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강해(1강~52강) 시리즈(5)입니다(눅19:45-24:53)

by 갈렙 posted Dec 0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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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youtu.be/8mJ0AQkCT4Y
날짜 2013-04-24
본문말씀 누가복음 19:45~24:53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누가복음강해, 누가복음19장-24장강해,

누가복음강해(1강~52강) 시리즈(5)입니다(눅19:45-24:53)

누가복음강해(41) 성전정화사건과 권위출처논쟁(눅19:45-20:18)

누가복음강해(42) 납세논쟁과 부활의 진리(눅20:19-47)

누가복음강해(43)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주님의 재림1(눅21:1-28)

누가복음강해(44)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주님의 재림2(눅21:29-38)

누가복음강해(45) 유다의 배반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눅22:1-23)

누가복음강해(46) 베드로의 맹세와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눅22:24-46)

누가복음강해(47) 잡히시고 심문받으신 예수님(눅22:47-23:12)

누가복음강해(48)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눅23:13-43)

누가복음강해(49)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눅23:44-56)

누가복음강해(50) 부활의 아침의 기쁜 소식(눅24:1-12)

누가복음강해(51) 부활체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눅24:13-43)

누가복음강해(52) 성령세례약속과 승천하심(눅24:44-53)

 

 
  날      짜 : 2013-04-24
  제      목 : 누가복음강해(41) 성전정화사건과 권위출처논쟁(눅19;45-20;18)
     
 
   
▒ 본문말씀 ▒
  :: 눅19;45-20;18(신약 129면) ::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다음날일 월요일과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다. 하지만 저문 시각이었으므로 예수님은 베다니에 가시어 쉬시고는 아침 일찍 예루살렘성으로 다시 들어오신다. 하지만 시장하신지라 한 무화과나무에게서 먹을 것을 구한다. 하지만 아무 열매도 얻을 수 없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그 무화과나무더러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와보니 성전은 온갖 장사치들로 말미암아 북적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환전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다. 성전을 깨끗히 청소하신 것이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거늘 너희들이 강도의 굴혈로 만드느냐?" 하지만 아무도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은 무슨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성전은 기도하며 제사드리는 것이 그 주목적이 아닌가! 그러므로 벗어나면 항상 성전도 더럽혀질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을 깨끗히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일에 잇권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엄청나게 반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잇권이 개입된 일들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만을 살 뿐 그것이 결코 그들의 영혼의 장래를 도와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했던 이들 즉 성전을 이용해 돈을 벌어볼 속셈으로 환전상과 제물매매자들을 이용하고 있던 대제사장그룹은 그때부터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 일에 매진한다.
  다음날 화요일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변함없이 성전에 나와서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산헤드린공회원들이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그러한 일들을 행하며, 누가 그러한 권위를 주었는지 물어본다. 그때 예수님은 역질문을 통해 그들의 권위출처에 대해 아무말을 못하게 하신다.
  그렇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에 대해 인간에게 허락받고 이야기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태를 보라. 교회에서 쓰임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람의 눈치만을 보는지 말이다. 하나님을 따르는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라시면 그대고 순종하는 자들이다.
  이제 주님은 이제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끈질긴 기다림의 사랑과 그래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 가혹한 심판이 내려질 수 있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이름하여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그 그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속히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하지만 유대인중 어느 누구도 귀기을여 회개하지 않는다. 그러자 결국 이스라엘은 이 말씀의 예언대로 패망하게되고 그 나라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린다. 마치 뿌리채 말라버린 무화과처럼.
  그렇다. 우리에게 주님은 회개의 기회가 있을 때에는 건축자의 모퉁이 돌이 되시지만, 그 기회가 끝나버리면 순간은 그 돌은 우리에게는 걸려넘어지게하는 반석이요 심판의 모진 돌이 되는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에 회개하자. 기회가 있을 때에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자. 기회가 있을 때에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자.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갑작스런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경험하기 전에 말이다.

