은 따로 세움, 그리고 데살로니가인들은 복음의 진리를 믿었다. 바울, 실라, 그리고 디모데는 이미 주어졌던 너희 모두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 하나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셨음을 아노라”(살전 1:2-4). 그들은 그들의 분명한 변화에 의해 데살로니가에서 신자들의 택하심에 관해 알고 있었다,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9, 또한 벧후 1:10을 보라). 야고보도 또한 같은 두 가지 생각을 제공한다: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2:5, 다비 ).

 

We read about God’s elect in Romans 8:33, Colossians 3:12, and Titus 1:1. Individuals are said to be elect, as the lady in 2 John 1 and her sister in 2 John 13, as well as Rufus in Romans 16:13. The Jewish believing remnant today are elect, (Romans 11:5, 7, 28) as are the tribulation saints of a future day (Matt 22:14; 24:22, 24, 31; Mark 13:20, 22, 27; Luke 18:7). We also note those believers stated to be with the Lamb in Revelation 17:14 are “called, and chosen, and faithful.” We see an interesting point raised by Paul about his endurance of suffering “for the elect’s sakes, that they may also obtain the salvation” (2Tim 2:10). Lastly, we note in Acts 13:48 that in Antioch and Pisidia when “the Gentiles heard … [the gospel] … as many as were ordained [appointed] to eternal life believed.” (There have been attempts to translate the word “ordained” as “disposed,” and to make it a reflexive verb, but the author has yet to find a reliable translation or major concordance which does not say “ordained” or “appointed.” See Romans 13:1 for the same word.)

 

우리는 로마서 8:33, 골로새서 3:12, 그리고 디도서 1:1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해 읽는다. 개인적인 요한이서 1절의 부인과 13절의 그녀의 자매와 마찬가지로 로마서 16:13의 루포처럼 택하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유대인의 나머지 믿음은 택하심( 15:5,7,28)처럼 미래의 환란의 성도들이다( 22:14; 24:22,24,31; 13:20,22,27; 18:7). 우리는 또한 요한계시록 17:14에서 어린양과 함께 있기 위해 정해진 그 신자들을 주목하는 것은 부르시고, 선택하고, 충성된 자들이다. 우리는 그의 고난의 인내에 관해 바울에 의해 제기된 흥미있는 점을 본다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견딤은 그들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딤후 2:10). 마지막으로 우리는 안디옥과 비시디아에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주의 말씀에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약속된) 자들은 다 믿더라고 한 사도행전 13:48을 주목한다. (“배치된(원했다)처럼 정했다단어를 번역하고 그것을 재귀동사로 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필자는 아직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나 주요 일치를 찾을 수 없으며 정했다또는 세웠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동일한 단어 롬 13:1을 참조하라).

 

Foreknowledge

Is election determined by foreknowledge? Did God just choose those whom He knew would believe? Peter addresses his readers as “strangers … elect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through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unto obedience and sprinkling of the blood of Jesus Christ” (1Peter 1:1, 2; 2:9). Their election is according to God’s foreknowledge, that is to say, “perfectly consistent with” His foreknowledge, His understanding being infinite (Psa 147:5; see also Acts 15:18). Likewise, elsewhere, we read of foreknowledge in the context of predestination (Rom 8:29, 30; Eph 1:5, 11).

 

미리 아심

택함은 미리 아심에 의해 결정되는가? 하나님은 바로 믿을 것을 그분께서 알고 계셨던 사람들을 선택했는가? 베드로가 그의 독자들을 위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벧전 1:1,2; 2:9). 그들의 택하심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른 것이다, 즉 말하자면 그분의 미리 아심과 함께 완벽하게 일치함이며 그분의 이해는 무한한 것이다(147:5; 15:18을 참조하라).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우리는 예정의 맥락에서 미리 아심을 읽는다( 8:29,30; 1:5,11).

 

Conclusion

God has elected (chosen) certain people and destined them for eternal blessing, all according to His purpose. This did not depend on anything that those individuals did, or on God knowing anything about them beforehand, thus, election is unconditional. As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says (note at 1Peter 1:2): “Election is … the sovereign act of God in grace whereby certain are chosen from among mankind for Himself.”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John 15:19).

 

결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 (선택된) 택하셨고 그분의 목적에 따라 모든 영원한 축복을 정하셨다. 이것은 그들 개인이 했다거나 사전에 그들에 관해 무엇이라도 알고 계신 하나님이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택함은 무조건적이다. 스코필드 관주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벧전 1:2에 주목하라): “택함은 어떤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주권행위는 그분 자신에 대해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신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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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rors of Calvinism(4): Limited Atonement
칼빈주의의 오류(4) : 제한된 속죄

하워드 A. 반즈

The doctrine of Limited Atonement – that Christ only died for the elect – is, of all Calvinistic doctrines, the one that creates most offense among non-Calvinistic, evangelical Christians. This month we will show that Christ did actually die for all in order that all might be saved. However, at the same time, we will stress that Christ died instead of believers only. If Christ died instead of those (as a substitute) who die in their sins, God would be punishing their sins twice, since such unbelievers will suffer for their sins in hell.

 

제한된 속죄의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복음주의 기독교인들, 비 칼뱅파 사이에서 대부분의 위법행위를 일으키는 한가지는 칼뱅파의 모든 교리 중에 있다. 이번 달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모두가 구원될 수 있는 상태로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로 죽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두 번 죄를 처벌하시는 것이다, 이후에 그러한 불신자는 지옥에서의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받을 것이다.

