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40)] 예수님의 부활과 도마의 위대한 신앙고백(2)(요20:19~31)_2023-12-20(수)

by 갈렙 posted Dec 2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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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N47xDdaPMH8
날짜 2023-12-21
본문말씀 요한복음 20:19~31(신약 183면)
설교자 정보배목사
주제어 예수님의부활의미,도마의신앙고백,여호와,한분하나님,주하나님,베드로의신앙고백,하나님의아들,그리스도,생명

2023-12-20(수)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40)] 예수님의 부활과 도마의 위대한 신앙고백(2)(요20:19~3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N47xDdaPMH8 [또는 https://tv.naver.com/v/45421382]

 

1. 들어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자들에게 어떤 소식이 되었을까? 사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자신들의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무덤에 있던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당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시작하셨다. 가장 먼저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도마가 빠진 열 명의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여드레를 지나서는 도마가 있을 때에 자신의 부활의 몸을 보여 주셨다. 그러자 그 위대한 도마의 신앙고백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어떤 의미였는지를 재조명하면서, 도마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로 재조명되었는가?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께서 죄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며, 그분의 죽으심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막10:45).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그렇게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생명의 확장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요20:17).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때부터 자신의 제자들을 가리켜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이제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20:17). 그날 막달라 마리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어 보라. 

요20:17[헬라어 직역]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붙잡지 말고 있어라.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를 향하여 올라간 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나의 형제들을 향하여 가고 있어라.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단번에] 말하라. 내가 올라간다. 나의 아버지를 향하여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를 향하여]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항하여] 그리고 너희의 하나님을 [항하여]”

  그렇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생명의 해방'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앞서 일어난 예수님의 성육신은 '생명의 잉태'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셨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는 오직 한 사람 곧 예수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는 그분을 가리켜,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신 유일하신 분이라는 의미로서 '독생자'라고 불리었다(요3:16).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해방하여, 믿는 자들에게 나눠주시려고 드디어 죽음을 택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요12:24).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종교 지도자들이나 군중들에 의해서 일어난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나눠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자발적인 희생이었던 것이다(요10:18).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이제는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나눠주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나눠주기 위한 방법이 곧 생명주는 영이 되신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이었다. 이는 성령을 믿는 자들 속에 주심으로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생명을 나눠주시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나눠주시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하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평강을 기원한 후,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생명은 이제 모든 믿는 자들 속에도 들어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하게 되었다. 성령에 의한 생명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요한복음이 다시 한번 생명의 책이라는 것이 입증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생명의 잉태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생명의 해방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도마가 있을 때에 다시 찾아와 그에게 당신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사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요20:22). 하지만 그때에 도마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믿지 아니한 제자였기에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였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8일 후에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에, 도마에게 특별하게 하셨던 말씀이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20:25). 그렇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3년 반을 지내기는 했지만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돌아가시자 그만이 마가 다락방을 들락날락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도마가 있을 때에 일부러 다시 찾아오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평강을 기원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도마를 따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20:27 다음에 그분이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너의 손가락을 여기에 [계속] 가져오고 있어라. 그리고 [너는] 나의 손들을 [단번에] 보아라. 그리고 [너는] 너의 손을 [계속] 가져오고 있어라. 그리고 [너는] 나의 옆구리(늑골) 안으로 [단번에] 넣어라. 그리하여 믿지 않는 이로 있게 되지 말고 있어라. 오히려 믿는 이로 [있게 되고 있어라]”

  그렇다.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당신의 구멍난 양손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도마의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구멍 속에 넣어보게 하셨다. 그것은 커다란 못자국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당신의 구멍난 옆구리까지 보여 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도마의 손을 내밀어서 옆구리 속에 넣어보게도 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커다란 창자국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당시 도마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들 앞에 나타나신 분이 정녕 그들이 3년 반 동안 따라다녔던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도마에게 자신의 구멍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신 것은 그런 뜻 뿐이었을까? 아니었다. 만약 그것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에 대한 확실함을 알려 주려는 것이었다면, 도마도 역시 그날 주님을 보고서, 이전에 했던 베드로나 마르다의 경우처럼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도마는 그날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다. 도마는 그때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이제는 도마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고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4. 그날 도마의 신앙고백은 어떤 의미였는가?

