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강해(1강~52강) 시리즈(2)입니다(눅7:1-11:46)

by 갈렙 posted Dec 0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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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youtu.be/VeyGzPwaO0o
날짜 2012-08-29
본문말씀 누가복음 7:1~11:46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누가복음 강해

누가복음강해(1강~52강) 시리즈(2)입니다(눅7:1-11:46)

누가복음강해(11) 고치시고 살리시는 예수님(눅7:1-17)

누가복음강해(12) 세례요한과 향유부은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눅7;18-50)

누가복음강해(13) 씨뿌리는 비유와 예수님의 참 가족(눅8;1-25)

누가복음강해(14) 자유케하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눅8;26-56)

누가복음강해(15) 오병이어의 기적과 베드로의 신앙고백(눅9;1-22)

누가복음강해(16) 영광의 길과 제자의 길(눅9;23-62)

누가복음강해(17) 70인의 전도대와 예수님의 감사기도(눅10:1-24)

누가복음강해(18) 영생의 조건과 빼앗기지 않을 복(눅10;25-42)

누가복음강해(19) 주기도와 기도응답의 확실성(눅11;1-13)

누가복음강해(20) 바알세불 논쟁과 권세의 능력(눅11:14-26)

 

 
  날      짜 : 2012-08-29
  제      목 : 누가복음강해(11) 고치시고 살리시는 예수님(눅7:1-17)
     

 

 

   
▒ 본문말씀 ▒
  :: 눅7:1-17(신약 100면) ::

 

  오늘은 예수님의 전기 갈릴리 사역 가운데, 12제자를 선택하신 후 2차 갈릴리 사역에 해당된다. 본문에 보면 중풍병자의 치유와 죽은 청년의 소생사건이 나온다. 그런데 본문의 치유와 소생사건은 여느 사건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다.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님께서 그 현장에 없었음에도 그리고 본인이 간절한 바램이나 소원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에서 치유받았을 뿐만 아니라 강건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리고 죽은 청년의 소생사건은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청하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 살려주시고 있다. 왜 예쉼은 그 청년을 살려주신 걸까?

  먼저, 중풍병자의 치유사건을 보자.
  이 중풍병자는 소년 종이다. 그런데 이 종을 주인이 사랑했다. 그 주인은 로마의 군대지휘관인 가버나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종을 아들처럼 사랑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자신의 문제로는 주님을 청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종의 문제를 가지고서는 예수님을 청했다. 처음에 그는 예의를 어긋나지 않도록 자신의 부하를 보내지 않고 유대의 장로들을 보냈다. 하지만 중간에 그의 친구들을 다시 보냈다. 그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번거롭게 오시지 마시고 그곳에서 말씀만 해도 종이 나을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백부장은 3가지면에서 예수님을 놀라게 했다. 첫째, 그는 예수님의 인격이 아니라 말씀만으로부터 자신의 종이 치유받을 것을 믿었던 것이다. 둘째,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그 어떤 상관보다도 더 높은 권위자로 인정했던 것이다. 셋째, 그는 자신을 예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낮추었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하고도 남았다. 선민인 이스라엘백성 가운데서도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진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백부장의 믿음 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이다. 그는 유대인의 장로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친구들이 그를 도와주고 있으며, 한낱 물건과 같은 종을 자식처럼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신적 권능을 지닌 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병이 왜 안 낫느냐고 묻기 전에 우리는 어떠한 믿음과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 같다.
  두번째로, 죽은 청년의 소생사건을 보자.
  이 청년은 외아들이었다. 그리곡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다시 말해 그의 어머니는 두 가지를 다 잃었다. 남편을 잃었고 아들을 잃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절망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장례행렬과 어긋맞기듯 그 옆에 예수님이 지나가셨다. 우리 주님의 행렬은 장례행렬이 아니라 기쁨의 행렬이요 생명의 행렬이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생명되신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된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의 상태가 바로 그러한 상태임을 아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자. 절망의 자리에 오셔서 우리를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인도하실 분은 오직 주 예수님 뿐이다. 할렐루야.

