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16) 예수께서 제2표적과 제3표적을 행하신 이유과 그 영적인 의미(요4:43~5:18)_2022-10-19(수)

by 갈렙 posted Oct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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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jmcWkoGiMRE
날짜 2022-10-19
본문말씀 요한복음 4:43~5:18(신약 149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요한복음강해,제2표적, 왕의신하의아들치유,38년된중풍병자치유,말씀신앙,표적주의신앙,말씀,생명,왕,아들,안식일의주인,광야38년,표적과기사,믿음과순종

2022-10-1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6) 예수께서 제2표적과 제3표적을 행하신 이유과 그 영적인 의미(요4:43~5:18)_2022-10-19(수)

https://youtu.be/jmcWkoGiMRE   [혹은 https://tv.naver.com/v/30429688 ]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하셨다(요2:23, 20:30). 그중에서 성경에 기록된 채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어떤 기적들은 아예 '표적'이라고 표기되어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기적들 중에서 왜 어떤 것은 표적이라고 말해지며 또한 그것이 성경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요한복음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요1~12장)이자, '영광의 책'(요13~21장)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12장까지 7가지 표적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이 표적들 중에서도 꼭 알아야 할 표적들을 7가지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가리켜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과 5장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표적을 행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4장의 표적은 우리도 잘 알다시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살린) 사건'이요(요4:43~52), 요한복음 5장의 표적은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이다(요5:1~18).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쳤던 이러한 기적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기록한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한 어떤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2번째와 3번째 표적을 살펴보면서, 왜 예수께서 이러한 표적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그 표적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2.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 가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들러 희어진 곡식을 추수하신다. 그리고 이틀 후에 갈릴리로 가신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던 갈릴리 사람들은 이제 갈릴리에서도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한다. 그때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 가셨다. 그곳은 이전에 예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장소였다. 그런데 그곳에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헤롯 안디바(재위 B.C.4~A.D.39)의 친족인 것 같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왕의 신하'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바실리코스'라고 나온다. 이는 그가 '왕에게 속한 자'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왕족이었든지 왕의 신하이었든지 상관없이 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왕의 신하(왕족)는 그 아들의 병을 고쳐보기 위해서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무려 34Km나 되는 거리를 달려온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계속해서 요청하였다.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말이다(요4:47). 그러자 주님께서는 거기에 모여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만일 너희는 표적들과 기사들을 보지 못한다면, 너희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표적주의 신앙을 나무라듯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환영하던 무리들 역시 예루살렘에서부터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였다. 

 

3. 무엇이 과연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왜 표적을 보고 찾아온 무리들을 향해 나무라듯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표적주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표적을 본 자들은 표적 때문에 주님을 신뢰하기도 하지만 표적이 사라지면 주님을 버리는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표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하지만 예수께서 힘없이 붙잡혀 가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신앙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도 믿는 신앙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롬10:17). 그런데 이때 당시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도 역시 표적주의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왔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는 신앙을 바꾸기 시작한다. 표적주의 신앙에서 말씀신앙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순간, 말씀만으로도 자신의 아들이 나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왕의 신하는 다시 한 번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자신의 어린 자식을 고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주님께서 딱 두 마디 말씀을 하셨다. "가고 있어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요4:50)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때 왕의 신하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예수님에게 이렇게 불평을 했을 것이다. "고쳐 주시려면 와서 고쳐 주실 일이지, 그렇게 말만 휙 던져버리면 그것으로 아이가 고쳐지기라도 하는 것입니까?"하고 말이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믿었다. 그리고 진짜 가버나움으로 가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다가 자기 집에서 오는 종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종들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집을 떠나올 때만 해도 아이는 막 죽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아난 것이다. 언제냐고 물으니 전날 일곱 시쯤에 열병이 떠나갔다고 했다. 계산해 보니 그 시각은 주님께서 그 아이가 살아 있다고 하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그러자 왕의 신하와 그의 집안 식구들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된다. 

