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 시리즈(1강~6강)입니다.

by 갈렙 posted Dec 0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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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youtu.be/Q2y-2FbQy7Q
날짜 2013-09-25
본문말씀 베드로전서1:1-5:14
설교자 정병진목사

베드로전서 강해 시리즈(1강~6강)입니다(2013.09.25~2013.10.30)

베드로전서강해(01) 성도가 간직한 하늘의 산 소망(벧전1:1-12)

베드로전서강해(02)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3-2:10)

베드로전서강해(03) 국가와 주인에 대한 바른 자세(벧전2:11-25)

베드로전서강해(04) 부부를 위한 권면과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벧전3:1-22)

베드로전서강해(05) 종말의 때에 고난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벧전4:1-19)

베드로전서강해(06) 교회의 지도자와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벧전5;1-14)







 날      짜: 2013-09-25
 제      목: 베드로전서강해(01) 성도가 간직한 하늘의 산 소망(벧전1:1-12)



  
▒ 본문말씀 ▒
:: 벧전1:1~12(신약 377면) ::

  베드로전서, 왜 썼을까? 베드로는 원래 글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는 헬라어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헬라어로된 편지를 남겼다. 그것도 자기 전도하지도 않았던 사람들, 소아시아 북쪽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늙은 노사도는 과연 그들에게 무슨 말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인가? 베드로는 원래 할례받은 신자들만을 위한 사도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가 지금 이방인 그리스인들이면서 또한 자기가 전도하지도 않은 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있다. 그들에게 뭔가 중요한 변수가 생긴 것이다.
  베드로전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적어도 A.D.64년 이후에 썼던 것으로 판단된다. 내증이 그렇다. 당시 로마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의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네로 황제가 로마시의 대화재(A.D.64년)의 주범으로 그리스도인을 지목하고서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하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밖에서 볼 때는 로마에 대한 불만세력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죽어갔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여러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소아시아 지역에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또다른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이방인들은 우상을 숭배했고, 우상의 제물을 나눠먹었으며, 신전의 여사제들과 음란한 행위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를 할 수 있으며, 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적당히 타협하고 살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했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은 바위를 타고 올라가 중간에 구멍을 파고 그곳에서 생활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갑바도기아 지방 성지순례를 가보면 그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종합해보면,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핍박과 각 지역사람들에게 많은 괴롭힘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음란과 욕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데 자기만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려 해보라. 얼마나 힘들고 생뚱맞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지조를 지켰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들을 위로하여 점점 더 거세어질 핍박을 믿음으로 견뎌내라고 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그들에게 써 보낸 것이다. 그것도 실라(실루아노)에게 대신 써달라고 해서 말이다.
  베드로전서는 3부분(1:1~12, 1:13~4장, 5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1:1~12은 서론부에 해당된다. 서론에서 베드로는 소아시아북쪽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 핍박을 견뎌내고 있는 것을 칭찬하면서, 이방인이라도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게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기업을 잇는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 것이다. 그렇다. 이방인이 거듭나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결국 이기는 자가 되어 하늘의 기업을 잇는 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현재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 한국사람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다. 하지만 구원에서 제외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상속자까지 예정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날      짜: 2013-10-02
 제      목: 베드로전서강해(02)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3-2;10)



