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말씀을 귀로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고 심판을 자초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 수 있으련면 계속해서 예수님으로부터 표적을 더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악한 세대일지라도 그들에게까지 공통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표적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셨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이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메시야를 직접 보고도 믿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자 그들을 향해 훗날 그들에게 임한 심판을 경고하신다. 그것은 스바여왕과 니느웨백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스바여왕이나 니느웨백성은 이방인들이다. 스바여왕은 유대로부터 2,000km나 떨어진 곳에 사는 왕이었다. 하지만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온갖 진귀한 보물을 싣고 예루살렘을 찾아왔다. 하지만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우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들으려하지 않는 이들은 과연 떠한 사람들인가? 더군다나 니느웨백성들은 자기 민족도 아닌 다른 민족이었던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되 왕으로부터 어린아기까지 심지어 가축들도 40일동안 금식하며 회개에 동참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정말 어떠한 사람들인가?
한편, 어떤 바리새인이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아침 겸 점심식사를 대접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 바리새인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어떤 자들인지에 대해 적나나하게 말씀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신다. 바리새인들은 한 마디로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규정에 그 항목이 없는 것까지도 십일조는 드리지만 실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사람들에게 칭찬듣고 자랑하기 위해 십일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회당에서 상좌에 앉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권세와 직분을 칭찬을 듣고 존경받는 욕심으로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속은 더러우면서도 겉은 깨끗하게 하고 다니는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외식을 책망한 것이다. 그때였다. 한 율법사가 바리새인을 모욕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율법사들의 만행을 적나나하게 드러내신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백성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백성들을 전혀 도와주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의인인 체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의인들을 잡아죽이고 있는 살인자들이었다. 그동안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그들의 만행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의인들의 죽음을 슬퍼한다고 하면서 비석을 세워주고 있었다. 이어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율법지식교육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마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막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화를 내면 예수님에게 대들었다.
그렇다. 우리는 기회할 기회를 줄 때에 회개하자. 말씀을 들을 때에 나를 고치자. 그리고 내게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짓고 있는 죄가 있는지 확인해보자. 그리고 회개하자. 나 자신의 속부터 깨끗히 하자. 그래야 산다. 그래야 용서받고 천국갈 수 있으니까.
날 짜
: 2012-11-14
제 목
: 누가복음강해(22) 진정 두려워할 자와 한 어리석은 부자(눅12;1-21)
▒ 본문말씀 ▒
:: 눅12:1-21(신약 114면) ::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외식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제자들이 가장 신경써야 할 부분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바리새인의 내면의 부패함을 하나님께서 다 드러내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한편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의 현장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셨다. 첫째, 세상권력자들이 두렵다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말 것 둘째,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우리 몸을 죽일 수 있는 세상 권력자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영혼을 둘 다 지옥에 멸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다.
당신은 지금 누가 두려운가? 사람이 두려운가 아니면 하나님이 두려운가? 만약 사람이 두렵다면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아닐 확률이 높다. 주님께서는 하찮은 참새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은 더욱더 귀히 보시고 보호하시고 챙겨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권력자 앞에서 사람이 두렵다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특히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이심을 알고 있으면서 세상권력자가 두려워 그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으로 사하심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주 예수님에 대해 모독하는 말을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핍박이 두려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의 죄는 용서가 없다고 하셨다.
주님을 부인하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혹시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하는 현장에 서 있다고 상상새보라. 그때에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는 주님을 택하라. 이것이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길이요 방법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재산상속에 대해 문제를 가지고 나온 어떤 형의 동생을 만났다. 하지만 주님은 그 동생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탐심이 그에게 가득했기 때문이다. 탐심은 사람의 영혼을 망친다. 그리고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탐심 때문에 자신의 생명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은 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어찌나 부자였든지 그 해의 소출이 풍성했지만 작년에 쌓아둔 곡식이 남아있어 이 부자는 멀쩡한 곳간을 헐고 다시 지어 그 해의 소출까지 보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날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불러가신다. 그러면 그의 모든 소유는 어떻게 되겠는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않다. 생명이 재산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 자기 자신을 위해여 재물을 쌓되 하나님을 위해 재물로 헌신하지 않는 자는 심판대에 그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고 맹렬한 불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넉넉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는가? 당신이 만약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을 계산하여 살아간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때를 따라 풍성한 대로 채워주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라.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날 짜
: 2012-11-21
제 목
: 누가복음강해(23) 진정 구해야 할 것과 깨어 있어야 할 이유(눅12;22-48)
▒ 본문말씀 ▒
:: 눅12:22-48(신약 115면) ::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진정 주님께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오실 날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첫째, 우리 믿는 이들이 주님께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세상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구하는 첫번째 덕목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의식주의 문제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들 때문에 늘 염려한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데로 늘 그것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연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우리를 챙겨주시는지 먹을 것에 대해서는 공중 나를 까마귀로 비유하셨고, 입을 것에 대해서는 들의 백합화를 비유하셨다. 하찮은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고, 들의 백합화에게 좋은 옷을 주신다고 하셨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더 귀하게 여겨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갈 것인가이다. 어떻게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하고 세례받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할 것인지에 고민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산다면 하나님은 의식주는 더해주신다고 했다. 둘째,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과연 다시 오실 주님을 얼마나 깨어서 기다리고 있을지에 관한 말씀을 보자.