 

 

 

 
  날      짜 : 2013-05-01
  제      목 : 누가복음강해(42) 납세논쟁과 부활의 진리(눅20;19-47)
     
 
   
▒ 본문말씀 ▒
  :: 눅20:19-47(신약 131면) ::

 

  오늘 말씀(눅20:19-47)은 예수께서 성 고난주간에 있었던 사건 중,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이다. 특별히 서기관들과 헤롯당원이 합작이 된 무리들과 예수님께서 벌인 납세논쟁과 아울러,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의 엉뚱한 주장 및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인지 다윗의 주님인지에 대해 주님께서 언급한 말씀을 살펴볼 것이다
  첫째, 과연 모든 사람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가?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나라에 바치는 세금 즉 인두세는 로마나라의 화폐인 데나리온으로 납부해야 했는데, 그 은전의 앞면에는 로마의 황제의 화상과 글(신적 통치자)이 기록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로마 황제의 어머니의 화상과 글(최고의 제사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시말해 세금 낼 동전의 앞뒷면에 기록된 글에는 로마의 황제와 황제의 모친이 곧 모든 사람의 신이자 제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그것이 가이사의 것이라면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평소 때에는 원수지간으로 지냈던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무 것도 책잡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가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글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다. 놀랍게도 그것은 사람에게 기록되어 있다(창1:26-2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로마가 만들고 로마가 베포한 동전이야 로마황제에게 드려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겠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몸이 하나님의 형상과 글이 새겨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라.

  둘째, 부활의 몸은 과연 어떤 상태이며, 부활의 능력과 믿음이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현실주의자였던 사두개인들 그들은 영적존재 즉 천사와 영과 천국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부활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대결혼제도(형사취수제도)를 가지고 요상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을 지으신 분이기에 부활 때에 사람이 어떤 상태로 부활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말씀해주셨다. 그때에는 하늘의 천사들처럼 종족번식을 위해 결혼도 아니할 뿐더러 죽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된다고 하셨다. 더욱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활에 대해 모르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나 그들의 믿음은 부활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고 증명하신다. 그렇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허리에 있었던 후손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듯, 우리가 믿는 믿음은 부활의 몸을 입을 때까지 유효한 것이 될 것이다
  셋째,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가 아니면 다윗의 주님이신가?
  예수님은 분명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9대 후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혈통적으로 볼 때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쪽 면만을 알고 있던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는 메시야관을 시정해주신다. 다시 말해 메시야는 비록 혈통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지만, 신성한 영역에 있어서는 다윗의 주님(Lord)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와같은 사실을 시110:1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윗이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다 성육신하기전의 메시야를 보았던 자들이다(요8:56, 시110:1).
  넷째,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언젠가는 종교지도자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때 주의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위선이다. 주님은 그것을 미리 아시고, 당시 서기관들의 위선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신다. 만약 제자들도 그렇게 된다면 그들과 똑같이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다. 그렇다. 높아지려 하지 말라. 그러면 천국에서 당신은 내려오기 바쁠 것이다. 

 

 

 

 
  날      짜 : 2013-05-08
  제      목 : 누가복음강해(43)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주님의 재림1(눅21;1-28)
     
 
   
▒ 본문말씀 ▒
  :: 눅21:1-28(신약 132면) ::

 

  예루살렘 성전은 언제 파괴될 것인가 그리고 그때가 가까웠다는 징조는 무엇일까?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세상의 종말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세워지고 있는 성전은 헤롯성전으로서 B.C.19년부터 A.D.63년까지 82년간 지어진 성전인데, 예수님 당시 그 성전은 46년째 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성전이 성전으로서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성전의 겉모습과는 달리 성전 내부는 온통 썩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결국 그 말씀은 40년 뒤 성취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른지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정확히 일러주시지 않았다. 다만 그때가 가까우면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이라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주님께서 오시는 종말이의 때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예언은 반복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의 파괴에 앞서 부자들과 가난한 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언급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헌금의 액수는 산술적인 액수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다 아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파괴는 언제 될 것인가? 재난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셨다. 거짓그리스도의 출현, 난리와 소요의 소문, 내란, 국제전쟁, 큰 지진, 기근, 전염병, 무서운 일들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와 박해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전조들이다. 그렇다면 성전파괴의 바로 앞 직전의 징조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루살렘 성이 군대들에 의해 포위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지상재림의 징조로서 일월성신의 큰 흔들림을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늘구름을 타고 공개적으로, 가시적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재림이 이중적인가 아니면 단회적인가 하는 문제다. 이중적인 재림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은밀한 공중재림과 공개적인 지상재림을 각가 따로 구분한다. 그 중 은밀한 재림 때 성도의 일부가 휴거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어떤 부류에서는 혼인잔치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기간이 7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3년반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다니엘서,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묵시서를 종합해서 살펴보면 7년은 불가능하고, 3년반의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도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성경이 밝히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재림은 환란 후에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마24:29-31). 다시 말해 복음전파가 불가능해지고, 적그리스도가 666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후3년반의 시간까지 이 세상에는 성도들이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계13:7,10, 14:9-12).  
  그렇다면 성도들이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활의 단회성이다. 성도들의 부활이 결코 2번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고전15:51-52).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주님과 더불어 이 세상으로 올 것이다. 그때 그들이 먼저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고, 지상에 남아있는 성도들도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공중에서 주님과 만나게 될 것이고 곧이어 지상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전에 은밀한 공중재림이 있어 준비된 알곡만을 데려갈 것이라는 환상과 그 무리에 나는 꼭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우선 내려놓아야야 한다. 만약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환난후에 오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이 환난을 견디어낼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은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날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후3년반동안 피난처가 들어가서 피할 영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은 동시적 재림이다. 또한 그것은 결단코 은밀히 진행될 것이 아니라 시끌벅적한 상태의 공개적 재림일 것임을 알라(살전4:16, 고전15:51). 

