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강해(1강~52강) 시리즈(4)입니다(눅16:19-19:44)

by 갈렙 posted Dec 0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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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youtu.be/3pDC1lq9K44
날짜 2013-02-13
본문말씀 누가복음 16:19~19:44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누가복음강해, 누가복음16장~누가복음19장

누가복음강해(1강~52강) 시리즈(4)입니다(눅16:19-19:44)(2013.02.13-04.17)

누가복음강해(31)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최후(눅16;19-31)

누가복음강해(32) 용서와 겸손에 관한 교훈(눅17:1-10)

누가복음강해(33) 나병환자 열 사람과 하나님나라의 도래(눅17:11-21)

누가복음강해(34)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재림의 날(눅17:22-37)

누가복음강해(35) 과부의 청원과 두 사람의 기도(눅18:1-17)

누가복음강해(36) 부자와 영생의 길(눅18:18-30)

누가복음강해(37) 세번째수난예고 및 거지맹인의 부르짖음(눅18:31-43)

누가복음강해(38) 삭개오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눅19:1-10)

누가복음강해(39) 므나의 비유와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눅19:11-27)

누가복음강해(40) 예수님의 결의에 찬 예루살렘 입성(눅19:28-44)

 

 

 

 

 
  날      짜 : 2013-02-13
  제      목 : 누가복음강해(31)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최후(눅16;19-31)
     
 
   
▒ 본문말씀 ▒
  :: 눅16:19-31(신약 123면) ::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과연 비유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우리는 본문을 흔히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 말씀이 비유라고 말하는 데목은 없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실제적인 사건을 비유처럼 이야기하고 있으신 것 같다.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핵심주제는 무엇일까? 부자는 지옥(음부)에 가고 가난한 자는 천국(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얼핏보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본문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본문의 청중이 과연 누군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본문은 눅15장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때 청중은 총 3부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말해주는 세리들과 죄인들, 그리고 스스로 의롭다여기는 권세있고 부자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눅 15장에 등장하는 3가지 잃었다가 되찾은 것에 대한 비유는 성자와 성령과 성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이어 16장의 2가지 부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눅16장 전반부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제자들을 향해 주신 말씀이며, 눅16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부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상징한다.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대표하는 자들이지만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요, 그들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줄로 확신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자는 누구인가? 그는 아브라함을 그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을 대표하는 이다. 그리고 그는 부자였고 권세도 있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권세와 부귀영화를 오직 자기 쾌락을 즐기는 데에만 쓰고 말았다. 그에게 분명 가난한 자가 도움을 청하러 왔건만 그는 본체만체했다. 결국 죽은 다음에야 위치는 뒤바뀌고 만다. 거지이면서 질병에 시달리던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부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부자가 소외받는다. 그가 아무리 아브라함과 나사로에게 청원을 해 보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지도자급이었던 이 부자가 왜 지옥에 떨어졌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첫째는 1차적으로 그는 가난하고 병든 형제를 보고도 신15장 7-11절에 나오는 모세의 글과 에스겔 22:29-31의 선지자의 글에서처럼 가난한 자를 기꺼이 도우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준행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둘째는 궁극적으로 그는 자기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자신이 그때까지 잘못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 회개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이나 이방인 교회 지체들 중에 왜 지옥가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다. 각기 다 양같아서 자기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지옥길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의 글 즉 구약성경이 안내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믿은 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기 때문이다. 
  이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러자 그는 간청한다. 자기 집에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죄짓고 있는 5명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죽은 뒤에는 반드시 심판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달라고 말이다. 그것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보내야 기적을 보고서라도 믿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율법과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는 자는 결코 기적을 보고 회개하지는 않을 것이락고 말한다. 그렇다. 만약 우리가 성경말씀만 듣는다해도 그것을 믿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여러분은 들을 귀가 있음에 감사하라. 그리고 회개할 기회가 있음에 감사하라.

