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강해(43)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1)(사48:1~12)_2017-04-12

by 갈렙 posted Apr 1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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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SoXxgpR8h_Q
날짜 2017-04-12
본문말씀 이사야58:1~12(구약 1038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금식,금식의기원,금식의모습,형식적금식,참된금식,금식에관한예수님의가르침,경건생활의방식,이사야58장강해

여러분은 금식을 해 보았는가? 금식은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한 가지 물어보겠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당신의 백성들에게 금식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었을까? 거꾸로, 하나님께서 금식을 하지 말라고 명하신 경우가 있었는가? 우리의 모든 판단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행할 때 정확하고 안전하다. 이제 금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을 이제 천천히 들여다보자.

 

1. 들어가며

  이사야선지자, 그는 B.C.740~680년에 남유다에서 활동한 궁중선지자로서 기록선지자에 해당한다. 성경에는 자신의 예언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선지자도 꽤나 있다. 하지만 이사야선지자는 자신의 예언을 기록물로 남긴 선지자 중의 대표자다. 특히 그의 예언(총66장)은 남유다의 죄에 대한 책망과 아울러 메시야를 통한 구원과 회복이 적나나하게 펼쳐져 있다. 특히 그가 남긴 66장의 예언은 성경 66권처럼 잘 정돈되어 있고 배열되어 있다.

  먼저, 이사야의 예언서를 간단히 구분해보도록 하자. 이사야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1~35장)는 주로 심판예언을 다루고 있고, 2부(36~39장)는 성취예언을 다루고 있으며, 3부(40~66장)는 회복예언을 다루고 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이사야 58장은 제3부(40~66장) 중에서 후반부(58~66장)의 시작부분으로서, 신앙회복을 통한 선민의 복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 그중에서 사58:1~9a에서는 금식에 관한 교훈이 나오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과연 어떤 것인지와 그러한 금식의 축복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아울러 금식전반에 관한 성경의 말씀들을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과 더불어 금식의 기원과 시작, 금식의 구약의 실례들, 금식의 의미와 발전을 다루며,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오늘날 금식의 활용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금식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이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남유다백성들이 행하고 있는 경건의 모양과 내용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책망하라고 명령하신다. 그중에서도 경건의 최고봉이라 알려진 '금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적나나하게 들추어내어 책망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통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전달케 하신다.

  금식이란 무엇일까? 금식이란 음식을 끊어 자신의 육체를 괴롭게 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아뢸 때에 취하는 기도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사실 금식은 기도라기 보다는 경건생활의 한 형태에 속한다. 물론 그것이 기도와 함께 어울어져 나타나므로 보통 사람들은 금식은 곧 기도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금식은 죽기를 각오한 장렬한 기도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금식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하나님께서는 과연 당신의 백성들에게 금식하라고 시킨 적이 있을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금식하라고 정확히 글자그대로 시킨 적은 없으시다. 다만 모세시대에 들어와서 율법 중에서 절기준수를 명령하실 때에, 금식에 관한 유사한 말씀을 주시기는 하셨다. 그것은 매년 7월 10일 지키는 속죄일에 자기를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레23:27,29).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해석하면서, 그 문구를 금식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 일년에 한 번 속죄일제사 때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그 날 자기를 금식하면서 스스로 괴롭게 했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온 백성치고 자기민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속죄일제사에, 금식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잘못하면 제사드리러 들어어간 대제사장이 죽어서 나올 수도 있는 속죄일제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속죄를 위해 드리는 속죄일제사에 어찌 엄숙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날 백성들은 전부다 금식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속죄를 위한 경건한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3. 금식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것의 활용방안은 몇 가지였나?

  그렇다면, 속죄일 제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식준수는 무엇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간절함의 표현이었으리라. 즉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때에, 간곡히 부탁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겸손히 요청하는 것이 바로 금식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죄악들을 그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탁하여 용서를 비는 것이 금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금식을 절대절명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방법으로도 허용하기도 하셨다. 예를 들어보자. 바사왕 아하수에로의 왕비였던 유대인 에스더가 자기 민족이 죽게 생기자,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3일금식을 부탁하게 된다(에4:16). 그녀가 왕께 나아간지 벌써 30일이 지난 후라, 혹시라도 잘못되면 죽임당하는 관례가 있었기에, 죽지 않고 왕께 유대인의 문제를 아뢸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달라고 금식기도를 부탁한 것이다. 결국 유다인들은 3일동안 금식하면서, 에스더 왕비가 자신의 민족의 구원하는 일에 아하수에로왕을 설득할 수 있도록 금식으로 동참하게 된다. 결국 이 금식으로 인해 아하수에로왕은 왕비의 청을 들어주게 되고, 악한 하만 일당은 전부 도륙을 당하게 된다.  그렇다. 금식은 원래는 속죄를 비는 경건한 방법으로 시작되었지만, 절대절명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는 일에도 쓰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를 보임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소원을 응답받는 경건의 모양의 한 형태이자,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간절히 아뢰는 방식으로 쓰였던 것이다.

