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당면한 백성들의 문제(대표적인 예는 병자를 치유하는 일)를 해결해주는 일이었다. 전자는 당장에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죽은 다음에는 가장 필요한 일이요, 후자는 당장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도 죽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에 속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2가지가 다 필요하다. 마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의 말씀처럼 '떡'에 해당하는 육신적인 것도 필요하고, '말씀' 에 해당하는 영적인 것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역자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균형을 잡지 못하고 한 쪽에 치우친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너무 천국만을 강조하다가 현실과 동떨어진 괴리감에 젖어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너무 현실의 치유와 복만을 강조하다가 궁극적으로 성도들이 들어가야 할 천국에 대해서는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라. 주님께서는 항상 이 두 가지 사역 즉 천국복음을 증거하는 일(영적인 일)과 당면한 백성들의 육신적,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을 병행하셨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전자가 먼저 나오고 때로는 후자가 먼저 나오기도 한다. 오늘 요5장 1~9절에서는 38년된 중풍병자에 대한 치유가 나온다. 이어서 죄사함에 관한 영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무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건이더라도 주님께서는 그냥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표적으로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혹시 기적과 표적의 차이를 아는가? 둘 다 기적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표적은 그 기적 안에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요한복음에는 총 7가지의 표적들이 나온다. 물론 다 기적들이다. 첫번째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이요, 둘째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여 소생시키는 기적이다. 그리고 오늘 요5장에서 우리는 세번째 표적이 나온다. 그것은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이다.
첫번째 표적에서 주님은 자신이 언젠가는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셨기에 표적이라 부르고, 두번째 표적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은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임을 암시하고 있어 표적이이 불리었다. 그렇다면 이제 세번째 표적은 무엇 때문에 표적이라고 불리우는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인간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그것을 보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고 있어서 표적인 것이다. 이 사건에 등장하는 장소는 양의 문 앞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이다. 예루살렘 북쪽에 나 있는 베냐민의 문이었던 이 문은 양이나 염소, 송아들이 드나드는 문이라하여 양의 문이라 불렸다. 그런데 거기에 스스로는 도저히 병고침을 받을 수 없는 한 중풍병자가 있다. 주님이 아니고서는 그는 결단코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몸을 못 움직이기 때문에 그 연못의 물이 동한다해도 결코 그곳에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스스로는 자기를 보호하기도 어렵고 죽을 수밖에 없는 양과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베데스다(벧+헤세드=긍휼의 집)에 직접 찾아오신 목자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이 기적의 영적인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주님께서는 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셔야만 했을까? 그것이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부딪힘을 유발한다는 것을 정녕 모르셨을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시고는 그로 하여금 자신이 누웠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다. 안식일에 물건을 운반하면 안 된다는 장로들의 유전을 주님은 정녕 모르고 있었을까? 전혀 아니다. 주님은 다 아시고 계셨지만 그렇게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이미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이며, 지금 그 일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이 세상에 놀러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일하러 오셨다. 하나님의 일 중에서도 죄와 마귀와 죽음으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이를 위해 그분은 친히 속죄제물이 되셨으며 또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사드리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을 한다 하더라도 결코 안식일법에 저촉되는 분이 아니시다.하지만 인간이 죄와 질병과 마귀에 눌려 시달리고 있는 것을 그냥 놔 둘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도 쉴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요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