  그런데 도마가 그날 그때에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예수님을 주님 가운데 한 분이자, 또한 하나님 가운데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마의 신앙고백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당신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여 주고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면서 도마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고백 안으로 이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마의 신앙고백은 아주 잘 고백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마의 신앙고백은 신성모독죄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여러 하나님들 중의 한 분으로 받아들이는 신앙고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 한 분만 있기 때문이다(요6:4). 그러므로 그들은 결단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다. 만약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었던 도마가 했던 신앙고백은 그저 예수님을 주님 가운데 한 분이나 하나님 가운데 한 분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나타남으로서, 구약시대로 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께서 왜 도마에게 나타나 당신의 손들의 못자국을 보여 주었는지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던 날에, 그의 머리 위쪽에 죄패가 하나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글귀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히브리어와 로마아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예슈아 하 나자레이 브 멜레크 하 예흐딤"이다. 해석하면 '나사렛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다. 그런데 이 글자에서 앞 글자만 따오면 '여호와'라는 말로서 '신명사문자'에 해당한다. 놀랍지 아니한가? 그날 빌라도 총독이 달아 놓은 명패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께서 여호와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는 신명사문자 곧 '요오드 헤 와우 헤'를 해석하면, "손을 보라. 못을 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는 손에 못이 박혀 있는 분을 보게 되거들랑 그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빌라도가 붙이게 한 죄패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있는 인간 예수가 곧 구약시대의 경우로 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마의 신앙고백은 "당신이야말로 나의 여호와이시요 나의 엘로힘(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5. 그날 도마의 신앙고백에 나오는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렇다. 그날 도마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정도가 아니었으며, 그분은 그리스도 정도가 아니라, 그분이야말로 하나님 자신이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했던 여호와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두 분이 될 수 없기에,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나타남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날 고백했던 도마의 신앙고백 가운데 "나의 주님"이라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이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호 퀴리오스 무'이기 때문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my Lord'이지만, 헬라어의 문장을 살려서 한국말로 직역한다면, '나의 그 주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어 보면 '주님(퀴리오스)'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주님(퀴리오스)이라는 단어가 총 49회가 나온다. 하지만 신약성경 전체서 '퀴리오스'라는 단어가 총 658회 쓰였다. 그런데 그중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퀴리오스'라는 모든 단어는 단 한 번도 예수님 이 외에 다른 분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서,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키워드가 바로 '퀴리오스'인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대체 누구에게 사용하던 칭호였을까? 그것은 보통 3가지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일반적인 용어로서 종이 주인을 부를 때에 쓰는 호칭이었든지 아니면 그냥 상대방을 높여서 부를 때에 '주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둘째는 종교적인 칭호로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주님'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퀴리오스'를 오직 기독론적인 칭호로서만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퀴리오스'가 사용될 때에는 꼭 정관사를 붙여서 '퀴리오스'라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시자 그때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호 퀴리오스(the Lord)'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칭호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다음 시간에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겠다. 

 

6. 나오며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2가지 신앙고백을 제공한다. 그중의 하나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하는 것이다(요11:27). 공관복음서를 보면 이러한 신앙고백은 베드로가 하였다고 나온다(마16:16).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신앙고백은 베드로가 아니라 나사로의 친여동생이었던 '마르다'가 했다고 나온다(요11:27). 그렇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베드로도 한 것이고 마르다도 했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수석 사도나 남자도 아니요,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여자의 신분이었던 마르다라는 여인이 그러한 신앙고백을 했다니 말이다. 그런데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넘어서, 또 하나는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예수님을 의심했던 자요, 3년 반 동안이나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진실로 믿지 않았던 도마의 입에서 그러한 고백이 나온 것이다. 그는 사실 죽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살아 돌아와서 자신을 만져보게 하는 예수님 앞에 도마는 완전히 거꾸러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때까지 예수께서 하셨던 모든 말이 다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도마도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 의아한 것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에게서 듣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든 의구심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것은 자기 앞에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보여 준 손의 못자국을 통해서 도마는 이제 의심없이 예수님을 여호와이자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도마는 그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 중에 가장 먼 곳으로 예수님을 전해 주려고 떠났다. 그것은 '인도'라는 나라였고, 인도에서 다시 선교를 떠나 한국 땅까지 왔었다. 그때 도마는 우리나라의 가야 땅에 와서 김수로왕에게 세례를 주어 그를 왕으로 삼아 가락국을 세우게 했다. 그런데 '가야'라는 나라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삼국 모두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에 따라 가야는 역사의 흔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다시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고 있으니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역시 도마의 경우처럼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신앙고백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날 우리나라에 와서 못다 이룬 선교의 꿈을 이뤄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2023년 12월 20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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