  
▒ 본문말씀 ▒
:: 벧전1:13-2:10(신약 378면) ::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이 갖는 속성이 있다. 우리는 신학적 용어로 그것을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도 가지고 계시면서 우리 인간에게도 조금 남아 있는 속성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을 우리는 공유적 속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유적 속성에서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에는 사랑, 거룩함, 인자함, 자비로움, 의로움, 선하심, 일정하심 등이 있을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베드로가 오늘 베드로전서 본론부의 서두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것은 '거룩'이라는 속이다. 
   성도란 모름지기 거룩해야 한다. 레11:44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원래 거룩하신 분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응당 거룩함(깨끗함+분별됨)의 속성이 나타나야 합당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 위장하여 속이고 있는 가짜 아버지인 마귀는 과연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을까?(요8:44). 마귀는 더럽고 추하다. 그리고 변덕스럽다. 또한 아주 악하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마귀의 속성만이 내 인격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말 거듭난 자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아비가 안 바뀌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어떤 댓가를 치르셨는지 아는가? 값으로 계산이 되지 않는 엄청난 비싼 댓가를 치르셨다. 그의 아들을 대속제물로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단지 양 한 마디나 소 한 마리를 잡으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이신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제물로 내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갓 태어난 성도들은 영적 성숙을 이루어 마침내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2가지가 필요하다. 소극적으로는 내 안에 부정적인 모든 것들 즉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순전하고 합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어린아기가 부모의 젖을 통해 자양분을 얻어 성장하듯, 성도들은 항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먹고 순종하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먹기를 사모하고 있는가? 그 말씀을 읽고 거기에 기록된대로 순종하고 있는가?
  아울러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더 권면하기를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연합하여 피차 뜨겁게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라고 명한다. 사실 그리스도는 교회의 기초이신 모퉁이의 머릿돌이시다. 그분은 무기체가 아니라 유기체이다. 지금도 성령으로 인하여 성도와 함께 집을 건축하고 있으시다. 그분이 유기체인 산 돌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배척하고 싫어하는 자에게 그분은 심판의 도구가 될 것이다. 거친 돌이나 부딪히는 돌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믿음으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였는가? 구원받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는 자이지만 우리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미덕을 선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 그래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과연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증거해야 한다. 그래야 거룩한 하나님을 닮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신부가 되지 않겠는가? 자, 이제는 자신을 돌아볼 때다. 나는 과연 거룩한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축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가? 이제 자신을 돌아보자.




 날      짜: 2013-10-09
 제      목: 베드로전서강해(03) 국가와 주인에 대한 바른 자세(벧전2:11-25)



  
▒ 본문말씀 ▒
:: 베드로전서2:11-25(신약 379면) ::

  사도 베드로는 혈기가 있던 사람이었다. 혈기는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열정이 끓는 자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나쁘게 표현하자면, 자기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 다혈질에 혈액형으로는 O형같은 성질을 지닌 자였다. 그러니 육체로 계신 예수님의 곁에서 예수님의 제자교육을 받을 때 가장 열심이었지만 가장 실수가 많은 자였다. 그러니 말은 앞세워 나갔지만 실제 행동은 자신의 말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그것이 한이 되었나보다.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읽어보라. 그는 믿음의 실제와 삶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량을 할애하지만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않고 있다.
  베드로전서의 본론부(1:13~4:19)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 오늘 살펴보게 될 벧전2:11-25의 말씀도 거룩한 삶에 대한 실천적인 권면이 주를 차지한다. 전반부(2:11-18)에서는 이방인 중에서 선한 행실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각종 세속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2:19-25)에서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선행 중에 고난을 감수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성도란 어떤 존재일까? 그 정체성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성도란 거류민 내지는 나그네라고 표현한다(벧전2:11-12). 이 말씀은 이 세상은 잠시 들렀다가 가는 장소임을 알라는 것이다. 그렇다. 성도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은 저 하늘나라일 뿐 이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의 주막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나그네 인생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주의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베드로 사도는 우선 2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성도란 먼저 자신의 내면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둘째, 외적으로는 외부인에게까지 칭찬들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벧전2:11).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함이다.
  더욱이 성도들은 나라의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도록 하나님께서 권세를 부여하여 세운 왕이나 총독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벧전2:15).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은 위에 있는 권세에 잘 복종하려 하지 않는다는 어리석은 말을 막기 위함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죄와 율법으로부터는 참으로 자유케 된 사람이다.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한 종으로 자신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가장 아름다운 삶이긱 때문이다(벧전2:16).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나 상전들이 선하고 너그럽지 않게 대한다해도, 다시 말해 까다롭게 대한다 해도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위하여 그들을 기쁨으로 섬길 줄도 알아야 한다(18절).
  한편, 베드로 사도는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부당한 대우를 받은 상황에서도 결단코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더욱이 예수님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자를 협박하지도 않으셨으며, 모든 것을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위탁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본을 따르라고 독려한다(벧전2:19-25). 예수님은 결단코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매를 맞은 분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형을 받으신 분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죄악에 물들어 있어 그 가운데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고난을 받으셨다. 조롱을 당하셨다. 침뱉음도 당하셨다. 배반도 받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되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하지도 않은 일에 모함을 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거나 채찍질을 받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리고 그때에 믿는 자로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일까? 그러므로 선행으로 악행하는 자들의 입을 막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심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당신도 이렇게 행할 자신이 있는가? 우리는 날마다 내 자신의 성질과 성품을 내려놓고 주님으로 채워저야 한다. 그래서 주님처럼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아멘.