 

4.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낸 것을 왜 표적이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단지 죽어 가던 아이를 살려 놓은 사건을 두고 왜 사도 요한은 그것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말하였던 것인가? 여기서 '표적'이라는 말은 기적은 기적인데 어떤 영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기적을 가리킨다. 특히 그 사건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사건일 때 그 기적을 '표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 가던 아이를 살린 이 기적을 두고 왜 사도 요한은 표적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이 사건은 예수께서 '말씀'으로서 사망을 향하고 있는 아이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요1:1~3),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1:4).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예수님이야말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생명을 주시는 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이 사건은 예수님만이 진정한 왕이신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왕의 신하는 왕족으로서 자기의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돈도 있었을 것이고 권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헤롯 안디바왕이 자기의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도 고칠 수 없었고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것을 예수께서 오셔서 해결해 주심으로서, 예수님만이 인생들의 진정한 왕이신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사실 나다나엘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별 볼 일 없는 분으로 알았다가 그분이 누군지를 깨닫고는 즉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했었다(요1:49). 셋째,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아버지가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낸다는 것인데, 이것은 장차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어 가는 아들 예수님을 살려내는 예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죽어 가는 자신의 아들을 가리켜, '아들(휘오스)'이라고도 했다가, '어린아이(파이디온)'라고도 말했다. 특히 예수님을 만나서 말할 때에는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다. 아이는 약하기 때문에 더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네 어린아이가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아들은 아버지보다 모자라는 유약한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와 동등하시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한 분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행하신 세 번째 표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의 공생애의 2년 차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명절을 지키기 위함도 있으셨겠지만 거기서 하실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양의 문 앞에 위치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치시려 그곳에 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연못가에는 다양한 종류의 병든 자들이 있었다. 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 그리고 혈기 마른 사람 등 다양한 종류의 환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게서는 그중에 38년된 중풍병자를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 그때 그는 자신은 도무지 병고침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왜냐하면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면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낫게 된다는 말이 있어서 병든 자들이 몰려 있는데, 자기는 자기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도 없고, 또한 자기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고 있어라. 그리고 네 침상을 들어올려라. 그리고 걸어가고 있어라."(요5:8).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병은 치료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침상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맨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세 번째 행하신 표적은 38년이나 되어서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일어나서 걷게 했다는 것이다. 

 

6. 왜 예수께서는 그 많은 병든 자들 중에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셨던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실 땅에 떨어질 그러한 말씀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필요한 말씀이었으며 그 말씀은 다 진리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께서 스스로 하시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할 말을 일러 준 것이며(요12:49~50), 아버지에게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그대로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들은 그대로 하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요8:26,28,38). 고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분을 이 땅에 보내셨던 아버지의 말씀이었다(요14:24). 또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셔서 그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요14:10). 그러므로 그분의 행동 하나에도, 그분의 말씀 한 구절에서도 우리가 빼내야 할 말씀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며(요10:30), 예수님은 아버지의 또 다른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누군가를 찾아간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가신 것이고, 예수께서 누군가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명절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서 38년이나 되었던 중풍병자를 찾아가신 것은 의도적인 방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38년된 중증환자를 찾아가신 것일까? 그것은 죄로 인하여 38년이나 징계를 받고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방문하신 곳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이었고,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곳은 베데스다 곧 '긍휼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38년된 병자를 찾아가신 것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광야에서 38년간을 고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중풍병자가 38년간을 그 병으로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그를 징계로부터 거두어 내어 안식을 주시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그러니까 지은 죄로 인하여 움직일 수도 없고 걸어 다닐 수 없는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 내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곳에 가신 것이다. 이제 38년간의 징계를 끝내시고 이스라엘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 그 사람에게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치신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7. 38년된 중풍병자는 어떻게 안식을 얻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38년된 중풍병자는 어떻게 안식을 얻게 되었는가? 그것은 첫째, 전적으로 그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이다. 왜나하면 중풍병자는 절대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고 걸어갈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일부러 그러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의 병을 낫게 하신 것이다. 둘째,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순종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3가지를 명령했다. "일어나고 있어라(에게이로). 너의 침상을 들어올려라(아이로). 걸어가고 있어라(페리파테오)" 첫 번째와 세 번째의 동사는 '현재 명령형'이고, 가운데 동사는 '과거 명령형'이다. 현재 명령형은 계속해서 그것을 하라는 명령이고, 과거 명령형은 단번에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그때 중풍병자는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았다. 만약 보통 사람 같았으면, "아, 이 사람아, 당신 말대로 내가 일어설 수 있고 자리를 들 수 있으며 또한 걸어갈 수 있었다면, 내가 왜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겠는가? 이 사람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 보는 청년 같은 예수님에게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본다. 왜냐하면 이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과연 누구에게 광야에 엎드려지게 했느냐고 말이다(히3:17). 그것은 범죄한 자들이라고 했다(히3:17). 그래서 누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느냐고 질문하면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이었다고 했다(히3:18~19). 그러므로 그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을 배척했으며,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정죄했고 죽이는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40년이라는 회개의 기간을 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A.D.70년 디도장군에 의해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을 고하게 된다. 