 

 

 

 
  날      짜 : 2013-02-20
  제      목 : 누가복음강해(32) 용서와 겸손에 관한 교훈(눅17;1-10)
     
 
   
▒ 본문말씀 ▒
  :: 눅17:1-10(신약 124면) ::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의 재물관에 관한 교훈(눅16장)에 이어서 주시는 형제간에 지켜야 할 덕목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덕목에 관한 말씀이다.
  믿음이 약한 형제를 죄짓게 하는 행위에 대한 심판의 중함과 아울러 형제과 죄를 범했으나 회개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큰 믿음은 어떻게 해서 얻게 되는지 그리고 주인을 섬기는 종의 올바른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형제를 죄짓게 하는 자가 받게 될 형벌에 대해 살펴보자. 주님은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멧돌사형당하는 것이 낫다고 하신다. 그만큼 작은 형제가 실족하게 되는 것을 주님께서 염려하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태복음 평행본문에 보면, 만일 그러한 일을 생기게 하는 것이 자기의 몸에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까지 하였다. 무슨 말씀인가? 눈이 범죄케 하면 눈을 뽑아버리는 것이 낫고, 손과 발이 범죄케 하면 그것을 잘라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믿음이 작은 형제들이 실족하여 넘어지도록 그들을 잘못 인도하거나 잘못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둘째,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살펴보자. 형제가 나에게 범죄하면 무조건 용서해주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그 형제를 꾸짖어 그가 죄를 범하였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때 그 형제가 내 말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에는 기꺼이 그를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지은 어마어마한 죄를 용서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해준 것처럼 우리도 우리 형제가 지은 죄를 숑서해주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비유로 말씀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이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 큰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제자들은 앞의 두가지 실천덕목을 듣더니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렇게 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게 느껴졌다보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요청한다. "주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소서." 그런데 그때 주님은 그들을 위해 안수기도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믿음의 질을 높인다면 어마어마한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이름하여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다. 아주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들에게도 엄청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견고하게 뿌리박힌 뽕나무가 뽑히여 바다에 심겨져라고 하면 뽕나무가 순종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같은 종류의 믿음은 무엇인가? 믿고 구했다면 이미 받은 줄 아는 믿음이요, 한 번 구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요, 구한 것은 이미 내게서 이루어졌다고 입술로 선포하는 믿음이다. 자, 여러분도 한 번 이 믿음대로 실천해보라.
  넷째, 마지막으로 주인을 섬기는 종의 자세를 살펴보자. 종은 매일 자기의 할 일이 있다. 하지만 그가 집에 돌아와서 또 주인을 섬겨야지 주인과 함께 겸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했어도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에게 마땅한 것이라고 여기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바 되었기에 우리의 몸과 시간과 물질도 다 주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에는 무엇인가를 바라고 섬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은 다 주님의 것이요 우리가 행한 일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서 행한 것 뿐이라고 말해야 옳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행한다면 그것은 공로주의나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 당신은 어떠한 자세로 봉사하고 있는가?

 

 

 

 
  날      짜 : 2013-02-27
  제      목 : 누가복음강해(33) 나병환자 열 사람과 하나님나라의 도래(눅17;11-21)
     
 
   
▒ 본문말씀 ▒
  :: 눅17:11-21(신약 124면) ::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무엇하러 오셨을까? 요1:11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러 오셨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들이..." 그렇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왕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런데 당시 이 세상은 마귀가 왕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특히 마귀는 귀신들을 통해 사람들을 어거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왕으로 보내 이 세상에 마귀를 정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시어 마귀와 싸우셨다. 그리고 승리하셨다. 1차적인 승리는 광야였다. 마귀는 3가지로 시험했고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 그 뒤로부터 마귀의 부하들이 쫓겨가기 시작했다. 마귀가 붙들고 있던 온갖 질병들도 떠나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창조의 기적과 생명의 기적이 이어졌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축사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병든 자가 고침받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고 하셨다(눅11:20).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 마귀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특히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마귀의 권세는 깨어지고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명의 문둥병자는 율법의 저주에 속한 질병 가운데 최고의 고통을 받고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하늘에서 오신 왕의 소문을 들었고 그래서 지나가시는 왕을 보고 외쳤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십자가에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기 전이었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하날의 왕의 통치를 주문하셨다. 그것은 질병든 것에 상관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하늘의 왕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가진 마귀의 통제 아래 머물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하늘의 왕의 말에 순종하기로 했다. 믿음과 순종은 그들로 하여금 마귀에 속한 것들을 쫓아버렸다. 그들은 나았고 그들은 즐거워했다.
  예수님은 이어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다. 그들은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것은 하늘의 왕의 말에 순종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순간에 임한닥고 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하늘의 왕으로 인정하는 순간, 하늘의 통치가 임하고 그것은 곧 새로운 나라의 진입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왕을 자신의 눈 앞에 두고도 그분을 믿고 따를 수 없다면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하늘의 왕의 말씀을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현상을 보지 말라. 현상은 마귀가 사용하지만 믿음과 순종을 통해 현상을 극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날      짜 : 2013-03-06
  제      목 : 누가복음강해(34)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재림의 날(눅17;22-37)
     