 

 

 

 
  날      짜 : 2012-09-05
  제      목 : 누가복음강해(12) 세례요한과 향유부은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눅7;18-50)
     
 
   
▒ 본문말씀 ▒
  :: 눅7:18~-50(신약 ::

 

  눅7:18-50절의 말씀은 두 사람 즉 세례요한와 향유부은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이다.
  먼저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살펴보자.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헤롯안디바의 죄악을 보고 회개하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을 예수님께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세례요한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자신에게는 인색한 예수님을 생각하며 실족하려 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자신을 구해달라는 말은 좀 우회하여 예수님께서 오실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말해달라고 그의 제자들을 보냈다.
  그러자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할하고 했다. 그것은 곧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세례요한에 대해 오해할까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내려주신다. 그리고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전혀 무감각한 세대를 향하여 회개를 외치신다.
  이어 벌어진 사건은 당시의 세대가 어떤 상태였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바리새인이었던 시몬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그에게 홀대를 받았는지가 적나나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 집을 찾아온 한 죄인인 여자는 달랐다. 그는 그의 모든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겼다. 그녀는 예수님의 뒤로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리고는 그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았으며, 귀한 향유담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죄인취급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그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데, 정작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얼마나 주님을 냉대하고 그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지를 시장터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의 놀이를 통해 설명하신다.
  왜 이리 세대가 악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무관심할까?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죄인인 여자가 행한 것을 통해 주님의 용서를 받는 자들의 태도를 보자. 우리 자신과 비교해 보자. 

 

 

 
  날      짜 : 2012-09-12
  제      목 : 누가복음강해(13) 씨뿌리는 비유와 예수님의 참 가족(눅8;1-25)
     
 
   
▒ 본문말씀 ▒
  :: 눅8:1~25(신약 103면) ::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8장의 전반부 말씀을 나눌 것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애 가운데 필요한 재정을 어떻게 충족했는지와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이야기하실 때에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알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노상에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지처럼 빌어먹으면서 살지도 아니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어느 집이나 여관에 머무셨으면 음식을 사먹거나 누군가의 섬기는 손길로 인해 의식주문제를 해결하셨던 것이다. 누가 그랬을까? 누가복음에서는 그 비밀을 알려준다.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거나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축사를 통해 해방을 받은 여인들이 주로 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눅8:1-3).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이었다. 우리도 만약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이어 예수께서는 천국을 설명하실 때, 비유로 말씀하신다. 대표적인 비유가 바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다. 예수께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심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더 풍성해지지만 마음이 완악하고 주님말씀듣기를 거부하는 자에게 도무지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4종류의 밭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밭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일날마다 말씀을 듣고 있는 당신은 과연 어떤 마음밭의 소유자인지 살펴보라.
  길가, 돌짝밭(바위 위), 가시떨기, 좋은 밭(옥토). 우리는 옥토밭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기를 사모해야 할 것이고, 말씀을 듣고 핍박과 시련이 닥쳐와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아야 하며, 세상의 욕심이나 쾌락 혹은 세상이 주는 근심을 떨쳐버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지키고 인내로서 결실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어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참가족관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과 피로 맺은 혈육관계가 하늘나라의 가족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자동적인 유산이 많다고 자고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있는 자신인지를 살펴보라.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광풍을 꾸짖어 잠잠케 하신다. 어떻게 바람과 물결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을까?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꾸짖었을 때 꾸지람을 받는 대상이 나오는데, 그것은 인격체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단 2가지 사례에 인격체가 아닌 것을 꾸짖으셨다. 한 번은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꾸짖었으며, 한번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다. 한편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꾸지람을 받는 대상이 나온다. 그들은 귀신들이었다. 결국 사람에게 병을 가져다주고, 바람과 물결이 일으켜 배를 전복시켜려 뒤에서 조종한 존재들은 다름 아닌 귀신들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앞에 좋지 않는 환경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그 환경이 떠나가도록 명령해야 한다. 그 환경을 꾸짖어라. 그리고 악한 영들을 결박하라. 그것은 바로 우리 신자의 특권이니까. 할렐루야.
 