 

8. 예수께서는 왜 안식일에 그 중풍병자를 고치셨는가?

  예수께서는 인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도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택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요5:9).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르셨을까? 아니다. 예수께서는 일부러 안식일을 택하여 그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이다. 그것은 유대 율법주의요 형식주의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유대인들은 그 병자에게 물었다. 누가 자신의 병을 고쳐 주셨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가 말하려 했을 때에는 이미 예수께서 피하고 없으셔서 누구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후 예수께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더 이상)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고쳐 주신 이는 예수님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 말을 듣자마다 유대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안식일의 본 정신을 바로 세워준 것이다. 왜냐하면 38년 동안이나 질병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이야말로 그에게 참된 안식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들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지만 그날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질병과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고 그분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역시 아버지의 또 다른 체현이신 아들 예수께서도 동일하게 아버지처럼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제정하신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을 허물어뜨리는 장본인이라고 판단했고, 더욱이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함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여기는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엄격한 구약의 율법시대일지라도 안식일에도 제사드리는 제사장들은 안식일법에서 예외였으며, 비록 그날이 안식일일지라도 소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그들도 빠진 동물들을 건져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말라는 율법 말씀도 없었다. 다만 그날에 일하지 말라는 것을 과대 해석함으로 물건(침상)을 운반하는 것을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서 안식일법에 저촉되지도 아니할 뿐더러, 참된 안식을 제공해 주고 있는 분이시기에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신 것이다. 

 

9. 나오며

  요한복음은 예수가 누구신가가 사실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래서 그분을 앎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작정하고 쓴 복음서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이나 표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몇몇 표적만을 선별하여 요한복음에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기록된 사건은 정말로 중요한 사건들이 아닐 수 없다. 그 사건들과 표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께서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밝혀 주는 단서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행하셨던 제2표적과 제3표적 역시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는 사건들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2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이야말로 말씀이 육신을 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곧 살리는 분 곧 생명 수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이 모든 인류의 왕이시자,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제3표적을 통하여, 그분은 구약의 여호와로서, 죄로 말미암아 38년 동안 광야에서 고통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제공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안식일의 제정자이자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제2표적이나 제3표적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기 위해 세팅되어 있었던 현장이었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우리는 과거 예수께서 행하셨던 제1표적(요2:1~12)에서도 왜 그날이 여섯째 날이었으며, 또한 왜 그 장소에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 역시 여섯째 날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후 결혼시켰던 날로서, 장차 신부를 취하러 오실 신랑되신 예수님의 결혼 잔치의 예표인 것을 함께 살펴보았다. 그렇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려 하는데, 어찌 미리 세팅된 채 없이 그 일을 하셨겠는가?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행하시는 일이요 그분이 하신 말씀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 하나님'(요20:28)으로 고백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저술 목적인 것이다. 

 

 

2022년 10월 1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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