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30)] 다락방강화(2)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에 대한 약속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요14:16~31)_2023-09-13(수)

by 갈렙 posted Sep 1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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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JqfqzCq_X_k
날짜 2023-09-13
본문말씀 요한복음 14ㅣ16~31(신약 172면)
설교자 정보배목사
주제어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의역할, 계명, 평안(에이레네), 이 세상 임금(통치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2023-09-13(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0)] 다락방강화(2)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에 대한 약속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요14:16~3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JqfqzCq_X_k [또는 https://tv.naver.com/v/40877110]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좀 특이한 책이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갈릴리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요한복음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의 인성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배치도 좀 특이하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총분량 중 절반 곧 전반부(1~12장)가 예수님의 3년반 동안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 데에 비해, 요한복음의 절반 곧 후반부(13~21장)는 단 며칠 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요한복음 13~17장까지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에 일어난 일들과 말씀의 기록이다. 그리고 18~19장은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죽음이 기록된 하루 동안의 기록이다. 그래서인지 13~19장까지는 요한복음 총 분량의 1/3이나 차지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13~16장까지는 예수께서 마가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 이 부분을 사람들은 보통 '다락방강화'라고 부른다. 그럼 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루 전날 밤 들려주신 말씀을 4장이나 걸쳐서 기록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 기록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중간 부분부터 마지막 절까지 살펴보게 될 것인데, 이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성령에 관한 약속(16~20,26절)을 말씀하고 있고, 새 계명('엔톨레')과 사랑('아가페')에 대한 교훈(21~25절), 그리고 평안('에이레네')에 관한 메시지와 이 세상 임금('아르콘')(27~31절)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2.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에 관해 약속을 다락방 강화의 핵심 주제로 말씀하셨는가?

  당시 제자들은 사실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꾸 떠나간다는 의향을 내비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제자들 곁에 계속 머물러만 있는다면 제자들은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계시면 어떤 문제라도 다 해결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간다고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은 마음에서부터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불안해졌다.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했다(요14:27).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의 당부를 하셨다. 오히려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더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오히려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28).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제자들과 죽는 그날까지 떠나가지 않고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요14:16).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것이 왜 제자들을 기쁘게 하고 평안을 주는 것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방식이 구약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3. 보혜사 성령께서는 앞으로 제자들과 어떠한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고 하셨는가?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면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인가? 그것은 2가지 방식으로 함께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첫째는 성령께서 제자들의 '곁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라고 하셨다(요14:17). 그리고 둘째 성령께서 제자들 '속에도' 계시는 것이라고 하셨다(요14:17). 그리고 곧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시게 될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요14:16). 

  먼저, 성령이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는 새로운 방식에 대해 살펴보자(요14:16). 그것은 2가지 방식으로서,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 '곁에' 머무르게 되실 것이고, 또한 제자들 '속에' 계실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성령의 존재방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라고 아니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성령의 존재방식은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사람들의 '위에'만 거주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삿3:10). 그것도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지명한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있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성령께서는, 성령받은 자가 범죄하였을 경우에는 그 사람을 떠나가기도 하셨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사울왕에게서 성령이 떠나갔던 예이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부리신 악신이 그이 위에 내려오고 말았다(삼상16:14).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자기가 범죄한 후 자신에게서 성령께서 떠나가지 않을까 염려되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른다(시51:11). 그런데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간 후에, 장차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성령은 제자들 '곁에' 머무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제자들 '속에'도 머물러 계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영 속에 들어와서 둘이 하나가 되는 방식을 뜻한다(고전6:17). 그러므로 이것은 오순절 성령의 놀라운 변화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둘째, 그리고 성령께서 한 번 제자들 속에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요14:16).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범죄하면 성령께서 그냥 떠나가셨다. 왜냐하면 위에만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떠나가기도 쉬웠기 때문이리라고 본다. 하지만 예수께서 새롭게 보내주실 성령은 믿는 이들의 속에 거주하실 뿐만 아니라, 두 영 곧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하나가 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둘은 떨어질 수가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에 대해서는 단서가 달렸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성령께서 '영원토록' 떠나가지 않는다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까, '영원무궁토록' 혹은 '세세토록'(세대들의 세대들까지)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왜냐하면 요14:16에 나오는 '영원토록'이라는 문구는 '에이스 톤 아이오나'라는 문구로서, 이를 직역하면, '그 시대까지'(for the age)라고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만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 세계로 인계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성령이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셨다면, 그 사람이 죽는 그날까지 성령께서는 결코 그 사람을 떠나지 아니하신다. 하지만 죽는 날에 성령이 떠나가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라 할지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못해서, 그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계3:5). 누구든지 진 자는 그날, 생명책에서그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인치는 시간은 우리가 구속받는 그날까지라고 한정해서 말했다(엠4:30). 다시 말해 우리 몸이 부활체를 입어 구속받는 그날까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를 떠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으로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4.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성령에 대한 2가지 명칭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주실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2가지 명칭을 사용하셨다. 그것은 첫째로, '보혜사'라는 명칭을 언급하셨다. 이 명칭은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돕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그리하여 이 단어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른 번역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영어로는 '위로자'(Comforter)(KJV), '상담자'(Counselor)(NIV). '돕는 자'(Helper)(NKJV), '변호사'(Advocate)(AMP), '중재자'(Intercessor) 등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한국어로는 '보혜사'(개역,표준새번역), '위로자'(킹제임스), '보호자'(카톨릭,현대인의 성경), '협조자'(공동번역), '돕는 분'(쉬운말) 혹은 '돕는 자'(현대어), '위로하는 자'(예수성교젼셔) 등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보혜사'라는 명칭이 위로해주시고 보호해주시며, 도와주시며,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성령을 가리켜,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보혜사'라고 언급하셨다(요14:16). 여기서 '다른'(알로스, anoher)이라는 말은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이다. 만약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이라면, 보혜사는 '딴(헤테로서, different) 보혜사'로 말해야 한다.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과 같은 종류에 속하는 보혜사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의 보혜사로 예수께서 일하시고 있었는데(요일2:1, '대언자'로 번역됨), 이제 예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님께서도 역시 예수님과 같은 종류의 다른 보혜사로서 일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또 다른 표현이었듯이, 오순절 이후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역시 예수님의 또다른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요14:19). 

