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34)]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에 나타난 놀라운 영적 비밀들(요17:1~26)_2023-10-25(수)

by 갈렙 posted Oct 2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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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CZMqQiog_vo
날짜 2023-10-25
본문말씀 요한복음 17:1~26(신약 177면)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3-10-2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4)]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에 나타난 놀라운 영적 비밀들(요17:1~2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CZMqQiog_vo [또는 https://tv.naver.com/v/43708159]

 

1. 들어가며

  요한복음 17장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마가 다락방에 드리신 중보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믿고 따르고 있던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믿게 될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3가지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그토록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님의 제사장적 중보기도 가운데 나타난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러한 영적인 비밀에는 '영생'의 비밀, '구원'의 비밀, '한 분 하나님'의 비밀, '아버지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의 비밀, '세상'의 비밀 등이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것들 중에서 '영생'과 '구원'의 비밀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 17장의 구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17장의 구조는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가? 그것은 크게 세 부분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다. 이것은 1절에서 5절까지다. 그리고 둘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다. 이것은 6절부터 19절까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다. 이것은 20절에서 26절까지다. 이제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도록 하자. 

  첫째,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계17:1~5). 그것은 '당신의 아들'인 곧 '나'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럼 그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계17:4). 결국 그것은 때가 되어 자신을 속제물로 내어놓는 일이다(계17:1). 사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는 어머니의 부탁을 들었을 때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대답했다(요2:4).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 그 때가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 다음날이면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기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잘 내어 줄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도야말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계17:1). 

  둘째,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두 번째로 드린다(계1:6~19). 그 내용은 2가지인데, 하나는 제자들을 지켜 주시고 보전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11).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16). 먼저, 제자들을 지키고 보전해 달라는 기도에는 2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적인 분열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심으로 제자들의 하나됨을 끝까지 보전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11). 그리고 또 하나는 외적인 분열로부터 지켜 주셔서 악한 자로부터 그들을 보전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15).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제자들을 통하여 장차 믿을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계17:20~26). 그 기도의 핵심은 이들도 역시 내적인 분열로부터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21~23). 그래서 장차 예수께서 가시는 그곳에 그들도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바 그 영광을 세상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24).

 

3. 예수의 죽음은 과연 비참한 종말인가 아니면 영광스러운 탈출인가?

  예수께서 드린 첫 번째 기도는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기도는 어떤 뜻일까?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더 높여달라는 기도인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가 이르게 되면 예수께서 수행해야 할 과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때가 이르면 수행해야 할 일이었다. 예수님께 부여된 이 구원사역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가나 혼인잔치에서 나타났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말했던 것이다(요2:4). 그리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도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고 말씀하시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땅에서 들림으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요12:32).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는 것을 없어짐이나 파멸이나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죽음은 다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던 예수께서 이제 지상에서의 모든 사명을 마치고 아버지를 향하여 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우리는 슬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께서 원래 보내신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셨던 그 직무를 잘 마치고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곧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영생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얻는가?

  예수께서 가장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실 때에 그분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정확히 드러내신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던 바 모든 것을 이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주는 것이라고 했다(요17:2).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우리도 이 땅에서부터 누리며 사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권세와 능력을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채 사람이 죽는 것은 영생을 누리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얻은 영생을 천국에서만 누리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누리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믿음이 있다면, 예수께서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아서 그것을 이 땅에서 누린 것처럼, 우리도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이 땅에서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이요, 그 영생을 가진 자가 결국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에 우리도 이러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가? 그 답은 한 가지이면서 동시에 두 가지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계속 아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아버지께서 파송하셨던 바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아는 것이다(계17:3). 고로 이것은 두 가지처럼 보이나 사실은 한 가지다. 왜냐하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인간 구원 때문에 하나님께서 취하신 부득이한 조치였다. 왜냐하면 사람의 죄값은 피 흘려 죽는 것이다(롬6:23, 히9:2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요4:24) 그분은 피를 흘릴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되어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 들어오실 때에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쓰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측면에서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 곧 인자라고 칭하셨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이 땅에 들어오신 분이셨기에,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아 이 땅에 들어오신 분이신 것이다. 

  

5. 장차 영생을 얻게 될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인가? 아니면 복음을 듣고 스스로 믿어서 구원 받을 자인 가?

  장차 영생을 얻을 자는 과연 누군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인가? 아니면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믿음을 받아들이는 자인가? 그것이 요한복음에 나온다. 하지만 어떤 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들을 사용하여,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그것은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한글로 번역한 사람들이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의 관점을 따라 요한복음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복음 번역자들은 헬라어 원문(현재는 네슬알란트28판)을 따라 번역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믿고 있던 예정론 교리에 따라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과연 어떤 구절들이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의 신학적 교리가 들어간 번역인가? 그런데 묘하게도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자들이 자신의 신학적 교리의 근거로 사용하는 말씀들이 사실 알고 보면, 성경을 잘못 번역한 본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구절들은 요한복음 17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6장과 10장에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것들은 헬라어 성경을 자의적으로 번역한 것이지 결코 원문을 직역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글 성경만을 갖고 있고, 그것만 읽는 분들은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성경적이라는 주장에 금방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잘못된 주장을 감추어 둘 필요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이제는 무엇이 오역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왜곡되이 번역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바로잡을 때가 되었다. 

