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곧바로 행복이 시작되는 것일까? 요즘 교회의 이름들 중에 "행복한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를 자주 보게 된다. 참된 행복이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리라. 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은 해보면 신앙의 길은 가시밭길이요 좁은 길이며 때로는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민족에게도 동일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직후 마라의 쓴 물을 만났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때로부터 어떻게 사는 것은 애굽에서 탈출한 자유인이 사는 방식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갈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인지를 가르쳐주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살려면 육신의 양식 못지않게 영적인 양식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먹어야 하며, 언제 먹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엘림을 지나 신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다. 오늘은 그것들에 관해 들여다보자.
1. 들어가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그날부터 곧장 평탄하고 형통한 길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그러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풍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광야의 험난한 여정을 뚫고서 가나안땅에 입성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유월절제사를 통해 갓 애굽을 탈출하여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광야의 초기 여정을 통해서,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갓 믿는 신자가 교회생활을 하는 중에 겪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출애굽여정에 관한 모든 말씀은 말세를 만난 우리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이다(고전10:11). 특히 육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과 음식공급은 과연 어떻게 받을 것인지 그리고 광야의 만나와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공급받아야 하며, 자신의 육신을 위해 노동과 수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난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 제일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마라였다(출15:22~23). 그들은 사실 삼일길을 물을 찾아 헤맸었다. 하지만 그들은 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삼일길 끝에 발견한 물은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또다시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나뭇가지를 지시하셨고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자 물이 달아졌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를 약속하셨다.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계명들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을 지켜 행한다면 적어도 애굽사람들에게 내렸던 질병을 하나도 내리지 아니하겠다고 말이다(출15:26). 이것은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첫번째 법도와 율례였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영적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곧장 평탄하고 형통한 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홍해를 건넜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육신이 비록 자유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노예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면 언제든지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표지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감사와 기도다. 어떠한 환경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는 감사와 기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셋째, 아무리 쓴 물이 나는 광야의 길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쓴 물이 단 물이 되고, 적어도 애굽사람들이 고생해야 했던 질병에 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말씀에 순종한다면 건강은 보장된다 말씀이다. 그렇다. 오늘날 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에 걸려 고통받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과거의 나쁜 습관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해서인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빨리 회개하고 과거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자.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때부터는 원망불평하지 말고 주님께 간구하자.
3. 엘림을 지나 나타난 물샘 12과 70그루의 종려나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따라 엘림으로 이동헀다. 그랬더니 더이상 싸울 일이 없어졌다. 왜냐하면 마라에서는 비록 쓴 물이 단 물이 되었어도 물이 한 개밖에 없으니 이리 다투고 저리 다투고 하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질서를 찾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 자세를 가다듬고 이동하니 이번에는 물샘(오아시스)가 12개가 있는 엘림이 나타났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각각 한 개씩 오아시스를 차지하게 되니 싸울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물가에는 종려나무들이 70그루가 있어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12지파에서 70명족장들이 나아와 이스라엘민족에 관해 의논하니 모든 일이 잘 풀리게 되었다.
그렇다. 영적으로 볼 때, 엘림은 마라의 확장이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더 많이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마라의 쓴 물의 웅덩이는 사실 1개였다. 이때 이 웅덩이는 우리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곧이어 오아시스 12개가 나타났다. 이것은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씀의 사역이 더 풍성하게 확장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은 70명의 제자들로 불어났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말씀사역이 더 풍성하게 된다는 것을 엘림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신 광야에서 만나의 공급과 거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왜 하나님은 광야로 나가 매일 만나를 거두라고 명령하셨을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번째 숙영지인 신광야로 나왔다. 신광야는 엘림가 시내산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식량이 바닦난 것이다. 준비해온 음식이 다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광야로 나온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먹는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필요도 채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하늘의 양식을 준비하시어 그들에게 보내주셨다. 이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다. 아침에는 이슬과 함께 만나가 내려왔고, 저녁에는 메추라기 떼가 진중에 내렸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곡식을 먹기 전까지 약 40년간 만나를 먹게 된다. 그리고 메추라기고기는 한 달간을 먹게 된다.
그렇다면 만나는 무엇이었으며, 만나는 어떻게 생겼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어떻게 거두고 그것을 어떻게 식량으로 사용해야 했는가? 그리고 만나를 거둘 때의 주의할 점은 무엇이었으며, 보관하고 관리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첫째, 만나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광야의 양식이었다(출16:4). 그런데 그것은 땅에서 나는 곡식이나 어떤 물질이 아니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양식이었다. 시편기자는 이것을 "천사의 음식(공동번역)"이라고 언급한다(시78:25).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이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다. 40년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음식으로 섭취한 것이다.
둘째, 만나는 어떻게 생겼는가? 만나는 그 생김새가 작은 둥글어 진주같이 생겼다(민11:7). 이 세상의 식물로 치자면, 깟씨(고수풀)같았으며, 그 빛깔은 흰색이었고, 맛은 꿀섞은 기름과자 맛 같았다(출16:31, 민11:7~9).