주님께서는 당신을 혼인집에 간 주인으로, 우리를 그 주인을 깨어서 기다리는 종으로 비유하셨다. 주인은 언제 올른지 모른다. 혹 이경이나 삼경 즉 한밤중에 오실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종일 일하여 몸이 고단한 종일텐데 과연 주인이 올 때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어줄 수 있을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충성됨이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그때까지 깨어있는 자가 충성된 자요 그런 자에게는 주인이 오히려 자신이 종이 되어 그 종을 주인처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정말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셋째, 어떤 주인이 청지기에게 자신의 종들을 맡기고 어리론가 떠나갔다. 그리고 돌아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청지기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
두 종류의 청지기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주인의 뜻을 알고 주인처럼 그 종들을 잘 관리하는 종이다. 또 하나는 주인이 언제 올른지 이야기도하지 않았으니 주인의 것으로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사는 종이다. 사실 청지기는 주인이 없을 때에는 주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주인이 올 것을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에 진실하고 충성될 수 있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여러 유혹에 노출되어 걷잡을 수 없이 방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자는 많이 맞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주인의 뜻은 분명히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인의 종이지만 마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종들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주인이 돌아와 그 종이 한 일을 보고 주인의 모든 소유마저 그에게 맡길 것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과연 우리는 우선순위를 바르게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주인이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리고 내게 맡긴 일에 충성되어 행하고 있는가? 이제는 알았으니 주님 말씀대로 살아보자.
날 짜
: 2012-11-28
제 목
: 누가복음강해(24) 불과 시대분간 피섞인 제물과 열매없는 무화과(눅12;49-13;9)
▒ 본문말씀 ▒
:: 눅12:49-13:9(신약 116면) ::
말세를 당한 자가 가장 신경써야 할 것은 무엇일까? 깨어준비해야 한다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한다는 것인가? 오늘 예수님께수는 2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 마지막 때가 되어 신앙문제로 영적인 충돌을 일으킬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주님께서는 그때 타협하지 말고 영적 전쟁을 하라 하신다. 말세가 되면 사탄마귀도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집중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탄마귀가 쓰는 작전은 초대교회처럼 핍박과 환란이다. 그때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잠시 신앙을 양보할 것인가? 아니면 불화가 발생하더라도 신앙을 지켜나갈 것인가? 그것을 결정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불화를 감수하라 하신다.
둘째, 신앙의 최종적인 승리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이다.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기상일기는 분별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온 당신이 있을 때에 회개하라 하신다. 본디오 빌라도가 죽인 갈릴리 사람들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질 때 치어져 죽은 18사람이 죄가 많아서 죽었는가? 그 질문에 예수님은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처럼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렇다. 마지막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온전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주님의 용서다. 회개를 할 때 주님은 기꺼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성된 사람들인가? 우리는 지상명령에 목숨을 걸고 실천하고 있는가? 누군가를 위해 목이 쉬도록 중보기도하고 있는가? 형제를 사랑하되 내 것을 다 내어주기까지 하고 있는가? 부족할 것이다. 아니 실천하지 않는 덕목이 더 많을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 회개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회개만 한다면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회개할 기회가 우리가 남아있는 이유에 대해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열매를 맺어야 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않자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그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간청하여 1년만 참아달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도 심판받지 아니하고 있음에 감사하자.