  둘째로, '진리의 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셨다(요14:17, 15:26, 16:13). 이는 성령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특징적으로 말해주는 명칭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오로지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15:26). 그리고 성령님은 성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실 분이기 때문이다(요16:13). 그러나 이 세상 신인 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거짓의 영이자 거짓의 아버지이다(요8:44). 그러므로 마귀는 미혹하는 일을 전적으로 하는 자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짓는 죄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거짓말하는 죄짓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 그러면 거짓말하는 자는 절대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못 들어갈 것이며(계21:27),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다(계21:8).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지 못하고 성밖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계22:15).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항상 진리만을 말해야 하고, 진리만을 따라가야 한다.  

 

5.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에 이어 예수께서는 누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인지를 밝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님의 계명('엔톨레')을 지키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요14:21),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지킨다는 뜻이라고 하셨다(요14:23~24). 그런 자가 되면 주님께서도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요14:21),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실 것이며(요14:23), 또한 주님께서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 보여주실('엠파니죠', 계시해주실,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21). 이와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결코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요14:24). 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인데도,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님을 진정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라. 주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당장 드러내보여주실 것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당신이 아버지와 함께 오셔서 그와 함께 거처('모네', 거할 곳)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요14:23). 그런데 영안을 열어서 보면, 실제로도 그렇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우리의 영 속으로 들어오신다. 그런데 귀신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에는 우리의 몸(육체)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육체에다가 자기들의 집을 짓는다. 이름하여 귀신의 집이 그것이다. 그런데, 회개하여 귀신들을 쫓아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귀신의 집을 파괴해 주신다. 그러면 귀신의 집이 없어진 허허벌판에, 천사가 내려와서 성령이 거주할 집을 짓는다. 우리의 육체에도 성령께서 거할 곳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는 혹 앞으로 귀신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결코 그곳에 귀신의 집을 지을 수가 없다.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오셔서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시면 그곳은 이제 성령이 통치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6.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행하시는 역할은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 5가지 역할을 감당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셨다(요14:26). 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원한 교사(선생님)이 되어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앙과 삶에 있어서 잘 모르는 것이 있을 때에는 성령님께 물어보면 된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교사가 되어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개인교사를 옆에 둘 수가 있는 놀라운 사람들이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들을 기억나게('휘포님네스코', 생각나게,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요14:26). 사실 우리는 어제 들었던 말씀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그 말씀대로, 말씀을 기억하여 요한복음이라는 성경책을 쓰게 된 것이다. 셋째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증언하신다고 하셨다(요15:26). 성령께서는 증언하시되, 다른 이를 증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하시는 것이다(요16:14).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면 우리는 성령님께 여쭤보면 된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슬프게 하거나 그분을 아프게 하는 자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넷째로, 성령님께서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다(요16:13). 여기서 '진리'란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요14:6, 8:32). 그런데 성령께서는 말씀하실 때에는 결코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예수님에게 들었던 말씀만을 말씀하신다고 하셨다(요16:13). 다섯째, 마지막으로 성령께서는 장래 일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했다(요16:13). 왜냐하면 구약시대 때부터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예언하는 일을 하게 하셨는데, 신약에 들어와서 여전히 성령님은 꿈과 환상과 예언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를 잘 받으면, 미래의 일까지도 잘 알 수 있고 그 복까지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7.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떠나갈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요14:27). 그러니 마음에 동요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불안함과 초조함까지 다 제거해주시는 진정한 하늘의 평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실 일 때문이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러한 평안을 경허하기가 어려웠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징계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평안이란 히브리어로 '솰롬'이라는 것인데, 이는 대부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평안을 가리킨다. 하지만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실 평안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임금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새로운 평안인 것이다(요14:28). 여기서 '이 세상 임금'이란 헬라어로 보면, '이 세상의 통치자('아르콘')'이라는 말이다. 이는 사탄마귀를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요12:31, 143:30, 16:11). 그러니까 사탄 마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인간들은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능력있는 마귀와 귀신이라도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우리의 몸을 허락없이는 절대로 건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악한 영이 우리를 죽이는 일은 우리 몸 속에 들어있는 성령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성령님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리 힘이 센 귀신들이라도 결코 우리의 몸을 죽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성령을 보내시어 주시는 평안이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평안이 아니라 항구적인 평안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환경마저 초월하여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평안인 것이다. 