 
   
▒ 본문말씀 ▒
  :: 눅17:22-37(신약 125면) ::

 

  예수님께서는 언제 다시 오실까? 예수 재림에 대해서 날짜와 시간을 이야기한 그동안의 모든 주장은 한 번도 성취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짜와 시간을 말할 것이 아니라 그때가 되면 어떤 상태가 되는가를 알고 그날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인가 하는 질문에 그의 제자들에게 답변형식으로 그날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신다. 오늘 눅17:22-27의 말씀은 그 부분을 다루고 있다.
  첫째, 제자들이 그 날을 바라고 있지만  제자들은 결코 그 날을 볼 수 없을 것이다고 하셨다.
  둘째, 거짓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출현하여 주님께서 광야에 혹은 골방에 이미 오셨다고 말할 것이나 절대 미혹받지 말라고 하셨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가시적으로, 동시적으로, 공개적으로 있을 것이며, 그 날은 갑자기 도둑처럼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넷째, 예수재림의 때에 세상 사람들은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 재림의 때에 세상사람들은 일상적인 일에만 빠져 그 날을 결코 준비하고 않고 있을 것이기에 뜻밖에 그 날을 맞이하고 절망할 것이라 하셨다. 물의 심판이 있었던 노아의 때나 불의 심판이 있었던 롯의 때와 같이 세상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 무관심할 것이라 하였다. 그 날에도 오로지 세상사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을 것이라 하셨다. 당시에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인 쾌락과 탐욕에만 빠져 있었다. 주님은 그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다섯째, 주님께서 재림하실 즈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인데 유대인들이 처음에는 그를 메시야로 생각하여 받아들이지만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하고 우상을 숭배케 할 때, 유대인들 자신들이 속은 것인 줄 알고 초림하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 때 적그리스가 유대인들과 교회의 구성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하는데, 주님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치라고 하셨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돌이키면 안 된다고 하셨다. 혹시 도망치다가 잡히게 되면 죽었으면 죽었지 결코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적그리스도를 숭배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여섯째, 예수께서는 그날에 구원받은 자와 멸망받을 자의 확연한 분리가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데려감을 당하겠지만 어떤 이는 남겨둠을 당할 것이라 하셨다.
  일곱째, 예수께서 임할 지상재림의 장소는 전쟁으로 인하여 시체를 처리할 수 없을만큼 널브러진 커다란 장소라고 하셨다.

  주님의 재림은 옛날보다 확실히 가까이 온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무화과 나무에 싹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이 오신다고 하셨는데, 한 세대가 지나기고 있다. 한 세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들이 있어왔다. 40년 광야생활일 것이다, 50년 희년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미 지나갔다.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이 독립했으니 이제는 70년 바벨론포로 귀환의 시기가 남아 있으며,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던 100년이나 혹은 120년의 시기가 남아있다. 가정이기는 하지만 만약 다니엘에나 예레미야선지자처럼 한 세대를 70년으로 보고 적그리스도의 대환란의 시기를 3년 반 정도로 잡는다면 곧 환난의 시작될 듯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것에 동요되어 흔들릴 필요가 없다. 오늘도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고 복음전파에 힘써야 한다. 베리칩을 외친다고서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날      짜 : 2013-03-13
  제      목 : 누가복음강해(35) 과부의 청원과 두 사람의 기도(눅18;1-17)
     
 
   