 
 
  날      짜 : 2012-09-20
  제      목 : 누가복음강해(14) 자유케하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눅8;26-56)
     
 
   
▒ 본문말씀 ▒
  :: 눅8:26-56(신약 104면) ::

 

  눅8:26-56에 보면 귀신의 정체와 병든 자의 치유에 있어서 핵심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다.
  첫째, 귀신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자.
  예수께서 유대인의 마을인 가버나움마을에서 볼 때 바다 건너편에 있던 가다라지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무덤사이에 지내던 귀신들린 한 남자가 그를 보고 엎드려 예수님께 경배했다. 그리고 자기를 쫓아내시려 한다면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고 돼지떼에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귀신이 들렸던 것이 아니라 군대귀신이 들려있었다. 그러므로 그 남자는 미치광이처럼 살았다. 쇠사슬이나 쇠고랑도 그를 붙들어 둘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출현은 그를 온전케 했다. 옷을 입고 단정히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먼저 귀신들림의 증상부터 알아보자. 사람에게 귀신들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그때에라도 온 종일 귀신이 그를 붙들어서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에 그러한 발작증세가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귀신의 도구이다. 그래서 귀신은 그 사람의 입을 통해 말을 할 수 있으며 상대방이 누군지도 알아본다. 그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즉시 알아보았다. 그리고 귀신은 자신의 최종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는 무저갱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은 과연 사람 속에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을까? 무덤 사이에 머물던 이 사람에게는 적어도 2천마리정도의 귀신이 들어가 있었다. 놀랍지 않은가? 그 귀신들 중에서도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귀신은 그 귀신들 중에서도 보다 더 높은 계급의 귀신이었다. 그러므로 그 귀신에게만 축사했을 때 그는  잘 떠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사람 속에 군대귀신이 들어있는 것이 확인되어지는 순간 그 귀신들은 모두 그 사람에게서 나갔다.
  그렇다. 오늘날 축사하는데도 귀신이 잘 나가지 않는 이유는 단 2가지다. 축사자가 귀신보다 권세가 더 약할 경우이 첫번째의 경우이다. 그리고 사람 속에 귀신이 한 명만 들어가 있지 않고 많은 귀신이 들어있는 경우다. 그럴 때에는 몇 명이나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축사해야 한다. 그래서 모두다 한꺼번에 나간다.
  둘째, 치유의 핵심사항에 대해 알아보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다시 도착했을 때,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께 엎드렸다. 그의 12살먹은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은 회당장의 안내를 받고 그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만나 시간이 지체가 되었다. 결국 그 소녀는 죽고 말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간증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야이로에게 심어주었다. 결국 야이로는 믿음이 뭔지를 알았고 결국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었다.
  믿음은 사실상 한계가 없다. 어떤 믿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혈루증여인은 예수님의 옷가만 만져도 병을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처음에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셔서 뭔가를 해야 아이가 나을 수 있다고 믿었으나 중간과정을 통해 주님은 말씀만 하셔도 뭔가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날      짜 : 2012-09-26
  제      목 : 누가복음강해(15) 오병이어의 기적과 베드로의 신앙고백(눅9;1-22)
     
 
   