 

Christ died for all

That Christ died for all is substantiated by John’s statement that “Jesus Christ the righteous … is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 and not for ours only, but also for the sins of the whole world” (1John 2:1, 2). Propitiation is, of course, the New Testament equivalent of the Old Testament atonement. In Old Testament times, the mercy seat was sprinkled with blood on the Day of Atonement (see Leviticus 16), so that God could forgive the sins of the nation of Israel and continue with them for another year – the sprinkled blood being the righteous basis for God’s forgiveness. Thomas Newberry’s New Testament (Samuel Bagster, London, 1870, read online at www.archive.org) invariably gives “mercy seat” as the marginal rendering of “propitiation.” So too, on the cross, the Lord Jesus shed His precious blood so that there could be a righteous basis for God to be able to forgive the sins of the whole world.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은 요한의 진술로 구체화되고 있다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속죄)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요일 2:1,2). 속죄는 구약의 속죄가 신약에서도 동일함은 물론이다. 구약 시대에 속죄소는 속죄일( 16장을 참조하라)에 피를 뿌리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민족의 죄들을 용서하실 수 있고 또 다른 시기 동안 그들과 계속 함께 하실 수 있다 -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의의 근거를 가져오는 피를 뿌렸다. 토마스 뉴베리의 신약 성경은 (사무엘 백스터, 런던, 1870, www.archive.org 에서 읽으시라) 변함없이 속죄의 난외 번역으로서 속죄소를 제공한다. 그래서 또한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이 그분의 귀한 피를 그렇게 흘리신 것은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할 수 있으신 하나님의 의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Paul stresses to Timothy the urgency of prayer, particularly for the gospel, because our Savior God “desires that all men should be saved” (1Tim 2:4 DBY). This is possible because “the man Christ Jesus … gave Himself a ransom for all” (1Tim 2:5, 6). Once again, Christ died for all, so that they could be saved.

 

바울은 특히 복음을 위해 디모데에게 기도의 절박함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DBY ). 이것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기때문에 가능하다(딤전 2:5,6). 다시 한번, 그리스도는 그들이 구원될 수 있도록 모두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The difference between “for” and “instead of”

We shall now look at three seminal treatments of this issue. First, in a supplementary note in his well-known 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W.E. Vine says, commenting on the Greek prepositions anti and huper, “Of special doctrinal importance are Matthew 20:28 and Mark 10:45,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anti) many.’” Here the substitutionary significance “instead of,” is clear, as also with the compound antulutron in 1 Timothy 2:6, “Who gave Himself a ransom for (huper) all.” Here the use of huper, “on behalf of” is noticeable. Christ gave Himself as a ransom (of a substitutionary character), not instead of all men, but on behalf of all. The actual substitution, as in the passages in Matthew and Mark, is expressed by the anti (instead of) many. The unrepentant man should not be told that Christ is his substitute; for, in that case, the exchange would hold good for him and though unregenerate he would not be in the place of death, a condition in which, however, he exists while unconverted. Accordingly, the many are those who, through faith, are delivered from that condition.

 

위하여대신에의 차이

우리는 지금 이 문제의 세가지 중요한 표현법을 살펴야 한다. 첫째, W.E. 바인이 말하는 그의 잘 알려진 신약 단어 해설 사전 에서 보조 노트에 헬라어 전치사 안티후페르의 주해는 특별한 교리의 중요성은 마 20:28과 막 10:45이다많은 (안티) 사람을 위한 몸값을 그분의 생명을 주기 위해’.” 여기에 대속의 중요성인 대신에는 딤전 2:6에서 안튈리트론(대속물) 화합물과 더불어 또한 분명하며, “모든 사람을 위한(후페르)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 여기에 을 대신하고후페르의 사용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도는 몸값(대속의 특성)으로 그분 자신을 주셨다, 모든 사람들을 대신한 것이 아니지만 모두를 대신한다. 마태와 마가에서의 구절에서처럼 실제상의 대속은 많은 사람(대신에) 안티에 의해 표현된다. 완고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그의 대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경우에 교체는 그에게 좋은 상태를 유지할 것이며 거듭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상태 죽음의 자리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변화되지 않는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상태로부터 전달된다.

 

David West of England also showed the importance of the Greek words huper and anti with respect to the doctrine of substitution. He comes to the same conclusion as W. E. Vine, that: “It is a blessed truth that ‘Christ Jesus … gave Himself a ransom for all’ (1Tim 2:5, 6); He died to open up the way to heaven for the ‘whosoever will.’” Christ’s death has provided a righteous basis upon which God may offer salvation to all. However, if we say that Christ bore the sins of all, we are overstepping the boundaries of Scripture. If Christ bore the sins of all in general, then for what will the lost be judged at the great white throne? Revelation 20:12 clearly teaches “the dead were judged out of those things which were written in the books, according to their works.” The apostles never preached to the unsaved that “Your sins have been borne by Christ.” However, Peter, writing to fellow believers could say, “Who His own self bare our sins in His own body on the tree” (1Peter 2:24). (See the chapter on substitution in the Glory of His Grace, published in 2006 by Assembly Testimony, Belfast, and downloadable from the Assembly Testimony website.)

 

영국의 데이비드 웨스트는 또한 대속의 교리와 관련하여 후페르안티  헬라어 단어의 중요성을 보였다. 그는 W. E. 바인처럼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축복된 진리인 것은 그리스도 예수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딤전 2:5,6); '누구든지 원하는 자를 위해 하늘의 길을 여시려고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하실 수 있는 의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들을 담당하셨다고 말을 하는 경우에 우리는 성경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으로 모든 죄들을 담당하셨다면 그 때 무엇을 위해 크고 흰 보좌에서 심판을 받고 잃어질 것인가? 20:12은 분명이 가르친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사도들은 구원받지 않은 자에게 당신의 죄들은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다고 결코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동료 신자들에게 기록하며 말할 수 있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벧전 2:24). (모임의 증거 의해 2006년에 출판된 그의 은혜의 영광 에서 대속에 대한 장을 보라.  벨파스트 그리고 웹사이트 모임의 증거에서 다운로드 할 수 있다.)