 날      짜: 2013-10-16
 제      목: 베드로전서강해(04) 부부를 위한 권면과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벧전3:1-22)
  
  
▒ 본문말씀 ▒
:: 베드로전서 3:1-22(신약 380면) ::

  베드로는 왜 편지를 써야했을까?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믿음의 식구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위해 이 편지를 썼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시 선을 행하고도 엄청난 핍박의 풍파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를 희생하며 선을 행하고 있었다. 더불어 황제숭배와 음행에 맞서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난 뿐이었다. 특히 자신의 불신남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노사도는 믿는 아내들이 불신남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건지 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쓴 것이 베드로전서 3장이다.
  베드로전서 3장은 아내들이 남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노사도의 고민의 스며있다. 그리고 그가 알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전한다. 그것은 아내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신남편이라도 믿는 아내의 말이 아니라 아내의 행위를 보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신남편들에 대한 믿는 아내의 태도를 보자. 정말 남편들이 존경할만하고 사랑받을만하고 신뢰할만하고 순종할만한 사람이어서 순종하고 있을까? 아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요 그것이야말로 불신남편의 전도방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에게 어느정도까지 순종해야 할까?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는 것은 남편을 주님처럼 알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마치 구약시대에 사라가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며 순종한 것처럼 그렇게 하라고 권면한다. 당시 주인은 종의 목숨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남편에게 순종하되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쉽지는 않은 명령이지만 정말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불신남편도 돌아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어서 베드로는 믿는 여자 성도들은 자신의 외모를 단장하는데 치중하지 말고 내면의 속사람을 단장하라고 권면한다.

  계속해서 베드로사도는 남편들에게도 말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아내를 절대 버리지 말고, 아내는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 감싸안아주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아내가 비록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연약하지만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측면에서는 남자와 동등한 신분을 가졌음을 주지시키며, 남자들이 드리는 기도가 응답이 되려면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 권면한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행실이 중요한 것 같다. 특히 나를 핍박하고 못살게 하는 까다로운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믿는 이들은 선을 악을 익겨야 한다. 그들까지 축복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들을 위해 비는 기도가 그를 변화시키든지 아니면 그 기도가 나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베드로사도는 선을 행했지만 고난을 당할 때에라도 좌절하거나 지치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냐하면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예수께서 의인이셨지만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결코 맞서 대항하지 않으셨다. 침뱉음을 당해도, 모욕적인 언사를 받아도 예수께서는 묵묵히 참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위탁하셨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원수들을 용서해주셨고 그들을 축복해 주셨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을 하늘에 오르게 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히셨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천사들이 복종케 하셨다. 
  왜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믿는 이들이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했어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라도 예수님처럼 행한다면 그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게 되고 천사들까지 다스리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내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당신도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고난에 직면했을 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그러면 천국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권세있는 자가 될 것이다.




 날      짜: 2013-10-23
 제      목: 베드로전서강해(05) 종말의 때에 고난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벧전4:1-19)



  
▒ 본문말씀 ▒
:: 벧전4:1-19(신약 499면) ::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에는 한 가지 비밀이 담겨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었는데도 고난을 받으셨다. 그 결과 중 하나는 그 고난으로 인하여 죄를 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벧전4:1).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은 크게 2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빗대어 설명하자면 그것이 하나는 잔이요 또 하나는 세례다(막10:38). 잔은 육체에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서 피흘리는 고통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채찍에 맞으시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당하신 것을 가리킨다. 또 하나는 세례의 고난이 있다. 이것은 죽음의 고난을 가리킨다. 세례란 옛 사람을 물 속에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린다는 의미가 들어있듯이 고난받으심의 끝은 결국 죽음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2가지 고난을 다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육체에 심한 고통을 겪으셨으며, 결국에는 육체의 심장이 멎는 죽음을 맞이해야했다.
 
