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강해(30)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1)(사1:1~31)_2017-01-04

by 갈렙 posted Jan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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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ESDhc2vEZn4
날짜 2017-01-04
본문말씀 이사야 1:1~31(구약 968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이사야의 표제, 회개촉구와 심판선고, 메시야예언, 이사야강해, 전반부(1~39장), 후반부(40~66장), 배은망덕, 하나님을 버림, 하나님을 경홀히여김

1. 들어가며

  이사야서는 구약성경(모세오경, 선지서, 시가서) 중에서 선지서(예언서)에 속한다. 또한 선지서(예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요 또 하나는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의 선언이다. 다시 말해 선지서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과 아울러, 죄짓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심판을 선고함으로 책망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사야선지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사야서도 이처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하지만 이 두 부분은 각각 따로 따로 구별되어 씌여진 것은 아니다. 둘이 서로 섞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메시야의 예언은 대체로 이사야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40~66장에서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회개를 촉구하는 책망은 이사야 전반부에 해당하는 1~39장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것들 중에서 남유다백성의 죄를 책망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부분인 이사야 1장을 함께 다루고자 한다.

 

2.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의 위치

  선지서들은 또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것은 역사서와 선지서로 구분된다. 참고로, 우리 개신교의 경우 구약성경을 크게 4가지 분류한다. 율법서(모세오경), 역사서(여호수아~에스더), 시가서(욥기~아가), 예언서(이사야~말라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선지서와 역사서를 하나로 합쳐서 선지서(느비임)라고 명명해놓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역사서를 선지서에 포함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서에 선지자들의 선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개신교에서는 역사서와 선지서를 각각 따로따로 구분한다. 우선 이 둘의 차이를 조금 이해하려면, 역사서에는 역사적 사실에 선지자들(엘리야, 엘리사 등)의 메시지가 간간히 끼어 들어가 있다고 한다면, 선지서에는 선지자들(이사야, 예레미야, 말라기 등)의 예언과 책망 사이에 간혹 이스라엘의 역사가 끼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류법에 따르면, 이사야서는 예언서의 시작인 책인 셈이다. 특히 이사야서를 비롯한 말라기까지는 다 자기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과 선포한 것을 책으로 남기고 있다. 그래서 선지서의 첫번째 책인 이사야는 선지자의 이름임과 동시에 선지서(예언서)의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

 

3. 이사야서의 저자와 활동무대

  그러면, 이제는 이사야가 누군지부터 살펴보자. 즉 이사야는 언제 어디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인가? 그것은 사1:1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남유다의 10대왕이었던 웃시야를 시작으로 하여, 그의 아들 요담 그리고 요담의 아들 아하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시대까지 남유다에서 활동한 왕궁선지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사야는 B.C.739~680년까지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선포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신분이 왕족이었든지 아니면 귀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냐하면 그의 왕궁출입이 아주 자유로웠고 빈번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이름은 이사야였다. 당시에 이사야라는 이름을 쓰는 자가 많아서였던지, 이사야는 자신의 이름을 아모스(아모츠)의 아들 이사야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금방 알아 들을 수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누군지도 정확히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사야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으로, '여호수아', '호세아'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의 이름 끝에 붙어있는 '야'라는 접미사는 히브리어로서 '하나님'을 뜻하며, 앞의 '이사'라는 단어는 '구원'을 뜻하는 단어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님과 뜻이 같은 이름을 사용했던 선지자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지자 이사야는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많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기록으로 담고 있다.

 

4.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

  렇다면, 이사야선지자는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무엇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했던 것일까? 이사야 1장은 그의 이러한 회개촉구와 회복에 대한 선언의 첫머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1장은 일종의 총체적인 회개촉구선언 및 회복의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1장은 회개촉구선언(2~23절)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유대의 배역(배은망덕)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는 여호와를 거역한 이스라엘에 처한 참담한 현실에 대한 애가(2~9절)요, 둘째로는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지탄이며(10~17절), 셋째로는 예루살렘의 부패와 회개에 대한 요청(18~23절)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사야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24~31절)을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종(노예)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당신의 백성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자식으로 생각했을까?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백성임이 분명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했다(사1:2). 그래서 그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만 어떤 특권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들이 먼저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통해 이방인들도 복을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 즉 제사장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출19: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은망덕한 백성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크게 2가지를 범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린 행위요, 또 하나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기 때문이다.

 

5.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2가지 죄들

  그럼,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우상숭배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사1:21). 영적인 간음이 그들에게 가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다(사1:4). 그 증거로는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을 순수하게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외관상으로 철두철미하게 언약을 지킨 것 같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이중성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으로 판단되어 그들은 심판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을 심판하신다(사1:4).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것 한 가지만 걸려도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천국에 들어갈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불순종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죄들은 치명적인 죄로서 배은망덕한 행위 그 자체였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신음한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자연적인 은혜로 이끌어내어 홍해를 건너 광야에 갖다 두었다. 사실 여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 바로를 대항하여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다. 즉 애굽 땅에 사는 자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린 것도 하나님이었고,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한 다음, 그곳에는 오히려 바로와 애굽군대를 수장시켜 버리신 것도 하나님이셨다. 하지만 그후 그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했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금새 돌아서서 광야에서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으며, 음행을 저질렀으며,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계신지를 시험했고, 원망불평했다(고전10:1~11).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합당하지 않는 자들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 중에서 애굽생활을 동경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땅 곧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 자들은 다 광야에서 엎드려뜨리셨다. 결국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어나가야했다. 그렇다. 죄를 좋아하는 자가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애굽에서 나오고 애굽의 군대로부터 벗어나기까지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다 해 주시는 일이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자기들의 행동여하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험을 거의 대부분이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고 말았다(히3:18~4:1).

 

6. 예나 지금이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상황과도 매우 밀접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칭의인이 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않는지 적합한지를 시험하는 장소가 바로 광야로서 교회생활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이 교회생활을 통하여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인지 아닌지를 지금 훈련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죄짓던 애굽생활을 동경하면서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 자는 그가 비록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온 성도라 할지라도 가나안 땅에는 결코 못 들어간다. 죄와 싸우지 않는 자, 천국을 믿지 못하는 자는 결국 낙오되고 도태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애굽에서 10가지 대재앙을 보았고, 깊은 홍해가 갈라진 후 마른 땅을 건너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굽생활을 동경하다가 금으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고, 만나를 버리고 애굽의 음식들을 달라고 떼를 썼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시려는 땅, 가나안을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은 결국 그들이 원하고 말하는대로 되었다. 광야에 엎드려서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출애굽2세대들이 어떠했는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들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또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 그리고 온갖 포악한 일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들도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바른 행동을 하는 척하면서 외식적인 삶을 줄곧 살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베풀어주신 놀라운 기적과 은혜들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러면 큰 일이다. 배은망덕한 삶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신앙생활은 결코 그리 간단하고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전적인 은혜에 의하여 칭의를 받았어도 교회생활을 잘못 행한 자는 결국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날마다 죄를 이기기 위해 싸워야 한다. 죄된 본성을 이겨야 한다. 피흘리기까지 사탄마귀와 싸워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소망의 땅, 천국을 바라보면서 고난과 핍박을 인내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가?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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