 

 

 

 
  날      짜 : 2013-05-15
  제      목 : 누가복음강해(44)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주님의 재림2(눅21;29-38)
     
 
   
▒ 본문말씀 ▒
  :: 눅21:29-38(신약 133면) ::

 

  주님의 재림과 징조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성도들은 어떻게 주의 재림을 대비할 것인가?
  먼저 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아울러 종말의 시대에 있을 일들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거짓그리스도의 출현, 난리와 난리의 소문,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의 창궐, 하늘로부터의 무서운 일들의 발생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전파시 당하게 될 엄청난 핍박이 그것이다.
  주님께서는 특히 예루살렘이 큰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의 가장 가깝고도 큰 징조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A.D.66년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해 에워싸이더니 A.D.70년에는 로마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장차 주님의 재림시에 나타날 징조의 하나로서 무화과나무와 각종 나무들이 싹이 나는 것을 예고하셨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각종 나무들은 여러 나라들을 상징한다. 아니나 다를까 2차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을 비롯한 약 80여개의 국가들이 독립을 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과 요르단과 레바논과 시리아가 독립하게 되었고, 유럽의 상당한 국가와 아프리카의 절반이상이, 호주와 인도와 필리핀과 태국, 베트남, 미얀마, 몽고, 한국이 독립하였고, 아메리카에서는 캐나다가 독립을 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각종 나무들이 싹이나면 여름이 가까이 온 것을 아는 것처럼 그때가 되면 주님께서 문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다. 그렇다. 지금은 주님께서 이미 문앞에 와 있으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싹이 난 후에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의 재림의 재림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1948년 5월 14일에 탄생한 사람이 벌써 65세가 되었다. 이제 남은 세대는 70년기간 뿐이다. 이전에는 한 세대를 40년(광야방황세대)과 50년(희년)이라고도 해석했지만 이미 지나가버렸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빨리 돌이켜보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 잡고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에 주의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방탕함과 술취함 그리고 생활의 염려로 짓눌려있을 것임 등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죄짓는 삶을 회개하고 죄를 그쳐야 한다. 비록 육신이 있어 이 땅에 살고는 있지만 이 세상에 종노릇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눈은 항상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깨어 기도해야 한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환난전휴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라. 19세기까지 환난전휴거 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19세 후반 존 넬슨 다비에 의해 미국에서 생겨난 세대주의가 한국에 유입되어 갑자기 환난전휴거라는 교리가 한국교회를 장악해 버렸다. 속지 말라. 초대교회 교인들도 다 환난을 통과했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인내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라 하셨고, 요한계시록 13-14장에서도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하다 하셨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므로 환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금부터 무장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그러면 피할 길도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실 것이다.

 

 

 

 

 

 
  날      짜 : 2013-05-22
  제      목 : 누가복음강해(45) 유다의 배반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눅22;1-23)
     
 
   
▒ 본문말씀 ▒
  :: 눅22:1-23(신약 133면) ::

 

