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07) 버가모교회에게 주신 승천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요2:12~17)_2017-08-09

by 갈렙 posted Aug 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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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Qm5oBccVdFY
날짜 2017-08-09
본문말씀 요한계시록 2:12~17(신약40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버가모교회, 순교지 안디바,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기는 자, 감추었던 만나, 흰 돌

버가모교회, 이 교회는 그 당시까지는 아직 주의 종이 타락하지 않았으나 성도들이 세상과 타협해버린 교회를 가리킨다. 이 교회는 경제적인 불이익과 핍박을 면해보기 위해 성도들이 세상과 타협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교회였다. 이 도시 사람들은 뱀신(에스클레피오스)을 주신(主神)으로 섬겼고, 그 외에는 수많은 우상들을 숭배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도시가 사탄이 사는 동네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사탄의 보좌가 있는 동네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교회에는 끝까지 진리를 수호하고 예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주의 종 안디바가 있었으니, 그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대체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세상과 비진리와 타합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교회를 타락으로 이끄는 발람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이 지상에 세워진 교회는 각 교회들마다 자기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에베소교회는 거짓과 이단적인 교리를 잘 분별하려다가 그만 주의 종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를 대표한다다. 그리고 서머나교회는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낸 핍박받는 교회를 대표한다. 그렇다면 세번째로 버가모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 버가모교회는 한 마디로 핍박을 면해보고 경제생활에 어려움을 받지 않으려고 거짓된 교리와 타협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버가모교회는 주님의 책망이 불보듯 뻔하게 예상되는 교회다. 하지만 버가모교회는 성도들 모두가 다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 특히 교회의 말씀을 담당한 주의 종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성도들은 바른 진리를 따르고 있었다. 그중에 버가모교회의 대표자였던 안디바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려다가 순교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소아시아교회 중 세번째 교회에서 해당하는 버가모교회를 돌아보며, 이 교회가 받았던 책망과 권면 그리고 칭찬과 격려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며,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버가모 도시는 어떤 도시이며, 버가모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버가모라는 도시는 오늘날 페르가몬(pergamon)’이나 페르가모스(pergamos)’로도 불리고 있는데, 이는 양피지(perchment)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버가모에는 당시에 20만권의 장서를 갖춘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다. B.C. 197~159년 유메네스 치하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이 도서관의 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버가모의 도서관에 있는 장서들을 빼내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애굽은 파피루스 공급을 중단시켰기에, 버가모에서는 양피지를 본격적으로 생산하여 책의 재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버가모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한편, 버가모는 위치상으로 볼 때, 서머나로부터 해안선을 따라 북쪽 약 104km지점에 위치한 내륙도시로서, 로마와 아시아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교육과 문화가 발달한 아시아에서 매우 유명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과거에는 무시아(Mysia)의 수도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이 도시는 높이 천 피트의 돌 언덕 위에 세워져 있던 언덕 위의 도시로서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B.C.133년 아탈루스 3세가 이 도시를 로마에 헌납한 뒤부터 로마의 예속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B.C.129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로마여신의 신전이 건축되기 시작하면서, 이 도시 주변의 산성 위에 제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 신전 그리고 트라얀황제의 신전과 왕궁이 자리잡게 된다. 심지어 뱀 신인 아스클레피오스(Aesclepios)신전까지 도시 변두리에 자리잡을 정도로 이 도시 안에는 우후죽순 격으로 각종 신전이 건립되었다. 특별히 제우스제단이 아크로폴리스 위에 놓여 있었기에, ‘사탄의 자리를 쉽게 상상하게 했던 도시였다. 다시 말하면, 이곳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우상숭배와 황제숭배가 자리잡고 판을 치던 이교도의 도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어떤 과정을 거쳐 교회가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지만, 성경주석가 바클레이에 따르면, 이 교회의 역사는 매우 짧았고 교세가 매우 빈약했다고 전한다. 이런 면모를 고려하건데 버가모교회는 일찍부터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강요받던 도시였고, 이 교회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전체적으로 감안해 볼 때,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등의 각종 이단 사설에도 노출되어 있었던 교회였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소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버가모교회가 핍박의 때에 순교자를 배출하는 등 귀한 영적 유산과 전통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교인들 중의 상당수가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름으로서 세속화될 위기를 처해 있었다. 그러므로 버가모교회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핍박을 면하기 위해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여 타협한 교회로서 로마국교시대의 교회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교회라고 하겠다(A.D.313~590).

