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09)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실례(2)(롬4;1~25)

by 갈렙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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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tiyg6IsIwoc
날짜 2015-12-02
본문말씀 로마서 4:1~25(신약 19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칭의,아브라함과다윗,믿음과회개,아브라함의3단계분수령,칭의와할례와순종,믿음의성장,아브라함과우리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처음부터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 루터에 의해 칭의는 다시 발견되어졌고 그것은 중세로마카톨릭으로부터 성도들을 바른 진리로 회복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칭의는 마치 그것이 구원으로 확대되어 해석되고 있다. 한 번 칭의가 영원한 칭의가 아닌데도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라. 칭의가 주어지는 통로는 무엇인가? 곧 그것은 믿음이라는 통로다. 하지만 사람치고 한 번 가진 믿음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은 채 유지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브라함은 흔히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정말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을까?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죽은 자도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분으로 그리고 없는 것이라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으로 믿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도 처음에는 지금의 우리들처럼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받은 후에도 그가 하나님만을 신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다루심을 받으며 회개와 순종을 통해 훗날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사실 그의 인생을 되돌아 보면 그에게는 믿음에 있어서 세 번의 큰 분수령이 있었다. 칭의를 받던  때(85세), 더 이상 자식을 기대할 수 없었던 때(99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 제단에 바칠 때(125세 내지는 137세)가 그것이다. 그는 85세 때 칭의를 받았지만 이내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99세 때에 할례를 통해서 다시 믿음이 회복될 수 있었고, 그의 나이 125~137세 때에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믿음은 3단계로 발전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85세 때에 가서야 비로서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99세 때에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125세  내지는 137세 때에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믿음 좋은 아브라함이 불리우는 사람이었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견고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나이 75세 때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갈대우르를 떠나 나왔다. 하지만 그 때만해도 그의 믿음이 적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본토(땅)만 떠나왔을 뿐 그의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행7:1~3, 창12:1~5). 그가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에 그는 아버지와 함께 나왔으며, 자신의 조차 롯을 데리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맨 처음에 정착한 곳은 갈대아우르부터 약 970km 떨어진 곳이었던 하란이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아버지를 먼저 보내드려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의 친척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는 바로 그의 조카 롯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둘씩 정리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복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셨다.

  아브라함은 그후 몇 년이 지나서야 그의 본토(땅)와 친척(롯)과 아비(데라)집을 온전히 떠날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기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대메섹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엘리에셀)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고 하셨다. 그때 하나님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며 앞으로 그의 후손들이 그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고 칭해주셨다(창15:6). 이것이 바로 칭의의 시작이다. 그는 85세 때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는 넘어지고 말았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아내의 말을 들어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가 첩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낳자고 제안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전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그를 만나주지 아니하셨다(롬4:19). 그때가 바로 아브라함이 나이 99세 때였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면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셨다(창17:5). 그리고 그에게 다시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도록 자신의 육체에 할례를 행하도록 지시하셨다(창17:10~11). 그는 그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할례는 옛사람을 장사지내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구약의 할례는 곧 신약의 세례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곧 육적인 몸을 벗는 것이요 자신의 옛사람을 죽음에 넘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골3:11~12). 즉 아브라함은 그때부터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그의 아내의 태가 이내 열렸고 아들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이삭'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할례는 오늘날 영적으로 회개와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하면서 다시는 자신의 육체를 의지하지 않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믿음의 세번째 분수령에 해당하는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다 자란 청년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그의 아들을 모리아산 제단에 드린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자로 인정받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떤 사람도 온전한 사람이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견고한 믿음을 가진 자도 없으며,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초지일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도 없다. 다들 아브라함처럼 작은 믿음에서 출발하여 실수를 통해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칭의의 과정 중간에 할례 곧 회개가 들어있으며, 결국에는 순종으로 칭의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는 과정을 요약해 본다면, 사람은 칭의에서 시작하여 회개와 순종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구원의 문을 여시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바로 전능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뭔가를 잘 해서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라고 고백한 것이 칭의의 시작이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에게 거저 칭의의 은혜를 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칭의를 주시기 위해 자신이 대신 피를 흘리셔야 했다. 우리는 오직 메시야의 피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고 구속을 얻고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칭의를 선물로 주시기 위해 하신 일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인간의 죄값은 하나님의 목숨값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칭의를 선물하시기 위해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지불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칭의를 너무나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함부로 죄를 짓는다. 그러지 말라. 칭의는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 맞다. 죄된 본성을 가진 인간치고 칭의를 스스로 얻어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일은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의는 하나님이 행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회개와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결국에 가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 뒤 우리는 순종을 통해서 내 자신이 구원을 향해 바로 나가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믿음과 행위를 통해 얻게 된다고 말하지 말라. 행위를 구원에 집어넣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에게 공로가 끼어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에 베푸신 구원에 대한 응답일 뿐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아브라함의 믿음도 처음부터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넘어지면서 다시 할례를 통해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었다. 그리고 결국에 순종을 통해 그의 믿음이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은 비단 아브라함의 경우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도 처음부터 온전하고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하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칭의를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인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우리에게 칭의를 주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나깨나 오직 예수님,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어야 한다. 그분의 희생을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를 노래해야 한다. 그것이 칭의를 선물로 받아누리게 될 우리의 반응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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