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부활이후에 자주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다음 자기들의 곁을 떠나시고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지 않은 시간에 주님은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격려해주셨으며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셨다. 왜냐하면 항상 주님은 제자들 곁에 계시다는 것을 훈련하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도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언제까지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아니었다. 승천하기기 전까지만 보여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지금까지 성도들은 예수님을 이세상에서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천국에 가면 그곳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지만 말이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날 아침에 하늘에 올라가셔서 첫열매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신 이후 그날 저녁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을 생각해보라. 그때에는 항상 그분이 제자들의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명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따로 가실 경우 나머지 9명에게는 주님은 그들곁에 없으셨다. 하지만 예수께서 육체를 떠나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시고 이제는 무소부재의 창조주의 상태에 들어가신 다음부터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존재방식이요 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존재방식이다. 주님은 이제 항상 우리와 임마누엘하시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무소부재한 상태로 돌아가신 예수께서 나타나사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 첫째, 그들에게 평강을 기원하셨다. 둘째,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파송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이제 또다시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셨다. 이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오심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오심인 것처럼 제자들의 파송도 곧 예수님의 파송이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베드로만 불러서 오직 베드로만에게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지는 않으셨다. 로마카톨릭에서는 베드로에게 사죄권과 교회설립권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먼저는 열한제자들이고 그 다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그러한 권한이 있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어리석고 우준한 자들까지도 주님의 대사로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신은 것이다. 셋째, 성령을 바람처럼 제자들의 호흡 속에 집어넣어주셨다. 이때 성령은 정관사가 붙어있는 '그 성령'이 아니라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늘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오순절날 강림하여 제자들 속에 임재하셨고, 부활후 첫날 저녁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창조시 아담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제자들에게도 호흡처럼 불어넣어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동생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해도 예수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복음전파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되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뤄지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날 아침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형되심으로 원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셨다. 하지만 그분의 긍휼과 온유한 마음은 변함이 없으셨다. 왜냐하면 부활절날 저녁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에는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래서 도마가 자신은 보고 믿겠노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도마를 위해 일주일 뒤에 또 다시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사용해 못자국와 창자국에 넣어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 있는 자다"고 하셨다. 그렇다. 당신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은 사람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복된 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직접 본 도마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는 베드로보다도 더 확실하고 더 나은 신앙고백을 했다. 베드로는 차마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까지는 고백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이는 예수께서 구약에 나오는 바로 그 여호와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여러분은 공관복음서가 이미 기록되어 있었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네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을 쓰게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요한은 2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궁극적으로 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려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렇다. 요한복음은 특별한 책이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없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독생자라 불렀다. 하지만 이제는 그분을 믿는 모든 자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요한복음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요한복음을 읽었음에도 거기서 예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메시야)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당신은요한복음을 잘못 읽은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요한복음을 잘못 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