하지만 놀라지 말라. 결국 그것은 자신의 죄된 육신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서 멸해버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에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육체에 고난을 받으신 이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마찬가지다. 지금의 자신의 육체에 고난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란 자신의 죄를 끊어버리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 것이든 고난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 결국 죄를 끊는 데에 많은 효과를 가져다 준다. 고난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육체에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맨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무슨 범죄한 일이 있는가"를 살필 것이다. 고난은 그것이 죄로 인한 고난이든 의로 인한 고난이든 똑같이 자기자신을 돌아보아 한다. 그리고 이어서 회개하게 한다. 그리하여 결국 죄를 그치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고난 때문에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죄로 인한 고난을 받고 있다면,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아왔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이미 장사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행위를 당장 그쳐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극한 방탕에 달음질했던 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때 불신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일까? 우리가 죄들을 그치는 것을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비방하거나 핍박하는 자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결단코 낙심하지 말라. 왜냐하면 심판의 날이 오게되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주님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게 될 터인데 그때 자신의 말과 행위를 주님 앞에 이실직고하게 될 것이니까.
  지금 우리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시기에 살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먼저는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적어도 자기의 생각과 행위가 죄인지 아닌지는 구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깨어서 죄악된 삶속에 자신을 넘겨주지는 않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무슨 일을 행하든지 주님께서 공급하는 힘과 지혜로 하듯이 행하여,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믿는 자들이라고 해서 불시험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단의 불시험을 당할 때에 결코 이상한 일처럼 취급하지 말라.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하라. 왜냐하면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심판대 앞에 밝히 드러날 것이며 그때에 하늘로부터 칭찬과 상급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누구든지 죄를 지어 고난을 일부러 당할 필요는 없겟지만 예수를 믿는 이유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당신에게 매우 유익하다. 그러므로 그런 고난을 받을 때에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라. 
  주님의 심판의 때가 되면 그리스도인이 먼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 칭의인이 된 그리스도인이 겨우 구원얻는 지켜볼 때에, 불경건한 자와 죄인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을 것이다. 구원, 고난을 통해 더욱 더 무르익어갈 수 있는 것이다. 결단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은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요, 하늘의 상급을 보장해주니까...



 날      짜: 2013-10-30
 제      목: 베드로전서강해(06) 교회의 지도자와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벧전5;1-14)
  
  
▒ 본문말씀 ▒
:: 벧전5:1-14(신약 382면) ::

  오늘은 베드로전서강해 마지막시간이다. 이제 베드로 사도는 벧전5장을 통해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간에 지켜야 할 윤리와 자세(벧전5:1~14)에 대해 말한다. 베드로 사도는 먼저는 장로된 자에게 권면을 하고 이어서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권면을 한다. 그런데 둘 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것이라 한다.
  먼저, 베드로 사도는 당시에 로마제국내에 흩어져 있는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에게 권면한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장로들을 기꺼이 '장로'라 불렀다. 다시 말해 벧전 5장 1절-4절의 말씀은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인 것이다여기에서 베드로사도는 자신이 먼저 장로된 자로서 동료장로들에게 권면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들에게 3가지 목양사역의 지침을 내린다.
  첫째, 장로들은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자세로 목양사역을 하라고 한다. 둘째, 장로들은 더러운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맡기신 사역자체에 대한 기쁨으로 목양사역을 하라고 권한다. 셋째, 맡겨진 양떼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로 오로지 앞서서 본이 되는 자세로 목양사역을 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훗날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공중에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을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다.
  사실 지도자가 되어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섬기고 돌보는 사역을 하기보다는 아랫 사람들을 누르고 압제하며 그들을 통해 뭔가를 누릴려고만한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지도자는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의 실천으로 그 지도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어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요청되는 첫번째 자세는 순종하는 자세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은 사탄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겸손함으로 허리를 동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사도는 고난 중에도 굳게 서있으라고 권면한다(벧전5:7~11). 이를 위해서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 한다. 사실 염려의 배후에는 사탄이 항상 있다. 그러므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면서 꼭 해야 할 것은 사탄을 대적하는 기도다. 야고보도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고 하지 않았던가!(약4:7).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염려와 근심만을 생각하지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항상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 명한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는 세상 드라마에는 주연과 조연이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직 충성과 겸손에 따른 구분이 있을 뿐이라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바벨론에 위치해 있으므로 고난이 올 때마다 놀라지 말고 올 것이 왔다는 각오와 자세로 고난을 이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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