 

3.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그 교회의 상황과 칭찬 그리고 축복의 약속은 무엇인가?(직역강해)

(12) 그리고 너는 버가모 안에 있는 교회의 사자(메시지 전달자)에게 [단번에] 편지하라(쓰라). 예리한 두 날을 가진 칼을 가지고 있는 이가 이것들을 말씀하신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는 계1:16절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으로서, 그분은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인자같은 이 곧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버가모교회에게 왜 이러한 분으로 자기를 소개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버가모 교회의 메시지전달자가 핍박자인 로마정부로부터 칼로 죽임을 당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성도가 비록 핍박받고 환난을 당하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핍박하는 자가 환난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다. 때가 되면 예수께서 곧 재림하시어 칼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날선 검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의 칼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6:17, 4:12, 19:13).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선과 악을 드러내고, 빛과 어두움을 분리시키며, 진리와 비진리를 갈라놓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엡6:17, 히4:12, 계19:13).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3) 나는 [네가] [지금]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아왔다. 그곳에는 사단의 보좌[있는 곳이라]. 그리고 너는 나의 이름을 붙잡고(굳게 지키고) 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부인하지) 않았다. 그리그 그 날들 안에서, 나의 신실한 이, 나의 순교자(증인)인 안디바가 너희들 곁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곳에는 사단이 거주하고 있다.

이제 주님께서는 가장 먼저 이 교회를 향하여 칭찬과 격려를 시작하신다. 이미 절대적인 지식으로 버가모교회의 말씀전달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미 아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버가모교회의 말씀전달자는 누구인가? 당시 그는 안디바’였. 그는 당시 버가모에서 목회하고 있는 주의 종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사탄의 보좌가 있는 장소이자, 사탄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장소였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곳 사람들은 일찍부터 뱀신인 아스클레피오스 신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제우스 신전, 아테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로마여신의 신전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로마의 트라얀황제의 신전과 왕궁도 이 도시에 건축되었다. 다시 말해, 이 도시는 뱀 신을 위시로 온갖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었고, 황제숭배도 왕성한 도시였기 때문에, 사탄의 보좌가 있고, 사탄의 현재 거주하고 있는 도시라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터툴리아누스(A.D.160-220)의 전승에 의하면 안디바(안티파스=모든 것을 반대하다)는 버가모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황제 숭배를 거절하다 불로 달군 놋쇠판 위에서 태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14) 그러나 나는 너에게 반하여 작은 것을 가지고 있다. 네가 거기에서 발람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는(굳게 지키고 있는) 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발람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앞에 올무(올가미, )[단번에] 던지도록 발락에게 가르쳐왔다. 우상의 제물(고기)[단번에] 먹도록 그리고 [단번에] 음행하도록.

이어서 주님께서는 버가모교회를 책망하신다. 왜냐하면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아 책망할 요소를 몇 가지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발람의 가르침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5절에 나오는 것처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발람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22~24, 31:16). 발람은 유브라데강가 브돌에 사는 이방선지자였다. 그런데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발람선지자에게 온갖 돈을 갖다 바쳤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셨기에 3번씩이나 저주하지 못하고 축복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돈을 받은 상태였기에, 돌아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망하게 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갔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잔치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대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이어지는 음행에 같이 동참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람선지자가 가르쳐준 그 올무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래서 그날 하나님이 치심으로 염병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려 24천명이나 되었다. 만약 그때 대제사장 비느하스의 의분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그때까지 아직 그 도시에 있었다. 우상숭배와 음행. 만약 이것을 제거하지 못한다면책망을 듣고도 지옥행인데 말이다.