▒ 본문말씀 ▒
  :: 눅18;1-17(신약 126면) ::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기도한느 모습은 어떠할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삶의 모습이나 태도는 어떤 것일까? 오늘은 이 3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말세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때가 되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인내하며 기도하는 자가 없다 하셨다.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올수록 사람들은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을 것이며, 끈질기게 기도하지도 않을 것이며,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우려하셨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소개해주시는 하나님, 즉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중이나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으시고 응답해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외면하지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고아과 과부의 객의 억울함을 신원해주시는 분이시다(시7:11, 사11:4, 렘11:20).
  하지만 아무리 타락한 시대가 도래한다고 해도 강청하는 끈질기게 탄원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부르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 성가시게 할까봐 불의한 재판관도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준다고 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일까?
  그러므로 성도는 말세가 되어갈수록 낙망하지 말고 기도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실 하나님을 뇌물같은 것을 받아야 재판해주는 불의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과부의 소원까지도 들어주시는 의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하겠는가? 끝까지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하는 문제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으실까? 첫번째로는 겸손한 태도로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기도의 내용이 회개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기도응답을 받고 자기 집에 돌아가게 되었는지 두 사람의 기도를 소개하신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자기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했고 남들을 깔아뭉개는 기도를 드렸다. 그에게는 간구가 없다. 일색 자기 자랑뿐이다. 그러니 무엇을 그에게 줄 수 있겠는가? 아니다. 세리의 기도는 달랐다. 그는 성전 가까이에 접근하지 못한채 멀리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한채 자신의 가슴을 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앴다.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에게 응답해주셨다. 그렇다. 우리의 기도는 남을 정죄하거나 자기를 높이려는 의도가 숨어있어서는 아니된다. 오히려 자기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놓고 간절히 겸손하게 진심으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도의 응답이 오기 때문이다.
  셋째, 천국은 과연 어떤 자들의 소유가 되는가 하는 문제다. 주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이들은 대체로 겸손하다. 그리고 곧이곧대로 잘 믿는다. 그리고 권위에 절대 복종한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질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실제로 천국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닌다고 한다.

 

 

 

 
  날      짜 : 2013-03-20
  제      목 : 누가복음강해(36) 부자와 영생의 길(눅18;18-30)
     
 
   
▒ 본문말씀 ▒
  :: 눅18;18-30(신약 127면) ::

 

 

 

  인생 최대의 질문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죠?"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나요?" 이러한 등등의 질문도 매우 중요한 질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보다 더 궁극적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공을 못해도, 좀 아프게 살아도, 좀 가난하게 살아도 괜찮지만,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죽어서 영원한 불못의 고통속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부자인 이 청년관리가 당시 종교의 최고지도자였던 산헤드린공의회 회장에게 찾아가지 아니하고, 영생과 구원에 관한 질문을 답을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에게 찾아간 것은 참 잘 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오늘 부자와 예수님과의 대화의 핵심포인트는 무엇일까? 그는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영생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그동안 그렇게 해 온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 주님을 찾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잘 아셨다. 인간은 이미 죄에 오염된 상태이고 죄된 본성을 소유하고 있기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를 행하기에 얼마나 무능한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 죄인인지를 아셨기에 그가 얼마나 의를 행하기에 무능한 존재이며 죄인인지를 알도록 그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계명들을 지켰느냐?" 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나는 이미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5계명부터 9계명까지 지켜왔을른지는 몰라도 그는 마지막 열번째 계명인 "네 이웃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준수에는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다른 계명들은 잘 지켰을른지 몰라도 인간계명의 요체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의 적극적인 의미의 계명은 소홀이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젊어서 부자가 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돈을 모으다 보니, 가난한 이웃에게 대한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돈에 대한 집착이 많았던 자였다.
  그러자 주님은 그가 자기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가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주님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가 진정 영생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얻기를 원한다면 영생을 얻기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느냐" 하신 것이다. 영생이 그렇게 갖고 싶은 것이라면 그가 하나님처럼 귀하게 여기는 재물을 버릴 수 있느냐를 질문하신 것이다.
  우리 믿는 이들도 언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자신이 가진 믿음을 죽을 때까지 지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걸림돌이 되는 부분을 제거하거나 내려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명예나 쾌락이 될 수 있으며, 어떤 이는 성공욕이 될 수도 있으며, 어떤 이는 가족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어떠한가? 과연 당신은 영생을 얻는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있다면 과연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그럴려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하다. 이제 당신이 선택할 차례다. 당신도 영생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지 한 번 체크해보라. 그리고 있다면 그것을 내려놓으라. 그리고 주님을 따르라. 그것을 내려놓을 수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당신을 주님께 가져가 회개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마3:2,4:17, 행2:38).