날 짜
: 2012-12-05
제 목
: 누가복음강해(25) 안식일치유사건과 하나님나라의 비유(눅13;10-30)
▒ 본문말씀 ▒
:: 눅13:10-30(신약 117면) ::
오늘 말씀은 참 은혜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한 여인이 고침받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18년동안 척추뼈에 이상이 생겨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한 채, 자기 허리를 허벅지살에 대며 살 정도가 되었다. 18년전에 그녀는 온전한 사람이었다. 그때에 회당에 가서 예배할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점점 허리에 문제가 생기더니 18년이 지난 그때에 그녀는 반신불수와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매안식일에 회당까지 나오려할 때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었을까? 그리고 회당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그녀는 몇번이고 회당에 가지 않으려는 마음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려 18년동안을 회당에 나갔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하러 말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조금만 힘들어져도 교회를 안 나가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 그래도 잘 참는다는 사람은 3-5년은 참는 것 같다. 하지만 5년이 지나도 별 차도가 없으면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이 여인은 무려 18년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렸다. 이 여인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를 기다리자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예배드리고 있는 회당으로 가셨다. 당시 유대지역에는 수많은 회당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회당에 간 것은 그 여인 때문이었다. 그 여인이 무려 18년을 회당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 여인은 자신을 고쳐달라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주님은 그 여인을 고쳐주셨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회당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다고 간접적으로 책망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안식일법은 자기들이 만든 것이지 율법규정에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지 안식일에 병고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탄에 매여 있어서 그 불편한 몸으로 18년을 기다려온 여인을 고쳐주는 것이 그녀에게 안식을 주는 것인가? 아니면 건강한 사람들끼리 모여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는듯이 예배하는 것이 그들에게 참다운 안식인가? 이어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모인 무리들을 향해 2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태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부패해져있는지를 적나나하게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 비유가 바로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다. 이어 주님은 베뢰아 지역에 들어가셔서 어느 제자의 질문에 답하신다. 구원받은 자가 적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다. 그리고 자신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질 때에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들이 구원받을 것이라 여기지만 오히려 버림받을 먼저 된 자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늘 설교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다. 자신을 점검하기에 더할나위없이 신선하다. 한번 이 설교를 들어보라.
날 짜
: 2012-12-12
제 목
: 누가복음강해(26) 주님의 길과 높은 자리를 차지함(눅13;31-14;14)
▒ 본문말씀 ▒
:: 눅13:31-14:14(신약 118면) ::
당신은 지금 사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누구에게나 사명이 있다. 그러나 그 사명의 길을 흔들림없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그랬다. 헤롯안디바는 세례요한을 죽인 뒤 자책했으나 이내 변하여 예수님마저 자신의 권력으로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말했는지 아는가?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그러나 오늘날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그렇다. 누구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버리고 다른 길을 가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이어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실 장소에 대해 분명히 말했다. 그것은 헤롯안비다의 영역인 갈릴리나 베뢰아가 아니라 유대 예루살렘이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은 한없이 아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품에 안으려하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제는 그의 아들마저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룩한 도시요 역사와 전통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들 주님을 관심하지 않는 모든 것은 부패하고 타락하는가보다. 그날은 안실일이었다. 그런데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아 넘어뜨리기 위해 방법을 짜낸다. 예수님을 한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초대한 후에 그의 앞에 수종병 든 자를 갖다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계략을 아시고서는 먼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율법에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 질문은 그들로 하여금 잠잠케 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되는 율법규정은 없지만 자기들이 지키는 장로들의 유전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규정에는 없지만 자기들의 지키는 전통에 있는 것에 대해 어느것이 합당한 것인지 말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주님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만들어버리는 그들의 자의적 해석을 꼬집어서 말씀한 것이다. 그들은 부끄러웠다. 그들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자신의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질 경우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왔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하는 것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것을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 그들의 외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셨다. 잔치에 초대받아 갈 때 그들은 언제나 상석에 앉으려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려는 속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가면 심판받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 사람을 초대할 때에는 부자들이나 친구나 형제나 친척을 초대하지 말고 초대해도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 즉 가난하고 몸이 불편하거나 다리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부르라고 하셨다. 그래서 참 구제가 되고 하나님께서도 그 구제를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 자신을 매우부끄럽게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도 주님 말씀에 부끄럽지 않게 살 때가 되지 않았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날 짜
: 2012-12-19
제 목
: 누가복음강해(27)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와 제자가 되는 길(눅14;15-35)
▒ 본문말씀 ▒
:: 눅14:15-35(신약 120면) ::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뢰아지역을 이동하신다. 그때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여러 일들이 있은 후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신을 포함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는 당연히 참석가능함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정반대로 이야기 하신다.
