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강해(11)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서(출13:17~22)_2018-11-14

by 갈렙 posted Nov 14,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s://youtu.be/5ifFPyGZfuc
날짜 2018-11-14
본문말씀 출애굽기 13:17~22(구약 10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홍해 광야길, 블레셋사람의 땅의 길, 에담 끝 광야, 구름기둥과 불기둥,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초자연적인 역사, 3일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B.C.1446에서1406년까지 무려 40년동안 무엇의 인도를 따라갔던 것일까? 모세와 아론을 따라갔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따라갔던 것인가?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따라갔다고 말씀하고 있다(출13:21~22). 그렇다면, 그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그들이 40년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은 무엇의 인도를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B.C.1446~1406년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시적이며, 초자연적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았다. 하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성막과 하나가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법궤(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오직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성령께서 믿는 이들을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계신다(요16:13). 그러므로 오늘날 믿는 이들을 인도하고 있는 분은 2가지다. 하나는 보이는 것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인도를 잘 따라가기를 소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나는 어떻게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는가?

 

1. 들어가며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간 곳은 어디였는가? 그들은 곧바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았다. 그들은 광야로 갔다. 그리고 시내산을 거쳐서 가나안땅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의 광야의 여정은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직접 블레셋사람의 길로 인도하여 곧장 그들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거쳐가는 광야의 생활을 하게 되는데, 왜 그들은 스스로 곧장 가나안땅을 향하여 가는 것을 결정하지 못한 채 광야에서 40년간을 지내야 했을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어떤 길을 통해서 시내산으로 이동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40년동안 광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왜 광야 이곳저곳으로 이동해야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에담 끝 광야에서부터 그들의 인도자역할을 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실체와 그 역할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광야로 가야 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출애굽직후 가나안땅으로 바로 가지 아니하고 광야로 들어가야만 했을까? 우선, 그 첫번째 이유부터 살펴보자.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에 모세에게 애굽왕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이 나를 섬길 것이다. 그들이 3일길을 광야로 가서 내게 절기를 지킬 것이다(출5:1,3,7:16,8:3)"고 말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광야로 가서 먼저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양떼를 치고 있던 모세에게도 "네가 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출3:12)"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뒤에 먼저 시내산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세번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가장 중요하고도 내면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출애굽은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는 누가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를 시험해보시기 위함이었다(신8:3). 다시 말해, 출애굽과 같은 위대한 역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했기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은 합당한 자격있는 자만을 데려가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1차적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광야의 여정이 필요했다. 거친 광야같은 교회생활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걸려진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겠지만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을 것이다(마22:14).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성도들은 교회생활을 잘 감당해야 한다. 여기서 구원이 결판나기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보라. 출애굽의 기적은 은혜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가나안땅은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에 제대로 반응한 자만 들어갈 수 있지 않았는가? 만약 광야에 나왔더라도, 애굽에서처럼 늘 짜증이나 내고 불평이나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송아지같은 우상을 섬기고 사는 자는 결코 가나안땅을 밟지 못할 것이다.

 

3. 자상하시고 배려하시고 하나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사람의 땅의 길은 가나안땅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지만 그 길로 자기 백성을 이끄시지 아니하시고, 홍해의 광야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들어간지 430년이 되었고, 종살이를 한 지는 한 300년이 넘었기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늘 문제가 생기면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 그들이 일상이었기에, 그리로 인도했다가는 그들이 짜증내고 불평할 것은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좀 돌아서가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의 광야길를 인도하신다.

 

4. 홍해의 광야길은 어디인가?

마라-엘림.jpg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둘러서 간 "홍해의 광야길"이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보편적으로 알려진 "홍해의 광야길"은 수에즈만이 있는 홍해의 광야길이라고 하는 장소다. 그러나만 홍해는 수에즈만의 홍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카바만의 홍해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빙 둘러간 홍해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모세오경에 의하면, 그곳은 아카바만의 홍해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홍해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역과 함께 알려주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왕상9:26의 말씀으로서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물가의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었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이 빙 둘러 갔던 홍해의 광야길은 아카바만의 홍해길이었던 것이다. 특히 민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 가데스에서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받고는 그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정탐한 날수를 1년으로 계산하여 그들을 광야에 죽게 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일 돌이켜(뒤돌아)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고 말씀하셨다(민14:25).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은 에시온게벨이 위치한 홍해에 있는 광야길에서 40년간을 헤맨 것이다. 그리고 아론이 에돔땅의 변방에 있는 호르산에 죽은 이후 그들이 호르산을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땅을 우회하려했다는 말이 나온다(민21:4). 이는 홍해길은 에돔땅과 인접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홍해길은 수에즈만이 있는 홍해의 길이 아니라 아카반의 홍해길을 가리키며, 이스라엘 백성이 건넌 홍해도 수에즈만의 홍해가 아니라 바로 아카바만의 홍해였던 것이다. 나중에 출14장 강해 시간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애굽땅의 비하히롯(골짜기들의 입구)이란 현재 이집트의 "누웨이바"라는 항구도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그곳에서 홍해를 건너서 건너편 바알스본에 도착하였고, 에담(수르)광야를 지나 마라와 엘림을 지나서 시내산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5. 홍해의 광야길을 수에즈만의 홍해의 광야길로 주장하는 자들은 왜 그렇게 주장하는가?