  

8.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감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잠시 떠났다가 다른 보혜사 곧 성령으로 다시 오신다고 하셨다. 한편 궁극적으로는 재림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오시면 제자들에게는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 뒤 보혜사 성령으로 오시게 되면, 예수께서는 항구적으로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제자들과 항상 같이할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다른 곳에 계시면 제자들이 그곳으로 가야 했고, 제자들이 위험에 빠질 때에는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라도 제자들 곁으로 오셔야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오시게 되면, 그때는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언제라도 제자들의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지켜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9. 왜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예수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28). 그렇다면, 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또한 이것으로 인하여 많은 이단들도 생겨났다. 왜냐하면 이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보다 못하신 분이라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까지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께서 피조물이라는 뜻에서 언급하신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셨다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일부러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시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요한복음 13장 16절에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13:16)" 그렇다. 예수께서는 보냄을 받은 분이시다. 그분은 결코 보낸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은 보내심을 받은 자였으므로, 보낸 자가 보냄을 받은 자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고, 다시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를 향하여 가실 분이시다(요16:2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처음에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에, 순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있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기에 둘은 똑같은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두번째 자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그렇다. 그분은 죽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실 때에는 자신을 항상 낮추시고 아버지를 높이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신성만 가지신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자신은 이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있으셨기 때문이다.

 

10. 이 세상 임금이 곧 올 것이지만 마귀가 예수님과 전혀 관계될 것이 없다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가?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있으면 이 세상 임금(통치자)가 올 것이라고 하셨다(요14:30). 그러나 이 세상 통치자인 마귀라도 주님과는 관계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죽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예수께서 마귀보다 힘이 없어서 죽임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가 있어서 마귀에게 죽는 죽음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신 죽는 죽음이기 때문이다(막10:45).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지도자들과의 힘겨루기에서 패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사실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기 때문이다(요10:1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목숨)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8).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 대속물로 내어놓으신 것이다. 그분은 사탄의 힘보다 약해서 사탄에게 죽임당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그 일로 인하여 사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히려 사탄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세만 빼앗기게 되었다. 사탄이 뛰어난 존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탄을 사용하실 뿐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개의 연장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탄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권한 곧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예수님에게 빼앗기고 만다(계1:17~18). 왜냐하면 자신의 권세는 오직 범죄자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었는데, 하도 조급한 나머지 죄없으신 예수님에게 사망권세를 잘못 적용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주님에게 넘겨 주어야 했고, 그시간부터 음부의 한 켠인 무저갱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지금까지 갇혀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곳에 계속해서 붙잡혀 있다가 재림 직전에 잠깐 놓임을 받을 것이다(계20:1~3, 7).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장차 여자의 씨가 와서 뱀의 머리를 박살낼 것이라고 하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창3:15). 사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에는 결코 못 미치기 때문이다. 

 

11. 나오며

  보혜사 성령은 대체 누구신가? 그분은 제3위의 하나님이신가? 그런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령님은 예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나온다(요14:18~19). 그분은 예수님과 같은 종류의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또 다른 오심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성도들은 성령님을 제3위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다. 이 표현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 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세 하나님으로 보게 할 위험성이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위로도 얼마든지 존재하신다. 하나님만이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이(요10:30), 보혜사 성령님도 예수님의 또다른 오심이기 때문에, 결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인 것이다. 단지 보냄을 받은 순서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예수께서 아버지만 못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성령님이 예수님만 못하다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버지를 향하여 간다면, 보혜사 성령을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분의 오심이 예수님의 오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궁극적으로 재림하심으로 다시 오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 때에 성령님의 오심을 예수님의 오심의 또다른 표현으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가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영으로 이미 재림하신 예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훼방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또다른 오심으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유효화시키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문전박대한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도 결국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의 일하심을 기뻐해야 한다. 그분이 내 안에서 충분하게 일하실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것이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09월 13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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