 

 

 

 
  날      짜 : 2013-03-27
  제      목 : 누가복음강해(37) 세번째수난예고 및 거지맹인의 부르짖음(눅18;31-43)
     
 
   
▒ 본문말씀 ▒
  :: 눅18:31-43(신약 127면) ::

 

  예수께서는 어떤 자의식을 가지고 계셨을까 그리고 예수님 앞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어떤 사람들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았을까? 오늘은 이 2가지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먼저 예수께서는 어떤 자의식을 갖고 사셨을까를 살펴보자.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나이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30세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30세 이전까지는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세우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이후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시작하셨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께서 언제부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줄을 아셨을까를 생각해보았는가? 예수님은 이미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어 3년반 뒤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아셨다. 하지만 어느 누군들 자신이 십자가에서 저주스러운 죽음을 죽는 것에 대해 그것을 기뻐하고 환영할 사람이 있을까? 주님께서도 아마 그것을 달가워하지는 아니하셨으리라. 하지만 주님은 공생애기간 내내 자신은 죽으러 왔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또 개시고 있었다. 특히 그의 공생애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3번씩이나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음에 넘겨지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다.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속죄양이 되시어 죽으시고 요나의 예언에 따라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3년반동안이나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대목을 찾을 수 없다.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며칠 안 남겨놓은 상황이었지만 예수께서는 자기몸을 돌보시기 보다도 자신을 찾는 자들의 고통과 소원을 들어주시는 데에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당신도 힘드셨을텐데 말이다. 그분은 예언을 따라 태어나셨고 자라셨으며 사명을 감당하셨다. 그것이 그분의 인생이다. 우리도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삶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사명이라 부른다. 그 사명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꼭 잊지 말고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두번째로 살펴볼 것은 과연 어떤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본문에는 여리고성에서 구걸하던 거지 소경이 등장한다. 그는 바디매오였다. 그런데 그가 구걸하다가 어느날 사람들이 웅성거리를 소리를 듣고는 무슨 일인가를 물었을 때, 구경꾼들이 나사렛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그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분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전능자이심을 그는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자신의 눈을 고침받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장애물이 참 많았었다는 사실이다. 첫째 그는 주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정확히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당시 수많은 구경꾼들의 방해에 맞딱뜨려야 했다는 점이다. 당시 구경꾼은 어서 빨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지상에 다윗의 왕국을 세워주기를 바랬기 때문에 예수께서 누군가 때문에 지체받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이 소경은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눈이 보이지 않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큰 소리로 외쳐 부르는 것뿐이었다. 그는 목청이 터저라 큰 소리로 예수님을 찾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구경꾼들이 나무라며 그를 저지했다. 하지만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야이신 그분께서 자신을 돌아보기를 간절히 구했다. 사람들이 발로 차고 떠밀쳐내도 그는 다시 일어나 주님께 외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세웠고 그를 치료해 주었다. 우리들은 어떠한가? 조그마한 방해를 만나도 금방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소경의 그 간절한 외침을 여러분의 외침으로 바꾸지 않겠는가?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날      짜 : 2013-04-03
  제      목 : 누가복음강해(38) 삭개오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눅19;1-10)
     
 
   
▒ 본문말씀 ▒
  :: 눅19:1-10(신약 128면) ::

 