  한국교회 이단 중에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유월절 지켜야 한다는 이단이 있다.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며 죽임을 면치 못한다고 가르치면서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월절은 영원한 규례이므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가르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오늘의 말씀은 그 답변이 들어 있다.
  예수께서는 성고난주간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그 일들이 비교적 소상이 기록되어 있지만 수요일의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가룟유다의 배신과 음모가 있지 않았나 본다. 특히 눅22:1-6의 말씀은 그 수요일에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는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이어 예수께서는 목요일 아침에 유월절을 준비토록 시키시고, 마가다락방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동하여 저녁식사를 하는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으며, 그리고 유월절을 대치하는 성만찬을 제정하여 주신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깊게 보아야 하는 것은 어떻게 되어서 가룟유다가 사탄의 노리개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유다는 12제자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분명 신임받는 예수공동체의 재정담장 제자였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돈궤를 맡아서 그 일을 처리했는데, 이는 그가 그만큼 머리가 똑똑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감당하면서 돈에 대한 탐심이 늘어났고 지나치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돈욕심을 버리지 못해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마저 대적자들에게 내주는 고리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그때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기록과도 일치하는데, 이는 곧 사람이 사탄의 쓰임에 합당한 생각이나 행동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사탄이 그를 붙잡아 쓴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하루가 지나도록 갖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출세하려하거나 돈을 벌려고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면 사탄이 그 사람을 써버리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가룟유다가 아니겠는가! 아니 우리 자신이 가룟유다가 될 수도 있다. 누구든지 섰다 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성경말씀처럼 늘 우리 자신을 점검하며 주의 말씀앞에 겸손히 자신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 돈과 명예과 권력과 음란함을 붙잡으려 하지 말라. 그런 사람을 다 사탄이 잡아쓰기 때문이다.

  가룟유다의 배신이 착착 진행될 무렵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목요일이 되자 유월절 식사를 하루 앞당겨 실시한다. 원래는 14일 금요일에 유월절 절기를 지켜야 했으나,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 양(고전5:7)으로 오셨기에 그분은 하루 전에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유월절을 끝내시며 유월절을 대신하여 성만찬을 제정하신다.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펼쳐질 어린양의 혼인잔치 전까지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유월절양이 되어 유월절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 양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피흘리심으로 죄용서를 허락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자연스럽게 율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굳이 유월절을 따로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가?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먼저는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백성들을 구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며,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시다. 얼마 안 있으면 재림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모든 일을 행하셨다. 자신의 생명도 내놓으셨고 당신의 능력까지도 내려놓으셨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이제는 주님처럼 살 때가 되지 않았을까  깊이 생각해보라. 

 

 

 

 

 
  날      짜 : 2013-05-29
  제      목 : 누가복음강해(46) 베드로의 맹세와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눅22;24-46)
     
 
   
▒ 본문말씀 ▒
  :: 눅22:24-46(신약 135면) ::

 

  오늘 본문말씀(눅22:24-46)은 고난주간에 있었던 사건들 가운데 목요일 저녁 성만찬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천국에서는 과연 어떤 자가 큰 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가, 기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천국에서는 어떤 자가 큰 자이며 누가 더 높이 여김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의 삶과는 반대되는 거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내려놓고 다른 형제를 주님처럼 섬기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멀리하지 않고 그분과 함께 할 때 영광은 더 크게 된다고 하셨다. 당신은 주님과 함께 받는 고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정말로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통치자로서 참여하고, 주님이 베푸신 천국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역경과 시련 가운데서도 주님을 떠나지 말라. 주님과 함께 하라.
  둘째,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인가?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비결이 기도에 있다고 하셨다. 사탄이 밀까부르듯 시험해도 그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는 사탄의 시험이나 올무를 끊어버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무엇이든지 사람의 약점을 걸어서 사람들을 넘어뜨리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사탄의 결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풀어 버리게 하는 것은 기도라는 사실을 아는가! 사실 사탄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유혹하며 넘어뜨리려 한다. 사탄이 넘어뜨리고자 하는 대상은 단 사람도 예외가 없다. 사탄의 교모하고도 집중적인 시험에도 넘어가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기도뿐임을 다시 한번 새기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보자.
  셋째, 예수께서는 늘 하시던 습관대로 기도하셨다. 당신에게 있어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습관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정기적으로 기도하셨다. 특히 기도의 습관은 환난이 와도 그것을 담대하게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습관을 좇아 늘 기도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기도하지 못했던 베드로는 넘어지고 말았다. 주님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중보해주셨다. 어떻게 되었는가? 정말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다시 회복되어 초대교회의 수장으로서 최초의 교회를 세우며, 복음전파사역에 만전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렇다. 뭐니뭐니해도 기도의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 저녁에 기도하는 습관. 당신은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는 기도의 습관을 만들어보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당신의 원함과 뜻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 기도는 나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우리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기도이며,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당신의 기도는 주님을 부려먹는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당신 자신을 복종시키는 기도인가?