 

1)요한복음 17:2의 번역 문제

  첫 번째는 요한복음 17:2의 번역 문제다. 이 성경 구절을 보면, 중성 단수(~것)를 남성 단수(~사람)로 바꾸어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17:2[개역개정]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남성, 단수)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위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17:2[헬라어(NA28) 직역] 당신께서 그에게 모든 육체의 권세를 주셨던 것처럼. 이는 당신이 그에게 주셨던 바 모든 것(중성, 단수)을 그가 그들에게 시대의(영원한) 생명으로 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의 문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과연 무엇을 주었는가 하는가에 있다. 모든 사람인가 아니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성경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던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중성,단수)이라고 나온다. 이는 아버지께서 예수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이제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예수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예수께서 구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아버지로부터 인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문제가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구절에 대한 신학적인 해설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자들이 사용할 때에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성경 구절로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아버지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셔서 아들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이기 때문에, 절대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한 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세 전의 하나님의 작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절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에 대한 어떤 사역적인 예정만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구원 예정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으며, 모든 사람이 다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도 아버지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딤점2:6).

딤전2:4,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6 그(그리스도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2)요한복음 6:37,39의 번역 문제

  두 번째는, 요한복음 6:37과 39절의 번역 문제다. 이 구절들도 역시 '중성 단수'를 '남성 단수'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6:37,39 [개역개정]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남성, 단수)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남성, 단수)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남성,단수)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7,39 [헬라어 직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것(중성, 단수)은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계속] 오고 있는 자(남성, 단수)는 내가 결코 바깥쪽으로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39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이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중성, 단수)을 내가 그것에서부터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지막날에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에 보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는 대상은 사람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중성으로서 "~것"이다. 거기에 '모든'이 함께 붙어 있으니, 곧 '모든 것'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당신을 향하여 나아오고 있는 자를 다 구원해야 하니까,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다다르고(도착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만세 전에 작정한 사람만을 예수께로 보내어 구원받게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3)요한복음 10:28~29의 번역 문제 

  셋째로, 이것은 가장 심각한 것인데, 이 구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요10:29에 나오는 '그것'이라는 단어를 대문자 사본(중성, 단수)을 가지고 번역하지 않고, 오히려 후대에 변형된 소문자 사본(남성, 복수)을 가지고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10:28~29 [개역개정]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8~29 [헬라어 직역] 그리고 나도 역시 그것들(양들)에게 시대의 생명(영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까지(영원히) 그것들은 스스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을 내 손에서부터 [장차] 낚아챌 수 없을 것입니다. 29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채 있는 바인 그것은 모든 것들보다 더 큽니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아버지 손에서부터 낚아채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0:28에 따르면, 예수께서 영생을 누구에게 주시는가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그들(양들)'이다. 그 양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양들이므로, 헬라어 원문에 보면 '그것들(양들)'이다. 예수께서 바로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29절에 보면,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아버지께서 그것들(양들)을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NA28)을 보면, 그것은 '양들'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채 있는 바인 바로 그것(중성, 단수)'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말씀도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주시고 있는 것은 양들이 아니다(그것도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어떤 무엇이다. 그것에는 아버지의 지혜, 능력, 권세 등등 다양한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때 주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고 있는 그것은 사실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지고 있는 것은 최고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아들 앞에 나아와 구원받으려는 자를 낚아챌 수가 없는 것이다. 고로 이 구절도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그 사람들만 구원한다고 하는 성경 구절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를 끝까지 구원하시어 그에게 영생을 주시고, 그를 낚아채 가지 못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28절에 나오는 바로 '그들(그것들)' 곧 양들이다. 그럼 그들은 어떠한 양들인가? 그것은 바로 앞 구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양들은 양들인데, 계속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자들이며,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자들이다(요10:27). 그렇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듣고 있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붙들어서 결코 영생을 다른 것이 빼앗아가지 못하게 막아 주시는 것이다. 

 

 

6. 나오며

  만약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거나 멸하기로 예정한 채로 모든 것을 집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거머쥔 채 당신 마음대로 행하시는 폭군 같은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자애로운 분이시다. 그런데 만약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편파적인 분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의 입장에서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을 보면 매우 기뻐할 것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만약 반대로 자신이 멸망받기로 예정된 사람의 입장에서 만세 전 개인 멸망 예정을 보면, 그것은 너무나 억울하고도 억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가 결국 버림을 당하는 신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세 전에 멸망으로 예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범죄했지만 그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들 중에서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모든 준비를 다 하셨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만약 구원의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다면 그분은 결국 공의로운 분이 아니다. 그리고 결코 심판주가 되실 수가 없다. 우리 인간에게 어떤 책임이 있으니까 그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심판이기 때문이다. 만세 전에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된 사람에게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지옥을 보낸다고 심판한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할 것이다. 왜 나는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지 않으셨냐고 말이다. 또한 그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들었을 때에 그분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뿌리친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지옥에 들어갈 자는 아무런 댓구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값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받은 구원을 보전하려면 우리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믿는 것을 부인해서도 아니 될 것이며, 지은 죄가 있다면 즉시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때로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을 영원히 효력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계22:14).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과 회개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지 하나님이 대신 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2023년 10월 25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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