셋째,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만나를 거두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식량으로 사용했는가? 만나는 이슬과 함께 밤에 진중에 내려왔다(민11:9). 그리고 이슬이 녹아 사라지면 거기에 남아있는 것이 바로 만나였다(출16:13~14). 그런데 해가 내리 쬐서 뜨거워지면 자연스럽게 녹아서 없어진 것이 만나였다(출16:21b).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에 그것을 거두러 나가야 했다. 한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나가서 거둔 것은 아니었다. 인수를 따라서 각 가정에서 한 사람씩 나가서 인수대로 한 오멜씩 거두어와야 했다(출16:16). 만약 몸살이라도 나서 거두지 못하면 가족들은 하루 종일 굶어야했다. 그러니 너무 일찍 거두러 나가서도 아니 되고 너무 늦게 거두러 나가서도 아니 되었다. 정한 시간에 그것도 새벽을 지나는 아침에 나가서 거두어야 했다(출16:21a). 그리고 많이 거두어도 별 소용이 없었으며 적게 거둔다도 해도 그리 걱정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많이 거두어서 집에 가서 와서 달아보면 한 오멜이었고 적게 거둔 자가 달아보면 한 오멜이었기 때문이다(출16:17~18). 그날 누군가가 거두러 나갔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한편 신기한 것은 6일째 되는 날 거둔 만나는 분명히 한 오멜(2.34리터)를 거두었는데도 집에 와서 재보면, 두 오멜이 되더라는 것이다(출16:22). 깜짝 놀라서 족장들이 모세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6일째되는 날은 이틀치의 분량을 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왜냐하면 7일째 되는 날에는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나 공장은 6일간 분주히 돌아가다가도 7일째가 되면 무조건 스톱하고 공장을 쉬었다는 뜻이다(출16:25~27).
이것은 단단한 고체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찧고 빻아서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 그것은 단단했기에 절구에 찧기도하고, 맷돌에 갈기도 했다. 그리고 가마에 삶기도하고(민11:8), 불에 굽기도 하였다(출16:23).
그렇다면 넷째, 만나를 거둘 때의 주의할 점은 무엇이었으며, 보관하고 관리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문제는 만나는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서는 아니 되었다는 점이다. 그날 거둔 만나는 그날에 다 먹어야 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둔 것은 이내 벌레도 생기기도 하고 악취가 났기 때문이다(출16:20).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만나의 유통기간은 딱 하루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6일동안만 그랬다. 6일째에 거둔 만나는 그 다음날까지 아무런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출16:24). 이틀이 되었지만 벌레도 생기지도 않고 악취도 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하늘양식이라 그러한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 이처럼 6일째 되는 날 거둔 만나만 유통기간이 이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기념으로 항아리에 영원히 보관하라고 했던 만나는 유통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한대의 유통기간을 가지고도 있었던 것이다. 만나도 피조물인지라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5. 만나가 가르쳐주는 9가지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광야에 40년간 내렸던 하늘양식 곧 만나가 가르려주는 영적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의 기본은 만나는 사람의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나와 같은 양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육신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핵심요소였다면,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로서 사람들의 영혼의 생명을 위한 핵심요소였던 것이다(요6:49~51). 그러한 의미에서 구약의 만나는 1차적으로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의미하며, 좀 더 나아가서 2차적으로는 사람의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어떤 영적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어야 살 수 있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다 생명을 주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영혼이 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만나는 광야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루에 꼭 필요한 양식이었듯이 사람은 날마다 영적인 만나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만나도 최소한 가중 중 누군가의 수고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려면 가족 중 누군가의 수고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넷째, 가족 중 누군가가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와야 했듯이, 가족 중에서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말씀의 통로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섯째, 만나는 새벽의 제한된 시간에 내렸고 그때에만 거둘 수 있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질 때면 확실히 붙들어야 하며, 기왕이면 새벽시간에 듣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만나는 태양이 내리쬐면 녹아서 없어졌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는 적기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여섯째, 만나가 작고 둥글어서 진주같이 생겼고 깟씨처럼 흰 색이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작은 것이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순결하기 그지 없다는 것이다. 일곱째, 만나는 자기의 가족 인수만큼만 거두어야 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가족을 살리는데 전적으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덟째, 6일째되는 날에는 2배의 만나를 거둔다고 해도 벌레도 안 생기고 악취도 나지 않았던 것처럼, 어떤 경우에 주어지는 특별한 말씀은 더 오랫동안 우리의 양식이 되기도 한다. 아홉째,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듯이, 모든 사람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반드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왜 만나를 거두는 수고를 시키셨을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만나를 각기 처소인 장막 안에 쏙 집어넣어주지 않으시고 일주일에 엿세동안은 꼭 광야로 거두러가는 수고를 하라고 명령하시고, 일곱째날에는 거두러가지 말고 쉴 것을 명령하신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교훈이 한 개가 아니라, 2개이상인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하나는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주일에 엿새동안은 육신에 필요한 양식을 위해 살아야 하겠지만, 하루는 반드시 육신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신의 영혼을 위해 필요한 하루의 삶의 두 가지 영역이 아닐 수가 없다. 하나님은 만나를 거두러보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적인 삶을 통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훈련받게 하신 것이다.
7. 나오며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그날부터 형통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전히 믿는 자라도 생존의 문제 부딪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그는 여전히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왕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우리도 쓰디쓴 삶이 아니라 달콤한 삶을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질병에서만큼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풍성한 땅에 가서 더 평안히 거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성도들이 아무 것도 안 하며 살아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창조의 법칙은 노동의 수고를 통해서 일용할 양식이 주어진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매일 노동의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일용할 만나를 허락하시는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분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육신의 양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같이 먹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가족 중에 적어도 한 사람은 말씀을 날마다 붙들고 기도하는 자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야 온 가족도 살 수 있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인가? 말씀으로 가족을 살리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냥 도움만 받고 사는 사람인가? 이제는 우리도 점점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고,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양육하여 생명을 성장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11월 28일(수)
정병진목사