다시 말해 원래 잔치에 청함을 받은 유대인들은 제외되고 오히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죄인취급하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고 이어 이방인들도 참여하게 될 것임을 큰 잔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는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다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자동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그 잔치는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며 이미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들이 몫인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잔치는 분명 주인의 아들의 혼인잔치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누가 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잔치자리에 참여해 자신의 아들의 혼인잔치를 축하해주는 이가 많게 되는 것을 주인은 바란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당신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바라신다. 그래서 원래 오기로 예정된 자라도 그 자리를 거부한다면 그 자리를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라도 와서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의 소외된 자들이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고 성밖에 있는 이방인들도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원래 그 잔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님과 그분의 증거자들을 보내 우리까지 그 잔치에 불러주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착각했다. 자신들인 선민으로서 언제까지나 사랑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혹시 잘못해도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메시야를 낳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메시야가 눈 앞에 있지 않은가? 그러면 이제는 메시야를 받아들이는 것이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메시야를 배척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하나도 그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이제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자들을 향해 주님을 따르는 자의 3가지 각오를 말씀하신다. 첫째, 주님을 따르려는 자는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의 목숨보다도 주님을 따르는 일을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주님을 따르려는 자는 자기가 짊어져야 할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서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주님을 따르려는 자는 자신이 가지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서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생각지 않고 주님을 따르다가는 중간에 포기하고 말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마귀만 기뻐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믿는 순간부터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과연 제자된 삶인가? 아니면 아직도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며 돈과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보라.
날 짜
: 2012-12-26
제 목
: 누가복음강해(28)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눅15;1-10)
▒ 본문말씀 ▒
:: 눅15:1-10(신약 121면) ::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베뢰아를 거쳐가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중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식사를 초대했지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책잡으려는 바리새인의 지도자를 책망하신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초청받은 자들은 하나도 참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이지만 이들이 먼저 참여하게 것임을 시사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셨다. 그러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아냥거리며 덤벼들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향해 3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잃었다가 되찾은 것에 대한 기쁨을 묘사하는 3가지 비유인 것이다. 일명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분명 3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그 비유를 복수로 표현하지 않고 단수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이 3가지 비유가 그 형식과 주제가 같이 때문이리라. 먼저 주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참 목자란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라도 찾아오는 자라야 한다고 하셨다. 이는 곧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리라. 그렇다면 잃은 양의 비유에서는 과연 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 안에 들어있는 99마리의 양들일까? 얼핏 보기에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좀 더 들어가보자. 잃은 양을 되찾았다가고 목자가 초대한 자신의 벗들과 이웃주민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하나님의 천사들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보면 조금은 다르다. 목자의 벗들과 이웃들이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일인데 그렇게 일하고 있는 주님을 보고서도 오히려 핀잔하고 있는 그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벗과 이웃들이 되어줄 수 없느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두번째 잃었다가 되찾은 것에 대한 비유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다. 앞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 어떤 남자가 목자라면, 이 비유에서 어떤 여자는 결혼한 여자인 것 같다. 한편 둘 다 부자는 아니었던 것 같고 그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는 자들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도록 찾고 있다. 그러므로 잃은 양의 비유에서 목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어떤 여자는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령을 상징한다 하겠다. 왜냐하면 이 여자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집 안에서 등불을 켜고 집 안구석구석을 세밀치 살펴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람기름을 태워 사람의 죄된 본성을 드러내어 찾으시려는 성령님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겠다.
다음 이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잃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눅15장에 등장하는 세 가지 비유는 아들, 성령, 아버지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주인공들이시다. 그리고 잃어버린 동물이나 물건이나 사람은 죄인되어 타락한 인류를 의미한다.
그렇다. 세 비유는 다 잃은 것을 찾았다고 하면서 주인공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잔치 비용이 되찾은 것보다 더 들어갈텐데도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다가 잔치하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누려 한다다. 그러므로 목자와 여자와 아버지는 성자와 성령과 성부를 가리킨다. 우리의 성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분을 닮아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날 짜
: 2013-01-30
제 목
: 누가복음강해(29) 잃은 두 아들의 비유(눅15;11-32)
▒ 본문말씀 ▒
:: 눅15:11-32(신약 121면) ::
오늘 본문은 누구나 다 아는 탕자의 비유본문이다. 하지만 탕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의 2/3는 둘째아들 이야기이지만, 1/3은 첫째아들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탕자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하나는 집나간 탕자이고, 또 하나는 집 안에 있는 탕자이다. 전자는 둘째아들이고 후자는 맏아들이다. 그렇다면 이 두 아들은 누구를 빗대여 말씀한 것일까? 먼저 눅15:11-32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한다. 그리고 둘째아들은 1차적으로는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고 2차적으로는 이방인들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맏아들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 맏아들은 1차적으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2차적으로는 유대인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두 당사자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의 주제가 '잃은 것을 되찾은 것에 대한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에 감추어진 주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탕자의 회개다. 눅15장에는 3가지 비유가 나온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 하지만 이 세가지 비유는 하나다. 왜냐하면 주제와 형식이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단수로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잃은 양의 비유는 성자의 관점에서, 잃은 드라마크의 비유는 성령의 관점에서, 잃은 아들의 비유는 성부의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오늘 잃은 아들의 비유는 성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잃은 것을 되찾은 것에 대한 기쁨이 그 주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어떤 사랑의 소유자인가? 첫째, 잃어버렸지만 포기하고 않고 기다리는 사랑을 가지신 분이요, 둘째, 아버지를 배반하고 떠났어도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해주시는 사랑을 가진 분이며, 셋째, 다시 회개하고 돌아온 자에게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사랑을 가지신 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사탄마귀나 타락한 천사같은 경우는 죄가 그들의 멸망의 요인이다. 하지만 사람의 멸망의 핵심요인은 죄가 아니다. 죄를 짓고도 용서를 받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를 지었어도 그 죄를 죄로 인식하고 그 죄로 인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회개하고 돌이켜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인간은 한 번 더 재생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천사와 인간의 차이점이다.