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그렇다면, 발람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올무에 걸려 죄를 짓게되어,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미혹하는 가르침을 가리킨다. 실제로 버가모 교회 안에는 발람과 같이 발람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그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William James Durant에 의하면 버가모 지역의 이교도 축제는 봄에 디오니소스(술의 신, 로마의 박카스)3일 축제 기간 중에는 술이 무료로 제공되었으며, 모든 사람이 술에 취한 채 음란한 연극을 보았으며, 축제 기간 동안 성적 자유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버가모 교인 중 일부가 발람의 가르침에 따라 그 지역의 문화 축제에 참석하여 술을 먹고 음란한 연극을 관람하고 성적 음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비슷하다. 일제 강점기 때에 신사참배의 압박이 가중되자 많은 교회들이 발람의 가르침에 따라 변절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라고 언급하므로, 수많은 목사와 교인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처럼 실시했으며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지옥 백성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5) 이와같이 너도 역시 유사하게 니골라당들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는(굳게 지키고 있는) 자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미워한다(TR)].

한편 이들 교회 중에는 에베소교회와는 반대로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이 교회는 성도가 딱 2가지로 분류되어갔다. 한 부류는 오직 안디바 감독처럼 순교자에 속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시에 그렇게 한다면, 굶주리게 되고 정죄받아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뻔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또 한 부류가 생겨났다. 이들은 비록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이미 영 안에서 구원얻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이것은 큰 일 날 일이었다. 그것이 곧 변형된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세상과 타협해버리는 성도들이 있는가하며, 끝까지 주님이 가르쳐준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신앙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선택의 몫이지 하나님께서 강제로 그렇게 만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결정해야 한다. 주님 앞에 서는 날, 책망을 받을 자로 설 것인가? 아니면 칭찬듣는 자로 설 것인가? 더 나아가서는 과연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갈 자가 될 것인가를 말이다.

 

(16) 그러므로 너는 [단번에] 회개하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에게 []속히 간다. 그리고 내 입의 칼 안에서 그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명령하셨다. 지금 당장 회개할 것을 단호하게 요청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회개하지 아니한다면 주께서 당장 찾아가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말씀)으로 그들과 싸울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19:15-16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구약성경 민23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발람이 발락왕에게 가지 못하도록 여호와의 천사를 보내 칼로 길을 막았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발람선지자는 그 경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칼에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17) 귀를 가지고 있는 자는 그 영이 교회들에게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단번에] 들으라. 이기고 있는 바로 그사람, 내가 그에게 감추어진 채 있는 만나를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흰 돌[장차]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돌 위다가 기록되어진 채 있는 새 이름을 줄 것이다. 그것은 아무도 알아온 채 있지 않다. 만일 받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회개하여서 우상숭배와 음행의 행위들을 그치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칭찬과 상급이 주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크게 2가지다. 첫째는 이미 감추어진 채 있는 만나[미래에] 먹도록 해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는 하늘양식으로서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40년간 먹었던 음식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마도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미래에) 천국에서 먹을 음식인 것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안디바와 같은 이기는 자들에게 왜 감추어진 채 있는 만나를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버가모교회 성도들 중에서 충성된 증인 안다바를 따르는 자들로서, 그들은 우상숭배와 황제숭배를 거절했으며 음행을 거절했기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천국에서만큼은 가장 좋은 음식을 먹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하신 것이다.

둘째, 그들에게 흰 돌을 주실 것이라고 했다. 이것도 미래형이다. 흰 돌이란 아마도 우림과 둠밈이라는 대제사장의 판결흉패에 들어있는 조약돌을 의미하는 것 같다. 특히 여기서 흰 돌은 죄없음을 뜻한다. 안디바를 따르는 자들은 로마정부로부터 그리고 버가모 도시에서 불법자로 취급을 받았고 그래서 유죄판결을 받아 죽임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천국에서 죄가 없다는 것을 선언해주시겠다는 뜻이다.

또한 그 흰 돌 위에는 이미 기록되어진 채 있는, 그리하여 시간적으로 새로운 예수님의 새 이름이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이들이 영원한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4. 나오며

  신앙은 갖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특히 기독교인이 되면 불이익을 준다거나 경제활동에 제재를 가하고 도시에서 추방하며, 때로는 화형당하거나 사자밥이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안디바처럼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주님은 세상과 타협하고, 거짓교리를 만들고 그것을 따라가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말씀하셨다. 아니 칼로 그를 잘라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진리와 타협할 것인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고, 억울한 일 당하는 것 같고, 희생이 뒤따르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길이 버가모의 안비다가 걸어간 것처럼 생명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주 이 시간에는 두아디라교회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교회의 지도자들마저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에 넘어간 안타까운 사례를 집중하여 조명하고자 한다.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26일(수) 1차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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