 

Lastly, we note the comments of Jim Baker of Scotland in this magazine (see “Great Gospel Themes – Atonement,” Truth and Tidings, Nov 2000). “A failure to distinguish between these two important Scriptural truths has resulted in doctrinal misunderstanding of the atoning work of Christ. As we have considered, ‘propitiation’ is the sacrificial work of Christ Godward. There is no limitation whatever here. There was sufficient atoning value in the sacrifice of Christ at Calvary to meet the need of all, and also to meet every effect of the fall. Thus we read, ‘And He is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 and not for ours only, but also for the sins of the whole world’” (1John 2:2). It is therefore quite unscriptural to teach a limited atonement. Substitution is the sacrificial work of Christ inward. In strict accuracy, only the believer can say “He took my place” (1Cor 15:3-4). Substitution is a truth for the saint to enjoy, and propitiation is a truth for the saint to declare to the sinner.

 

마지막으로, 우리는 본 잡지에서 스크틀랜드의 짐 베이커의 해설을 주목한다(위대한 복음의 주제속죄를 참조하라, http://onyang.tistory.com/2586). 이 두 가지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구분하는 것의 실패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교리적 오해를 가져왔다. 우리가 상고했듯이 속죄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이다. 여기에 무엇이든 아무 제한이 없다. 충분한 대속의 값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그리고 또한 타락의 모든 결과를 충족하기 위해 갈보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읽는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요일 2:2). 제한된 속죄를 가르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이지 않은 결과이다. 대속은 내부적인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역이다. 엄격히 정확하게는 신자들만이 말할 수 있다 그분께서 내 자리를 차지하셨다”(고전 15:3-4). 대속은 즐길 수 있는 성도들을 위한 진리이며, 속죄는 죄인에게 선포할 수 있는 성도를 위한 진리이다.

 

Conclusion

If Christ had not died for all, then all could not be saved, for the sacrificial work of Christ on the cross is the only means of salvation. Of course, His work only becomes effective for the unsaved when they believe. So we can happily make the bona fide statement to all unbelievers that Christ died on their behalf, (2Cor 5:14), and that they can be saved. At the same time we, as believers, can enjoy the truth that Christ died instead of us, as our substitute on the cross.

 

결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지 않으셨다면 그 때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으며,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은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다. 물론 그분의 사역만이 구원받지 않은 자들이 믿을 때 효과적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그리스도가 그들 대신에 죽으셨다고 모든 불신자들에게 진실한 진술을 유쾌하게 할 수 있으며(고후 5:14),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믿는 자들로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진리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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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rors of Calvinism(5): Irresistible Grace
칼빈주의의 오류(5): 불가항력의 은혜

하워드 A. 반즈

Calvinists claim that the Holy Spirit only works on the hearts of the elect and that His urgings cannot be refused, hence the term, “irresistible grace.” Once again, for them, divine sovereignty overrules human responsibility. However, our thesis is that they coexist, and here we shall show that certainly God (in the person of the Holy Spirit) must be at work for anyone to be saved, but at the same time, individuals are commanded to change their minds, i.e., repent.

 

칼뱅파는 그분의 촉구하심은 불가항력의 은혜라는 조건에 따라서 거절될 수 없다는 것과 택한 자의 마음에서만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한번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우리의 논제가 그들이 공존한다는 것과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령의 사람 안에서) 구원받으려는 누군가를 위해 역사하셔야만 했던 것을 보여야 하지만, 동시에 개인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명령되고 있다, 즉 회개하라.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salvation

The Lord Jesus promised His disciples in John 16:8 that the Holy Spirit would come to reprove the world of [i.e., about] sin,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e same world that “God so loved” (John 3:16), and the same world into which God sent His Son “that the world through Him might be saved” (John 3:17). So what does it mean that the Holy Spirit would reprove the world (not just the elect) about sin,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is point is so important that it is well worth spending some time considering the breadth of meaning of the word. The relevant Greek word is elegchos which literally means “to bring to light.” Among the possibilities offered for its English rendering are from Strong (Concordance with Hebrew and Greek Lexicon): “convict, convince, tell a fault, rebuke, reprove.” From J. N. Darby (New Translation): “to bring demonstration”; the English Revised Version “convict”;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1871): “convince” (note our English word convict comes from the Latin word “convincere” which literally means to convince), while other renderings include “to expose.”

 

구원에서 성령의 사역

주 예수님께서 요 16:8에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셨던동일한 세상( 3:16)과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신 동일한 세상으로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3:17). 그래서 성령께서 죄, 의와 심판에 대해서 (단지 택한 자가 아니라) 세상을 책망하실 의미는 무엇인가? 이 요점은 그것이 단어의 의미하는 폭을 고려하는 약간의 시간을 투자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관련된 헬라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빛으로 가져오는의 의미인 ejlevgcw(엘렌코오)이다. 그것의 영어 번역에 대해 제공된 가능성 중에는 스트롱 사전에 있다(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사전과 일치):  J.N 다비의 (새 번역)에서가책, 설득, 잘못을 말함, 훈계, 책망하다”: “증거를 가져올”; 영어 개정판  가책”; 로버트 제미슨, A.R. Fausset, 그리고 데이비드 브라운 ( 전체 성경에 비평과 해설의 주석, 1871): “가책”(우리의 영어 단어 책망은 라틴 단어 설득하다에서 온 것을 주목하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설득), 동시에 다른 번역은 드러내는 것을 포함한다.