▒ 본문말씀 ▒
  :: 눅9:1-22(신약 107면) ::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 공생애를 2년정도 사시면서 갈릴리의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다가, 한 명씩 두 명씩 제자들을 부르시더니, 12제자가 채워지자 그들에게 당신의 사역을 보여주시고 나서 이제는 12제자를 파송하여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을 대신하게 하는 때의 일들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자에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나그네들이 가지고 다녀야 할 필수적인 품목들을 전부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들에게는 2가지만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보호장비가 없어도 되고 양식이나 돈이 없어도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복음전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주님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며, 주님의 권세가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 능력과 권세의 상실, 이것이 오늘날 복음전파에도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들에게 먼지를 털어버릴 수가 있을텐데,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없으니 그들에게 담대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12제자들에게서 예수님과 똑같은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자, 사탄진영에서는 당황하게 됩니다. 특히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은 헤롯안디바 분봉왕은 어찌할 줄 몰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들은 영적 능력과 권세 앞에 꼼짝 못합니다. 당황합니다.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들으신 후에 12제자들이 좀 쉬도록 벳새다로 이동하십니다. 사람은 육체를 지녔기에 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적절히 못하거나 과도한 휴식은 게으름과 태만 방종을 가져오지만, 적절한 휴식은 다음사역을 잘 준비해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1주일에 하루를 쉬게 하시고, 하루의 시간에는 밤이 되면 쉬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밀려오는 군중들 때문에 예수님은 쉬지도 못한채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저녁이 되고 말았습니다. 군중들은 먹을 것이 떨어져 기진맥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을 시켜 그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린 꼬마의 도시락을 찾아내었고 그것을 주님께 드렸더니 주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다시 말해 그것으로 장정만 5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기적은 순종 후에 따라오는 것이지, 기적을 보면 순종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체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먹을 것이 준비되지 않았지만 군중들은 50명씩 앉히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따라하는 제자들이나 그 명령에 순종하는 군중들이나 믿음과 순종을 기적을 낫는 도구임에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종교와 정치가 소용돌이치는 지역을 벗어나 가이샤라빌립보에 이르러서 제자들이 자신에 대해 듣고 온 바를 물어보시고, 그들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베드로의 고백후에 주님은 즉시 베드로의 고백은 맞는 것이지만 자신의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고난당하고 죽어서 죄값을 치르게 될 메시야임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은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돈이나 명예입니까 아니면 예수이름의 권세와 능력입니까? 불평과 원망입니까 아니면 순종과 믿음입니까? 이제 우리들도 주님이 원하는 그것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곳에 반드시 일어나는 치유와 풍성함의 역사를 여러분의 것이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날      짜 : 2012-10-03
  제      목 : 누가복음강해(16) 영광의 길과 제자의 길(눅9;23-62)
     
 
   
▒ 본문말씀 ▒
  :: 눅9;23-62(신약 107면) ::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러한 제자도가 들어있다.
  제자도의 핵심은 눅9:23말씀이다. 2가지가 필요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는 자기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제자도의 핵심이다. 자기자신의 야망이나 성품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제자는 완성되지 않는다. 또한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할 사명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언제 하셨는가? 그것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묶어 전도파송하신 후에 제자들로부터 세상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고,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하신 말씀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한 바른신앙고백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자도를 배워야 한다. 만약 확실한 신앙고백없이 제자도부터 배운다면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떠나갈 것이 분명하다.
  주님의 제자가 걸어가야 할 길은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하늘의 빛나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처음에 제자들은 그 길이 자신의 출세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바로 제자도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다른 가르침으로 부연설명을 더하신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길이란 결코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며 평안도 안락한 삶도 아니며,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마음조차 둘 곳이 없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손에 쟁기를 잡은 자이다. 뒤로 돌아보아서는 아니 된다. 세상일에 연연해서는 주님의 제가로서살아갈 수 없다. 제자가 걸어가야 할 길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그러니 그 어떤 일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한다. 당신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
  첫째, 우리가 장차 하늘에서 받을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다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여주셨다. 변화산에서. 그 빛난 영광스러운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 모습은 그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였다.
  둘째, 믿음과 기도없이는 그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음은 주예수님께서 부여하신 권세에 대한 믿음이요, 기도는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주님을 따르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교훈을 깨닫게 하시려고 주님께서는 9명의 제자들을 산 밑에 두셨다. 그리고 간질병 귀신들린 아이를 두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기도가 얼마나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데 중요한 것을 깨달았으리라.

 

 

 
  날      짜 : 2012-10-10
  제      목 : 누가복음강해(17) 70인의 전도대와 예수님의 감사기도(눅10:1-24)
     
 
   
▒ 본문말씀 ▒
  :: 눅10:1-24(신약 109면) ::

 

  오늘 누가복음 10:1-24의 말씀은 70인의 전도대의 파송 및 전도보고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에 대해 말씀한다.
  누가복음에 보면 12명의 전도파송 말고도 70명의 전도파송 장면이 독특하게 나온다(눅10:1-16).  그때 예수님께서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12명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거의 일치한다. 단 한 구절을 빼놓고 말이다. 그것은 2절 말씀이다.
 
