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139) 창세기는 왜 에서의 족보를 한 장이나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는가?(창36:1~43)_2023-07-12(수)

by 갈렙 posted Jul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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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xgAvQJ4Oasg
날짜 2023-07-12
본문말씀 창세기 39:1~43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3-07-12(수) 온라인수요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139) 창세기는 왜 에서의 족보를 한 장이나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는가?(창36:1~4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xgAvQJ4Oasg

 

에서는 과연 저주받은 인물이요, 버림받은 사람의 대명사인가?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렇게 에서를 생각해왔다. 그러나 창세기 36장은 에서가 그러한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 에서는 어떤 인물로 살다갔는가? 그가 받은 부스러기의 은혜는 대체 어떻게 그에게 주어진 것인가? 오늘 다시 에서를 성경에 기록된대로 들여다보자. 그리고 우리의 일생 가운데 나에게 복을 받게 해주는 또 하나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1. 들어가며

  한 번 각인된 생각은 좀처럼 바꾸기가 어려운 것일까? '에서'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는 버림받은 자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말1:2~3의 말씀 곧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는 말씀을 곡해하여, 야곱은 선택받아 구원받은 자의  예표가 되었고, 에서는 버림받아 구원받지 못한 자의 예표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야곱의 구원과 에서의 멸망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없다. 그래서 오늘은 에서에 대하여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정확한 말씀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언약계승자의 명단에서 떨어져나간 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족보를 창세기 기자가 무려 한 장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불신앙자요, 버림받은 자요,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에서가 진정 어또한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봄으로서, 사람이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이 끝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재생의 놀라운 회복의 시회가 주어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에서는 정말 믿음이 없는, 불신앙의 사람이었는가?

  보통 신앙인이라면 에서는 불신앙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은 선택받았고 에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서가 버림받았던 영역은 언약계승자로서의 자격이었을 뿐, 다른 그 어떤 것에서도 그가 버림받았다가 되었다는 말씀은 없다. 고로 우리는 창세기를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한다. 좋지 않은 시각으로 계속 에서를 들여다보니, 에서가 나쁘게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은 에서를 두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에서를 통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공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기자가 에서의 족보이야기를 무려 한 장이나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에서는 상당히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삭이 60세에 태어났다. 그리고 40세에 결혼했다. 그런데 그가 결혼했던 아내는 가나안인 중에서 헷사람이 2명이었고, 이스마엘의 딸들 중의 1명이 있었다. 고로 그의 아내는 총 3명이다. 에서는 3명의 아내들을 얻어서 5명의 아들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가 낳은 5명의 아들들을 보면, 에서가 상당히 신앙적인 인물이었음을 직감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에서의 첫째 아들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아다가 낳은 것으로서, 그의 이름이 '엘리바스'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엘리바스'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힘'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기 아들의 힘이 될 것임을 고백하면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부인인 오홀리바마를 통해 태어난 둘째 아들의 이름 역시 '르우엘'이라는 이름으로서, 그  뜻이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서가 자신의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둘째 아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의 친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여 붙여준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에서는 상당히 신앙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지은 아들들과 손자들의 이름 속에서 계속해서 그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번째 부인이었던 바스맛(마할랏)의 아들들의 이름은 또 어떻게 지었을까? 그들은 세 명의 아들들로서 '여우스와 '알람'과 '고라'가 그들의 이름이다. 이때 오홀리바마로부터 태어난 장자 '여우스'라는 이름은 '수집가'라는 뜻이고, 오홀리바마로부터 태어난 셋째 아들의 이름은 '고라'였다. 이는 '대머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차자 '얄람'은 '하나님이 숨기는 자' 즉 하나님께서 숨겨두고 싶은 사랑스런 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시대에는 부모나 조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사건 이후로 각자가 자기의 후손을 위해 이름을 짓도록 허락하셨다.

  에서가 사실 상당히 믿음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이유를 좀 더 살펴보자. 둘째로,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동생 야곱과 함께 아버지를 막벨라 굴에 조심스럽게 장사하였기 때문이다(창34:28~219). 그에게 아버지는 사실 원망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철석같이 아버지를 믿고 따랐는데, 아버지가 장자의 축복을 그만 동생에게 주고 말았고, 자신에게는 척박한 땅에서 살게 될 것과 칼을 믿고 살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동생을 섬기고 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에서가 브니엘에서 야곱과 진정 화해를 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죽은 아버지를 장사하는데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하고 화해를 했던 에서인터라, 기꺼이 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는 그가 아버지를 용서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부친 사후에 에서와 야곱은 둘이 다 가나안 땅에서 함께 살았지만, 서로의 목자들이 다투게 되자, 에서가 스스로 가나안 땅을 동생 야곱에게 물려주고 세일산으로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형제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펴본 후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살아야 할 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기꺼이 그 자리를 떠나가게 된다. 그가 통 큰 양보심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3. 에서는 언제 어떻게 달라진 것인가?