 

Marvin Vincent (1834 – 1922) expanded the meaning to “will convict [the world] of ignorance of their real nature” (Word Studies on the New Testament, Eerdmans, Grand Rapids, 1946), whilst Fritz Rienecker (1897 – 1965) helpfully gave his expansion as “a rebuke that seeks to prove with demonstrative evidence” (A Linguistic Key to the Greek New Testament, Zondervan, Grand Rapids, 1980). Another has noted that “the word rendered ‘reprove’ in the AV [is] rather difficult to render satisfactorily in English, (so full of meaning is it),” but it contains “the conception of authoritative examination, unquestionable proof, decisive judgment.” Last we note that B. F. Westcott (1825 – 1901), former Regius Professorship of Divinity, Cambridge UK, wrote that: “It involves the conceptions of authoritative examination, of unquestionable proof, of decisive judgment, and of punitive power. He who ‘convicts’ another places the truth in a clear light before him, so that it must be seen and acknowledged as truth … He who then rejects … rejects it with his eyes open and at his peril,”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1, p. 228).

 

마빈 빈센트(1834-1922)그들의 실제 본성의 무지에 관해 (세상을) 책망할 것에 대한 의미를 확장했다(​​신약 단어 연구 , 에드맨스, 그랜드 래피즈, 1946), 동시에 프리츠 라이네커(1897-1965)논증할 수 있는 증거와 함께 증명하려고 추구하던 훈계로 그의 전개를 유용하게 제공했다(헬라어 신약성경에 대한 언어 핵심, 존더반, 그랜드 래피즈, 1980). 또 다르게 지적했던 것은 AV 에서 번역된 단어 '꾸짖다'를 영어로 만족할 만큼 번역하기가 다소 어렵다, (그러한 의미의 충분함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 결정적인 판단, 권위 있는 시험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B.F. 웨스트코트(1901-1825)가 이전에, 영국의 캠브리지 왕실의 신성한 교수직에서 쓴 것을 주목한다: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 결정적인 판단, 권위 있는 시험과 징벌의 능력의 개념을 포함한다. 그분은 그에게 앞서 명백한 빛 안에서 진리를 또 다른 위치에서 책망하시는 분이시며, 그래서 그것은 볼 수 있어야 하고 진리로 인정되어야 하며 그분께서 그 때 거절되셨고 자신의 사정을 잘 알면서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것을 거절한다”(St. 존에 따른 복음, 그랜드 래피즈, 미시간: 윌리엄 B. 에드먼즈 출판사, 1971, P. 228).

 

In summary we can say that “reprove” covers the idea of providing sufficient and convincing proof of the reality, truth, and seriousness of sin, righteousness, and judgment. Without such proof sinners cannot and will not repent, but once they have it, they are obliged to repent. The question then is, “Are those to whom the Holy Spirit speaks able to refuse His evidence?” Stephen told the Sanhedrin “Ye do always resist the Holy Ghost” (Acts 7:51). The verb “resist,” as explained by Vincent (Word Studies), is “a very strong expression implying active resistance.” Here then is one example of willful, strong resistance to the work of the Holy Spirit.

 

요약으로 우리는 꾸짖다가 만족함과 사실의 설득력 있는 증거, 그리고 죄의 심각성, 의와 심판을 제공하는 개념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죄인들이 그러한 증거 없이는 할 수 없으며 회개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은 회개할 의무를 지게 된다. 문제는 그 때 그분의 증거를 거절할 수 있는 성령께서 말하는 그것들인가?이다. 스데반은 산헤드린에서 말했다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7:51). 동사 반항하다는 빈센트(워드 연구)에 의해 설명하듯이  적극적인 반항을 의미하고 있는 매우 강한 표현이다. 여기에서 그 때 성령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인 강한 반항의 한 예이다.

 

When such sufficient evidence of the Holy Spirit is refused, surely this is blaspheming (evil speaking) against the Holy Spirit (Matt 12:31), and insulting Him (Heb 10:29). If this persists, the person involved will not be saved. Even in prediluvian days, we have God saying, “My Spirit shall not always strive [plead, JND] with man” (Gen 6:3). This implies that even in those wicked days the Holy Spirit was active in giving men the necessary evidence for them to repent, through the walk and witness of Enoch and Noah (1Peter 3:19; 2Peter 2:5–9; Jude 14).

 

성령의 이러한 충분한 증거가 거부될 때, 반드시 이는 그분을 모욕( 10:29)하고 성령에 대해( 12:31) 모독하는 (악마의 소리)이다. 만일 이것이 지속되면 상대방은 구원받지 않을 것이다. 대홍수 시대에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항변하다, JND) 아니하리니( 6:3). 이것은 심지어 그 악한 시대에 성령이 에녹과 노아의 걸음과 증거를 통해 그들에 대해 회개할 필요한 증거를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제시하셨던 그것들을 의미한다(벧전 3:19; 벧후 2:5-9, 14).

 

This work of the Holy Spirit means that those who hear the gospel have divine witness as to its truth, in writing in the Word of God, and in their conscience by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hus, although man generally is spiritually dead, hearers of the gospel are given sufficient evidence by the Holy Spirit to see the truth of these weighty matters. If we leave the Holy Spirit out of the equation, then we cannot find any solution to man’s responsibility exercised in the gospel; once we understand His work, we see possibilities that otherwise are absent.