 

 

 

 

 
  날      짜 : 2013-06-05
  제      목 : 누가복음강해(47) 잡히시고 심문받으신 예수님(눅22:47-23:12)
     
 
   
▒ 본문말씀 ▒
  :: 눅22:47-23:12(신약 261면) ::

 

  오늘은 예수님의 성고난주간의 기록 중 금요일 새벽부터 아침까지 있었던 사건을 다룬다. 사건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자정을 지난 어느 시각 새벽4시쯤이나 되었을까? 캄캄한 시각에 가룟유다가 대제사장들이 보낸 하속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 예수님곁을 찾아온다. 그리고 입을 맞춘다. 그를 잡으라는 군호였다. 그들은 물었다. 하지만 내가 그니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들을 뒤로 나뒹굴 수 밖에 없었다. 어찌 하나님의 아들을 감히 인간이 건드릴 수 있을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칼을 빼어 휘두르는 왼손잡이 베드로 때문에 예수님을 붙잡으려다 귀가 잘린 말고의 귀를 붙혀주신다. 칼은 남을 공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자.
  예수님은 붙잡혀가셨고 새벽녘 대제사장의 집 뜰에 있었다. 그시각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대제사장의 종들이 예수님과 한 패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라고, 말씨가 보니 그렇다고 베드로에게 말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극구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러자 그때 닭이 울었고 주님의 시선이 베드로와 마주친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채 몇 시간이 되지 않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부인하고 만다.어찌 그의 통곡을 우리가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가룟유다와 베드로 이 두 사람의 운명이 천양지차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룟유다는 자살해 죽었고 베드로는 회개하여 초대교회를 반석위에 세우는 자가 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을까?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지만 베드로에게도 사탄이 역사했다. 주님께서는 죽지 말라고 말하는 베드로더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둘 다 주님을 부인했고, 둘 다 사탄으로부터 붙들려 쓰임받았다. 그러나 한 사람은 지옥에 가고 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갔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났을까? 첫째, 의도성에서 차이가 난다. 가룟유다는 의도적으로 주님을 배신했다. 하지만 베드로는 어쩔 수 없이 부인했다. 둘째, 우상숭배의 측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 우상숭배는 보이는 석상이나 목조각이었지만 신약에 들어와서 우상은 물질이나 음란 등으로 변했다. 마6:24에 예수님은 물질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가룟유다는 물질을 숭배했다. 그는 곧 우상숭배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 부인했다. 계21:8을 보라. 우상숭배하는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에 던져진다고 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
  그렇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범죄했을 경우에는 회개가 쉽지 않다. 그리고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는 더욱 돌이키기가 어렵다. 작은 범죄라도, 작은 우상숭배라도 절대 저지르지 말라. 우리가 천국가려면 반드시 죽기전에라도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작은 도둑이 소도둑된다고 작은 범죄들이 모이게 되면 죽을 때 회개하기 어렵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어 주님은 산헤드린공회에 붙들려가 정죄받고,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심문받고 헤롯안디바에게까지 보내어진다. 왜 그랬는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종교법으로 죽이려 했지만 불가능했기에 사형집행권을 가진 빌라도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죄없는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고 그래서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에 사건을 헤롯에게 떠넘겨버린다. 하지만 헤롯에 붙들려 간 예수님을 끝까지 침묵을 지킨다. 책임을 가진 자여,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하지 말라. 그리고 죄가 문틈으로 들어올 때 잘라버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의 온 영혼을 장악하게 되고 기관과 법을 장악하여 사람을 헤치기 마련이다. 그리고 헤롯분봉왕처럼 호기심으로 주님을 보려고 하지 말라. 그분을 진실로 믿으려고 그분을 보라. 그래야 비로소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날      짜 : 2013-06-12
  제      목 : 누가복음강해(48)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눅23;13-43)
     
 
   
