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38)] 장로들의 전통과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마15:1~28)_2025-07-23(수)

by 갈렙 posted Jul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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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JUM17pjnHf8
날짜 2025-07-23
본문말씀 마태복음 15:1~28(신약 25면)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5-07-23(수) 수요기도회

제목: [마태복음강해(38)] 장로들의 전통과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마15:1~2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JUM17pjnHf8

 

1. 들어가며

  마태복음은 ‘왕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왕국 복음서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모든 기록은 ‘누가 과연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마태복음 15장은 이 질문에 대한 극적인 대비를 통해 심오한 영적 진리를 드러낸다. 한쪽에는 하나님의 계명보다 자신들의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외적인 정결함에 집착했던 당대의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서 있다. 다른 한쪽에는 유대인들에게 ‘개’처럼 여겨지던 이방 여인, 그러나 민족과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는 끈질긴 믿음으로 왕이신 예수님 앞에 엎드렸던 한 가나안 여인이 있다. 이 두 그룹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마태는 무엇이 사람을 참으로 정결하게 하며,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따라서 이 시간에서는 마태복음 15장 1-28절에 나오는 두 사건을 깊이 있게 분석함으로써, 외식적인 종교의 한계와 참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2.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전통'이라는 견고한 진(마15:1-20)이란 어떤 것이었는가?
  어느날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공회의 파송을 받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더니,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이 질문의 핵심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the tradition of the elders)’을 지키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모세오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구전 규율들을 왜 제자들이 어기고 있는가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장로들의 전통'은 본래는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한 ‘울타리’로서의 긍정적 의도로 시작되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이 전통은 본래의 율법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평행본문은 이 전통이 얼마나 세세하고 백성들의 삶을 옥죄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손을 씻는 것을 넘어, 시장과 같이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돌아오면 온 몸에 물을 뿌려 정결케 해야 했고, 손님을 접대하는 데 사용되는 잔과 주발과 놋그릇 같은 식기류도 특정한 방식으로 씻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외적인 정결 규정의 준수 여부는 한 사람의 경건을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위는, 그들 눈에 신성모독에 가까운 심각한 범죄로 비쳤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를 고발함으로 스승인 예수님의 권위와 가르침에 흠집을 내고자 시도하는 것이었다.

 

3.  예수께서는 어떻게 ‘고르반’제도를 통하여, 다시 종교지도자의 안타까운 위선을 폭로하셔야만 했는가? 
  자신들의 전통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공격하려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정확히 그들의 잘못을 찾아내셨다. 그러자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가장 깊은 위선을 꿰뚫는 예수님의 날카로운 반격에 직면해야 했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되물으셨다. 그리고 공수의 위치를 완전히 뒤바꿔 놓으셨다. 그리고 그들의 위선을 증명할 구체적인 사례로서 ‘고르반(Corban)’제도를 언급하셨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또는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서원된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문제는 이 제도가 당시 악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는 연로하신 부모를 물질적으로 부양해야 할 실질적인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어떤 자녀들은 부모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생활비나 재산을 “이것은 하나님께 드릴 ‘고르반’입니다”라고 선언하기만 하면, 그 의무를 합법적으로 회피할 수 있었다. 부모 공경이라는 명백한 하나님의 명령보다, ‘고르반’이라는 인간의 전통을 앞세워 자신의 탐욕과 불효를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이 논쟁을 통해 문제의 핵심, 즉 정결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하셨다. 그분은 무리를 불러 모아 이렇게 말씀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그런데 제자들조차 이 비유의 뜻을 깨닫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신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배로 들어가 소화된 후 몸 밖으로 배설될 뿐, 영혼을 더럽힐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을 진정으로 더럽히고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목록은 악한 생각을 제외하고는 십계명을 어긴 죄들을 가리킨다. 곧 악한 생각, 살인(6계명), 간음과 음란(7계명), 도둑질(8계명), 거짓 증언(9계명), 비방(신성모독)(3계명). 그러므로 이러한 목록은 인간 내면의 부패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바리새인들은 씻지 않은 손을 문제 삼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한 교만, 위선, 탐욕, 그리고 이웃을 향한 비방과 정죄의 악함을 지적하신 것이다. 외적인 정결함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오히려 내면의 심각한 더러움을 가리는 위선적인 장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4. 예수님을 찾아온 이방여인, 그녀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는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격렬한 논쟁 이후,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해 의도적으로 유대 땅의 경계를 넘으신다. 그분이 향하신 곳은 두로와 시돈, 지중해 연안의 이방 도시였다. 이곳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부정한 땅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러한 이방의 땅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는 ‘가나안 여인’으로 소개된다. ‘가나안’이라는 명칭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오랜 적대 세력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으로, 그녀가 얼마나 철저한 이방인이었는지를 강조한다.