 

이는 성령의 사역에 의한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함으로 복음을 듣는 자들은 그 진리에 대한 신성한 증거가 있게 하는 의미의 성령의 사역이다. 따라서 비록 일반적으로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지만, 복음을 듣는 자들은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의 진리를 보도록 성령의 충분한 증거가 제공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평형상태를 벗어나 성령을 떠난다면, 그 때 우리는 복음에서 행사되는 사람의 책임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일단 우리가 그분의 사역을 이해하면 우리는 가능성을 보며 그렇지 않다면 잃어진다.

 

The Gospel Call

The gospel call is “God’s authoritative invitation,” wrote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Pickering and Inglis, London, 1961). It is the same F. F. Bruce who wrote that C. H. Spurgeon, the greatest English Calvinist of the 19th century, is said to have prayed more than once, “Lord, hasten to bring in all Thine elect, and then elect some more.”(Answers to Questions, p. 198, Paternoster Press, Exeter, 1972). Along with the bona fide proclamation of the gospel for all, the Holy Spirit is active in hearers hearts, giving them all the proof they could ever ask for as to its truth. They are then responsible to repent (change their minds) and believe the gospel.

 

복음의 초청

복음의 초청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초대이다라고 F.F. 브루스는 기록했다(에베소서, 피커링과 잉글리스, 런던, 1961). F.F. 브루스도 동일하게 기록했던 것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국 칼뱅파 C.H. 스펄젼은 주님, 그 때에 좀 더 택하고 또 모든 당신의 택함에서 가져오도록 하소서라고 한 번 이상 기도했다고 말했다(질문에 대한 답변, P. 198, 주기도문 출판, 엑세터, 1972).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의 진실한 선포와 함께, 성령께서 그들이 이제까지 그 진리에 관해서 구할 수 있었다는 모든 증거를 그들에게 제공하여 듣는 자들의 마음에 활동한다. 그들은 그 때 회개 (자신들의 마음을 변화)와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

 

Of course, it is important when trying to understand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o bear in mind what the Lord Jesus told Nicodemus: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i.e., wants to] …. so is every 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That is to say, since in Hebrew the words “spirit” and “wind” are the same, the Holy Spirit works in salvation when and where He desires and chooses, and not as we expect or understand.

 

물론 그것은 주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마음으로 태어나기 위해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려고 할 때 중요하다: “바람이 마음대로(예를 들어, 원하다) 불매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한 3:8). 그것은 히브리어로 단어 바람이 동일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며, 성령은 그분께서 바라시고 선택하시는 구원의 때와 장소에서 일하시고, 우리가 기대하거나 이해하는 것에 따라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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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rors of Calvinism(6): Perseverance of Saints
칼빈주의의 오류(6): 성도의 인내

하워드 A. 반즈

If the statement in the title is only what it appears to say, i.e., “once saved always saved,” then we could have no argument with it, for according to the Scriptures, once a person is truly saved, then they can never be lost again. However, in many Calvinists’ minds it can mean the very opposite, so they say you can only be sure that you are saved if you persevere! But first, we need to be sure about eternal security.

 

만약 제목에서 그 말하는 것에 나타나는 것만이 표현되는 경우, 예를 들어 한 번 구원됨은 영원히 구원됨이다동시에 우리는 성경을 따름에 대해 그것에 대한 어떤 논쟁도 할 수 없었으며, 한 번 사람이 참으로 구원 받으면 그 후 그들은 결코 다시 잃어버릴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칼뱅파들의 마음에 그것은 바로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끈기 있게 노력하는 경우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영원한 안전함에 대해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The believer’s eternal security

The simplest and most striking statement about eternal security was made by the Lord Jesus Himself, Who said “My sheep hear My voice, and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And I give unto them eternal life; and they shall never perish, neither shall any man pluck them out of My hand. My Father, which gave them Me, is greater than all; and no man is able to pluck them out of My Father’s hand” (John 10:27-29). Then the promises of the Bible, in John’s writings for instance, about the connection between a believer’s faith in the Lord Jesus and the certainty and possession of eternal life, are obviously irreversible. “He that heareth My word, and believeth on Him that sent Me, hath everlasting life, and shall not come into condemnation; but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 (John 5:24); “He that believeth on Me hath everlasting life” (John 6:47); “He hath promised us ... eternal life” (1John 2:25); and “He that hath the Son hath life; and he that hath not the Son of God hath not life” (1John 5:12). See also John 3:16, 36. If the life spoken about is really everlasting, how can we ever be lost?

 

신자의 영원한 안전

영원한 안전에 대해 가장 단순하고 두드러진 표현을 말씀하셨던 주 예수님 자신에 의해 주어졌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느니라”( 10:27-29). 동시에 예를 들어 요한복음의 기록에서 성경의 약속은 주 예수님 안에 신자들의 믿음과 확신과 영원한 생명의 소유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는 분명히 돌이킬 수 없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5:24);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6:47);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라”(요일 2:25); 그리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또한 요 3:16,36을 참조하라. 만일 생명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실제로 영원한 경우, 우리가 어떻게 잃어버릴 수 있는가?

 

Look at the following selected statements made by Paul, Peter, and John about what God has already done for Christians: “sealed us” (2Cor 1:21-22); “quickened us” (Eph 2:5); “translated us into the kingdom” (Col 1:13); “appointed us … to obtain salvation” (1Thes 5:9); “called us unto His eternal glory” (1Peter 5:10); “given to us eternal life” (1John 5:11). If it is possible to be lost again after we are saved, then every one of these promises, and many more, would have to be taken away, annulled, or reversed – this is never anticipated and clearly impossible!