▒ 본문말씀 ▒
  :: 눅23:13-43(신약 138면) ::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시다. 그런데도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을까? 그것은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산헤드린공의회와 백성들과 빌라도의 합작품이라고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배후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었지만 말이다.
  먼저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산헤드린공회는 예수그리스도를 신성모독죄로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시 사형집행권을 가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찾아가 사형언도를 내려달라고 고소했다. 하지만 그들이 빌라도에게 고소한 것은 종교적인 문제였으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모반죄를 고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빌라도가 그 문제에 관해 자세히 조사해보았지만 죄는 없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3번씩이나 그가 죄가 없으니 석방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산헤드린공회의 사주를 받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않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자, 빌라도는 때려서 놓겠다고 했다가는 결국 민란이 일어날까봐 자기의 손을 씻고는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내어주고 만다.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들의 최종결론은 나중에는 악도 버젓이 행한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빌라도는 성난 군중들이 무서워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죽이는데 내주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그는 지금도 기독교인들이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저주스러운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다.
  한편, 처형장으로 이동하던 예수님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매질을 당한 나머지 골고다 언덕까지 이동하면서 무려 14번이나 넘어진다. 노중의 한 중간쯤이었을까? 주님은 더 이상 20kg의 십자가의 가로목을 지고갈 수 없게금 되었다. 그때 구경나온 구레네사람 시몬이 붙들려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간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주님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일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모든 식구가 구원을 받고 초대 로마교회의 핵심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막15:21, 롬16:13).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도 복이 되는데 하물며 손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에게는 얼마나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좌우편에 못박힌 두 행악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 중 한 죄인은 죽음 앞에서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고 한 사람은 자신의 완악함과 고집과 교만함을 버리지 못해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국에 들어간 행악자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한 것은 아닌듯 보인다.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그 순간에도 자신을 십작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기도소리를 듣고 한 강도는 그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자신은 살인 등의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예수께서는 그 벌을 받아야 할 죄가 없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왕국에 들어가실 때에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한다. 주님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낙원을 약속해주신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는 것 같다. 정말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만 않는다면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더 늦기전에 여러분도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자가 누구인 줄 아는가? 죄를 지어놓고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자일 것이다. 이 세상에 예수믿고 구원받지 못할 자가 없겠지만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계속 죄만을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천국에 입성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천국은 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라도 다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각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주님께서 회개할 마음을 주시고 죄를 깨닫게 해주신다면 그즉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라. 그러면 반드시 살 길이 열릴 것이다.

 

 

 
  날      짜 : 2013-06-19
  제      목 : 누가복음강해(49)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눅23;44-56)
     
 
   
▒ 본문말씀 ▒
  :: 눅23:44-56(신약 139면) ::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어떤 징조가 나타났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장사지낼 때에는 누가 그 일을 맡아했는지에 대한 기사이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2가지 이상하고도 특별하고 의미심장한 징조가 나타났다. 하나는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3시간동안 임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한 가운데가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무슨 일이며 거기에는 어떤 뜻이 담겨있을까?
  먼저, 정오부터 오후3시까지 3시간동안 대낮에 해가 빛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주만물이 자신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죽으신 것을 슬퍼하는 징조이다. 그런데 이러한 징조마저 해와 달과 별이 생성될 때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니산월 1월 13일 정오부터 오후3시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순간 칠흑같이 어둠이 찾아왔는데 이는 개기일식이 그 시간에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개기일식이 하루 아침에 그냥 생성될 수 있는가? 해와 달과 지구가 공전하면서 서로 겹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니 하나님께서는 이미 해와 달과 지구가 생성될 때부터 이를 계산하여 돌게 했다는 것이 아닌가? 온 우주만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속의 하나님이 되시어 오시어 죽으시는 것을 슬퍼하기 위해 해와 달과 지구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 오후3시쯤에 일어났다.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이 지시를 따라 만들었던 성소휘장이 그날 처음으로 찢어진 것이다. 황소 2마리가 끌어도 찢어지지 않는 휘장이 갈라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새로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대속의 제사로 인해 하나님과의 화해되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라고 선언하고 있다(히10:19-20).
  한편, 예수님의 죄없으심은 계속해서 증거된다. 금요일새벽에는 빌라도가 그리고 헤롯왕이 그리고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님이 무죄임을 말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이후에는 한 편의 강도가 그리고 죽으실 때에는 로마의 백부장이 그리고 가슴을 치며 돌아가는 무리들이 그리고 이어서 장사지내는 아리마대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랬다. 주님의 무죄성과 대속의 죽음은 이렇듯 만천하에 알려지고 드러났던 것이다. 그분은 왜 죽었는가? 그분의 죄인가? 아니다. 인류의 죄 아니 나와 너의 죄 때문이다. 그분은 죄없으셨으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때였다. 안식일에 십자가 위에 시체가 달려있으면 부정을 입을까 염려하던 유대인들이 시체를 치워달라고 한다. 그때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시체를 달라하여 새로 판 무덤에 장사지낸다. 사람은 왜 부자로 사는 것이며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일까? 모든 만물은 다 쓰임에 합당하게 지음받았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일 아닌가 한다. 이 세상의 부자나 높은 관직을 가진 것은 다 하나님의 필요가 있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를 아는 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다. 공회원 요셉과 니고데모는 그 역할을 잘 감당했다. 우리들도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지음받았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때에 하나님이 부르실 것이다. 그럼, 아멘으로 응답하여 나아가라.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또한 필요하다면 우리를 보호해주시면서라도 우리의 섬김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

