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36)]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과 세례 요한의 순교에 담긴 하나님의 뜻(마13:53~14:12)_2025-07-09(수)

by 갈렙 posted Jul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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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kK33w_CStXA
날짜 2025-07-09
본문말씀 마태복음 13:53~14:12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5-07-09(수) 수요기도회

제목: [마태복음강해(36)]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과 세례 요한의 순교에 담긴 하나님의 뜻(마13:53~14: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kK33w_CStXA

 

1. 들어가며

  이 세상에 오셨지만 비로소 세례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자신이 가야될 길을 정확히 알게 되셨던 예수께서는 3년반이라는 공생애를 사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신다. 그런데 예수께서 전해주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 곧 천국에 관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천국은 어떤 곳인가? 천국은 이 세상에 속한 3차원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곳은 이곳보다 더 높은 고차원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해 제자들과 청중들에게 들려주실 때에는 비유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알기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기법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천국을 싫어하는 자들에게게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말씀으로 들려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지역에서 활동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의 한 켠에는 항상 이러한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좋은 천국을 내 고향에 사람들에게도 들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이 있으며 그것이 지금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과 축사와 치유기적을 통해 알려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고향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여자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를 보냈으나 그 선지자를 그만 개인적인 맹세와 권력유지를 위해 허무하게 죽이고 마는 일을 해야 했던 헤롯 안디바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사건을 통해서 과연 무엇을 깨달을 수 있으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2.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예수께서는 천국의 비유를 가르치신 후, 당신께서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가장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하늘의 복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삶에도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때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서 처음에는 그의 지혜와 권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들은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라며 경탄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은 곧 의심과 경멸로 변질되어버리고 만다. 그들의 시선이 예수의 신성한 가르침과 권능에서 그만 그의 '배경'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의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 13:55~56) 그랬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낸 경이로운 메시아가 아니라, 그저 어릴 적부터 봐왔던 '목수 요셉의 아들'일 뿐이었다. 분명 그들이 들었던 메시지는 일찍이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메시지였고, 그분이 행하신 일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고 있었다. 그분의 말씀은 천국에 관한 말씀이었고 그분의 행동은 초자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에 자신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과 익숙함이라는 틀 안에 예수를 가두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과거의 정보, 즉 예수님은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고정관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를 기름부어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행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보면서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선입관이 그들을 불신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에 대한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의 근본적인 원인은 지금 사람을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과 권능을 보면서도, 자신들의 편협한 시각과 경험을 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예수께서는 자신을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나사렛에서는 많은 능력을 행할 수가 없으셨다. 이는 예수께서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고로 나사렛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들려준다. 익숙함과 선입견이 얼마나 쉽게 영적인 눈을 가릴 수 있는지, 그리고 과거의 경험에 얽매일 때 현재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어떻게 놓치게 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진정한 믿음이란 나의 경험과 지식을 넘어서, 지금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3. 세상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가 결국 얻게 된 것은 무엇이었는가?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 사건에 이어, 마태복음의 기자는 헤롯 안디바와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이어서 소개한다.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1/4왕)이었던 헤롯 안디바는 예수의 소문에 대한 듣고는 전에 그가 자신이 죽였던 세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며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그의 두려움은 사실 그가 의로운 자를 허무하게 죽였다는 그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누구였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보낸 최고의 선지자였다. 그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메시야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보내어진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사람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죄를 지적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러므로 그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헤롯 안비다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으며, 그의 죄를 단호하게 지적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헤롯 안비가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었던 헤롯 빌립1세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차지한 것은 명백한 불륜이자 율법을 어긴 죄악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헤로디아는 자신의 남편인 헤롯 빌립1세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으며, 헤롯 안디바는 헤로디아의 아주버님(자신의 남편의 배다른 형)으로써 당시 나바테안 왕국의 아레다(아레타스 4세) 왕의 딸을 아내로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헤롯 안디바는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자신의 남동생의 아내를 탐한 것이다.