 

바울,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인을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해 선택되고 표현되는 다음에 관해 살펴보라: “우리에게 인치시고”(고후 1:21-22); “우리를 살리시고”( 2:5);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1:13);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느니라”(살전 5:9);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벧전 5:10);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요일 5:11).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다시 잃어버릴 수 있다면, 그 때 이들 약속과 더 많은 모든 사람은 소멸되거나 파기되고 없어지게 되어야 할 것이다. – 이것은 결코 기대할 수 없고 분명하게 불가능하다!

 

God’s part in eternal security is further emphasized in such statements as He is “able to keep you without stumbling, and to set you with exultation blameless before His glory” (Jude 24 ESV), and that believers are “kept by the power of God” (1Peter 1:5). Then we read that the Lord Jesus “is able also to save them to the uttermost that come unto God by Him, seeing He ever liveth to make intercession for them” (Heb 7:25), being “the author of eternal salvation unto all them that obey Him” (Heb 5:9). Notice also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Heb 9:12). So “once saved always saved!” Surely we are happy to say with Paul, “I know whom I have believed, and am persuaded that He is able to keep that which I have committed unto Him against [for] that day” (2Tim 1:12).

 

영원한 안전에 하나님의 역할은 그분께 있는 그대로 그러한 표현은 한층 더 강조되고 있다, “이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넘어지지 아니하게 하시고 넘치는 기쁨으로 자신의 영광이 있는 곳 앞에 흠 없이 너희를 제시하시는 분”( 24, ESV ), 그리고 신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벧전 1:5) 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는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심을 보건대 그분은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느니라”( 7:25)는 말씀을 읽으며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 5:9)가 되신다. 주목할 것은 또한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9:12). 따라서 한 번 구원됨은 영원한 구원됨이다!” 확실히 우리는 바울과 함께 말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알며 또 내가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딤후 1:12).

 

Antinomianism

There are those Calvinists who say that if believers are told that they can never be lost, then this allows them to lead careless lives. (The formal name for such a belief is antinomianism). When we consider the great things that God has done for believers, then “if any man be in Christ, he is a new creature: old things are passed away; behold, all things are become new. And all things are of God” (2Cor 5:17, 18). Positionally, this is immediately true upon conversion, but as we are obedient to God and His Word, this also becomes true practically. This progress might not be as continual as it should be, so that in the epistles believers have to be warned about stealing, lying, swearing, cheating, being immoral, etc. However, even carnal believers are still sons of God by faith in Jesus Christ (Gal 3:26).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is about a person who was always a son, regardless of what he has done (Luke 15:11–24). Even those who have to be excommunicated from assembly fellowship and are under disciple are never said to be lost: they too are still sons.

 

신앙 지상주의

신자들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 때 이것은 그들에게 부주의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는 칼뱅파 사람들이다. (: 그러한 신념의 정식 이름은 신앙지상주의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신자들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고려할 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또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으며”(고후 5:17,18). 위치적으로 이것은 변화에 즉각적인 사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실제적인 사실이 된다. 이 진행은 그것이 있어야 할 정도로 계속적으로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그래서 서신서에서 믿는 자들은 훔치고, 거짓말하고, 욕하고, 속이는 부도덕한 행위 등에 대해 경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육신적인 신자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의해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3:26). 탕자의 비유는 그가 했던 것에 상관없이 항상 아들이었다( 15:11-24). 심지어 모임 교제에서 출교된 자라도 제자 중에 있는 사람은 결코 잃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도 여전히 아들들이다.

 

Many Calvinists, because they are obsessed with the possibility of antinomianism, think that the “once saved always saved” doctrine is actually dangerous. The Charismatic Calvinist R. T. Kendall (author of Once saved, Always Saved, Moody Press, Chicago, 1983, and like Martyn Lloyd-Jones and G. Campbell Morgan minister at Westminster Chapel in London) is reported to have said that “nearly all … [17th century Calvinist teachers] went through great doubt and despair on their deathbeds as they realized their lives did not give perfect evidence that they were the elect.” Sadly, many Calvinists think the same today. They think that, effectively, at the end of the day, their salvation depends on their faithfulness. However, the Bible says that even, if we are unfaithful, He abides faithful (2Tim 2:13).

 

많은 칼뱅파는, 그들이 신앙지상주의의 가능성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 구원받음은 영원히 구원받음이다는 교리가 실제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카리스마적인 칼뱅파 R.T. 켄달(한 번 구원받음은 영원히 구원받음이다의 저자 무디 출판, 시카고, 1983, 그리고 마르틴 로이드 존스와 런던에 웨스트 민스터 예배당에서 G. 캠벨 모건 목사와 같은)거의 모든 … [17세기 칼뱅파의 교사들]은 그들의 삶이 자신들이 택했던 완벽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음을 그들이 깨달음으로 죽음의 자리에 관한 큰 의심과 절망 속에서 나아갔다고 말했던 것을 보고 받는다.  슬프게도, 많은 칼뱅파들은 오늘날도 같은 생각을 한다. 그들은 실제로 시절의 마지막에 자신들의 구원이 자신들의 충성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심지어 우리가 성실하지 못할지라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다는 것을 말한다(딤후 2:13).

 

Final thoughts

The only point left to consider arises from what we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article: “once a person is truly saved, then they can never be lost again.” Sadly we must realize that some people do make false professions of faith because of peer and parental pressure, as well as other reasons, so they were never truly saved at all and often later revoke their profession anyway. (This does not include those who are saved but have doubts about their salvation, for Satan is only too quick to try to rob us of our assurance (cp. Gen 3:1.) Therefore care must always be taken not to illicit false confessions of faith by human means, however well meant.