 

 

 

 
  날      짜 : 2013-06-26
  제      목 : 누가복음강해(50) 부활의 아침의 기쁜 소식(눅24;1-12)
     
 
   
▒ 본문말씀 ▒
  :: 눅24:1-12(신약 139면) ::

 

  눅24장은 예수님공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 장이다. 눅19장에서 시작된 예루살렘 입성후 4일간의 사역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일단락된다. 그리고 부활의 새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끝냈다. 죄를 끝내고 저주를 끝내고 우리의 육신을 끝내고 사탄의 권세마저 끝내버렸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에 묻힌 후 무덤에 그냥 누워만 계신 것이 아니다. 그의 영은 우리의 죄 때문에 사망을 받고 음부로 내려가셔서 사망의 값을 지불하신다(벧전3:18-20). 
  럼에도 불구하고 사망과 음부가 그를 계속 붙들어 둘 수가 없었다(행2:27,31). 왜냐하면 정작 그분에게서는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음부에 내려가셔서 무슨 일을 하셨을까? 벧전3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음부에 내려가셔서 음부에 갇혀 있는 영혼에게 당신의 속죄의 죽음을 알리셨고, 곧 있게 될 부활에 대해 선포하셨을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3일만에 음부의 문을 열고 살아나신다. 할렐루야.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없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음부의 문이 바깥쪽으로 열린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오직 안 쪽으로만 열렸던 문이 그날만큼은 바깥쪽으로 열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함은 그분의 영이 무덤에 누워있는 육체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부활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죽음과 음부와 사탄을 이길 수 있음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첫번째 표적이 된다(고전15:20). 그분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할 수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이 재림하시는 날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당신은 몸의 부활의 영광스러움을 아는가? 문은 닫혔으나 드나들 수 있으며, 보였다가도 보이지도 않는 몸을 아는가? 음식을 먹을 수도 있으며, 손으로 음식을 집어서 줄 수도 있다. 신령한 몸이자 영광스러운 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좋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에 붉과하다.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도 죽음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구차한 사람이 있었다 한다. 잠시잠깐후면 들어갈 영광스러운 집을 그 순간에 발로 차 버린 셈이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약속된 것이었다. 레23장에 절기 가운데서도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유월절 다음날이 초실절인데, 날짜로 말하자만 1월 14일이 안식일이자 유월절날이고, 15일은 초실절날이다. 예수님은 초실절에 부활의 첫열매로 부활하신 것이다. 이는 곧 그분이 죽으시고 3일만에 살아나실 것에 대한 구약의 예표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마12장 39절에서 당신이 표적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실 수 있다고 했는데, 요나가 밤낮 3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나왔듯이 예수님도 3일간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마12:39-40, 마16:4, 엡4:8-10).
  하지만 놀랍게도 여인들 한 사람도, 제자들 한 사람도 예수님의 부활이 있을 것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순간에 수차례 이야기를 하셨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을 들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듣는 귀가 열려져야 한다. 당신의 귀는 어떠한가? 당신의 눈은 어떠한가? 다시 한 번 자기의 영적 상태를 살펴볼 때가 된 것 같다.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는 눈, 들어야 할 것을 들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날      짜 : 2013-07-03
  제      목 : 누가복음강해(51) 부활체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눅24;13-43)
     
 
   
▒ 본문말씀 ▒
  :: 눅24:13-43(신약 139면) ::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3일째되는 날 오후 3시무렵 실망과 좌절에 쌓인 두 명의 제자가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던 엠마오 도상에서 일어난 에피소드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간증하고 있을 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의 확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의 문제와 부활체는 과연 어떠한 몸의 상태인가에 대한 것이다.
  먼저 살펴 볼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하심에 대한 증거로서 직접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 만져보라 하지 않고 구약성경의 기록들을 풀어서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이 직접 무엇인가를 보아야 믿겠고 만져봐야 믿겠다는 것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만져보는 것은 사실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것들은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도 재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바꿀 수도 없으며 바뀔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말씀의 바탕 위에서 세워져야 흔들리지 않는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자신이 부활하셨음에 대해 당신 자신을 보고 그리고 만져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구약성경 즉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 그리고 모든 성경을 풀어서,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해주셨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결단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랬다 저랬다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주님의 말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일점일획도 변개할 수 없을 걳이다.