  그런데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구약학자들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갔던 홍해길 및 그들이 건너갔던 홍해가 수에즈만의 홍해라고 계속해서 주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3일만에 이동하여 절기를 지켰던 장소가 결코 에담광야(에시온게벨 근처) 내지는 수르광야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에담광야 혹은 수르광야까지는 적어도 600Km이상 먼 곳인데,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도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3일만에 미디안땅과 인접해있는 에담광야나 미디안 땅 안의 수르광야까지는 이동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인 시각에는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이 종종 따른다. 사실 성경에는 수많은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정복했던 여리고성은 천혜의 요새였고 2중성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호수아장군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외치는 소리 때문에 그냥 무너지고 만다. 2중성벽이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의 함성소리에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당시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이스라엘의 믿음의 함성과 함께 여리고성을 안쪽으로 무너뜨렸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무조건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하지 않는 일이라고 해서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 그대로를 믿고 따라가야 한다. 성경은 출애굽의 역사는 초자연적인 전능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숙곳을 떠나 에담 끝 광야에 도착하기까지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알아아 햔다. 그것은 출19장에도 나온다. 하나님께서 그때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출19:4)". 또한 시편기자는 당시 애굽을 빠져나오던 사람들 중에는 비틀거리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시105:37). 이것은 마치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빌립집사가 가자로 가는 길목에서 이디오피아내시를 전도하고 세례를 준 뒤 갑자기 아소도에 나타나 사역했던 것과 비슷한 사건이다. 그때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적인 대이동이 있었던 것이다.

 

6.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을 가리키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에담 끝 광야에 도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부터 어떠한 인도를 받았을까? 그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였다(출13:21~2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때 보고 따라간 것은 단순한 구름이나 불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가나안 입성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각기 다른 존재는 아니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였던 것이 밤에는 불기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출13:22, 14:24, 민9:15~16).

  그렇다면, 에담광야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동안 광야에 이끌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크게 3가지 역할을 했다. 첫째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고 있었다(출13:21, 신31:15, 시99:7, 느9: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여주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알게 하셨다. 또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 곁을 떠나지 않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과 임마누엘하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둘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시105:38, 출14:19~20,24). 한 마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키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이 터져있는 광야에서 누구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고 떨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들을 보호해주는 민족의 막대기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의 막다른 길로 들어가서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 불기둥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바로와 그의 군사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출145:19~20). 셋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아무도 몰랐다. 일이십명이 아니라 200만명의 사람들인데, 그들을 한 번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이 떨어지면 목말라 죽일 수도 있고 음식이 떨어지면 굶겨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인도해주었다. 만약 물이 없을 때에는 반석을 쪼개서라도 물을 마실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면 가면 되었다. 그러다보니 광야에서 그만 40년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빛이시며,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들을 지켜주고 인도하던 좋은 길잡이였던 것이다.

 

7.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언제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으며, 이후 그것의 역할은 무엇으로 대체되었는가?

  그런데 이러한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서자 더이상 그들을 인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면서부터 무엇의 인도를 받아야 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법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당시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출애굽후 1년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윤리와 법도를 가르쳐주셨다. 그것을 "율법"이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용서를 받게 하는지를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법이었다. 성막에 흠없는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때 성막 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십계명의 두 돌판을 법궤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성막이 완성되자,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제 성막 위에 머무르기 시작한다(출40:34~38). 그리하여 에담 끝 광야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인도하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관되어 있는 성막과 하나가 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동하면 이내 성막도 걷어서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멈추면 그곳에 이내 성막을 쳤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위에 구름이 머물러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성막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다가 40년이 지난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에 비로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사라지게 되고, 제사장이 멘 법궤만 맨 앞에서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광야 40년동안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가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로 대체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므로 민수기 9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은 것을 두고 "하나님의 명령(입)을 따라" 이동했다고 7번씩이나 기록하고 있다(민9:15~23).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모든 믿는 성도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동이 대체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으며(요8:12),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주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요16:13).

 

8. 나오며

  B.C.1446~1406년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으며, 가나안땅으로 이동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한다는 표적이었으며, 그분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는 증거였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간다는 표시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가야 했다그렇지만 성막이 건축되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가나안땅을 들어가면서부터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사라진다. 더이상 초자연적이며 시각적인 하나님의 인도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부터는 오직 법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갔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따라갈 수 있는가? 그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결국 약속의 땅인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인 현상은 B.C.1446~1406을 제외하고는 뚜렷히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법궤로 대표되는 말씀만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기를 힘쓰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그 가운데 기록된대로 지켜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런 자만이 결국 가나안땅인 천국에 들어갈 것이니 말이다.

 

2018년 11월 14일(수)

정병진목사

크기변경_20181114_152402.jpg

 


Articles

7 8 9 10 11 12 13 14 1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