 

결정적인 생각

고려해야만 할 남은 요점은 우리가 본 문서의 시작 부분에 말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일단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으면, 그 후 그들은 결코 다시는 잃어버릴 수 없다.” 슬프게도 우리가 깨달아야만 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이유뿐만 아니라 또래와 부모의 압력 때문에 믿음을 거짓 고백함으로 인해서 그들은 진실로 결코 조금도 구원되지 않았고 종종 나중에 잘못된 고백을 철회한다. (이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의 구원에 관한 의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사탄은 단지 우리의 확신을 우리에게서 강탈하기에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비교. 3:1). 따라서 염려는 항상 아무리 의미 있게 잘 하더라도 인간의 수단으로 믿음의 거짓 고백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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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rrors of Calvinism(7): Concluding Remarks
칼빈주의의 오류(7): 결론

하워드 A. 반즈

As we have seen, we can be quite happy with some of the teachings of Calvinism, especially unconditional election and the preservation of saints - at least when properly defined! Equally, we have been clear in strongly disagreeing with other points, especially limited atonement. Of course, what we have said is not new, but it has been the generally agreed point of view in assemblies of the Lord’s people for nearly two centuries (see C.H. Mackintosh’s piece on one-sided theology at www. stempublishing.com and Sovereignty And Responsibility, by F. B. Hole at www.biblecentre.org). However, before we conclude this series, there are a few extra things to consider.

 

우리가 보았듯이, 우리는 특히 성도들에 관한 무조건적인 택함과 보호가 칼빈주의의 가르침 중 일부와 더불어 매우 행복 할 수 있다 - 적어도 제대로 정의할 때! 마찬가지로, 우리는 특히 제한된 속죄와 다른 요점이 가지는 강하게 일치하지 않음이 분명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가 말했던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거의 두 세기를 통해 주님의 백성들 모임들에서 일반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던 관점들이었다(www.stempublishing.com에서 C.H. 매킨토시의 일방적 신학 부분을, 그리고 www.biblecentre.org에서 F.B. 홀의 주권과 책임 참조하라). 그러나, 우리가 이 연재를 끝내기 전에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추가적인 것들이 있다.

 

Simple illustrations of the “Balanced View”

The two great Victorian preachers, D. L. Moody and C. H. Spurgeon had quite diverse views on Calvinism. Moody was very much an anti-Calvinist, while Spurgeon has been called “the greatest English Calvinist of the 19th century” (F. F. Bruce, Answers to Questions, Paternoster Press, Exeter, 1972). Given this dichotomy, it is quite remarkable that between them they have supplied us with the simple, but helpful illustrations we often hear quoted about the fact that divine sovereignty and human responsibility happily coexist. Moody used to illustrate the point by saying, “On a beautiful mansion, above the portico on the door are the words, ‘Whosoever will may come.’ You go inside because that is what it says. ‘Whosoever will come on in.’ You come inside. You turn around and you look. Above the door on the inside is, ‘Chosen in Him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Moody also used to say, “The elect are the whosoever wills and the non-elect are the whosoever won’ts!”)

 

균형 잡힌 관점의 단순한 그림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두 위대한 설교자, D.L. 무디와 C.H. 스펄젼은 칼빈주의에 매우 다양한 생각이 있었다. 무디는 매우 많이 반 칼뱅파였고, 동시에 스펄젼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국 칼뱅파로 불리게 되었다(F.F. 브루스, 질문에 대한 답변, 주기도문 출판 엑세터, 1972). 이 이분법을 제시했던 그것은 그들 사이에 매우 두드러진 것이며, 그들은 단순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응했지만 도움이 되는 그림으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행복하게 공존한다는 사실에 관한 인용을 듣는다. 무디는 요점을 말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아름다운 저택에서 문 현관 위 쪽에 말씀이 있으며, ‘원하는 자는 들어올 수 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 안으로 들어간다. ‘원하는 자는 들어오라당신은 안으로 들어간다. 당신을 둘러보며 살핀다. 내부의 문 위에 있다, ‘세상의 기초 이전에 그분에게서 선택되었다’”(무디는 또한 말하기 위해 사용된다, “택함은 원하는 자들이고 택하지 않음은 원하지 않는 자들이다!”)

 

In a sermon entitled “Sovereign Grace and Man’s Responsibility,” originally delivered on Sunday morning, August 1, 1858, at the Music Hall, Royal Surrey Gardens, London, Spurgeon preached “That God predestines, and that man is responsible, are two things that few can see. These two truths, I do not believe, can ever be welded into one upon any human anvil, but one they shall be in eternity: they are two lines that are so nearly parallel, that the mind that shall pursue them farthest, will never discover that they converge; but they do converge, and they will meet somewhere in eternity, close to the throne of God, whence all truth doth spring …You ask me to reconcile the two. I answer, they do not want any reconcilement; I never tried to reconcile them to myself, because I could never see a discrepancy … Both are true; no two truths can be inconsistent with each other; and what you have to do is to believe them both.”

 

은혜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제목을 붙인 설교가 1858년 8월 1 일요일 아침에 런던, 왕실 서리 정원, 음악 홀에서 최초에 배달되었다, 스펄젼은 설교했다, 사람이 책임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은 대부분 볼 수 있는 두 가지이다. 이들 두 진리는 내가 믿지 않는 것은 어떤 인간의 모루에서도 언제나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지만 하나는 그들이 영원하여야 한다: 그것들은 그렇게 거의 평행하는 두 선이며, 마음은 가장 멀리까지 그것들을 따라가야 한다,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한 점에 모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다가선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영원의 어딘가에서 만날 것이다, 모든 진리가 솟아 오르는 어딘가에서 당신은 둘을 일치하도록 나에게 요청한다. 내가 대답한다, 그들은 어떤 화목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나 자신에게 그들을 일치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불일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둘은 참되다; 어떤 두 가지 진실도 서로와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그것들 둘을 믿는 것이다.”