 

4. 이사야선지자 당시에는 금식이 어떻게 와전되어 있었는가?

  그런데 이사야선지자 당시 남유다는 어떻게 금식을 사용하고 있었을까? 남유다의 제13대왕이었던 히스기야의 말기이자 제14대왕인 므낫세왕과의 공동통치무렵의 시기에, 남유다인들은 이미 많이 타락해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볼 때에 그들은 매우 경건해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형식적이었지만 하나님을 찾고 있었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그들은 금식을 아주 중요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께서 남유다인들을 책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겉으로는 금식의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 속으로는 쾌락을 즐기며, 종들로 하여금 일을 하게하여 돈을 벌고 있었으며,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논쟁하며 다투며 힘을 이용해 악한 주먹으로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58: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겉모습은 놀라운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서 머리에 재를 뿌려가며, 머리를 숙인 채 금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58:5).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들의 금식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기 위한 금식에 불과하며, 그것을 이용하여 금식을 못하고 있는 자들을 억누르기 위한 거짓 경건이라고 말이다. 그랬다. 그래서 그들의 금식은 오히려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 그들의 금식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노여움과 책망만 사고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말씀하신 금식은 어떤 것이었나?

  이러한 모습은 약700년이 지난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비릇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을 실천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금식도 형시적인 금식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금식에 관해 말씀해 주셨는데(마6:16~18), 그때도 사58장에서 하나님께서 남유다백성들의 잘못된 금식을 책망하신 것처럼, 외식으로 물들어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들도 금식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위선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겸손한 자세로 시작된 금식이 ,어느샌가 자신의 경건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금식을 금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 그것 자체로도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식을 경건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에 대해서 엄히 책망하셨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려면, 초췌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차라리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명하셨다(마6:17). 그리하여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금식하라고 명하셨다(마6:18).

 

6. 오늘날의 경건의 방식으로 우리는 어떤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한편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금식은 어떤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좀 살펴보자.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금식을 이용한 경건생활은 그리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복음전파나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는 금식하기보다는 건강한 몸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거나 봉사에 힘쓰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식같은 어떤 형식적인 의식을 통하여 경건생활을 유지하려 하거나, 그것을 사용해 남들 앞에서 자기를 자랑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 3개의 경건한 당파가 있었다. 하나는 바리새파였고 또 하나는 사두개파였으며, 마지막으로 엣세네파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구약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학파들이다. 이러한 경건학파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후, 신구약중간시기에 나타난 유대종교지도자 조직으로서, 모두가 다 자신의 경건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생긴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율법조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 다시는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하겠다는 각오로 시작된 바리새파들은 율법조항 하나하나를 문자그대로 지켜 행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경건훈련으로서 사용하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기도'와 '금식'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점차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서 기도하거나,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금식을 자주하여 얼굴을 흉하게 하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미덕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엣세네파 사람들은 좀 달랐다. 그들은 '금식'과 '세례'를 통해서 경건훈련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어느날이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말했다. "우리 엣세네파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9:14)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경건훈련으로 금식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금식은 어떤 상황이 오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경건의 모양은 기도나 금식이나 세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가르침과 같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인 금식같은 경건방식 안에 넣어두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옛경건방식에 해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새 시대가 도래했으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금식은 사실 원칙적으로 볼 때 율법조항의 하나가 아니다. 일종의 해석에서 비롯된 경건훈련방법이다. 금식은 사실 하나님의 속죄를 바라는 자들의 겸손한 태도에서 비롯된 경건생활의 방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금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다시말해,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의 방편으로서 금식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금식을 예수께서는 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금식이라는 경건생활이 복음을 그대로 담아 펼치기에는 역부족인 것을 말씀하셨다(마9:17).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라면,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금식을 사용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 데에 사용해서도 절대 아니 될 것이다(마6:16~18). 하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경건생활을 유지하거나, 절대절명의 기도의 응답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간절한 기도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것만이 경건생활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는 도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오직 금식과 같은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서 자기가 경건해지려 하거나 간절한 기도의 방편이 그것 뿐임을 고수하는 우는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인으로 삼고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함으로 옛사람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새사람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경건한 척 보이는 어떤 외식에 물들기보다는 실제적으로 자기가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실제적인 경건생활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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