천사는 사람보다는 훨씬 더 능력있는 존재요, 영물이다. 하지만 인간보다 못한 점은 그들을 위해 속죄제물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요, 그들에게는 한 번 죄를 지으면 영원한 심판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한 번 죄를 지었어도 그 죄를 대속해줄 속죄양되신 예수그리스도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고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이킬 수가 있는 것이다. 혹시 당신은 그러한 사람이 아닌가?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집밖으로 뛰쳐나간 죄인이든지, 집안에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의를 쌓기 위해 수고하는 죄인이든지,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마음준비가 필요하다.
주님의 용서는 한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한없는 용서에 감사할 뿐이다. 과거를 보지 않고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도 잊지 말자.
날 짜
: 2013-02-06
제 목
: 누가복음강해(30) 불의하지만 현명한 청지기의 비유(눅16;1-18)
▒ 본문말씀 ▒
:: 눅16:1-18(신약 121면) ::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이해하기 참 어려운 본문을 오늘 복음서에서 만난다. 일명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말씀이 그 말씀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옳지 않은 일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려고 하는가? 그는 자신의 주인 재산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가 나중 핑계를 보면 추정컨데 그는 나이가 많다. 그리고 다른 어떤 직업을 가질 만한 사람도 못 된다. 더군다나 그는 구걸하는 짓은 절대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정말 할 것이 없는 사람이요, 주인이 그를 쓰지 않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어느날 주인이 자신의 재물담당 관리책임자인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주인은 단호히 결정한다. 그를 해고하기로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즉시 그를 해고시킨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해고시킬 것이니 자신의 사무를 정리하라고 했다. 그에게 잠깐의 시간을 준 것이다.
그는 그때 무엇을 했을까? 주인의 재산을 몰래 빼돌렸을까? 아니면 다른 직업을 알아보로 다녔을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 내에서 그가 다른 사랑에게 훗날 자비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자신의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빚을 탕감해주는 일을 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는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사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기름 백 말 빚진 자의 장부에서 50말을 제하고 50말만이 적으라고 했으니 50%빚을 탕감해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때의 채무상환법에 의하면 기름 백 말 중에 50%에 해당하는 것은 이자였다. 다시 말해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불러다가 이자를 탕감해준 것이다. 주인으로서는 빌려준 것 그대로 받으니 손해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청지기에 있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지기는 민첩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빚을 탕감해주면 탕감받은 자들이 자신에게 언젠가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그 청지기가 하는 일을 보면 그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보고 칭찬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이하나님이심과 청지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은사와 달란트를 받아 일하는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회계하고 잘못 되었으면 그것을 만회를 기회를 주신다. 하ㅏ님은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미리 알려주시고 그것을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재물에 관해서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여 지혜롭게 행동하는데 오히려 빛의 아들들을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지극히 작은 일 즉 세상 일에도 충성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겠느냐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을 관리하는 법도 모르는 자에게 하늘의 일을 맡기겠느냐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몰랐다. 우리도 지혜롭게 재물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미 부요의 축복이 주어졌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져 가난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얻을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 능력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은 재물에 부요함을 누리고 사는 자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는 자가 생긴다는 말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13절에 재물에 대한 경고의 말씀도 주신다. 하나님의 율법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하나님의 법대로 관리하면 반드시 부자가 된다. 이것은 율법의 진리의 말씀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존귀히 여긴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멸망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 물질을 축복을 받아야하겠지만 그것을 우상처럼 섬기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아니 하늘나라에 저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다시 달라하시면 돌려드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과연 당신의 물질관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