 

Is faith a gift from God?

Calvinists insist that faith is a gift from God and is not part of man’s responsibility. At first sight two verses seem to support this view. First, “For 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Not of works, lest any man should boast (Eph 2: 8, 9). Experts in New Testament Greek, including Dean Alford, F. F. Bruce, A. T. Robertson, W. E. Vine, C. I. Scofield, Kenneth S. Wuest, Marvin R. Vincent, and many others, tell us the construction of the Greek in Ephesians 2:8-10 makes it impossible for faith to be the gift spoken of: so the phrase “it is the gift of God,” refers to the whole subject being dealt with, i.e., 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 and not to faith. Secondly, Peter wrote, “to them that have obtained like precious faith with us” (2Peter 1:1). Once again it looks as if faith is a gift. However, William Kelly in his commentary on this epistle (Stempublishing.com) explains that faith here refers “to what is believed,” i.e., faith seen objectively and not subjectively. So the command is, “Believe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thou shalt be saved” (Acts 16:31).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가?

칼뱅파들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책임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첫눈에 두 구절이 이 관점을 지원하는 것 같이 보인다. 첫째,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8,9). 신약 헬라어 전문가를 포함 딘 알포드, F.F. 브루스, A.T. 로버슨, W.E.바인, C.I. 스코필드, 케네스 S. 웨스트, 마빈 R. 빈센트,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해진 선물이 되는 그것이 믿음에 대해 불가능하다는 그것을 엡 2:8-10에 헬라어의 구조를 말한다: 그래서 구절은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다뤄지는 전체의 주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구원이며, 믿음으로가 아니다. 둘째, 베드로가 기록했다, “우리와 더불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얻은 자들에게”(벧후 1:1). 다시 한번 그 믿음이 선물인 경우처럼 보인다. 그러나 윌리엄 켈리는 이 서신에 대해(Stempublishing.com) 자신의 논평에서 여기에 믿음을 참조하여 믿어진 것에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즉 객관적으로 보인 믿음이고 주관적이 아니다. 그래서 명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당신이 구원받을 것이다”( 16:31).

 

Conclusion

We can conclude by once again quoting the words of William Kelly. In his commentary on the prophet Hosea he wrote: “The tendency of all men is to become what people call either Arminians or Calvinists; and a hard thing it is to hold the balance of truth without wavering to either side. There is nothing, however, too hard for the Lord; and the Word of God is the unfailing preservative from either one or the other. I am perfectly persuaded … that neither Arminianism nor Calvinism is in the Bible, and that they are both thoroughly wrong without even the smallest justification. The fact is, that the tendency to either is deeply seated in unrenewed minds. That is, the same man may be an Arminian at one time and a Calvinist at another and it is likely that, if he has been a violent Arminian one day, he may become a violent Calvinist tomorrow. But the roots of both lie in man and in his one-sidedness. The truth of God is in His word as the revelation of Christ by the Spirit, and nowhere else.”

 

결론

우리는 다시 한번 윌리엄 켈리의 말을 인용하여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호세아 선지자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기록했다: “모든 사람들의 경향이 알미니안파 또는 칼뱅파 중 하나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양쪽으로 흔들거림이 없이 진실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주님을 위한 지나친 열심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또는 또 다른 하나의 끊임없는 방부제이다. 나는 매우 설득당한다 알미니안주의나 칼빈주의가 성경에 있는지, 그들은 심지어 조그마한 정당화도 없이 철저하게 양쪽 모두 잘못되었다. 사실은 그 중 하나에 대한 경향이 깊이 갱신되지 않는 마음에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즉 같은 사람이 한 때는 알미니안 다른데서는 칼뱅파가 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은 만약 그가 오늘은 과격한 알미니안이 된 경우 내일은 그가 과격한 칼뱅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과 자신의 편벽 모두에서 거짓의 기원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어디에서라도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계시로 그분의 말씀에 있다.”

 

Calvinism and Arminianism are both wrong because they put reason above revelation. Let us stand neither with the Calvinists and rob man of his responsibility, nor with the Arminians and rob God of His sovereignty.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그들은 계시의 위에다 이유를 놓음으로써 둘 다 잘못이다. 우리도 칼뱅파처럼 자신의 책임을 사람에게서 강탈하는 사람, 또한 알미니안파처럼 하나님 그분의 주권을 강탈하는 어느 쪽도 고집하지 말자.

 

We can do no better in concluding this series to quote the wise words of C. F. Hogg: “It is no small comfort to know that … the electing grace of God leads to Christ. The will of man submitted to God also leads to Christ. Some day …we will see how these two factors in the life of man meet in Christ … meanwhile, the secret of peace and effective service is to trust implicitly in, and unhesitatingly preach, the wisdom and truth of the God Who is love.” (What Saith the Scripture? Pickering and Inglis, London, 1947).

 

우리는 C.F. 호그의 현명한 말을 인용하므로 이 연재의 결론으로 더할 나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알고 있는 작은 편안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택함은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한다. 하나님께 복종된 사람의 의지는 또한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한다. 언젠가 우리는 사람의 삶에서 어떻게 이 두 요소가 그리스도안에서 만나는지를 볼 것이다 그와 동시에, 화평과 효과적인 섬김의 비결은 주저하지 않고 슬기롭게 전도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진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어떻게 성경을 말했는가? 피커링과 잉글리스, 런던, 1947).

 

http://www.truthandtiding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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