  그러나 헤롯 안비다가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려 했던 이유는 그녀에게도 동시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원래 헤롯 대왕의 장손 집안의 손녀로서, 아주 권력욕이 강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헤롯대왕의 장남이었던 아리스토 불루스였는데, 아리스토 불루스에게는 딸인 헤로디아와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1세를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헤로디아는 누나였고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그녀의 남동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자신이 왕권을 쥐고 싶어했다. 그래서 자신의 배다른 삼촌인 헤롯 빌립1세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권력욕이 강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헤롯 대왕이 죽은 후, 4개의 나라로 나눠져 있던 팔레스틴 전지역을 차지하기 원했던 헤롯 안비와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왜냐하면 헤롯 안디바는 자신의 배다른 작은 아버지로서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을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헤로디아와 헤롯 안디바는 서로 남편과 아내를 두고 있었지만, 권력욕에 취한 나머지 결혼을 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둘은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해버린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에게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마14:4). 그러자 이러한 책망은 헤로디아의 극심한 원한을 샀으며, 헤롯 안디바 역시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었으나 민심을 두려워해 죽이지는 못하고 그를 옥에 가두는 데 그쳤었다.

  그런데 비극은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시작되었다(마14:6).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연회에서 관능미 넘치는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자, 술에 취하고 흥에 겨워했던 헤롯은 자신의 조카인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헤로디아가 뛰어들었다. 그래서 딸을 사주하여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헤롯 안디바는 자신의 맹세와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가진 체면 때문에 근심하면서도, 결국 의로운 선지자의 목을 베어 소반에 담아 소녀에게 내어주는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고 만다.

  이 사건은 세상 권력이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쓰일 수 있는지를 적나나하게 보여준다. 헤롯 안디바는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자신의 정욕과 체면 그리고 한 여인의 원한에 휘둘려 그만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례 요한을 죽임으로써 잠시동안 자신의 권력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그 결과는 비참하게 흘러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헤로디아와 재혼함에 따라 원래 부인이었던 아레다 왕(재위기간: B.C.9~A.D.40)의 딸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그 사실을 고해바쳤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바테안 왕국의 아레다 왕은 곧바로 헤롯 안디바의 영토인 베뢰아를 공격한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헤롯 안디바는 참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욕을 버리지 못했던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는 로마까지 달려가서, 4개로 나누어진 유대 나라를 자신을 물려주도록 요청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이미 그 나라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러자 그들은 거짓 밀고죄로 로마황제에게서 쫓겨나야 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프랑스 리옹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랬다. 헤롯 안디바는 세상을 얻으려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4. 두 사건 두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하나의 뜻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마태복음 13장 후반부에서 14장 초반부에 걸쳐, 우리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사건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시는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에 취해있는 불의한 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의로운 선지자 세례 요한이 허무하게 순교하는 이야기이다. 이 두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이 둘은 공통된 주제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평가와 맹세 때문에 하나님의 보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천국으로부터 멀어져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신다. 그런데 앞선 사건은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야에 대하여 과거에 자신이 갖고 있던 선입관과 관념 때문에 메시야를 배척함으로 천국을 침노할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또한 뒤의 사건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보고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잔치를 즐기다가 그만 무모한 맹세를 함으로 선지자를 죽여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살아야 했던 슬픈 이야기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도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저버리고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세상권력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5. 왜 의로운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은 갑자기 이슬처럼 사라져야 했는가?

  세례 요한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를 하게 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하는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나이가 30세가 되었을 때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할 때까지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정말 예수께서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셨다. 그는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지만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장차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자신을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어 기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흥하여야 하겠지만 자신은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더이상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의 사명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퇴장은 언제 실현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의 사명을 감당하기까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퇴장을 가장 숭고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순교하여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권력욕에 취했던 두 사람 곧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헤롯 안비다와 헤로디아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불법적인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세례 요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둘은 하나가 되어 결국 세례 요한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례 요한을 가장 명예스럽게 퇴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어찌 보면 세례요한의 순교가 허무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가 가장 아름답게 퇴장할 수 있는 길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우리의 머리로 어찌 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6. 나오며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 배척과 헤롯 안비다의 어리석은 판단. 이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는가? 그것은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자들이 받게 될 비참함과 세상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비참하게 끝나는지를 알려주는 놀라운 이야기들이다. 사실 이 세상 사람들은 헤롯 안디바와 같이 눈에 보이는 배경과 지위, 권력을 치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그러한 권력이라도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잘 모른다. 세상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잘 모른다. 무엇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허무한 것만을 쫓다가 허무한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은 현재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외면한 죄가 크며, 헤롯 안디바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악을 행하다가 그만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세상의 지위나 명성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중요하다. 그리고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사건을 통해 세상의 권력과 인정을 탐하는 삶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서 돌려 오직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세상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여말로 바로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세상의 조롱과 배척에 흔들리지 않으며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도 역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2025년 07월 09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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