  에서는 들사람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붉었고 전신에 털옷을 입은 것 같이 털이 많았다(창25:25). 그래서 그는 들사람이 되어서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다(창25:27). 그는 또한 활을 잘 쏘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야생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쌍둥이였던 동생 야곱은 달랐다. 야곱은 착실한 사람이어서 늘 장막에 거주했다(창25:27). 그러면서 약 15년동안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에 대해 들었고, 어머니 리브가로부터도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 하지만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세상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야곱은 늘 형의 장자권에 탐을 냈다. 자신의 나이가 약 16살 정도 되었을 때에, 그는 사냥하고 돌아오는 배고픈 형 에서에게 팥죽을 팔아 장자권과 맞바꾸었다(창25:33). 에서는 그것이 장차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자신이 받으면 될 것이라고 가볍게 여겼다. 하지만 그 뒤 50년이 흘러갔고, 에서와 야곱의 나이가 76세가 되었을 때에,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동생이 장자의 축복마저 가로채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에서는 울부짖었다. 17살 즈음에 장자의 명분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장자의 복마저도 빼앗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동생을 죽여버리겠다고 벼렸다.

  그러자 어머니 리브가가 하루 아침에 어찌 자식을 둘 다 잃겠느냐고 하면서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켰다. 겉으로는 거기에서 신부감을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야곱은 떠나갔고 다시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야곱은 거기에서 4명의 부인들과 12명의 자식을 얻었다. 그리고 거부가 되어 돌아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형에게 사죄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기별을 했다. 그런데 아뿔사, 형이 그만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모든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께 아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홀로 남아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린다. 그리하여 얍복강에서의 철야기도가 시작되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이어진 그의 기도는 결국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치고 축복하고 떠남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형을 마중나갔다. 하지만 그가 인간적으로도 형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550마리의 가축을 형에게 예물로 보냈다. 그리고 철저히 낮아져서 형을 맞이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자신의 몸을 땅에 대었고, 일곱 번 절을 하면서 형으로부터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 사실 형 에서는 밤사이 하나님의 군대인 천사의 무리를 만났다. 그때 천사들이 에서로부터 악한 영들을 제거해 주었을 것이다. 그 때 혈기와 분노의 영들 그리고 살인의 영들이 떠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형 에서는 동생이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형으로서 동생을 죽이겠다고 벼뤄온 20년의 세월이 있었지만, 형에게서 용서를 받기 위해 처절히 자신을 낮추는 동생을 보면서, 형 에서는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형 에서는 동생을 용서해주기로 마음먹는다. 통 큰 결정이라고 아니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결정이 하나님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살펴 보겠지만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에서에게도 놀라운 축복을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에서가 달라지게 되었고 에서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축복을 받게 되는 데에는, 동생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준 데에 기인하는 것임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죄를 지었는데도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할 경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셨다(마18:21~22). 에서는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4. 달라진 에서가 뒤에 가서 비로소 받은 축복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철천지 원수와 같은 동생의 사과를 받아준 에서는 어떤 축복을 받게 되었을까? 우리는 보통 야곱이 받은 축복에 대해서는 참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에서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어찌 어찌하다가 교리를 먼저 접하다보니, 에서는 버림받은 자의 대명사라는 생각만 굳어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생의 사과를 받아주었던 에서는 그 뒤 하나님으로부터 적어도 2~3가지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된다.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복이 임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첫째, 먼저 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는 자손에 관한 축복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14명의 족장들을 거느린 족장의 우두머리가 되었기 때문이다(창36:15~19). 놀랍게도 창세기는 에서가 받은 복을 창세기에서 무려 한 장이나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음을 본다. 창세기 36장은 43절이나 되는데, 온통 에서의 이야기요, 에서가 받은 축복을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만 그런 줄 알았더니 역대상을 살펴보더라도, 역시 에서의 족보(대상1:34~42)와 에서의 후손들의 왕의 계보(대상1:43~51a) 그리고 에서의 족장들(대상1:51b~54)을 똑같이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그렇다. 무엇보다도 그는 척박한  에돔 땅에 살게 되었지만, 에서는 거기에서 하나의 거대한 민족을 이룬 것이다. 적어도 그는 아주 강한 민족을 이루었던 것이다. 