눅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12제자들에게처럼 70명의 전도인에게 똑같인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줌과 동시에 한 가지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준 권세와 능력을 효과있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12명의 제자들이 그것을 간과했을 때, 12명의 제자들은 귀신축사를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70명의 평신도들에게는 꼭 하나님께 간구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달라고 기도하고 나가라고 하였다. 70명의 평신도 전도대들은 그래서 기도하고 나갔다.
  그렇다면 기도할 때 받아야 할 '추수할 일꾼들'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그것은 1차적으로는 70명이 나가서 전도할 때 부족한 일손을 보내달라는 것이므로, 함께 전도할 전도자들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태복음 13:39의 말씀에서 추수할 일꾼은천사들인 것을 보게 된다. 
  전도하러 나가는 전도대원들에게는 무엇이 주어지는지 아는가? 기본적으로 예수이름의 권세와 능력이 주어진다. 하지만 세상사람들 배후에는 귀신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귀신들의 세력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출해 내려면 그들 배후에서 활동하는 영들보다 제압해야 한다. 그들보다 더 강하고 많은 천사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천사가 파송되기 때문이다. 왜 전도할 때 열매가 없을까? 그것은 기도하지 않고 나가기 때문이다. 기도해야 한다. 추수할 일꾼들을 붙혀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승리할 수 있다. 그래야 열매맺는 전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하고 나갔던 70명의 전도대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놀라지 말라. 70명의 전도대도 놀랐고 주 예수님도 놀라셨다. 아니 주 예수님께서는 벅찬 감격으로 인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매우 기뻐하셨다. 주님은 우시거나 근심한 경우는 있지만 이처럼 기뻐하며 웃으셨다는 대목은 여기에만 나온다. 70명의 평신도가 나가서 귀신들을 제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돌아왔을 때, 주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주님은 무엇 때문에 기뻐하시는지 아는가?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마귀에게 속한 자를 구출해 낼 때인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어 주님께서는 이 모든 비밀을 오직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순종으로 실천하는 자들에게 나타내심이 아버지의 뜻임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보는 자는 복이 있다 하셨다. 당신은 정말 복있는 자인가? 그럴려면 당신도 복음을 전파하라. 그래서 마귀에게 속한 자를 구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라. 그것만이 주님을 함박 웃으시게 할 수 있다. 
 
 
 
  날      짜 : 2012-10-17
  제      목 : 누가복음강해(18) 영생의 조건과 빼앗기지 않을 복(눅10;25-42)
   
 
 
   
▒ 본문말씀 ▒
  :: 눅10:25-42(신약 111면) ::

 

  영생의 조건은 무엇인가? 율법대로 행하는 것인가? 믿음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또 무엇일까?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에피소드에서 일어난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마르다가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말씀듣는 것을 제쳐놓고 음식준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오늘 이 부분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눠보기로 하자.
  첫째, 영생의 조건은 무엇인가? 한 율법의 질문이다. 그때 주님은 오히려 역질문을 통해 그가 알고 있는 율법지식을 묻는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00% 옳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율법지식과 실천으로 보았을 때 자기자신은 영생을 받기에 합당한 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강도만난 자를 보았던 세 사람의 실천적 삶을 통해 무엇이 진정 영생 얻기에 합당한 자인가를 말씀하신다. 요지는 율법을 앍고 있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데에 효과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을 살고 있느냐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믿는 이들은 자신에게는 믿음이 있으니 자신은 구원받은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점검받아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따지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처음 믿었을 때게 가진 믿음을 소유하지 않거나 그것을 약화시키는 행동을 하고 있다거나 그 믿음을 거부할 경우에 그 믿음을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어떻게 해서 예수께서 대신 고통받으시고 죽으셨는지를 아는 자는 결코 죄를 알고도 지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욕되게 하는 자는 설령 그가 믿음을 가진 자라도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핵심이다.
  둘째, 음식을 장만하여 주님을 대접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할까? 얼핏 보기에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곰곰히 들어가보면 그것만은 아니다. 정성껏 주님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는 것은 좋은 미덕이다. 나쁠 것이 없다. 사실 언니는 열심히 음식장만 때문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하고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언니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동생으로 마리아는 잘못 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음식장만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조건 우선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방적인 해석이다. 당시 상황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음식을 대접받기 위해 베다니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이제 곧 있으면 예루살렘에 가셔서 죽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3년 공생애기간 동안 가장 자기를 위해 헌신했던 베다니의 나사로의 식구를 보고 싶어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죽는다해도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임을 알려주려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당시 주님의 생각에는 음식을 대접받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에는 주님께서 그곳을 방문하신 이유와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의 심정에 촛점을 맞추어야 했다. 하지만 마르다는 주님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행하면서도 동생이 그 일을 도와주지 않자 불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주의했다. 누가 더 잘했는가?그래서 주님은 마르다가 잘못 행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생각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 말라. 그분의 심정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삶을 살아야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아닌 이때까지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제는 주님의 심정에 좀 더 생각을 집중해보자. 그래야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날      짜 : 2012-10-24
  제      목 : 누가복음강해(19) 주기도와 기도응답의 확실성(눅11;1-13)
     