  그래서 주님은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두 명의 제자에게 나타나사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부활하신 주님을 곁에서 대면하여 3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었던 제자였지만 결코 그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몰라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맛디아처럼 12사도에는 들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주님을 따랐던 자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보았다. 왜 그랬을까? 오늘 말씀에 따르면,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비록 주님이 자신의 곁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안을 주님께서 열어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주님을 결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40일동안 나타났다 사라지셨다를 반복하셨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때부터는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항상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훈련시키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실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제자들과 함께 주님은 처음부터 동행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주님 곁에 그들 곁에 모습을 드러내셨지만 그들의 영안을 열어주지 아니하니 그들은 주님이 곁에 있어도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몰라보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 곁에는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주님께서 동행하고 계시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기도해보라. 그리고 우리 주변을 둘러보라. 주님이 함께 하심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다. 부활의 몸은 우리가 지닌 육체하고는 많이 다르다. 죽지도 않을 뿐더러 질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물질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만져볼 수도 있다.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인데, 그것의 미리맛봄을 주님께서 자신의 부활체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날 영광스러운 주님의 재림의 날,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이 있다. 그날이 설레지 않은가!

 

 

 

 
  날      짜 : 2013-07-10
  제      목 : 누가복음강해(52) 성령세례약속과 승천하심(눅24;44-53)
     
 
   
▒ 본문말씀 ▒
  :: 눅24;44-53(신약 141면) ::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40일동안 당신의 부활한 것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승천하신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어떻게 제자들에게 믿게하고 증거하신 것일까? "내가 바로 3일전에 죽었다가 바로 오늘 아침 살아난 너희 스승 예수다"라고 말만하셨을까? 아니다. 물론 제자들에게는 그들 앞에 나타나신 자신이 바로 그들의 스승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나, 열한 제자에게 는 그것만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3일후의 부활 및 승천에 대해 이미 기록된 성경말씀을 찾아 일일이 설명해주시며, 당신의 부활이 곧 예언의 성취인 것을 말씀하셨다. 모든 현상은 말씀의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나타나신 그분이 정말 예수님인지에 대해 우리 주님은 보이는 것만으로 제자들을 확신시켜려 하신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으로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루시퍼의 세력들로부터 속지 않으려면 우리들도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모든 사역은 구약예언의 성취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과연 누구의 후손으로, 어느 혈통에서, 어디에서 태어나실 것인지 예언되었었다. 그리고 그분의 공생애가 어떻게 되어질 것인지 그리고 그분은 과연 어떠한 죽음으로 죽게 될 것인지도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부활한 당신 자신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글을 인용하여 확인시켜주신다.
  성도들이여, 너무 보이는 것에 목숨걸지 말라. 사탄도 얼마든지 거짓것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는 자만이 부활의 주님도 확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시간 날 때면 성경을 꾸준히 읽으라. 성경과 씨름하라. 그리고 나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분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이신가를 늘 확인하라. 그리고 그분이 확실한 것을 알았다면 그분의 말씀과 인도에 충실하라라. 그분인 줄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과 인도를 거역한다면 언젠가는 그 책임을 우리가 담당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이어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바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증인들이라고. 그렇다면 증인이란 어떤 자인가?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자들이다. 법적인 용어이다. 그렇다. 주님을 믿고 그분을 체험했다면 그분을 그대로 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정말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 믿음인지를 드러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기는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시기다. 이제는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여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믿음으로 살고 순종함으로 주님말씀을 지키는 자는 알곡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망하지 말라. 회개하면 우리가 지은 죄들은 용서받을 수 있으니까.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일도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리고 끝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을 의지하라.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자는 성령세례를 간구하라. 주님께서는 부활의 증인이 되기 전에 꼭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성령세례를 받으라. 그리고 증인이 되라.
  주님은 이어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신다. 천사들이 말한다. 우리 주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그렇다. 다시 오실 주님은 아무도 모르게 골방에 오시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보게금 가시적으로, 공개적으로,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강림할 것이다. 재림하신 주님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해도 절대 흔들리지 말라. 그것은 다 가짜일 것이니까. 주님은 하늘로부터 재림하신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금 재림하신다.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까지 포함한다면 떠들썩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말씀까지 합친다면 예수님은 아마겟돈전쟁 직후에 오신다. 이는 그를 대적하여 일어난 사탄의 군대도 그를 보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오, 그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마라나타. 그때에 눈을 들어 우리 주님을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