  당신은 삭개오의 고뇌를 생각해보았는가? 유대인이지만 유대인과 함께 어울릴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었지만 회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가에서 서성이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에게는 어려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키가 작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렸을 때 자존감에 많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단했다. 보란듯이 꼭 성공해서 자신을 놀려대었던 사람들이 자신 앞에 고개숙이게 하겠다고 말이다. 그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다. 결국 합격하기 어렵다면 관리시험에 합격했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지역에 발령받아 그곳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장소는 가나안의 첫 관문이자 당시 최대 무역거래소라 여겨지던 여리고성이었다. 그가 얼마나 열심이 돈버는 데에 열중했는지 그는 결국 여리고성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비록 그가 부와 권력을 손에 거머쥐었어도 잃은 것이 참 많았다. 그는 먼저 친구와 이웃과 동료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율법과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마저 내팽개칠 때가 있었다. 
  이제 부자가 되었고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고 한들 그에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는 여리고성 사람들에게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이 민족의 반역자 내지는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가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대궐같은 집이 있고, 육선이 가득한 만찬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해도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 그러면서 그는 하루를 산다고 해도 사람답게 한 번 살다가 죽으리라고 또 마음 먹고 마음먹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참으로 뜻밖에 반가운 소리를 접했다. 그때 당시 새로 뜨는 분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은 기존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어느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고 사람을 대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모세와 예언한 바로 그 선지자라고 말해지고 있었고, 엘리야 선지자 내지는 메시야라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삭개오는 살아생전에 그분을 꼭 한 번 뵙고 싶어했다. 어서 그분이 오셨으면... 사실 삭개오는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받고 새롭게 살아보려고 해도 받아주는 이가 없었기에 늘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이 그 성에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는 세리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동네길가로 나아갔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분을 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세리장으로서 왕따를 당하는 형편이라 사람들이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리도 없었다. 또한 키가 작았기에 까치발을 딛고 보려해도 소용이 없었다. 얼마나 기다린 주님과의 만남인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혹시 그분에게 야단을 맞고 책망을 듣는다해도 그분을 한 번 꼭 만나보리라. 그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나볼 수 있을까를 골똘히 궁리했다. 그때 그는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곳의 저 멀리 앞쪽에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장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 번도 올라가본 적이 없는 돌무화과나무 위를 기어서 올라갔다. 손이 덜덜덜 떨린다. 그러다가 떨어지면 허리가 부러질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님을 한 번만이라도 가까이에서라도 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 주님께서 그곳에 오셨고 주님은 걸음을 멈춰 선 채로 위를 올려다 보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날 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겠노라고 말씀해주셨다. 대궐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으나 한 사람도 찾아오는 이가 없어 바람만 날리던 자신의 집에, 사람이 흔히 말하는 죄인의 집에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신 것이다. 그는 몸둘 바를 몰라하며 자신의 집에 주님을 기쁘게 모셨다. 그리고 그때 주님 앞에 중대한 선언을 한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표현해준다. 그것은 무엇일까?

 

 

 
  날      짜 : 2013-04-10
  제      목 : 누가복음강해(39) 므나의 비유와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눅19;11-27)
     
 
   
▒ 본문말씀 ▒
  :: 눅19:11-27(신약 128면) ::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기 위한 예루살렘성 입성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한 사람을 위하여 여리고성에 들르신다. 그 사람은 바로 여리고성의 외톨이 삭개오였다. 삭개오를 만난 주님은 그의 마음의 상처를 싸매어주시고 그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다. 이어 예수님은 거기에 모여 있는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곧바로 메시야왕국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메시야 왕국이 당장 실현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왕권을 받고 재림하실 때에 그 일이 이뤄질 것을 아셨다. 그래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시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것이 바로 '열므나의 비유'이다.
  열 므나의 비유는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와 비유와 흡사하다. 하지만 둘은 다른 비유이다. 이 두 가지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사건의 결론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비유들이 주어진 시점이 각각 다르며, 그 목적과 대상도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본 므나의 비유는 기회의 균등성과 아울러 충성도에 따른 다른 보상이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대한 평가기준이 그 중심주제다. 뿐만 아니라 부가적으로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자들 중에 예수께서 왕됨을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임도 등장하고 있다. 
  이 비유는 어떠한가? 어떤 마을에 많은 종들을 거느린 한 귀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에 가려했다. 출발전에 그는 자신의 종들 열 명을 불러 각각 한 므나씩을 그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이 올 때까지 장사하라 명하였다.
  한편 그 마을 주민들은 그가 왕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뒤로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후 귀인은 왕이 되어 돌아왔다.
  그때 왕이 되어 돌아온 귀인은 먼저 열 명의 종들을 불러 그간 어떻게 장사했는지를 계산했다. 또한 자신의 왕됨을 원치 아니한 백성들이 있음을 알고 그들을 불러내어 그들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아마 그의 백성들과 더불어 죽임당한 사람 중에는 게으르고 불충성된 귀인의 종도 븐명 들어있을 것이다. 그도 악한 종이라 책망을 들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한 므나도 빼았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므나의 비유에서 동일한 기회가 주어진 주의 종들에 대한 상급심판이 분명히 존재함을 볼 수 있으며, 주인은 결코 종들을 착취하기 위해 장사를 시킨 것이 아니라 나중에 그의 나라를 그들에게 주실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임무를 주었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려먹지 못해 안 달이 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동일한 기회를 주시면서 우리가 그 기간에 얼마나 충성되게 살아가는지를 보기 원했다. 당신은 그분이 맡긴 일에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주인의 평가는 그분이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잣대로 사용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주인의 명령에 얼마나 충성되며 얼마나 부지런한 사람인가? 그분은 인색한 주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지만 공의롭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음에 유의하자. 그리고 오늘도 우리 자신에게 주신 임무에 충실한 성도들이 되자.