 
   
▒ 본문말씀 ▒
  :: 눅11:1-13(신약 111면) ::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의 모범(눅11:1-4)과 기도응답의 확실성에 관한 비유와 말씀들(눅11:5-13)이다.
  오늘 설교말씀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해 줄 것이다.
  첫째, 기도도 배워야 하는가?
  둘째, 기도할 때도 일정한 순서가 있는가?
  셋째, 기도할 때에 우선순위가 있는가?
  넷째, 우리가 먹을 음식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잘못된 간구인가?
  다섯째,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인가 우리의 용서가 먼저인가?
  여섯째,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기를 기도해야 하는가?
  일곱째,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우리의 기도는 어떤 상관이 있는가?
  여덟째, 우리는 여호와께 기도해야 하는가? 이버지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아홉째, 우리가 아버지에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열째, 어떻게 기도할 때 우리는 응받받는 기도를 드리는 것인가?
  열한째, 기도의 3단계는 무엇인가?
  열한째, 기도하는 사람이 응답받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열두째, 우리가 기도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열셋째, 기도응답이 늦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열넷째,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때 어떤 것을 주시는가?
  열다섯째, 하나님께서 기도응답으로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날      짜 : 2012-10-31
  제      목 : 누가복음강해(20) 바알세불 논쟁과 권세의 능력(눅11:14-26)
     
 
   
▒ 본문말씀 ▒
  :: 눅11:14-26(신약 112면) ::

 

  눅11장은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중간은 귀신축사와 관련된 바알세불논쟁이 등장한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주제를 꿰뚫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이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치신다. 그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이다. 그런데 이 기도의 가르침에 이어 나오는 귀신축사와 관련된 바알세불 논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그 중심주제이다. 왜나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축사의 능력에 관한 질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의 증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한 벙어리 들린 귀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니 그 벙어리가 말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람은 사람 속에 들어온 귀신의 증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병들었거나 미쳤거나 정신이상 증상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들어온 귀신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어 벙어리귀신이 말하기 되었을 때, 예수님을 대적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3가지 비유를 통해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축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가장 큰 증거임을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왜 귀신축사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 세상임금은 마귀였다. 마귀는 범죄한 영혼들을 자신의 종으로 부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귀신들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살게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사 40일동안 시험받으신 후에 귀신의 왕 사탄과 일전을 벌였다. 3대0 판정승으로 예수님께서 승리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귀신들은 예수님을 볼 때마다 떠나갔다. 자신의 왕인 사탄마귀가 예수님에게 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에 강한 자는 오직 마귀였다. 하지만 마귀보다 더 강한 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후로 이 세상사람들은 마귀의 종에서 해방받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도 임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의 일이 그뜻을 펼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귀신이 쫓겨나가고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내 삶의 영역으로 가져오기 위해서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첫째는 회개를 통해 마귀와 귀신들이 역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리도 둘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의 세력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게 된다. 자 여러분이 이제는 시작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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