  둘째, 에서는 기업의 축복도 받았다. 그 때 에서가 가나안 땅을 떠나 찾아간 곳은 가나안 땅의 남동부에 위치한 세일산 근처였다. 세일산 근처의 땅은 당시 호리족이 거주하고 있었다(창36:20). 그 때 호리족의 족장이었던 '세일'은 7명의 아들들을 두고 있었고, 그 아들 중에서 넷째 아들이 '아나'인데, 아나에게는 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그 딸의 이름이 바로 '오홀리바마'인데, 이 여인이 에서의 둘째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호리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어진다. 에서가 들어가서 에서가 낳은 자식들에 의해 호리 족속이 에돔 족속에게 흡수 통합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에서가 세일산을 땅의 기업으로 받았다는 사실은 훗날 500년 뒤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으로 그 증거가 드러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아라비아의 미디안 광야를 출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에, 필연적으로 에서의 땅 한 복판을 지나가야 했다. 그것은 '왕의 대로'라고 불리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때 에돔 족속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에돔족속의 말을 들어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 2:4-5)" 그렇다. 세일산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에돔 족속에게 준 것이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에돔 족속의 땅을 우회하여 이동해야 했다. 그렇다. 가나안 땅을 기꺼이 동생에게 내어주고, 세일산으로 이동했던 에서를 하나님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서가 당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받아들이고 가나안 땅을 기꺼이 양보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그가 택한 세일산을 기꺼이 그와 그의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셨던 것이다.

  셋째, 에서의 후손 가운데에는 욥과 욥의 친구들 같은 믿음 좋은 사람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욥은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언약 계승자의 핏줄에 서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동방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방의 우스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땅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이 바로 에서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그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도 역시 에돔 족속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나온다(욥2:11). 그런데 엘리바스는 에서의 장남의 이름과 똑같다. 그리고 데만은 또한 엘리바스의 장남의 이름이다. 욥기서에 나오는 엘리바스가 에서의 장남인지를 모르겠지만 적어도 관련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욥과 엘리바스가 대단히 믿음 좋은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욥기서를 보면 구구절절이 그 증거가 나온다. 그리고 당시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의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에서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신앙적인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 에서의 후손들 중에는 믿음좋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에서를 저주의 대명사, 버림받은 자의 대명사로 쓴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5. 창세기 36장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창세기 36장이 가르쳐주는 영적인 의미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창세기 36장은 에서가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 36장은 에서를 버림받은 자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에서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거대한 민족을 이루었고 심지어 왕들이 다스리는 국가적 형태를 가장 먼저 띠었다고 증거해주고 있다(창36:31~43). 그렇다. 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아주 강한 민족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이다. 척박한 땅에 살았어도 살아남았고, 무엇보다도 호리 족속에게 들어가 호리 족속을 흡수 통합하여 그 땅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세일산을 하나님의 주시는 기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에서의 아들들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 중에 신앙적인 인물이 나오게 했다. 그렇다. 에서는 저주받은 인물도 아니었고, 또한 버림받은 인물도 아니었다. 다만 언약의 계승자가 되지 못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서 영영 떨어져 나간 사람은 아니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민족 외에, 하나님께서 어떤 땅을 가리켜, 그 족속의 땅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에서는 달랐다.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만큼은 세일산을 그의 기업으로 주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을 만한 어떤 근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가 동생을 용서해주었고, 동생을 언약의 계승자로 인정해준 것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부스러기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 족속은 비록 정통의 신앙노선을 걸어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돔 족속이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우상)을 섬기지도 아니하였다. 설령 그의 후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민족의 신들을 동시에 섬기기는 했지만, 에서 시대 만큼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던 것이다. 

 

6. 나오며

  사람이 한 번 가진 선입관을 떨쳐버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교리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버려야 한다. 에서에 대한 선입견이 바로 그러한 예들 중에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그동안 에서를 너무나 평가절하해 왔다. 그는 버림받은 자요 구원에서 제외된 자라고만 생각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을 살펴보니, 전혀 복받은 신앙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의외로 신앙적인 인물이었으며, 평생 하나님을 잘 섬기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용서할 수 없는 동생을 용서해주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약속의 땅을 기꺼이 동생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척박한 땅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땅을 개척하여 결국 자신의 후손의 기업의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세일산"이라고 하면, 일곱 명의 아들들을 둔 호리 족속의 족장 "세일"이 떠오르지 않고 에서가 떠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에서가 그 땅의 온전한 지배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진실한 사과를 한 것도 중요하지만, 진심어린 사과를 수용하여 용서해주었던 에서도 역시 복된 자라는 것을 창세기 36장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에서가 비록 정통노선에 서 있어서 정 중앙의 은혜를 받지는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에세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도 복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023년 07월 12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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