 

 

 

 

 
  날      짜 : 2013-04-17
  제      목 : 누가복음강해(40) 예수님의 결의에 찬 예루살렘 입성(눅19;28-44)
     
 
   
▒ 본문말씀 ▒
  :: 눅19:28-44(신약 129면) ::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 그러나 그 길은 개선행진하는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 길을 앞장서서 가신다. 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다. 오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을 향해 우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상명을 받은 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주님의 방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제자 2명을 보내시며, 메시야의 입성을 준비하라신다. 그것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겠다는 것이다.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구원하러 오시는데 말을 타지 않고 나귀새끼를 탈 수 있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에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신다. 그것도 아직 한 사람도 타 본 적이 없는 나귀새끼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순결하신 분이기 때문이리라.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약 주인이 나귀새끼를 왜 푸느냐고 물어보면 "그것의 주인께서 쓰실 필요를 가지고 있으시답니다."라고 말하라 하신다. 그렇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다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인 것이다. 그리고 특히 구속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다. 주님께서 핏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것을 청지기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아까워하며 인색한지 모른다. 그러나 보라.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내 놓는 일에 얼마나 인색하셨는가? 그리고 그것을 아까워하셨는가? 주님은 우리 위해 아낑없이 당신의 목숨을 주셨건만 우리는 주님에게 그 목숨을 드리기를 머뭇거리고 있지 않은가? 뭔가 잘못되었다.
  제자들은 이제 나귀를 끌고 주님께로 왔다. 그런데 그들은 왕이 입성하시는데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는 그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얹어서 예수님에게 나귀안장을 만들어드린다. 그러자 메시야를 환영하러 나온 무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의 겉옷을 땅에 깔아드린다. 그리고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주님을 환영한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노래를 한다. 메시야의 입성을 축하하는 찬송을 부른 것이다. 겉옷을 드리는 행위, 종려나무가지를 흔드는 것, 찬양을 부르는 것, 모두가 다 주님을 향한 참된 제사임에 틀림없다. 당신도 이러한 제사를 드리고 있는가?
  그러나 그들이 부른 찬송은 초막절 절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었다(시118:25-26).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는 행동을 제지시켜달라고 예수께 요청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일을 말리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하신다. 그렇다. 주님은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감람산을 내려가 기드론골짜기에 들어서신 예수님의 눈가에는 눈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방문을 거절한 그들의 최후가 어떠한 것인가를 미리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평화의 도성이라 불리던 예루살렘은 곧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그러면 그 성 주민들은 다 죽게 될 것이다. 온 도성은 불에 탈 것이며, 성벽의 돌도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될 것이다.
  왜 하나님의 도성이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방문을 거절한채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파송하신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몰랐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최후통첩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는 우리의 눈도 감겨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최후통첩을 최후통첩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종교적인 입지를 방해하고 자신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여, 우리의 닫혀진 영안을 열어주소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드리게 하소서. 내 시간과 내 물질과 내 재능과 내 미래와 내 생명까지도 드리게 하소서. 그분이 나에게 그 생명을 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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