  그때 그녀는 예수께 나아와 처절하게 부르짖는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그녀의 첫 마디에는 이미 놀라운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을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치유자로 부르지 않았다. ‘주 다윗의 자손(Lord, Son of David)’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이는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즉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구원자를 칭하는 대표적인 명칭이었다. 이방 여인의 입에서 이 위대한 고백이 터져 나올 줄이야. 그녀는 이미 소문을 듣고 자신의 민족적, 종교적 배경을 뛰어넘어 예수께서 누구신가 곧 예수님은 모든 민족들의 왕이 된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5. 침묵과 거절, 그리고 모욕의 시험에 이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러나 이 위대한 믿음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차갑고 매정하였다. 예수님은 마치 세 단계에 걸쳐 그녀의 믿음을 극한까지 시험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예수께서는 '침묵'하셨다. 그 여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마15:23). 완전한 무시와 외면이었다. 제자들조차 그녀를 귀찮아하며 “그 여자를 보내소서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나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둘째, 예수께서는 그녀를 '배척'하셨다. 제자들의 요청에 마지 못해 입을 여신 예수님은, 오히려 더 큰 거절의 벽을 그녀에게 세우신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일차적으로는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고로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그녀가 구원 사역의 우선순위에서 배제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선언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납짝 엎드려 절한다. 그리고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더욱 간절히 매달린다.

  셋째,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모욕'을 주었다. 이때 예수님의 시험은 절정에 달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강아지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15:26).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며 경멸했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할 때, 이는 한 인간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는 모욕적인 언사였음에 틀림없었다. 이 비유에서 ‘자녀’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떡’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아의 은혜와 축복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더러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개’와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토록 그녀에게 매정하게 행동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 여인을 무시하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믿음을 시험하고 그 믿음의 위대함이 어떤 결과를 미치게 되는지를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6.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의 시험을 이겨내었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게 되었는가?
  이 마지막 시험 앞에서, 여인의 반응은 신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고백 중 하나를 하게 된다. 그녀는 그때 예수님에게 분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돌아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안에 있는 작은 희망의 근거를 찾아낸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 이 한마디에 주님은 인정하셨다. 왜냐하면 이 말 한 마디를 통하여 주님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믿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첫째, 그녀는 철저히 겸손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을 ‘개’로 칭하는 모욕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전능자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과 무자격적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둘째, 그녀는 아주 지혜로은 답변을 하였다. 이때 그녀는 ‘자녀의 떡’이 아니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고 얻기를 구한다. 주인의 풍성함 속에 있는 부스러기의 은혜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셋째,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끈질지게 매달렸다. 그녀는 예수님의 침묵과 배척과 모욕 속에서도 소망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고 끝까지 은혜를 구했던 것이다. 그러자 마침내 예수께서는 모든 시험을 마치고 감탄하며 그녀에게 선포하신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그토록 찾으셨던 ‘큰 믿음’을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이방 여인에게서 발견하신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의 문제를 즉시 해결해주셨다. 그러자 귀신들린 그녀의 딸이 즉시 시공간을 초월한 예수님의 권능으로 깨끗하게 고침을 받는다. 

 

7. 장로들의 전통과 가나안 여인의 끈질긴 믿음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들려주는가?

  우리는 위의 2가지 사건을 통해서 2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로 죄를 깨우쳐주는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들이 바로 기득권 세력이자 종교지도자들이었음을 본다. 당시 손바닦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장로들을 보게 된다.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허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지만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이 지금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가르쳐주셨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어야 했는가?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는지를 회개해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탄복하면서 "당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지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기득권과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서기관과 바리새들은 마침내 독사의 새끼들이 되어버린다. 그렇다. 여기서 유대인의 문제는 자기자랑을 내려놓지 않는 것과 자신의 지식을 최고로 여기는 자기 교만인 것이다. 

  둘째로, 전혀 자격이 없는 이방인으로서 냉대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마침내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아누리게 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된다. 여인은 하나님께서 멸족을 시키라고 했던 가나안 여인이었다.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그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혈통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위대한 믿음은 이 모든 제약요소를 한꺼번에 다 뛰어넘게 한다. 왜냐하면 침묵과 배척과 냉대로 일관했던 예수님을 움직이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이방인이 갖고 있는 가장 심각한 삶의 문제는 우상숭배로 인한 저주로서 찾아온 귀신들림이라는 것이다. 귀신들림의 문제가 이방인에게는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낯선 사람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기본적으로는 귀신이 모든 문제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녀가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온 것이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떠한 예수님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을 계속해서 붙들었다. 그리고 말할 기회가 생겼을 때에는 주님을 감동시키는 겸손과 단호함이 그녀에게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의 방법이 강력한 믿음을 내놓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가 가져온 문제를 해결받게 된다. 

  

8. 나오며 : 마음의 정결과 믿음의 승리
  마태복음 15장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누구를 닮았는가?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전통을, 내면의 정결보다 외적인 경건의 모양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는 있는지를 살펴보야아한다. 아니라면, 사회적 편견과 내면의 절망 속에서도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임을 고백하며 그분의 ‘부스러기 은혜’라도 붙들려는 가나안 여인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씻지 않은 손을 정죄하지 않으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더러운 마음은 엄청 책망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혈통과 전통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을 물리치셨지만,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고 나아온 이방 여인의 믿음은 크게 칭찬하시며 그 소원을 들어주셨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는 외적인 조건이나 종교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 그리고 왕이신 예수님을 굳게 신뢰하는 끈질긴 믿음. 이것이 바로 사람을 진정으로 정결하게 하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세우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있는가? 회개함으로 교만과 위선의 껍데기는 벗어버렸는가? 그래서 이제는 왕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풍성한 은혜라도 먹을 수 있는 성도가 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라. 

 

2025년 07월 23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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